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3장 - 35장 주석
창세기 33장 - 35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창세기33장 - 35장
복의 근원이란 자신이 얻은 많은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소 경험한 뒤 알게 된 하나님의 모습을 전달하는 것임을 야곱이 복의 사람이 되고 난 뒤에 얻게 된 놀라운 소득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결코 자기 힘으로 복을 생산하고자 했던 야곱시절의 생각에서 벗어난 생각이었고 이제는 이스라엘로서의 생각이었다.
장자로서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 취한 마음가짐과 동일해야 한다 그것은 [섬김을 위한 존재]의 출현이다. 많은 소유물과 이제는 무관했다. 문제는 타인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있다. 창세기 25:23에 보면 에서와 야곱이 출생할 때 하나님이 남기신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은 두 형제가 각기 독립된 나라로 이루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두 나라 조성에는 필연적으로 그 전에 치열한 투쟁이 있음을 말해준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이기에 두 나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투쟁의 결과는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에 지배를 받게됨으로 종식된다. 보다 강한 나라가 있겠고 다른 나라는 상대적으로 약해진다는 것이다.
누구 쪽이 강한 나라를 이루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일반 통념을 넘어 장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형식을 취한다. 하나님은 왜 그들은 동시에 태어난 쌍둥이로 만드시고 또 그들 가운데 싸우는 관계로 이끄시는가? 그것은 그들을 통해 장자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가를 보이기 위함이다.
즉 장자란 어린 자를 섬기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장자만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에돔은 이스라엘 족속에 복속되어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음으로, 큰 자(에서)는 어린 자(야곱)을 주인으로 섬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러한 지배 뒤에는 야곱에게 남긴 장자의 참 실체가 단순한 혈통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전달하는 쪽이다. 야곱이 에서로부터 물리적으로 장자권을 빼앗았지만 그럴 때도 그는 장자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어린 자를 섬기는 것이 큰 자]가 되는 법칙을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이해하게 된다.
날 때부터 에서를 목표로 싸운 야곱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싸운 것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이미 [싸우는 형제상]에서 비친 그대로 자신이 바로, 에서의 자리에서 에서와 같은 사고 방식을 가진 자임이 드러났다.
형 에서를 오래 간만에 만난 야곱은 형을 더 이상 원수로 여기지 않고, 자기가 섬겨야 할 주인으로 모시게 된다. 일곱번 절하며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에 야곱은 이미 장자의 자리에서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이러한 아버지의 언약 정신을 알지 못한 채, 오직 힘에는 힘으로 처리한다는 야곱식의 발상으로 누이 동생의 강간사건을 처리한다. 아버지를 이들의 과격한 행위를 꾸짖고 세겜 땅을 떠난다.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축복했던 벧엘에 도착했을 때 비로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의 진정한 뜻을 재 확인 받게 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약속을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함으로써, 그 때 얍복강가에 나타난 그 분이 곧 벧엘의 하나님 것이 확연해 진다. 동시에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는 그 의지는 야곱 같은 인간을 이스라엘 같은 인간으로 바꾸는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진정한 복의 민족의 본질을 이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창세기 28장의 벧엘에서는 야곱이었다. 그러나 숱한 세월 뒤에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로 벧엘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게 된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다 이루기까지 여기에는 창세기 32장의 하나님의 희생이 있었다. 그 흔적으로 야곱은 지팡이를 가진다. 부서진 허리에서 국민과 많은 국민이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다시 벧엘에 돌아온 야곱은 자기가 전에 그곳에서 하던 식대로 돌기둥을 세워놓고 기름을 부어 자기가 진정한 아브라함 언약의 후계자임을 인정한다. 이제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서 말이다. 이 정신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이어지고 오늘날 교회까지 전달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정신 안에서만 말씀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이다.
33:1-6
구원 관계에 돌입 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관리 체제 안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 자기 구원을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구원을 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인도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단력 있는 행위로 구원을 따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걱정거리는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구원은 받았지만 이 세상에 떠날 때까지 긴긴 여백의 세월이 아직 남아 있으니 그 여백을 자신의 행함으로 다 채워 넣어야 될 임무가 아직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행함은 항상 하나님 보시기에 착해야 되고 의로운 행함들 이어야 된다고 믿고 있다. 생각이 이렇게 되니 바르게 살아야 될 주체가 최종적으로 계속 자기 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다. 나는 내가 책임지지 아니하면 책임질 사람이 없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계속해서 감시하는 분으로만 머물고 실제로 바르게 살 주체자는 자기 자신이 되어 버린다.
이런 상태에서 설교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심' 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만약 진짜 내 소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시면 비로소 하나님께 함께 있는 것이 증명될 것이고 만약 안 이루어지면 그것은 내 기도 정성이 부족해서 그러하고 하나님께 졸라대는 강도가 약해서, 즉 신앙심이 부족해서 일어난 현상이니 더욱 애걸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사실 이런 강탈의 기도를 신앙심 있는 기도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 마음바탕에는 평소에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나온 현상이다. 즉 마음이 변화되지 않았기에 세상적인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넘쳐 나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이런 상태에서 이해되는 잘못된 신앙의 성장이나 신앙의 강함이란 곧 자신의 욕심으로 가득찬 빈 보따리를 뻔뻔스럽게도 하나님 앞에 내던지고서는 그 빈 보따리를 채워라고 협박하는 것과 같다.
이런 식의 삶은, 자신의 고통과 고민을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식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식으로 처리하겠다는 고집에 불과하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를 만날 때 이런 본성이 그대로 다 드러났다. 내 축복과 내 소유물은 내가 지킨다는 주의이다.
비록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기는 하지만 그 축복물을 계속 축복물로 유지시키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홀로 남아 있는 야곱을 공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무엇이 진정한 축복인지 야곱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시편 121편에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힘께나 쓴다는 주위 사람들을 의지하고 앞장 세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신앙인은 참으로 배포가 크다. 천지의 산악을 두루 살피고서는 하는 말이, 자신은 도움을 사람이나 세상에서 얻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꼬? 여기에 대해서 대담무쌍하게도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는 것이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나 대단한 분으로 함께 하신지, 세상에 자신이 잠을 잘 때에 그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지키시고, 자신의 출입을 지키시고 자신의 영혼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세상적인 것이 없다고 불안에 떠는 그 모습은 마치 철없던 어린 시절의 모습과 같다. 보다 크고, 깊은 큰 세계를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친지나 친구, 모두가 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조절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쓸데없는 타인과의 비교의식과 경쟁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런 것으로 마음 조이고 조마조마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야곱은 내심 조마조마 했다. 형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끌고 온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 33:20절에 보면,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라는 말씀이 나온다.
'엘엘로헤이스라엘' 이라는 말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야곱이 왜 이런 고백을 했을까? 사실 형 에서가 400명의 인원을 끌고 자기 무리에 다가온 것은 공격해서 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동생을 반기고 환영하기 위한 환영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 야곱은 참으로 마음 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야곱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주는 상황을 조성했다. 그래야지만 진정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의미를 야곱에게 알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 단순히 재물이나 자식 생산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지탱하고 수호하고 방어하고 지켜 나가겠다는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쪽으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축복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불안하고 걱정하는 모든 원인은 야곱처럼 나 스스로 나를 지키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수호하는 방식도 평소에 알고 있던 모든 세속적인 장치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집안 재산이 늘어난다든지, 자식이 출세한다든지, 큰 세력을 지닌 기업이나 교회를 갖고 있다든지, 늘 건강하고 젊음이 유지된 신체를 가졌다든지, 가정이 화목하고 웃음꽃이 피어난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런 것 없으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의의가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정작 찾아든 것은 그 사람 본인의 마음의 초조와 불안감이다. 하나님은 성도와 함께 하시어 이 마음 조차 바뀌어주시려고 하신다. 남들보기에 자연스럽게 일이 처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도 성도 그 개인의 마음의 변화를 염두에 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본문에서 타인이 볼 때에는 에서는 처음부터 야곱을 헤칠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야곱은 형을 만나기 전에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올지 염려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에서 야곱에게 이런 마음을 유발시켜서 진정 축복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신다. 이로서 야곱은 이제 진정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되었다.
34:1-6
야곱은 변화되었다. 야곱은 축복 속에 놓여 있기에 생겨난 그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축복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의 배에서 나오는 자식들과 또 그들에게서 나오는 후손들 모두에게는 야곱과 함께 있는 그 축복의 대상이 되어있다.
그들이 축복을 따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야곱에게 내린 그 축복이 이제 야곱의 후손에게 손을 뻗친다는 말이다. 야곱을 다루었던 원리 원칙을 야곱의 후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시켜 나겠다는 것이 야곱의 하나님의 의지이다.
야곱의 자식들의 축복이 시작되는 내용이 창세기 34장에 결쳐 나온다. 야곱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은 디나이다. 그 당시 야곱의 가족들은 남의 땅에 기거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 없어 남들로부터 보호 받기 힘든 상태에 놓여 있다. 따라서 살려면 스스로 지켜내는 자생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또한 자연히 정신상태도 대단히 예민해져 있을 뿐이다. 물론 야곱은 이미 변화되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위력을 친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야곱의 자식들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네 식구들과 함께 있음을 그저 건성으로 알고 있을 따름이다. 아버지의 신앙 변화를 제대로 읽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 누이 동생 디나가 토착민에게 강간을 당한다. 야곱의 아들들이 내린 처방은 한결같다. 철저한 복수뿐이다. 또한 그것이 스스로 자기를 지탱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물론 변화되지 않는 자연적 죄성이다.
야곱의 아들들은 빈틈없는 복수를 위하여 상대방을 속이게 된다. 토착민과 더불어 한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하기로 협상을 하게 된다. 누이동생을 토착민에게 시집보내는 대신 그저 종교적 요식 행위 하나만 요구한다.
자신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에 보면, 할례 받지 않는 자와 혼인이 금지되었지만 이왕 육체적 관계가 있게 되었고 혼담까지 오가게 되었으니 단지 신랑쪽 사람들이 모두 할례를 행해서 이번 혼인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험이 없기를 바란다고 상대방에게 요구했다.
상대방은 상대방조차 이해타산을 계산했다. 야곱의 가족들이 키운 모든 가축과 재산이 결국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마음이 맞아떨어져 혼인을 인정하고 토착민들의 모든 남자들은 일시에 할례를 행하게 된다.
3일 째 되는 날, 가장 고통스러워 남자들이 기동을 못하게 된 틈을 타서 이 야곱의 시므온과 레위라는 아들들이 달려 가서 디나를 강간한 그 남자와 그 집안의 어른과 그리고 여타의 모든 남자들을 다 처치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누이 동생 디나를 도로 데려오고 토착민이 갖고 있었던 양과 소와 나귀와 재물을 몽땅 다 뺏아버린다. 과연 이것이 정의로움인가 아니면 정의를 빙자한 인간적이 살인본능인가? 내 것은 스스로 지킨다는 것이 과도히 되면 이런 결과를 낳는다.
물론 야곱의 아들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잘못이 없도록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거론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남들 보기에 신앙적으로 보고 정의로움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 신앙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런 야곱의 아들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축복을 하시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하나님과 함께 자에게 내리는 축복도 이 원리에 준해서 실행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49:5-6의 이 대목은 야곱이 마지만 숨을 거두면서 자신의 12아들들에게 각자 축복을 해주는 장면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축복이라면 온갖 갖고 싶은 것을 하늘에서 듬뿍 내려주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대상이 품고 있는 잘못된 정신을 낱낱이 지적하는 식으로 진행이 된다. 시므온과 레위는 '잔해하는 기계' 라고 야곱은 이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있다.
기계란 감정도 없고 이성도 없고 절제도 없는 것이 기계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잔인하게 말이다. 따라서 다른 자식들이 이 자식의 행동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버지로서의 야곱의 축복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준 축복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 된 품성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결국 그런 죄로 인해 누가 희생해야 하며 누가 그 죄를 대신 처리해야 하느냐를 보게 하는 것이 축복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많이 가지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그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서 바른 안목을 갖고 있는 것이 축복이다.
구원이란 내가 그 예수님을 알아주는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고 데리고 다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사실에 눈이 뜨이게 함으로서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로운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함께 있는 자들에게는 정말 현실화 될 수 있도록 우리들을 데리고 다니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야곱에 내린 축복이요 야곱의 아들에게 임했던 축복의 경륜이다.
35: 1-8
하나님은 벧엘이라는 장소를 야곱과 에서 사이를 따로 분할 관리하겠다는 거룩한 의지를 드러낸 장소로 보시고 그 일에 대해서 확고히 하겠다고 사랑을 받은 당사자인 야곱보고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다.
이러한 거룩의 의미를 지속케 하기 위해 계속 야곱을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려고 하신다. 벧엘은 바로 야곱의 야곱됨과 에서의 에서됨이 확연하게 분리되었음을 보여준 장소이다. 하나님은 에서를 영원히 야곱 곁에서 떨어져 나가게 조치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의 의미이다.
본문 7절에도 하나님은 결코 에서와 야곱의 공동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을 바로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알 때만, "벧엘로 돌아오라" 는 하나님의 취지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되고 또한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 불렀던 야곱의 선언을 우리가 바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오로지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36:10-15에 보면, 야곱 때에는 형 에서와 따로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알게 된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문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제 이 야곱 식의 생각은 이스라엘 식의 생각으로 바뀔 때가 되었다. 이 바뀜이 벧엘이라는 장소에서 새로운 계시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로 바뀐다. 그 차이점은 특정한 공간이나 장소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바뀐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몸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의 문으로 달라졌다. 축복된 민족이 야곱의 허리가 아닌 이스라엘의 허리에서 쏟아져 나오게 된다.
이 사실이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하심의 효력이다. 우리 성도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소유'로 바뀌었다. 야곱의 허리에서 복의 후손들이 나오듯이 이제는 예수님의 허리에서 예수님께 속한 백성들이 하늘의 별 같게 바닷가의 모래 같게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원받는 백성들의 등장은 전부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마치 야곱에게 찾아오신 벧엘의 하나님처럼 말이다. 이들은 그동안 세상 알고 있는 인간적인 사랑이나 거룩이 아니라 새로운 각도로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구별된 사람들이다. 이 구별됨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한다.
35:16-22
야곱이라는 사람에게는 아내가 둘 있다. 한 사람은 레아요 다른 사람은 라헬이다. 남편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둘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야곱은 라헬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했다. 비록 레아보다 후손을 못 낳아도 상관 않고 사랑했다.
그 라헬이 일찍 죽고 만다. 야곱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 것 같다. 누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있어 함께 부부의 정을 나누고 싶었던 라헬을 하나님은 일찍 데려가고 만다. 이렇게 되니 라헬의 입장에서는 언니 레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셈이 된다.
평생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마땅히 자신의 권리처럼 여겨왔던 라헬은 자식을 낳으면서 그 자식으로 인해 자기 목숨을 잃게 되고 동시에 남편의 뜨거운 사랑과도 이별해야 했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래서 라헬은 죽어가면서 낳게 되는 그 자식의 이름을 '베노니' 라고 짓는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베노니가 태어나면 그를 지극 정성 돌봐 줄 친어머니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어머니에게 태어난 숱한 형들의 구박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살아가야 될 처지에 놓여 있다. 자기와 같은 어머니와 태어난 형제는 오직 요셉뿐이다. 비록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게 되지만 유별한 사랑은 도리어 다른 형제로부터 미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일이다. 상상만해도 끔직한 불행한 일들이 새로 태어난 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난산의 현장에서 아버지 야곱은 그 자식의 이름을 전혀 딴 이름으로 돌려놓는다.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논다. 그래서 '베냐민'이 된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나온 특별한 능력 발휘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 잃은 이 아이가 어떻게해서 엄마의 죽음을 보여주는 아기가 아니라 능력의 오른손, 즉 하나님을 보여주는 아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점은 이 아이의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의 어머니와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비록 라헬은 죽었지만 라헬이 남긴 자식, 요셉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이 요셉에 대해서 얼마나 대단히 집착하고 사랑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창세기 37:3에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야곱은 여전히 라헬편이다. 도리어 이 점이 화근이 되어 나머지 형제들이 이 라헬의 형제들을 무척 미워하게 된다.
급기야 요셉을 애굽나라 노예로 팔아버린다. 아버지 야곱의 눈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야곱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랑의 대상자가 없어진 것이 되었다. 라헬이 지녔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그대로 야곱에게 이전되었다. 야곱은 크게 운다.
야곱은 그래도 라헬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베냐민이 아직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그 하나 남은 베냐민마저 야곱의 품에서 앗아가 버리신다.
그 과정에는 잃어버린 자식 요셉이 관여한다.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간 이후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오른다. 그러면서도 그와 같은 어머니의 혈육인 동생 베냐민이 잘 있는지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마침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사러 요셉 앞에 나타났다. 요셉은, 자기 동생 베냐민이 잘 지내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므이를 볼모로 잡고 동생 베냐민을 자기 앞에 나타나도록 조치했다.
일단 베냐민을 보게 된 요셉은 이번에는 동생 베냐민을 볼모로 잡고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오게 했다. 그 과정에서 베냐민은 고난의 요셉과 고난의 야곱이 함께 만나게 되는 운반체가 된다.
그들은 고난 안에서 함께 만나는 것이 되고 동시에 야곱의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을 조정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베냐민은 마냥 슬픔의 아들이 될 수 없다. 고난을 매개로 하여 야곱이나 요셉이나 다른 형제들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게 하는 역할을 맡은 자가 된 셈이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만사 형통해 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평소에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소망이나 소원 속에는 고통이나 고난이 빠져 있다. 어느 누가 자진해서 고난과 고통을 찾겠는가?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고난과 고통이 없이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파악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성도의 현실을 인도하시되 예수님이 당했던 현실 속으로 데려 가신다. 그 속에는 외로움이 있다. 서러움이 기다리고 있다. 누가 봐도 비극이라고 느껴질 일들이 대기하고 있다. 전혀 희망 없음의 상태이다.
마치 요셉이 애굽의 종으로 팔릴 때, 장차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리라는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요셉 본인조차도 몰랐던 일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야곱도 몰랐던 일이다. 야곱은 도리어 요셉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가 사라진 상태이다. 요셉은 이미 야곱에게 있어 죽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함께 계셨다. 요셉을 총리대신 되게 하심으로서 형들이 지니고 있는 그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게 하신다. 이처럼 고통 받는 자를 통해서 구원될 자의 죄를 지적해 들어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방식이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다른 경우를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다 가짜 하나님이요 가짜 예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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