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9월 25일 디모데후서 4장 6절
광주 9월 25일 디모데후서 4장 6절
이름 : 관리자(IP:124.59.85.46)
090925 내가 나를 다듬어 손댈 필요 없는 세계로 옮김
관리자(IP:124.♡.85.46)
09-09-2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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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14 15:59
광주090925a디모데후서4장6절a
광주 강의(09. 9. 25) 53-1
디모데후서 4장 6절부터 보겠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여기에 천국의 속성이 나오는데, 첫 번째 공간이라는 것, 두 번째는 의롭다는 겁니다. 의롭다는 말은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의롭지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의라는 것은 죄인에서 예수님의 의로 바뀌는 그 과정도 의가 돼요.
그러니까 죄인이 예수님처럼 의인되려고 시도하게 되면 이것은 죄가 되고, 주님이 죄인을 용서해서 오면 이것은 의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 내부에서 발견되는 죄라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뿐만 아니라 죄인이 의인되려고 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어려워요.
그냥 주님 하시는 방식에 맡기면 되는데, 혹시 구원에 탈락될까 싶어서 내가 나에게 손을 대요. 내가 나를 다듬어요. 긴장하면서 나를 관리하고, 절제하고 ---
제가 최근에 쓴 댓글에서 이와 유사한 것이 하나 있어요. 손양원 목사 이야기 같은데,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제가 여기에 대해 뭐라고 썼는고 하면, 인간의 본심은 양자 삼은 것이 본심이 아니고 자기 아들 죽인 자를 죽이고 싶어요. 이것이 본심인데 그 본심은 숨겼어요. 그러나 없어지지 않아요. ‘내가 예수 믿으니까 너 같은 놈을 살려두지 내가 교회 안 다녔으면 너 같은 놈은 벌써 죽었다.’ 이런 마음이 양자를 삼고도 여전히 미운 감정이 잠재되어있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기를 ‘몇 번 용서할까요?’라고 하는데, 천 번 만 번을 용서해도 끝까지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냥 남들 눈을 의식해서 그냥 용서하는 척하지요. 하지만 그 일을 잊을 수는 없어요. 진짜 용서가 되었다면 그 일(사건)마저 잊어야 되는데 잊을 수가 없어요. 바쁘게 살다보면 생각이 안 나지만 그 집 앞을 지나가면 또 다시 그 일이 떠오르고 화가 치밀지요.
어떤 사람은 빨간 차에 치었는데, 그 후 빨간 차만 보면 화가 난다고 해요. 얼마나 용서가 안 되었으면 그렇겠습니까? 자신을 친 차도 아닌데 색깔이 빨갛다고 전부 싫어해요. 어떤 미친놈은 여자한테 속았다고 모든 여자에게 적개심을 품고 길가는 여자에게 염산을 뿌리는 사람도 있어요.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과 용어로 ‘사이코 패스’라고 합니다. 남에게 분풀이를 해야 자기 정체성이 유지가 되는, 분풀이할 대상이 없으면 견디지를 못하는 반사회적 정신장애지요.
인간은 누구나 다 병들었어요. 모두 환자입니다. 여기에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병든 사람이기 때문에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환자가 환자를 고치는 것은 안 됩니다. 병들었다고 여기면 의사를 찾아가야지요. 그러면 성령은 뭐하는 분이냐 하면, 의사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성령이 의사를 바라보게 하고 가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하는가?’ 그것이 아니고, 이미 성령이 왔다는 자체가, 성령은 예수의 영이니까 예수님께로부터 와서 우리를 낚아채서 우리를 고치십니다.
우리를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의사되시는 분에게 잡아당기는 이 작업도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 때 이 사람은 천국 백성입니다.
이제 진짜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어떤 공간을 생각할 때 특정 공간이 있어야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그런 것이 인간입니다. 예를 들면, 추석이 되면 고향에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어린 시절 자란 고향에 가면 어머니, 아버지 무덤이 있습니다. 현재 아무리 고향과 멀리 떨어져 살아도 그 무덤이 있는 곳이 본향이라서 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인간은 어떤 특정 지점이 없으면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아까 차에서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집사님이 손에 돈을 쥐고 4Km를 이동하면서 계속 돈을 찾았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돈은 항상 어떤 특정 공간과 더불어 돈이 있어야 되는데, 지금 그 공간에 돈이 없으니까 돈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설마 내 손이라는 공간에 돈이 있을 줄은 생각을 못했지요.
돈은 항상 어떤 특징 지점과 더불어 있는 거예요. 저기 TV위에 개 인형이 있는데 이것을 제가 손에 쥐고 있으면 쥐고 있으면서 개 인형을 찾게 돼요. 왜? 개 인형은 늘 TV위에 있었기에 그곳에 없으면 찾게 되지요.
사람이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나를 봐서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내가 있어야할 자리에 있을 때 그 공간과 더불어 나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천국을 설명할 때 이 두 가지로 설명해야 돼요. 하나는 죄 문제로 설명해야 되고, 그리고 공간문제로 설명해야 되는데, 만약이 이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경우를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 천국은 내 위에 있다. 나는 여기에 살다가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간다.’ 천국은 이렇게 갈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천국 보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예수여, 당신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당신이 죽음을 이기는 사람으로 믿겠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 봐라. 부활했잖아!’ 하고 왜 동네방네 광고 안 합니까? 자기를 조롱하고 놀린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찾아가서 확인시켜주면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믿을 것인데 왜 이런 방법을 사용 안 했을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할 때 자기가 죄인이란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하여튼 ‘내가 뭔가 몸이 아프다. 병들어 죽는다.’ 이것만 생각했지 ‘나는 천국이 있다고 인정하니까 넣어주세요.’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텔에 들어갔는데 201, 202, 203호가 쭉 있어요. 자기는 202호에 들어갔는데 영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201호에는 어떤가 싶어서 201호에 노크를 합니다. 안에서 사람이 나와서 “왜 문 두드립니까?” “나는 201호가 존재함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넣어주세요.” 이게 말이 됩니까? “나는 천국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넣어주세요.” 똑같은 이치에요. 이건 말이 안 됩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 죽으면 좋은데 갑니다.” 정작 천국에는 의가 있어야 되고, 의는 죄인이 만들 수 없어요. 죄인이 의를 만들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죄고 의롭게 되려고 해도 죄고 이러나저러나 죄입니다.
수요일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노상방뇨해도 죄고 안 해도 죄고. ‘나는 이 짓이 나쁘다.’ 라고 여기는 이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나쁜 거예요. ‘내가 나쁜 놈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역시 나는 착한 자야.’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나쁘다거나 착하다고 여기며 나에게 신경 쓰는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사람은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만들어줘서 내가 되는 겁니다. 나의 엄마 됨은 내가 엄마기 때문에 엄마가 아니라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아들에게 맞는 엄마로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주님이 배치하신 자식들로 인해 만들어져 갑니다. 아이들이 없었으면 이런 엄마가 안 될 텐데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을 배치하므로 나로 하여금 이런 엄마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래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잖아요. 자, 여기서 한 번 봅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요. 여기에서 이 ‘은혜’를 좋다, 나쁘다로 판정하지 말고 그냥 은혜입니다. 그냥 주신 거라니까요. 주신 것을 받고 좋다, 나쁘다고 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집에 냉장고를 선물 했는데 ‘아, 냉장고 너무 좋다.’ 좋다고 하지도 마세요. ‘어, 냉장고가 구 모델이네.’ 그런 소리도 하지 마세요. 그냥 주셔서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주께서 창세전에 만들어져야 될 인간으로 여기 도착한 것뿐이에요. 도착한 물건은 주님의 은혜인데, 이것을 내가 ‘나는 나쁜 놈이야, 나는 좋은 놈이야.’ 지가 뭔데 입맛을 다시고, 간을 보냔 말이지요. 자기 것도 아닌 몸을.
내 몸이 내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간을 보냔 말이지요. ‘나는 괜찮은 놈이야, 아이고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네.’ 왜 이런 식으로 ---
하여튼 사람들이 천국을 이해를 못해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이제는 제발 너 자신에게서 손을 좀 떼라.’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 인간은 손 못 됩니다.’ 라고 나옵니다. ‘내가 기계장치를 해 놓아서 어떤 인간도 자기한테 긴장을 푼다든지 자기에게 관심을 안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신병자 이외에는 없습니다.’ 라고 장담을 하는 것이 마귀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욥을 봐라. 욥은 안 그렇거든.’ ‘아니요. 안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것에 손대면 하나님도 원망합니다.’ 그래서 초반에 하나님께서 자식 10명 죽이고, 재산 다 태우니까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입니다.” 라고 했어요. 사단이 놀랐어요. 분명히 그런 인간이 없다고 여겼는데 있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하나님께서 욥 하나 만들기 위해서 마귀를 배치해 놓은 거예요. 마귀를 배치해서까지 욥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직접 몸에 손대 보세요.’ 라고 했어요. 그 때 마귀가 새로운 제안을 하지요. ‘직접 몸에 손대면 원망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비해서 배치된 준비물이 누구냐 하면 욥의 세 친구들입니다. 그 때 세 친구가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오는데, 이 친구들은 마귀의 대변자 역할을 합니다. 개뿔도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식으로 인간이 조작해낸 하나님을 내세우게 해서 진짜 고난 받는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대비시키지요.
누가 이깁니까? 욥이 이기지요. 그런데 어려운 것은 욥이 분명히 이겼는데 본인이 이긴 것이 아니고 이겨버렸지요. 이겨버렸으니까 욥은 모르는 거예요. 왜 내가 저 인간들한테 이겨야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자기가 의롭다고 했지요. 세리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주님은 바리새인보다 세리는 의롭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당사자(세리)가 왜 자신이 의로운지를 모르는 거예요. 욥도 바로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지옥 간 놈은 나는 지옥에 오면 안 된다고 펄쩍 뒤고, 천국 간 사람은 웬 은혜입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분명히 죄인인데 내가 왜 천국에 와 있지?’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지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은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몽땅 다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주셔서 도착한 냉장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자신에게 감동하고 ‘나는 괜찮은 인간이야.’ 또는 ‘나는 나쁜 놈이야.’ 이럴 필요조차 없다니까요. 늘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된 회개이고 가장된 위선입니다. 주께서 용서하셨다는데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정죄하는 사람도 없고 주님도 정죄하지 않는데 자신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으니 ---
[개그콘스트]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내버려 둬!’ 라는 것이 있어요. ‘그냥 내버려 둬.’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냥 좀 내버려 두세요. 주님께서 다루시게 내가 나를 간섭하지 마세요.
천국은 바로 죄와 관련되어 있고, 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 오신 분은 항상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 의가 뭐냐? 용서하는 것도 주님의 의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 주님의 자기 숙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찢으면 안 됩니다. ‘나는 내가 착해서 구원 받을래요. 나는 그냥 용서해서 구원 받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요.’ 이런 사람은 지옥 갑니다.
용서 자체가 있어야 우리는 주님의 숙제물이 돼요. ‘예 보세요. 창녀인데 제가 건졌잖아요.’ 주님이 우리를 보면서 자랑하실 수 있도록 제발 좀 나를 내 버려두세요. ‘노태진도 내가 구원 했잖아.’ 라고 주님이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도록 나를 내가 관리하려고 하지 마세요. 내 몸 주님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어려운 것이 공간 문제입니다. 사람은 본향을 중심으로 아무리 공간이 멀어지고 확대 돼도 고향에서 규정된 인간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창조’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보면 하나님이 칠일 만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나오지요. 이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제 창조는 끝났구나. 그러니까 창조된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살면 된다.’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 창조하신다고 수고 했습니다. 창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창조된 내가 내 방식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손 털어버려요. 이제 간섭하지 말라는 거지요. 자녀들과 부모님의 대화도 이렇지요. 부모는 자식에게 ‘내가 너를 낳았고, 먹였고, 길렀다.’ 라고 하면서 간섭하려고 하면, 자녀는 ‘예,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나도 컸으니까 내가 알아서 내 할 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큰 아이가 이렇게 나오면 둘째 아이도 따라서 그렇게 하지요. 심지어는 일곱 살 막내도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이 나이 40이 넘어서 부모 찾아와서 보증 서달라고 오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간섭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왜?
창조라는 것이 창조되었으니까 이제는 손 털고 빠이빠이하는 그 관계가 창조관계가 아니에요. 창조라는 것은 본향, 다시 돌아가야 돼요. 원상복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통일교나 지방교회에서는 ‘회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것입니다. 회복이 아니고, 에덴동산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인데, 그러면 예수님 사는 동네, 즉 공간이 있겠지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하나님 사는 공간에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예수님이 계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창조했지요. 창조했으면 고무줄과 같아서, 창조했다는 말은 항상 끈끈한 연결이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 35절에 나오지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여기에 고무줄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예수님에게서 나온 사랑의 고무줄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미워하기로 작정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지난 대전강의에서 했는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집이 두 채가 있어요. 하나는 사랑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미움의 집입니다. 사랑의 집에는 앞에다 ‘사랑의 집’이라고 써 붙였어요. 미움에 집에는 ‘미움의 집’이라고 썼어요.
사랑의 집은 특징이 뭐냐 하면, 항상 죄가 용서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미움의 집은 항상 의가 죄가 되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무슨 일을 해도 반드시 죄가 되게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집이 미움의 집입니다.
사랑의 집에 식구가 3명이라면 이 3명이 머리를 쥐어박고 미워하고 싸워도 문패에 붙은 ‘사랑의 집’이라는 것 때문에 그 안에서 떠져 나오는 모든 죄가 용서가 됩니다. 이런 집을 누가 지었어요? 우리 예수님이 지었습니다.
“목사님이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 아닙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텐데, 이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사랑의 집에 어린 양의 피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는 이 피를 집 입구에 발랐어요. 그러면 그 집은 사랑의 집이 되는 겁니다.
이 집 문설주에 발린 피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일을 했어도 그 피를 보고 넘어가는 집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 진짜 기독교입니다.
만약 사랑의 집만 있다면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갖고 있는 두 가지의 속성을 전하기 위해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랑의 집만 만들면 반쪽 예수님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심판주니까.
마태복음 25장 33절에 보면, 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염소도 있어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가라지와 알곡이 있고, 나쁜 고기와 좋은 고기가 있이요.
사람은 예수님께서 처음에 어떤 목적을 위해서 만들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습니다. 이 둘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습(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면이 있습니까? 사랑할 자를 사랑하는 모습이 있고, 또 미워할 자를 미워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만 좋아해요. 하지만 사랑이 사랑답기 위해서는 미움이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전체가 다 사랑이라면 사랑이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교입니다. ‘신은 모든 것이 공평하다. 모든 것을 사랑한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질 필요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고, 독생자가 십자가에 달리고, 놋뱀을 쳐다보듯이 쳐다보는 자는 구원 받고 이런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지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지요. 하나님은 사랑이라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되기를 바라지요. 이게 바로 사랑의 집을 배제하고 ‘우리가 지어낸 멋진 구원의 방식을 밀어붙이자’는 미움의 집에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미움의 집에는 피가 없어요.
제가 문제 하나 냅니다. 축복 산(그리심 산)과 저주 산(에발 산)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서야 됩니까? 저주 산에 서야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 번 강의를 들어서 잘 알고 있지요? 왜 저주 산에 서야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피가 저주 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 산은 자기가 축복 받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향해 축복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축복 산입니다.
이걸 모르고 축복 산에 서면 저주 산에서 저주가 날아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주 산에 제단을 쌓았는가 하면, ‘너희들은 저주 받아야 마땅한데 용서함으로 그것이 바로 너희들의 행함과 무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 사랑받을 짓을 안 했다는 것이 충분히 드러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덮쳐집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눅7:43).’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반 종교와 교회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사랑의 집이 아니고 미움의 집을 스스로 뜯어 고쳐요. 문패에 ‘사랑의 집’이라고 새기고 힘을 쏟는데 이것을 공로로 내세웁니다. 교회가 사랑의 집이 된 것은 예수님이 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뭘 보탠 것도 없고 도와준 것도 없고 그냥 천사가 와서 사랑의 집 간판을 걸었단 말이지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의 집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집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죄가 용서로 전환되지요. 그러나 미움의 집에서는 자기 공로를 내세우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를 의라고 여깁니다. “나도 이만큼 했다.” 그런데 그 의가 주님 보시기에는 죄입니다. 미움의 집 안에서는 이 인간의 의가 죄로 규정되는 일이 늘 벌어집니다. 계속 미움 받을 짓만 합니다.
사랑의 집에서는 뭘 해도 사랑받을 짓만 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니까 “아이고 귀여운 것.” 이렇게 되고, 저쪽 동네에서는 “주여, 저 열심히 했습니다.” 라고 하니까 “그래. 너는 지옥 가라.”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것은 원래 고향인 하나님의 형상이 고향이고, 그 고향에서 파생된 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이걸 칼 바르트는 ‘창조의 사건’이라고 했고, 그 다음에 창조의 사건에서 나온 ‘은혜의 사건’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바르트가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묵시적 차원에서의 사건들이 많기 때문에 일반 사건으로서는 해명이 안 돼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요1:30).”고 했는데, 이것은 해명할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하셨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잖아요. 역사 말고 다른 층이 있어야 이게 해명이 됩니다. 그래서 역사 층 말고 다른 층에서 이것을 해석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디모데후서 4장을 봅시다.
자, 그렇다면 천국이 뭐냐 하면 공간으로 본향을 간다.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고무줄이 있어서 고무줄이 당겨주면 우리가 고향으로 가는 거예요. 갈 때 우리는 사랑의 집이 되어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미움의 집에서 사랑의 집으로 이사 가면 안 됩니까?’ 라고. 그런데 사랑의 집은 사람 먼저 만들고 사랑의 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집부터 먼저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춰서 집어넣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사랑 받을 야곱을 나중에 만듭니다.
야곱 만들어 놓고 ‘하는 짓을 봐서 구원해 줄게’ 이런 것은 다른 종교에는 있지만 복음에는 없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롬9:11).”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만들었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시고 만들어 놓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를 채찍하거나 닦달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날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린 아이가 집안에서 옷을 벗고 있다가 밖에 나가면 엄마가 말리지요. “애야 밖에 나갈 때는 옷을 입고 나가야 돼.” 라고 해서 옷을 입히지요. 그러면 아이는 옷이 거추장스러워요. 옷이란 것은 내가 원치 않는데 일반 사회에서 원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원하는 대로 맞춰주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나에게 욕을 하게 될 것이고 나는 졸지에 나쁜 놈이 되고, 미친 놈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는 말씀은, 네가 네 몸에서 뜯어내야 될 것이 뭔가를 한 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나왔는가 하면, 제자들이 질문하기를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고 물을 때 답변으로 나온 말씀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는 것은 어디에서 배운 행세입니까? 이 세상에서 배운 행세지요. 그러면 우리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고향은 이 세상이 아니고 천국이란 말이죠. 천국에서는 ‘누가 더 높으냐’는 것이 성립이 안 되고, ‘누가 더 세상 것을 홀랑 벗었느냐’ 그 싸움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어떤 사람은 나체족으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데, 이것도 인위적입니다. ‘나 봐라. 세상 눈치 안 보잖아. 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 이건 어린 아이의 마음이 아닙니다. 저는 머리카락을 이상한 색으로 염색하고 이런 사람들 보면 너무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아이는 옷을 입으나 안 입으나 별 신경을 안 써요. 그런 아이처럼 되란 말이지요.
원래 여기 도착한 냉장고처럼. 원래 하나님이 주신 그 냉장고처럼. 죄 지으면 죄 지은 대로 그냥 냉장고. 까불면 까부는 대로 그냥 냉장고. 인위적인 것을 벗겨내야 됩니다. 그것을 벗겨내는 방법은 자기를 미워하는 겁니다.
‘자기를 미워하라.’라 했지만 안 미워지지요. 그러니까 옆에 가족을 붙여주지요. 그래서 서로서로 싸우게 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싸우고. 아비가 자식과 싸웁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마10:35)”이라고 했어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어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마10:36)”하다고 하십니다.
그동안 우리의 가족이란 것이 그냥 주신 가족이 아니고 나의 가족이 된 것이 문제지요. ‘내 자식’이란 것이 문제잖아요. 주님이 주신 자식이 아니고 내 자식이란 것이 문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것을 요구했지요. ‘이삭을 나에게 번제로 드려라.’
드리면 뭐가 없어져요. 조금 전까지는 내 자식이 있었는데, 드리면 내 자식이 없지요. 내 자식이 없어지는 순간 나도 없어지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두 개의 나(에고)가 있는데, 그냥 ‘나’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내 소유물로 간주해서 만들어낸 ‘가짜 나’가 있습니다.
부부가 이혼하면 그냥 헤어지면 되는데,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재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합니다. “집도 내 것, 가구도 내 것, 당신 목에 있는 목걸이도 내 것.” 그 때는 이렇게 하세요. “다 당신 것이면 내 몸 자체도 가져가라.”
나와 나 사이가 있는데, 그냥 나는 나도 누군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내가 소유한 껍데기가 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이것에 가려서 진짜 나를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것을 살짝 치우면 ‘아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자구나.’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나를 발견합니다. 잠시잠깐. 그리고는 다시 내가 가졌다고 여기는 나로 덮어버립니다.
이렇게 내가 가진 것으로, 내 노력으로 치장된 나를 데리고 사회로 나가는데, 그러면 상대방도 무장을 하고 나옵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쳐다보는 그 순간 시선이 어디로 갑니까? 너도나도 시선이 다 놋뱀으로 가지요. 그러면 그 순간은 너와 나를 잊어버리고 놋뱀에서 말하는 진정한 나가 누구냐 하는 것이 새롭게 다가오겠지요. 그래서 놋뱀을 쳐다보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를 보라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눈을 떼면 자신의 잘난 곳에 시선이 가기 때문에 ‘내가 높으냐, 네가 높으냐?’ 경쟁에 돌입합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마을에 리플을 달 때 ‘놋뱀을 쳐다봐야지 너와 나를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더 신학적으로 실력이 있는가?’ 이런 것을 따지지 말라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십자가마을이 예수님만 쳐다보고, 예수님 하신 일만 증거되길 원하지 여기서 누가 더 뛰어나고 하는 그런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것 같으면, 사랑의 집 앞에 뭐가 있습니까? 피가 있지요. 그러면 피를 이야기해야 될 텐데, 저주 받은 집안에서는 피가 없기 때문에 바라볼 피가 없고, 그러니까 자기의 의로움을 봅니다. 그러니까 “나를 무시하지 마라.” 이렇게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장모와 처형을 죽였어요. 왜? 자기를 무시한다고. 딴 건 다 용서해도 날 무시하면 용서가 안 돼요. 축구할 때 선수가 경기에 신경 써야지 골 못 넣었다고 야유하는 관중들 보면서 흥분해서 관중들과 싸움을 벌이면 됩니까? 관심을 어떤 일에 몰두해야 될 텐데 자기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조치로 일을 하면 그것은 제대로 일이 안 됩니다.
특히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딤후4:7)”라고 했는데, 사람을 보고 갔습니까, 뭘 보고 갔습니까? 하늘나라, 자기의 본향, 주님 주신 사명만 쳐다보고 간 거예요.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된 곳으로.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면 ‘아하, 내가 나를 닦달하고 손댈 필요가 없구나.’ 왜? 나는 사랑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뭘 해도 죄라는 것을 알고, 미움의 집에서는 뭘 해도 ‘나는 최선을 다해 남에게 꿀리지 않는 인간이 되겠다.’ 왜? 믿는 것은 자기뿐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가도 교회 간 자신을 믿고, 예수 믿어도 예수 믿는 나를 믿고, 놋뱀을 쳐다보지 않고 항상 자기를 쳐다봅니다.
5-6절을 봅시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관제가 뭡니까? 일종의 제사제도입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붓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뭘 생각합니까? 신문지상 구석진 한 곳에 ‘사도바울 드디어 갔다.’ 라는 것을 자기가 먼저 광고지 빈 칸에 스스로 자기 이름을 쓰고 “나는 이미 갔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나는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 잘 있거라. 타향아. 나는 고향으로 간다.’ 이게 나그네의 삶이지요.
10분 쉽시다.
(2009. 10. 13. 11:17 녹취 마침)
관리자(IP:124.♡.85.46)
09-10-22 19:06
광주090925b디모데후서4장6절b
광주 강의(09. 9. 25) 53-2
디모데후서 4장 8절부터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여러 개를 주느냐, 한 개를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받는 백성이 한 사람입니까? 아니죠. 두 사람, 새 사람이 될 수 있지요? 여러 사람이 될 수 있지요?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인데, 그러면 ‘의의 면류관을 여러 개 준비해 놓았는가?’
그런데 본문에 보면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지요. 그러면 의의 면류관이 여러 개가 되어야 하는데, 하늘나라의 특징은 양으로 안 따진다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죄를 양으로 안 따져요. 그러나 지상의 교도소는 죄가 가벼운 사람과 무거운 사람의 형량이 달라요. 노상 방뇨한 사람과 살인한 사람의 형량이 같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같아요. 하나님의 심판은 양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질로 따져요. 유황불에 들어가면 조금 뜨거운 곳, 적당히 뜨거운 곳, 굉장히 뜨거운 곳 이런 차이가 없어요. 같은 유황불이에요.
김영임의 ‘회심곡’을 들어보면 형벌의 차이가 있어요. 죄의 양에 따라 달라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천국 가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전부 유황불에 들어가요. 유황불에 온도 차이가 나는가? 아니에요. 다 똑같아요. 질적으로 지옥은 어느 구석에 가도 동일하며, 영원히 그곳에 갇혀 있어야 됩니다.
지옥 가는 자의 목록이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나와 있는데, ‘믿지 않는 자와 거짓말 하는 자’ 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자’와 ‘거짓말 하는 자’의 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칸막이가 없어요.
천국에서는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니고, 오직 하나만 있어요. 질적으로 하나만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는 한 사람, 두 사람 따지면 안 돼요. 144,000 때문에 요즘 한국교회가 아주 시끄러워요. 144,000 명단에 들어가려고. 이만희 목사라는 사람이 주장하기를, 훈련을 통과한 사람만 이 명단에 들어간다고 교인들을 훈련시킵니다. 이것은 ‘여호와 증인’도 마찬가지고, ‘신천지’도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44,000이 뭐냐고 하면서 엉터리 해석들이 나오는데, 144,000은 뭐로 축소가 되느냐 하면, 12 x 12 x 1,000으로 축소됩니다. 이것은 다시 12 x 12로 축소되고, 이것은 다시 12로 축소되고, 이것은 다시 1로 축소됩니다.
왜 그러냐? 1에서 나온 은혜가 144,000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이 뒤에 12 x 12 x 1,000이니까 1,000이 뭐냐 하면, 모든 택한 자의 완료입니다. 그래서 이 숫자는 양적으로 퍼져도 그것과 관계없이 질은 오직 하나에서 나온 거예요. 이것이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옵니다. 성전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를 손으로 다 쥐고 있는 거예요. 오른 손으로 일곱 교회를 쥐고 있으면 어느 교회이든 관계없어요. 모든 교회는 주님의 일곱 교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곱 교회, 즉 7이라는 숫자를 소급해 보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나에서 나왔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몇 일만에 창조했습니까? 칠일 만에 창조했지만, 창세기 2장에 보면 이 창조가 안식의 때에 올라가면 7일이 하나가 되어서 7의 반복은 하나를 말해주기 위한 되풀이가 되지요. 항상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창조하심, 한 분이 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겁니다.
동양철학은 하나에서 둘이 돼요. 동양철학은 전체를 태극이라고 하고, 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오고, 음양에서 네 개로 또 갈라지요. 네 체질. 태양인, 태음인, 소음인, 소양인.
그런데 성경은 하나에서 둘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수가 나와요. 왜 그런가 하면, 다수가 나와도(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결국은 하나로 소급되기 때문에 ‘전체는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예수님을 위해서 악마든 천사든 인간이든 모든 것은 한 분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메시아가 한 분입니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하지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 하나. 인간은 전체가 다 하나로 모아지고 그 하나에서 모든 인간이 알아보지 못하는 하나에서 또 하나가 나와요.
하나에서 둘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에서 하나가 나오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성부와 성자 두 분이 의논했어요. 그래서 하나에서 하나가 나오는 것을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요 8:18).”고 했어요.
겨울 수련회에서 요한복음을 할 계획인데, 아마 이해 못할 말 많이 나올 겁니다. 이 말을 그 당시 사람들도 못 알아듣지만 지금 우리에게 설명해도 굉장히 어렵지요.
그러면 이 다수가 하나 되는 것을 알려면 어떻게 하는가? 다수를 하나로 만드는 작업을 하지요. 그 다수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까요? ‘바둑 둘 줄 아는 사람?’ 하면 다수가 나오지만 바둑 못 두는 사람이 있잖아요. 기아 타이거즈가 프로야구에서 1등을 했는데 광주 사람들이 상당히 기뻐하지요. 그러나 대구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는 사람은 싫어하지요. 왜? 자기 팀이 12년 동안 계속 4강에 들어갔는데 이번에 못 들어가서.
그러니까 뭐로 만들면 하나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미 공통점이 우리 허락 없이 들어와 있어요. 그것이 뭐냐? 죽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죽었다’는 것이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이미 죽었어요. 그런데 아담은 몇 살까지 살았지요? 900살 넘게 살았잖아요. 그래도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을 표시 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 피카소가 어떻고, 아인슈타인이 어떻고, 노벨 평화상을 누가 받았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아인슈타인을 볼 때는 하나로 보지 않고 다수로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수학도 못하는데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천제구나.’ 나는 이러한데 아인슈타인은 이렇구나. 라고 하면 아인슈타인과 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지지요. 그러면 이것은 하나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아인슈타인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행복할까요? 아인슈타인이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추방을 받을 때 일시적으로 좋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아인슈타인의 문제는 수학문제를 못 풀어서가 아니라 ‘나는 왜 죽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포가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꿈을 꿉니다. 꿈은 공포입니다. 모든 꿈은 공포를 해소하려는 마음 때문에 일어납니다. 꿈에 날아다니기도 하고 하는 것은 떨어지면 죽는다는 의식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꿈에 누구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은 평소에 미운 사람에게 복수하지 못해 한이 맺혀서 그래요.
잠을 잘 때는 의식이 중단되니까, 무의식 속에서 평소에 내가 무서웠던 것을 가릴 수 있는 자체적인 드라마를 만들어요. ‘내가 이렇게 했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인데.’ 라는 식으로. 내가 현실 세계에서 채우지 못한 것을 꿈에서나마 잠시 채워봄으로 말미암아 마음의(심적인)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꿈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은 괜찮은데, 이것을 현실 세계에서 균형을 맞춘다고 하는 사람은 정신 분열증 환자들입니다.
이게 목사한테 있어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나오다가 무의식 속에 목사 티를 내요. “어디 감히 평신도가 나를 무시해!” 목사라는 직분이 인간을 버려놓았어요. 왜 목사가 안 좋은가 하면, 하나를 독자적은 자기로 대체해 버렸어요.
종이가 이렇게 있으면(이것을 삶의 환경이라고 봅시다.) 주체라는 것은 종이를 밀어 올리면서 돌출되는 것입니다. 돌출 되면서 그냥 돌출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이용할 만한 것을 끌어들여서 ‘이것은 나야!’라고 돌출할 때 그게 바로 주체라는 거예요.
평소에 아빠, 엄마가 이야기할 때 얘가 자고 있으면 얘라는 주체는 발생하지 않는데, 얘가 ‘응아 ~’ 하고 울면 엄마, 아빠가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이도 있구나.’ 하고 그 주체를 확인하게 되지요. 얘들이 왜 웁니까? 자기 주체를 알리기 위한 동물적 본성입니다.
남의 집에서는 얘가 잘 안 울어요. 왜냐하면 그쪽 환경에서 돌출될 주체가 없기 때문에. 남의 집에서는 점잖은 척해요. 그러다가 자기 집에 오면 생떼를 부리면서 난리를 쳐요. 신사분이 혼자 길을 갈 때 거지가 구걸을 하면 무시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신사분이 애인과 같이 갈 때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돈을 줍니다. 주변 환경이 나라는 존재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인지를 탐색해서 행동에 나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런 자기를 미워하라고 하셨잖아요. ‘너희들끼리는 통하지만 심판자인 나에게는 그런 것이 안 통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신사는 자기가 스스로 신사라고 착각하는 그것 때문에 누구한테 이용당했는가 하면 거지한테 이용당한 거예요. 누가 센 놈입니까? 거지가 더 센 거지요. 거지가 신사의 허위의식, 스스로 신사 되고자 하는 의식을 이용한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부가 아담 안에서 하나의 질인데, 인간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만이 하나고 나머지는 전부 다 하나가 아니고 나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배치물로 보지요. 이것을 가지고 ‘자기 역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역사’라고 할 때, 실제 있는 일을 역사라고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이 있으면 그 환경 속에 과거, 현재, 미래가 들어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 환경에서 내 주체가 돌출되면 돌출된 위치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봅니다. 즉 나의 있음을 중심으로 ‘이순신은 나에게 어떤 의미이고, 안중근은 어떤 의미이고, 에디슨을 보면서 나는 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이런 식입니다. 에디슨과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어요.
평소에 엄마 말 잘 듣든 아이가 어느 날 우연히 신데렐라라는 동화책을 보고 난 뒤에 밖에 나갈 때 바지를 안 입으려고 해요. 꼭 치마만 입으려고 고집해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아이가 치마를 입고 어디를 갔는데 누가 자기에서 “너 신데렐라 같이 예쁘구나.”라고 했어요. 이런 소리를 듣고 나니까 그 신데렐라와 자신이 무슨 연관이 있는 줄 알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치마만 입어요. 치마 입은 자신을 보면서 ‘신데렐라 같다’는 그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것을 ‘환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나중에 뭐 될래?’ 라고 물으면 그 속에는 타인의 욕망이 들어있어요. 남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게 돼요. ‘케보이’라고 하는데, 라캉이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없어요. 남들이 ‘너는 이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이야기한 그것을 내가 원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어때요?’ 남에게 물어보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면 남에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골프채를 차에 싣고 다닌다든지 해서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먼저 선점했다.’는 것을 보여주잖아요.
목사가 되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물어봐야 돼요. ‘당신은 어느 목사가 좋게 보여서 목사 되려고 하는가?’라고. 지금 우리 십자가마을에 이근호 목사가 많이 씹히는데, 그래서 십자가마을에서는 목사 되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만약 제가 교인 5,000명 되는 교회를 담임하고, 연봉이 1억쯤 되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면 십자가마을 젊은 아이들 중 목사 되려고 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닐 겁니다.
이것을 끊어야 돼요. ‘누구 때문에, 누구처럼’을 끊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수가 아니고 하나에 속하는데, 그 하나가 뭐냐 하면, 죄인입니다. 나는 그냥 죄인 속에 한 사람. 나는 죄인이라는 풀장에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받은 면류관은 뭐예요? 이 면류관은 나만 받는 것이 아니고 ‘나처럼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다 받는다.’고 했는데, 분명히 숫자를 헤아리면 여러 명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한 몸이고, 한 지체고 하나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 됨을 유지하려면 각자 서로를 비교하면 안 되고 놋 뱀을 봐야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눈을 떼면 하나가 아니고 다수가 되고, 다수가 되면 그 사이에 경쟁이 생겨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면류관을 나만 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가 다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를 왜 기다립니까? 이 모두가 하나 됨을, 그 원천 때문에 우리가 하나 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바로 주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제 대전 강의에서 처음 참석하신 분이 있어서 어려운 내용을 쉽게 한다고 했는데도 어렵게 되고 말았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람이 길게 살아도 90년 정도인데,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누가 계획해서 나를 만들었습니까? 분명히 내가 없는 상태에서 어떤 분이 나를 만들었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아는 것은 기껏 내가 태어나서 살면서 죽을 때까지 포착된 하나님만 압니다. 그러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면 결국, 나는 종지(작은 그릇)밖에 안 되는데 여기에 담는 하나님은 종지에 담긴 하나님밖에 더 되겠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종지에 다 담을 수 없는 큰 분이잖아요. 그런데 이 종지가 다른 종지와 다툰다면 우습겠지요? 옆에 있는 종지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붙여준 거예요. 너와 내가 따로(각자)인 것 같지만 따로가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는 전부 하나의 뜻을 위해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 중심으로 따로 역사를 만들고, 나 중심으로 선과 악을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폐쇄적인 것이 됩니다. 노무현 씨가 자살을 했는데, 자기가 기껏 몇 년을 살았습니까? 겨우 60년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다 압니까?
자기의 역사만 고집하다보니까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자기가 결정해요. 그래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부응이 바위에서 뛰어내렸지요. 왜 자신은 종지밖에 안 되면서 그 작은데 담아서 전체를 본다고 착각하느냔 말이지요. 그래서 옛말에 ‘시간만 지나가면 다 해결된다.’는 말이 있어요.
이번에 기아 타이거즈가 1등 했지요. 광주에서도 야구에 관심 없는 사람은 ‘왜 저렇게 야단들이냐’고 합니다. 그리고 기아 타이거즈의 팬이라 할지라도 막상 자기 아이가 아플 때는 타이거즈 1등 한 것 잊어버려요. 자기 아이 아픈 것이 더 우선이 되니까. 그만큼 타인이에요.
그리고 아무리 우승을 해서 기뻐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 별 것 아닙니다. 시간 지나면 물에 물 탄 듯이 별 것 아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의의 면류관 주실 분을 기다려야지 ‘나 잘났어요.’ 하는 것은 시간 지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젊을 때 미남이고 장동건이 잘생겼고 하지만, 90된 장동건을 생각해 보세요.
전도서에 나옵니다. 사람이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안 보이고 할 때에, 이것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원래 죽은 인간이에요. 육체가 흙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세요. 흙에서 늙은이가 되었다고 젊어져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관점에서 젊음을 보면 젊다는 것을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그 생각을 못해서 ‘내가 늙으면 안 되는데.’ 이러고 있단 말이지요. 주름살 편다고 성형수술하고 주사 맞고.
나는 결국 하나에 흡수됩니다. 흡수, 통합되는 것을 저는 ‘흐물흐물해 진다’고 했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식을 군에 입대시키고 엄마가 제일 서글픈 것은, 군에 갈 때는 상당히 젊었는데 제대할 때 늙어 보일 때 마음이 아픕니다. 자기 늙는 것은 생각도 안 하고. 시집간 딸을 오랜만에 만나면 ‘시집가서 고생 많았구나.’ 하면서 가슴 아파합니다. 세월이 지나서 늙었을 뿐인데.
그래서 하늘나라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아비도 자식도 없고 천사와 같아요. 시집도 장가도 아니 가고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같이 살아요.
지금 하늘나라가 복잡한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 자식입니까? 다윗의 자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다윗에게 뭐라고 해야 됩니까? ‘할아버지!’ 이렇게 불러야 되겠네요. 그 문제를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지적했어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인데 어떻게 후손이 다윗의 주가 되느냐?’는 것이지요.
바리새인이 답변을 못해요. 왜 못합니까? 인간의 시간론 때문에. 역사는 과거로부터 흘러가면 그만이죠. 그런데 묵시에서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고무줄처럼 위에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그래요. 시간도 하나고 공간도 하나고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물론 나중에 공간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지만.
자, 그렇다면 이 하나 됨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디모데후서 4장 11절부터 보겠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도직입니다. 아버지가 한 분이기 때문에 아들이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느 신학 책에도 안 나오지요? 왜 독생자입니까? 아버지가 한 분이기 때문에 아들이 한 분입니다. 아버지를 보여줄 두, 세 아들이 없다 이 말입니다. 한 하나님을 위해서 한 아들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시110:1)” 하듯이.
그러면 아들에서 다수가 되어야지요. 이 다수를 뭐로 묶어야 된다? 아들에 이르기 위해서 하나로 묶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전부 하나지요. 이삭은 야곱에게서 나오지요. 이삭이 빛이라면 그림자는 누구입니까? 이스마엘. 야곱의 어두운 그림자는 에서.
분명히 이삭과 이스마엘 둘인데 하나님은 하나밖에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스마엘은 잘려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떨어진 것도 둘이 아니고 하나이어야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두 노선이 있어야 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있듯이.
항상 하나의 노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같이 가고 싶어도 떨어져 나간 다른 하나가 있어요. 이 떨어져 나간 다른 하나는 항상 다른 하나를 핍박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지요.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한다(29절).’
핍박한다는 것은 자기도 하나 되려고 붙다가 떨어져 나갔어요.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떨어져 나간 다른 하나가 필요했다 이 말입니다. 천국이 하나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떨어져 나간 지옥이 필요한 거예요. 지옥은 뭐냐? 천국 못 간 인간들이 지옥입니다.
그러면 하나에서 하나가 되려면 어떤 원칙이 있느냐?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몇 명입니까? 한 명이지요. 하나잖아요. 하나인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뭐로 바꿔요? 하나를 둘로 만들어 놓고 하나를 발로 차버리지요. 첫 번째 사마리아 여인이 뭘 달라고 합니까? 물을 달라고 하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보는 물은 컵에 담기는 10리터, 또는 20리터. 양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떨어져 나갈 사마리아 여인이 갖고 있던 물의 의미라면, 새로운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하는 물은 몇 리터입니까? 이것은 아무리 퍼도 끝없이 나오는 물입니다. “네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리라.”
그러면 우리 자신도 우리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새 사람에 기 붙어서 옛 사람 차버리고 새 사람 되기 위해서 나를 둘로 잘라야 하는데, 그 일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었고, 예수님이 네 안에 사는 조건하에서만, 네가 살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너는 새 사람이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네 안에 네가 살지 않고 예수님이 사는 조건하에서만 너는 새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 힘으로 삽니까? 예수님 힘으로 사는 거죠. 예수님이 들어있는 그 하나 만들기 위해서 나만 있었던 나를 차버려야 되는 겁니다. 이게 자기부인이죠.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뭐라고 합니까?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4:6).’고 했지요. 남편이 다섯이었고, 지금도 한 명 사귀고 있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남자관계를 청산하라’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영생을 주는 것은 남자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이 임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착해지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아니지요. 착하거나 나쁘거나 관계없어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롬8:11).’고 했어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나는 옛 사람 그대로인데, 남자관계 그대로인데 ‘주님 때문에 나는 영생 얻었다.’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옆에 최 집사, 박 집사, 김 집사가 각자 있더라도 동일한 하나가 들어가니까 다 같이 동일한 성령 때문에 한 몸이 되고, 하나의 백성이 되고, 하나의 하나님 나라 권속들이 되는 겁니다.
야곱에서 12명이 나왔지요? 그러면 이 12명의 그림자는 뭡니까? 이삭의 그림자가 이스마엘, 야곱의 그림자가 에서인데, 12 아들들의 그림자는 뭡니까? 각자 본인들이죠.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장차 이스라엘 속에 등장할 이스라엘을 위하여 배태해야 될 하나의 자궁이 되지요. 모태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나왔던 사도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누굽니까? 14절에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그러면 이 사람이 사도바울을 안단 말입니까, 모른단 말입니까? 아는 사람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을 괴롭혔어요. 왜 괴롭혔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를 바라보는데 이 사람은 자기 독자적으로 자신을 생각하니까 ‘내가 네 말 왜 듣는데? 네가 뭔데?’라고 하고, 바울은 ‘우리 서로 잘났다고 하지 말고 주님 바라봅시다.’ 아까 나왔지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8절)”가 구원 받는다고 했잖아요.
바울은 ‘주를 바라봅시다.’ 라고 하는데, 알렉산더 같은 사람은 주는 안 바라보고 ‘너만 최고야! 너만 사도야!’ 고린도후서에 나오잖아요. 이것은 자신도 알아달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사도바울은 주님 증거하는데 그쪽에서는 자기 자신을 알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인생은 한 번에 훅 갑니다. 10년 믿고 20년 믿어도 소용없어요. 언제 어느 시점에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따로 챙길 수 있고, 하나를 인정하지 않고 여럿을 인정해 달라. 이렇게 해서 여럿이 하나로 뭉치는 인간적인 방법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십자가마을에 민주주의 하자.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인위적인 방법으로 여럿을 하나로 만들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