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28장 - 31장 주석
창세기28장 - 31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28장 - 31장
아브라함 언약의 유효성은 이삭 시기에도 그대로 전달되어 이삭은 부자가 되고 그곳 주민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이삭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이러한 축복의 영향력은 대단히 매혹적이어서 이 축복을 전수 받는 쪽은 대단한 이득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이러한 행운은 어떤 애씀이 없더라도 자연적으로 뒤따라 오는 것으로 알려 질 수 있다.
야곱이 혼인이라는 구실로 아버지 집으로부터 쫓겨난 뒤 룻스라는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야곱 자손의 편만을 분명히 약속하셨다.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이 아버지 이삭의 집에 고정되어 계신 분이 아님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통해서 계시함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삭의 하나님이 이제는 야곱의 하나님으로 하나님 사역의 중심점이 바뀐다. 이삭 식으로 역사하시던 하나님은 이제 야곱 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야곱이 지니고 있는 표상, 즉 인간의 투쟁성이 하나님의 약속성취에 어떤 연관을 맺고 역할을 하게 되는지 보이기 위해 이제는 야곱이 등장을 한 것이다.
야곱이 투쟁하는 상대와 하나님이 약속성취를 이루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상대가 일치되지 않을 때, 우리는 야곱이 어디에서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살필 수 있다. 하나님이 야곱보고[너와 함께 있겠다] 는 말은 결코 야곱이 생각한대로의 함께 하심이 아니었다. 야곱이 생각한 자손의 번식에 하나님은 약속성취라는 차원에서 하나 하나씩 관여하고 있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가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는데 거기서 생산한 자식들은 거이 다 야곱의 두 아내 사이의 투쟁과 시기와 질투의 산물로 주어지기에 그 자식들의 이름에 그 투쟁의 흔적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시되 복의 차원에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이 인간의 세속적 탐욕을 질책하는 증거로 주시고 계심을 볼 수 있다. 한 남자 야곱을 사이에 두고 두 아내는 경쟁적으로 자기에게 남편의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을 다한다. 여기에는 여종들도 가담을 하게 되는데 이 모두가 두 여자의 개인적인 사랑 싸움의 도구로 동원된다. 하나님의 복된 자식을 꼭 이런 추한 모습 속에서 배태해야 하며 하나님의 복의 산물로 여겨지는 많은 재산을 꼭 삼촌의 살진 양을 빼돌리는 야곱의 속임수의 대가로 주어져야 하는가?
여기에는 분명 왜곡된 축복관이 개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야곱의 인생사로 표현하고자 하셨다. 선조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진정한 뜻이 야곱 같은 투쟁의 인간의 추잡한 속임과 탐욕으로 얼룩진 야욕에 상처 입은 모습으로 등장된다.
복의 산실이라 여겨졌던 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복의 근원 야곱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쫓기다시피 나와야 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 라헬은 아버지의 귀중품까지 마저 가져 나와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야곱을 중심으로 한 모든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속고 속이는 그런 자들이었다.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의 지난 20년간 생활은 야곱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모습을 자기와 다를 바 없이 똑같이 탐욕적인 사람들의 부대낌 속에서 진솔한 그의 모습을 재확인하는 기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은 이런 탐욕스런 자의 하나님이 될 수 있단 말인가? 20년간 모은 모든 것들이 진정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 이삭에게 엄청나게 재산을 불어 나게 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 재산이 왜 나에게는 이런 추한 꼴로 주어져야 하는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다는 복을 두고 온갖 추한 꼴을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경배한 교회가 된다. 하나님 그 분보다 그 분이 손에 들고 가져온 선물 보따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직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다르다.
28:10-15
야곱이 받았던 축복의 본 내용을 서서히 공개하기 시작한다. 사닥다리가 내려왔다는 것은, 사닥다리 윗 동네와 사닥다리 아랫 동네가 따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다. 또 한가지, 그 동안 윗 동네와 아랫 동네 사이를 이어주는 그 어떤 연결점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야곱의 사닥다리가 주어지기 전에는 말이다. 야곱의 축복 이외의 영역이 당연히 저주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모든 축복 된 상태는 이 인간들의 세상인 아랫 동네가 아니라 윗 동네에만 있다. 그 축복이 그동안 차단되어 있었다. 밑의 동네에서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윗 동네에 잠입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곱이 밤에 받았던 이 축복의 사닥다리 외에는 그 어떤 천국의 층계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실제로 창세기 11장에서 인간들은 하늘을 향해 높은 건축물을 건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친히 하나님에 의해 그 의도는 무산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기어올라오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은 일체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의사표시 이다. 지상에 그대로 있다가는 저주를 받고, 또한 이 저주를 피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모험을 시도해도 하나님은 거부해 버리시고, 이런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실정이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하늘의 문' 이라고 짓는다. 하늘의 문은 귀향하라고 있는 것이다. 축복 받는 자 외에는 돌아갈 수 없는 그곳으로 들어오라고 하나님께서 출입문을 허락하신 것이다. 야곱이 겪었던 이런 체험을 보고 동일한 꿈이 제공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꿈의 체험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사람 다룸은 다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구원하시면 똑같은 경우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 동일한 경우를 맞이해야지만 구원된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맏아들을 바쳐야 하는 지경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동일한 구원의 원칙을 고백하도록 인도하신다. 그 어떤 형편에 있느냐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 구원의 원칙은 야곱이 받은 축복의 원칙과 일치되는 것이다. 비록 무화과 나무에서 홀로 있더라도 이런 축복과 구원의 원칙을 제공받은 자가 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47-51절에 예수님께서 먼저 나다나엘보고 하는 말이, "참 이스라엘 사람" 이다 하셨다. 이스라엘이란 야곱의 새 이름이다. 이스라엘이 곧 야곱이 축복을 받은 상태에서 나온 축복의 피조물에게 붙은 이름이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하게 된 것은 야곱에게 내린 축복의 결과이다.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생겨나는데 이 국가도 또한 야곱이 받은 축복의 관리 하에 있게 된다. 그 축복이 바로 '사닥다리' 축복이다. 윗 동네에서 사시는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 사닥다리 이다. 이 축복 외에는 저주뿐이며 축복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계속 저주가 된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 이다 말씀하신 것이 얼마나 대단한 칭찬인 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마음씨이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라고 했다. 나다나엘은 마음에 담겨 있는 소망이란 딴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오실 메시아만 있다면 자기는 족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고백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고 "마음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고 하신 것이다. '간사하지 않다', '간사하다' 를 이런 기준으로 측정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임금 됨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전하신니다.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리라" 고. 예수님은 야곱이 받는 축복을 그대로 인정하신다는 말씀이다. 야곱이 보았던 그 사닥다리의 실체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야곱처럼 꿈 속에 사닥다리가 보이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진정 간사한 마음이 없이 이 땅에서 누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축복이다.
참된 교회란 교인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만이 증거 되느냐에 달려 있다. 성도는 바로 이 점을 증거 하는 사람이며 축복 속에 놓여 있는 신자임이 분명해진다.
28:16-22
야곱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체험이 주어졌다. 여기에 대한 야곱의 반응이 나타나 있다. 야곱은 대단히 감격했다.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성의껏 해드릴 만한 것들을 가지고 자진해서 맹세를 해댄다. 이런 야곱의 반응이 곧 모든 인간성의 원천을 장식하고 있는 내용이다. 야곱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영구히 하려고 한다. 그 방법으로 야곱이 생각해낸 것은 성전 지어 드리겠다는 제의이다. 어찌 보면 대견스럽고 가상히 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야곱은 자신이 받은 체험을 고정화 하겠다고 그 지역을 신성시한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고 어떤 장소에도 구애 받지 않고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주시는 분이다.
그 잘못된 반응 중의 하나가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결심이다. 야곱은 특정 지역이 자동적으로 하늘의 복과 신성한 능력이 작렬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야곱의 생각은 28:15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 말씀에서 야곱은, '이 땅으로' 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야곱은 어쨌든 이 곳으로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실현됨이 분명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28:15의 뜻은 '이 땅'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라는 대목에 있다.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고 있다. 야곱이라는 인물을 붙잡고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작업을 마무리 할 때까지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달라짐에 대해서 관심조차 두지 않고 그 지역에만 신경을 쓴다. 그는 자기가 베고 잔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고서는 성전의 개시를 알린다. "제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라는 몸짓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십일조를 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야곱에게 내려진 사다리 꿈은 야곱 쪽에서 뭘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다리는 순전히 천사들만 오르락내리락하는 층계이다. 야곱이 축복의 사람이 되고 아니 되고 천사들, 즉 천사들을 부리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달려 있는 문제였다. 야곱은 이렇게 맹세한다. 20절에 보면,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라고 한다. 흔히 우리들이 저지르는 행동양식 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할 때, 자기 쪽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 드릴 테니 최소한 자신들의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을 시키려면 일을 할만한 최소한 환경조성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마음껏 헌신하고 실력발휘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객기들이 나중에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대로 야곱을 다루면서 모든 것이 다 망가진다. 다시 본 땅으로 돌아올 때는 다리를 저는 장애자가 되어 돌아온다. 하나님은 야곱과 동업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신다. 이스라엘이란 결국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이 담긴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공간이나 특정 지역이 아니라 그 인물 자체를 성전 만들겠다는 것이다. 신약 때에 와서 고린도전서 3:16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야곱이 내세우는 자기 주장은 사실상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전에 뿌리 채 뽑혀야 될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성령께서 독차지 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한 그 모든 것' 이 완성되는 것이다.
29:16-30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일을 실시하신다. 야곱이 사랑하는 것, 야곱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나름대로 작업에 나선다. 야곱의 자기 사랑이 방해를 받게 함으로서 참으로 우리가 사랑해야 될 분을 일깨워주신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가 선택한 대상에게 사랑한다는 말이요 이는 곧 자기가 자신의 선택에 만족한다는 말이요, 곧 자기가 자기를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이다.
이 자기 만족에 7년이라는 세월도 무색하다. 혼인 날이 되었다. 신부는 얼굴을 가린 채 들어온다. 야곱은 삼촌과 약조한대로 예쁜 라헬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날이 새고 옆에 같이 잔 여인의 얼굴을 보고 그는 화를 내었다. 자기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삼촌은 변명하기를, 우리 동네에서는 동생을 언니보다 먼저 시집 보내는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니를 버리지 않고 정식 아내라는 징표로서 7일 동안 같이 있어주면 약조대로 동생도 건네주겠다고 한다.
야곱은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먼저 혼인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야곱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아야 했다. 뒤늦게 라헬과 혼인하고 다시 7년간 삼촌에게 봉사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변함없이 사랑하지만 그녀는 야곱의 아이를 낳다가 횡사하고 만 비극의 여인이 된다.
야곱의 인간적 사랑이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런 식으로 함께 하신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모두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지만 결국에는 온갖 방해와 장애물을 등장시켜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에 하나님을 개입시켰나 하는 점을 깨닫게 하신다. 물론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이다.
29:31-35
본문에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자매가 나온다. 레아가 언니이지만 사실 언니는 야곱과 동생이 정식 부부가 되는데 덤으로 끼어든 신세로 지내야 될 입장에 있다. 야곱의 아내라고는 하지만 아내로서 남편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동생 라헬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그런 상황을 보고 있으면 자기 육적 존재의 가치성은 참으로 비참할 것이다.
이런 육과 육의 만남 안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자매는 모두 아기를 아직 갖지 못하는 여성이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태의 열림과 닫힘을 조절해 버린다. 남편으로부터 아내로 인정 받지도 못하고 사랑도 받지 못하는 언니 레아가 졸지에 태가 열리게 되어서 자식들을 가지게 된다.
그동안 남편의 사랑만으로 흡족하던 라헬이 언니에게 자식이 줄줄이 생기자 육적인 욕심이 가동된다. 남편한테 항의한다. 그러자 야곱이 하는 말이, "성태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는 것이다. 여기서 그냥 물러 설 동생이 아니다.
육과 육은 필히 전쟁하게 되어있다. 하나 가지면 다른 쪽은 졸지에 패배자로 간주하기 마련이다. 동생 라헬에게는 '빌하' 라는 여종이 있었다. 그 여종의 태를 빌려서라도 언니를 이기고자 한다. 꼭 아브라함이 약속의 씨를 얻기 위해 육적인 방편인 여종 하갈과 관계하는 것과 같다.
라헬은 이런 식이라도 하나님은 언니편이 아니라 자기 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드디어 빌하에게 첫아들이 생겼다. 그래서 라헬은 이름을 '단' 이라고 지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레아는 여종 실바가 낳은 자식들을 포함해 8명의 자식을 낳았고 라헬은 여종 빌하에게서 2명의 자식을 낳은 것이 된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나님께서는 패배자로 전락한 라헬의 태를 열어서 자식을 낳게 했다. 이것을 보고 라헬은 다시금 경쟁의 전기로 삼는다. 아직도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싸움의 투지를 불태운다.
창세기 35:18에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라는 육은 죽음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계속 살아남은 언니가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게 되고 경쟁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출산 되는 그 자식의 이름을 '베노니' 라고 짓는다. '슬픔의 아들' 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속에서 잉태 되는 자식을 야곱은 달리 보고 있다. 결코 라헬의 마지막 자식은 슬픔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최종 승리를 보여주는 자식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 베냐민' 으로 바꾼다.
야곱은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육적인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가 결코 죽은 자에게 대해서 승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진정한 승자는 죽음 속에서도 자식을 갖게 한 하나님에게 있었다. 레아나 라헬이나 야곱이라는 육들이 자체 내에서 승자 패자가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이런 육의 우충좌돌에서도 그들에게 자식을 갖게 하셨던 하나님이 최종 승자이시다. 이러한 승자의 모습은 놀랍게도 슬픔을 안고 죽어가는 사랑하는 라헬를 통해서 비로소 제공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참된 라헬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사랑의 실체를 전달하신 것이다. 구원이란 결코 인간의 육적인 욕망의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30:25-29
삼촌의 재산을 빼돌려 자기 재산 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마련한 것이 따로 존재함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인간들이 야심 속에서 소원한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 기름과 곡물을 파는 가게 한 점원이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그 점원은 자기 살 궁리를 하게 된다. 그가 생각해 낸 것은 단골되는 손님들을 불러다가 그들이 유리한대로 장부를 임의로 뜯어고친다. 나중에 자기가 퇴직하고 난 뒤에는 자기로 인해 혜택을 입은 자들을 찾아가서 그 혜택을 돌려 받겠다는 것이다. 기름 백 말을 가져간 사람은 오십말 가졌다고 짐을 반으로 줄여주고 밀 백석을 빚진 자는 오십만 졌다고 장부를 조작해 주는 것이다.
이 점원의 행세는 횡령죄에 해당된다. 주인 입장에서 보면 파렴치한 인간이다. 불의한 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불의한 점원이 그 시대에서 자칭 의롭다 하는 자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래를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원은 현재의 절망을 미래의 희망으로 바꿀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점원을 불의하다고 비웃는 그 당시 성직자들은 심판주가 그들 코 앞에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장래를 대비할 줄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곱의 행위 자체는 분명 생존의 사투다. 자기 탐욕의 결정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버리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행위가 곧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야곱이 어떤 행위를 하든지 간에 세상 인간은 야곱을 건드려서 위기에 몰아넣지 못한다.
야곱이 획득한 재산을 나쁜 것이라고 비난 하지 못한다. 나중에 삼촌이 야곱을 뒤쫓아왔지만 결국 야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정하고 되돌아 간다. 야곱이 완전하게 행동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뜻이 야곱의 욕심보다 더 우선적이기에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다. 실생활 속에서 성도는 불신자와 똑같이 생존의 사투를 벌리고 있다. 하지만 그 행동이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성도를 버리지 않기에 성도는 결국 이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