창세기 38장 - 41장 주석
창세기 38장 - 41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창세기38장- 41장
요셉 이야기 가운데 유다 가정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은 다소 낯설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야곱 언약과 연관되어 있다. 야곱 언약은 요셉 홀로만의 작품은 아니다. 야곱을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며 찾아오신 하나님은 이제 야곱을 다루었던 것과 같은 차원에서 아들들을 다루신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과 혼인하게 된다. 유다는 그 당시 아내나 며느리를 그 지방 사람 아닌 곳에 구태여 찾아야 된다는 필요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큰 아들 엘이 죽고 둘째 아들도 죽는다. 이 때 유다는 그 원인을 며느리 쪽에 있지 아니한가 하여 시집에서 추방하고, 또 세째 아들을 주기를 보류한다. 그러나 다말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어찌하든지 시집과의 관계는 이어져야 한다. 시아버지가 자기 지방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말은 시아버지의 잘못된 생각을 추궁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고자 자기가 창녀로 변해 시아버지와 관계한다. 나중에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유다는 자기 집안의 수치로 여기고 대노한다. 그러나 그 수치스러운 일을 만든 근본 원인이 바로 유다 자신인 것을 깨닫자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며느리의 처신에 대하여 옳은 일이라고 판정한다.
아들들의 죽음의 이유를 며느리에게 돌려 세째 아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유다의 잘못 때문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야 했다. 유다는 다말 속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보았다. 그것은 다말의 고통으로 주어졌다. 자기 가문을 정상적으로 돌려 정상적인 가계를 잇기 위한 헌신적인 결정을 내린 다말이야말로 야곱의 하나님이 지금도 그의 가정에 역사하신다는 증거로 삼을만 하다. 자신의 과오 때문에 수치스러운 일을 감행한 희생적인 다말을 유다 자기 앞에 남기신 것은 야곱의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로 받아들여져야 하고 거기서 유다는 조상의 하나님의 진정한 심정을 헤아려야 한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와 관계하여 낳은 자식을 자신의 가문의 대를 잇게 한 것은 달리 말해서 그 하나님의 희생정신의 계승이라고 봐야 한다. 유다 자신이 당할 수치를 대신 당한 다말의 기점으로 하여 진정한 유다 가문은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요셉의 한 많은 일대기는 진행된다.
즉 요셉은 다말 같은 희생으로 야곱 언약의 성취자로 동원된 것이다. 형제들로 인해서 던져진 어려운 운명은 남들에게 복을 안겨주는 운명이 된다. 가는 곳마다 형통했지만 그의 앞길은 갈수록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건져주지 아니하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모두 다 외면했으며 그들은 요셉의 회복에 무능한 자들이었다. 도움을 받은 자도 요셉의 구출에 영향력을 행사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요셉이 꿈의 해석자로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꿈에 대한 해석이란 곧 역사에 대한 해석을 뜻한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며 그 역사 구원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정신에 있음을 알게 된다.
서열상 요셉은 제2의 위치에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역사를 해석하는 자가 진정한 통치권자가 되는 것이다. 요셉은 세계 역사가 감옥에 갇혀 있는 자기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진행됨을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아버지에게 약속한 언약에 근거됨을 알게 된다. 아버지로 하여금 이 언약의 진정한 성취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형제들도 그 희생의 정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과정을 거쳐서 보고 싶은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근처 모든 지역에 기근이 일어나게 하신 이유는 야곱의 하나님의 우월성을 나타내 보이고 거기에 복종시키려는 것으로 이해했다.
희생이 파멸이 아니라 승리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언약의 초월성을 모르고서는 납득이 될 수 없다. 교회라는 것이 마지막 때에 지상에 등장한 초월적 기관이 됨을 교회 스스로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세상의 방식으로 살지 않기에 쫓겨 다녀야 하고 번거로운 존재로 눈총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야 말로 하늘이 내려준 만사 형통인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요셉의 위치에 서 있을 때뿐이다.
38:1-11
하나님께서 시형제 결혼법에 담긴 구원의 방식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신다. 시형제 혼인법의 취지는 여자의 후손에 의한 구원의 자녀 만들기' 이다. 창세기 3:15에 보면,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에 의해 악마의 세계는 와해된다.
온 인류 중의 택한 백성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출산으로 인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에 의해 구원 받는 것이다. 이 원리 원칙은 변동되지 않는다. 사람이 확실한 것을 모르게 되면 형편 따라, 상황 따라 자꾸만 흔들리게 될 뿐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을 알게 되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하지 않다.
시형제 결혼법도 이 확실한 원칙을 담는 틀이다. 형수라는 여성으로 인해 그 신앙적 가정은 대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 부부가 아비멜렉이라는 가문에 들어간다. 이로 인해 아비멜렉 가문의 여인들이 태가 닫히게 된다.
이 때 아브라함이 그 가문을 위해 친히 기도해주니 저주가 풀이면서 태가 다시 열렸다. 대가 끊어지면 저주이고 대가 이어지면 축복인 것이다. 하물며 야곱의 축복 안에 놓여 있는 유다 가문이 영속적으로 이어져야 복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 유다 가문의 자식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죽이신다. 유다는 이방 민족인 가나안 사람인 수아의 딸과 혼인했다. 이것은 신앙적인 핏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핏줄에 속한 자를 가차없이 죽이신다. 이는 곧 유다 가문의 전체 위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나마 신앙의 틀을 유지하고 있던 유다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둘째 아들과 그의 형수와 새 부부로 맺어준다.
그러나 둘째 오난이라는 아들은, 형수가 임신해 봤자 자기 아들이 되지 않음을 알고서 그냥 땅에 배설해 버리고 만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또 그 오난이라는 아들을 쳐서 죽이신다. 이제 유다에게는 아들 셋 중에 둘은 죽고 하나만 남았다.
유다는 생각하기를 자기 아들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며느리를 잘못 들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만약 그 며느리와 셋째 아들과 또 혼인시켰다가 그 아들마저 잃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아직 셋 째 아들이 어리다는 구실을 달아 다말이라는 며느리를 집안에서 추방시키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 아들이 죽은 모든 책임을 며느리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아비멜렉 가문은, 그저 닫힌 태가 나중에 다시 열려서 회복되는 식이라면 유다 가문의 회복은 다말이 임신 못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유다 가문의 여자의 후손 역할은 하나님에 의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유다의 본 아내요 아들들의 어머니인 수아의 딸은 죽고 만다. 유다는 너무나 슬펐지만 곧 위로 받은 후 여행을 했다. 마침 며느리 다말이 거하는 동네에 오게 되었다. 여기서 다말은 대단히 과감한 행동을 한다.
아들의 죽음과 그리고 시아버지에 의해 자신이 쫓겨난 것을 종합해 볼 때, 축복의 가정을 회복하는 길은 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창녀로 변장했다. 그리고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다. 유다는 그녀가 단순한 창녀인 줄 알고 그 대가로 염소 한 마리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다말이 요구한 것은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었다. 이것은 상대자의 신분에 대해서 차후에 두 말 못하도록 명확히 해놓기 위함이다. 이제 다말과 유다의 관계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가 아니라 부부의 관계로 성사된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불신앙인으로 인해 저주 받은 가문을 살리는 것이다. 유다의 죄와 자식들의 죄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은 다름아닌 며느리이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의 역할이다. 악마를 이기고 죄를 이기는 분은 도리어 사람들의 철없는 죄악으로 인해 한없이 피해를 보는 자로 출현된다.
유다는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한다. 신앙적으로 축복을 받고 있다는 자기 가문의 영광을 먹칠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자기 며느리를 불로 태워 죽이려고 했다. 다말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으면서 이 물건들의 주인으로 인해 임신했다고 했다.
이 때 비로소 유다는 자기의 임무를 소홀히 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기 가문의 위기가 결코 며느리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말이다.
여자의 후손, 즉 구세주의 등장은 꼭 이런 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만 고집한다. 자기 잘남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이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은 도리어 구세주를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유다가 며느리로 인하여 회개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철없는 죄로 인해 누가 피해를 봤는지 그 분 앞에서 진정 회개해야 한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유다의 본 처인 수아의 딸은 빠져 있다.
그 대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되어 있다. 드디어 아예 유다 족보 자체가 바뀌었다. 원래 유다가 의도한 것과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주도권은 유다가 아니라 도리어 다말에게 있었다. 다말은 쌍둥이를 가지게 된다. 산파는 먼저 손 내민 자식이 먼저 나오는 줄 알고 얼른 붉은 줄을 손목에 묶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 자식을 제치고 뒤에 있는 아이가 먼저 나왔다. 그 아이가 바로 베레스이다.
이와 같이 출생에 있어 역전되는 것은 다말에 의한 출산이 단순히 다말 개인적인 계획이 아니라 에서를 제치고 장자로 역전된 야곱의 경우와 동일한 하나님에 의한 축복의 산물인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의 밑바탕에서 창녀짓까지 해야 했던 다말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들보다 더 심한 마음 고생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인생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그것도 축복이요 은혜인 것이다.
39:1-6
같은 복음이건만 각자 이 복음과 접한 결과로 인해 가는 길은 다르다. 요셉에게 하늘의 계시가 주어진 것도 이런 세상 실정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다. 분명히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다. 이 요셉 덕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서 마치 요셉과 주위 사람들의 관계는 서로 신뢰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개인적인 평안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요셉에게 그런 상상을 해서는 아니 된다. 명백히 하나님이 함께 있는 자가 어떤 식으로 인생이 꼬이는지를 똑똑히 보라는 것이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함께 있는 자라면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탄탄대로의 인생을 살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엉터리 하나님관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선입견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말은,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다는 것을 내비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진정한 실체와 마음을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본문과 같은 경우에 보면, '범사에 형통'이라는 신나는 단어가 나온다. 사람들은 이 '만사형통', 즉 '만사형통'에 매료되고 싶어한다.
본문을 통해서 '만사형통'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 '만사형통'을 제공케 한 장본인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한 사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경우가 창세기 9장 1절에도 나온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라고 되어 있다. 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은 노아의 가족뿐이다.
따라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은 사실 모든 인류의 후손에게 똑같이 복을 주신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복이 오게 된 것은 그 중심에 노아가 하나님께 비친 희생 제물이 있었다. 정결한 새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드렸드니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복은 뭔가 하나님께서도 받으실만한 만족스러운 상태가 형성되어야 한다. 노아의 경우는 정결한 새의 희생제물 이었다. 신약에서는 의로운 예수님께서 택한 자를 위한 대속의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에 있다.
이 예수님의 몸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므로서 하나님께서 복을 안 줄래야 안줄 수 없는 입장이다. 스스로 내린 약속에 따라 이것은 불변의 진리가 된다. 참된 기독교 신자는 이 사실을 받아드리는 자요, 불신자는 이러한 계획을 무시하는 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무서운 저주가 임하는 것이다.
노아의 경우나 혹은 예수님의 경우나 모두 희생제물이어야 하는 이유는 창세기 8:21에 "사람들이 계획하던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상을 꿰뚫어보신다. 비록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실천에 옮길 능력은 전무한 것을 아신다. 따라서 인간의 행함은 복을 줄 토대가 되지를 못한다.
그 대신, 인간처럼 악하지 않는 제물이 필요했다. 구약의 제사 때 동원되는 정결한 새나 정결한 소나 짐승들은 모두 그 뒤에 오시게 되는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한 예형들이었다. 이 세상에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할 만큼 의로운 자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복의 중심에 놓여질 수가 있다. 본문에 나오는 요셉이 당하는 경우는 바로 예수님의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 누가 보더라도 흠 잡을데 없는 사람으로서 요셉은 사람 앞에 등장된다.
뿐만 아니라 외모적으로도 흠모할 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외모가 화근이 되고 말았다. 아름답다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그런데 이 악한 인간 세계에서는 그것이 죄를 유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요셉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보고 동침을 요구했다. 주인의 아내가 날마다 동침을 요구했다. 그 때마다 요셉은 더욱 강경하게 대처했다.
그것은 현재 요셉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주인이나 주인의 처만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그러나 주인의 처는 그 소리를 듣고도 막무가내다. 아름다운 미소년 요셉의 얼굴만 보이지 결코 함께 계시다는 하나님을 그녀는 전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요셉을 단지 자신의 성적 상대로만 여겼다.
이것이 보디발의 처와 요셉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견해 차이란 마냥 차이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선에 대해 악의 보복으로 이어진다. 보디발의 처는 주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유포한다. 요셉이 오히려 자신을 강간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요셉의 주인은 요셉을 달리 보아 요셉은 옥에 갇히게 된다. 이로서 요셉의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요셉이 꾸었다는 그 꿈은 성취되기가 더욱 요원해졌다. 인간 세상의 악이 너무나도 지독해서 요셉에 내린 하나님의 뜻이 자꾸만 방해를 받는 것 같다.
왜 하나님께서 요셉이 당한 이 억울한 일에 직접 나서지 않으시고 방치하시는 것인가? 그것은 요셉을 통해서 인간들이 얼마나 악한가를 노출시키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보디발의 아내가 갖게 되는 마음의 상처를 이해해야 한다.
선과 악을 떠나서 일단 자신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계이다. 이런 상황에서 옳고 그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자기가 만들어낸 분노로만 충만할 뿐이다. 이것이 보디발의 처가 당한 아픔이다.
안일하고 평온할 때는 곧잘 하나님의 은혜나 예수님의 공로를 거론하다가도 막상 자기의 자존심이 뭉개지는 사태가 일어나면 하나님마저 적으로 삼으려고 한다. 우리 자신들이 이런 정도로 악독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
요셉에게 있어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은 이 요셉을 통해 주위 인간들의 악한 반응을 유발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의 운명이다. 보디발의 가정은 진정 무엇이 문제인가는 이사야 26:10에 "악인은 은총을 입을찌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노아의 후손들인 우리들로서는 신자이든 불신자든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덕을 보고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은총을 입지만 정작 하나님의 의는 배우지 않는다. 이것이 신자와의 차이점이다. 신자는 안다. 자신의 구원이 결코 자신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된다는 것을 말이다.
시편 71:2에 '주의 의'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다. 그 정도로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자기 자존심이 뭉개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신자만이 하나님 의 앞에서 회개하며 하나님의 의를 배우게 된다. 즉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로서 같은 복음을 듣고도 그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의를 아는 자만이 천국 갈 신자가 된다.
40:5-16
요셉과 같은 감옥을 사용하는 왕의 신하 둘에게 난데없이 꿈이 꾸인다. 마치 요셉이 고향에 있을 때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꿈을 꾼 것과 같다. 꿈은 꾸었고 또 이 꿈 또한 확정된 미래의 사건에 관한 것임을 알면서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다. 8절에서 요셉이 하나님을 거론하면서도 타인이 아닌 유독 자기 자신에게 꿈의 내용을 말하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한다.
그것은 창세기 39:23에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주어지는 '범사의 형통'이 단지 현재 자기 생활만을 목적으로 한 형통이 아니라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차원에서 봤을 때 그야말로 제대로 된 '형통'이라는 점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다.
미래의 세계까지 이어지지 않는 신앙 생활이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 취미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요셉에게 있어 하나님의 가치란 모든 것을 최종 종결 짓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분명한 이상, 요셉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해몽을 자처해 나선다. 미래 해석은 자기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고, 또한 미래를 확정 지어놓은 그 분께서 그 사실을 현재 속으로 미리 집어넣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꿈이 그 어떤 스토리로 전개가 되든, 혹은 어떤 다양한 내용을 가지든 상관없이 모든 세상 만사는 현재 요셉에게 어릴 때 내려준 그 꿈의 계시로대로만 진행될 뿐이라는 점이 꿈 해석의 요지이다. 신하들이 꾼 꿈은 그 꿈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요셉의 역할이 앞으로 이 애굽 나라에서 얼마나 결정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작용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예고편을 띄운 셈이다.
즉 한 날 한시에 같이 꿈을 꾼 두 신하에게 있어 그들의 운명은 요셉이 내린 해석에 따라 확실하게 갈라진다. 한 신하는 직위와 권리를 회복하게 되고 다른 한 신하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요셉의 입장에서 두 상대에 대해 의도적으로 한 쪽은 저주하고 한 쪽을 축복할 이유도 없었다.
또한 그러지도 않았다. 요셉은 단지 자기와 함께 있는 하나님에 의해서 전달된 해몽을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다.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가미하지 않았다. 또한 가미한다고 해서 그들의 운명이 바뀌어지는 것도 아니다. 두 신하들에게 이미 확정된 장래가 나름대로 굳혀져 있었던 것이다. 다만 꿈을 꾼 그들 자신으로도 그 내막을 몰랐을 뿐이다.
하지만 요셉이 그 자리에 있었다. 요셉을 통해서 그 확정된 미래가 그들에게 적나라하게 전달된 것이다. 과연 이 확정됨이 무섭다고 여겨지며 사람들의 현재 행동 여하와 상관없이 미리 모든 운명이 결정나 버린 것에 대해서 아쉽고 섭섭한가?
신앙인은 생각을 달리 먹어야 한다. 도리어 감격스럽고 다행스러워야 한다. 본문에 보니 꿈을 꾼 두 신하는 아침에 일어나서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 자체의 한계에 의한 불안감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쓰고, 또한 반대로 아무리 태만하고 나태하고 방탕하고, 자기 인생을 자포자기 하듯이 제멋대로 살아도 신앙이 없는 자의 심령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게 된다. 그것은 미래를 이미 확정지어 놓으신 그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는, 그 함께 있음의 근거를 하나님이 내려주신 계시에다 둔다. 히브리서 9:27-28과 같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과연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공포로 몰아넣는가 아니면 대단한 평안과 안심으로 다가오는 것인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에게는 이 말씀과 함께 죽고 이 말씀을 함께 살 것이다. 당장 죽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세계는 결코 우리 인간의 현재의 노력과 무관하다. 미래는 인간의 현재 노력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는 바벨탑이 아니다. 도리어 야곱의 꿈, 요셉의 꿈, 그리고 진정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이 땅에 나타나셔서 그것이 현실화시킨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이 현재 속의 미래의 세계로 등장되었다.
진정한 믿음이란 자기 행함의 결과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운 공로를 믿는 것이다. 본문 마지막에 요셉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두 신하에게 합니다.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아니하였나이다"
즉 요셉은 의로운 자로서 이 악한 감방의 세계에 잠입한 것이다. 마치 예수님과 같다. 요셉은 이같이 세상 만사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끌린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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