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강의 2007년04월13일(고린도후서 4장) (1/2)
안산강의 2007년04월13일(고린도후서 4장) (1/2)
이름 : 조현창(IP:222.108.62.231)
자, 고린도후서 4장 할 차례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두 가지 층이 달라지죠. 하나는 뭐냐 하면 영적인 해석, 영적 차원, 영적 층이 있고, 그 다음에 문자적인, 육적인 층이 있었죠. 육적인 층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죠. 문자로 해석한다는 말은 ‘문자로 밖에 해석이 안 된다’는 뜻이죠. 이것은 성경을 해석하면서 ‘아, 너는 내 백성이 아니야’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이렇게 건지기 위한 책이 아니고 내 백성 맞느냐 아니냐를 구분하기 위한 책입니다. 성경을 던져주고 ‘해석해 봐라!’. 육적인 해석이 나오면, ‘아! 내 백성이 아니구나!’. 하고 영적인 해석이 나오면 ‘성령이 너와 함께 있구나!’, 이렇게 구분하는 겁니다.
이러한 구분은, 현재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이러한 구분을 하는 것은, 이미 구약에서 전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가운데 언약의 민족이 따로 있죠. 이것이 뭡니까?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에게만 여호와께서 나타나고 다른 숱한 민족이 있지만 이들에게는 그냥 우상 신만이 있을 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 말은 다른 민족은 백성입니까 아닙니까? (백성이) 아니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쪽에 대해서 어떻게 하죠? 저주하죠. 저주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배반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저주해 버리죠.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을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은 자동적으로 그 자리에서 지옥 가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을 폭로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걸어오다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동전 100원을 주웠는데... 그것을 보면서 이 전도라는 것이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전도란 이렇게 줍는 겁니다. 여기 고물(장수)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 길에 동그랗다고 다 줍지는 않아요. 돈과 돈 아닌 것을 구분하잖아요. 전도란 무엇이냐, 예수님께서 깔아 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만 이렇게 주워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주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울 때, 우리는 동전 100원이 떨어져 있을 때 ‘앗, 돈이다!’ 하려면 돈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되듯이, 영적인 층이 있는 사람만이 그게 진짜 백성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지 육적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냐? 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면 자기편이 되고 자기에게 못 해주면 나쁜 사람이 돼요.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너만 달랑 구원 받으라’는 뜻이 아니고 돈을 줍듯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요, 그 백성을 주워서 함께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성도는 항상 영적인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돼요.
돈도 아닌데 돌맹이 주워 놓고 돈을 주웠다고 하면 이것은 미친놈이죠. 돈이냐 아니면 그냥 자갈이냐를 구분하려면 먼저 돈이 뭔지를 알아야 되듯이, 귀한 줄 알아야 되듯이 영적인 층에 있는 사람은 항상 세상을 볼 때에 영적인 층과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중요해요.
전도한답시고 만약에 돈 내밀어서, 일당 주어 교회에 오게 되면 그 온 사람이 육적인 사람이 와 버리잖아요. 그러면 줍는 것이 아니잖아요. 돈 주우라고 했는데 돌맹이만 주머니에 가득하면 그 것을 다 갖다 버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을 전도할 때 돈을 주고 전도해서도 안 되고 어떤 혜택(구제나 자선사업)을 주어서 전도해도 안 되는 이유가 주께서는 하나님의 구원받을 백성이 따로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남철(자석)에 딸려 나오듯 영적인 특징을 사람들에게 미리 깔아 놓았어요. 그런 사람을 도와주고 돈 주고 해도 되는데, 돈 주면서 당신 영적인 사람이다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돌맹이를 돈으로 어떻게 만듭니까? 무슨 수로 만듭니까? 안 되죠.
추접스러워도(?) 돌이고, 더러워도 돌이고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돌인데. 안 되죠. 되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평소에 성도는 영적인 안목을 늘 24시간 유지를 해야 됩니다. 본인이 유지할 수 없습니다만, 성령께서 늘 유지하게 하죠.
어떻게 유지하냐 하는 것은 계속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제가 여기 3장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에(혹시 지난 강의 듣지 못한 분들은 인터넷에 안산강의란에 올려져 있으니 들으시기 바랍니다.) 영적과 육적을 제가 나눈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나누어 놓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나눈 것은 뭐냐 하면, 모세 이야기에서 보면, 처음부터 구약성경에 보면, 택한 백성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이 따로 있는데, 택한 백성이 안 택한 백성이 될 수도 없고 안 택한 백성이 택한 백성이 될 수 없어요. 왜냐? 선택권이 택한 백성에게 없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에게 선택권이 없습니다. 선택 될 뿐이지 선택권은 없어요. 선택될 권리는 없습니다.
요한복은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를 버리는 사건이 벌어져요. 물 길러 왔으면 물 길어 집에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물동이를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물동이 버리면서 뭐라 합니까?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하잖아요. 보세요, 처음에 예수를 만나기 전 까지는 자기는 메시아는 생각도 안하고 물만 길러 왔어요. 메시아를 진짜 만났으면 그 딴 물 긷는 것은, 육적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 나처럼 영적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물동이 버려두고 마을 동네에 들어가서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예요. 너무 좋아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반가운 애인 만나는 것보다 더 반가와요. 이것은 인류가 만류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한 건수 올리면 보험회사에서 나오는 수당보고 하는 것이 아니예요. 9명 데려오면 1명 네 것은 공짜로 해줄게, 하는 적금 펀드 넣는, 회원 모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왜? 영적인 것에 속한 사람이 영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것은 말려도 안 됩니다. 관심사가 영적인 것에 가 있기 때문에 육적인 것에는 관심사가 없어요.
이 세상에 자기 혼자가 아니라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있다면 그 다음부터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혼자 사는 게 아니란 말이죠. 혼자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은 ‘이제부터 그 분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라는 것은 바로 전에 육적으로 있을 때 받은 사명과는 전혀 달라요. 육적인 사명은 무엇을 하게 되면 전부 내 것이 돼요. 끌어 모으면 다 내 것이 된다고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요. 포대기(포대,넝마) 예를 들었어요.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니까 여기에다 복음, 십자가, 언약 이런 것들을 여기 포대기(포대)에다 막 집어넣어요. 자기는 여기 있고, 여기 포대기안에 언약도 집어넣고 십자가도 집어넣고 복음도 집어 넣어가지고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 얼굴을 보여라’, 하는데 얼굴은 안 보이고 이것들을 자꾸 집어넣는 거예요. 이래가지고 구원받았다고 보는 겁니다. 자꾸 챙기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라는 것이 무어냐 하면 황산입니다. 황산은 손에 닿으면 타버려요. 그렇잖아요? 황산은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여기 컵도 녹아버립니다. 십자가는 황산입니다. 닿으면 죽습니다. 십자가가 들어왔다는 것은 나는 죽어나가는 것이죠. 전에 살아 있을 때는 이것도 내 소유, 내 소유 했는데 이제는 주님과 십자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나는 황산에 녹아서 살이 뻘겋게 타서 아주 죽어버렸어요. 죽고 그 안에서 주님의 사명, 영적인 사명이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의 특징이예요.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리는 것 보세요. 자기 할 일도 모르잖아요. 물 길러 온 것은 생각도 안하고 메시아 만났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동네방네 ‘메시아 만났다!’ 외친다 말이죠.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메시아 만났다!’ 하면 아마 ‘그 메시아가 뭔데?, 뭐하는 물건, 얼마짜리인데?’ 할 겁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당시의 메시아라는 것이 뭐냐? 그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어요. 메시아 오면 로마에서 벗어나서 이사야에서 약속한 대로 세상이 완전히 골프장이 되죠. 잔디밭에 어린양들이 뛰어 놀고 더 이상 일하지 않더라도 힘들게 살지 않더라도 죽음이 없고. 사망이 없고. 영원한 축복된 생명을 누리는 곳. 그 것을 얻는다는 것은 온 지구를 얻는 것 보다 큰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잊을 수가 없고 메시아가 온다는 소망 때문에 온갖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를 여자가 만났다고 하니까 얼마나 놀라운 빅 뉴스입니까. 그러나 육적으로 메시아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 여자가 전하는 메시아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아들이죠. 처음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와 내가 메시아라고 했을 때에도 그 여인은 받지를 않고 거부했거든요.
그래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나누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육적인 사람에게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도저히 이해가 전혀 될 수 없는 그러한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자, 이렇게 제가 3장을 이야기 한 것은 이제부터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4장을 한 번 봅시다.
4장 2절에 보면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고후3장에서 사도바울은 그야말로 납득이 가지 않는, 육적인 사람에게 전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것이 짜증이 날 거예요. 왜냐하면 의사소통이 되어야 뭐 전도랍시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 한 것은 육적인 사람에게 납득이 안 되잖아요. 방금이야기가 이해가 안 되잖아요? 그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금 뭐냐하면 왜 우리가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도저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것이 고후4장에서 큰 어려운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세상 신이 이 종교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지금 우리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종교라는 껍데기가 뒤집어 씌어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이 납득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 하면은 신이라든지 메시야라든지 무슨 소리를 해도 이게 종교라는 이 두꺼운 껍질을 통과해서 주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종교를 누가 쥐고 있습니까? 세상 신이 종교를 쥐고 있거든요.
이게 오늘 고후4장에 보세요.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 한 이것이 참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이죠. 이것은 도저히 묵어주지도 않죠???(이해가되지 않죠?).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처음 만날 때도 예수님 차버렸잖아요. 나 물 길러왔지 그 따위 소리 듣기 싫다고. 물만 길으면 되었지. 영원히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 주세요, 했다가 자기 과거 이야기 한 뒤에 얻어터지고 난 뒤에 충격 받고 난 뒤에 메시아 만났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사람들이 종교라는 것이 어디에서 나왔냐하면, 여러분 여름철이 되면 땀 냄새 나는 사람들이 있죠. 그 냄새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본인에서 나오잖아요. 방구 낄 때 방구냄새는 본인이 피우잖아요. 종교라는 것이 냄새입니다. 누구 냄새? 내 냄새. 나의 냄새예요.
내가 영원히 죽지 않고 죽어서 좋은 나라 가려고 하는 그 냄새가 종교라는 두꺼운 층을 형성하였고 이곳에서 악마가 이미 이것을 장악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무슨 소리를 해도 종교 층에서 (하나님 말씀이) 튕겨져 나가죠.
이게 오늘 날 교회 아닙니까? 교회 목사들 아닙니까? 악마가 쥐고 있는 종교, 그들이 누굽니까? 교회 목사들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육적이고 문자적이예요, 전부 다. 교인들에게 ‘이거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 하고 있단 말입니다. ‘말씀 지키면 구원 받습니다’ 한 단 말이죠. 그것은 복음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 말씀을 줄 때 성경말씀을 아무리 줘도 이 두꺼운 종교 층에서 이것을 뭐로 해석합니까?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뭐로 해석해요? 문자적으로 해석하죠, 문자적으로.
문자라는 것은 뭐냐 명령, 지시 아닙니까? 교육 아닙니까? 명령, 지시, 교육이거든요. 훈련. 이런 것들은 문자 아닙니까?. ‘안되는 놈이 어디 있어 하면 다 되게 되어있지.’ 이것이 교육이잖아요. 훈련이잖아요. ‘안되는 것이 어디 있어 열심히 반복하면 하게 되어 있지.’ 이것이 교육이고 훈련이고 수련이잖아요. 자기 억제고 관리이고. 그것을 오늘날 종교 단체에서 하고 있잖아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수련하고 훈련하고 교육받는 그 당사자도 ‘너는 맨 날 그래도 소용없다!’ 이것을 통보해 주는 것이 복음 아닙니까. 아까 복음이, 십자가가 뭐라고 했습니까? 황산이죠. 몸에 닿으면 같이 죽어버리잖아요. 네가 죽을 놈이란 말이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을 놈이예요. 예수님도 죽었는데 그래 우리는 안 죽을 놈이겠어요?
우리가 살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덩달아서 사는 것이지 우리 힘으로 산다는 게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살 수가 없어요. 우리 힘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 나를 영적으로 만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영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나를, 스스로 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예요. 나라는 자체를 포기 못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으로 끌려가요. 죽음으로 끌려간다고요. 사람이라는 것은 과거의 산물인데 근심걱정이 다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다 과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10살이 되었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기억을 잃었다. 그래서 한 10년쯤 의식불명하다가 나이 20년 지나 스무 살 때 깨어났을 때 그동안 자기 엄마가 죽었다는 것을 스무살 깨어날 때 알겠습니까?
‘우리 엄마가 죽었어.’ 처음 들었을꺼예요. 그러나 열 살부터 스무 살까지 그대로 살았던 사람은 자기 엄마가 죽은 것을 알겠죠. 슬픔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전부 어디에서 나오냐하면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지금 없는 것이거든요. 없잖아요. 사람이 걱정 근심하는 이유가 뭔가하면 과거의 환상때문이예요. 환상. 기억 속에 있는 환상 때문에 걱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거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과거하고 비교하니까 자꾸 걱정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기대한다는 것은 뭐냐? 과거가 있기 때문에 기대를 합니다. 기대를 하게 되면, 기대를 한다는 것은 걱정 근심을 불러 모으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우리 마음속에 귀신이 나오고 난 뒤에 귀신이 나갈 데가 없어 친구 불러서 일곱 귀신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죠. 그죠?
사람이 걱정 근심이라는 것이 사람이 기대하고 희망을 가지면 걱정근심 일곱 귀신 다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중국집에 가서 짬뽕, 자장면, 이렇게 곱빼기, 복음밥... 있으면 뭘 먹을까 갈등이 일어나잖아요? 뭘 먹을까. 자장면 시켜놓으면 짬뽕이 맛있어 보이고, 짬뽕 시키면 자장면 시켜 놓은 게 맛있어 보이고 , 먹으면서도 걱정 근심 갈등을 일으키죠. 제일 좋은 중국집이 뭔지 알아요? 그냥 주방장이 주는 대로 쳐먹어! 이게 제일 좋은 중국집이예요 ^^ 그냥 주는 대로 먹으면 되는 거예요.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것이 자유라는 겁니다. 주는 대로 먹는 거예요. 자신의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고 과거는 지나 간 거고. 미래에 기대를 하는 것도 과거가 있기 때문에 기대를 하는 하거든요. 우리가 기대를 하는 것도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기대를 하는데, 미래라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대로 미래를 만들어요. 내 미래가 아닙니다. 주께서 주시는 미래가 따로 있어요. 왜 그 걱정근심을 하느냐 말이죠.
전부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층에서 성경을 보니까, 종교라는 층을 뚫지를 못하는 겁니다. 왜냐? ‘나’라는 것을 자꾸 견지하다보니까. 유지하려다 보니까. 종교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신도 들어있고 하나님의 약속도 들어있고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잖아요. 이것을 뚫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다 가짠데. 전부다 가짠데. 악마가 쳐놓은 굴레인데. 경계선인데.
4장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그 중에 이 세상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 악마가, 세상 신이 바보 아닙니다. 악마는 창세기 3장에서 유일하게 여자의 후손과 한 판 붙을 대상이예요,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은 간단합니다. 여자의 아들하고 뱀의 후손하고 싸우는 거예요. 끝났어요. 이것 외에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뭐 의사 될까요? 판사 될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나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예요. 나에게 벌어진 일. ‘내가 몸이 아픈데 어떻게 할까요?’. 주님께서 ‘그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예수님과 마귀하고 싸우는 것이 주의 뜻이라’ 하고 끝나요. ‘집에 쌀이 떨어졌는데 죽을까요?’. ‘죽던지 말든지 니 마음대로해라.’ 중요한 것은 예수님하고 마귀하고 싸우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택한 자를 건지는 것이 주의 뜻이예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소위 교인들이 복음을 안다고 해 놓고는 자기 방어에 집착해요, 자기 방어. 자기에 집착해요. 그 넝마(포대)에다가 자기를 집어넣고 막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얼굴 좀 보자고 하니까 자꾸 기어들어가는 겁니다. 아프면 파스 붙이면 되는데 파스를 떼려고 하는 거예요, 자꾸. 부끄럽다고. 복음 붙이고 말씀 붙여 (놓고서) 자기 아프게 자꾸 고개를 숙이는 거예요.
거북이 알죠. (거북이를) 쑤시면 얼굴을 내미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합니까? 그 두꺼운 갑옷 속으로 자꾸 기어들어가죠.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이것이 잘못이다’라고 쑤시면 쏙 들어가 버려요. ‘이것도 잘 못이다’ 그러면 ‘예, 저는 죄인입니다.’ 이레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얼굴을 내미는 것이 아니고 ‘저 복음 압니다’ 하고 쏙 집어넣고 자꾸 집어넣는 거예요. ‘저 성경 많이 압니다’, 하고.
지독한 자기 아집이죠. 이런 인간들이 모여서 교회라고 하니 교회가 될 리가 있습니까? 결국 교회라고 하는 것은 자기 돈 자랑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돈 자랑. 권력 자랑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이처럼 예수님과 세상 신의 공통점은 뭐냐하면 마귀하고 예수님 빼 놓고 인간들은 병신이다, 라는 것은 둘 다 알아요. 인간들은 자기 위에 악마의 껍데기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세상 신이라는 껍데기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밖에 몰라요. 그래서 성경 주고 해봐야 육적인 해석 문자적 해석밖에 안 나오는 겁니다.
이 종교의 층을 어떻게 뚫어요. 모든 게 다 종교인데. 신이고 예수고 다 종교인데. 다 종교 용어 아닙니까. 십자가 이런 것. 무슨 수로 이것을 뚫습니까. ‘저 뚫었는데요’ ‘뚫었으면 영적인 사람 주우러 다녀야지, 평생을’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집착, 자기 아집, 점점 더, 그것을 쪼그라든다 하는데, 점점 쪼그라들어요.
전에 성경공부 참석했다가 한 2년만에 오랜만에 만났다 말이죠. 요새 뭐 하십니까? 예 복음에 기뻐서, 이렇게 안 합니다. 하는 일이 바빠요, 이러거든요. 하는 일이 바쁘다 이 말은 결국 뭐냐하면 ‘심 봤다! 메시아 만났다!’라는 그런 기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죠? 사마리아 여인처럼 지금 되지 못했다 말이죠.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그저 남자 갈아치우는데 분주했지요. 어떤 사람이 성경 공부에 참석하다가 몇 년 뒤에 왔다. 나중에 와 보면 뭐 하냐 하면 자기 옷 갈아 치우는데. 지금보다 더 좋은 옷, 지금보다 더 넓은 아파트 이것 갈아 치우는데 분주해요. 예수님 만났다, 기쁘다, 이런 소리 안 합니다.
만약에 진짜 영적인 사람을 만났으면 ‘아, 목사님 그 때 성경공부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웠습니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이미 영적인 것에 관심을 끊은 사람은요, 쪼그라들어요. 쪼그라들어요. 희미한 등불 밑에 쪼그려 앉아서 ‘그때 참 좋은 것 했지만, 지금 세상에 나와보니까 말씀대로 안 되던데요. 성경 말씀으로 해결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면서 앉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만 길러 온 거예요. 목마르지 않는 물을 봐야 영적인데, 그 사람은 지금 한 때 성경공부 했다 뿐이지 계속해서 지금 목마른 샘을 파고 있은 거예요. 그러니까 나 잘났다 자기 방어에 집착하고 있지, 예수님 만났다! 좋다! 뛰어다니는 그런 사람은 아니더란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갇혀있어요? 세상 신에 갇혀있는 거예요.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의 광채라 하는 것은 그 광채 이야기가 영적인 광채이거든요. 영적인 광채는 인간을 어떻게 하느냐, 여기 3장 17절에 보면 인간을 어떻게 합니까? 무슨 용어가 나와요? 2자로. 자유죠 자유. 자유케하는 자유. 어떤 때 자유냐 하면, 자기 방어 안하면 무조건 자유입니다, 자기 방어가 없으면, 자기 집착이 없으면 그것이 다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누구한테 부림받으면 누구한데 사용당하면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관심사가 영적인데 있는 사람은 자유 안 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 100원짜리 돈 주우러 다니는 사람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이 또 있을까요? 흘린 돈을 누가 못 줍습니까? 그리고 그 주우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러니 얼마나 자유로워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유 아니냐 하면, 집에서 돌맹이 가지고 100원짜리 돈 만드는 사람. 이것은 괴롭습니다. 되지도 않는 일을 돈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만들어 놓은 영적인 일이 있는데 자기 집에서 영적인 사람되려고 애쓰는 것, 이것처럼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셨을 때 기뻤지, 그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 깊이 파서 물을 계속 뜬다고 자기 목마른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마리아 여인이 좋아했던 것은 뭐냐하면, 영생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구나, 그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마지막 날 추수하러 오는데 추수할 때 너희는 아무 것도 수고하지 않은 것을 그냥 추수하면 된다, 내 뒤만 따라오너라.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셨어요.
마지막 날 추수는 줍는 것이다. 누구같이? 사마리아 여인같이. 그런데 주우려면 영적인 자유가 있어야 돼요. 마귀한테도 얽매이지 않아야 돼요. 마귀한테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하면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난다는 말이예요. 자기 중심주의.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나 밖에 모른다’에서 ‘나는 모른다’로 바뀌어야 합니다. 나 밖에 모르는 것에서 벗어나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내가 나를 몰라 봐. 내가 누군지 몰라. 이런 자유가 있어야 돼요.
왜 자기를 몰라? 자기에게 관심이 없으니 자기를 모르지요. 키가 얼마인지 몸무게가 얼마인지 모르겠어. 자기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몸무게도 키도 모르지요. 뭐한테 관심 있는데? 주님한테 관심이 있지. 이것이 영적인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