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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울산강의(창49장a)자유게시판창세기

울산강의(창49장a)

이름 : 강이아빠(IP:219.249.86.34)

울산(090403a)

2009년 4월 3일

창세기49장

이근호 목사

창세기 49장 1절에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라고 나옵니다.

28절에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9장 1절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에서 후일에 당할 일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예언 해 놓고 28절에 보니까 “그들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복’이라 하는 것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이런 복 주세요, 저런 복 달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복 주세요’라고 말은 해도 그 복의 내용에 관한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복’인 줄 아시고, 그 ‘복’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게 무슨 복이냐?’라고 짜증을 내지 마세요.

하나님이 복이라고 주시면 우리가 그걸 ‘이건 복이다, 이건 복이 아니다’라고 따질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그냥 그대로 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49장에 보니 ‘장차 그들에게 당할 일이다’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를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열두 지파 아들을 통해서 일하시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너희를 사용해 세상만방에 알리겠다’는 그것이 ‘복‘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상상하세요^^), 여기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있고, 열두 지파 속에 하나님의 복이 담깁니다. 이걸 빨간 걸로 그리겠습니다. 복의 분량은 다 다릅니다. 내용이 모두 다릅니다. 사람은 같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복이 담겨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면 이 복을 받게 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건드리면 맞는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건드리면 저주 받는다는 그런 성질의 복이 성도 안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를 건드리면 저쪽에는 저주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복 안에는 복과 저주를 확산시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열두 지파에게 나눠준 게 있습니다. 빨간 걸로 되어 있습니다. 이 복의 내용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무시하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고, ‘저게 바로 하나님의 본래 뜻이구나! 하나님 뜻이 저런 거구나!’ 라고 동의하면 그들도 같이 빨간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할 49장이 무슨 내용이냐 하면, 복을 지금 아버지가 줍니다. 아버지 야곱 전체가 하늘의 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축복을 하게 되면 열두 개의 야곱이 되는 겁니다. 열두 개의 야곱, 야곱 하나가 열둘로 확산된 야곱입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로 된 이유는 야곱이 계속 야곱 되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야곱, 이스라엘은 자기 인생 자기 마음대로 못 사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못 살고, 주님이 주신 미래에 당할 복의 내용대로 그 길을 가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야곱이 받은 복을 열두 지파가 받았고, 야곱이 받은 복대로만 생겨난 것이 이스라엘이란 국가입니다. 간략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이 축복한다’는 말은 ‘야곱이 새끼를 깐다’ 또는 ‘야곱이 야곱을 만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야곱을 가지고, 열두 개의 야곱을 만드는 겁니다. 손오공이 머리털 하나 뽑아서 훅 불면 똑같은 손오공이 무수히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복이란 것은, 야곱 새끼치기? 야곱 같은 사람들을 퍼뜨리기 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도 동일한 복을 받기 때문에 그들도 이스라엘에 편입된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확정 되는 겁니다. 야곱이 내려줬던 그 복이 이미 들어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의 내용은 장차 이들이 살아가는 인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복 덩어리를 역사라는 발굽으로 밑에 깔아버리는데 이게 역사입니다. 야곱에 준 복이 굴러굴러 나중에 성취가 되면 역사는 끝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 이스라엘의 역사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굴러가는 이것이 복입니다. 붉은 복이 계속 굴러가는 겁니다. 이 복이 굴러가면 다른 사람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복과 저주가 계속 바깥으로 발산됩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준 복의 내용이 단순히 자기 식구에게만 좋으라고 한 복이 아니고, 인류 모든 역사의 흥망을 관통하면서 복과 저주를 가름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너를 축복 자에게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받으리라”라는 말을 우리가 들으면,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우리가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도 받을까요?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네가 뭔데? 아브라함, 네가 뭔데?’ 이러면 안 되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아하, 아브라함이 하늘로부터 인수인계 받은 게 있구나. 이제 아브라함이 그것을 나줘 줄 모양인데 나눠 줄 때 아브라함이 어떤 복을 가지고 나눠주느냐? 그게 궁금하다’

창세기 49장 들어가기 전 이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우선 이 예언의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열두 지파에게 이야기한 모든 축복 내용의 결과가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내용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복 받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야곱이 자기 열두 아들에게 나눠줬던 그 열두 야곱들, 열두 이스라엘인 그들에게 담긴 복 내용의 결론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겁니다. 상당히 엉뚱하죠?

그런데 본문 창세기 49장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열두 지파 자리는 나와 있습니다. 제가 복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중간과정은 전부다 생략하고 결론부터 이야기한 겁니다. 복의 알맹이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것이고, 행함이 아닙니다. 이 내용과 창세기 49장을 보면 복 된 사람들인 열두 사람이 둘러 쌓여있습니다. 이 열두 명의 사람들이 복이 굴러가는 역사를 통해 빙빙 돌면서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라는 이곳에 골인한다는 겁니다.

49장. 아버지에게 당한 일이 결국 소용돌이치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누구를 믿을 것이고, 어떻게 믿을 것이며, 무엇을 믿을 것이냐 입니다.

창세기 49장의 주석들에는 이런 내용들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그 주석가들은 정답을 모릅니다. 지금까지 나온 주석들을 보면 창세기 49장의 예언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풀어야 풀리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어렵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할 때에 자기를 믿는 건 행함이므로 안 됩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창세기 49장에서는 야곱이 앞으로 내가 너희에게 일어날 일을 말합니다. 야곱이 하는 말과 갈라디아서 3장 결론부분을 연결시켜 보면 “예수를 믿어라”라는 겁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자”라는 겁니다.

창세기 49장 중간 부분을 보면 “우리도 예수 믿자”라는 내용이 아니라 전쟁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이 딜레마에 빠지는 겁니다. 창세기 49장의 축복은 기존 교회에서는 개인 축복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축복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축복과 성경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축복이 있는데 둘 중에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축복입니다. 강조하면, 축복은 이쪽을 믿지 않으면 저쪽에 저주가 내려가는 게 축복입니다.

‘난 이런 기도해서 이번에 아들 장가 보낸다’ 할 때 이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믿지 않고, 저주가 주어지는 내용만 축복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어떤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경우 반드시 저주가 주어지는 내용이 되어야 이쪽에 축복이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축복은 반드시 저주와 쌍을 이룹니다. 저주 없는 축복은 없습니다. 한쪽이 축복을 받으면 반드시 저주를 받는 쪽이 있습니다. 새순교회가 구원 받는다면, 다른 교회는 반드시 지옥을 가줘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적으로 사시면 다른 교회들은 저주를 받습니다. 반드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욕망이 원하는 걸 가지면 축복으로 여기고,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나 하나님께 이것 받았다. 약 오르지“ 이걸 축복이라 여기는데 그건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은 뭡니까? 인간적인 야곱의 열두 아들이 갖고 있던 자기 나름대로의 축복은 축복이 아니고 저주거리가 된다는 것을 내부적으로 싸워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가야 될 전쟁입니다.

쉽게 말하면, 장차 이스라엘이 예수님처럼 되려면 내부 조정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안에는 예수님의 뜻, 하나님의 뜻만 남게 하옵소서’라는 내부 조정이 이스라엘 내부에 전쟁이 일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설 수 있는 진짜 이스라엘이 되기 때문입니다.

49장 3절에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끊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렵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그 다음 7절에 보면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것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 족속에게 저주를 내리고 비난한 겁니다.

이 본문을 본 사람은 백이면 백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세상에. 아버지 야곱 너는 잘했나? 자식한테 저주가 뭐냐?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다 용납해주고, 용서해주는 게 아버지의 자세이거늘! 그래 큰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이 나쁜 짓 했다고 거기다 대놓고 자식을 저주 하는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나!! 그래 야곱 너는 잘했나!!!’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 생각이 들면 이 본문해석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예가 또 있습니다. 노아 본인은 술 먹고 바지까지 벗어놓고, 아들이 뭐라 했다고 저주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너무 자기 편의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야곱은 본인이 잘했기 때문에 축복을 하는 게 아닙니다.

참 어려운데 다시 하겠습니다. 야곱 안에 빨간 복이 있습니다. 열두 개의 야곱을 만듭니다. 빨간 걸 집어넣습니다. 붕어빵 속에 단밭 앙꼬(소)를 넣듯 야곱의 앙꼬(소)를 집어넣는 게 축복입니다. 그럼 야곱의 앙꼬가 야곱의 선행입니까? 야곱의 착함입니까? 야곱이 노력하고 잘한 겁니까? 모두 아닙니다.

야곱 안에는 야곱의 자기 죄와 저주받을 것과 결합된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그 벌인 야곱의 속성을 자식들이 고스란히 물려받아야 됩니다. 물려받은 후 하나님 작용해서 이들을 야곱처럼 만들어 갑니다. 그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하나님께 복 받았다. 복 받은 그 순간부터 우리는 자신을 아는 하나님에게 우리 죄가 발각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 어떤 것도 ‘죄’라는 것을 낱낱이 들춰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알게 하는 복을 받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복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보통 아담의 의는 죄 안 짓는 것이 “의”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3장에서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의를 주고 또 주고, 또 주는 거”라고 합니다. 대야에 물 담아놓았는데 구정물이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맑은 물이 넘치고, 넘치는데 또 넘치는 겁니다.

우리는 죄 지은 것만 용서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 정도로 멈추는 분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의를 뒤집어씌워버립니다. 사람들이 행할 수 없고, 예수님만 행할 수 있는 의를 우리에게 폭설 내리듯, 소방관이 호스로 드라이아이스를 뿌리듯 하얗게 눈사람을 만들어버립니다. 나중에 미안해 하면 주님은 “이것이 내 의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공짜로 의를 주므로써 나도 의롭고, 너도 의롭고, 그리고 하나님 의를 나타내려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의 인형입니다.

내가 의인이 되고 싶어 의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소원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하나의 비바인형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파묻혔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3장의 하나님의 의고, 갈라디아서 3장 오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그 내용입니다. 풍성한 의가 되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남들 앞에 복의 기준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전쟁을 이스라엘을 통해 이뤄지는데 그 전쟁은 외부적인 적들로 인해서 이뤄집니다. 외부적인 적들이 쳐들어 올 때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싸우려다가 패하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믿을 때 그 의와 거룩으로 말미암아 적들이 물러갑니다.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거룩때문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믿음과 의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내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새순교회 교인들 가운데서 주님이 있다는 것을 새순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아느냐?

창세기 49장의 내용을 신학자, 목사, 주석가들이 풀질 못하는 이유는 입체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입체사진을 보통 사진처럼 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49장의 내용을 성경 뒤져봐도 뒤의 내용과 부합되질 않습니다.

창세기 49장 내용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야곱의 불순성, 인간성의 불순함이 서로 간섭을 해서 예언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는 겁니다. 혼동 되어서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해석이 되려면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 같지만, 흐릿하게 숨어있는 어떤 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순수함이 인간의 인생을 통해 나옵니다. 나올 때 뚜렷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인생이 예수님의 순수한 축복을 가로막고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고 인생 망하는 것 아닌가? 내 인생 실패 아닌가?’ 자기 실패한 것만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수하게 일했다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전쟁을 통해서 가려내야 합니다. 외부에 의해 내부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 전쟁에서 이기라고 이스라엘이 있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은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순수한 빛으로 있으라고 복과 저주의 기준점 되라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모르고 전쟁 한번 이겼다고 좋아 까불다가 사사기에 보면 벌 받습니다. 야곱의 더러운 속성을 받은 인간은 계속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큰 아들 저주하고, 둘째 아들 저주하고, 셋째 아들 저주하면 인간은 어떻게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그렇게 저주하느냐고 비난합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 순수함을 위해 물려주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혼자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한 인간을 용서하시고 의를 주신 그 원천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겁니다. 간섭이 일어나야 우리의 죄까지 아는 그 순수함, 죄가 섞였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구원받는 겁니다.

저 집사가 잘 되는 것 보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저 집사가 잘 되든 망하든 간에 저 집사님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나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순수한 광선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성도입니다.

교회 짓자 하는 것이 복과 저주의 기준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우리를 의롭게 했다는 것을 증거해야 저주하고 저주 받을 수 있는 복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차이를 통해서 압니다. 차이 속에 새 생명이 나옵니다. 남자하고 여자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애가 생깁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차이’를 다른 말로 하면 ‘틈’입니다. ‘틈’에서 생명이 납니다. 창세기 49장에 두 종류의 틈이 나오는데 르우벤이란 장자와 다른 열한 명의 형제들과의 틈이 생깁니다. 장자가 장자 값을 못했습니다. 흐리게 만든 장자가 갖고 있던 두 개를 나눠서 하나는 유다에게 또 하나는 요셉한데 가버립니다.

유다하고 요셉은 차이 납니다. 1이 2가 됐지만 2가 1이 됩니다. 유다와 요셉 틈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창세기 49장 이상한 장자권 두 봉우리 중 하나는 유다에게서 하나님이란 왕이 등장하고 요셉에게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나옵니다.

왕과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이는데 어떻게 하나의 장자권에서 둘로 나눠지고, 어떻게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되느냐는 겁니다. 하나에서 둘이 되는 차이에서 예수님의 새 생명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차이라는 것이 차이가 되려면 반드시 A와 B가 서로 마주서 있어야 됩니다. 같지만 완전히 같진 않고, 다르지만 완전히 다르지 않아야 틈이 생깁니다. 차이는 A와 B 그 사이에 골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이로 안 보고 같이 봅니다.

창세기 49장 24절에 “야곱이 축복하기를 요셉이 강건하고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 요셉에게서 목자가 나옵니다. 창세기 49장 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유다에게서 왕이 나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요셉 후손들이고, 남쪽은 유다 후손입니다. 둘 다 아니고, 그 틈 사이에서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서양 이천년 역사가 풀지 못한 문제가 나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 ‘실로가 누구냐’라는 겁니다..

어느 주석이 해답 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왜 실로란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라는 겁니다. 그들은 유다를 믿으니까 모를 수밖에 없고, 요셉을 믿으니까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도 믿지 말고, 유다도 믿지 말고 그 틈 사이를 믿어야 됩니다. 잇사갈과 스불론의 틈, 갓과 아셀의 틈이 아니라 유다와 요셉 사이의 틈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둘로 나눠집니다. 나눠져야 남쪽 나라도 아니고, 북쪽 나라도 아니고 진짜 ‘실로’란 분은 바로 메시아인데 그 메시아가 올 때까지 유다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대상으로써 남아 있어야 됩니다.

실로는 장소로 요단강 있는 사해, 갈릴리 바다 남쪽에 있습니다. 실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막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모든 회의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물어서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실로는 최초의 하나님의 장막이 서있는 곳입니다. 최초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할 그 당시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던 첫 번 째 장소가 실로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성막이 밀려오는 곳. 하나님 자신이 왕이 되어서 올 때까지 유다 족속의 왕은 왕으로 있어야 되는 겁니다. 유다 지파가 담당해야 될 예언이 되는 겁니다. 자기 역사가 되는 겁니다. 유다가 왕이 될 때는 처음이지만 왕이라는 직책이 올 때까지는 요셉이 담당합니다. 요셉이 장자 노릇을 해야 됩니다.

르우벤이 장자 역할을 못하니까 장자의 권한이 두 쪽으로 넘어갑니다. 한쪽은 요셉에게 넘어갔고, 장차 올 왕의 주도권은 유다한테 넘어갔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통해서 합쳐집니다.

그리고, 르우벤의 장자권이 박탈당한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7장 29절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여기 ‘어미’가 나오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장자, 축복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요셉의 경우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기에 장자권이 있고, 유다의 경우는 축복을 할 수 있는 권한이기 때문에 장자입니다,

장자권은 축복을 받은 자가 되는 동시에 축복을 받았기에 또 나누어주어야 될 권력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르우벤의 경우는 장자권이 둘로 나눠져버렸습니다.

아브라함에 있어 첫 번째 인간적인 육적인 자식은 이스마엘입니다. 그 다음에 진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 이삭입니다. 축복은 어디로 갑니까? 이삭에게 갑니다. 축복이란 말은 복을 받았고, 받은 복을 나눠줄 수 있는 권한 양쪽을 다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과 이삭은 무엇때문에 갈라졌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에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점은 ‘어미’의 차이점입니다. 어머니의 차이입니다. 이스마엘의 어머니는 하갈이고, 이삭의 어머니는(물론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을 대신해 아기 낳은 사라가 엄마가 됩니다. 지상에서 엄마에 의해 한쪽은 지옥 가는 언약, 한쪽은 천당 가는 언약으로 바뀝니다.

남자는 허수아비고 진짜 여자가 누구냐?

창세기 3장 15절에 진짜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에서 태어납니다. 가짜 여자가 있고 진짜 여자가 있다는 겁니다. 엄마가 누구냐에 따라서 씨가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 언약에 의해 야곱은 여자가 두 명 됩니다.(사실은 네 명이 되지만) 두 명의 여자를 통해 열두 명의 자식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49장에 축복할 때 제일 먼저 레아 계통을 축복합니다. 나중에 끝에 가서 라헬 계통을 축복합니다. 르우벤은 아빠의 자리보다 엄마의 자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라헬의 몸종인 빌하와 통간합니다. 빌하는 라헬과 한 몸입니다. 라헬이 불임 여성이니까 빌하를 낸 겁니다.

르우벤이 빌하와 통간함으로써 하나님의 순수 광선. 하나님의 언약의 질서가 깨집니다, 인간적인 르우벤이 엄마의 질서를 혼잡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받은 축복성이 간섭을 일으켜 르우벤은 저주를 받습니다.

저주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출생의 어머니를 성령에게 두지 않고 육적인 것에 둘 때 그게 바로 저주 받은 인간들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걸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행함과 종교성으로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구원받겠다는 것 모두가 이스마엘에 속한 겁니다, 엄마를 잘못 골랐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던 르우벤은 숨겨져 있는 순수 광선인 어머니의 중요함을 아간섭했기 때문에 장자권이 박탈된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ulsan090403a_v1.hwp (112.0K), Down:12

강이아빠(IP:219.♡.86.34)

09-09-27 00:24

천하 어떤 부모가 어떤 자식에게는 축복하고, 어떤 자식에게는 저주를 내리는 경우가 어디 있을까?
내 안에서 태어난 자식인데 다 축복하지, 어떤 자식에게는 저주를 할까?
야곱이 장자인 르우벤에게 저주를 했다. 왜 그랬을까?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엄마의 차이였다.
이스마엘의 엄마 하갈과 이삭의 엄마 사라(하나님)의 차이였다.
하갈을 엄마로 둔 이스마엘은 장자가 되지 못하고,
사라가 엄마인 이삭이 장자가 되었다.
엄마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나에게는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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