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3:1-5 / 삼손의 출생
삼손의 출생 2008년 3월 30일 본문 말씀: 사사기 13:1-5 (삿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삿 13: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삿 13: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삿 13: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삿 13: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나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예언 성취’에 관한 겁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평소에 예언 자체가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 대신 현재 자신이 아쉬운 것만을 신께서 채워달라고 간곡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열성과 떼씀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감동받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예언에만 관심 둘 뿐입니다. ‘나실인’이라는 용서를 하나님 쪽에서 사용하셨는데 인간이 그 ‘나실인’가가 뭔가를 모르게 되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게 됩니다. 마노아라는 가정은 자식이 없습니다. 아내가 자식을 못낳습니다. 그 점을 하나님도 잘 아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이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용하시려는 겁니다. 즉 아기 없는 가정에 아기를 주되 결코 단지 ‘나도 내 자식 가졌다’는 식으로 받지 못하게 하십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식없는 가정을 철저히 이용한다는 식으로 말씀을 전하시고 자식도 전하십니다. 우리네 가정도 이래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살아야 될 운명을 가진 아기를 이 마노아 가정에 주십니다. 그렇다면 나실인이라는 법이 태어날 아이의 전 일생을 지배하게 됩니다. 나실인이란 민수기 6장에 나옵니다. 특정 기간 동안 특별한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께서 서원을 하게 되면 그 기간만큼은 나실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나실인은 다른 사람과 다른 삶을 그 기간동안 보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마음놓고 포도주와 포도와 관련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 되는 사람은 포도주와 관련된 음식을 먹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모양내기 위해 자기 머리털을 자기가 다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이 된 사람은 자신이 정해놓은 기간만큼은 그의 머리털이 자라나는대로 방치해야 합니다. 또 일반인들은 죽은 시체나 혹은 장례식장에 참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은 자신이 서원한 기간만큼은 죽음과 상관있는 사물을 만지거나 그 장소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과 무관한 생명과 관련있는 인물인 것을 나타내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서원의 기간이 끝났을 때, 과연 나실인으로 산 의의가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것은 나실인이 그동안 길렀던 머리카락에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보통 이스라엘의 제사에는 인간의 신체가 섞이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더럽기 때문입니다. 제사의 제물은 오직 ‘흠없는 제물’만 제단에 얹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흠없는 제물만 받습니다. 인간의 신체 일부는 그래서 거절당하십니다. 그런데 예외 규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실인의 머리카락입니다.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이 머리카락이 잘아난 기간동안 제대로 서원에 충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됩니다. 그래서 그 머리카락이 제물에 합류된다는 것은 그 서원만큼은 흠없는 제물과 동격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 됩니다. 이것은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미리 알려주는 기능을 합니다. 즉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자체가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제물을 일체 받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모든 제물은 예수님만이 제물임을 보여주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실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나실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나실인의 삶이란 희생과 섬김과 봉사의 삶입니다. 나실인이 포도와 관련된 술과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곧 축복된 결과만을 보여주는 삶이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축복된 열매만 따먹지만 그런 열매를 맺히기 위해 나실인의 삶은 광야 때와 같은 척박한 고난의 길을 가야합니다. 포도주라는 결실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그 축복을 영글어내기 위한 고난의 기간, 헌신의 기간이 따로 있습니다. 이 고난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역할을 나실인이 하게 됩니다. 쾌락과 흥겨움과 세속적인 즐거움을 멀리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머리 손질하며 멋을 뽐낼 때, 나실인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머리카락 잘라서 정리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 즉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에게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만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가 곧 나실인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죽음과 늘 연류된 생활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꾸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얻고자 하는 것이 결코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지는 못하고 죽음으로 함께 쓸려내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죽음이 오면 그동안 얻고자 했던 모든 것을 제대로 쥐고 있지도 못하고 이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실인의 헌신으로 인해 주어진 하나님이 생명은 줘놓고서 도로 뺏는 일은 없습니다. 진정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간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생명이 아닐까요? 이 생명을 낳기 위하여 나실인을 타인을 위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겁니다. 시장에 나가보면 아이들이 때로 엄마한테 강짜를 부립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달라고 강짜를 부립니다. 이처럼 나실인의 의미를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항상 신을 향하여 강짜를 부르겠다는 심정으로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나실인을 진정 안다면 그 분의 희생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택정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힘에 있지 않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힘이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제물이 되어 제단 위에 밀어넣는 그 희생이 곧 구원의 원천입니다. 처음에 삼손은 이런 결과를 몰랐습니다. 자신도 모르고 남들보다 훨씬 힘이 세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그것을 자신의 힘을 뽐내는데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나실인의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반(反)나실인의 모습니다. 하지만 한 번 나실인은 영원한 나실인이라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데 이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실인의 진정한 최후입니다. 즉 ‘자기 죽고 남 살고’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영원히 주어진 이 생명이 바로 이 원칙에 준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은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하나님의 예언을 생각하고 우리 자신의 욕망을 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사기-2007/25강-삿13장1-4(삼손의출생)-jdg080330.mp3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사기-2007/25강-삿13장1-4(삼손의출생)-jdg080330.wmv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사기-2007/25강-삿13장1-4(삼손의출생)-jdg080330.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