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2장 주석
창세기 32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창세기 32장
야곱의 투쟁은 그가 원했던 많은 자식과 재산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형과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말은 지난 20년간 그가 흘린 땀과 인생의 노력의 대가는 하나님이 원한 축복과 무관함을 드러낸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나오다가 길에서 천사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아직 야곱에게 행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야곱은 이제 자기가 가진 축복을 잘 관리할 책임을 느낀다. 형은 항상 자기에게 신변의 위협을 가하는 존재이며 또한 그동안 획득한 축복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형과의 관계 정상화는 하나님에게 복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낸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한다. 기도의 내용은 형의 손에서 건져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형이 400명을 이끌고 동생을 만나러 오는 것은 동생 집안을 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즉 동생을 만나고 싶고 다시 우애를 다지기 위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살아 남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한다(32:8,16-20,21-24. 32:9-12).
야곱은 형의 노를 풀기 위해 많은 재물을 풀었다. 형의 심사를 헤아리기 위해 선봉대를 앞서 파견해 놓고 그는 얍복강에서 최후의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밤중이었다. 야곱은 갑자기 어떤 인격체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야곱은 필사적인 방어를 했다. 지금 여기서 죽으면 지금까지의 자기의 인생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가기에 필사적인 항거를 하였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곧 축복의 사람으로 자리 잡는 것으로 알았다. 누구에게든지 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빼앗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밤새도록 야곱과 투쟁한 그 분은 야곱의 강력한 저항에 수월하게 방문한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 분은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 시켜 놓았다. 그 사람이 온 목적은 힘으로 야곱을 굴복시키기 위함이었다. 끝까지 자기만은 살아 남아야 되는 더러운 야곱을 죽이기 위해서 찾아오신 분이었다. 야곱은 그 사람과의 투쟁을 원만하게 해결하고자 했다. 거기에 비해 그 분은 그냥 야곱 곁을 떠나고자 하였다. 그 사람은 밤에만 야곱과 관계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 사람의 이런 행동은 옛날 벧엘의 밤에 나타난 하나님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 분은 왜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가? 이 때부터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오히려 싸움의 상대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적은 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서 가나안 족속을 치기 전에 먼저 야곱 같은 인간을 먼저 치심을 알 수 있다.
이는 축복의 방식에 대해 이제까지 자기가 잘못 시도하고 있기에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갈등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싸움과 강탈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야곱은 여기서 그분과 원만한 관계가 이어지도록 간청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축복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 임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그 이름과 연관하여 새로운 변화된 이름을 부여한다. 진짜 하나님을 만나보니 지금까지 복의 개념이나 모든 인생살이가 얼마나 죄 덩어리인 것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 죄 없으신 분이 애꿎게 자신으로 인해 고난을 당했다는 이 사실을 아는 인간의 상태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은혜 베푸사 다시 살아난,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만이 흠뻑 젖어 있는 현재 이 상태를, 즉 하나님[하나님=정확한 번역:잡신들, 즉 이는 가나안의 우상들을 의미한다]과 사람[ 정확한 번역:사람들, 즉 장차 정복할 열국들 즉 가나안 족속]을 겨루어 이기었다는 뜻에서 이스라엘인 것이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이 상태가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이 부여 되는 것이다. 이 상태가 유지되지 않음으로 해서 바벨론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을 공격하기 전에 하나님의 원수는 나 자신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천국 백성이다.
야곱이라는 이름 위에 던져진 이스라엘의 이름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상관 없는 가를 보여 준다. 벧엘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겠다는 것은 야곱적인 사고방식으로 언약을 이루겠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서 그의 탐욕으로 하나님이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축복한 그 복은 하나님이 이러한 낮아지심이 뒷받침이 되어서 주어지는 것이다. 야곱적인 사상은 이러한 하나님에게 오히려 엄청난 고통만 안겨 줄 뿐이다.
'하면 된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고 하는 인간의 힘을 부추기는 사상은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는 것으로 바울의 말을 빌리면 개들이다. 손 할례당이다. 인간의 탐욕 때문에 하나님은 고통을 받는다. 그런 것이 모두 야곱때의 생각이라면 우리는 야곱의 저는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로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안 믿는 이것이 믿음이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지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다. 십자가를 믿어주니까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이 우리를 믿게 했으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잡고 있는 손을 믿지 말고, 예수님이 나를 잡고 있는 오른 팔을 믿어야 한다. 항상 주님과 비교해야 한다. 자기 것을 믿는 것이 교만이다. 죄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 죄이다.
32:1-2
야곱은 떼 천사들을 만나고서는 '하늘의 군대' 라고 부르고 있다. 그 천사들은 분명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될 천사들이다. 천사의 만남과는 전혀 상관없이 야곱은 나름대로 위기의식을 지니게 된다. 그는 결국 자신이 딴 고장으로는 갈 수도 없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자신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 형이 있다는 것이 자기에게 곧 위기라고 본 것이다.
먼저 야곱은 형을 달래기 위해 타협책을 제시한다. 자기에게 각양 가축과 종들이 있으니 이것을 미리 받으시고 이 아우를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 형의 반응이 몹시도 궁금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형이 무려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대동하고 야곱 쪽으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을 만난 사실과 야곱의 위기 상황이 풀리는 것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곱이 아무리 하나님의 천사들과 만났지만 야곱이 실제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야곱 본인의 책략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야곱의 모습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야곱은 우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빈 몸으로 이곳까지 흘러 들어왔다가 이제 풍성한 축복 보따리를 안고 다시 하나님이 지시하던 곳으로 귀환하려고 하는데 이제 와서 형에 맞아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이 야곱이 형에게 맞아 죽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야곱의 기도는 순전히 자기 중심적이다.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 천사들이 어떤 전쟁을 벌리기를 원하는 가에 대해서는 전혀 깜깜하다.
야곱은 그 동안 모아 놓았던 재물과 식구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지켜내는 것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열을 네 개의 나눈다. 앞선 3개의 대열은 모두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한 예물의 대열이다. 자기 종들에게 부탁해서 이 동생 야곱의 뜻을 형이 깊이 헤아려 주기를 당부했다. 이런 선물들을 받으시고 부디 동생을 용서해 주십사 하는 인간적인 방식을 동원했다. 결국에는 처 자식마저 앞서 보내고 마지막 자기 홀로 남게 된다.
참된 위기는 자기의 소유를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다. 위기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자기 자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모르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참된 그 인간의 본질은, 그 인간과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밝혀져야 할 그 때다. 이런 경우의 예가 열왕기하 2장에 나와 있다.
엘리야가 등장하고 그리고 그를 집요하게 쫓는 엘리사가 나온다. 엘리사가 궁금했던 것은 엘리야 본질이다. 엘리야가 행하는 그 모든 놀라운 일들과 사역이 도대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기에 나올 수 밖에 없었는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결국 엘리야가 세상을 떠날 때는 시신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불말과 불병거가 내려와서 엘리야를 데리고 갔다. 엘리야는 바로 엘리사가 그대로 고백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병거요 그 마병이었다.
엘리사 외에 다른 선지자들은 엘리야의 시신을 찾기 위해 사흘 동안이나 헤매였다. 그들은 여전히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를 모르고 있다. 오직 엘리사만 알았기에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그 겉옷을 가지고 다시 강물을 헤치면서 돌아올 수 있었다. 엘리야는 그저 평범한 이스라엘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마병으로 사셨던 분이었다. 흔히 생각하기를 위기 상황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힘이 모아져서 해결된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위기란 하나님 앞에서 진정 자기 자신의 면모를 제대로 모를 때 생겨나는 법이다. 야곱이 만났던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군대는 일방적으로 야곱을 도와주기 위해 있는 군대가 아니다. 도리어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질을 바로 알게 하기 위한 군대이다. 야곱은 형을 보고 위기를 느껴야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신의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과연 무엇이냐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있는 위기만 없어진다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위기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야곱에게 본래의 하나님의 뜻을 담고자 하신다. 성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통해서 실시되는 것을 겁낼 것이 아니고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족한 줄로 알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통해서 실시되는 것을 운 없다고 여기지 말고 도리어 영광스럽게 여겨야 한다. 야곱이 그러했고 엘리야, 엘리사가 그러한 사람들이다.
32:22-32
하나님과 야곱의 만남에 주목해야 될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 평소에 인간들이 안 들킨 야심이나 본능이 유감없이 펼쳐진다는 것이고, 또 다른 면에서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모든 야심을 그대로 다 인정하고 받아준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겸손인지 알 수 없다. 인간들이 야심을 불태우는 이유는, 평소에 나름대로 축복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무의식 중에서도 축복을 기대하고 요구하면서 살고 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상황에서 축복의 양과 종류도 계속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야심이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각종 야심이 희망하는 목표가 바로 축복이 된다. 덩달아 '신'이라는 개념도 축복 성사에 따라서 존재하고 존재 안하고를 측정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근성은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지니고 있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보면 실제로 제대로 된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나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외 신앙인들이 이들이다. 물론 이들이 본질적으로 인간성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축복이란 인간에게 그런 권리가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아예 없는 하나님의 권리가 어떠함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이 부름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과 이들의 만남 사이에는 축복관의 사이의 차이성으로 인해 갈등이 일어난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과 야곱의 싸움이 바로 그런 이유가 벌어진다. 야곱은 재산과 처 자식을 앞서 보내고 얍복강 가에 홀로 남았다.
그는 축복을 받아내고 또한 그것을 지켜내는데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의 주위에 다른 인간은 없다. 따라서 예의를 갖춘다든지 점잖을 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속마음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그만인 상태이다. 그런데 밤새도록 야곱은 난데없이 누군가와 붙들고 싸움을 하게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왜 야곱이 지금까지 모아놓은 재산과 가족에 탐을 내느냐 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곱의 것인데 말이다. 본문 32절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해가 돋았을 때, 야곱과 싸웠던 그 낯선 인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일반 사람 같았으면 대낮까지 계속 싸워 사생결단을 내었을 것이다.
그 사나이는 결코 야곱의 재물이나 가족에 탐을 낸 분이 아니었다. 야곱과 직접 상대하고자 했던 분이다. 이 분은 야곱과 씨름을 한 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진정한 축복이 따로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창세기 32:1-2절에서 야곱의 고향 방문 길에 만났던 큰 무리의 천사단의 이름은 마하나님, 즉 하나님의 군대이다. 군대의 임무는 전투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축복관이 정립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관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것이 곧 축복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한 적이 있다. 창세기 28:15에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의 축복이란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에게 철저하게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그 당사자는 자기 뜻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굴복 당하는 상태가 되고 자기 뜻을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매여 사는 사람이 될 때, 이것이 곧 축복 된 사람이다.
이러한 축복이 성사되려면 그 과정에서 필히 하나님의 측복관과 인간의 축복관으로 야기된 싸움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비단 야곱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도 다 마찬가지이다. 물론 성도가 아닌 자에게는 이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성도이기에 하나님이 몸소 찾아오셔서 이 작업을 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성도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 놓은 축복관을 유감없이 철없게 발휘한다. 야곱은 자기를 찾아온 상대와 밤새도록 붙들고 싸웠다. 자기 축복 자기가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서 말이다. 바로 이 점이 평소에 야곱 안에 들어있었든 그야말로 야곱적인 본성이다.
호세아 12:2-4에 이러한 야곱적인 정신상태에 대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벌받을 짓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유다나라의 소행이 딴데서 온 것이 아니라 본문에 나오는 이 야곱의 행동이 그 당시 '야곱, 즉 이스라엘의 소행' 의 원조가 된다는 것이다. 야곱은 진정한 축복이 뭔지를 아직 모르고 있다. 본인이 염두에 둔 처 자식과 재물이 결코 하나님이 주고자 했던 그 축복이 아니었다.
야곱이 진정한 싸움꾼으로 변모되는 것이 야곱이 받을 축복의 전부이다. 마하나임이라는 천사들의 싸움 군단으로 하여금 야곱을 만나게 했던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함께 들어가 있는 바이다. 싸움하다 보니 밤이 다 샛다. 이제 낮을 피해 떠나야 될 그 인물로부터 환도뼈를 얻어맞고서는 싸움이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천사를 붙들고 싸울 힘이 없기 때문이다. 야곱은 낯선 상대를 만나 자신의 본성을 다 드러나고 만 상태가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들켜 버렸을 때에 야곱은 자신에게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음을 알았다.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가져간 그를 붙들고 이번에는 싸움이 아니라 애원을 한다. 제발 축복해 달라고 말이다. 그 때 그 낯선 분은 야곱의 이름을 묻는다. 야곱의 모든 것을 회수하려 하는 것이다. 야곱식으로 생각한 축복은 이제 끝났다. 야곱식으로 축복을 지키려는 결과로서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절둑절둑 절게 되는 장애를 입은 신체뿐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축복을 내리신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없어진 근거에서 주어지는 축복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가지고 전쟁을 벌리려는 것이다. 야곱식으로 버티는 모든 자를 향한 이스라엘식의 공격이다. 성도라는 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이다. 이름만 이스라엘을 사용한다고 성도가 아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뀌게 한 그 하나님의 일관된 능력이 임한 자만이 참 이스라엘이다. 이들은 야곱식의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리고 야곱식의 축복관이 무엇인지도 안다. 내 힘으로, 내 기도로, 내 헌신으로 내 축복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잘못된 축복관 이다. 이스라엘이 되면 애당초 내 것, 내 축복이라는 것이 도무지 성립될 수가 없다. 그저 하나님의 뜻만이 작렬할 뿐이다.
시편 73:1-5에 이런 상황에서 안 미끌어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결코 육적인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악마와의 싸움이다. 즉 인간 자신의 능력과 솜씨에 의존해서 사는 그런 야곱식을 좋아하고 옹호하는 세력이다. 이 싸움은 타인과의 싸움 이전에 우리의 싸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