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주석
창세기 12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12장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시면서 다음의 사실을 약속하셨다. 첫째 네가 큰 민족을 이루고 둘째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셋째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약속을 하나로 집약하면 [너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제하겠다] 라는 약속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내리겠지만 만약 저주하는 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저주하겠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탑을 높이 세워 자기들의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는 시도에 부응하여 하늘에서는 아브람이라는 특정인간을 앞장세워 그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창대케 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의 창대는 인간이 스스로 내세우는 자기 이름에 대한 고발조치이기도 하다. 이것도 또한 언약이 가지는 중대한 역할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을 위하여 여러 가지 징표가 등장하는데 그것을 위하여 땅의 개념과 자식의 개념, 또 義의 개념을 도입한다. 이 개념을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또한 알아야 하는 일이다. 만약 이러한 징표에 대하여 무지하면 잘못된 복의 원천과 복의 증거를 붙들고 구원 받았다고 오해할 소지가 참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무지가 신학의 무지로 이어지고 이러한 신학의 무지가 교회의 황폐함을 불러온다
구원은 성경에 나타난 용어를 외우고 있을 때마다 그 용어를 사용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타난 용어들이 주술적으로 잘못 이용된 예가 성서에서도 발견되고 현 교회사에서는 쉴새 없이 발생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한 땅은 평범한 흙 지반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식도 단순한 자손을 두고 말하지 아니며 義라는 것도 그 시대 사람들 사이에 이해되는 윤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람이라는 개인을 통해 새롭게 창출하여 지상에 남기고 싶어하는 그런 개념들이다. 이러한 의미들의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흔히 통념상 여기는 개념들을 죄라는 이름으로 고발하는 개념들이며 그로 말미암아 부정 당하고 깨어져 버린 그 개념 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 개념이 된다.
아브람은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고 선택된 시범 조교인 셈이다. 그렇지만 성서에서는 고상하게도 아브람에게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달아주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는 물론 [믿음의 대상]은 아님을 인식시킨다. [믿음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의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 그를 처음부터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고쳐 부르지 않았음에 우리가 주목을 하자. 약속의 의미가 함유되어야 할 때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인 인간이 그 약속의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그의 주변에 새로운 구원사건을 발생시킬 때 주어지게 된다. 즉 언약 상대자로 하여금 눈에 비쳐오는 현실세상에서 또 다른 현실 -약속의 세상이라는 현실로 데려가게 하는 그 사건을 말한다.
언약 상대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단순히 남을 위해 가르치는 강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몸소 당하는 모든 고난이 후대의 신앙인들을 위한 계시구실을 톡톡히 하게 된다. 그의 실수는 지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수며 우리는 그를 욕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우리가 관심 두는 것은 그의 그러한 실수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 약속]이라는 구원의 소식을 기어이 밝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정신이 팔려 있어야 한다. 그 사랑은 단순한 관심이나 친절로 끝맺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난관도 이기는 능력으로 이 세상에 남겨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지녀야 될 힘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나 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의 힘이다. 이 사랑의 힘은 환경을 바꾸어주는 성질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사랑을 발휘하는 권능이다. 사도바울이 이 힘을 믿었기에 그는 그 어떤 난관도 장애가 아니라 은혜로 보게 되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한다. 큰, 창대, 복은 같은 뜻이다. 창1장 [1]1:20의 복은 번성하는 것, 팽창력이다. 핵심은 기뻐하기 때문이다. 나쁜 것은 소멸시키기를 원하신다. 복을 주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기 때문이다. 복 받을 조건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라야 한다. 창조의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인간의 타락하고 난 뒤에는 무슨 복을 받는가. 문화사명은 엉터리이며 선한 문화가 아니다.
하나님이 번창하라는 것은 복의 근원을 번창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뿐이다(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예수님이시다. 그 분을 근거로 해서 퍼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퍼뜨려도 소멸시킨다. 아무리 번창해도 멸하신다. 다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죄인들이다. 죄인들의 움직임은 죄밖에 남지를 않는다. 죄를 모르기 때문에 사이비 종교가 되고 있다.
아브람을 부른 것은 너를 통해서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삭-야곱---- 나중에는 그리스도이다. 너 말고 너 후손이다. 자기가 창대케 되는 것을 꺾으신다. 아브라함도 내가 복의 근원이 아니라 나와 계약한 그 분이 복의 근원임을 안다.
상속자는(창15:2-17) 제물 가운데 횃불이 지나간다. 상속자는 하나님 자체임을 알려 준다. 아브라함은 믿었다. 하나님 자체가 상속자임을 안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이유는 한국교회에서는 믿는 자기 자신을 믿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고 우리에게 다가온 그 분을 믿는 것이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하다. 풍랑 만난 배에서(마8:25)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이유는 관심은 자기에게 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잘해 줄 것이라는 그 능력을 믿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왜 무서워하느냐 나무란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 예수님 자체에 관심을 갖는다. 제자들의 믿음은 자기 중심적이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
창세기12장이후에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자라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얼마나 반대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그 핵심이다.
롯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영향이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엘리멜렉 가문 태가 열리는 이유는 아브라함 기도로 통해서 복이 온다. 아브라함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믿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이삭 안에 뭔가 들어있음을 믿었다. 우리도 아브라함이 믿는 것처럼 믿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씨를 믿었다. 약속의 씨를 믿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인 이삭의 하나님으로 야곱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국가의 하나님으로 바뀐다. 장차 인자의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 십자가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12:1-5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찾아와서 방주 만들라는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네가 복의 근원이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유사한지 우리가 알아야 한다. 방주라는 이상한 배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들어가면 살고 안 들어가면 죽는다 라는 방식이 이제 아브라함에게 와서는 아브라함 후손이 확대되는 것을 봐서 저 분이 하나님의 언약인 사실을 믿으면 살고 안 믿고 무시하면 죽는다는 규칙이 세워졌다. 방주라는 물체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으로 바뀐 것뿐이다.
아브라함 속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들어 있는 것이다. 러시아 인형처럼 분명히 한 개의 인형인데 그 인형을 열어보면 또 다른 작은 인형이 들어있고 또다시 열어보면 그것보다 더 작은 또 다른 인형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마치 앙파 껍질 벗기듯이 말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으라고 했다. 아브라함도 자신이 자신을 믿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아브라함이 탁 깨어지면 그 안에 생명이 되는 이삭이 톡 튀어나온다. 이삭 시대가 왔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삭을 믿어야 구원 받는 줄 알고 이삭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이삭이 탁 깨어지고 보니 야곱이 들어 있었고 야곱이 탁 깨어지니 그 안에 요셉이 들어 있었다. 결국 나중에 보니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 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 미리 아브라함 보내고, 이삭 보내고 야곱을 보낸 것이다. 이 시대에 와서 예수님을 이미 알아버린 자에게는 더 이상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같은 것은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었지만 그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을 구약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이 곧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실수와 오해가 곧 예수 잘 믿고 있다고 자칭하는 우리들의 실수와 오해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했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완전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실수투성이, 죄 투성인 아브라함이지만 그런 자도 하나님이 관여하니까 구원이 되고 용서가 되고 의인이 되는 이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다.
1절에 하나님은 아브라함 가족을 크게 하면서 떠나기를 강요하신다. 하나님이 나서서 민족과 민족을 구분하시려고 하신다. 그 민족과 전혀 다른 민족을 만드시려고 하신다. 분리 하시므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국가와 민족을 이루어 온 것과 하나님이 관여해서 새로 생긴 민족과 국가를 상호 비교 시키려는 것이다.
인간들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의 대결이다. 하나님이 손 댄 민족이 얼마나 대단하게 되는가를 말이다. 이것은 타 민족이 보고 믿음으로 복이 다른 민족에게도 전달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따로 처리하고 따로 취급하시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 되는 요건에 왜 아브라함 이름이 창대케 되는 것이 필요한가 하면 자손이 많아진다든지 재산이 늘어나는 것으로 복의 근원이 될 수 없고 아브라함의 이름 그 자체가 창대 해야지만 복의 근원 구실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인간들이 구원 받을 때, 여타의 인간 이름과 구원 받게 할 이름을 구별 짓게 하기 위해서 이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 못 받게 하신다. 다른 이름은 구원의 능력을 베풀 수 없다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특별히 아브라함의 이름에는 구원의 능력이 차별적으로 들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때는 일단 내 이름을 믿는 행위가 거부되고 절단된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의 건립 취지가 인간 이름에 대한 가치성 유지에 있다. 우리 이름이 하늘까지 닿아서 더 이상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인간들의 이름이 영원함을 확정 짓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뜻을 인정치 않고 흩어 버렸다. 인간들의 이름이 흩어진 것이다. 흩어진 그 많은 민족 가운데 그 어느 민족의 이름도, 인간의 이름도 하나님이 인정치 않는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 가운데 뽑아 낸 아브라함과 그 민족만이 하나님이 나서서 구원의 이름으로 창대케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손 댄 민족만이 복이다 는 선언이다. 인간들의 복은 깨질 복이요 복도 아니다는 것이다. 복의 중심은 따로 존재한다. 인간의 이름을 걸고 하는 모든 것은 복이 아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나라를 따로 만들므로 말미암아 기존의 나라의 존재 가치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지시할 땅이 따로 존재하는 이유는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땅이기에 그러하다.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원주민이 있지만 이들은 어차피 다 쫓겨나가야 되고 다 멸절 당해야 하는 자이다.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먼저 선점하신 땅이기에 하나님과 생활을 같이 못할 자들에게 도저히 생존이 불가능한 땅이다.
살 수 없는데 그 땅에 살 수 있게 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에 한한다. 하나님께서 불러준 자들에게만 하나씩 그 땅에 심듯이 살 수 있다. 아브라함도 그 땅에서 죽어야 하고 막벨라 굴에 묻혀야 한다. 누구든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곳이 가나안 땅이다. 죽어야 사는 땅, 그 곳이 장차 천국을 설명하기 위해 설치된 땅이 바로 가나안 땅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뽑아 놓은 백성과 자녀는 따로 있다. 그들을 다루시면서 하나님은 언약적으로만 다루신다. 떠나라 할 것이요, 그들의 잘못을 알게 할 것이요, 누가 자기들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알게 할 것이다. 그래서 복이라는 것은 인간이 쟁취하는 것이나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언약 안에서 사전에 마련해 두었다는 점을 알게 한다.
노아가 방주 만들어 놓았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새로운 저주 거리가 생긴 것이다. 일부러 지옥 가려고 죄 더 짓고 방탕 생활 안 해도 방주에 안 들어가는 것으로 저주 받는데 충분한 것처럼, 예수님의 존재도 그러하다. 이 시대에 지옥에 더 깊이 들어가고 더 빨리 들어가기 위해 악 쓰고 죄를 찾아가며 짓지 않더라도, 예수에게 무관심하면 곧 그것이 저주의 자리이다. 복의 근원, 예수님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주의 자리가 자동적으로 발생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 이름으로 교회 세웠다고 해서 우리 교회가 복의 근원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만이 복의 근원이다.
12:10-20
13절에 아브람의 생존을 위해 아내의 아내 됨을 포기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아브람 자신을 아내의 오빠, 아름다운 여인의 오빠로 나서므로서 그 미모가 안겨 줄 혜택 속에 오빠라는 자격으로 들어가서 생명을 부지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브람의 의식 속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복의 중심에 서 있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상이 있었다. 아내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 자신은 축복과 저주의 중앙에 놓여 있기에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죽지 않아야 하나님의 일이 무사히 성사된다는 의식이다. 이것이 아브람의 상식적 생존술 이다.
과연 그들이 애굽 나라에 들어왔을 때 그들이 예측한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아내로 인해 자기가 목숨 부지 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호강을 하는 위치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시도하는 방책에 그냥 묵묵히 따라가 주는 것 같으시다. 애굽의 바로 왕이 아브람에게 큰 재물을 내릴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일이 모두 아브람의 생각에 의해서 진척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일시에 무너져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뒷통수를 치시는 것이다. 아브람 자신이 버렸다고 여긴 그 아내 사래를 도리어 하나님이 친히 관여해서 보호하시고 그 엄청난 애굽의 권력으로부터 그리고 남편 아브람의 버림으로부터도 지키신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람이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 도리어 아내 사래가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점을 아브람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아브람의 작전에 따라 묵묵히 따라오신 것인가? 이는 아브람의 모든 행위가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목숨을 부지하려는 상식적인 태도를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의 일을 애초부터 가로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하면서도 왜 그런 일이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일인가를 보여주고 지적하시려는 것이다. 자기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간주했던 아내 사래를 하나님이 하나님의 내세운 방식으로 동원해서 지켰다는 말은 결코 아브람이 아내를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더 나아가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되게 하시는 것도 아브람의 본인의 노력과 상관없다는 말씀을 하기 위함이다.
바로 가문에 하나님의 큰 재앙이 떨어졌다. 바로 왕은 이 재앙의 원인이 사래에게 있는 줄 알아 아브람을 다구친다. 그러면서 바로 왕은 모든 것을 원상 복귀해 주려고 한다. 아브람 부부를 애굽에서 내보내는 것이다. 많은 선물과 함께 말이다. 바로 왕은 하나님의 재앙을 재수 없는 일로 간주하고 평소의 자신의 인생으로 얼른 되돌아 가 버린다.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에 비해 아브람은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자기를 인도하는 지를 알았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다 허락하면서도 바로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식으로 관여하시는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성도를 늘 실패자로 만들어 버린다. 낭패자로 전환시킨다. 인간들의 낭패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은 늘 성공적이다. 이것이 성도를 지키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아브람에게 일어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여준다. 기도를 골라가며 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할 것 같지만 이 또한 성공적인 기도가 가져 다 주는 효험을 보겠다는 노림 수에 불과하고 그리고 잘라버렸다고 소원 같은 것이 멀리 간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 속에 응어리져 그대로 들어 있기 마련이다. 참 신앙인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다 하나님에게 털어놓고 살며 그리고 그 결과를 하나님에 일임하는 자이다. 실패, 그것은 성공한 신자의 일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