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21장 주석(2)
창세기 18-21장 주석(2)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21:13-21
창세기 21:10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시기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하셨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근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과감하게 하갈 가족을 내어쫓을 것을 명령하신다. 오도 갈 데는 없는 불쌍한 이 모자(母子)를 당장 내어쫓으라는 것이다. 예상한 대로 하갈 가족은 얼마 못 가서 아사 직전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하갈 가족이 이런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죽음의 지경까지 몰아넣으신다. 하갈 가족의 존재 의의가 하갈 가족만의 생존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하갈 가족은 아브라함 가족과 관련 지어서 생각해야 한다. 이스마엘이라고 이름을 선택한 것은 그 어미 되는 하갈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기를 임신하고 가출하는 일이 있었다. 본처 사라가 임신을 못하니까 다소 멸시한 모양이다. 여기에 대해서 사라는 화가 나서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한다. 이 학대를 견디다 못해 하갈은 가출해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나타나서 가출을 말리신다. 도로 주인 댁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신다. 헤어질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안이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태어날 아기 이름을 하갈의 학대 받음과 연관해서 지어주신다. 그 이름이 바로 '이스마엘' 이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들으심'이지만 이것은 하갈의 소원대로 다 수락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하갈이 무슨 원한과 괴로움이 있더라도 즉 하갈과 그 가족의 운명은 이미 하나님의 관리 체제 하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창세기16:10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라고 하갈에게 약속해 주었다. 13절에도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라고 하셔서 계속 약속이 유효함을 분명히 해주신다. 하갈에게 관심사는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약속이 아니라 아브라함에서 이탈된 비약속, 즉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식이자 동시에 하나 밖에 없는 하갈의 친 아들에게 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약속과 비교해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약속의 증거물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주신 약속의 의의를 살려주기 위해 아브라함의 약속이 가는 곳에는 항상 아브라함의 육체적 생각의 산물이자 인간 지혜의 산물인 이 비약속이 늘 배경이 되어야 했다. 약속이 약속답게 피어나기 위해 비약속이 어떤 속성과 성질을 지니고 있는가가 약속과 더불어 부각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도 역시 창세기 17:3에는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것이다. '만민의 아버지'라고 말이다. 이 이름을 받을 당시에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운명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약속의 노선에서 이탈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 성취를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의 열매인 하갈과 이스마엘 가족도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비해 창세기 22장에 보면,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살아있는 자식을 번제로 죽이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당당하게 아들을 도로 하나님께서 바친다. 아브라함은 인간의 육적인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반면 하갈은 모성애라는 인간의 한계를 못 벗어나고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셈이 된다.
하갈의 생각은 이왕에 있는 것을 계속 있는 것으로 유지시키고 번창시켜주기 위해 하나님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식이 죽든 살든 하나님의 존재 의의는 오직 하나님의 내려준 약속만이 실현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 가족과 이스마엘 가족 모두를 하나님께서 번창시키시지만 번창시키시는 의도가 다르다. 하갈의 입장에서 보면, 마침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샘물이 가까이 있는 것을 발견케 하신 것은 이미 있는 이 자식을 유지시켜주고 더 나아가서 번창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모성애라는 선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긍정하시고 단지 이 모자 가족이 스스로 힘으로 물과 양식을 구하지 못하는 그 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임무를 띠고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스마엘 종족의 보존은 사실은 아브라함의 종족의 번창의 원리를 설명해 주기 위함이다. 이스마엘 종족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이스마엘' 이라는 이름을 지어 줄 때부터 하나님의 관리 하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지어 줄 때는 그 아브라함의 이름에 합당하게 관리해 주신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차이 나느냐 하면 이스마엘 종족은 인간이 스스로의 긍정적으로 여기는 면을 유지, 보존하는 방식의 연속으로 이어진다면, 아브라함 종족은 계속적으로 인간적인 요소를 배제하면서 실행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긍정적인 행위는 전혀 없다. 단지 아브라함은 행함이 아니라 은혜를 입어 의롭다고 받은 분이고 또한 믿은 자의 조상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이웃이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이 이사를 온다든지 혹은 가는 곳마다 이단들이 설치는 것을 보고서 마음 아플 것이다. 참된 믿음은 그런 이단들 마저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관리 체제 하에 놓여 있음을 믿는 마음이다. 따라서 자신의 처지나 행위를 보고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악인이 번창하더라도 말이다.
21:22-34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평소에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리 생소한 일들이 벌어진다. 이는 아브라함 자체가 보통 사람하고 다르기 때문이다. 창세기 12:3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다. 이 점이 바로 아브라함과 여타의 사람들을 구분 짓는 차이점이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위치는 확정된 것이다. 수정이 안 된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예상치도 못한 일을 당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진 이러한 위상으로 인해 세상은 새로운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 대대로 이어지는 하늘의 숙명이다. 사람의 운명이란 아브라함을 어떻게 보느냐 로 결정 난다.
신자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 신앙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신자를 향한 자신의 뜻이 있다. 그 뜻은 신자뿐만 아니라 불신자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주위에 있는 불신자들이 알아서 신자를 신자처럼 대우하는 경우가 일어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맹세를 체결하면서 아비멜렉에 일곱 암양 새끼를 주면서 그것을 받으라고 한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도 아니요 그런 위치에서 맹세를 한 것도 아닌 것이다. 아브라함은 은혜를 주는 입장이요 아비멜렉은 은혜를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내세운 맹세의 우물은 이 지역에서의 아브라함의 우월과 은혜의 주도권자임을 분명히 증거케 하는 우물이 된다.
인간의 것을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일방적으로 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브엘세바의 우물은 나중에 이삭의 우물이 되고 야곱의 우물이 된다.
요한복음 4장에서 이 야곱의 우물에서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목마르신 예수님에게 물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으로부터 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구원의 샘터가 되어 그 생수를 여인에게 주어 여인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구원의 맹세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간의 체결된 맹세이다. 우리는 그 혜택을 입고 있을 뿐입니다. 그 맹세 속에는 인간의 먼저 하나님에게 대들고 범죄한 요소가 담겨 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자기가 잘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첨부파일 : 창세기 18장 -21장.docx (37.8K), Down: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