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주석
창세기 22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22장
창세기 4장에서 발견되듯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정상화는 하나님이 열납 하는 제사에 의해 표현된다. 관계의 정상화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복으로 주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아들 이삭을 제사의 제물로 요구할 때에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라는 입장에서 기꺼이 순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제사를 염두에 두고서 이번 제사를 아브라함의 신앙을 테스트하는데 사용하셨다. 신앙에 대한 테스트란 그것으로 신앙의 본질을 확정시키기 위한 사전 조치인 것이다. 따라서 이번 시험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참된 신앙과 유사신앙을 구분하는 절대기준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한 인간으로서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 둘의 비중을 달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대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무엇을 못하겠는가.
신앙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응답의 표시라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어떤 심정으로 이해했을까? 그것은 자식을 자기와 격리시키되 영원히 격리시킬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왜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잡으라는 무섭고 비정한 일을 시켰을까?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마음을 그 속에서 전달하려는 의도 였음을 분명히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아픔 속에 같이 참여 시키려는 시도로 받아드렸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 하나뿐이기에 그것 잡으면 代가 끊기는 위험성을 안고 있는 이 시도는 계속해서 밑바닥으로 무겁게 주저앉는 절망을 야기한다. 이 극단적인 절망은 하늘과 세상과의 절대적인 단절의 지역을 만드는 것이다. 그 지역을 신앙인은 통과해야 한다. 그 어느 한 가닥도 이어짐이 없는 지역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그곳을 지나가도록 한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죽음을 경험한다. 그것은 영원한 단절이었다.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은 갈수록 멀어짐을 경험하듯이 자신은 하나님 계신 곳에서 가장 먼 위치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그 모리아 산은 사랑하는 아들과 영원히 헤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 안으로 던져 넣는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아들의 모습에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며 만약 그런 내용을 담아 놓고 있지 않다면 그 신앙은 여지없이 가짜 신앙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을 대신하여 수양 한 마리를 근처 숲속에 감추어 놓으셨다. 여호와 이레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을 사용할 때 먼저 염두에 둘 것이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약속에 묻어두고 깊은 수렁과 버려짐 속에서 하나님의 다음 행동을 대기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로서 여호와를 믿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근원이 되는 제사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분의 제물로 온전한 효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수양을 대신하여 살아난 이삭의 앞으로의 운명 안에는 죽은 자도 살리는 약속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앞으로 약속의 자손이란 단순히 혈통의 자식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까지도 함유된 자손을 두고 말하게 되었다. 어찌하든지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기 위해 부지런히 십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던 바울의 순교적 일생을 생각해보면 신앙이 무엇인가 분명 등장할 것이다(빌립보서 3:9-14).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배웠지만 예수님은 또한 진정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완성자로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염두에 둔 일생일 것이다.
교회는 가짜 신앙을 남발해서는 아니 된다. 그 가짜 신앙이 교회에 차고 넘침으로 참된 신앙이 교회 내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앙과 종교세계에 대한 취미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과한 집착력과 열심이 참된 신앙을 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목숨을 묻히느냐로 결정되어야 한다. 이때만 자신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표출된다.
22: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는 과연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경외하는지 아니하는지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이다.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 받은 성도 자체를 탈락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험하시는 것은 아니시며 자신의 욕심을 정당화하려는 자에게는 하나님은 마치 탈락을 위한 시험을 하시는 분으로 보일 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성도들에게 시험을 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구원 받았음을 보다 확실히 해주기 위함이다.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 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며" 라는 대목이 나온다. 성도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식으로 교제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으로 버티기 힘든 각가지 유혹과 시련 같은 것이 있다. 그 실체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이미 당하셨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물으신다.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와 세상이 주는 압박감 이 둘 중에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의 위력이 이 악한 세상 속에서 실감을 느끼는 것은 세상에서 오는 각가지 시험과 유혹이 강렬한 때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늘 시험될 만한 세력을 밀려오게 허락하심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진정 구원된 자임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인간이 바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친히 장만한 것에 우리가 초청 받고 초대 받음으로 구원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둘 다 하나님의 친히 벌리시는 작업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다듬어 나는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지배하고 장악하시며 다루고 계심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고자 하시는 '하나님 경외'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성보다 우선해야 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통치성에 대한 신뢰이다. 성도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따로 받아서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추가적 복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지금도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통치를 더 즐거워해야 한다.
22:15-19
17절에 '대적의 문'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의 원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세력에 대해 가만 보고만 있지는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이 원수들이 노리는 것은 하나님과 자연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인간을 자기 세력 하에 둠으로써 이 자연 세계 자체를 반 하나님 세력화 하려고 하는데 있다. 따라서 과연 하나님이 어떤 인간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하나님의 일을 수행케 할 수 있는가?
15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다고 되어 있다. 두 번째 나타나신다는 말은 첫 번째 나타나셔서 지시하는 일이 결코 허사로 끝맺어질 것이 아니라 이제 두 번째 나타나셔서 제시하는 맹세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일로 말미암아 두 번째 맹세가 효력을 제대로 낼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 주신 맹세의 내용은 악의 세력에 대한 토벌이다.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이겨내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확산된다는 것이다.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 받아야 한다. 이 인정 받음에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맹세가 담겨 있어야만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한 역할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역할을 받은 자이다. 모세는 그냥 시내산 위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역할은 이 땅에서 아들을 바치는 역할을 했다. 물론 두 분다 성경에서 '순종했다'고 되어 있다. 그 순종은 인간들이 하나님께 받을 선물을 미리 내막을 알고 의도적으로 한 순종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순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하나님께서 지시한 어떤 인간의 역할이 드러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순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택하거나 또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이나, 또 아브라함의 순종 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3:17에는 모세가 한 역할의 의의가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또 주셨다. 아브라함에게 준 원칙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갈라디아서 3:21-21에 보면 보다 상세한 이유가 나온다. 하나님께서 그저 주신다고 해서 다 구원되는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된 선물은 먼저 이 지상에서 진정한 의로운 제사에 의해 죽음마저 극복한 방침이 있음으로 해서 그것만을 내용으로 한 선물이 진정한 구원의 선물 이다.
이 선물의 참됨을 말씀하시기 위해 또 다른 선물을 모세를 통해 보내셨는데 그것은 율법이다. 이 율법으로 인해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의 행함으로 도저히 구원이 가능치 않음을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율법으로 인해 모두를 죄 안에 가두어 두었다는 말씀이 이런 뜻이다. 우리가 순종한다고 해서 그 순종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아는 상태에서 참작하여 순종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 모든 뜻을 알고 순종하신 분은 따로 있다. 바로 예수님이다.
누가복음 22:42에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바로 이런 순종만이 진정한 순종이다. 이런 순종으로 인해 이 지상에 의로운 백성이 출현했고 이들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악을 지배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얻는 그룹들이 된다. 결코 우리 자신들의 순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과 연결되도록 조치하신 하나님의 공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