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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울산 9월 29일 출 4장 1절 이스라엘 그릇에 담겨지는 낯설은 언약의 침투강의출애굽기

울산 9월 29일 출 4장 1절 이스라엘 그릇에 담겨지는 낯설은 언약의 침투

이름 : 관리자(IP:220.81.41.193)

090929 이스라엘 그릇에 담겨지는 낯설은 언약의 침투

관리자(IP:220.♡.41.193)

09-09-30 07:39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울산/울산090929a출4장1절a.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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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41.193)

09-10-14 15:39

울산090929a출4장1절a

20090929a 울산강의-출애굽기4장1절
(강의:이근호 목사)

이스라엘 사람은 다수죠. 많다, 우리말로 여럿. 다수의 사람을 이쪽 동네에서 이쪽 동네로 옮길 때에 A란 지점에서 B란 지점으로 옮길 때에 여기 만약에 열 명이 있다 합시다. 젓가락으로 한 사람 끄집어서 여기 집어넣고, 한 사람 끄집어서 여기 집어넣고 이런 식으로 집어넣을까요? 아니면 그 중에 한 사람을 끄집어 당기면 나머지는 따라오는 방법을 사용할까요? 어느 것이 편리하지요? 여러 사람을 이쪽 동네에서 이쪽 동네로 옮길 때에 한 사람, 한 사람 되는 것보다도 한 사람 인도해서 우르르 쫓아가면 되겠지요.

그런데 현재 이쪽 동네라 했는데 A란 동네가 애굽이라면, B라는 동네로 옮기는데 문제는 B라는 동네가 없다는 겁니다. 이 자체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건집니까, 이스라엘을 건집니까? 애굽 사람들이 보기에 히브리인들이 나가죠. 이 사람은 뭐냐 하면, 히브리인들로 나갔는데 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스라엘은 없어요.

다만 애굽에서 히브리인들 건질 때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은 애굽에서 벗어났다, 나왔다, 탈출했다 이것만 염두에 두었지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 된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어요. 이 히브리인들 중에서 어떤 한 사람 봅시다. 가족들이 있다. 부인하고 아들 둘이 있다 합시다. 이럴 때 이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에서 살던 네 식구가 딴 데 가서 사는 네 식구 이기를 원하지, 우리 식구가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그들은 안중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되려면 여기에 ‘언약’이 투입돼야 돼요. 슬슬 어려워지기 시작하죠. 애굽에서 살 때 맨 몸, 그냥 보통 몸, 히브리인들도 보통 사람, 그냥 보통 몸.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너희들이 내 언약을 지키면 내 백성이 되리라.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여기는 뭐가 개입되는가? 빨간 걸로 쓸게요. 언약이 개입돼요. 언약이라는 것은 애굽에서 나왔던 히브리인들은 몰라요. 자기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사전에 언약이란 걸 들어본 것도 아니고 모른단 말이죠.

어서 오세요. 멀리서 오셨네. 멀리서 왔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할게요. 다수가 전체를 이동시킬 때 한 사람, 한 사람 빼내는 것보다도 어떤 특정 인도자를 따라서 우르르 좇아 나오는 방식을 하나님은 사용했다 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약간 어렵기 때문에 보류하고 이 이야기 먼저 했습니다.

왜 이게 어렵냐 하면, 다수에서 한 사람을 지정해서 이 사람 따라 나올 때 문제는 각자 열 명이라면 이 한 사람을 지도자로 간주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가 또 남아 있어요. “어이, 가자. 힘들지.” “그래 나가자.’\” 이렇지 않습니다. “너, 뭔데? 너 누구야. 도대체. 너 같이 대장질하는 사람들 우리 중에 한둘이 아니야. 뭐야 니?” 그렇게 나오죠.

그런데 한 사람을 심어놔도 따라 나온다는 보장이 없는 거예요. 출애굽기 4장 하는데 12절에 보면,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절에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저, 지도자 제 취향에 안 맞습니다. 안할 랍니다. 저보다 말 잘하고 재주 있는 사람을 보내소서. 할 때 여호와께서 분노하시죠. 분노해서 가라.

그래서 내 백성에게 보낸다 할 때 이 사람들과 모세 사이에도 삐거덕거리죠. 안 맞으니까 보내봤자 따라오질 않을 거고. 그래도 약속의 땅에 해야 되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지난 시간의 이야기. 애굽에서 히브리인 될 때에 그들이 만약에 네 식구가 있다면, 문제는 이 네 식구가 이스라엘 된다는 생각은 안중에 없단 말이죠. 왜냐? 이스라엘 될 때는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가미되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언약에 예속이 될 경우에만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가미될 때 나온 사람들이 언약을 아느냐 말이죠. 몰라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애굽 생활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건 굉장히 낯설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히브리인들에게 주기 전에 모세한테 주는 겁니다. 모세와 언약이 만날 때 과연 이게 얼마나 언약이라는 것이 낯설고 특이한 것이냐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하려고 하는 출애굽기 4장 1절의 세 가지 기적입니다.

일 번 기적이 뭐냐? 지팡이 던지니까 지팡이가 되었다. 이거는 기적이 아니죠. 지팡이를 던지니까 지팡이가 아니고 뱀으로 변했지요. 그러면 뱀 되었던, 이런 게 강의할 때 제가 힘든 거예요. 뱀 되었던 지팡이입니까, 지팡이 되었던 뱀입니까? 골치 아픈 이야기입니다. 지팡이가 본질이에요, 뱀이 본질이에요? 장담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거는 장소에 따라 달라요.

지팡이 되었다가 뱀 되었다가 도로 집으니까 지팡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지금 모세는 언약을 모르잖아요.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냥 모세에게 언약 아는 모세로 바뀌겠지요. 그러면 그냥 모세와 언약 아는 모세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모세가 갖고 있던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로 됨으로 말미암아 모세에 어떤 변화가 주어졌다는 거예요.

주께서 찾아올 때만 해도 자기가 던져 봐도 지팡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와서 던지라 할 때 던지니까 뱀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뱀이 되었던 지팡이를 다시 쥐고 있다는 이 말은, 이제는 지팡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룰 때는 뱀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지팡이 들 때 뱀을 쥐고 있느냐? 라고 말하면 안 되고, 모세가 쥐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쥐고 있다

그래야 이 지팡이로 홍해를 살짝 대니까 홍해가 갈라지고, 이것으로 반석을 처음에는 치니까 물이 나오고, 나중에서 대지마라 했는데 그냥 가리키기만 했는데 대서 나중에 문제가 되지만. 그리고 출애굽기 27장 같은 경우에 아말렉이 왔을 때 지팡이를 높이 드니까 아말렉이 물러가잖아요. 그러면 아말렉 족속이 왜 쳐들어왔어요? 언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다양한 재주, 앞으로 언약을 통해서 하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다양성을 뭔가 이 인간이라는 역사 속에 남길 필요가 있거든요. 이때 어떤 인간을 쓰느냐 하면, ‘나 안 갈래요.’라는 인간을 써요.

다시 말해서 이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손톱만큼도 제 능력은 없소이다’ 하는 것이 이미 발각된, 확인된 그런 사람들 손에 지팡이를 쥐고 주께서 보냄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언약에 준해서 일어나는 일이지 절대로 모세의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하고는 상관없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지난 주일오후에 그런 설교했는데 아말렉 전투의 특징이 뭐냐 하면, 칼의 유무가 아니라 지팡이의 유무입니다. 지팡이가 내려가 버리면 지팡이가 안 보이잖아요. 지팡이가 올렸다가 내려가 버리면 전쟁하는 산 위나 산 밑이나 사람들 눈에는 지팡이의 소멸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밀린다 할 때 지팡이가 올라가니까 갑자기 이스라엘이 승자가 되고 아말렉은 후퇴하게 되죠. 그때 결국은 등장하는 지팡이의 운명과 새롭게 만들어질 언약의 나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지팡이에, 하나님의 임재에 종속되죠. 속해버린 거예요.

미리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종속돼버리면 자동적으로 여기에 있는 모든 이방나라가 혼자 있어도 여호와 말고 다른 신에 종속된 걸로 하나님이 간주해버립니다. 어려운 말이다. 우리가 신 같은 것 다 때려치우고, 명절날 보면 집안사람들 모이잖아요. 그냥 고스톱 치고, 차례 지낼 땐 별 의미 없는데 종교 이야기 나오면 문제가 커요. 이단 소리 나오고 어느 지경까지 갈지 모릅니다.

그냥 신은 없고 사람끼리 모이면 다 좋아요. 그런데 이쪽에서 복음 이야기 나오고 하면 졸지에 저쪽은 지옥 간 사람 돼버립니다. 자기 신은 일을 안 해도 한쪽이 복음에 속해버리면 나머지는 복음에 안 속한 사람이 돼버린다고. 한쪽이 그리스도 안이 돼버리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밖이 돼버립니다.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했거든요. 사무엘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 권력구조에 공백이 생겼습니다. 그때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이냐 그 문제 있을 때에 갑자기 아말렉이 쳐들어왔어요. 미국 서부의 넓은 광야에 말둑 막는 놈이 임자라고 아말렉이 쳐들어오니까 아말렉을 다루는 사람이 그때부터 사무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권력자가 되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그러면 아말렉은 왜 쳐들어왔어요? 이미 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진행한 권력자가 지금 상주하고 있음을 저쪽이 쳐들어와야 아는 거예요. 아말렉이 쳐들어와야 안다고.

애굽에 있을 때 히브리인들과 바로 사람들은 신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통 인간들의 싸움인데 여기서 여호와가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와 다른 신의 군대와의 전투로 의도적으로 몰아가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두 분 집사님하고 이야기했지만 세상이 나 혼자 조용히 예수 믿고 살면 되겠지. 물론 우리의 아주 소박한 소망이에요. 근데 만약에 주변에서 가만 안 두면 어떨까? ‘너 십자가 주장한다면서?’ 이렇게 난 가만있는데 주변에서 그렇게 나올 때는 어쩔 수 없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어요. ‘그래. 나는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다.’라고 할 때는 가만있는데 ‘너, 이단이지.’ 하고 나오고. 네가 뭐 잘못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데려갈 때는 가만두질 않습니다. 꼭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이 뭐냐 하면, 언약 안이냐, 언약 바깥이냐 하는 사건들이 항상 줄기차게 가만있어도 찾아와요. 부부싸움해서 기분 나쁜데 갑자기 여호와증인이 찾아오듯이. 가만있는데 뭔가 와요.

우리는 이스라엘 안 되고 싶어. 우리는 죽어서 천당 가지 지금 이 땅에서 주의 복음 전하고 이런 것 하기 싫어. 사명 감당도 귀찮아. 그런데 가만 놔두질 않아요. 꼭 일이 벌어져. 그게 뭐냐? 우린 놀지만 하나님 언약은 쉬질 않는다.

이것 꼭 적어놓으면 좋겠는데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전도 방식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답답한 건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답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전하지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무엇을 전할 것인지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전도 방식은 하나님이 다 정해서 알아서 합니다.

계속해봅시다. 첫 번째 이적이 뭐냐? 지팡이를 던지니까 뱀이 되고, 뱀을 도로 집으니까 지팡이 됐다. 이로써 모세는 벌써 이스라엘 전체가 종속되기 이전에 모세는 언약에 종속됐죠. 그러면 나중에 모세가 지도자 되고 난 뒤에 여러 명을 당길 때는 모세의 능력이 아니고 언약의 능력이다. 그 언약의 능력을 출애굽기 4장 5절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능력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언약의 내용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뻔하죠. 모세에게 찾아왔던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되게 하는 내용은 벌써 확정적이죠.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고, 없던 이삭을 생기게 만들고, 야곱을 기어이 복 받는, 에서를 젖히고 장자 되게 하는 그 능력이 고스란히 이스라엘 국가에 주어지겠죠.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데 그 ‘전능하신’의 의미가 뭐냐? 사람들이 요구하는 걸 채워주는 게 아니고 자신이 약속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것을 그 어떠한 장애나 인간들의 방해나, 우리들의 나태와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성사시키는 그런데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인간적인 힘으로 이스라엘을 유지하려는 껍데기고, 그 속에 뭐냐? 인간들이 어쭙잖게 어설프게 자기 식대로 이스라엘 꾸미려는 그 속에서도 기어이 진짜 엑기스 같은 이스라엘을 해내시는 하나님의 열심. 그 두 가지를 앞으로 찾아내야 되는 거예요.

그 두 가지가 일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기에 들뢰즈의 철학이 나온데 차이성. 진짜 어려운 거예요. 차이라 하는 것은 균열이거든요. 그러니까 늘 균열이 일어나줘야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쪼개지면서 이쪽은 A고 이쪽은 B라면 쪼개진 틈 사이에서 인간들이 예측도 못했던 새로운 언약이 이 둘 사이를 마그마처럼 올라와서 지표면을 적혀버리죠.

새로운 언약이 올라오면서 낯선 언약이 올라오면서 그들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이 뭔가를 재정립할 수 있는 그런 길을 갔습니다. 이게 되풀이 되는 것이 사사기. 사사기 잘 아시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해줬더니만 처음에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다가 살만 하니까 ‘내 식대로 이스라엘 유지시키지.’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을 보내서 종살이 만드니까 처음엔 자기 힘으로 견디려하다가 도저히 못 참으니까 부르짖잖아요. 그 부르짖는 방식이 애굽에 있을 때 바로의 압제 때문에 부르짖는 그 원칙을 약속의 땅에 되풀이, 되풀이 계속 되풀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이란 되풀이, 다른 말로 반복. 계속 반복됩니다.

반복하는 그 방식이 하나로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사람이 하나님께 은혜 받는 방식이 하나로 확정이 돼버리면 그걸 우상화시킵니다. 마치 모세가 지팡이를 우상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바빠요. 기적은 기적대로 새로운 걸 보여줘야 되고, 두 번째, 새로운 것이 ‘아이고 좋구나’ 하고 붙잡고 그걸 우상화되는 것도 피해야 되고. 주시고 내 것이라 할 때는 부수고, 부수니까 못 살겠습니다 하면 또 주시고.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하면 또 부수고.

특히 자식 키울 때 부모가 이제는 자식 때문에 애 먹을 것 없을 것이다 하는 그 순간 애가 학교에서 사고치고, 아프고. 이만하면 됐다 싶으면 또 있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 인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복 받은 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언약이 개입하니까 그렇게 흔들기를 계속 해주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봅시다. 두 번째 봅시다. 모세가 지팡이 던져서 뱀이 되었고, 뱀이 지팡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뱀도 포함해서 여러 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런 기적을 할 수 있다는 뜻이고. 지금도 실제로 열 가지 환란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두 번째 보면, 첫 번째 화살표가 어디서부터 출발했습니까? 모세로부터 출발해서 도로 모세로 돌아왔잖아요.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없지요. 하나님이 누구하고 싸웁니까? 모세만 다루는 겁니다. 모세를 계속해서 마치 하나님이 함께 있을 때 모세에게 이런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모세가 지도자 같으면 모세에게 일어난 변화가 모세를 따라야 될 전체 사람들에게 언약의 변화가 그들의 몫으로 번지겠어요, 안 번지겠어요? 번질 때 그걸 누가 해석을 해줘야 됩니까? 먼저 하나님께 호되게 당했던 모세가 이쪽에 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렇다고 이야기해줘야 될 해석자 위치에 있지요.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를 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반드시 그 뒤에 뭐가 따라오느냐 하면, 계시해석자가 따라와야 되는 겁니다. 따라오면 이 사람들이 모세 말을 듣습니까, 안 듣습니까? 안 듣고 반항하지요. 반항하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됩니까? 모세가 져야 돼요. 그러니까 계시 주시고 해석해봤자 이 사람들은 기존의 애굽과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반발하고. 반발하니까 책임은 모세가 또 지고.

계시 주시고 해석하고 반발 책임은 지고. 이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시는 분이 모세 말고 장차오실 예수님 아닙니까. 항상 요셉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고, 엘리야와 예수님을 비교할 때 거기에 뭘 집어넣어야 하느냐 하면, 누가 엘리야를 핍박했고, 누가 모세를 핍박했느냐를 찾아봐야 돼요. 누가 요셉을 핍박했느냐를 찾아봐야 됩니다. 이걸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일찍이 선지자 속에 들어가서 장차오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미리 말씀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설명하면 결국 이름은 모세지만 모세의 요소는 어떻게 돼요? 하나님의 성취하는데 완전히 빠지겠죠. 나중에 놀라운 것은 모세마저 하나님께 반발하죠. 그러면 그 모세 대신 누가 들어가야 됩니까? 여호수아. 그래서 여호수아에요.

이렇게 되면 성경해석 층에 있어서 끝에 나오는 형식 밑에 들어가면 수많은 층들이 복잡한 층들이 같이 언약의 이름으로 위는 사건과 밑에 해석하는 사건이 병행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건뿐만 아니고 밑에 해석까지 들추어서 같이 병행시키는 그 작업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두 번째 사건 봅시다. 모세가 갖고 있는 소지품으로써 지팡이를 던졌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그 지팡이를 갖고 있으면 모세하고 그 지팡이 사이, 새롭게 달라진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이 지팡이 사이에 이게 일치가 되어야지, 분리되면 모세가 자기 지팡이 재주한 것밖에 안 되잖아요. ‘어이 내 지팡이 봐라. 뱀 되지. 신기하지.’

자기 자신의 운명을 거기에다 맡기지 못한다 말이죠. 그러니까 모세가 만약에 지팡이하고 자기 몸하고 따로 돼버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라는 인격을 보지 않고 모세의 재주만 바라보고 따라갈 가능성이 있어요. 모세가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인간이잖아요. 히브리인들도. 인간이라면 하나님의 기적이 인간 인격 속에 스며드는 그 기적도 또 필요한 거예요.

오늘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라. 십자가를 졌잖아요. 그러면 뭔 소용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없는데. 예수님이 시장통에 다녀도 아무도 못 알아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구원하려고 하면 어떻게 돼요? 예수님이 십자가만 지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믿을 수 있는 것이 우리한테 와서 우리 인격 속에 스며들어야 되잖아요. 십자가가 우리 안에 스며들려면 그때 우리는 저주 받은 문둥병 환자가 돼야 되고, 하나님께 저주 받아 마땅함이 등장해야 될 것 아닙니까.

두 번째 기적이 뭡니까? 모세는 문둥병 환자가 되도 살아있는. 모세의 손이 문둥병 된 게 아니고 모세의 손을 품속에 집어넣었어요. 그런데 꺼내보니까 문둥병 되었다고요. 지금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 구원하는 것 맞잖아요. 왜 모세 가지고 닦달 냅니까? 지팡이하고 모세하고 일체감이 없으면 이들도 마찬가지로 모세 지팡이 재주 구경하지 그들의 인격이 되지 못하는 거예요. 모세에게 일어난 기적은 히브리인들에게 일어나야 돼요.

왜? 모세에게 온 것이 언약이니까.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니까. 그러면 야곱의 언약이 히브리인들, 집단으로 일어나줘야 그래야 모세를 포함해서 전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종속되는 겁니다. 그 종속되는 걸 출애굽기 3장에서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와서 이 땅에서 나를 섬기리라.

어떤 분이 십자가마을에 질문을 했지요. 임직식 하는데 목사들이 와서 순종하라 했는데 그런 말 꼭 들어야 됩니까? 또 두 번째 질문은, 내가 요새 장사한다고 가게 문 열었는데 주일날 되면 닫아야 되느냐고 했지요. 그때 제가 이렇게 답변했지 않습니까? 가게 문 열고, 닫고가 문제가 아니고 너무 복음 듣고 싶어서 ‘까짓것 가게 문 돈 몇 푼, 복음이 좋지.’라고 하시면 교회 가시고, 그렇지 않고 ‘가봤자 들을 것 없다.’ 하거든 가게 문 활짝 열어놓으시면 나중에 주께서 재림하실 때 두 사람이 교회 안 가고 가게 문 열어놔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그냥 버려둠을 당하는 거예요. 말씀이 인격화 돼야 돼요. 말씀이 인격화 되면 섬김이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안 오면 인간은 자길 섬기게 돼있어요.

다시 해봅시다. 진도 빨리 나가서 좋은 게 아니니까. 사람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자기 생각 아니지요.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이스라엘 됐잖아요. 이스라엘 되는 순간에 갑자기 이방사람들은 그냥 신을 안 섬겨도 졸지에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이 돼버렸어요. 그리고 이쪽은 이스라엘에게 종속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섬기고, 저 사람은 교회도 안 가고 절에도 안 가고 신이라는 것도 들어보지도 못해도 그 사람들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이 돼버렸다고요. 세상이 원래 그래요. 영원한 이치에요.

하나님께서 언약의 주체로 만들어버리면 자연적으로 그쪽은 하나님께서 버리는 이방족속이 되게 하는 게 하나님 전략입니다. 이거는 어쩔 수 없어. 가만있는 성경책 한쪽 들어버리면 들리게 돼있어요. 뒤쪽에 있는 것이 왜 드나? 왜 드느냐가 아니라 한쪽에 매달려 있으니까 들리는 거예요.

이쪽이 천국이라면 이쪽은 지옥이에요. 지옥 있으면 천국 있어요. 한 세트로 돼있다고.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있으면 지옥이 있어요. 한 세트기 때문에 천국 따로 지옥 따로가 아닙니다. 천국 못 간 사람이 지옥 가고, 지옥 못 간 사람이 천국 가는 거예요. 오랜만에 좋은 소리해서 기분 좋다. 뻔한 겁니다.

빛이라 하는 것은 뭐가 있다? 반드시 어둠이 있다는 속에서 빛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내가 빛으로 왔다는 말은 세상이 어둡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사야에 보면 나오죠.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짓고. 굉장히 난해한 말이죠. 창세기 1장, 2장에 혼돈, 누구 지었다? 이런 문제까지 나오는 거예요.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짓고.

히브리인들은 살기 편하면 되지 지금 이스라엘, 언약 아무 관심 없습니다. 관심 없든 말든 하나님께선 섬겨야 돼. 어떻게요? 섬기면 될 것 아닙니까. 안 돼. 언약의 능력이 와야 섬겨요. 내가 교회 가서 헌금 한다고 섬기는 게 아닙니다. 복음이 좋아져야 돼요. ‘미치겠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라고 복음이 좋아지는 게 섬기는 것이지 찬송 부르고 사도신경 한다고 섬기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당겨야 돼. 마음이 감사해야 돼요.

주여, 이렇게 복음 들으려고 한 것 감사합니다. 이래야 그게 섬기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만 섬기는 겁니다. 예수 이름이라는 게 새 언약 아닙니까. 새 언약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주님 섬김이 없습니다.

두 번째 기적이 뭐라고 했지요? 소지품이 된 지팡이하고 모세 사이에 일치가 되려면 지팡이에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인격화 될 때 인간 속에 스며들 때는 모든 인간은 모세처럼 문둥병자가 되고 졸지에 죄인이 됩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집어넣고 근호야 빼라. 장난이지요. ‘빨리 고쳐 주이소.’ 하잖아요. 빨리 고쳐 주이소 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빨리 고쳐달라는 것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옛날 모세를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생각이에요.

하나님은 옛날 모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것이지 내가 어떻게 다루느냐 내 용도로 사용하기 위함이지 네가 따로 나는 옛날 과거의 나, 이것 챙길 여유가 없어요. 이제부터 막무가내로 무조건 굴리는 거고 사용하는 겁니다.

빼보니까 문둥병이라. 손 집어넣어라. 그러니까 다시 성하게 됐죠. 그러니까 모세가 뭘 느낍니까? 내가 원래부터 성한 놈이 아니고 문둥병이었는데 그동안 웬 은혜를 주셔서 지금 오늘도 성하고, 내일도 성한 거예요. 만약에 모레 문둥병이라면 그건 당연한 거고. 그런데 그 다음날 성하다면 하나님의 은혜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것은 착해라, 나쁘라가 아니라 은혜를 아느냐를 묻는 겁니다. 그게 언약적 인간상이에요. 선악과는 네가 착하냐, 나쁘냐를 묻지만 언약 속에 있으면 은혜냐, 은혜 모른다 그 둘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이적으로 이적은 끝났습니다. 세 번째 있지 않습니까? 세 번째는 모세와 관련된 이적이 아니고 이러한 모세로 하여금 언약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그 바깥 환경을 모세와 및 히브리인들, 이스라엘 사람, 다른 말로 언약의 나라 만들기 위해서 행여 믿지 않거나 방해하는 게 있다면 주께서는 가차 없는 심판을 내린다는 것이 세 번째 기적입니다. 너는 하수를 취해서 육지에 부어라. 그게 피가 되었지요.

모세에게 일어난 일이 히브리인들에게 그대로 일어나죠. 지금 모세가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두 번째 기적이 뭐냐 하면, 모세는 죄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였다. 지팡이로써. 문제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심판의 대상이 된 거예요.

참 더러운 예화까지 들어야 되겠습니까만 하여튼 화장실에 오래 안 간 사람 지나가면 엘리베이터에 지나가면 방구 냄새나죠. 모세가 지나가면 무슨 냄새가 납니까? 하나님의 심판 냄새. 예수 그리스도가 관통해버리면 그 세계는 이미 종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빠서 심판 받는 게 아닙니다. 교회 안 가고 절에 안 가도 착한 사람 많아요. 양심 고운 사람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곁에 그 집 옆에 보험하는 사람 와버리면 졸지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죠. 그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어쩔 수 없어.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우리를 천사도 흠모하는 신분이라 안 합니까. 우리가 어떤 신분이냐 하면, 우리가 하여튼 존재하고, 어떤 집회라든지, 모임이라든지, 동창회라든지 우리가 명절날 모였다 하면 그 동네는 심판받는 동네가 돼요. 진짜 이거는 영광스럽다고 해야 될지, 안 그러면 아찔하다 할지 하여튼 그렇게 됩니다.

복음을 실어 나르는 수레를 신약성경에는 두 자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성전. 성전이 옮겨지면 다시 말해서 법궤가 옮겨지면 그 근처가 무슨 바다가 된다? 완전히 웃사 같은 경우에 잘못 만져서 심판 받죠. 법궤, 하나님의 새 언약을 지니고 있는 몸이 움직이면, 집사님은 교사인데, 학교에 움직이면 학교가 완전히 심판 받아버려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입을 다물고 복음을 안 전하니까 심판 안 받는 거예요. 입을 다물고 복음을 안 전하니까 사대부고가 심판을 안 받는 거예요. 집사님이 입을 벌리고 복음을 전해야 돼요. 그러면 심판 받는 거예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고, 사회에서, 직장에서 입 다물고 있으면 다같이 심판 속 입장이에요. 누가 입을 벌리면 그야말로 양과 염소가 나눠지지요.

이스라엘이 왜 생겼느냐?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이방족속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보낸 거예요.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이 땅을 악하다고 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요한복음 7장에. 세상을 죄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우리는 하기 싫지요. 언약이 우리들을 가만두지 않는다니까. 복음이 우리를 가만두질 않아요.

그러면 미리 이야기해봅시다. 지팡이 하고 모세가 죄인이다. 모세와 함께 있을 때 이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심판의 마지막의 열 재앙의 마지막이, 열 재앙의 마지막이 무슨 날이죠? 유월절이잖아요. 어린양의 피가 있는 집안은 구원을 받고, 모세 말을 듣고 구원을 받고, 어린양의 피가 없는 사람은 죽음이 오죠.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의 핵심이 뭡니까? 피 있으면 살고 피 없으면 죽고, 다른 말로 하면, 피 흘림이 있은즉 사함이 있고, 피가 없으면 용서 받지 못하고. 용서 받지 못한다는 것은 뭐냐? 피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용서 받아야 되는지 안 되는지조차도 몰랐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은 사람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피 없이는 용서가 안 되는구나를 비로소 외부에 심판성을 드러내는 그러한 새로운 질서, 우주의 질서가 재편되는 그 가운데 이스라엘이란 국가 등장했던 겁니다. 그것도 모세를 통해서.

그러니 이거는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죠. 어떤 장소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가 아니죠. 에피소드가 아닌 것이 사도행전 17장 봅시다. 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모세 같은 분)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일방적이에요.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심판해버려요)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만 구원된다는 것을 하고, 32절에 보니까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해서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 반응이 어떻습니까? 웃기네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 복음을 안 전했으면 그 사람들 다 신사 분들이고, 숙녀 분들이에요. 지금도 엄마, 밥 줘 드라마 보고 있을 거고. 아주 평범해요. 너무나 평범하고 인간성 좋고. 이웃집 어려우면 다 도와주고 아주 하자 없는 사람이에요. 갑자기 복음을 듣는 순간부터 속에서 뭐냐? 울렁증이 욱하면서 ‘웃기고 있네. 세상을 그따위 안목으로 보는 게 어디 있어?’라는 반발이 나오죠.

고린도후서 6장 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말 했어요.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산자요 내가 가난한 자 같으나 부한 자요. 내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걸 가진 자로다. 우리가 그 말이 납득이 되려면 이렇게 돼야 돼요. 아까 울산에 오다보니까 차들이 있는데 거기에 차도 없고,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 봅시다. 그걸 그렇게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분주한데. 빵빵빵 소리 들리는데. 안목이 층이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여기 차가 많구나, 사람이 왔다갔다하구나 ‘땅콩 사세요.’라고 장사 있구나 하지만

다른 층으로 보면, ‘다 죽었네. 아무도 없네.’ 그럴 경우에는 이 세상 자체가 어떤 유리상자나 거울 속에 갇혀놓고 바깥에 이야기해보면 울산바닥에서 아무리 아우성쳐도 귀에 안 들리죠. 아무도 없네. 도로는 이렇게 넓게 해놓고 차도 하나 안 다니고. 집은 아파트 지어놓고 사는 사람이 없네. 이런 안목으로 볼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사도 바울은 그렇게 보는 거예요.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고함지르고 보니까 소리도 안 들리고 갇혀 있는 지옥이니까. 아우성이니까 갇혀있는 꼴이고. 그 정도로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깥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가난하고 가진 것도 없지만 그걸 몽땅 거울 속에 가둬놓고 보니까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없으나 몽땅 다 가진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적어도 그렇게 되려면 진짜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진짜로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자가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말이죠. 그게.

그러니까 제가 늘 하잖아요. 어떻게 예수님의 피의 가치가 세상적인 돈보다도 더 못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께서 유월절을 통해서 어린양의 피가 나머지 모든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더 귀한 축복이란 것을 깨우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아는데 있어서 수준이 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에 있어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수시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소유, 우리의 가진 것을 흔들어 깨버려서 그건 우상이야. 그것도 우상이고. 자꾸 그걸 소유하지 말라고 흔들어대고. 그 흔드는 가운데서 다시 균열이 일어나면서 ‘어, 내 것 아깝다.’ 하다가 그 틈 사이에서 분화구에서 올라온 예수님의 피를 보고,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를 치게 했구나.

예수님의 피가 소중한 피를 내가 가진 것보다 더 하찮게 여겼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들죠. 그럴 때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한 사람을 통해서 마지막에 회개하라 하시고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 부활로 구원받는 사실이 와 닿는다 이 말이죠.

교회라는 것이 교회만 다니면 안 되고 천국 가야 돼요. 천국 가야 교회 온 보람이 있는데 교회는 왔는데 천국은 못 가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천국 가려면 그 교회에서 주께서 흔들어서 모든 교인들과 목사님들이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다시 한번 그 가치를 짧은 설교시간이나 매주 한번 만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피의 가치를 월등하게 느껴지는 그런 일들이 있어야 됩니다.

조금만 하고 십분 쉽시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리해보면, 모세에게 일어났다는 말은, 지금 히브리인들은 사실은 애굽인이죠. 애굽 생활하기 때문에. 이 히브리인들과 모세의 만남이 원활했습니까, 원활하지 않았습니까? 원활하지 않습니다. 한쪽은 언약의 맛을 본 사람이고, 저쪽은 ‘무슨 소리냐? 우리를 편하게 해달라고 여호와 불렀지 무슨 언약 같은 그런 소리, 우리한테 하지 마라. 우리는 우리 가족 편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 언약, 어디 가서 섬기고 그거는 우리가 관심 없다. 가기는 어디 가. 여기 있지.’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다음에 십분 쉬고 합시다.

관리자(IP:220.♡.41.193)

09-10-14 15:40

울산090929b출4장1절b

20090929b 울산강의-출애굽기4장1절
(강의:이근호 목사)

4장 20절에 보면,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지요? 그냥 지팡이가 아니고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돼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애굽으로 내려가거든요. 가서 뭐한단 말이냐? 여러분이 모세입니다. 가서 뭐 할 겁니까? “여러분, 저 하나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갑시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이게 미쳤나 합니다. 왜냐하면 못 나갈 게 뻔하니까.

모세가 누굴 만나야 하느냐 하면, 바로와 만나야 돼요. 개인한테 나가자, 나가자 이래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뭐냐? 예수님께서 마귀하고 이야기가 돼야지 개인적으로 어이, 가자. 이런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오셔서 마귀를 묶고 마귀 속에 있는 우리를 데려가는 방식으로 그렇게 구원하시지,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고 ‘피 봐라. 아프잖아.’ 이런 식으로 호소해서 가는 게 아니라 진짜 미혹의 영, 악령을 떠나보내는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 볼 자 없어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우리는 육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가는데 그 다음에 22절에 보면,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모세가 누굴 만나는 게 아니다? 히브리인들을 만나는 게 아니고 바로를 만나요. 히브리인들은 영문도 몰라요. 모세가 온 줄도 모른다고요. 나중에 알겠지만.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바로 왕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보냈다고 해요.

요즘 같으면 어떻습니까? 지금 내 백성들이 하도 어려워서 내가 백성들 말 듣고 왔다. 그게 아니고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왔다 할 때 바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가 누구지? 요새 개나 소나 대단한 신들이 많아서 헷갈린다. 여호와 누구지? 하잖아요. 모세가 여호와가 누군데 내 백성 보내느냐 이 말입니다. 말하는 모세도 황당하고, 듣는 바로도 황당하고, 애굽에 빠진 이 사람도 황당하고, 전부다 황당한 겁니다.

더욱더 황당한 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요. 나오죠. 22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것은 제가 아까 했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룰 때 아들 부분이 어느 쪽일까요? 아들 부분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이라는 그 대목이 처음 나오죠. 그때 아들 나올 때 처음에 아브라함과 이삭 나오면서 아들 이야기하면서 나오는 언약이 ‘할례언약’입니다.

그러면 아들은 할례언약을 통해서만 아들이 나오고 할례언약이 없으면 아들이 못 나오는 겁니다. 할례가 뭐냐 하면, ‘내 육은 포기했습니다’는 뜻이거든요. 골로새서 2장에 보면, 할례를 세례라 하고 십자가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없이는 아들이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나중에 바로 뒤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죠. 뭘 알려주기 위해서 죽이느냐 하면, 할례언약과 아들의 관계의 연관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모세를 죽입니다. 그걸 눈치 cos 모세의 부인, 십보라가 모세를 어떻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아들, 할례를 안 했구나. 아들 할례를 g행해버리니까 모세가 산다. 모세가 산다는 건 이스라엘을 아들 만들기 위한 사명이 순조롭게 드디어 다시 연결되었다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언놈이 내 아들 만드는데 누가 방해해. 이런 뜻이에요.

어떤 사람 묻기를 목사님, 모세한테 일을 시키면서 모세를 숙소에서 죽이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는 모세가 아니라 우 모세라도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는 모든 어떤 방해도 주께서는 심판으로 죽여 버리죠.

여기서 아브라함에 있어서 이스마엘이 태어났는데 이스마엘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모세가 등장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들이 아니다. 나면서 팔일 만에 할례한 사람이 이삭이죠. 이삭이 태어나면서 할례를 통해서 진짜 아들이 얻어진다는 것을 먼저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보여줬습니다.

그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이 그대로 모세에게 먼저 주어지고, 모세에게 주어진 그것이 모세를 따라야 될 히브리인들에게 그 언약이 주어져서 집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형성됩니다. 단 뭐냐? 할례를 행해야 돼요.

출애굽기 12장 봅시다. 12장 48절 누가 읽어보세요.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유월절 지킬 때는 앞으로 유월절 행사가 반복되는데 반드시 유대인은 물론 할례를 받았고, 이방인들이 그냥 유월절 지키면 안 되고 할례를 받은 후에야 유월절 지키게 되는데 만약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유월절 참석을 못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구원받으려면 두 가지를 해야 돼요. 하나는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되고, 또 한 가지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보면, 안식일은 영원하라 했거든요.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고자 했어요. 안식일 지키고 할례를 행하면 이방인이라도 저 밑자리에 하나님께서 용서해 준다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합니다. 내가 할례 받은 사람 중에 있지만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지 그저 외형적인 할례는 할례도 아니다. 그러면 진짜 할례는 뭐냐? 마음의 할례는 어떻게 하느냐? 골로새서 2장에 보니까 육의 껍데기, 몸을 벗는 것을 할례라 하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과장된 해석이

보세요. 분명히 남성의 생식기 끝을 까는 게 할례로 알고 있는데 골로새서 2장에서는 우리 몸의 피부조직을 벗겨버리는 거예요. 사람 죽습니다. 손톱 조금만 까져도 아픈데 머리부터 모든 피부를 십자로 그어서 바나나 껍질 벗기듯이 벗겨보세요. 그게 됩니까? 안 되지요. 죽어라 이 말입니다.

결국 아들 만들기는 육체적인 할례, 율법 그것 말고 십자가로 승리했느니라. 십자가 있으면 구원되는데 지장 없다 이 말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이미 합격한 사람이 여유가 있어야지. 합격해놓고 벌벌 떨면서 십일조, 벌벌 떨면서 안식일. 이게 무슨 합격한 사람의 여유입니까?

남자들은 알아요. 군 제대 해놓고 꿈속에 또 군대 가라 해서 벌벌 떨어요. 깨보니까 꿈이었구나. 제대 못해서 막 애쓰다가 깨보면 맞아. 제대했지. 한번 제대하고 난 뒤에 자기 부대를 찾아보세요. 느긋합니다. 중대장 나와. 선임하사 나와. 고참 나와. 고참해도 지 쫄병이야. 그런 여유를 가지고 이 세상 살자는 거예요. 죽어도 사는. 그래서 이미 죽은 자 같으나 이미 사는데 합격한 자의 여유.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여유. 그것이 바로 십자가 때문에만 피 때문에 생긴 거란 말이죠. 할례언약, 피 때문에 생긴 거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봅시다. 출애굽기 4장. 아들 만들기 작업에 할례언약 행하고 피 흘릴 때 그것이 나중에 유월절까지 이어집니다.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23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그때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앞으로 모든 역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언약성취를 위해서 이런 반대되는 세력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비상태에 있는 겁니다. 오고 오는 모든 세월에.

그래서 어떤 자들은 강퍅해야만 하고, 바로 같은 사람은 방해해야만 하는 거예요. 그래야 이쪽이 죽어줘야 이쪽의 삶을, 생명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나줘야 이삭이 이스마엘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죠. 한쪽은 언약에 의해서, 한쪽은 육체에 의해서. 그 가운데 할례언약.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짝이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빛은 어둠이 있어야 되고, 어둠은 빛이 있어야 되고, 천국은 지옥이 있어야 되고, 지옥은 천국이 있어야 돼요. 양은 혼자 있으면 양이 아닙니다. 반드시 염소가 있어줘야 양이 양 값을 하는 겁니다. 양이, 괜찮다. 양이 괜찮은 것은 염소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성경 공부하는데 위에서 해줘야 얼마나

여기서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가 이론상, 계획은 나와 있어요. 할례언약을 행해서 아들 만든다. 아들 만들 때 그냥 만들지 않고 반드시 아들 만들기에 반대되는 세력이 있어줘야 아들이 아들을 안다. 이론은 맞아요. 이게 실제로 적용이 된다면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잖아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잖아요. 이삭 언약 아닙니까.

그러면 현재 비 언약에 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잖아요. 우리가 언약이 오는 순간부터 죽었다고 각오해야 됩니다. 언약 앞에 어쩔 수 없어. 언약과 비 언약의 만남은 죽음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숙소. 24절.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실컷 부려먹겠다고 아직 개시도 안했는데 개시 차에 죽여 버리면. 마치 박카스에서 주최하는 전국대학생 국토 순례하는데 부산 해운대로 발 Ep는데 해운대에서 죽여 버리면 국토 대순례 안 되잖아요. 그런데 모세 발 떼서 부산 해운대 와서 죽이려 하니까 도대체 하나님 계획에 차질이 있을 것 아니냐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이건 칼 바르트 할 때 해야 하는데 할 수 없이 미리 해야 되겠다. 비 언약이 나름대로 뭘 갖고 있느냐 하면, 육의 역사. 육의 역사의 중심부는 우리 가정, 내 가족. 아버지 같으면 가장 중심, 내 중심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걸 흔히 족보라 합니다.

여러분들이 상당히 어려운데요. 다윗의 집안, 다윗의 족속 또는 다윗의 가문, 다윗의 집안에 사람이 몇 명이죠? 여러 사람이 나타나죠. 거쳐 가는 여러 사람이 있는데 거쳐 갈 때마다 다윗의 집안을 자기 집안으로 연결되죠. 거쳐 갔기 때문에. 난 다윗과 외사촌이다. 난 다윗과 아는 사람이다 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성경에 보면 다윗의 집안은 예수님 집안이에요.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예수님 강의할 때 뒤에서 마리아 오니까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며 누가 내 형제냐? 하나님 말씀을 듣는 너희들이 내 모친이요, 내 형제요, 내 누이라 했거든요. 그러면 천주교에서 마리아만 모친이 아니고 누가 모친이 돼야 됩니까? 천주교에선 마리아만 예수님 모친이라 하는데 잘못된 거죠. 성경 본문에 누가 모친이에요? 그 자리 있던 아줌마들. 아줌마들 다 모친입니다.

다윗 집안의 특징이 뭐냐? 어떤 집안을 구성할 때 우리가 아는 역사가 완전히 파괴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이런 관계가 깨져버려요. 언약이 갖고 있던 역사가 새롭게 여기에 주입됩니다. 그러면 차이점이 뭐냐? 비 언약적인 역사에선 주인공이 시조, 경주 이씨 무슨 파. 시조가 조선시대 때 정승을 하고. 정승을 한 시조 중심의 역사가 있어서 그 중심으로 너는 사촌관계 하는데 이거는 할례언약을 통해서 피바다 돼요. 심판 피 속에 사라집니다.

피 안에서 나온, 피 안에서 나왔다는 말은, 무효 되는 것이 아니고 피 안에서 나왔으니까 이 언약이 살아있는 한 인간의 육은 전부다 피바다 돼야 됩니다. 언약이 살아있는 한 인간 육의 역사는 용납이 안 됩니다. 이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가 등장하게 되면 이 안에서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같은 시대에 악수하고 같이 밥 먹고 하거든요. 인간의 시간이라는 걸 초월한 어떤 것도.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이걸 그리스도 역사라 합니다. 성경 여러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역사는 인간의 육의 역사와 달리 시간을 초월한 거다. 그걸 묵시라 하죠. 이건 보통 역사라 하죠. 그런데 이걸 초역사 이야기했는데 여기 용어상 오해될 소지가 많아요. 바르트가 오해될 수밖에 없는 용어들 몇 개 사용한 게 있어요.

어쨌든 언약에 의하면 피에서 나오는 역사가 되죠. ‘그러면 피에서 나와도 역사는 역사잖아요.’라고 할 것 아닙니까. 피에서 나온 역사는 인간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 인간 역사는 그냥 용도에 불과해요. 용도에 불과해서 개인적인 가치가 밑에서 전수 될 수 있는 것을 일체 허용을 안 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다말에게서 그 다음에 마리아에게서. 마태복음 1장에 나오죠. 이게 다 이방여인이죠.

왜 이방여인을 넣습니까? 이게 바로 언약적 역사에서는 이방여인을 집어넣어서 인간 유대의 역사, 다윗의 역사, 아브라함의 역사를 인간 아브라함의 역사로 전환되는 것을 주께서 차단시켜버립니다. 그러면 라합 역사가 있잖아요. 라합 역사란 말은 안 돼요. 라합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후손을 낳자마자 라합으로서는 자기 할 일 다 했어요. 용도폐기 됐어요. 이걸 모르고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그리스도 엄마라 해. 하나님 엄마. 마리아는 용도폐기된 사람이에요. 아까 했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면 여러분들이 마리아에요. 아줌마들.

하나님의 언약에서는 어떤 특정 인간의 공로가 안 들어가게 돼있어요. 스데반 집사가 훌륭하다. 스데반 집사 아들도 당회장 돼야 됩니까? 아니에요. 그냥 돌아 맞아 죽는 그 용도, 단회성, 일회성으로 끝나 버려요. 한경직 목사 기념회, 주기철 목사 기념관, 손양원 목사. 웃기고 있네. 그거는 안 됩니다. 설사 그 사람들이 성도라 하면 그 사람 그걸로 자기 역할 다한 것뿐이죠. 그런 기념관 같으면 새순교회 교인들 하나하나, 사모님 기념관 전부 다 해야 돼요. 황 전도사님 기념관. 기념관 한두 개가 아닙니다.

방금 이러한 인간 역사를 죽이는 역사를 가지고 인간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받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역사가 주님이 주체가 되어서 인간을 용도로 사용했던 역사가 언약의 역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세야 네가 하려고 하지 말고 너의 지팡이를 봐라. 지팡이 시키는 대로 해라.’ 하나님과 동행해서 이제는 모세는, 자기가 뭘 해야 될 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강의를 제가 이렇게 하고 난 뒤에 ‘그럼 목사님. 앞으로 우린 어떻게 할까요?’ 그거는 본인이 알아서 하세요. 본인은 본인 나름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게 있습니다. 교회에 오백만원 바치든지. 본인이 주고 싶으면 주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거는 제 삼자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하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장로임직 받고 다 하세요. 그건 어떻게 잘했다 제 삼자가 관여할 수가 없어요. 다만 그런 식으로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용했다는 것을 잘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나쁘다, 잘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돼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였다. 그래서 피라는 것을 알고 십자가 믿고 어떻게 살까요? 하면 그것은 피가 알아서 할 문제가 남 흉내 낼 필요는 없단 말이죠. 흉내나 모방은 또 하나의 위선이니까. 각각 개인마다 달리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인 능력을 쳐다보면 안 되고 그런 것을 모아서 어디로 몰고 가느냐? 그걸 보셔야 되죠.

25절에 봅시다.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발 앞에 던진다는 말은, 발이 어느 쪽이냐? 발을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사타구니를 이야기하는 것이냐? 그런 건 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여튼 던지니까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그러면 십보라의 남편은 누굽니까? 모세입니까, 피입니까? 피가 되죠. 이거는 십보라는 황당한 사건을 당한 거예요. 남편을 잃어버린 거예요. 사실은 육의 남편을 잃어버리고 언약적 남편을 찾은 거예요. 당신은 피 남편이다. 따라서 모세 때문에 모세 가정이 언약의 영향을 받는 영향력 아래 놓이게 겁니다. 모세 가정 자체가.

이러한 방법으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끌 겁니다. 이제는 모세 가정뿐만 아니고 모세가 인도해야 될 히브리인 전체에 있어서 피의 영향력,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할 것이며, 거기에 반드시 뭐가 등장해야 되는가? 방해꾼. 이걸 성경에서 강퍅. 강퍅해야 되는 그런 사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5장 봅시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이 이야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이걸 저는 개인적으로 성도들 이사 갈 때나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런 것 좀 하지 말고 ‘여호와가 누구관대’ 이걸 액자에 붙여 놓는 거예요.

왜 그걸 붙이느냐 하면, 목사 생활 십년, 이십년 한다고 믿음 있는 줄 압니까? 어느 순간 눈 뜨면 예수가 누구지? 없잖아. 죽었잖아. 그동안 예수 팔아먹고 장사 잘했다만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모르겠어. 다만 사람들이 복 준다 하니까 좋아했지 예수 이야기 안 한지 오래됐는데 사실 나도 의심스러워. 예수가 과연 살아있을까? 예수가 누구지? 이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는 거예요. 목사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들어요.

특히 집안에 만약에 애가 죽었다. 교회에 잘 나가는데 죽었다. 대번 생각이 뭘 들겠어요? 집사님, 예수 믿고 힘을 얻어야죠. 예수가 누구시죠? 예수가 살아있다면 내 애를 죽입니까? 항상 뭔가 이 바로가 있어줘야 돼요. 그래서 ‘예수가 누구지?’라고 욕하는 그런 교인들이 있어줘야 됩니다. 새순교회의 비극은 그거죠. 다 신앙 좋다는 것. 지금 비비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목사님 설교하면, ‘목사님 예수님 봤습니까?’ 그런 인간들. 두 번 쓰다가 용도폐기하고 다가든지 그 마음 다른 사람 오든지 하다가. 자꾸 뭔가 ‘진짜 예수 믿는 것 맞아?’라고 쑤셔대고 흔들어대는 요소가 있는 게 정상입니다. 이게 성도가 좁은 길로 갈 때 정상적인 거예요. 이런 게 없으면 자기는 자연스럽게 예수 잘 믿는 사람인 줄 착각하게 돼요. 너무너무 잘 믿어. 그런데 푹푹 송곳으로 쑤셔줘야 사람은 뭔가 당황스럽고 도대체 내가 교회 가도 즐겁지도 않고 왜 그런지 몰라. 스스로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어요.

사람이 장사하기 바쁘면 몸이 있는 줄 없는 줄 몰라요. 언제 몸이 있는 줄 아느냐 하면, 자기 몸이 아플 때 ‘몸이 있었지’ 그때 알아요. 마치 우리의 신앙도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당신은 불신앙 맞지, 그렇지? 솔직하게 이야기해봐라. 위선하지 말고. 네가 의심하면서 믿지.’라고 누가 쑤셔줘야 ‘아, 있구나. 그게 아니거든.’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좋으신 바로 같은 분을 항상 우리 곁에 두신다는 것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언약을 할 때 비 언약, 반대 언약이 그림자처럼 동참하면서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여기 5장 그냥 쉽게 넘어갑시다. 5장 5절에 보면, “또 가로되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를 쉬게 하는도다” 하고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간역자들에게 이야기해서 이 게으름뱅이 백성에게 짚을 얻을 곳을 가르쳐주지 말고 그러면서도 제품의 실적은 줄이지 말고 그대로 전에처럼 그렇게 제품을 생산하라고 그들에게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15절에 쭉 나오죠. 히브리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왜 갑자기 태도가 살벌합니까? 물으니까 그때 애굽의 감독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누구 때문에 그렇게 했다? 모세가 바로 만나서 우리의 형편을 힘들게 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 다음에 20절에 보니까 모세와 아론이 있는 걸 보고 백성들이 달려들지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21절이 재미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구원이 그만큼 수월해졌습니까, 구원 받기가 힘들어졌습니까? 하나님이 만드는 상황은 구원받기가 더욱더 힘들게 되었지요. 이게 하나님의 가시는 코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삼년동안 교육받았다. 흔히 선교단체에서 그렇게 가르치는데 교육받았으면 좀더 나아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삼년동안 교육 실컷 받은 결과가 뭡니까? 목자를 치니까 양들이 튀어버리잖아요. 심지어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요. 꼴좋습니다. 교육받은 성과가 기껏 그겁니까?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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