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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창세기 25장-27장 주석자유게시판창세기

창세기 25장-27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25장-27장

사라와 마찬가지로 리브가도 아기를 못 낳는 여성상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사라처럼 늙어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성이 아니다. 사라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사라가 표상하고 있는 천만인의 어미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가장[사라됨]을 보여 준다. 약속의 자식은 인간의 손을 들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천만인의 자식이든 백만인의 자식이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필요한 인간들을 사용하여 일하신 결과로 주어져야 한다. 그래서 주어진 자식이 바로 다툼의 형제 지간인 에서와 야곱이다. 불임 여성인 리브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신 결과로 주어진 것은 두 아들인데 이들은 다툼을 일으킨다. 이 다툼은 하나님의 일하신 결과이다. 하나님의 일하신 결과는 약속의 결과이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리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싸우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약속의 자손이 싸움을 통해서 주어 진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다. 에서와 야곱과의 싸움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을 위한 싸움과는 상관없이 세속적이었다. 날 때부터 싸우는 동작 그대로 세상을 본 이들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걸 맞게 서열 결정에 혼란을 일으키는 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이들뿐 아니라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도 이들간의 싸움에 말려든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감정과 기분에 의해서 어느 한 쪽을 선호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들먹이지만 그들의 싸움은 철저히 세속적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재산을 누가 상속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다. 어린 야곱은 형의 입에서 재산권 포기에 대한 언급이 있기를 기다렸다. 오히려 기다렸다기 보다는 그런 분위기로 조성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다가 드디어 형이 사냥 나갔다가 허겁지겁 허기져 돌아 오니 팥죽으로 유혹하여 반 강제적으로 형으로부터 재산권 위임을 약속 받는다. 그러나 형의 입장에서는 장자인 것이 어차피 아버지는 자기를 아끼고 또 누가 뭐래도 자기가 먼저 출생했기에 장자권 확보는 운명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여겼다.

드디어 아버지 이삭이 정식으로 상속권을 넘겨 줄 때가 왔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약속대로 누구든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자에게 복을 주는 형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사냥한 고기를 좋아한 이삭은 에서를 불러서 별미를 준비할 것을 부탁한다. 그것을 가져오게 되면 아브라함의 복을 지닌 아버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는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님의 복을 전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에서가 나간 사이에 야곱이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기를 들고 아버지께 나아 간다. 이삭은 정식으로 별미를 가져온 자에게 아브라함의 권리를 위임한다. 즉 이삭은 약속하기를 별미를 만들어 온 자가 장자가 된다고 했지 이미 장자가 결정된 후에 별미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삭이 먼저 고기를 가져온 야곱을 에서라고 여기든지 아닌지 상관없이 약속은 이삭의 확신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나머지 한 형제는 장자가 아닌 셈이 되고 장자의 축복권에 종속되어 살아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삭의 예상과 달리 장자권이 주어지자 여기서 이삭은 새로운 각도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취미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매이지 않음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이삭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전달에 동원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바람과 무관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임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 그리고 리브가는 아직도 이삭이 아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의 분위기는 파탄된 채 장자를 홀로 살도록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갈등과 투쟁의 골은 더욱더 깊어져 갔다.

하나님의 약속을 두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을 자기들의 소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수단으로 여기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을 소유물로 여길 경우 그 사람은 심하게 왜곡된 인생을 살아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탐욕을 정당화 해주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삭, 리브가, 에서, 야곱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나누어진다. 자기들의 탐욕으로 싸운다. 야곱이 생각한 장자와 에서가 생각한 장자는 다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 야곱은 장자 아닌 채로 장자를 탈취하려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 되었다. 자기가 죽어야 할 이유이다. 자기 힘으로 장자가 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바꾸고자 하는 탐욕이다. 리브가의 죄는 그 아들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 이삭은 에서를 좋아하는 남아다운 것이 죄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가지고 집안을 뒤집어 놓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를 위해서 주었다고 오해를 하고 있다. 이것은 십자가의 희생을 모르기 때문이다.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이왕 섬길 것 애초부터 섬김을 받는 쪽을 큰 자로 만들면 되는데 그렇지 않다. 간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거꾸로 보아야 한다. 장자를 밝히는 자를 먼저 나오게 하지 않고 뒤에 나오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인간의 죄를 배경으로 깔고 들어 온 것이다. 나중에 십자가의 의미를 안다. 인간의 행동은 절대로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예수를 사랑한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긍휼을 이미 받은 자만 찾는 작업이 설교요 전도이다.

사라와 마찬가지로 리브가도 아기를 못 낳는 여성이다. 여자는 여자인데 기존에 있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자이다. 아기를 낳는 점에서 여성이다. 이것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사라가 여성인데 나중에 아기를 낳는 여성으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베풀어주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3:24에서 천국 가는 길은 이미 단절되어 있다. 단절된 입장에서 왜 단절됨을 인정하지 않는가? 인간은 예수님만으로 다 이루심을 믿지 아니한다.

사라와 마찬가지로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는 여성으로 출발한다는 말은 기존의 모든 인간의 속사정 모든 죄를 낱낱이 밝혀 보이겠다는 것이다. 천만인의 자식은 하나님이 만드신다. 십자가는 잘못 쓴 것을 지우는 것이 아니고 죽음에의 동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빠지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게 되어 있다. 고전 6:20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내 몸은 예수님이 값을 주고 산 것에 불과하다.

천만인의 자식은 하나님의 할 몫이다. 인간이 해야 할 것이 아니다. 주님의 할 몫을 나의 몫으로 돌리는 이유는 사람이 사는 보람이 자기가 손수 일을 해서 남에게 영광을 받을 때 사는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신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신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자라고 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이다(롬5장). 하나님과 인간과의 싸움의 관계를 이삭의 4명의 가족에게 집어넣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를 고발하고 있다. 인간 본래의 죄성이 무엇인가를 싸움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싸우고자 하는 싸움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를 싸우게 하시고 그 싸움에 부모가 편을 들어서 개입을 하고 있다. 승리자는 아무도 없다. 이긴 자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긴 이김으로 야곱을 선택하여 너는 승리자가 되라고 하신 것이다. 지적한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계획에 의한 것이지 야곱이 잘해서가 아니다.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태에서 서로 싸우게 하신 것이다. 에서와 야곱이 서로 싸우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상태가 서로 전쟁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싸울 때는 서로 자기가 잘 낫다고 하고 있다. 약속을 받았다. 나는 본래 장자이다라고 싸운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의 약속과 장자의 의미는 인간의 사고 방식이다.

야곱은 장자가 되고자 하는 자가 장자가 된다는 것이다. 야곱은 장자라는 것은 종결되지 않은 입장으로 본다. 에서는 이미 종결된 것으로 본다. 이런 의미에서는 야곱이 맞다. 그러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시시하게 봤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다. 아버지는 장자권을 에서에게 줄려고 하고 있다. 야곱은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

야곱은 장자 됨의 증거물을 찾고 있다. 많은 자식과 재물을 소유하면 된다고 보고 있다(천만인의 어미라는 것으로부터). 야곱은 아내를 둘이나 두었지만 둘 다 자식을 못 낳는다. 단 한 명도 없게 될 판이다. 아기 낳지 못하는 것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야곱의 현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11명 사이의 관계는 아주 치욕스러운 관계이다. 인간적인 탐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복의 증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의 문을 열어서 보여준 것은 죄의 증거물 만이었다. 11명의 아들을 낳는 과정에서 두 여인이 보여 준 것은 에서와 야곱의 모습을 그대로 대립 작업하는 것이다. 형과의 관계가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12 아들이 축복이 아님을 알게 된다.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것이 진정한 축복이 아니다. 축복이라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어떤 일을 맡는 것,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어떤 사명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다. 복이란 하나님의 일에 선택되어서 참여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야곱의 사명은 아브라함에게 준 사명 곧 10 족속을 멸하는 약속이 야곱언약을 통해서 구현된다. 창27장29절에서 열국들이 야곱에게 굴복한다 이것은 가나안의 10족속이 이스라엘에게 굴복하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 준다(창27:29). 이 말씀은 야곱에게 준 것이 아니라 야곱언약에게 준 축복이다. 언약의 성취는 야곱 당대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장자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창세기25장23절의 말씀이 복잡하게 엮어지면서 창세기 32장에서 진정한 섬김의 본을 보인 분은 밤에 찾아오신 여호와의 사자였다. 여기서 야곱은 섬김의 의미와 자신의 탐욕 때문에 자신은 이미 끝난 자임을 깨닫는다. 자신의 망함과 없음! 자신의 탐욕 때문에 희생당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이기고 울며 간구한다. 여기서 장자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인간의 탐욕 때문에 희생당하시는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그 분이 장자임을 안다. 야곱언약은 이러한 장자의 은혜가 담겨 있는 언약이다. 이 장자의 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을 때 그 때가 이스라엘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대로 열국 즉 가나안 족속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이 언약의 성취 역시 야곱 개인이 이스라엘로 변화되기까지 장자의 은혜가 임함으로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이 야곱언약은 개인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국가 이스라엘로서의 위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야곱의 아들들에게도 이루어 져야 한다. 그래서 그 아들들의 야곱적 성품을 죽이고 섬기는 자가 장자라는 은혜를 집어 넣는 방식이 요셉에게 꿈을 주어 팔려가게 한다. 형제들에게 수난을 당하고 마침내 팔려간 요셉이 오히려 자기에게 몹쓸 짓을 한 그 형제들을 살리는 위치에 서게 된다. 죄 없는 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우리가 살게 되었으며 우리는 우리의 탐욕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 찾아온 그 분을 싫어하고 온갖 수모를 주었고(사53장) 그럼에도 그분은 오히려 우리를 살려 내셨다는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이스라엘이다. 희생으로 섬기는 자로 찾아오신 그 장자의 은혜가 담겨 있는 사람이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희생자를 주님으로 섬기는 민족을 말한다. 이 희생의 의미가 국가 이스라엘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출애굽시에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유월절 희생의 피를 모르면 다 우상이고 신약에서 십자가 피를 모르면 다 우상인 것이다.

25:20-26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어떤 상태로 임신시키셨는가 하면 이삭에게 일어난 일을 보게 되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확인하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식으로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리브가의 쌍둥이 임신이 이번에는 이삭과 리브가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신앙을 바로 정립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이삭의 경우,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인간 세계는 그 자체가 악이요 죄이다. 따라서 '있음' 으로는 '있음' 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창궐하고 통치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태어나게 해서 그 이삭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이유와 그 해결책을 알게 한 것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번제만이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고 죽음 조차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에 동원된 이삭이라는 인간은 '있음' 의 세계에서 나온 자가 아니라 '없음' 의 세계에서 나온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약속이라는 것이다. 약속이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인간의 아이디어는 모두 '있음' 의 세계의 작품일 뿐이다. '있음' 으로는 '있음' 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이삭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 인간 세계는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세계임이 판명 났고 부활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에서만 나온다는 것이 확정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비약속의 사람들은 아무리 번창하고 오래 살아도 약속 밖에 있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이삭을 장자로 삼았다. 비록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나도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뜻에 준하는 장자가 될 수 없다. 이처럼 장자란 세상의 악함과 그리고 그곳에서 구원됨을 성사시킨 중심 인물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삭 이후에 또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게 될 장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자식 하나만 나온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둘이 나온다. 그것도 서로 붙들고 한창 싸우는 채로 나왔다. 누가 복을 제공할 약속된 장자인지 미완료된 상태이다. 이삭과 리브가 부부는 둘 다를 키운다. 물론 분명 둘 중의 하나는 가짜이다. 왜 하나님은 이런 가짜 자식도 함께 키우게 하시는가? 그것은 이삭 부부가 이제부터 또다시 새롭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혼란스럽게 고통스러운 각가지 일들을 유발시킨다. 과연 우리가 제대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를 점검 시키기 위해서 이다.

사람들이 낙심을 하는 이유는 그것은 예수님과 복음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설교를 통해서 그런 예상 상황까지 일일이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자가 아무리 생동감 있게 말씀 드려도 본인이 체험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 지식으로만 수납 될 뿐이고 하는 말이 "안다, 안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쌍둥이 임신처럼 막상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나면 그동안 알았던 복음은 기껏 지식으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모든 것은 탐욕적인 본심으로만 움직이는 자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치 이삭의 두 자녀들처럼 치열한 싸움을 벌리는데 그 벌리는 싸움이 복음을 빙자한 각자의 오기 싸움이요 명예 싸움이요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게 마련이다. 흔히 환란이요 고난이라고 말들 한다. 또 자기 자신에게 참혹한 환란의 시기가 닥쳐 올까 봐 미리 염려하는 경우도 있다.

환란이란 것은 없이 지내고 병 들어야 만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지면 가진 자로서 환란이 따르고, 건강하면 건강한 자로서 염려되는 환란이 또 따라오게 되어 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환란 속에 사실상 놓여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시는 것은 평소의 우리들의 선입견이나 생각들이 순수하지 못해서 그러하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축복에 대해서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함께 있는 사람은, 그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 그 인간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 그 사람의 예상을 빗나가는 일들을 일으켜서 그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신다. 이만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다가 새로운 사태를 만나게 되면 자신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얼마나 미워하고 원망해 왔는가 가 드러나게 된다.

바로 이런 더러운 인간을 위하여 사랑하사 십자가에 대신 올라가셔서 죽었다는 그 희생을 생각해 볼 때, 다시금 예수님의 고귀함과 가치를 더 깊게 깨닫게 된다. 결코 성도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는 것이 축복이 아니요 하늘의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저 못난 자신을 위해 베푸신 보혈의 피가 진정한 축복이요 사랑일 뿐이다.

25:27-34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장자가 뜻하는 것은 출애굽기 13:1-2의 유월절 때는 애굽 장자이든 히브리인들의 장자이든 모조리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죽음을 당할 특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히브리인들의 장자들은 구사일생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려준 규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어린 양을 대신 잡아 그 피를 죽음의 사자가 찾아 드는 문설주에 발라놓으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감으로써 그 집안에 있던 장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나게 된다는 규칙이다. 유월절은 그것으로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다. 그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게 된 히브리인들의 장자를 하나님의 장자로 삼겠다고 도로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장자란 곧 '하나님의 것' 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기 족보에 집착해서 자기 족보 살리기에 급급하지만 그런 노력조차 하나님은 올바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몰살해 버린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가족에게는 그런 저주가 임하지 않는 것은 아브라함 자체가 하늘의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장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창세기 12:3의 축복과 저주는 아브라함이 사적인 차원에서 혹은 자신의 가문의 차원에서 결정짓는 축복과 저주가 아니다. 하늘의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등장한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것' 이다.

이와 같은 신분은 이삭에게만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창세기 22:18에 보면 이삭도 역시 축복의 중심 인물로 등장된다. 하늘의 축복의 특징은, 저주와 반드시 병행된다는 것이다. 저주 쪽에서 볼 때만 축복이 축복답게 되고, 축복 쪽에서 볼 때만 왜 저주인가가 밝혀지기 때문에 다같이 저주 없이 축복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축복 축에도 들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축복이 아니다.

지금 인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위치에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 야곱이, 할아아버지와 아버지가 가진 위상이 하늘의 축복과 저주가 통함을 잘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 비해 에서는 전혀 그런 것에 무관심했다. 에서는 자신이 당연히 먼저 태어났으니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 번 장자 되었음이 변치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영원한 장자 권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의 장자 권에 도전하는 저주 받을 장자 권으로 보는 것이다.

로마서 9:10-13에 야곱의 장자 됨은 이미 그들 형제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되어 버린 사항이다. 하늘의 장자라는 것이 결코 그들의 차후에 지상에서 착함과 선행에 의해서 굳혀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취소될 문제도 아닌 것이다. 이미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기로 결정 내린 채로 이 두 인물이 지상에 태어나게 하셨다. 사랑이란 미움과 동반해야 한다. 그리고 미움이란 사랑과 동반하는 경우에 한 해서만 하나님의 미움이 얼마나 냉혹한 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에서를 이 지상에 먼저 태어나게 하셨다. 부모들조차 생물학적인 면에서 누가 보더라도 에서가 장자가 될 것이 뻔하고 이 자연적인 형제 서열은 그 어떤 경우에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바뀐 것이다. 하늘에서 정해져 버린 장자 권은 지상에서의 자연적인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일부러 보이기 위해서 이다. 지상의 세계는 뭔가 엄청나게 잘못된 세계인데 그 잘못된 세계의 허점이 어디서 드러나는가 하면, 그저 자연적인 서열만이 장자로 결정된다는 사고 방식을 통해서 알려진다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자연적 서열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하늘의 하나님이나 둘 다 "한 번 장자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 도중에 바뀌는 식으로 장자가 결정되도록 이삭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작용하셨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는 예언을 가지고 말이다.

이런 예정된 일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세력들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예정된 뜻을 거부하고 싶은 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자가 바로 에서 이다.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장자 권 자체에 부족한 이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팥죽에 바뀌는 그런 장자 권은 아닐 것이다" 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장자 권 자체의 의의는 생각지 않고 자신의 자연적인 장자 됨에 집착한 것이다. 히브리서 12:16에서 이렇게 에서를 표현하고 있다.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에서는 도대체 장자 권에 대해 어떤 점을 오해해서 이런 망령된 행위를 한 것인가? 그것은 축복이 저주와 병행한다는 것을 무시한 겁니다. 창세기 27:38에서 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 최후의 항변을 한다. 축복 곁에는 저주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에게는 저주만 임할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예정되지 않는 자는 이런 하늘의 규칙을 경멸할 뿐이다. 그것이 곧 에서의 본색이다.

26:1-11

하나님은 자신의 맹세를 이루기 위해 성도를 불러낸 것이지 결코 성도가 노리는 바를 부수로 얻게 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 믿어 이익 보자고 교회 찾아 든 사람은 성도도 아니오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달성하시기 위해 불러준 사람만이 성도요 구원 받은 사람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삭이 살던 동네에 흉년이 들게 하신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이곳을 떠나라고 흉년을 내리셨구나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이 그렇게 생각할까 봐 미리 다짐을 해놓으신다.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말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흉년은 흉년대로 발생시켜놓고서는 결코 그 흉년 든 땅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풍년대신 흉년을 일으키신다. 이삭이 얼마나 괴롭고 살기 힘들 것인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지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그래야만 된다는 것이다. 1절에 아브라함 때에 흉년이 들었더니만 이삭 때에도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때의 흉년은 아브라함을 통한 맹세를 성취하는 환경이었듯이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흉년 때에 하나님의 맹세를 이루어내었는가?

본문 4-5절에 과연 아브라함이 그 때 뭘 했는가? 별로 한 것이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도록 몰아넣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칠 때도 마찬가지이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달리 생각을 못하도록 궁지로 몰아세운 것이다. 이점은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흉년이 들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자신이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하셨다. 달리 어떻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곳에 거하면서 이삭이 일부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철저히 지키려는 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성질대로 한다. 그 예가 바로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인 점이다. 이 수법은 아버지 아브라함도 써먹었던 바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런 비겁한 술책을 통해 오히려 아브라함이 복의 중앙에 존재하는 인물임을 사방에 널리 알리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속으로 이끄시는 맹세의 작업이다.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삭은 그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자신을 살리는 최선의 방도를 강구할 뿐이다. 그 어떤 윤리적, 도덕적 기준보다 먼저 앞선 것이 그에게 있었다. 살아 남고 보자 하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남을 때 하나님의 맹세도 산다고 본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맹세로 인해 자신의 것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분명코 자신과 그 가족이 살아 남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타인의 회개는 결코 자신의 회개로 이어지는 법이 아니다. 타인의 실수도 타인의 경험에 머물기에 언제든지 본인의 실수로 재현될 수가 있다. 남에게 교훈을 배운다는 것으로 곧 자신의 본성으로 달라지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육한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행위의 밑바탕에는 "무조건 살고 보자" 정신이 먼저 자리잡고 있는 이상, 외부에게 주입되는 그 어떤 교훈도 잔소리에 불과하다. 이삭은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순종하며 살지만 그 땅에서 사는 태도는 자신의 본성을 작용시켜가면서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자기 아내가 너무나 아리따웠기 때문에 자기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 되는 자기 목숨을 노리는 일도 미리 예상할 수가 있었다. 만약 어떤 자가 자기 아내 리브가를 탐내어 강제로 아내 삼으려고 한다면 아내는 아내대로 살아 남을 수 있고, 자기는 오빠라는 신분이 되어 또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부부는 남매로 위장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나님은 맹세의 인물 앞에 도덕적이고 정의를 부르짖는 인물과 마주치게 하셨다. 그는 그 지역의 부족장인 아비멜렉이다. 이삭의 부부가 남매가 아니라 부인인 것을 그는 발견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맹세의 내막을 밝혀주기 위해 하나님의 맹세와 인간의 정의감을 직접 마주치게 하셨다. 정의감을 갖고 있는 아비멜렉은 이삭의 잘못을 지적한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정의가 이삭 쪽에서 아니라 아비멜렉 쪽에서 성취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 맹세의 본질은 인간들의 윤리적 정의감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삭이 지금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삭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보호 받고 있는가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삭의 처신이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볼 때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철회되거나 취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랑의 내막을 알아야 했다. 인간의 정의감에서는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삭의 처신술에서도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이삭을 데리고 이룩하시는 그 맹세로 인해서만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못난 이삭, 못난 아브라함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자신의 사랑의 실체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꼭 인간들의 윤리적, 도덕적 감성과 마주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 여부에 따라 신의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이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이삭의 나름대로 살아 남고자 하는 근원적 본성을 통해서 수정 받아야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얻어낼 만한 것을 얻어내어서 그것으로 우리의 생존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시 그런 것을 바라고 교회 나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관리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다. 성도는 하나님 사랑의 보호 하에서 사적으로 얻고자 하는 그 어떤 이익도 보지 못할 것이다. 진정 성도라면 단지 사랑, 이 사랑을 알도록 인도될 뿐이다.

26:12-22

이삭에게 내려진 복을 하나님이 이 지상의 인간이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뜻과 본질을 보여주는 통로라고 봐야 한다. 흔히 생각하기를, 이삭도 복 받고 아브라함도 복 받고 야곱도 복 받았으니 우리도 동일한 복, 즉 소 떼가 많아지고 양 떼가 많아지고, 재물이 늘어나고 노비도 많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이삭처럼 되려고 하지 말고 이삭을 관리하시고 인도하신 이삭의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을 믿지 말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복을 주심으로서 그 복을 둘러싸고 그 동안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불신 세계의 정체를 들추어내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관리할 때는 각자의 형편에 맞도록 복을 주시는데, 그 내려주신 복으로 인하여 그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적이 나타내는 계기로 하나님은 삼으시는 것이다.

이삭이 살던 땅은 대단히 흉년 들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려워하는 때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삭의 농산물은 무려 백배나 증가하였다. 결코 이삭이, 주위 종족들의 자존심을 꺾어 놓기 위해 자기에게만 특별조치 해달라고 요청하지를 않았다. 그냥 하나님이 이삭을 데리고 사용하시는 것이다. 난데없이 수확물이 100배나 증가된 자로 등장되게 하셨다.

주위의 사람들이 이삭을 그 지역에서 추방하고자 했다. 그것은 본문에서는 시기했다고 되어 있고 미워해서 그렇다고도 했다. 이삭에게 난데없이 복이 내려오지 아니하면 이삭과 그들 사이에 하등의 문제가 발생될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인해 이삭은 이제 그 동네 사람들부터 기피인물이 되어 버렸다. 왜 사람들은 이삭을 미워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 깊은 내막은 신약 때 와야 알 수 있다.

마태복음 8:28-34에 예수님과 관계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하나는 마귀 들린 혹은 마귀가 나오고 다른 한 무리들은 마을 사람이다. 마귀와 예수님과의 사이에서는 이 세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관계이지만, 마을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는, 모든 것을 양적으로 따지는 이 세상의 겉 모습을 보여주는 관계가 된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귀신 들린 청년에서 악한 귀신이 나갔느냐 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내 돼지가 저 예수라는 자 때문에 다 잃어버렸다" 는 것이다. 따라서 그 예수가 계속 우리 동네에 있는 한 자기네 소유물에 손해가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삭에게도 그 동네 추장이 와서 자기 동네에서 떠나기를 요구한다. 본문 16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삭이 갖고 있는 질적 가치를 모른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들 앞에서 백배나 소유가 증가하도록 하는지 이유를 모른다. 이삭은 그들의 요구대로 그 지역을 떠나 넓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우물을 판다. 그랬더니 물이 나온다.

그러자 그 지역 사람들이 또 따라와서는 그 우물은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 그래서 첫 번째 우물 이름이 '다툼' 이다. 이삭의 가족은 다시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에서 거기서 우물을 팠더니 또 물이 나온다. 그러자 이번에도 그 우물에 탐을 내면서 쫓아와서는 자기 우물이라고 우긴다.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대적함' 이라고 짓게 된다. 이삭 가족은 다시 다른 지역에 가서 우물을 파서 그 우물 이름을 '장소가 넓음'으로 짓는다. 이삭의 복이 가는 곳마다 이삭이 받은 복으로 인하여 다툼이 유발되고, 그래서 원수가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결국에는 그것으로 인해 이삭의 정착지가 예상외로 크게 넓혀짐을 알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이삭을 인도하실까? 그것은 이삭의 복이 지니고 있는 질적 요소, 즉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식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만약 소유만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 같으면 이삭이 느꼈던 '장소의 넓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보다 쉬운 예가 창세기 39:19-23에 나온다. 우리가 요셉 본인이라고 생각해 보면 진정 우리가 생각하는 '만사 형통' 은 오직 하나뿐일 것이다. 다름 아닌 옥에서 나오는 일이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복을 주시되 그런 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옥에는 그대로 갇히게 하시고 단지 그 감옥 내에서 요셉의 활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편하도록 조치하시면서 그것은 '만사 형통' 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자기 생존에만 연관해서 복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만사 형통' 에 대해 화날 만할 것이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무슨 복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복의 본질은 우리들로 하여금 복이 갖고 있는 그 내막의 '자리를 넓히기' 와 관련 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의 희생이 과연 복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복이 갖는 본질을 넓게 보느냐와 관계이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소유물만 늘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과 함께 있음' 그 자체에 있음을 알게 하게끔 생각의 폭을 넓히는데 있다. 물론 이러한 복이 가는 곳에는 가는 곳마다 다툼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원수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성도로 하여금 "우리가 거할 자리가 참으로 크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26:26-28에 그 지역 사람들은 자기네들에게 없는 것이 이삭에게 있음을 알았다. 단순히 늘어난 재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 그 자체였다. 복의 이런 질적 요인으로 인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직도 있음이 파악된다. 마태복음 10:34-36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복을 받은 사람은 불신자라는 새로운 원수들을 불러내는 계기가 된다. 심지어 자기 식구라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큰 복이다.

27:1-4

죽기 전에 축복 권을 자기 맏이에게 전달하는 것은 당연히 복의 근원자로서 해야 될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켰으니까. 그런 당연한 행위를 하는 그 와중에서도 이삭은 본인도 모르는 가운데 본인 중심주의적 사고가 그의 행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을 주겠다, 혹은 복을 주세요 라고 요구하는 인간의 행위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자기 뜻에 장악된 채 움직이게 되어 있다. 리브가와 야곱의 행위 속에서 역시 이런 취지가 작동한다.

이삭이라는 인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은 축복 권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가 축복하면 무조건 축복 된 인물이 되고, 그가 저주하면 이유없이 무조건 저주의 인물이 된다는 점을 리브가와 아들 야곱은 인정했다. 이들 모자는 복 자체에 대해서 아버지 이삭처럼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즉 축복 권을 어떤 사물처럼 다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가오는 그 축복의 길목을 노렸다가 그 축복 덩어리를 가로챌 수 있는 대상으로 본 것이다.

복의 능력이 이삭에게 있으니 이삭만 속이면 복의 능력은 그 어떤 외부의 간섭도 받지 않고 복도 변형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자기네들 손아귀에 넘어 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일단 나중에 들통나도 이미 복이 자기네 손아귀로 들어왔으니 아무리 나중에 취소해도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리브가와 야곱은 이삭을 속이기 위해 모든 수완을 다 발휘한다.

이삭은 이미 복을 맏이 에서쪽으로 밀어주기로 마음 먹고, 에서와 야곱의 차이 나는 조건을 가지고 복을 전달하기로 했다. 그 차이란 에서는 사냥을 잘해서 별미를 만들 줄 안다는 것이요 또 온 몸에 털이 많이 나 있다는 것이다. 이삭은 단지 외형적의 차이만으로 야곱과 에서의 차이를 생각한 것은 애초에 큰 잘못이었다. 근원적으로 다른 차이가 난다는 점을 아버지 이삭은 알지 못했다. 리브가와 야곱은 이런 이삭이 제시한 차이성을 쉽게 흉내내어서 극복할 수 있었다. 이미 이삭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체의 한계를 극복 못한 이삭이나, 이런 신체의 한계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속이면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리브가와 야곱도 모두 진정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에 있었다.

복이란 인간이 달라고 해서 비로소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그리고 인간은 전달한다고 해서 비로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복 받기로 작정된 자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이 점에 대해서 이삭은 알았기 때문에 이미 자기가 내린 축복 권을 나중에 철회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이삭 자신을 속이도록 허용하면서까지 복이 돌아갈 자에게만 복이 돌아가도록 조치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복의 실체는 디모데전서 6: 7-8에 성도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무소유적으로 계속 살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세상에 올 때 비록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성도의 존재 자체가 은혜요 축복이다 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축복을 달라고 해서 그것으로 자기를 덧칠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알게하시고자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이삭의 가정에 야곱을 나중에 태어나게 하고,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이삭에게 에서의 별미를 찾게 만들었고, 바로 이런 점을 알게 하기 위해 집요하게 야곱으로 하여금 장자의 축복 권에 탐을 내도록 했고, 바로 이런 점을 알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리브가가 남편을 속이도록 허용하신 것이다.

흔히 축복이란, 지상의 인간이 천상의 신에게 새삼스럽게 요구할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보지만, 그러나 이런 마음이 달라져야 한다. 창세기 27:27에서 이삭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보여준다.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이삭은 아들의 내음 자체를 복의 산물로 본다. 야곱이라는 아들 존재 자체가 하나님 복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마치 이삭 본인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 만들어낸 작품이요 생산물이다.

에서의 잘못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사냥해서 나중에 집에 돌아온 것밖에 없다. 돌아온 것은 저주였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미 축복 받기로 예정된 자에게만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 죄가 바로 에서의 한계요 무지요 어두움이다. 복은 지킨다고 비로소 자기 소유가 될 정도로 소유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27:27-29

29절에 보면, '주' 라는 용어가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 떨어지게 한 축복의 내용은, 야곱이 '주' 의 위치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은, 이 '주' 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야곱이 아무리 거부가 된다 할지라도 야곱을 저주하는 자에게 실제로 하늘의 저주가 떨어지지 아니하면 야곱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다. 정말 '주' 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인물이 된 것, 그것이 바로 축복의 중심 인물이다.

이 주의 자리가 어떠한 지가 역시 29절에 나오는데 그 내용이 복의 당사자인 야곱에게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야곱에게 있어 형제는 오직 에서 한 사람뿐이다. 따라서 '형제들' 이라는 말은 야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네 어미의 아들들' 이라는 말도 어울릴 턱이 없다. 창세기 25:23에서 예언은 이삭의 부인 리브가가 임신했을 때,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들의 장래 운명에 대해 이미 결정되어 버린 사실에 관한 것이다. 야곱과 에서의 운명은 단지 그들 당대에 끝날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탄생될 국가 단위에서는 계속 이어질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을 멀리 내다보는 상태에서 이 두 아기들은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예언에서 특이한 점은, 먼저 된 자가 먼저 되고 나중 된 자가 나중 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두 민족 사이에는 주인과 종이라는 어떤 서열이 확립이 되는데 결코 큰 자가 계속 주인이 되고 작은 자는 계속 종이 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도리어 대역전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식이 된다는 것이다. 기존의 인간들의 마음 가지고서는 잘못된 축복과 저주 관을 그대로 간직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잘못된 축복 관은 곧 잘못된 저주 관이다. 축복, 축복을 원하지만 실제로는 계속 저주, 저주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다.

잘못된 축복 관은 축복의 중심 인물인 '주' 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주' 의 모습은 야곱에 의해 비로소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의 내용이, 야곱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야곱에게는 '형제들' 이라는 다수의 형이나 동생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축복의 내용대로 과연 하나님이 제시한 축복 중심인물은 어떤 형태의 ‘주’로 등장되는 점을 알아보기 위해서 에서의 후손과 야곱의 후손을 살펴봐야 한다. 창세기 36:1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그 뒤의 말씀은 에돔이라는 나라가 어떤 후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는가를 말해준다.

같은 취지로 적은 창세기 37:2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야곱의 약전' 이라고 해놓고서는 대번에 요셉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당사자는 분명 야곱이다. 따라서 야곱은 그 축복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이 성취된다. 야곱의 인생에서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을 달성하게 한 실무자는 야곱이 아니라 놀랍게도 요셉이라는 아들이다. 이 요셉에게는 숱하게 많은 형제들이 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창세기 42장에서 이 형제들이 같은 형제인 요셉에게 절을 한다. 그것에 대해서 요셉은 사태를 이렇게 보고 있다. 창세기 45:9에서,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주' 가 되게 하신 것이다. 요셉이 이런 일생을 처음부터 '주' 다운 길을 간 것이 아니다. 요셉이 이상한 꿈을 꾸니까 형제들은 무척이나 그를 싫어했고, 급기야는 그를 미운 존재로 간주해서 애곱의 상인에게 팔아 넘긴다.

그러나 계속되는 꿈이 요셉의 운명을 조정한다. 요셉이 연이은 험난한 인생의 길을 거쳐서 결국에서 '주' 다운 위치에 오른 것은 그 배후에 야곱에게 이미 내려진 축복의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비로서, 형제들의 주가 되고 어미의 아들들이 요셉에 굴복한 것이다. 사실은 요셉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굴복한 것이 된다. 에서의 후손의 나라인 에돔이 에서의 저주 요소로서 구성된다면 앞으로 야곱에 의해서 세워질 야곱의 나라, 이스라엘은 이런 요셉의 일생이 보여준 '주' 요소로서 세워진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된 자를 먼저 되고, 나중 된 자를 나중 되는 상식 선에게 이들 가족을 인도하지 않으신 것은, 인간들 속에서 잘못된 축복관념과 '주' 관념이 이미 장악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하신 조치이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메시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형편없다. 모든 이들이 싫어할 만한 모습으로 메시아는 등장한다. 메시아가 수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마치 요셉의 길을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이 모든 운명을 '주님' 으로서의 당연한 면모임을 알려준다. 우리들이 집어 넣은 탐욕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지금이나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무시를 당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재 우리들이 노리는 축복이 모두 우리의 욕심의 산물이라면, 진정 축복 된 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뿐이다. "저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이런 자가 되지 아니면 저주 받는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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