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08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2
20090908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2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908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2
(강의:이근호 목사)
그래서 만약 목사님들이 쓴다면, 그분이 하는 말이, “목사님 책하고 이런 게 나와 있으니까 그걸 적어주면 어떻습니까?” 적어주면 저는 작업의 80%는 수월하죠. 20% 정도는 제가 뒷정리해도. 80% 해놓은 것 약간 첨부, 수정 이것만 하면 되니까 저로선 수월한데 그 80% 해주는 목사님들이 얼마나 힘들겠느냐 했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면, 66권을 일반교인들이 볼 때 못 보고 자기들 보기에, 처음 보는 교인들 보기에 여기서 여기까지 한 주제고, 그 다음에 한 주제라고 나름대로 끊을 게 아니냐 말이죠. 그걸 성경 66권, 창세기부터 다 끊어버리잖아요. “다 끊는데 하루 걸립니다.” 했거든요. “하루요?” 아니 일주일.
베들레헴에 성경 있잖아요. 그 나오는 것을 다 워드에 실어놓고 칸을 미루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1장 1절에서 5절까지 하나의 주제라면 칸을 미루는 거예요. 한 페이지 내지는 반 페이지 정도로, A4용지. 그 다음에 6절부터 10절까지, 이거는 베들레헴이 수고해주니까 일일이 쓸 필요 없잖아요. 여기에다가 제가 여기에 대해서 했던 창세기,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에 나온 내용들을 쓰기만 하면 된다 이 말이죠.
이런 식으로 해서 목사님들이 나는 고린도전서를 한다든지, 광주강의 했기 때문에. 에베소서를 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해주시면 그 다음에 뒷정리하는데 수월하겠다는 이야기를 제가 부산 가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굉장히 힘들거든요. 물론 본인도 공부하면 되는데. 하여튼 저는 전달만 할뿐이죠.
이렇게 해주셔서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 제 설교가 나와 있고, 설교문 있잖아요. 그러면 설교 다 들을 필요 없이 다 들으면 좋겠는데 시간 없으니까 설교문만 따로 옆에 떼어놓고,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1장 1절부터 그렇게 적어주시기만 해서 저한테 보내주시면 저는 뒷정리만 하면 요한계시록 하나는 후다닥 넘어간다 이 말이에요.
교회사 할 때 혼자서 교회사 한다는데 저가 거기서 한 십년 늙었습니다. 정말 힘들어요. 왜냐하면 교회사 자체가 엉터리입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교회사 자체가 교회의 자기의 조직과 자기의 노선을 옹호하는 왜곡된 사건 역사기 때문에 그것을 복음적으로 그게 거짓말인 것을 도려내야 될 작업도 해야 되고,
삼위일체 형성과정 같은 경우에 삼위일체가 왜 정치적인 안목 때문에 발생됐는지를 정치적 안목까지 경제적 차원까지 고려해야 돼요. 그것 하려면 기존의 삼위일체를 알아야 되고, 그 삼위일체를 옹호한 쪽으로 나왔던 교회사 책들을 봐야 되고, 논문을 봐야 되고 그것 때문에 도서관에 몇 번씩 들락거려야 되고. 그래서 강의했는데 참석자는 두 명이었습니다. 내내. 그래도 두 명 되던 말든 남겨놓으면 계속해서
교회사 해달라는 취지가 뭐냐 하면, ‘복음으로 흘러온 교회사 따로 있습니까?’ 그게 궁금해서 교회사 해달라고 했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사적으로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해달라는 뜻이란 말이죠.
그런데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교회사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그 사람들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사에 주요 인물이 아닙니다. 복음 아는 사람은 캘빈, 루터한테 다 잘린 사람들이에요. 캘빈, 루터가 마치 복음 아는 것처럼 드러났고 그 뒤에 진짜 복음 아는 사람은 이름도 없이 사라졌어요.
제가 교회사하면서 이야기한 것은, ‘왜 어떤 신학이 복음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를 현재 나타난 신학을 통해서 반대로 증명해야 되는 수고를 해야 된다고. 캘빈 신학이 이렇고, 루터 신학이 이렇게 때문에 복음은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이렇게 나와야 된다고. 신앙고백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신앙고백이 이렇게, 이렇게 나왔기 때문에 신앙고백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숨어들어간 인간들이 어떤 단체를 만들어서 재세례파라든지 또 하나의 자기 집단을 옹호하는 역사를 또 펼친 거예요.
뭐든지 역사가 나온다는 자체는 문제가 있는 거예요. 하나의 교단이 된다는 자체가. 교단 속에 예수 믿는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단을 운영하는 사람은 정치꾼이지 복음을 아는 사람이 아니에요. 항상 그래요. 정치꾼들이 노리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능률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업적입니다. 업적을 남기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업적을 보고 하나님 일인 양 여겨서 믿게 되거든요.
쉽게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상징물이 없으면 하나님께 못 나간다고 인간들이 생각해요. 그러면 상징물이 뭐냐 하면, 쉽게 말하면 큰 교회, 문화센터 이것 아닙니까. 교회 정문에 걸려있는 사법고시 20명 합격했습니다. 그것. 그런 게 하나의 업적이란 말이죠. 상징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는데 상징물 자체를 누가 결정하느냐, 선택하느냐 하면, 본인이 납득할만한 상징물을 본인이 편집해요. 거기서 편집하면서 잘려나가는 게 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이 지금도 열심히 주시하고 있는, 열심히 응시하고 있는
초반부터 어려운데. 케이 보이라 해서 라캉의 철학에 보면 나옵니다. 적어볼게요.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느냐?] 주변의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게 없으면 우리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몰라요. 누가 나에게 지시와 명령을 해줘야 우리는 거기에 맞추어서 자아라는 것을 형성하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아내에게 ‘내가 어떤 남편이 됐으면 좋겠어?’ ‘내가 어떤 엄마가 됐으면 좋겠냐?’ 자식은, ‘엄마, 내가 어떤 자식이 되면 좋겠어?’ 목사는 교인에게 ‘교인 여러분, 제가 어떤 목사가 되면 좋겠습니까?’ 교인들은, ‘목사님, 제가 어떤 교인이 되면 좋겠습니까?’ 묻는 가운데서 그걸 소통이라고 하는데, 그 묻는 가운데서 자아가 보정이 되고, 형성이 돼요.
그걸 흔히 소통이라 하는데 거짓말하기에요. 솔직하게 드러내면 소통이 안 됩니다. 솔직하게 드러낸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바보같이. 사실은 전략이지만. 사람과 대화할 때 솔직한 것을 드러내면 안 돼요. 그러면 대화가 막혀버립니다. 나는 이런 거짓말하고 있어. 너는 어떤 거짓말하는 거야. 그런 거짓말이야? 우리는 서로 소통하자. 우린 친구다. 왜? 같이 거짓말 하는데서 우린 친구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성경책 펴놓고 목사나 교인들 전부다 딴 생각하기로 묵계, 약속을 하잖아요. 성경에 관계없이 딴 이야기하기로. 너는 날 너무 죽이지 말고, 그 대신 나도 목사, 당신을 죽이지 않겠단 말이죠. 사전에 계약이 돼있습니다.
만약에 너와 나 말고 목사 자신의 거짓말을 도려내는 어떤 분을 증거 해버리면 그분은 목사만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있는 듣는 교인들의 거짓말도 드러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목사와 교인들이 서로가 만나기가 서먹하지요.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는 예수이야기나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안 돼요. 왜냐하면 교인들 놀러오잖아요. 하나의 스트레스 받는 것을 풀기 위해서 오락하기 위해서 왔는데 그 오락장소에 피를 뿌리면 되겠습니까? 잔칫집 피 뿌리면 안 되잖아요.
예수님 말씀에 있잖아요. 옛 부대에는 절대로 새 포도주를 담아서는 안 돼요. 이미 옛 부대를 교체할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옛 술만, 옛 포도주만 담아줘야 돼요. 선악과가 옛 부대에요.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이야기했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선악과를 담을 수 없는 몸을 만들어놨는데 마귀가 자꾸 꼬시는 거예요. 무엇으로? 미흡함 가지고.
‘야, 인간아. 너 미흡하다. 너 신 아니잖아.’ 말 들어보니 맞네. 신과 인간 사이는 거리감이 있다는 거예요. 그만큼 미흡하죠. 간격이 있죠. 그것마저 채울 때 너는 만족해. 마저 채우자. 근데 선악과가 와버리면 부하가 걸려요. 몸은 선악과를 못 먹는 몸인데 거기다 선악과를 담아버리니까 몸이 완전히 찢어지게 돼있죠. 인간의 몸이 찢어진다는 말은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책을 보면서 “하나님, 저 인간입니다. 지금보다 더 미흡함을 보충할 수 있는 신처럼 될 수 있는 그러한 아이디어와 정보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자 하오니 이 겸손한 마음을 부디 받아주시어 신처럼 더욱더 위상이 올라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나온다고. 그럼 성경은 말하죠. “너는 인간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냥 죽어.” 인간이 아니면 인간이 아닌 걸 알면 돼요. 인간이 아니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묻게 되면 구원문제는 이미 네 손에서 떠나버렸어요.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풍병자를 낫게 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죄사는 권세는 인간이 가타부타할 입장이 못 된다. 인간이 누구를 구원하고 말고 할 그런 권세나 죄를 사하는 권세는, 죄 사함 받고 싶다고 해서 죄 사함 받는 게 아닙니다. 죄 사함 받고 구원받겠다는 것은 그건 주제넘은 짓이에요. 자기가 아직 자기 자신을 몰라서 나오는 망발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그냥 돌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곱게, 아무 소리 안 하고.
인간은 누구와 할 때 거짓말을 담고 해요. 제가 오늘 강의에 이 거짓말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 거짓말이 생겼으며, 왜 생겼으며, 언제부터 생겼으며, 왜 나는 거짓말을 도려낼 수 없는 존재인가를 제가 요한서신하면서 말씀드릴 겁니다. 그건 아주 복잡한 문제에요.
어쨌든 인간은 자기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상은 남한테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잠간 말씀드릴게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이 자체가 뭐냐 하면, 원래부터 내 게 없다는 거예요. 내 안에 내 것이라는 게 없고, 전부다 남의 것을 모방해서 남의 것이 들어온 거예요. 그 남의 것을 ‘타인의 욕망’이라 합니다.
‘아빠, 나는 아빠한테 어떤 자식이 돼야 돼?’ ‘너는 이렇게 돼야 돼.’ 어릴 때부터 자기 것이 있는 게 아니고 어린아이의 특징은 몸은 있는데 몸을 관리하는 법체계가 외부에서 수입해야 한다는 거예요. 애가 똥을 쌌어요. 엄마가 매를 듭니다. 그때 애는 법을 배워요. ‘똥 싸면 똥은 화장실에 가서 싸야지 여기서 싸면 안 되는구나.’라고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하는 법을 어디에서 수입한다? 외부에서, 엄마 법에서 수입하는 거예요. 훈계를 통해서. 그걸 양육이라 하죠. 회초리를 때려가면서.
그래서 십계명의 5계명이 뭡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이게 신약에 오면 앞에 하나 붙죠. ‘주 안에서’ 다시 말해서 부모는 부모의 것을 자식에서 증거할 자격은 없고, 주님의 언약만 자식에게 증거하라고 자식보다 먼저 태어난 분이 부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복음적인 계시를 가진 것 때문에 내가 너희들의 아비라고 이야기했고, 내가 너희를 복음 안에서 낳았다고 했어요. 이걸 또 청량리 대성교회 이상한 목사 있어요. 박윤식, 그 사람은 지가 애비라고 설치고. 골치 아파요. 별 사람 다 있어요.
인간 속에는 타인의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영화 같은데 보면, 망나니로 살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꼭 성공해서 용인 쪽의 세트장, 무덤에다 소주 하나, 오징어 구워놓고 울지요. ‘아버지 저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다니. 그리고 제 옆에 있는 여자는 제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하고 영화, 드라마 끝나잖아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평소에 누구 굴레에서 못 벗어났다? 평소에 아버지의 욕망에서 못 벗어난 거예요. 나라는 게 없어요. 만날 아버지 돌아가셔도 아버지의 인상을 그리워하며 자란 겁니다.
프로이드는 이걸 가지고 모든 종교가 자기가 숭배하는 교주의 그늘에서 못 벗어나서 그 교주의 시킴대로 흉내를 내면서 모방을 하면서 살아가는 하나의 미신처럼 살아간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걸 라캉이란 사람은 대타자, 큰 타자. the Other.
그렇게 보면 결국 거짓말한다는 말은 이러한 신의 법에 대해서 인간은 이미 뭐가 있습니까? 선악과를 이미 먹었잖아요.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데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선악이라는 체제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본 거예요. 그리고 선악지식은 인간이 몰라요. 왜? 인간은 처음부터 모르게 돼있어요. 아는 것은 영적 존재만 알게 돼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아, 선악을 아는 일에 네가 왜 합세했느냐? 바보야. 네가 합세했기 때문에 생명나무 끝났고, 저주받아야 돼.’ 이렇게 된다 말이죠.
하나님 외에 선악을 알게 되면 저주받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외에 선악을 알게 된 피조물이 누굽니까? 천사 중에 악마에요. 악마는 선악을 알기 때문에 인간을 자꾸 고소하죠. 스가랴 4장에 보면 나오죠. 여호수아 할 때 만날 고소하고 고발하고.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그러니까 결국 선악과를 따먹으면 사람은 자기가 선으로 올라가려고 애써도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 결국 주도권은 누구한테 있다? 선악을 아는 내가 나의 주도권이 아니라 선악이 나를 지배하고 선악 중에서도 어느 쪽이 우세하다? 악이 우세해요. 그럼 나는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주제 파악하라고 의도적으로 율법과 이방인에게는 양심을 주셔서 전부다 까발리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새 포도주를 주시기 위해서 옛 부대가 옛 부대임을 알려주는 작업을 한 거예요. 그러면 옛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부대 자체를 교체해야 되겠죠. 그런데 이놈의 인간들이 부대 교체한다고 죽어라고 싫어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렇게 죽이시면 안 됩니다. 잘해볼게요. 제가 이래 죽으면 안 되죠.’ 자꾸 옛 부대 고물을 쥐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지난 주일날 설교할 때 교회는 주유소가 아니고 폐차장. 만날 주여 오늘도 은혜 받으러 왔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아예 차 자체를 폐차이군요. 폐차로 자체가 교체 돼요. 새 차가 뭔지 궁금하겠지요. 새 차는 선악구조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 구조로 만듭니다. 그게 요한일서에 나오는 새 계명, 사랑이죠.
사랑의 몸이 우리의 선악을 아는 몸을 교체하시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사랑이 있는 몸이 되어야 새 포도주에 있는 사랑을 듬뿍 담게 됩니다. 사랑의 몸이 되면 수준이 어느 정도냐 하면, 자기가 죄 지었다고 해서 그게 낙심할 대상이 안 될 정도로. 내가 새로 죄 지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되면, ‘역시 나는 죄로 태어날 몸이었어. 내가 착하게 살았다고 우겨도 역시 나는 죄밖에 나올 수 없는 그런 몸을 아직도 지니고 있어.’라고 자기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진 몸이 구원받는 것도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이야기라고요. 그러면 죄 있는 몸을 죄라고 자꾸 들춰내는 그 자체가 자꾸 은혜가 왔기 때문에 죄를 들춰내는 것 아닙니까. 가만있는 밭이 갑자기 뒤집어낸다는 건 뭐예요? 누가 쟁기로 새벽 두 시에 퍼내고, 새벽 세 시에 퍼낸 어떤 흔적 때문에 아침에 가보니까 밭이 뒤집어져 있잖아요. 그럼 삽질하고 퍼내는 작업을 그걸 ‘은혜’라 한다 이 말이죠. 은혜가 오면 죄 아니고, 죄 아니면 행복이고 축복이고.
그동안 우리가 힘들었던 게 뭐예요? 내가 선악과 때문에 내가 죄를 미워하고 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힘들었잖아요. 근데 거기서 말하는 선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선이 아니고, 외부에서 큰 타자, 벌써 다 잊어버렸지요. 뭡니까? 우리 교회 목사님 또는 어릴 때부터 살았던 아버지의 말씀, 엄마의 잔소리, 내 아내의 잔소리, 내 남편의 잔소리 그걸 맞춰야 우리는 의인된다고 본 거예요.
아까 강의하고 연결되십니까? 라캉의 이야기와 연결되십니까? 다시 할게요. 나는 내 것은 없고 내 안에 남의 욕망만 들어있죠. 사람들이 살 때 ‘엄마, 나 어떻게 살까?’ 자꾸 물어요. 자꾸 설교하는데 존다 말이죠. ‘성도 여러분, 어떤 설교를 하면 안 조시겠습니까?’ 그런 욕망의 행동 하나가 바로
‘졸지 마’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러면 어떤 식으로 하면 안 조시고, 그 다음부터 다른 교회 안 가고 우리 교회 나와 주시겠습니까? 목사가 묻는 거라니까. 그런데 그렇게 물으면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그걸 감추지요. 그러니까 감추니까 교인들과 소통이 되는 거예요.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은 거짓말이 없으면 남하고 소통할 수 없다.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그런 거짓말을 담을 수 없지요. 대번 부정적으로 나오죠. 네 생명을 미워하라. 좁은 길로 가거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나 떠나면 너희들이 그리워하는 하나님도 없다는 거예요. 예수 없이는 천국도 없고, 여호와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하나님은 계시고 내가 있는데 여기 뭔가 미흡한 게 있었는데 메시아가 와서 그걸 메워준다는 거예요. 그건 니 생각이고. 잘못된 생각이고, 자기 구원 위주의 생각이고.
진짜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 여기 계시고, 인간은 여기 있고, 선교단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십자가로 다리 만들어 건너갈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엉터리 같은 하나님, 엉터리 같은 구원이란 말이죠. 그 자체가 우리의 사고적 시스템이 만든 오류에요. 복음도 아니고 다른 복음이라니까.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에서 예수님의 욕망이, ‘너는 자슥아. 반드시 구원돼야 돼.’ 하고 나의 죄를 근본적인 죄인 됨을 뒤집어주는 은혜가 임하면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예수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고, 구원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빼도 박도 못해요. 자기 인생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고백할 게 뭐냐 하면, ‘내가 구원 안 받으려고 했는데 주께서 자기 숙제한다고 나를 구원시켰어.’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용서라는 게 죄라고 모든 걸 쟁기로 밭을 뒤집어놓으니까, 내 온갖 거짓말과 타인의 욕망도 거짓말인 것을 다 뒤집어놓으니까 그 용서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십자가에서만 나오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은 십자가만 보면 감격해요. 왜? 십자가에서 용서가 나와.
그 사람은 뭘 증거하느냐 하면, 자기를 증거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아주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아주 거리낌 없이 앞에 누가 있든지 상관없이, 앞에 절이든지, 이슬람교 성지든지 관계없이 ‘아이고, 타인의 욕망하고 엎드려 절하고 있네. 내 용서는 십자가야.’ 큰 교회 가서, ‘가운 입고 돌아다니고, 매미채 들고. 웃기고 있네.’ ‘이 교회가 우리를 용서하는 게 아니야. 십자가야.’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그것도 서슴없이. 그것도 부교역자 되서 강대상에서.
그 주일날 오후에 당회 모이죠. 종용히 나가달라고. ‘나는 너 붙들고 싶은데 교인들이, 장로님들이 싫어하네.’ 그게 뭡니까? 나는 당신 붙들고 싶은데 타인의 욕망, 교인들이 뭐라고 하는 것을 목사가 담을 수밖에 없어요. 타인의 욕망이죠. 목사님은 복음을 믿습니까? 하고 부교역자가 나가면서 그런 소리하면, ‘그런 건 목회 윤리상 묻는 게 아니고’ 하죠. ‘다만 목회 윤리상 조언하는데 이 앞에서 삼백 미터 이상 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한테 십자가 보고 관계하는 게 아니고 그 목사는 내 소유의 교회라는 사업체가 있다는 것이 자기 인생을 감격케 합니다. 내가 이 교회 키운다고 얼마나 노고 많았는데. 그리고 그 교회 있음으로서 다른 동기생들이, 너 목회 성공했다는 자기들의 욕망이 나는 꽉 차 있고, 그들은 비어있음에서 나는 승자가 되죠. 목회세계에서.
이런 힘이 있고 실적이 있을 때 그걸 구약 이스라엘에서 선이라고 합니다. 선악과의 선이 돼요. 구약 이스라엘에서 선이라 하는 것은 항상 뭔가 양적으로 불어나고, 잘 되고, 오래 살고, 성공하는 이런 걸 선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선 때문에 진짜 참된 선지자들은 이런 이스라엘의 가짜 선 때문에 진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미가, 아모스, 호세아, 다니엘은 이단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사람이 아벨이죠.
여기서 잠간 어려운 것 해봅시다. 지난번에 했기 때문에 새로운 것 합니다. 요한서신은 통틀어 이겁니다. 화해처럼 보이는데 양보 없는 분열이에요. 성경, 요한서신 찾아봅시다. 두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요한일서 4장 5절에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보통 현재 한국교회 신학에서 십자가를 화해라고 하죠. 좋게 지내자 이 말 아닙니까. 이제는 우리 원수지지 말고 좋게 지내자 그거잖아요. 그 근거가 에베소서 2장에 나오죠.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있는 담을 헐고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게 했다 했죠. 그걸 WCC는 화해로 보잖아요. 그런데 방금 봤던 요한일서 4장 5절에 보면, 노선이 두 노선 되죠. 하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 속한 사람. 이 두 노선은 평행선을 달리기 때문에 화해입니까, 양보 없는 분열이에요? 분열이죠.
그 다음에 요한일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여기서 19절에 보면,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이 말을 볼 때 어떤 분들은 자꾸 오해하시는데 이 말은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속한 것 맞죠?’ 이러면 안 돼요. 질문을 ‘나는 하나님께 속하고 저놈들은 나쁜 놈이니까 세상에 속했죠?’라고 그런 질문하라고 이 본문이 있는 게 아닙니다. 지난번에 참석하신 분은 알아요.
그런 뜻이 아니고, 성경 전체를 보는 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아니하면 가인과 아벨은 결별 안 됩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없이 둘이 사이좋게 살 수 있습니다. 원수지간 될 이유가 없어요. 같은 인간인데. 아까 했잖아요. 소통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해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인간은 혼자 못 살아요. 사회적 동물, 정치적 동물이라 하잖아요. 인간은 여럿이 모여살고 공동체를 이룬다고. 혼자 살면 외로워서 못 살아요.
어제 중매하려다 안 되서. ‘혼자 살면 외롭지 않습니까?’ 하니까 그쪽에서 ‘외로워도 참아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중매 없는 걸로 합시다.
사람은 그때부터 혼자 못 삽니다. 가인이 받은 벌이 뭔 줄 알아요? 여러분 아시죠. 혼자 사는 것. ‘나 죽어도 혼자 못 삽니다. 왜 이렇게 심한 벌을’ 이러고 있다고. 그래서 교도소 중에 교도소가 뭡니까? 독방 아닙니까. 안 가보셨으니까 모르죠. 저도 들었습니다. 나중에 갈지 모르겠습니다만.
가인과 아벨이 원수 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그럼 원수를 누가 만듭니까? 하나님이 원수 되게 개입하시죠. 그게 바로 하나님 뜻이에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내가 온 것은 화평케 함이 아니고 불 지르러 왔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비와 자식이 말은 안했지만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 간에.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이건 참 어려운데 그 뒤에 나오는데 내가 나와 분리. 옛 부대의 내가, 새 부대의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내 몸과 그리스도의 몸이 빠이빠이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개입하는 그 힘은 오직 인간의 종교성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 피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피 복음밖에 전할 수밖에 없어요. 피를 안 전하면 사람은 화합합니다. 피를 전해야 분열이 일어납니다.
똑같은 작업이 십자가를 통해서 되는데 가인과 아벨에서 주님께서 제사를 한쪽은 받고, 한쪽은 안 받음으로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거는 모든 이삭과 이스마엘, 에서와 야곱, 요셉과 나머지 열한 형제. 요셉이 난데없이 꿈을 꿈으로 말미암아 요셉과 나머지 열한 형제는 분열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은 로마서 11장 25절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 해서 현재 있는 유대인들도 이스라엘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래드도 그런 쪽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은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이 있어요. 그걸 모른다고 그 사람들이. 역사적 이스라엘 속에 진짜 이스라엘에 들어있는 걸 모르고 껍데기 이스라엘, 껍데기 이방인들만 결합하면 온 이스라엘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저는 아직 이걸 이야기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니엘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호세아가 뭐냐?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 이사야가 누굽니까?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이었어요. 왜냐하면 이사야는 임마누엘을 바라보고 이사야를 핍박했던 아하스 왕은 자칭 이스라엘인데 결국 유대인인데 오히려 이사야를 핍박하는 존재로 등장하잖아요.
가인이 누구 자식입니까? 분명히 아담의 자식이죠. 그런데 아담 자체가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주어져버리면 아담이 둘로 분리됩니다. 하나는 여자의 후손과, 하나는 뱀의 후손으로 분리됩니다. 뱀의 후손된다고 뱀 대가리 하나 튀어나오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에요. 여자의 후손도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끼리 있으면 다같이 타인의 욕망이라. 서로 속임수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뿐입니다.
따라서 둘로 갈라야 돼요. 그 방법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돼야 되는데 문제는 또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자칭 어느 쪽에 속하고 싶다? 자칭 여자의 후손 쪽 속하고 싶어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계시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하죠. 이것, 안 먹어줍니다. 다시 말해서 옛날에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할례를 행할 경우에는 너나 자식이든 모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에 편입해줄게 하는 창세기 17장의 아브라함의 언약을 믿고 할례를 행했던 사람, 지옥 가서 울며 통곡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킨 대로 할례 했는데 분명히. 창세기 17장 스스로 하나님이 거짓말 하신 거예요? 할례 없는 백부장은 세상에 이만한 믿음 못 봤다. 너는 천국을 차지할 것이요. 할레 행했다고 으스대고 자랑하고 있는 아브라함 본 자손들은 어두운 곳에서 울며 통곡하고 있으리라. 마태복음 8장에 나오죠.
그건 뭐냐? 조건을 하나님이 제시해도 조건을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인간에게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그 하나님의 계시를, 복음을 이해할 수 있고 그 비밀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도 주님에서 나와야 되는데, 주님과 인간의 만남은 밑에서 쟁기로 우리의 죄를 뒤집어 파내는 은혜의 능력 안에, 피의 능력 안에서만 그게 나오게 돼있어요. 배고프다 정말.
그래서 요한일서 5장에 나오는 하나님께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 대목에서 ‘죄’라는 개념이 자기 몸의 개념에서 나오면 안 됩니다. 주께서 죄를 죄 되게 하십니다. 가만있어보세요. 아하, 죄라는 것이 예수님 사랑하지 않는 게 죄고 그리고 어떤 사람이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기 능력으로 죄 짓고 싶어서 사랑한 게 아니고 사랑할 능력을 안 받아서 사랑을 못하는구나. 알면 그게 죄 아니고 사람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우기면 그건 죄가 되고. 그겁니다.
그래서 어제 강의했잖아요. 예수 믿는 게 죄가 된다고.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건 죄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고 그걸 내가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여기면 죄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고 그렇습니다. 주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 구원받는다면 그건 죄고, 주님의 공로로 구원받게 돼있습니다. 자기가 구원받는다고 믿는 그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의 공로로 구원받아요.
이 말은 주체가, 모든 구원의 행위가 나한테 새로 정립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이미 내 것이 돼버리면 예수 믿는 내가 우상이 된다고. 내가 만약이 우상이 되면 내가 주체가 되고, 타인의 욕망이 되면서 다른 사람과 경쟁이 나서게 됩니다. 네가 믿음 좋으냐, 내가 믿음이 좋으냐? 김 집사 믿음 좋아, 내가 믿음 좋아? 네가 기도해, 헌금해? 항상 남한테 주체가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 내 안에 남의 욕망이 들어와요. 저놈을 꺾어야 내가 행복해지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이미 자기 안에
밧모섬에 가서 그냥 예수 믿으면 되는데. 밧모섬에 만약에 누가 들어오면 그 다음부터 사도 요한하고 시합 붙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밧모섬에 사도 요한이 그냥 있으면 괜찮은데 예를 들어서 밧모섬에 만약에 사도 바울이 끼어들었다. 둘이 붙어서 ‘무릎 꿇어!’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럼 문제가 되잖아요.
왜냐하면 타인이 등장하면 타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의식하다보면 나라는 것을 독자적으로 구축을 해야 된다니까. 예를 들어서 이렇습니다. 목사님 전화해서, ‘집사님 지난주 안 보이던데요?’ ‘지난주 늦잠자서 못 나왔습니다.’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면 되는데 거짓말하는 거예요. ‘집에 일이 있어서 못 나갔습니다. 다음에 잘 나갈게요.’ 목사한데 전화가 안 오게 되면 늦잠 잔 것도 주의 은혜인 줄 알겠는데 목사가 전화한 그 순간부터 목사 앞에 내가 나쁜 놈이 아닌 것을 보여야 되니까 거짓말을 모아서 새로 거짓말을 장착해서 새로운 거짓말 포함된 목사하고 소통에 들어가야 돼요.
그러면 목사도 거짓말 할 수밖에 없지요. ‘집사님이 잘 알아서 하지만 제가 집사님 생각해서 전화했습니다.’ 생각해서 한 게 아니에요. 집사 한 명 빠지면 교회가 썰렁하기 때문에 자기 목회가 실패하지 않느냐 하는 두려움,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죠. 전화 안 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밉상 받아서 두 명 빠질 수 있는 저주를 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라 하는 것은 요한일서에 보면 불안, 두려움에서 감사로 바뀌어요. 사람이 자기 게 있으면 불안해요. 이거는 키르케고르 이야기했죠. 그런데 감사가 어떤 거냐 하면, 모가지 빼서 자기를 안 보고 있다는 거예요. 시편의 주제가 한 마디로 말해서 감사와 찬양입니다. 할렐루야! 그것은 내가 주님의 성전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시편의 주제가 뭐예요? 주님이 주체가 되셔서 주님이 원하는 인간대로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그런 뜻이라 이 말이죠. 내가 나를 만들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안 만들려면 뭘 포기해야 됩니까? 선과 악이라는 것, 특히 잘 들어보세요. 오늘 첫째 시간에 제일 중요하다.
‘악이 나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하는 그것이 절대로 나에게 실망스럽지 않아야죠. 고함지르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뭘 해도 악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나로 하여금 절망스럽지 않고 실망스럽지 않을 때만 감사가 나오죠.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애씀이 나오죠. 무엇에 근거해서? 불안과 초조함을 통해서.
예를 들어 봅시다. 간음한 여인이 잡혔습니다. 이제 끝장났죠. 공개적으로 다 들켰으니까. 신문에 나왔으니까. 죽은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장진영이 간음하다 이렇게. 그럴 때 주께서 뭐라 하느냐 하면, ‘너를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물었어요. 그때 여자가 뭐라 했습니까? 새로운 층, 그전에 온 층은 선악 층, 율법 층이죠. 그런데 율법 층에서 벗어난 게 뭐냐 하면, 자기가 간음한 게 분명 맞아요. 분명히 죄 지은 여인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를 정죄할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럼 없다는 말은 타인을 의식할 필요 없고, 타인의 욕망이 나한테 들어올 이유가 없죠. 남은 타인이 누굽니까? 자기 앞에 예수님밖에 없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그럴 때 그 여자에게 초조함 속의 애씀과 불안 속의 애씀이 나타나겠습니까, 아니면 감사가 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러겠지요. 그게 시편이라고.
그러면 시편을 해석하려면 인간은 비참해야 되죠. 다윗은 비참하게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게 재미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선악 층에서 잘 나갔던 골리앗을 이겼던 다윗이 위층이든 아래층이든 괜찮아요. 이 층 말고 다른 층에 가면 분명히 이쪽에서 보면 비참하게 된 거예요. 비참 속에서 감사와 찬양이 된다는 겁니다.
이걸 아래층으로 내려봅시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옵니다. 케노시스 이론이라 하죠. 5절에서 9절.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하나님 영광을 버리시고 어디까지 낮아지셨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한 거예요. 그러면 선악 층에서 보면 예수님은 비참한 분이죠. ‘아이고, 인간아. 그래서 왜 사나. 나 같으면 죽었다. 저래도 안 먹어주고 죽어버렸는데 도대체 사는 보람을 모르겠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죠. 설교 잘하고 돌에 맞아 죽고.
그런데 이 층에 내려갈 때만 감사가 나오고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이걸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못 하지요. 왜? 우리는 비참하게 되도 혼자서 비참하면 안 됩니다. 꼭 보란 듯이 남 순교자 되는 폼을 내야 돼. 주기철 목사 실수가 그거잖아요. 혼자 죽으면 될 것을 폼 내고 죽잖아요. 손양원, 한경직 다 이런 오류란 말이죠. 꼭 교인들 앞에 모범을 보이려해 목사가. 참 문제가 큽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이거는 인간 힘으로 안 됩니다. 테레사 수녀, 이런 사람들 실수하고 있는 거예요. 안 돼요. 김수환 추기경도 마찬가지고.
그럼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쥐포를 찢듯이 우리 몸을 난도질 찢어버리면 우리는 말씀이 와서 잘라내 버리니까 하나의 상온에 있던 이것이 난도질 해버리면 하나하나가 다 떨어지잖아요. 도대체 우리는 그걸 당하면서 도무지 내 것이라는 게 없지요. 내 게 없으니까 주께서 말씀으로 떨어지면 미분, 미세하게 분열시키면 하나하나 떨어질 게 아닙니까. 떨어진 하나하나가 말씀의 파편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이 떨어진 걸 안개. 시편에 보면 이 떨어진 걸 네 인생은 한 줌밖에 안 된다. 또 마가복음에 보면 넌 개야.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까라면 까겠습니다. 너는 소경이야, 귀머거리야. 말씀을 난도질 하니까 비로소 책 속에 있는 말씀이 아니고 내 자체가 말씀의 작품인 것을 안다 이 말이죠. 이거 한 2초 갑니다. 그런데 2초 가도 괜찮아요. 2초라도 빈번하면 1분 되고, 한 시간 되니까. 빈번하게 일어나면 됩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은 허구고 실상은 뭐냐? ‘빛이 있으라’ 하는 말씀에 의해서 빛이 있는 것처럼 주께서 말씀으로 나를 지금 열심히 제조하고 있다는 것, 우리 열심이 아니고 주의 열심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죠. 그 흔적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이런 죄인으로 살아간다는 이 자체가 이 몸 덩어리가 귀한 주의 몸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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