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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창세기 36장 - 37장 주석자유게시판창세기

창세기 36장 - 37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창세기 36장 - 37장

하나님과의 싸움을 극복하고 이 땅에 나타난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스라엘의 12아들은 지금부터 이 정신을 구현할 책무를 지니고 태어나게 된다. 만약 이 점에 소홀히 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무관한 족속이 될 것이다.

인간의 어떤 점 때문에 하나님은 싸움의 상대로서 인간을 생각했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대로 이 땅에 새로운 질서를 전개하시려고 하시고 그 일을 야곱의 12아들을 통해 진행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세상과의 단절과 갈등은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인 이스라엘과 타민족과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민족은 복을 받게 되지만 만약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나라는 여지없이 언약대로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 전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다워야 하는 조건이 따른다. 가장 이스라엘다운 사람이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지도자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진 모든 힘과 특권은 바로 이 정신을 구현하는데 집결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땅의 세계가 계속적인 갈등이 있듯이 이스라엘도 계속적인 투쟁을 진행해 나가는데 그 전쟁은 언약정신을 이해하는 자와 이해 못하는 자의 싸움이기에 이스라엘은 총력을 다해 이 언약을 고수해야만 한다.

창세기 36장에서 에돔의 족보가 나와 있다. 이는 창세기 37장의 야곱, 즉 이스라엘의 내력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어째서 이스라엘은 에돔의 족속을 지배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어떤 정당성을 부여해 주기 위한 기록이다.

그런데 야곱의 내력을 언급하면서 그 대부분의 내용은 요셉의 일대기로 채워진다. 이는 창세기 27:29에 야곱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하나님의 복을 받은 내용이 어떤 식으로 야곱에게 성취되는가를 밝히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 축복의 내용 중에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라는 대목이 있다. 이것은 분명 야곱 자신에 관한 사항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야곱은 형제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 어미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야곱에게 내려준 복의 성취를 위하여 야곱의 자리에서 일하는 다른 자를 두고 말한다. 그 아들 이름은 요셉이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대로 일하지만 자신의 일의 범주는 아버지께 계시 내린 하나님의 약속의 범주를 이탈하지 아니하기에 요셉의 등장은 야곱언약의 성취를 위함이다. 따라서 요셉이 일할 동안에 야곱이 처해있던 절망과 연결시켜 언약 완성을 이해해야 한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인 요셉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내려진다. 이것이 야곱으로 봐서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계시가 내렸다는 것은 그 자식이 다른 자식과 구별되며, 구별된 그와 다른 형제간의 사이에서 언약 정신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배타적인 대우를 받고 있느냐를 보이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로 등장되기 때문이다.

요셉이 내 뱉는 꿈 이야기는 한 형제가 다른 형제로부터 주인이 되며 자기가 그 자리에 앉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분노를 불러 일으켰지만 아버지 야곱은 자신의 편애가 하나님의 편애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여 그 꿈의 결실을 갈망하게 된다.

한편 형제들은 꿈 이야기로 인해 일어난 가정의 갈등을 제거하기 위해 요셉을 아버지 모르는 곳에서 처리하기에 이른다. 꿈이 없던 시절로 다시 되돌리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아들의 상실로 받아드리고 있다. 이는 살 희망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야곱은 그 아들을 따라 자기도 죽고 싶다고 말한다. 사랑했던 아들은 죽음 저편에 있다. 동시에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꿈과도 절단되어 있다.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다. 야곱의 미래는 오직 요셉 한 개인에게 집약되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이 세상의 무엇으로 그 나라와 바꿀 것인가?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교회의 유일한 희망과 행복이어야 한다.

36:1-8

가나안 땅에 이처럼 축복의 민족과 저주의 민족을 함께 살게 하신 것은, 이들의 축복이나 저들의 저주가 결코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 자체가 곧 하나님의 약속이 지닌 본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른 지역, 다른 공간에서는 이러한 약속의 면면을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동네에서는 사람의 축복과 저주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원칙만 통용될 것이다.

말라기 1:3-5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란 자기가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좋은 결과가 얻어지는가 아니면 나쁜 결과가 얻어지느냐 로 결판나는 것으로 알고들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식적인 발상은 하나님에 의해서는 용납될 수 없다.

이 말라기의 말씀을 보면, 에서의 경우,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서 황무하고 황폐한 지역을 개간해서 보란 듯이 결실을 맺어도 곧 하나님께서 나서서 허물어버리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시는 이유도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미움'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란 미움 받을 짓을 했을 경우를 따져서 미워하는 것이 순리처럼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순리조차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에서의 입장에서 봐서는 참으로 불공평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이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시는 이유는 사랑으로 사랑답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에서의 경우를 가지고 야곱의 사랑을 설명하면 야곱이 아무리 미움을 많이 받기 위해 저주 받을 짓에 몰두하고 몸부림쳐가며 노력해도 그에게는 계속해서 사랑만 주어질 뿐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미움과 사랑은 그 자체로 운명으로 고정되어 버릴 속성들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외부에서 인간들의 그 어떤 시도에도 영향을 타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타 민족의 하나님과 확연하게 다른 점이 이런 점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계시다. 신명기 5:7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단언하시면서 곧 이어 나오시는 말씀이다. 질투라는 말씀에서 '독점'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후차적으로 등장된 분이 아니라 아예 인간의 여망과 기대를 고려하지 않고 특정인을 독점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전략을 실천에 옮기신 하나님이다. 이러한 원리는 에서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무조적으로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자비의 하나님에서 이유 없는 미움이 나오면 참으로 기이하고도 기이한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서 이유없이 거저 주시는 사랑이 한량 없이 나오고 이것을 근거로 질투까지 하신다면 이것은 안 이상한가?

다같이 하나님의 한마음에서 나온 귀결이다. 사랑이라는 것을 행사하자면 반드시 미움이 동반되어야 하고, 미움이 미움답게 되는 것은 일방적인 사랑의 처사가 엄연히 있는 상황 안에서만 통용되는 법이다.

성도라면 이 세상에 살면서 반드시 당해야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한다는 이유 때문에 당하는 수모 같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 여부에 따라 사람들로부터 미움도 받을 수 있고 귀염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한다면 자신이 과연 성도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될 사람이다.

37: 1-4

에서와 달리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적 축복을 받는 그 축복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우리는 주목해야 되고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일과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지켜 보아야 한다.

야곱이 받은 축복의 내용은 사실상 야곱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천국이라는 축복을 내리시면서 그 과업은 우리 손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본문 2절에 분명히 축복은 야곱이 받았지만 그 축복된 일대기의 내용을 가득 채우는 것은 야곱이 아니라 요셉이다. 요셉의 나중 위상이 곧 야곱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의 수준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요셉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편애할 정도로 말이다.

이 사랑 받고 있는 아이에게 난데없이 연이은 꿈이 주어진다. 일단은 멋있게 보인다. 5-9절에 이 꿈은 결코 요셉이 야심 품고 꾼 꿈이 아니다. 혹은 자기가 자식 중에서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으니 하늘의 축복이 틀림없이 자기에게로 쏟아질 것이라고 예상해서 꾸게 된 꿈이 아니다. 정말 난데없이 꾼 꿈이다.

여기서부터 요셉의 힘든 여정은 출발이 된다. 요셉의 꿈은 중간 과정이 모두 생략된 것이다. 먼 미래의 산봉오리만 보여준 꿈이다. 그러나 그 꿈에 도달되기까지 야곱과 다른 형제와 달리 요셉 본인에 얼마나 큰 시련이 주어질지 철없는 이런 요셉은 아무 것도 모른다.

시편 105:17-19에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이 요셉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물론 야곱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성도도 역시 요셉처럼 축복의 약속이 이미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세속적인 축복을 은근히 갈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은 이미 확정되었다. 십자가 안에서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연단 받은 사도 바울은 성도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빌립보서 3:10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고 되어 있다. 부활의 권능, 즉 천국의 능력으로의 진입은 놀랍게도 이 땅에서 십자가의 고난에로의 참여이다. 물론 성도이든 성도 아니든 모두 기피하고 싶은 상황일 것이다.

요셉도 마찬가지이다. 높은 자리에 앉는 꿈 자랑은 하겠지만 그 가운데 생략된 중간과정의 험난함을 깊이 알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축복 받은 자이기에 그 어떤 험악한 고난도 이런 축복 된 운명이 변경되지 않음을 더욱 더 알아가는 것이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 받는 자이다. 십자가로 인도 받는 사람은 늘 자신의 내면의 욕심과 다투면서 동시에 회개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갈등 안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그 축복의 넓이와 깊이를 더욱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37: 5-11

요셉이 전한 하나님의 계시가 주위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미움을 증가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20절에 보면 더한 경우도 닥치게 된다. 요셉의 형제들이 한 다음의 말을 잘 음미해 보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라고 했다. 여기서 꿈이라는 달리 말해서 하나님이 내리신 계시이다. 비록 하늘의 계시라 할지라도 그 계시가 달성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방책도 우리 인간들에게 있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출하는 말이다.

이러한 노골적인 인간의 저항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을 막무가내로 불신앙자라고 비난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를 제대로 듣게 되면 사실 누구도 그런 반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수히 받아들이고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는 다음의 두 가지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듣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저 참고할 정도로 다루는 사람은 그 어떤 계시에 대해서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존뿐이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나 그 계시는 곁자리에 불과하다. 있으나 마나 하는 것이 된다.

만약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 기준에 준해서 자신을 심판하겠다고 달려든다면 어느 인간이든 숨겨둔 분노심을 폭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 그 동안 예수님 잘 믿어보려고 애쓴 것이 몽땅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늦기 전에 예수님을 팔아버림으로서 그 동안 헛짓한 자신에 대해서 다소라도 위안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본질과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여기면서 삼년 동안 동거동락을 같이 했던 이 가롯 유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처럼 보다 솔직하지 못하면서 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작자들이 얼마나 가증된 인물로 보겠는가.

전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수용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에게 충실한 사람처럼 행세하는 그 위선 된 행동에 대해서 가롯 유다는 참으로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계시를 대하는 다른 태도가 있을 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요셉 같은 사람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은 사람이다. 물론 요셉은 아직 어려서 철이 없다. 자기가 받은 꿈의 계시대로라면 자기는 형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 뻔하다. 형들로부터, 심지어 부모로부터도 절을 받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자랑 삼아 계시를 형들에게 발설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평소에 요셉이 형들을 꺾어보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라도 형들을 정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남들이 못 받는 대단한 내용의 계시를 꿈 속에서 받기 위해 사전 연습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자신은 받게 되었다. 따라서 요셉은 마냥 기뻐했다. 자신이 계시를 조작하거나 만든 것이 아니라 계시가 도리어 자신을 덮쳐서 자신으로 하여금 계시 덩어리가 되게 한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조금도 거부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성경 내용을 삽으로 퍼내어 그 말씀의 축복과 효과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크게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성취자는 오직 한 분 뿐이다. 그분은 예수님이시다.

하늘 나라 성전에 올라가신 분은 예수님뿐이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장도 예수님뿐이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도 예수님뿐이다. 따라서 이런 예수님 앞에서 인간의 자기 자랑은 모두 죄악 된 것으로 판정 받을 뿐이다.

이런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은 극도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계시가 나타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주려고 했는데 비해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하신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말씀이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 예수님이 과연 그럴 만한 위인인가가 의심스러웠다. 그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지난 날 당신은 5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는 여섯 번째이다"고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계시는 항상 우리의 감추고 있는 약점과 거북스러운 점을 건드리면서 찾아든다.

그러나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입은 사람은 이러한 점까지 거북스러워 하지 않고 차라리 홀가분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사실 그 동안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고 살아온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가증된 삶이기 때문이다.

37:26-36

요셉은 하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서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늘의 계시 내용은 결코 형제들의 속셈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받은 계시가 계시 내용대로 성취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그런데 자기들 보기에는 그 일이 성공한 것으로 여겼다. 요셉이 자기들보다 높은 사람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저 밑바닥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요셉의 시련과 낮아짐이 오히려 진정 하늘의 계시가 본격적이면서도 제대로 전달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전달될 때는, 인간들이 쉽게 무시할 만하고, 함부로 다룰 만하고, 하찮게 처리될 만한 약하디 약한 대상을 통해 일을 진행시키신다.

예를 들면,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 선지자가 나온다. 그는 돈이라면 맥을 못추는 선지자다. 돈에 따라 상대를 가리지 않고 축복과 저주를 퍼붓는 선지자다. 그러한 그가 돈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간다.

그런데 평소에 자기에게 고분고분하던 당나귀가 어느 길에서는 갑자기 앞으로 더 나아 가려고 하지 않는다. 감히 짐승이 주인에게 대드는 것이 괘씸해서 선지자가 그 당나귀를 마구 때린다. 그런데 그 나귀는 황급히 입을 열어 말을 다 한다. "왜 나를 때립니까?" 라고 말이다.

당나귀는 천사가 칼을 들고 길을 막고 서는 것을 보았다. 만약 그대로 통과하면 발람 선지자는 죽게 된다. 돈에 눈이 어두운 발람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나약한 짐승에게 화풀이한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요셉이기에 형들이 함부로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비해 요셉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저 운명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요셉에게 내린 계시는 성취될 수 있을까?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뜻 때문에 최대로 괴로움을 당하고 희생이 된 자는 따로 있다.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축복 속에서 인도 받는다는 야곱이다. 본문 33-35절에 과연 이래도 야곱은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있는 자인가? 물론 이후 사정을 미리 다 아는 우리로서는 요셉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은 하지만 전혀 이 사정을 모르는 야곱의 입장으로 우리가 같이 놓여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 야곱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운운할 수 있을까?

야곱 눈 앞에서 분명코 요셉이 죽었다는 물증이 있고 증인들도 수두룩 한데 말이다. 자식들이 가져온 옷은 분명 자신이 준 옷이요, 요셉이 형들과 함께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그 누가 뭐래도 분명히 요셉은 분명히 죽은 아들이다.

야곱에게 있어 요셉은 모든 아들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아들이요, 유별나게 사랑의 전부를 던져 넣었던 그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축복의 하나님께서 자신이 축복한 야곱에게 이런 아픔을 왜 주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지상의 인간과 만날 때는 절망과 모든 것을 무너지는 경우를 동반시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하나뿐인 아들이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은 난데없이 그 하나뿐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다.

성경에 보니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해서 하나님께서 얻으실 수 있는 바는 무엇일까? 아브라함은 비록 이삭을 사랑했지만, 그 이삭도 결코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알았다.

이삭을 아무리 사랑해도 이삭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지만 거두신 자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신 때'는 곧잘 하나님이 주셨다고 좋아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둘 실 때'는 우리는 왠지 그 '거두심'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흑심이 딴데 가 있다는 것이 들통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면서, 잃어버림과 얻음, 그리고 죽음을 통한 삶을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심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신약 성경 야고보서 2장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생생히 산 믿음의 모델로서 아브라함의 아들 바침을 예로 들고 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내리진 시험의 출제 문제는 똑같이 야곱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축복의 야곱에게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내신다. 만약 같은 문제를 내었다면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주위 수풀 속을 주위 깊게 둘러 볼 것이다. 행여 길가던 수양이라도 걸리지 않았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는 또 다른 문제를 내신다. 이번에는 아예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완전히 죽어버려서 영영히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태를 일으키신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마땅히 절망스럽고 모든 희망과 사랑의 대상이 상실된 사태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물론 제 3자인 우리들 입장에서 아직 요셉이 안 죽고 살아있기에 하나님의 축복은 영속된다고 안심하겠지만 야곱은 그야말로 축복의 고리가 모두 절단되어 버린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일을 하셔도 인간들이 전적으로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궁지로 몰아 넣으신다.

그래야지만 천국에는 온전히 하나님의 수고와 공로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요셉의 시련은 단지 야곱뿐만 아니라 형제들에게 겨냥해서 일어난 일이다. 누구보다 더 서로 사랑해야 될 형제이지만 단지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형제들은 요셉을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형들은 계시를 품고있는 요셉을 가볍게 처리하면 처리될 줄로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도리어 이를 계기로 해서 일이 더 커지게 하신다. 형들로 하여금 요셉을 생각할 때마다 더욱 더 가슴이 아파지도록 하나님께서 유도하신 것이다. 쓸모 없다고 처리한 그 일로 인해 그들은 더 강해진 죄의 무게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일이 더 커진 셈이다.

이와 같은 경우는 예수님에게도 종합해서 일어난다. 예수님을 거추장스럽게 여겼던 대제사장은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들어서 가볍게 하려고 했다. 요한복음 11:50에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동조해서 예수님을 처단해 놓고서는 모든 일이 깨끗하게 마무리 된 줄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되 살아나실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요셉이 꼭 이런 식이다. 요셉이 나중에 출세에서 형제들 앞에 나타날 때에 그들은 자신의 한 짓 때문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결코 자신이 한 행위도 동기에 대해서 변명의 여지가 없이 되어 버렸다. 바로 천국이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예수님이 평소에 기적을 자주 시행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자기들 앞에서 신기한 기적을 베풀어보라고 요구했다.

그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내가 보여줄 이적은 요나의 이적 뿐이다"고 말이다. 요나의 이적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되 살아나는 일이다. 이 일은 곧 인간들의 무지와 죄악을 부끄럽게 하기 위한 이적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가? 혹시 자기 힘으로 달성할 수 있는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바로 그런 인간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십자가 죽으심이다. 그 어떤 인간도 십자가 앞에서 자기 행함을 언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분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끄러움에 절감하고 몸부림치는 자가 진정 구원 받은 자이다. 반대로 오로지 자기 이권만 생각해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예수를 포기하게 된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고 대신 그 귀신들을 돼지 속에 집어 넣어 돼지가 바다에 죽게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의 귀신을 이기신 일은 보지 않고 자기들의 재산인 돼지를 잃은 것에 대해서 못내 아쉬워하면서 예수님이 자기네 곁을 떠나주기를 요구했다.

또한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의 일가 친척들이 예수님을 단지 목수 짓 하는 자기 혈육의 한 식구로만 알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이 예수를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신자이다. 예수님을 알되 요나의 이적을 통해서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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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