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21장 주석
창세기 18-21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18-21장
약속의 자식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 자식이 함유하고 있는 구원의 정보가 무엇인지는 규명할 필요성이 있다. 아브라함 가정에 그 자손을 주시기 전 먼저 천사 세 명을 파견하셨는데 이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을 위해 파견된 자들이다. 그 천사를 아브라함 가정이 따뜻하게 대우해 준 행동과 소돔 성 주민들이 그들에게 행한 무례하고도 음란한 행위를 성경은 대비시켜 놓고 있다.
아브라함 가정이 그들을 대접한 것은 천사라는 신분을 알아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 지방 사람이 아닌 나그네라는 점에서 그렇게 하였다. 이웃 환대법의 시원은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을 멸한 가인의 저주에 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실 때 어떤 식으로 나타난다는 것까지 예시되어 있다.
이웃을 지키는 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은 이 땅에 자신을 등장시키고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무엇이 죄악이 되며 소돔과 고모라 성에 무엇이 결핍되어 그 죄악이 하늘까지 상달 되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실제로 천사가 그 동리를 방문하고서 보다 분명해진 사실이었다. 거기에 비해 정성껏 천사들을 하나님이 보낸 특사로 인정하고 대접하는 롯의 행위는 분명 그 지방 사람들과는 다를 뿐 아니라 아브라함 가정이 이해한 것처럼 단순한 사람의 차원으로 그들을 영접한 것이 아니었다.
롯에 대한 이러한 특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하나님이 취한 특별 조치였음이 드러난다(19:29). 이러한 언약의 상대자로서 아브라함이 지닌 의의 중개 기능은 아브라함 가정이 그랄이라는 지방에 내려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한 것은 전에 애굽에 내려갔을 때와는 달리 하나님의 특별 지시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지시는 아브라함 고유의 구원적 기능을 보여주며 특히 약속의 자손이 어떤 기능을 위한 출생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인해 자신의 가계가 번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우연찮게 그(왕)는 아브라함 아내와 동침할 뻔한 순간을 맞이하는데 이 일 때문에 그 집안에 좋지 않는 징조가 발생되고 그 친척들 가운데 여인들이 태가 닫히는 일들이 벌어진다. 하나님은 꿈에 나타나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의 존재 의의(意義)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만약 아브라함이 너를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의 집안은 멸종한다고. 아브라함이 그를 위하여 복을 빌자 드디어 태가 열리면서 그 집안에 생기를 얻는다. 그리고 난 뒤 이번에 사라의 태가 열리면서 이삭을 탄생시킨다.
아비멜렉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사라 태의 열림은 곧 복의 강림을 의미하며 복의 강림은 하나님의 우호적인 은총의 내림을 뜻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처참한 멸망을 구경한 아브라함으로서는 이번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이 자손은 바로 그 멸망 한 가운데 복의 원천의 자격으로 개입하여 약속의 민족을 구성할 복의 인간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제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 집안에서 떠날 때가 되었다. 그들이 따로 나가서 나라가 건설되면 이제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대결이 아니라 나라 대 나라의 갈등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의의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그 지역에 자기의 자리를 확보하기 시작한다. 이는 장래를 대비한 경영으로서 그의 후손이 장차 지역의 통치자로 등장될 것을 내다봤기 때문에 미리 계약을 체결하여 법적인 확실한 권리를 확보해 놓고 있다. 즉 이 땅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민족만이 거할 수 있는 땅으로 계약해 놓은 것이다.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그 지역 주민과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복의 원천으로서 그의 신분과 연관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것도 동반해서 보여진다. 이점은 그가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추구해야 될 일이 바로 이점이다. 교회는 세상을 의지해서도 아니 되고 또 세상을 두려워해서도 아니 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 약속, 그 자체로 남을 때 교회는 자신의 할 일을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
약속의 자식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 자식이 함유하고 있는 구원의 정보는 무엇인가? 유대인들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 쪽에서 주실 메시아와 인간 쪽에서 기다리는 메시아 상이 다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못 알아본다.
인간은 종교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종교를 원하는 그 모습을 죄의 절정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 없다 인간에게는 지옥만 필요하다. 구원하고 안 하고는 하나님의 긍휼의 소관 사항이다.
구약에서 주의 개념은 구원자의 주권이다. 구원하고 안하고는 주님의 소관이다. 주의 개념 안에는 출33:19의 정신이 들어 있다. 은혜, 긍휼을 주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통해서 이 작업을 이루신다. 교회는 구원 받은 자의 모임이다. 긍휼을 받은 자의 모임이다.
이삭이 초점이 아니라 이삭을 주는 쪽과 받는 쪽, 이삭을 받는 쪽이 주는 쪽의 의미를 아느냐 이삭이 어디서 태어났으며 왜 이삭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으며 왜 이삭을 죽이는 쪽으로 몰아가시는가를 아는 것이 약속의 자녀이다. 인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조카에게 위기가 닥쳐온다. 아브라함은 소돔이 아니라 조카를 위해서 기도한다. 심판을 받을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사의 파견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이다. 아브라함과 연관된 조카는 아브라함 때문에 살았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들어주신다. 복의 근원의 개념은 심판에서도 구원을 받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희생 제물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나중에 나온다. 자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구세주를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기도에서 의인은 한 명도 없다. 그런데 롯은 살았다. 무엇 때문인가? 아브라함의 기도는 무엇인가? 영원한 우리의 죄를 인해서 돌아가신 그 분으로서의 아들이 진짜 복이고 그 복으로 인해서, 그 복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기도하므로 롯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사라의 태가 열리면서 이삭을 탄생시킨다. 아비멜렉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사라의 태의 열림은 곧 복의 강림을 의미하며 복의 강림은 하나님의 우호적인 은총의 내림을 뜻한다.
아비멜렉의 태를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열었다. 사라의 태는 하나님에 의해서 열린다. 아비멜렉의 저주 받은 가문이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남으로 깨닫는 것은 아브라함은 자신은 저주 받은 인간인데 하나님에 의해서 귀한 자식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서 주신 것이다. 내가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해서 태가 열린 것처럼 동일하다. 죄를 이기고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찾아오신 것을 알면 더 이상의 복을 기대하지 말고 대 만족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같은 대만족을 누리는 사람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죄 용서 하나로 대 만족하는 그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 사랑으로서 만족해야 한다 더 이상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긍휼이 있으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종교가 필요 없다. 하나님의 긍휼만 있으면 족하다. 즐거워해야 한다. 모두가 예수님만을 바라보면 사랑의 질서가 이루어진다. 목회자의 권위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 주안에서 하나되는 것이 교회이다.
18:1-10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이 보니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 오시고 있었다. 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다른 두 분은 천사로서 소돔과 고모라도 내려가신 것이다.
세 분의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후한 대접이나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나름대로 복안을 가지고 오신 분이다. 그 복안은 "사라가 어디 있느냐?"로 시작하신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수풀 속에 숨어 있는 아담 부부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름대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너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 분에 있어 진정한 기쁨의 잔치는 아브라함의 접대나 사라의 음식 솜씨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예고하신 그 내용이 진정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을 성사시킨다.
실제로 천사는 말씀하시기를 "내년이 다시 올 터인데 오게 되면 그 때는 벌써 사라가 임신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삭의 잉태는 결코 아브라함 개인의 소원 성취 차원 일어날 일도 아니고 분명히 하나님의 앞선 뜻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천사 세분씩이나 무엇 때문에 자신을 한꺼번에 찾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다. 이런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어 하나님의 일방적 뜻이 내장된 자만이 신자이다.
18: 16-21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계획이 따로 있으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므로서 하나님의 선택이 들어 있는 사람과 하나님의 선택이 들어 있지 않는 자들의 차이를 보여주고자 하신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자신의 뜻이 따로 없다. 하나님의 뜻이 모두 아브라함에 적재되었다.
17절-18절에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아브라함은 그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나라가 이런 식의 강대국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그 어떤 부탁도 한 적이 없다. 선택된 자에게 있어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이 품고 있는 뜻 가운데 '강대한 나라'가 된다는 대목이 있다. 20절에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사정을 주목하신다. 방관하시지 않으신다. 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고자 하신다. 선택된 아브라함에게 당부하는 바가 왜 아브라함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 수 밖에 없는 가를 제시하고자 하신다.
19절에 아브라함으로서는 단지 선택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아브라함의 나라가 강대해진다는 것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바람이나 소망으로 전환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이미 구원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자동적으로 강대국이 될만한 자격을 취득했다고 봐서는 아니 된다. 결코 자신의 의로움으로 강대국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고백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운 나라로 만드시려고 하신다.
선택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내용까지 믿는 자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운명이 이미 선택되고 확정된 바대로 하나님의 법도와 공의가 담겨 있는 나라이다 는 사실을 믿는 자이다. 이것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수고에 의해서도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포함해서 믿는 자이다.
비선택 된 사람은 출발선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뜻에 두는 것이 아니고 선택에 관한 내용만 빼고 하나님을 이해하려 든다. 모든 사실은 아직 미확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사람들이 하기 여하에 따라서 채워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란 단지 기준만 제시되어 있고 그 기준에 부합되고 아니 되고는 순전히 인간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선택된 자의 면모를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준수하려고 하니 그 위선 되고 모순된 태도가 빤히 보이게 마련이다. 모든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애쓰고 기도하는 것은 선택된 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그 나머지 부분을 마저 채워 달성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참된 선택된 자는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고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된 뜻으로 여기고 매사에 황공스러워 할 따름이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탐낼 만한 목표에 대해서만 은혜를 논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극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 놓여 있더라도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쏟아놓기 마련이다. 신앙 생활을 편하게 해야 한다. 선택된 자들에게 결코 억지로 하는 공도나 의는 없다. 이미 하나님의 의와 공도가 그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8: 22-33
22절에 두 천사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소돔과 고모라에 불심판 내리러 갔고 이제 아브라함은 남은 분, 즉 여호와 앞에 서있다. 두 천사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소돔과 고모라에 갔다는 것은 그 도성의 심판은 이미 기정 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판이 이제 와서 취소될 수는 없는 일이다.
23절-25절에 대다수의 악인을 멸하는 것에 아브라함은 동의한다. 하지만 왜 그 심판으로 인해 의인도 함께 죽어야 되느냐가 납득이 안된다. 아브라함 생각에, 그 동안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 받지 않는 것은 대다수의 주민이 착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의인 50명 정도는 있어 만약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는 심판하면 의인을 하나님이 징벌하는 식이 되기에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 받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의인의 존재가 다수의 악인을 용서하는 식으로 지탱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결행하신다고 하니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상이 깨어질 판이다. 하나님의 답변은 아브라함 생각과 동일하시다. "의인 50명이 있다면 나는 그 도성을 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소수라 할지라도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나름대로 갖고 있는 심판 원칙에 따라 계속 요구사항을 내어놓고 있다. 의인의 존재를 가지고 심판 자체를 유보 시켜 보려고 한다. 염치불구하고 요구한다고 하면서 의인 10명까지 내려 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의견에 동의하시면서도 여전히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변함이 없다.
아브라함은 계속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의인의 존재로 인해 악인에게 돌아가는 혜택에 대해서 아브라함 생각은 하나님과 같지 않았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의인 한 사람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냐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계속 대들기를 통해서도 분명히 보여주겠다는 뜻이다. 의인 50명이 아니라 의인 10명만 있어도 멸망되지 않을 정도로 의인의 존재는 가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막무가내는 너무나도 자기 생각에 도취되어 있기에 나온 결과이다. 아브라함은 비록 죄악 된 세상이라도 할지라도 소수의 의인과 함께 살므로서 상호 서로 평화롭게 사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저쪽은 악인인 채로, 이 쪽은 의인인 채로 말이다.
이왕 세상은 악한 세상인 것이기에 의인만이라도 조용하게 사는 것이 더 낫지 아니한가 하는 생각이다. 의인 덕분에 악인의 멸망이 유보되고, 의인은 의인대로 심판이 감행되지 않으니 평화롭고, 이러한 체제를 아브라함의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 자신의 의문점을 털어놓고 있다.
이러한 아브라함 생각의 허점은 멸망의 도성이라도 빌붙어 살아야 된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은 롯을 다른 곳으로 빼돌릴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민이 아니고 거류민에 해당된다. 잠시 머물다가 떠날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의인 롯을 그곳에서 건져내고 그 나머지를 철저히 심판하므로서 심판은 심판대로 이루어지게 함과 동시에 의인은 그 어떠한 심판에서도 심판 받지 않는다는 공의성도 아울러 보여주고자 하신다. 아브라함처럼 의인이 그냥 편하게 악인의 세상에서 빌붙어 사는 것으로 공존하는 사실이 하나님의 최종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성과 심판은 성도를 편하게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성도 그 자체도 결코 의인이 아니라 마땅히 심판되어야 하지만 진정한 의인 되시는 그 누구로 인해서 구원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공의성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적인 질문을 허용하셨는데 이것이 또한 은혜이다. 그 와중에서 아브라함이 지니고 있는 중보자적 입장을 정말 제대로 파악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쪽으로 수정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요구는 의인 10명 선에서 멈춰버린다. 아무리 의인의 숫자를 낮춘다 할지라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은 철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함께 믿어야 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는 공의성을 들이밀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일임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 간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그 중보성을 통해서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의인 롯을 악인과 함께 멸망하지 않게 조치하셨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의 존재 가치를 놓치고 스스로 의인 노릇하면서 주위에 깔려 있는 악인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지는 않은지 하나님을 잘 믿는 자신부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사는 잘못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19:1-11
소돔 땅의 롯은 어째서 그 두 나그네를 환대한 것인가? 환대 정도가 아니라 자기 집안이 풍지박산이 되는 것을 자청하면서 그 두 나그네를 영접하고자 했다. 이것은 롯이 무엇이 정상적인지 무엇이 비정상적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롯은 그 두 나그네를 보는 순간, 이 더러운 세상과 전혀 다른 때묻지 않는 분으로 보았다. 그래서 목숨 걸고 그 분의 신체를 안전하게 지켜 드리려고 했다. 그만큼 롯은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알았던 것이다. 심판이 엄중한 하나님의 일인 만큼 우리도 진지하게 예수님을 생각하고 영접해야 한다.
19:12-22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이 우호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타협조로 나오시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묻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일하신다. 타협과 협상과 양보로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은 일방적으로 일을 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그 일방적 일 처리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세상을 향해 공격하신다. 인간 세계는 그저 당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일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심판의 진행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덮어주신 그 은혜를 스스로 철거함으로써 실시된다. 원래부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덮여 있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교육 받기를 계속해서 '가능성, 가능성'만 계속 강요해 왔지 은혜에 대해 교육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설사 은혜를 교육시켰다고 해서 그 은혜에만 감동할 위인들이 아니다. 인간의 위대함이 부각되는 쪽으로 세상 교육은 있어 왔다.
모든 것은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하나님의 태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멸망 당해도 당연한데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지 결코 인간의 행함이 아니다. 우리 행동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내리신다. 하나님의 자체적인 자비심의 발로이다.
12-13절에 천사는 자신을 심판자로 소개하면서 성밖으로 나가라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우리가 참으로 은혜를 아는 자라면 무엇이 기쁜 소식인지 무엇이 기뻐해서는 안 되는 소식인지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롯의 사위들은 이 천사의 소식을 농담으로 돌렸다. 그리고 롯의 처는 천사의 기쁜 소식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이 전하신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그렇지 않는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은 인간적인 어떤 차별이 없다. 자신이 진작 멸망 당해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면 이 예수님의 이야기가 참으로 다행스러운 구원의 말씀으로 다가올 것이다.
19:17-29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데 그 태도가 차갑고 냉정하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 자세를 배워야 한다. "나는 이 성을 멸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멸망했다" 라는 일관성이다. "너는 뒤 돌아 보면 안 된다. 롯의 처는 뒤돌아봐서 죽었다" 라는 결과도 일관된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차갑고 냉정해야 하며 비정해야 한다.
앞 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목표만 생각할 때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걱정거리는 사라진다. 확고한 게 있기 때문이다. 연필 속에는 심지가 있다. 그 심지는 나무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나무를 깎아내면 언제든지 확고한 심지가 나타난다.
우리한테도 이런 심지가 심어져 있어야 한다. 심지가 없으면 안 쪽이 텅텅 비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들어가면 이 일 때문에 고민하고 저 일이 들어가면 저 일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계속해서 심신이 상하게 된다. 차갑게 냉정한 인생관이 없으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다 심판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 받은 자가 한 명 나온다. 구원 받은 자는 다른 사람과 뭔가 차이 나는 것이 있다. 심지 같은 것이 있기에 무서운 하나님의 불 심판 마저 덮치지 못할 그 심지 같은 것이 있었던 사람이 나온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맹렬한 심판 가운데서도 구원 받은 자를 남겨서 그 구원 받은 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참으로 냉혹한 심판을 감행하신다. 이런 구원의 심지가 있다면 남들이 뭐라고 해도 그 인생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이다.
19절에 롯은 그것을 '은혜'라고 보고 있다.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롯은 '은혜를 얻었다'고 했다. 그래서 생명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심판 받는 자는 '은혜'라는 심지가 없는 것이다. 롯의 사위의 경우를 보면, 그들에게는 은혜가 없기 때문에 그 대신 "심판은 없다"는 식으로 심판을 사전에 유야무야 하려고 했다.
롯은 은혜라는 말은 해놓고서는 그 은혜에다 자기가 염두에 둔 구원방식을 개입시켜 보려고 한다. 19-20절에 롯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들의 태도를 방불케 한다. 흔히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안다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1:3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2에 긍휼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성도가 구원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효과가 그대로 전달되는 은혜이다. 그런데 이 은혜를 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나름대로의 이 은혜를 자신의 제시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항상 이용하려 든다.
롯은 천사가 준 은혜의 내막을 전부를 모르고 그저 그 은혜를 자신이 사는 쪽으로 한번 활용해 볼까 하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쪽에서 나에게 은혜를 주신다니까 이왕에 본인의 능력 수준에 맞추어 안심이 되는 선까지 한껏 이용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 안이라고 여긴 작은 마을로 피신하게 되었다.
유황불에서 면제 되었지만 이들 가정은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 원칙 아래에 놓여있었다. 뒤돌아봐서는 아니 된다는 엄명을 어긴 롯의 처는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롯의 처는 아직도 자기가 자기를 살리던 예전 방식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유황불에서는 면제되었지만 하나님의 심판 원칙은 구원 속에서 결코 철회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 방식으로만 살아야 될 구원 받은 자가 그 은혜 방식에 의심을 하고 스스로 포기한다면 그 사람이 비록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소금기둥이 될 공산은 늘 있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2-3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자. 분명히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이 은혜로만 구원이 된다. 그 어떤 인간의 공로나 선한 행위가 첨가될 필요성이 없다. 사람들은 이 방침의 깊은 은혜 성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자신의 불안감 해소용으로만 도용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심정은 차갑고 냉정하시다. 롯의 처 못지 않게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 수 천번을 뒤 돌아 본다. 소금기둥이 우리 모두이다. 여전히 스스로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시지 않는 것은 은혜의 위력이고 긍휼의 위력이다. 구원 받은 자라면 정말 제대로 롯의 처를 생각할 것이다. 롯의 처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그러기에 자신을 위한 그리스도께서 귀한 피를 흘러 주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19:30-38
롯의 가정은 평지가 무서워서 산으로 피신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무서운 유황불에 살아남은 것은 다행스럽지만 그들 마음 속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포부가 그대로 살아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롯의 가정만 있다. 아버지하고 딸 둘이 남았다. 자손 번식은 자아 보존에 있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자식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두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자아가 위험 부담 없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확산 시키겠다는 신체적 본능에 기초하고 있다.
롯의 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손 번식을 우선적으로 생각해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는 내심의 본능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러한 내심의 금지마저 넘어설 정도로 강렬하다. 이것이 바로 어두움의 특징이다. 인간의 자기 본성을 강제로 금지할 그 어떤 요건도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 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구원 받았다고 해서 옳다고 봐서는 아니 된다. 어두움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롯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서 결국 다 아들을 얻게 된다. 하나는 모압, ‘아버지부터’라는 뜻이다. 다른 아들 이름은 벤암미 이다. 내 혈육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곧 암몬 족속이다. 신명기 23:5에 보면 이 두 민족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여호와의 총회는 오직 여호와의 사랑에 의해 탄생된 민족뿐이다. 그렇다면 모압은 모두 지옥 가는가? 모압 여인 룻은 다윗 왕의 반열을 낳는 여인이다. 어째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모압 나라 출신의 여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왕이 등장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든 조직과 혈통을 초월하는 다른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주도권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롯의 가정이 구원 받은 것은 롯이 단지 아브라함 혈통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그 해당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결과이다. 이런 원리만이 통하는 나라가 진정한 이스라엘인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존재했던 이방 나라이다. 아예 구원이란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민족이다.
우리가 모압이며 우리가 암몬이다.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그 어두움의 요소에 의해서 생겨난 핏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이 여겨주지 않더라도 무방한 어두움의 자식들이었다. 자손번식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는 민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여인 룻처럼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자비로서 무상으로 우리를 건져 주셨다. 우리가 잘나서도 아니요 우리가 남들보다 더 가치 있고 귀해서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떨어졌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과 그 분의 메시아를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가치나 자존심에 연연하면 안된다. 계속해서 주의 은총만을 길이 높이는 자가 되어야 한다.
20:1-7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를 극복해야 한다.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 6절과 7절의 말씀이 각각 그것이다. 하나님은 지정한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치 않도록 막을 수 있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이다.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 타인이 기도하고 도와주셔야 우리에게 저주가 오지 않고 복이 오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죄의 원인 제공자는 아비멜렉이 아니라 다름 아닌 아브라함과 사라이다. 그 둘은 자진해서 먼저 자신들은 남매라고 속였던 것이다. 잘못은 아무 죄 없는 아비멜렉에게 돌려 놓고는 그 집안을 몽땅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하나님 다운 일관성과 정의로움과 틀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을 이렇게 하는 이유는 구원된 당사자는 중보자의 예속 하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성취라는 것이다.
아비멜렉이 도로 정상적으로 돌아 온 것은 아비멜렉이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기도 덕분에 정상적이라면,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죄 안 짓도록 한 것도 역시 아브라함의 위상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지 아비멜렉의 의로움을 부각시킴이 아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증인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이 원인 제공자이니까 말이다. 아브라함을 데리고 사용하는 그 취지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 성취에 있다. 그 뜻 성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