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1-(2) 서울강의녹취 : 빌립보서 제 4강
20090911-(2) 서울강의녹취 : 빌립보서 제 4강
이름 : 오용익(IP:59.3.147.38)
빌립보서 제 4강 (이 근호목사, 2009년 9월 11일(2), 서울의존교회)
두 번째 시간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 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인지 아니면 어제 처음 교회 나온, 흔히들 사람들이 말하는 신앙의 초짜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 10년 혹은 20년을 믿거나 혹은 목사쯤 되어야 해당되는 것인지,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특수한 부류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이러한 특별한 은혜를 받는 것인지, 이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빌립보서 1장 9,10절에 보면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침투한 예수님이라는 바이러스, 그 DNA가 우리를 만들어버려요.
내 인생을 내가 가꾸고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내버려 두세요. 여러분, 우리가 잘하는 것이 세 가지 있어요. 제가 점쟁이처럼 100프로 맞출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첫 번째 뭐든지 돈 되는 것과 두 번째 남에게 인기 얻는 것과 세 번째 세상의 부귀영화 얻고 싶어서 환장한 것, 이것 백프로입니다.
모든 인생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향하여 줄기차게 갑니다. 교회를 다니고 안다니고 목사고 집사고 뭐고 모든 인간이 차별이 없이 이 세 가지를 놓지를 못합니다. 여자가 시집가든 남자가 장가를 가든 혼자 살든 상관없이 항상 생각하는 것은 ‘왜 나는 인기가 없을까’ 그것 때문에 짜증나고 ‘왜 우리집안에 돈이 없을까’ 그것 때문에 짜증나고 ‘왜 나는 사람들이 즐기는 세상 즐거움을 같이 누리지 못할까’ 그것 때문에 하루 하루 짜증내고 신경질 나고 때로는 자살하고 싶어요.
‘내가 이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 뒤에 뭐 하나 붙이면 좋겠어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산다’고 이렇게 나오면 참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냐. 나는 그냥 한강에서 투신하고 싶어. 왜 나는 남들처럼 못 사는가? 대충 중간쯤이라도 왜 안 되는가?’ 그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 본성을 여러분들이 고칠 생각을 하지 마시고 그냥 내버려두세요. 내버려 두시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허락도 없이 여러분 속에 침투해서, 신종플루같은 것은 이유도 아닌 그리스도바이러스를 여러분 속에 퍼뜨려 버립니다. 퍼뜨리게 되면 여러분 속에 뭐가 자생하느냐 하면 빌립보서 1장 10, 11절의 말씀이 자생하지요.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첫 번째가 뭐다? 내버려 둬. 여러분의 인생에서 손을 떼세요. 여러분의 인생을 자꾸 여러분이 간을 보면서 짜니 마니 하면서 간맞추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이 자꾸 간을 맞추면 여러분의 인생이 피곤해서 안돼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어떻게 인도하는지 한번 관찰해 보세요. 어떻게 인도하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공식은 ‘주님보고 놀라라. 그리고 나를 잊어라.’
왜? 무엇을 보고 놀라는가? 내 평생 헛수고 한 것을 보고 놀라고 헛수고해도 구원받는 것을 보고 놀래라는 겁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스케치 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근접이라고 하는데 근접스케치 하는 방법입니다. 지금부터 그림을 그리는데 어떤 여자를 그리겠습니다. 여자얼굴을 그리는데 처음에는 대충 대충 윤곽을 그려요.
제가 분명히 이야기 했습니다. 내버려두라고요. 그냥 내버려 두면 주님께서 이것을 스케치 하면서 이걸 칼 가지고 도려내요. 그럼 여기서 뜯겨 나가는 것이 있을 겁니다. 뭐가 뜯겨 나가는가 하면 ‘나는 무조건 돈 벌어야 돼. 이번에 들어간 브라질펀드에서 한건 올려야 돼’라는 이런 것이 내 뜻대로 안되고 주식이든 뭐든 폭락한다든지 해서 뜯겨 나가는 것이 있어요.
‘나는 무조건 인기 있는 목사여야 돼’ 그런 것도 뜯겨 나가요. 그 다음에 ‘나는 세상 부귀영화를 못 놓겠어’ 라는 것. 우리는 이것을 절대로 못 놓기 때문에 내버려둬요. 내버려두면 돈 좋아하고 세상 좋아하는 이것이 마구 발산됩니다. 교회 나와서 ‘주여, 돈 주옵소서’ 하고 노골적으로 기도 막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껍데기를 하나하나 뜯어나가면 뜯기고 뜯기고 남는 것이 있어요.
그 남는 것이 ‘나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용서로서 저를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내 죄를 용서했습니다’ 라는 성경말씀, 십자가복음이 안에 남게 되면 이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됩니다. 지금 제 딴에는 안 어렵게 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는데 여러분의 눈빛이 ‘지금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데? 그거 다 아는 이야기인데’ 라는 투 같아요.
시편의 주제가 찬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찬송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윗을 아주 혼쭐나도록 하면서 아예 죽는 구석으로 몰아가요. 그러니까 다윗이 믿을 사람이 없거든요.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여호와는 나의 요새시요 반석이시요 피난처시오’ 라고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안 몰아넣으면 ‘외삼촌은 나의 반석이시고 청와대는 나의 구세주요’ 라는 식으로 전부 다 아는 사람이 요새 되고 피난처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주변 모든 사람을 다 끊어 버리니까 비로소 다윗에게서 ‘여호와께 찬송하리로다 할렐루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나의 찬양이요 나의 도피처라.’ 이것이 뜯겨 나가는 사건이에요. 이렇게 됩니다.
아침에 눈뜨면 ‘오늘도 돈 버는 날 되게 하옵소서’ 하고 마음껏 원 없이 상상하세요. ‘주여, 오늘도 나에게 욕하는 놈은 반드시 뒤지게 하시고 내 차보다 더 빨리 달리는 추월차량들 펑크 나게 해주시고 내 뒤에서 수군거리면서 내 욕하는 인간들 졸지 남고 다 떨어지게 하시고 고스란히 그 애들 우리학원으로 오게 하시고 개척교회 같으면 두 달 만에 우리교회로 500명이 몰려오게 해주시고…’ 마음껏 하세요.
그걸 숨기면 위선자가 되고 또 스트레스 받아서 안 됩니다. 몽땅 다 하는데 그렇게 하시고 그날 하루 중에 그 중에서 몇 개가 뜯겨 나가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뜯겨 나가거든 구원받은 것 100프로입니다. 저녁때 되어서 ‘주여,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십자가 공로뿐입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 되면 또 상상해야지!’
그러면 주께서 ‘네 맘대로 해라. 오늘 게임은 오늘로 끝났고 내일은 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그래서 이튿날이 되면 ‘오늘 애 수능 치는 날인데 400점 만점에 399점 되게 해주시고 경찰대학 수석합격 하게 해주시고 우리 조카 이번에 사법시험 치는데 일차 이차 한방에 합격하게 해주시고 이번에 회사에서 과장승진이 있는데 미운 놈들 다 떨어지게 하시고 나 혼자 승진하게 하시고 몸무게가 좀 나가는데 내일 아침이면 5킬로 빠지게 하시고…’ 이렇게 원 없이 해 보세요.
다음 날 아침에 5킬로그램 더 쪘어요. 아침에 장 보러 갈 때도 ‘오늘도 싱싱한 계란을 고르게 하시고 우유 고를 때 제발 유통기한 제일 긴 놈으로 고르게 하옵소서’ 라고 해 보면 꼭 제일 짧은 것 골랐어요. 계란도 상하기 일보직전인 것 골랐어요. 하여튼 주와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마운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전부 다 아버지의 뜻대로만 되는 이 놀라운 체험을 경험하시면 구원받은 사람 백 프로입니다.
그게 주기도문에 나와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 뜻이 어느 정도냐 하면 “내가 매일같이 먹는 그 양식도 ‘하나님이 주셔서 먹게 되었습니다’ 하는 것을 깨닫는 지점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몰아넣게 하옵소서.” ‘내가 돈이 많아서 양식을 산 것이 아니고 정말 주님이 양식을 주시지 않았으면 오늘 밤 굶어 죽을 뻔 했다’는 것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밥맛이 없는 거예요.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것도 아니고 반찬이 맛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입맛이 떨어지니까 뭘 먹어도 모래 씹는 것처럼 되는구나.’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김치하고 단무지만 있어도 밥맛이 꿀맛이더라는 겁니다. 그냥 밥에 물 말아서 먹어도 맛있어요. ‘주여,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로소 모든 배후에 하나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 느끼는 시간이 한 1초 내지 2초인데 그 순간 영광입니다. 2초 지나고 난 뒤에 내 몸에서 또 악마의 주특기가 발산되지요. 딱 2초 지나고 나서 마구 발산됩니다. ‘주여, 이 정도로 영광을 돌렸으면 슬슬 이제 복 좀 주실 때가 안 되었습니까? 제가 이렇게까지 예수를 믿는데 왜 복을 안주십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뭐? 뭐? 뭐라고? 소원대로 아뢰라. 무슨 복이냐?’ ‘남편 보너스 타게 하옵소서.’ ‘그래. 알았다. 해 주마.’ 잠시 뒤에 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내가 지금 병원에 있다. 오늘 보너스를 받아서 기분 좋아서 까불면서 운전하다가 나는 다치고 차도 부서지고 150만원 물어주게 생겼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유익함이라.’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것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합니까? 빌립보서 1장 21절에 의하면 ‘죽는 것도 괜찮다’ 할 정도입니다. ‘죽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는 수준까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도바울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죽는 것도 괜찮다’ 하는 거죠. ‘목사님, 사도바울이야 죽는것도 괜찮은 수준이지만 우리 수준은 아직 그 수준까지는 안 되잖아요.’
분명히 제가 정답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죽는 것도 괜찮다’ 하는 수준이 사도바울이 도 닦아서 얻은 수준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사용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하게 죽는 경험들을 하게 하니까 사도바울은 서슴없이 나오는 거예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죽는 경험까지 갈 이유는 없겠지요.
물론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맘대로 인데 여기서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 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한강 물에 일부러 빠져본다든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할 때 우리는 성경 보면서 뭘로 바꾸냐 하면 ‘아하, 담배 끊는 것도 유익하구나’ 하는 이 정도 수준, ‘도박을 그만 하는 것도 내게 유익하구나’ 라는 이정도 수준, 그것만 해도 본인에게는 대단한 수준이에요. 어느 수준인가? 사도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고 같은 수준입니다.
담배 하나 끊는 것도 아무나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아야 끊을 수 있으니까. 어떤 사람은 반대로 성령 받아서 안 피우던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때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담배 피우는 것도 유익함이라’가 되겠지요.
어찌되었든 담배 피우는 것도 헛수고, 끊는 것도 헛수고 우리는 평생 동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장악해서 구원되지 내가 무슨 폼을 내고 흉내를 내서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산다 할지라도 다 헛짓이다 이 말이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집어넣으신 파이프를 통과하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사도의 편지를 사도의 편지만 보지 않고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자꾸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사도 안에는 그 앞에 예수님이 살았던 인생이 다 들어 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도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가 경험했던 그 그리스도가 그대로 사도 안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2장에 보면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너희들의 고생을 못 알아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고생한 그 고생을 몽땅 다 했다.’ 예수님께서 이 죄 많은 세상에 오셔서 했던 일이 그대로 우리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사도도 자기 욕망이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욕망과 예수님의 노선과 그 안에서 만남으로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는것도 유익함이라’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내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고 나는 죄인중의 괴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면 복이 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실족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이 오늘 강의 중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에 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지금 이 미아선생이 라면 끓여서 김치 놓고 혼자서 맛있게 먹으려고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제가 들이닥쳐서 라면그릇에 젓가락 집어넣어서 휘휘 면발을 말아 올려서 맛있게 먹는거죠. 그러면 이 미아선생이 ‘목사님, 이건 제 라면인데요’ 할 때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자는 복이 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예수님이 오게 되면 우리 인생은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애초에 각오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 할까요? ‘예수님이 오게 되면 우리가 우리의 원하는 인생을 갈 수 없고 자꾸 예수님에 의해서 밀리고 쫓기게 되어 있다는 것을 고맙게 여기고 감사히 여기는 자가 진짜 복 받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 인생, 내 젓가락, 내 라면’ 하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 이제 말씀하옵소서. 이제 내가 지키겠습니다.’ 자꾸 우리가, 내가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사람이 말씀을 자기가 지키게 되면 실족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장하다. 나여! 훌륭하다. 나여! 전에는 교회도 안 나오더니 이제는 교회도 다 나오고. 전에는 성경도 안 보던 내가 이제 성경도 보고.’
이게 무슨 실족입니까? 오히려 자랑스럽지요. 우리가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서 구원될 것 같으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너는 안 지켰지. 나는 지켰다. 너는 이것도 모르지. 나는 안다.’ 이런 식으로 만날 자기 잘남에 도취되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옥 가는 방법입니다.
천국 가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지금 잘 지키고 있는데 뭐가 하나 날아들었지요. 날아들게 되니까 ‘어? 당신 누구야! 이것은 내영역이야. 당신이 왜 내 영역에 침범을 해. 이 젓가락은 내 것이고 라면도 내가 끓여서 내 라면이야.’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라면에다 손가락을 막 집어넣어서 ‘아, 라면 참 맛있겠다. 왜? 아니꼽나? 나로 인해서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 가져다 드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왜, 너는 안 먹고?’ 그러면 우리는 ‘제가 이것 먹는다고 구원되겠습니까?’ 주께서 이렇게 주도할 때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고백하는 것 같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그러니까 죽는 것도 주님 쪽에 유익이다, 라는 그것이 바로 주님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까 우리 교인 중의 애 가 눈을 다쳤는데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아서 수술을 했대요. 그래서 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제가 너무 초조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주님 죽으심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애 아픈 쪽으로 눈이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의존교회 사람이 아니고 대구우리교회 교인이고 그 교인은 내 소유라는 의식이 강하게 있어서 그 교인의 애가 다쳤으니까 그 애 다친 것이 나를 아프게 하는 거예요.
제가 전화로 ‘수술 잘 되었습니까?’ 하니까 ‘수술 잘 되어서 나중에 경과를 보자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의 쉼을 얻고 ‘휴, 이제 편안하게 안산강의 할 수 있겠구나’ 했습니다. ‘자기교회 식구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뭘 잘났다고 안산까지 가서 강의하나? 네 식구도 제대로 못 챙기는 주제에. 목사가 되어서 기도를 얼마나 안했으면 목사가 되어서 교인의 애가 다치겠는가? 똑바로 해라! 네가 똑바로 했으면 네 교인식구들이 안 아플것이 아니냐?’
결국 이것은 아무리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누구 찬양입니까? 이것은 내가 알아서 내가 실족하지 않겠다는 자기의 치밀한 계획이 아닙니까? 남들 보기에는 아주 멋있어 보이지요. ‘와, 목사님께서 교인들을 그렇게도 사랑하는구나. 주 기철 목사님이 양들에게 모범 보인다고 신사참배도 안한 것 보면 참 훌륭한 목사님!’ 이라고 합니다.
그런 게 바로 이단이거든요. 주님께서 어떤 사태를 일으켜도 ‘저 사람은 주님의 아이다’ 라는 사실을 확인받는 겁니다. 제가 전화를 해서 ‘제가 애 아픈 소식을 듣고는 복음 전하기도 싫고 당장 내려가고 싶습니다’ 하니까 그 집사님이 ‘복음 맘껏 전하이소. 우리 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집사님은 자기 애 일인데도 불구하고 실족 지 않았어요.
괜히 제가 걱정해주는 척 하면서 괜찮은 목사라는 인상을 가지도록 해 보려고, 목사 근처도 못가면서 완벽한 목사 티내려고 촐랑대고 호들갑을 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것을 가지고 저를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의 본성이고 다 헛수고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웃고 있지만 집에 애가 아프다고 하면 대번에 다 집어치우고 튀어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예 우리한테 어떤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뭘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뭐만 요구합니까? ‘내가 너한테 들어갈 때 네가 실족하지 말아다오.’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내가 죽는것도 유익함이라” 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한 말씀 한 말씀이 이렇게 힘듭니다. 이제 빌립보서 1장의 중요한 것을 막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빌립보서 1장 1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을 제가 써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여기서 뭘 빠뜨리냐 하면 ‘그리스도’를 빠뜨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네가 천국간다’ 는 말인데 그리스도를 빠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라고 되어 버리면 우리가 우리 쪽에서 예수를 믿어야 되는 줄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버리면 이 그리스도의 특징은 우리가 우리 죄를 위해서 다시 드릴 제사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그리스도는 우리가 해야 될 것을 다 채워주시는 그런 기능을 발휘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기능해 버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어이 우리는 가기 싫어도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능성 때문입니다. 그러며 그 그리스도의 기능성이 뭐냐? 오늘 강의의 핵심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그리스도의 기능성이란 양으로 갔던 우리를 그냥 잘가라는 식으로 해 놓고 그 다음에 우리가 세상으로 간 빈자리,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리스도가 대신 서심으로 아버지로부터 대신 저주의 소낙비를 다 받아요.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우리는 있지 않고 세상이 좋아서 가버리고 그 자리에 희생양으로 주님이 서심으로 몽땅 저주를 다 받게 될 때 그것을 가지고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이라’ 고 합니다.
이사야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빌립보서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기능이 결국 뭐였습니까? ‘죽으심’ 이죠.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다른 것은 다 의심해도 내가 생각한다는 그것만큼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한다는 그 나는 있잖아’ 라고 봤어요.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그 순간은 하나님도 있지요. 반대로 내가 생각하지 않는 순간, 치매가 걸렸다든지 해서 생각을 제대로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되면 하나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도 없겠지요.
내가 60년 동안 교회를 다니고도 치매가 걸려서 하나님 생각이라는 그 개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님이 있어요, 없어요? 없다는 말이죠. 내가 있음에 하나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약점인줄을 알고 아예 그리스도를 죽여 버렸습니다. 내가 죽어버리면 하나님도 소용없는데 죽으심, 그 자리에서 천국이 나온다면 우리는 현재 살아있는 나에게 기대를 걸어야 됩니까, 아니면 죽으신 예수님한테 기대를 걸면 됩니까?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부활된 천국이 나온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 있는 나에게 더 이상 기대를 걸 필요가 있다, 없다? 나에게 기대를 걸 필요가 없으면, 구원받는데 있어서 내가 나에게 기대를 걸지 않으면 나는 구원 문제에 대해서 어떤 스트레스를 받을 하등의 염려가 없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죽어 가시면서 ‘근호야, 너는 십일조를 해야 된다’ 했으면 우리가 십일조를 하면 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죽어 가시면서 ‘근호야, 나의 무덤을 부탁한다’ 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죽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죽으심에 손댈 수가 없습니다. 임진강에 애가 빠져서 죽었는데 시체밖에 없어요. 보상금이 5억 나왔다고 하죠.
보상금 5억을 받고나서 집에서 자고 있는데 임진강에서 아빠가 살아나서 ‘나, 여기 살아났다. 나 여기 있다.’ ‘귀신이네요.’ ‘내가 귀신이 아니다. 내 못 박힌 손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봐라.’ 그 때부터 우리는 인생을 살 때 눈에 보이는 인생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인생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그리스도의 기능입니다.
제가 말을 좀 어렵게 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기능이란 것은 밥 먹고 사는 것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아예 믿음이 없는 우리를 예수님의 죽으심 그 자리에서 다시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런 눈까지 제공하시는 분이 누구다? 바로 그리스도의 기능인 겁니다. ‘주는 나의 그리스도십니다’ 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나부터 어떻게 살까, 그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이끌고 가고 있느냐, 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자신의 구원을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니까 ‘내가 하는 모든 것은 헛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 덕분에 우리가 사는구나’ 라는 것을 주님의 죽으신 자리에서 세상을 다시 볼 때 새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빌립보서 1장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뭐도 유익하다? ‘죽는것도 유익하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관점은 어떤 관점인가? 22절부터 봅시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죽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까, 사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까?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바울이 그런 고백을 합니까? 관점이 살아 있는 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죽은 빈 무덤이라는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그리스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도 같이 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얼굴과 사도바울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 죽은 무덤에서 누구를 봅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죽었던 상태에서 보니까 ‘쟤(사도바울) 보이나?’ ‘예, 그게 바로 저 아닙니까? 예수님, 쟤 좀 고생 그만 시키고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좀 해주세요.’ ‘그렇게 해줄까?’ ‘예. 정말 소원입니다.’ ‘그래. 그런데 넌 좀 오래 오래 살아야 되겠다. 네 입장에서는 죽어서 나와 함께 있는 그것이 참 좋겠는데 너의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조금 더 고생을 해야 되겠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 주일에 어떤 집사님이 제 설교를 듣고 난 뒤에 심각하게 이야기해요. ‘목사님, 제가 지금 당장 죽으면 안 됩니까?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그것은 무슨 관점이냐 하면 예수님관점이 아니고 지금 본인이 사는 관점에서 본인이 힘드니까 자살은 하면 안 되겠고 자살은 자살인데 그걸 주님 쪽에서 그걸 해주면 고맙겠다는 의식으로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관점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여전히 자기 편한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집사님, 제대는 함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군복무기간 다 채워야 제대가 되지 아무나 제대시켜주지 않습니다. 고참이 되어야 제대를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아직 집사님은 고참이 아니니까 군대생활 좀 더 하셔야 되겠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관점이 살아 있는 내 관점이 아니고 예수님의 무덤에 얼굴 맞대고 보는 관점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미 뭐가 됩니까? 죽은 자가 되지요. 그 이야기를 써 놓았더니 사람들이, 특히 우리 노회 말고 다른 노회의 목사님들이 자꾸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 근호 목사는 인간이 죽었대. 저 인간이 미친놈 아냐!’ 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린도후서 4:10-12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분명히 고린도후서에 나오고 갈라디아에도 분명히 나오는데 그 사람들은 관점이 자기가 살아 있어야 된다는 관점 때문에 그것을 해석을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평수가 넓어요. 거기에 예수님만 계신 것이 아니고 성도도 같이 들어 있어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있는 대로 세상은 나에게 죽은 자고 세상은 나를 볼 때 죽은 자로 보일 것이고.
내가 이미 죽은 귀신이라는 이것이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요. 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무엇이 부끄럽고 뭐가 두렵고 뭐가 겁나는 것이 있겠어요. 그래서 ‘사랑은 두려움을 쫓느니라’ 하잖아요. 여러분이 꼭 90살 되어서 죽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열 몇살 쯤 되었어도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홉 살도 덤으로 살고 열 살도 덤으로 사는 것이고 다 축복이고 열 한 살 되어도 감사하고 그래서 한 95살까지 살면 끝까지 감사합니다. 사람이 술이나 마약 같은 것이 의존하는 이유가 본인이 살았다고 여기고 더 살려고 하니까 그렇게 괴로운 거예요.
‘주여, 죽었는데 무슨 짓을 할까요?’ 이러면 편한 것을 가지고 ‘지금 살아 있는 이 몸을 어떻게 굴려서 또 살게 합니까?’ 하고 나오니까 살려고 하는 본인도 괴롭고 ‘내 안에 내가 들어 있어서 죽으려고 하니까 그것도 미치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빌립보서 1장은 달라요. ‘내 안에 사는 것은 나니 내가 더 살려니 괴로워죽겠다.’ 이것하고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하고는 완전히 정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내버려두세요. 내버려두시면 허락 없이 주께서 여러분을 침투하실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껍데기를 벗기고 벗겨서 결국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피만 출렁출렁 담겨 있을 것을 본인이 보게 할 것이고 그리되면 ‘아하, 나는 죽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The others' 이라는 영화에 보면 엄마와 애 둘이 나와요.
관객들은 그 들이 처음에는 산사람들인 줄 압니다. 그런데 영화 끝날 때 보면 그 세 사람이 귀신들이었어요. 귀신이 서로 귀신인줄 몰랐던 겁니다. 나중에 보니까 ‘아하, 우리가 귀신이구나.’ 영화 끝에서 알아요. 귀신이 자기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산 사람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자와 네가 산다는 것은 네가 사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그리스도의 것으로 산다’라는 놀라운 이야기가 이 성경에 바울의 편지속에, 로마서 6장에 세례부분에 나옵니다.
로마서 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안 놀래요. 전혀 무슨 뜻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뜻을 모르기 때문에 놀라야 될 대목에서 놀라지를 않는 거예요. 놀라는 대신 뭘 하고 있느냐 하면 신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살아 있는 나에다가 신학을 덧대기 합니다. 삽겹살처럼 신학으로 덧대기를 합니다. 그 신학이라는 껍데기를 다 벗겨내야 됩니다.
앞으로 의존교회 여러분들이 이야기를 할 때는 평소에 보는 산 사람들처럼 이야기하지 말고 바이브레이션을 넣어서 하세요. ‘여러분~~~! 우리는~~~ 귀신들입니다~~~.’ ‘엄마~~~ 포도 좀 주세요~~~.’ ‘아들(귀신)아~~~, 내가 주마~~~, 공부나 해라~~~공부해야 돈 벌어 온다~~~.’ ‘엄마는 귀신이라면서 돈 좋아해~~~?’ ‘내 성질이 그렇다~~~이 귀신성질이 돈 밖에 모른다~~~.’
성도는 자기가 죽은 줄 아는 것이 성도고 불신자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산채 하는 것이 불신자입니다.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더 살아보려고 축복을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인생, 그런 인생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뭐가 된다? 복음의 진보가 되지요.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믿어서 천국간다’고 하니까 이 복음의 중간과정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서 ‘야, 복음은 널리 전파되어야 해. 그래야 천국 많이 가’ 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 이런 인간의 생각을 묵살해 버리고 여기다가 뭘 집어넣습니까?
사도바울의 체포당함을 집어넣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려나, 말려는 것인가? 복음 전하는 사람을 체포시켜 버렸어?’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이 아니라 “체포되고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바로 그것이 인간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인간들의 생각을 능가해서 ‘진짜 복음의 진수인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에게 덮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로서 하나님이 나를 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복음의 진수를 알았으니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 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고 복음 알아서 출세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일이 안되어 버리니까 그것이 복음의 진보입니다. ‘아하, 복음이 나를 출세시키는 것이 아니고 나의 그러한 세상적인 껍데기를 벗기고 나는 죽은 자요 내 안에 산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 덕분에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깨닫는 복음의 진보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분의 의도대로 안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힘들게 한 거예요.
빌립보서 1장 29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고난을 왜 줍니까? 고난 없는 복음은 십자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옴으로 말미암아 ‘아하, 우리가 복음을 잘못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었구나’ 라는 관점에서 고난을 주는 겁니다. 1장 28절에 보면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똑같은 말을 했는데 멸망 받을 사람한테는 멸망 받을 이유가 되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구원받은 이유가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 예수님의 죽으심은 믿는 자 에게는 부활의 능력이고 안 믿는 자에게는 저주받을 증거로서 작용으로서 그리스도가 기능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목사님, 딱 깨놓고 이야기 합시다. 내 안에 그리스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들의 뜻대로 안되거든 주께서 여러분들의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은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도 산 자가 아니라 이 몸이 해체되어야 하며 죽을 자 인 것을 아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 뜻은 간단해요. 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누가 너를 정죄하느뇨.’ ‘없습니다.’ 할 정도로 이 더러운 죄인이 용서받는다는 것을 짧은 순간이나마 알게 되거든 그 순간이나마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의의 열매가 되는 그런 도구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앞으로 뭐든지 우리 뜻대로 안 될 때 마다 그래도 예수님 덕분에 죽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더욱더 감사할 수 있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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