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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0908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2자유게시판미가

20090908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2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908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2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강의 가운데서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강조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여기 요한일서 2장 8절, 9절에 나오는 빛. 빛 가운데 행하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빛이라는 게 뭐냐 하면, 사람은 빛이 아닙니다. 사람은 200조 개의 세포로 돼있습니다. 세포는 단백질로 돼있고. 빛이 아니에요. 빛은 파장과 광자로 돼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는 빛이라 했잖아요. 이 말을 그냥 ‘알아듣습니다’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그걸 따져보는 가운데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일을 풍성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돼요.

사람은 단백질로 되서 온도 200도 되면 녹아버립니다. 빛이 아니에요. 그냥 물체지요. 물체가 어떻게 빛이 되고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말이에요. 물체가 빛이 되고, 물체가 어둠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쪽에서 물체가 빛 되게 하시는 새로운 작업이 여기서 가미가 되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보면, 예를 들어서 성경에 사랑이 나오니까 사랑이라 합시다. 그러면 사랑은 몇 그램입니까? 사랑이 몇 미터죠? 사람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손에 만져지는 게 전부에요. 전부인데 이 사람과 이 사람 사이에 ‘사랑한다’ 하니까 갑자기 이쪽에서 호르몬이 증가하면서 좋아해요. 분명히 사랑은 없는데 왜 사랑이란 말을 하면 저쪽에서 흐물흐물 녹아지고 ‘나도 좋아해’ 하면서 왜 이렇게 뽀뽀하고 왜 이런 짓을 하느냐 말이죠. 사랑이 물건도 아니고 도움 되는 게 아닌데.

이걸 가지고 ‘표면효과’라 합니다. 이 말은 너무 어렵고, 들뢰즈가 한 건 어렵고. 그냥 쉽게 말해서 이걸 ‘상징’이라 봅시다. 상징이라 하니까 사람들이 없는 걸로 여겨요. 왜냐하면 몇 킬로입니까, 몇 미터입니까, 키는 얼마고?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무조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없다고 여긴다는 말을 무슨 뜻이냐 하면, 뭐든지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그걸 ‘환원’이라 하죠. 되돌아오지 아니하면 무가치한 걸로 여기는 인식들이 우리한테 있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인간은, 성경은 육이라 하는데 육은 반드시 육으로 돌아오게 돼있어요. 육의 특징이 뭐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렇다면 나에게 내 몸에 어떻게 유리해, 나 오래 사는데 얼마나 불리해, 얼마나 유리한데, 내 몸의 컨디션을 좋게 하는데 당신의 그것이 어떤 이익을 주는 거야? 반드시 뭘 이야기할 때 나한테 대한 이익, 이런 걸 하는 거예요.

돈 같은 경우에는 눈에 보이잖아요. 돈 보면 물건을 살 수 있잖아요. 교회 와서 기도할 때 ‘주님이여, 복을 주옵소서.’ 복은 상징에 불과하고 이걸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답변해 보세요. ‘돈을 주옵소서.’로 바뀌어져야 된다 이 말이죠. 그래야 내 주머니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은 기도를 해도 항상 뭔가 내 몸이 유리한 쪽으로 잡아당기는 쪽으로 오게 된 이유가, 내 몸에서 원하는 것을 먼저 저쪽에 던져놓은 것을 회수하는 식으로 기도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솔로몬은 기도를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몸에서 나오는 걸 다 잘라버렸죠. 부자 되는 것 거부하고, 오래 사는 것 거부하고, 나를 괴롭히는 원수에 대한 존재도 거부하고 뭐만 알았습니까? 추상 중에 추상적인 것,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뤄지는 그것만 했죠. 하나님 뜻대로 백성들 다스리는 것, 내 백성이 아니고 주의 백성이니까 주의 뜻만 지키길 원했죠.

그러면 자기는 뭐가 돼요? 매개체가 되면서, 매개체란 말은 그냥 스쳐지나가니까 자기는 녹아 없어지는 거죠. 지난 수련회 할 때 카드 옆에 있으라 했죠. 그럼 말씀이 와서 그냥 통과한다 했죠. 이 말씀이 나한테 한 덩어리 돈 던지고 나머지 빠지는 게 아니고, 그냥 댐 방류하듯이 비가 와서 댐이 넘치니까 그냥 뺐다는 거예요. 북한에서. 빼니까 여섯 명 죽었잖아요. 그냥 와서 그냥 빠지는 거예요. 완전히 설사에요. 먹은 대로 빠진다 이 말이에요.

그럼 자기 존재는 없죠. 그렇다면 백성들이 누구에게 영광 돌리겠습니까? 솔로몬이 아니고 그대로 투명하게 솔로몬을 통과해서 오직 여호와만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래서 기도할 때 어떻게 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 이름이 아니고 누구 이름? 아버지 이름 거룩케 하기 위해서는 나는 뭐냐? 나도 용서받아야 될 존재에 불과하며 나도 매일같이 일용할 양식을 얻어먹어야 될 그러한 가련한 거지같은 인간이란 걸 고백하는 것이 주기도문 아닙니까.

그러니까 집이 세 채 있어도, 통장에 10억 있어도 나는 뭐다? 있으나마나한 거지입니다. 갈비를 썰면서, 안심스테이크를 썰면서도 주여,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매일같이 죄가 생성되니까 그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냥 통과 도구로서만, 통과되는 존재로서만, 매개체로만 사용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주기도문인데 그 주기도문대로 사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나는 내 뜻을 이루러 온 게 아니다. 아버지 뜻을 이루려 함인데, 아버지 뜻이 뭐냐?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마지막 날에 다 살리는 이것이다. 그럼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버지가 주신 자의 죄를 누가 짊어져야 돼요? 자신이 짊어져야 돼요. 자기는 죄 안 졌어요. 죄 안 졌기 때문에 저주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주를 받아야 되는 것이 아버지의 피할 수 없는 쓴잔이라면 내가 쓴잔을 마시도록 프로그램화 돼있다면, 어쩔 수 없지요. 쓴잔을 마셔야 되지요. ‘마시겠습니다’ 했잖아요. 그러면 쓴잔 마신 예수님의 십자가란 복음이 우리에게 전수되면,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졸지에 뭐가 돼버립니까? 천하의 죄인 되죠. 아주 못된 죄인이에요. 그리고 우리 힘으로, 우리 공로로 절대로 구원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파악하는 거예요. 아무리 성경공부하고, 성경 달달 외우고, 새벽마다 성경 써도 그걸로 구원되는 게 아니란 거예요.

그렇다면 뭐냐? 이 몸 행동 한다면, 요한일서에서는 그걸 어둠이라고. 그러니 우리의 행동한 이걸, 세포로 돼있는 우리 육체를, 육을 옮겨버리면 여기에 어둠이 돼버려요. 어둠이 될 때 빛은 우리에게 없었고 빛은 딴 데 있었는데 그 빛에서 뭐가 나온다? 빛과 어둠 사이에 사랑이 나온다는 이 구조가 요한일서, 이서, 삼서의 구조입니다.

아예 우리가 어둠으로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빛으로 묘사함으로 말미암아 빛은 뭐 때문에 있다? 빛은 이쪽이 어둠인 것을 말하기 위해서 빛이 뜬 거예요. 겨울수련회에 요한복음할 건데. 정말 어렵습니다. 진짜 요한복음은 아마 수련회 가운데 제일 어려운 수련회 같은데 하고 싶어요.

빛이 나타났다는 것은, 어둠이 없는 빛은 의미가 없어요. 지옥 없는 천국이 의미가 없듯이.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지옥 십년 살다 나오면 안 된다고. 왜? 지옥 십년 살다 나오면 천국 십년 살다 나오기 때문에 큰일 나는 거예요. 천국에서 못 나올 것 같으면 지옥에 간 사람은 절대로 나오면 안 돼요. 부자 없는 거기 나사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지 나사로 됨은 지옥 간 부자와 세트를 이루어서 갔기 때문에 부자가 지옥 갔다 빠져나와버리면 거지 나사로도 천당 갔다 그 시간에 나와야 되기 때문에.

이게 왜냐? 같은 속성이기 때문에. 어려운 말로 예수 그리스도 속성 가운데 같은 속성이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따로 움직이는 법이 없어요. 바로가 강퍅하지 아니하면 때려죽어도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 될 수 없습니다. 강퍅해줘야 이스라엘 받은 사랑이 더욱 빛이 나는 겁니다. 그렇게 돼있어요.

항상 종이에 앞면과 뒷면이 있듯이 앞면만 있는 종이는 없어요. 항상 언약에 들어가면 언약은, 신명기 28장에 나오죠. 이렇게 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만 있는 게 아니고 신명기 28장 15절부터 보면, 네가 이 말씀 안 지키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고 있지요. 에발산과 그리심 산의 존재가 뜻이 뭡니까? 한쪽 축복 산이라면 반드시 하나는 저주 산이 돼야 돼요. 저주 없는 축복은 의미가 없고, 축복 없는 저주가 의미가 없어요.

왜 저주받아야 되는가? 축복이 없으니까. 왜 축복 받아야 되는가? 저주가 없으니 정죄할 사람이 없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누가 널 정죄 하더냐? 없습니다. 없으면 그게 축복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방법은 간단해요. 저주를 주님께서 없애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동적으로 축복 안에 존재하게끔 그런 식으로 구원합니다.

불교라든지 다른 종교는 자기가 용을 써야 돼요. 지가 아주 땀을 내야 돼요. 이걸 보면 한국교회가 불교인지 분간이 안 되는데. ‘가만있어라. 내가 구원하겠다.’ 이것 아닙니까.

어렵게 해봅시다. 여기에 지금 뭐가 어려우냐 하면, 요한일서에 보면, “내가 손으로 만진 바요, 본 바요”로 돼있지요. 어려운 것 해볼게요. 빛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소개할 때는 뭐냐? 예수님을 본 바요, 만진 바죠. 그러니까 빛이 아니고 육체지요. 육체에서 어떻게 빛이 되느냐? 이걸 설명해야 돼요. ‘믿습니다’ 하면 될 문제가 아닙니다.

왜 이것이 설명되느냐 하면, 육체에서 빛 되는데 그것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 요한일서 5장 6절, 다같이 봅시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지금 요한일서에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가 발생했잖아요. 그 사람들은 말하기를 육체는 육이요, 영의 세계는 영의 세계인데 육체와 영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이 적그리스도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영지주의에서 했다고 하는데 잘못된 거예요. 영지주의와 관계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복음을 모른다 치고 육체가 된 인간이 영의 존재, 신의 존재가 되려면 어떤 아이디어를 여기다 집어넣으면 되겠습니까? 지금 세상의 모든 종교를 가진 사람, 안 가진 사람 다 갖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을 육을 둘로 분리하면 되겠지요. 첫째는 불멸 요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가 사멸 요소로 나누면 되겠지요.

지금 기독교가 서양에 들어오기 전에 철학자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있었잖아요. 이거는 기독교와 관계없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있기 전에 이스라엘 있든 말든 바벨론, 앗수르의 종교가 어떤 종교입니까? 애굽의 종교가 어떤 종교에요? 이집트 종교가 이시스, 태양신이잖아요. 그들이 종교가 놀랍게도 부활 종교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종교가 유명한 바알 신. 바알 신이 부활 신이에요. 바알의 아버지가 ‘엘’이에요. 엘은 최고 신인데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노아방주가 도착한 아라랏 산에서 나온 신이라고.

그 아라랏 산에서 내려다보면 여기에 바벨론 보이고, 앗수르 보이고, 팔레스타인 보이고, 지중해 보이고, 저 멀리 애굽이 보인다 말이죠. 아라랏 산 이쪽의 유럽은 계시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계시의 장이 아니라고. 필드가 아닙니다. 항상 이스라엘과 놀아도 이쪽에서 놀아요. 자칫 잘못 이야기하면 우리나라 단지파 하는 또 엉뚱한 소리나온다. 이런 공간적, 시간적 개념을 할 때 주의해야 돼요. 인간의 시간, 공간도 여기서 나왔다는 걸 고려해야 돼요.

어쨌든 간에 불멸적 요소와 사멸적 요소 나온다면, 불멸 요소를 사람들은 영혼, 몸은 죽어도 영혼이 살면 땡 잡았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인간들이 누구든지 만든 아이디어죠. 그러면 그 다음의 문제가 뭡니까? 영혼이라 한다면, 영혼에도 질적으로 수준 차 있을 것 아니냐. 소위 고품질의 영혼과 저질스런 영혼, 그걸 나눠야 되겠죠.

오래살긴 하는데 더럽게 오래 사는 것, 그리고 고상하게 오래 사는 것, 품위 유지하면서 골프 치면서 오래 사는 것, 여호와증인들. 진디 밭에서 골프 치면서 사는 것. 이슬람교 같은 경우에는 천국 가면 여자들 있고. 꼭 여자들 있어야 돼. 술시중. 분수가 있어야 돼. 왜냐하면 사막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세계라 하는 것은, 자기가 살았던 환경 가운데서 모자라거나 미흡하거나 결핍된 요소, 자기 욕망을 다 채우지 못한 것을 꿈에나마 볼 수 있는 걸 보충해서 제2의 자아상, 그 사이를 비전, 꿈, 이상. 보이즈비엠비셔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야망이라 하는 거예요. 야망을 가지려면 무릎이 낙타무릎이 돼야 된다는 책이 [낙타무릎]이란 책이죠.

영혼을 질적으로 우수한 영혼으로 만드는 여기서 나온 게 캘빈의 성화론이에요. 캘빈의 성화론을 분석해보면 세 가지로 돼있어요. 첫 번째는 선한 일, 세 번째가 악한 일. 재미있는 것은 중간이 문제에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일은 니 마음대로 하세요. 융통성을 줘요.

그렇다면 인간이 스무 살 때 생각했던 선한 일과 악한 일은 누구한테 배웠지요? 스무 살 때까지 자기 아버지한테 배웠지요. 아버지가 소주 세 병 잡숫고, 두 번 다시 다섯 병 안 잡숫는 걸 보고 소주 세 병까지는 선한 일로 보는 거예요. 201호 아파트에서. 그런데 202호 아파트는 아버지가 아예 술을 안 먹어. 그러면 202호 아이들은 뭐가 선한 일입니까? 아예 술을 안 먹는 게 선한 일이에요.

그런데 201호는 담배를 피우는데 베란다에 나가서 피우면 선한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걔는 뭐냐? 담배를 베란다에 나가서 피우면 그게 나쁜 짓인지 모르는 거예요. ‘금연’이라고 돼있는데서 담배 피우면 나쁜 짓이고 거기서 담배 안 피우면 선한 일이죠. 그 사람이 버스정류소에서 피울 때 저는 가만있지 않고 ‘아저씨, 담배 피우지 마세요.’ 하거든요. 그 사람이 ‘뭐, 내가. 금연 어디 있는데?’ 이러거든요. 그 사람한테는 금연 없는 데선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담배 연기가 몸에 해롭고 남한테 불쾌감을 준다는 생각이 없고 금연 없으면 다 되는 줄 알고.

광주에서 식사하는데 주인이 식당 1층 전부를 금연석으로 해서 세 줄로 돼있는데 앞에 ‘금연’이라고 써놨어요. 전체가 금연이라고. 우리가 식사를 여기서 했거든요. 이 앞에 남녀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담배 왜 피우느냐?’ 하니까 이 줄만 금연이고, 이 줄은 금연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담배연기 안 퍼집니까?’ 하니까 여기만 금연이라는 거예요. 담배연기 퍼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선악과가 결국은 무엇의 용도로 활용됩니까? 어쨌든 나는 옳다는 것, 내가 존재할 정당성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선악과가 동원돼요. 제가 주일날 했잖아요. 그 교도소에 유영철 하나 오고 난 뒤에 유영철 빼놓고 나머지 모든 인간은 졸지에 뭐가 됐어요? 의인 됐어요. ‘아이고, 인간아. 난 두 명밖에 안 죽였어. 스무 명이 뭐고. 난 조폭 죽였어. 너는 연약한 여자를 어떻게 죽일 수가 있느냐?’ 졸지에 두 명 죽인 놈이 의인 돼버렸거든요.

그게 모든 선악구조는 어쨌든 최후의 남아 있는 게 뭐냐 하면, 자기의 의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남 탓이고, 사회가 날 이렇게 만들었고, 나는 잘 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교육을 못 받아서, 난 태어날 때부터 고아기 때문에. 하여튼 핑계가 뭔 핑계가 그렇게 많은지. 근데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십자가 짐으로써 그들의 핑계 제일 밑바닥에 내려가 버렸죠. 그러면서 핑계치 못하리라.

그러면 십자가를 보고 우리는 뭘 해야 되느냐? 우리는 매일같이 나의 잘남을 핑계하면서 군화발로 뭘 지근지근 밟고 있느냐 하면, ‘예수, 넌 입 좀 다물어 둬.’ 하고, ‘네가 입 열면 내가 졸지에 죄인 되잖아.’ 십자가가 안 들리는 곳으로, 십자가가 외치지 않는 곳으로 우리가 군화발로 예수 십자가를 계속해서 밟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여야 되는 겁니다. 왜? 스데반 집사가 있어버리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졸지에 죄인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복음 전하는 사람을 매일같이 짓밟는 그 역사를 가지고 쓰인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목 베인 영혼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두 증인 죽은 곳이 뭐라 했습니까? 그게 어느 장소가 되던 예수님의 십자가 못 박히신 곳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영역은 공간, 시간의 영역이 아니고 이미 이 세상 자체가 어느 지점에 관계없이 어둠이 되고, 어둠에 빛 되신 주께서 작용하죠.

그런데 그 육체가 인간들은 영혼과 소멸한 육체 둘로 나누어서 이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셨다는 거예요. 보세요. 똑같이 빛이란 용어를 사용했죠. 영지주의에서도 빛이라 했고 요한복음에서도 빛이라 했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사람이 빛이란 단어가 오니까 그 빛을 뭐로 봅니까? ‘나는 어쨌든 간에 나는 살아남아야 돼.’라는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입장에서 빛이란 개념을 자기 머리 속에 집어넣어요. 나는 빛을 알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빛을 모르는 것은 구원 못 받는다. 따라서 나한테 한 수 배워라.

그런데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얼마나 이게 신기하며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왜냐하면 사람에게만 배워야만 그게 가르침이라고 익히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 가르침 받고 교사가 있었고.

그런데 여기 보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기름부음이 너를 가르친다. 기름 부음이 가르치다 보니까 계속 가르치려면 계속 기름 부음이 있어야 되죠. 그러면 기름 부었다는 말은 기름 붓는 어떤 주체가 있어야 되죠. 그래야 우리는 기름 부음 받는 객체가 되니까.

다시 봅시다. 말이 어렵습니다. 기름 부음을 보통 요한복음이나 마태, 마가에서는 성령이라 하잖아요. 요한일서는 성령이라 하지 않고 그냥 기름 부음이라 했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성령이라는 것을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하나의 과정으로써 액션, 행위로 본다고, 성령 있다 이게 아니고 성령이 지금 일하고 있다는 거예요.

너희 집에 파출부 있나? 파출부요? 이 예 잘 들어보세요. ‘파출부 아줌마 좀 나와 보세요.’ 하면, 파출부가 청소하다가 나올 때는 청소기 시동이 꺼져야 되죠. ‘왜 불렀어요?’ 이러잖아요. 그런데 그리하는 게 성령이 아니고, 성령은 뭐냐 하면, 파출부 있어요? 소리 한 번 들어보세요. 위~잉. 있어요? 누군데요? 위~잉. 계속 뭔가 일하면서 바깥에 누가 날 찾는데요? 하고 섞여 나오면서 계속 하죠.

그렇다면 성령은 우리 육으로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규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거예요. 이게 왜 요한일서에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양보 없는 분열, 노선을 둘로 쪼개기 위해서, 보고 믿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하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 용어를 사용해서 나도 믿는데 여러분도 믿습니까라는 식으로만 호소할 뿐이죠.

참 이것 들으면 목회자 목회 다했습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걸 원하는데 눈에 보이는 걸 하지 말고 교인들이 믿지도 않는 걸 계속 이야기해요. ‘여러분 속에 기름 부음이 있지요?’ 교인들이, ‘없는데요.’ ‘그럼 안 나오셔도 괜찮습니다.’ 이런 식으로 무슨 목회가 되며 사람들이 남아있겠습니까?

사람의 소통이라 하는 것은 육에서 서로가 같이 공통점이 있을 소통이 되거든요. 그럼 다시 봅시다. 아까 인간들이 아이디어는 뭐라 했습니까? 이 번이 껍데기였고, 사멸 되는 것, 없어지는 것. 첫 번째는 뭡니까? 불멸이죠. 그러면 사람 대 사람으로 이야기하려면 불멸을 이야기해야겠죠. 그런데 불멸이 처음부터 사람에게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질문합니다. 사람들에게 불멸의 요소가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있어야 된다는 그 자체가 문제, 죄가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없는 기름 부음이 와야 비로소 성도로서 이야기가 되는데 사람들은 없는 걸 이야기해버리면, ‘으흠, 목사님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렇게 된다 말이죠. 있는 걸 이야기해줘야 있는 것끼리 통하잖아요. 영혼이 잘 됨 같이 해줘야 된다고. 이게 이야기 된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기름 부음이 우리 자신을 뭐로 바꾸느냐? 이 자체를 죄, 이 자체를 어둠이라고 만들기 위해서 여기에 적그리스도 주장을 빌려온 거예요. 요한일서에서. 너희들이 적그리스도를 아느냐? 압니다. 뭔데? 영혼불멸설 주장합니다. 그렇지. 그렇다면 너희는 아니지? 아니죠.

아니면 뭐냐?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몸에서 일어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가르치고자 한 그게 바로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하나님 속한 자만 알아듣고 세상 속한 자는 못 알아듣는 이유가 그 이치다. 왜? 완전히 결별돼있으니까. 노선이 다르니까.

요한일서를 보면서 신학자들은 해석하면서 이래요. 영지주의 영향을 받아서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은 증거한다. 예수님의 사귐이 있다. 그렇게 하니까 신학자들이 뭐가 두려우냐 하면, ‘예수 안에서 보이지 않게 사귄다는 자체가 영지주의 아닙니까?’라고 공격할 때는 답변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영지주의도 다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우리는 빛 안에서 사귐이 있고, 하나님 영 안에서 사귐이 있다.

그러면 요한일서에서 진짜 사도 요한이 이야기하고자 한 영지주의와 우리는 완전히 반대라는 근거를 요한일서 주석이나 책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니까요. 특히 요한일서 2장 27절 이 말씀 들어버리면, 이걸 만약에 목사가 그냥 설교해버리면, 교인들이 누구 말 안 들을 가능성이 많습니까? 목사 본인 말을 안 들을 가능성이 있어버리면 목사의 카리스마, 권위가 안 먹어주죠. 그러면 그 목사가 그 교회를 자기 소유화 할 수 없잖아요. 자기 소유의 양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거기서 돈을 빼먹지 못하죠. 좋은 걸 빼먹지 못해요.

그렇다면 진짜 요한일서 시절의 목사는 어떤 목사냐 하면, 예수의 피와 살과 성령이 뭘 증거하느냐 하면, 바로 육체와 진짜 어둠과 빛을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물과 피와 살과 성령이죠. 이걸 한꺼번에 말하면 무슨 층이라 했습니까? 사랑이죠. 그렇다면 목사가 들어갈 위치가 어딥니까? 사랑에 들어가야 되죠.

사랑에 들어가게 되면, 요한일서 3장 16절, 뭐라고 돼있죠? 형제에 대해서 사랑을 알면 그 사랑이 여기 있다가 아니라, 사랑이 요한일서에서 과정이에요. 액션이니까 사랑을 알면 그 사랑은 형제를 위해서 마땅하다는 자리에 목사가 먼저 서 있어야 되겠죠.

그러면 목사가 ‘나를 섬기세요’ 하지 않더라도 나, 나, 나를 주장하지 않더라도 누구만 알아봅니까? 똑같이 기름 부음이 있는 성도는 그 목사를 보면서 목사 위대하다고 본 게 아니고 목사 안에서 주의 사랑이 저렇게 희생적인 사랑이구나를 빼먹으면 되죠. 그러면 나의 간, 쓸개 다 빼먹으라고 나와야 될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요한일서에 있는 대로 합당한 목회자가 되겠지요. 그래서 이 말을 정리하면, 요한일서대로 된 사랑을 아는 목회자는 결코 ‘나를 섬기세요. 내가 중요한 존재입니다.’ 말을 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그저 섬기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우리 노회 목사님들은 너무 잘 섬기다보니까 교인들이 부담이 되서 겁이 나서 다 도망 가버렸어요. 몇 명 남지도 않아요. 우리 장 목사님. 그래서 제가 아까 처음에 강의했잖아요. 적어도 ‘나는 이렇게 거짓말로 살아갑니다.’라는 말을 안 해야 되는데 목사가 저는 이런 식으로 거짓말하며 살아가는 목사라고 해버리니까 교인들이 부담이 되서 다 도망 가버려요.

서로 거짓말을 쥐고 있어야 소통이 되는데 너무 진리를 이야기해버리니까 진리가 와서 나한테 이런 거짓말 있음을, 목사에게 이런 죄가 있음을 까발림을 당했다고 해버리니까 진리를 이야기해버리니까 어둠에 속한 자는 무엇이 무서워서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진리가 무서워서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요한복음 3장 19절, 20절에 나오는 그대로 어둠은 빛을 무서워해서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결국 하나님의 일은 뭐냐 하면, 가인과 아벨의 극단적인 분리에요. 노선을 완전히 조각내버립니다.

그 다음에 어려운 것 해봅시다. 요한일서 4장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다. 그러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 믿어집니까? 아니지요. 요한일서 1장에 보니까 자기가 죄 없다 하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을 피와 살과 성령이 한 모든 것을 전부다 헛된 것으로 간주할 경우에만 내가 죄 없다 하는 거예요. 내가 죄 없다 하는 그 순간 예수님의 피와 모든 것은 헛짓한 게 되죠.

그러면 ‘나는 원래부터 죄인입니다’ 하는 사람에게만 예수의 피와 물과 성령이 의미가 있고, 그냥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액션, 그것이 나를 덮치죠. 그럼 이 과정을 육체와 빛과 만나는 것이 피와 물과 성령이라 하는데 이 과정이 ‘우리가 이렇게 합니다.’라고 예수님의 몸으로 이렇게 합니다 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육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구체적인 과정, 메커니즘을 설명을 해줘야 돼요.

성령이 오게 되면 당신의 육체는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게 돼있다. 이렇게 설명돼있죠. 그런데 사람의 궁금증이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어째서, 어떻게 해서 성령이 오게 되면 그렇게 합니까?’라고 또 묻는다고. 묻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실 궁금한 게 내가 성령 받은 건지, 성령 안 받아놓고 우기는 건지, 자기가 확인할 증거물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또 묻는다고. ‘목사님, 성령 받았을 경우와 받지 못할 경우가 확연하게 어떤 경우를 두고 갈라집니까?’라고 묻게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여기서 우리 몸을 대지 말고 예수님 몸을 대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에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걸 잘 지적했어요. 뭐냐 하면, ‘하늘이 열리며’라고 돼있거든요. 원어 상으로 찢어지면. 하늘이 찢어지면 구멍이 생기죠. 그 구멍을 통해서 성령이 오시죠.

그렇다면 하늘이 안 찢어졌다고 봅시다. 안 찢어진 상태에서 예수님의 몸과 사람들 몸이 있다면, 하늘의 일이 이뤄집니까, 안 이뤄집니까? 안 이뤄지죠.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늘나라 갈 수 있습니까? 성령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부터 묻고 싶어요. 예수님께도 성령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늘의 사랑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안 되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안 되는 이유가 뭐냐? 이런 게 어려운데. 사람은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는 가만있지 않고 자꾸 뭘 만들어낸다? 육체가 표면효과, 그걸 뭐라 했습니까? 상징이라 했지요. 그러면 사람의 몸은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는 천국과 뭐가 있더라도 가만있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천장을 향하여 뭘 쏘아댑니까? 천국도 여기다가 도배를 하고 그려내고, 나쁜 놈은 지옥 가라 해서 지옥도 만들어내고. 이게 오늘날 종교라고.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가만있지 않고 자꾸 상상을 하죠. 나쁜 놈은 지옥 가거라.

김영임 씨가 불렀던 유명한 노래, 사모곡. 사모곡 가사를 아십니까, 여러분? 저는 어릴 때 사모곡 듣고 살았어요. 그 가사내용이 뭡니까? 부모한테 효도하면 염라대왕한테 칭찬받아서 좋은데 가고, 부모한테 효도한 양만큼 지옥 가서 차등화 된 감옥 생활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부모한테 잘해라 그 말 아닙니까. 부모한테 못해도 패자부활전이 있어요. 천도제 해요. 이것 돈 좀 써야 돼. 오백만원 들어요. ‘도를 아십니까?’ 이거거든요. 그리고 낙태한 사람에게는 어린애 귀신 붙으면 안 되니까 재수 없으니까 영아 천도제 따로 있어요.

종교가 뭡니까? 요한일서에서 중요한 걸 이야기해요. 인간의 몸은 몸이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뒤의 영발, 무슨 영발? 악마의 악한 자가 너를 손대지 못한다. 악마가 그려낸, 선악과 구조가 그려낸 천국과 지옥이 이미 여기 완전히 도배를 해놨어. 그리고 그 가는 순서까지 불교 같으면 41단계. 기독교 성화론은 몇 단계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목사 따라 달라요. 베드로전서 1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형제 사이에 뭘 더하고, 더하고 따라서 몇 단계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거룩이 있는 성화단계. 그건 교회마다 달라요. 목사마다 달라요.

다른데 문제는 성화론을 주장하는 목사의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는 뭐냐? 절대로 어느 교인들도 목사보다 더 성화로우면 그 교회를 나가줘야 된다. 특히 부교역자가 목사보다 성화로우면 나가줘야 돼요. 통치자의 부담을 행정적 부담을 주면 안 돼요. 네가 복음 알고 똑똑하니까 나가 해라. 종용히 내보내요. 꼭 저보다 수준 낮은 사람만. 그래서 목사는 다른데서 성경공부하지 말라하죠. 참 골치 아픈 사람이에요. 악령으로 도배된 것이 나오겠죠.

그렇다면 여기 구멍을 뚫었습니다. 구멍을 뚫고 제일 먼저 예수님이 하신 일은 누구와 만남? 성령 받고 제일 먼저 한 행동은 광야에서 마귀와 만나죠. 보세요. 보세요. 사람하고 상대 안 하죠. 사람은 상대할 쨉이 안 돼. 그것은 마치 주인집에 있는 가구에 불과하죠. 하나님나라라 하는 것은 도둑이 와서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가구를 옮겨가는 식이 하나님나라거든요. 그렇다면 인간은 가구에 해당되니까 가구는 스스로 움직이질 못해요. 같이 논의할 쨉도 못 돼. 수준 낮아 안 돼. 그러면 누구하고 의논해야 되겠어요? 주님께서 집 주인하고 악마의 대장하고 의논해야지요. 의논하는 게 아니고 그걸 붙잡아, 결박해야 가져가니까.

그러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악령과 만난다고. 그러면 여기서 알 것은 간단하죠. 악령이 그동안 무슨 짓을 했어요, 이 땅에서? 방금 이야기했는데. 선악적으로 해서 선하면 뭐 받는다? 구원받는다는 짓을 했잖아요. 그리고 이걸 가지고 사람들은 자기 속을 불멸 요소와 사멸 요소로 나눌 때 사람들은 사멸 요소는 아무것도 아니고, 사멸 요소는 영혼의 품질을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육체를 경건케 하는 육체를 단련시키면 뭐도 값이 올라간다? 영혼이 번쩍번쩍 빛이 나는 쪽으로 이쪽을 단련시키잖아요. 거기의 대가, 거기에 제일 잘했던 사람을 가지고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라 했고, 누구든지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했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을 악령의 짓을 최고 정점에 놓아뒀어요. 그렇게 하시면서 바리새인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고, 너는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로다. 제가 수련회 때 이야기했잖아요. 그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 하면,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는 느헤미야, 에스라를 모방한 사람들이에요. 수련회 때 잠간 이야기했어요.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매개체는 뭡니까? 말씀밖에 없죠. 그렇다면 바리새인 주장은 그겁니다. 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풀어서 생활화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바로 그 유명한 김남준 목사죠. 같은 류 박영선, 김남준, 김홍전, 최낙재, 박용기. 목사님, 실명 거론해도 됩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거론해도 되죠.

전부다 말씀을 생활화하자 아닙니까. 김홍전 박사의 주장이 뭡니까? 하나밖에 없어요. ‘삼위일체를 삶으로 보여드려라.’ 이것 아닙니까. 그래야 하나님께 경건이 된다 이거잖아요. 제 생각은 뭡니까? ‘피 앞에 죄인 돼있으면 그것이 시편이다.’ 이거잖아요. 왜? 감사가 나와요. 자기가 죄인도 아닌데 감사가 나올리는 없어요. 죄인 아닌 이상 만약에 성령을 받으면 최선을 다하자가 되지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미흡함이 나오지.

그런데 요한일서에서 뭐냐 하면, 이런 악령을 한 마디로 말해서 두려움이에요. 그러니 결국은 악령이 구멍이 뚫리고 성령이 오기 전에 악령의 세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두려움,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불안이죠. 요한일서에서 불안에서 감사로 바뀌면서 감사의 이유가 사랑했기 때문에.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0장 18절 다같이 읽어봅시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여자가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여자는 꼼짝없이 죄인이었어요. ‘예수님, 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하면 됩니까?’라고 물을 필요도 없어요. 그냥 간음했어요. 그냥 간음한 대로 가만 계셔요. 그 다음에 누가 용서합니까? 예수님이, 누가 정죄하더냐? 없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다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예배나, 미사나, 제사는 없어요.

‘없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더 이상 우리가 자기 양심이나, 자기 선악이나 세상 사람들이 평가에 의해서 벌벌 떨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남한테 떠는 게 아니고 본인이 본인한테 떠는 게 문제에요.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실패한 것 때문에 떨어요. 목회 안 될 때 개척교회 안 될 때 목사가 자기한테 떨어요. 누가 뭐라 했습니까? 주님도 용서했다 했는데 ‘주여, 또 두 명 나갔습니다.’ 주님께서 ‘누가 뭐랬어?’ 누가 책잡았는데? 본인이 본인을 책잡아요. 말씀으로 난도질당해야 됩니다.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고 다시는 널 위해서 죄질 제사가 남겨지지 않고 정죄할 사람 다 보내버렸는데 네가 널 정죄하면 어떡하란 말이냐? 그래서 뭐냐 하면, 네 속에 누가 있는지 다시 봐라. 성령이 있잖아. 성령이 뭔데요? 악령하고 이겼잖아. 성령 받은 예수님이 아니라 성령과 악령의 싸움이었어요. 성령이 이겼다는 말은 악령을 이겼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이겨버린 죽기를 무서워하는, 부활하신 영이 성령 아닙니까. 부활하셨기 때문에 보증으로 왔다.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죽어도 안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럼 죽는 건 뭐냐? 폐차를 새 차로 교체하는데 오 분 걸리는데 그걸 못 기다리나? 폐차장에 가서 ‘고객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새 차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아이고, 내 차.’ 이러고 있다고. ‘곧 바꿔드리겠습니다.’ 팔십 먹은 구십 된 폐차 교체하러 간 사이에 그걸 못 기다려서 ‘아이고, 아까와라. 내 몸.’ 이러고 있다고.

새 차, 새 장막, 새 옷 입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천사와 같이 될 겁니다.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습니다. 육의 형상은 날아가 버립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우리는 미련이 있어서 내 폐차에 튜닝, 폐차에 에어컨 한 것, 폐차에 오디오 한 것, 그게 아까워서. 폐차 뒤에 탄 유학 간 내 자식 아까워서, 그리고 아침마다 밥 해먹인 남편이 아까워서. 남편과 헤어져 죽으려 하니까 환장해서.

그래서 사람은 죽는 걸 실패로 보잖아요. 그것은 뭔 뜻입니까? 죽어가는 것도 실패로 보니까 실패는 두려움이 있죠. 그러니까 사람은 두려움 속에 사는 거죠. 실패할까봐, 이러다가 죽을까봐.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네가 폐차니까 폐차답게 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안심이요, 행복감이요, 안도감이요 그게 감사가 있죠. ‘저 폐차 맞습니다. 튜닝 백날 해봐야 페차입니다. 여기다 성화해보고 사랑, 구제 해봐도 목사해도 폐차고 폐차 맞습니다.’라고 하는 이 당당함, 이것이 뭐냐?

그게 바로 이미 성령 때문에 죄로부터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죄 지을 수가 없는 거예요. 죄 짓고 싶어도 내가 죄인 된 것을 아는 그러한 성령을 취소할 수 없는 거예요.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니까 죄가 자꾸 나오는데 나 죄인 맞다 하니까 마귀가 그 다음에 할 말이 없어버려요. 너 맞잖아? 그래 맞잖아. 나, 너하고 말 안 한다. 가라, 그래. 귀신 나가는 것 간단해요. 마귀야 나가라 하지 말고, ‘너 죄인 맞잖아’ 하면, ‘맞습니다’ 하면 다 나가버려요.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가 버려요. 인간도 아닌 게 인간 흉내 내니까 자기가 스스로 고로워요.

그래서 사랑은, 다른 말로 성령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나니.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심판을 심판이 없나니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 지금도 그 작업이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생긴 두려움을 쫓아내고, 생긴 두려움을 또 쫓아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하나님의 성령 안에 피 안에 있음을 확인케 하는 겁니다.

(질문)

간음한 여인이 주님 앞에 정죄를 받지 않고 용서를 받았고, 함께 한 강도 역시 마찬가지로 오늘밤에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과연 정말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구원의 확신이 그들에게 있었을까요?

(답변)

용서받은 간음한 여인과 강도가 과연 구원의 확신이 있었는가? 그게 인식인데, 이게 주체거든요. 이걸 말씀이 오면 완전히 액체로 만들죠. 그렇게 되면 이게 하나의 공간, 시간이 사건이 돼버립니다. 사건 돼버리면 이 사건 속에서 나의 역할이 아니라 나라는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건을 만들었구나.

선덕여왕 엑스트라가 ‘선덕여왕 내용을 아십니까?’라고 엑스트라한테 물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냥 수염 붙이고 창 들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실례지만 선덕여왕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한테 묻지 마세요. 나는 프로그램 속에 들어가 있는 하나의 사건이 돼버리죠. 우리 몸도 마찬가지에요. 중요한 것은 우리 옛 몸, 옛 부대를 계속 갖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방금 질문한 게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인식의 문제가 나오고 계속해서 주체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다음에 그런 것이 없어지는 또 사건 하나 일으킵니다. 갑자기 애가 아프다는 소리 들으면, ‘뭐, 애가 아파?’ 하다가 성경공부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애 아픈 거 신경 쓰잖아요. 또 하나의 사건을 마주치게 하죠.

그러니까 우리는 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를 주께서는 사건으로 넘어가면 다시 우리는 사건 자체를 내 존재에 편입시키고 그걸 또 부셔서 사건 만들고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첨부파일 : 20090908b 부산강의.hwp (59.0K), Down: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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