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 - 16장 주석
창세기 15장 - 16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15장 - 16장
약속의 성취가 전쟁을 통해 달성된다는 사실을 아브람이 접하고 난 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전쟁에 있어 너의 방패가 되며 그 결과로 주어진 전리품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너에게 전쟁 승리의 결과로 줄 수 있는 것은 많은 자손과 그리고 이 땅이다]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이 사실을 믿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義가 되는 것이다. 義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면서 완전히 포기할 때, 그 때 내리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두고 말한다.
이처럼 약속이 전쟁의 형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이미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으로 설정된 바 있다. 그것이 아브람에게 있어 적절한 형태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거룩한 전쟁의 군사로서 부름 받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그때 그때마다 적들을 [붙이시는] 방식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심으시는 것이다(창세기 14:20)
아브람이 믿는 자손과 땅의 성질은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 그 승리의 요소가 함유된 자손들이요 땅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세속적인 자손이나 땅이 아니라 약속의 자손이요 땅이 되는 것이고 그들도 아브람처럼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또 복의 민족으로 탄생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복의 탄생을 현 가나안 땅 거민의 죄악의 관영함과 결부시켜 일을 감행하실 생각을 갖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죄악의 관영함을 징벌하실 때 아브람의 후손을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죄악의 심판 한 가운데서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의롭고 거룩한 민족의 출현을 기대하시는 것이다.
아브람과 그 후손에 대한 이러한 구체적 언약의 확실한 보장을 위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로 마련된 제물들을 마련하고 그 가운데를 쪼개어 놓았을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를 불꽃 모양으로 지나가셨다. 이러한 의식이 보여주는 의미는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담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계약은 이 계약을 위해 희생된 자가 없으면 성취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 희생을 기어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있다는 하나님의 결단을 나타내는 것도 바로 계약 의식이다.
그 희생에 하나님이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계약은 아브람의 계약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도 준수해야 될 계약이다. 이러한 계약정신이 요청되는 것은 여자의 후손의 모습을 이 속에서 출발시켜 뱀의 후손과 대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여겨진다. 이러한 계약정신은 앞으로 주어질 모든 구원의 개념들 속에 보편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에 비추어서 죄가 무엇인가 규정될 것이다. 이러한 계약정신 밖에 있는 것은 죄악이요, 이 안에 있는 것은 義가 될 것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남편에게 요청하기를 여종을 통해서라도 약속의 후손을 갖자고 했다. 아브람도 그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그 일로 인하여 가정에 불화가 생겼다. 아브람의 종 하갈이 고통스러워 하자 하나님은 하갈에게 다시 원주인 사래에게 돌아가 복종하기를 명령한다. 이는 종의 자손과 주인의 자손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그 자식 이스마엘은 남아 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스마엘: 하나님이들으심) 이란 그 이름 속에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피해 받고 우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관심하지 않는 그 정신으로 구원은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수많은 이스마엘등을 양산하고 있지는 않은지 교회는 조심해야 한다. 일종의 영적 사생아라고 할 수 있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계약정신에 위배될 때마다 잉태되는 산물이다. 쉽게 고난 없이 이어지는 구원은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본격적인 전쟁을 할 것이다(창15:13-14)
아브라함의 씨 문제가 나온다. 4대만에 돌아온다는 것에서 씨의 문제와 과연 악을 징벌할 자손은 어떤 자격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너는 아니 되고 너의 후손으로 말미암는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을 거부하므로 아브라함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하나는 종의 자식이고, 다른 하나는 본처의 자식이다. 노아의 경우와 같다. 셈과 함과 같다. 아브라함의 혈통 속에서도 종이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난 자식은 싫어한다. 가나안 족속은 인간의 혈통으로 태어났기에 징벌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삭처럼 약속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아니한 자는 다 진멸 하시겠다는 것이다. 혈통으로 난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례를 행하게 한다.
15:1-7
1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는데 이러한 소개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속에 들어 있는 말을 내놓게 한다. 하나님, 이번에는 무엇을 주시렵니까 라고 화답한다.
하나님이 너의 방패와 상급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은 너는 어디를 가든지 승리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옛날의 전쟁은 신들 끼리 벌리는 전쟁의 대행체제로 진행되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전쟁에 관여하겠다는 것이다.
방패 이야기로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의인이다 는 말로 매듭지으신다. 의롭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도와줄 수도 없고 도와줄 리도 없다. 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승리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의 승리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행함이 개입됨이 없이 믿으니 의가 되는 이유를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털어놓는 속내를 이용하신다. 아브라함은 상속자가 없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자기 의사를 털어놓고서는 후손이 없기에 종을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네 몸의 날 자가 너의 후손이 된다 고 하셨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전혀 생각조차 해 볼 수도 없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의인 되게 하신다. 아브라함의 의견이나 행위가 개입된 것이 아니다.
이점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로마서 8:3의 예를 들면 우리는 분명 죄의 종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의인이 되고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는 우리들의 의견, 힘, 애씀의 아이디어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참 아들이 개입이 있어야 성사될 문제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규정 시켰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은 그 자체가 죄였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말이다. 이 아들의 영이 임해야 한다.
로마서 8:15에서 그 '아들의 영'이다. 더 이상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제시한 행위란 기껏 종에 불과했다. 우리 인간이 내세우는 의라는 것은 기껏 죄의 종으로서 드러내는 가짜 의일 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다른 인물을 개입시키려고 하신다. 예수님을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시는 법칙과 동일하다. 아브라함에게 개입된 인물에 아브라함의 아이디어가 전혀 섞여 있지 않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밤의 하늘을 보게 하신다. 그리고 그 별의 숫자를 세게 한다.
아브라함이 그 수많은 별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아브라함의 행할 수 있는 행함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바로 이와 같다. 하나님에 의해 주시는 은혜란 인간의 자기 기대치의 수준에서 다 헤아릴 수 없다. 아무리 해도 그 많은 별을 다 셀 수 없듯이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은혜라는 것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엄청난 규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이 계시한 계획과 약속하신 바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이 아브라함과 다른 적들과의 차이 나는 점이다. 아브라함의 의는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된 인물과 관련 지어서 판정 받는 의이다. 성도가 의로운 것은 예수님이 의롭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 내었다고 여기는 의를 거두고 히늘의 별처럼 도저히 다 헤아릴 수 없이 우리 한계를 벗어난 그 의를 자랑해야 한다.
15:8-21
13절에서 21절까지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일어날 일이 예언되어 있다. 후손들에게 이런 축복을 퍼부어주시는 것은 이방 민족에게 없는 것이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내용은 제사의 제물에 관한 내용이다. 이 내용으로 인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거룩한 백성, 의로운 백성으로 규정되고 반면에 이 언약적 내용이 없는 민족들은 악한 민족, 비거룩한 거룩으로 취급 받는 것이다.
3년 된 암수소, 3년 된 암염소, 3년 된 수양, 그리고 새와 비둘기가 담고 있는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제물에는 등급이 있다. 큰 가치를 담고 있는 재물과 보다 작은 가치를 담고 있는 재물도 있다. 소 같은 제물은 온 백성의 모든 죄나 대제사장을 위한 제물에 바쳐지는 제물이다. 염소 같은 것은 장로급의 속죄제에 등장된다. 양은 일반인들의 제물로 사용되며 새나 비둘기는 가난한 민중들을 위한 제물이다. 이것 저것도 살 돈이 없는 자는 곡물을 바치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소나 염소나 양 등 제물의 등급 별로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위계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다. 등급에 속해 있는 소나 염소는 수컷이 아니고 암컷인 것은 상위 등급, 즉 하나님께로 가까운 쪽에 있는 제물이 유독 암컷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하위 등급, 즉 인간 쪽에 가까운 제물이 수컷으로 시작한다는 점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위에는 암컷만 있고 아래에서 수컷이 지배한다. 하나님이 어머니 역할을 해서 수컷, 즉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창세기 3:15에 있는 말씀, "여자의 후손이 악마를 이긴다"는 내용의 연장선에 같이 놓여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이어져 아브라함에게는 제물의 형태로 전달된 것이다.
왜 하필이면 3년인가? 그것은 제물이 되는 동물을 가지고 고유의 속성을 표출 할 때는 년 수를 가지고 표현한다.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에서는 1년 된 수양으로 '흠 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3년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가? 그것은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쪽으로 나온 세 분의 천사가 나타난다. 이 분들이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 부부를 찾아온 것은, 그대들이 받은 언약이 무용지물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언약대로 진행된다는 증거로 이 세 명의 천사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언약대로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을 칠 수 있는 후손이 나타나는 것과 아브라함의 언약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즉 이삭의 출생을 통고하러 이 세 분의 천사가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이들 세 분의 천사는 지상 쪽에 속한 분들이 아니라 하나님 쪽의 사람이다. 이들은 곧 하나님의 대표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어머니 역할을 상위 등급에 속한 제물로 표현하기 위해서 3년이라는 기간을 표현방식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1년과 비교해서 더 늙었다는 것이 아니고 더 노숙하다는 말이 아니다. 3년이란 '3'과 관련된 분의 작품으로서 아브라함의 언약대로 후손이 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 내용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해야 될 몫은 없다. 그 언약의 내용을 실천하는 주체자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 증거가 17절에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중간을 쪼개어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으라고 하셨다.
제물의 본질과 속성이 무엇인가를 아브라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횃불로서 그 중앙을 통과하신다. 이는 곧 이 제물이 말씀하는 실체는 하나님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제물로 통한 언약의 실제적 기능자라는 점을 보이는 것이다.
16:1-14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세 사람 모두 다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우선 여종 하갈부터 보면, 하갈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의 행위를 정당화 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갈과 그 후손을 키워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어떤 씨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냐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자손이 하늘의 별 만큼 번성한다고 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작업이 아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도 번성 시키고자 하신다. 알곡도 번성하지만 더불어 가라지도 번성케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 천국의 씨가 될 수 밖에 없느냐"를 계속 말씀 하시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하갈은 하나님은 자기 편이 되는 줄로 알고 있다. 이것은 오해이다.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하면 아브라함 부부의 오해로 인해 생긴 같은 오해이다. 아브라함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오해를 그냥 두고 보시는 이유는 씨의 원천을 계속해서 인간에게 두지 않기 위해서 이다.
어떤 인간이 바른 인간으로 변모해서 거기서 나온 씨를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씨로 간주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인간의 잘못은 잘못대로 그대로 자행하게 하시고 그 잘못된 오해와는 별개의 씨를 마련해서 그 씨로 인해 오해하고 있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씨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것을 알게 하시는 방식이지 결코 거룩한 씨를 인간들의 달라진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하갈을 아브라함 가족과 다시 합류 시키는 것은 모두다 다 같이 문제점이 있음을 밝히고 거기서 천국의 씨는 그들의 자질로서 결정되는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따로 마련해주는 씨가 누구를 통해서 나오느냐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8절에 하나님께서 이미 하갈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신분을 몰라서가 아니고 아시기에 찾아오신 것이다. 여종이라는 신분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일에 있어 중요한 한 역할을 담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는 네 위치를 이탈하고 있으니 도로 제 자리로 돌아가라 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차원이다. 하갈은 전체로서의 자기 위치를 모르고 그저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는 점을 염두에 둔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갈처럼 오해하면 안된다.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자기 입장에 생각하고 전체를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갈을 전체 속에 도로 집어넣으려고 하시려는 것이다. 하갈은 개인적인 학대를 피해서 전체적인 구조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일부로 찾아와서 하갈을 다시 전체적인 구조와 조화가 되도록 집어넣고자 하는 것이다. 네 씨를 번성케 해주지만 네 씨는 고생을 죽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16장의 이야기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4:21-23에서는 하나님은 전체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갈이 난 자식은 천국에 못 들어가고 사라의 몸에 태어난 자식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 우리의 공로가 결코 아니다. 전체적인 계획에 보면 원래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은 하갈의 씨든 사라의 씨든 누구든지 그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정작 구원 받는 것은 하갈의 씨가 아니고 사라의 씨라면 당연히 자신의 행위로 구원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갈을 감찰하사 다시 사라의 집으로 합류 시킨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개입의 의미인 것이다. 우리의 기본적인 욕망을 지적하는 그 의의도 같이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