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믿는다는 것] 이호식 씨 글 좀 평가해 주세요
[믿음과 믿는다는 것] 이호식 씨 글 좀 평가해 주세요
이름 : 김대식(IP:220.81.176.169)
목사님들 [믿음과 믿는다는 것] 이 글 좀 평가해 주세요
목사 직분이 아니어도 누구든지 복음을 위해 한번 평가 해주시길 바랍니다.
믿음과 믿는다는 것
206.05.06 09:30 abe
http://blog.daum.net/chaanu/8044316
믿음과 믿는다는 것(라합)
( 이호식 목사님의 글)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히 11:31)
성경은 항상 나의 이야기여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 역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살게 된다. 때로는 아브라함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야곱이 되기도 한다. 아니면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도 하고 기생 라합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의 얘기가 나의 얘기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
교회 나가서 예배드린다고 하나 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나오는 라합은 교회 나가서 하나님 믿게 된 사람이 아니다. 물론 교회 나가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교회 나가지 않고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나를 향하여 ‘무교회주의자’ 운운할 일은 아니다. 나는 무교회주의자도 아닐 뿐더러 교회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처럼 살고자 원하는 한 개인일 뿐이다. 얘기는 간단하다. 교회의 일원이 된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히브리서 저자가 지금껏 얘기해 온 바는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하는 점이다. 그 믿는 사람의 한 전형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본문의 라합 이다. 라합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이지 교회에 나가기만 하면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건 그는 궁극적으로 교회 의 일원이며(따라서 ‘무교회주의’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인간들이 벽돌로 지어 놓고 ‘교회’라고 이름 붙여 놓은 건물 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된 줄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다고 예수 믿는 사람, 하나님 믿는 사람이 될 것 같으면 참으로 걱정이 없겠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대열에 든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부인해야만 하는 아픔을 수반한다. 아벨이 그랬고 에녹이 그랬으며 노아 역시 그랬다. 어디 이뿐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이 땅 위에서 부평초처럼 이 세상과 유리된 삶을 살았다. 하 나님을 믿는다는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의 원리를 부정하고 자신의 목숨을 미워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몸은 이 세상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요 오해이다. 본문의 주인공 라합 역시 마찬가지이다. 라합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세상적 으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나타내 준다.
믿음이란 참으로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는 것이 아니며, 앞으로 천년왕국이 어떻게 일어나며 1999년의 지구 대멸망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천년왕국이 내일부터이건 내년부터이건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구의 멸망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내년이건 10년 후이건 그 일이 ‘오늘의 일’이 아닌 다음에야 우리에게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이다. 계속 강조해 온 바이지만 믿음은 관념이 아니다. ‘내일’이라는 미래는 오늘의 삶이 아니라는 뜻에서 관념에 불과하다. 과거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0년 전에 예수라는 인물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이 땅 위에 태어났다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느냐 말았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나와 더불어 사는 삶이 없다면 그것은 남의 집 얘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밝혀 두지만 내일 일(우리 육신이 죽고 부활하는 모든 일도 여기 속한다)을 위하여 염려할 필요도 없고 염려해서도 안 된다(마 6:34). 문제는 오늘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다. 천년왕국의 존재를 믿는다고 거기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늘’ 그렇게 산다. 오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오늘 내가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느냐가 문제다.
오늘의 삶은 이 세 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마 13:22)에 푹 젖어 있으면서 백번 천 번 교회 나가서 봉사한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교회 나가기 전에 이 세상에 대한 염려부터 내려놓을 일이다. ‘이 세상의 염려’란 단순히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가 아니다. 5공 청산이 되어야 하는데 …, 국가 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하는데 …. 이런 생각들이 이 세상의 염려이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이 이런 일들을 위하여 단식투쟁 혹은 가두시위 등을 하시는데 이 모든 일들이 ‘이 세상의 염려’에 꽁꽁 묶여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으며 제5공화국을 청산하는 일과도 상관없다. 어차피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는 것(요일 5:19)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쳐부수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이건 인간들의 생각이다), 이런 세상이 때리면 얻어맞고 죽이면 죽임당하면서, 즉 죽음으로써 살고 버림으로써 얻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다. 국가보안법으로 무기를 삼든지 돈으로 무기를 삼든지 자기네들 끼리 실컷 하라고 내어버려 둘 일이다. 억울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느냐고 볼멘 항의를 하실 분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은 억울한 사람들이 아니다. 모두 자업자득일 뿐이다.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그만큼 ‘세상 일’에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마 22:21)’ 돌려주라고 했다. 그렇다고 카이사가 옳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내어버려 두라는 뜻이다. 내 버려둔다고 옳은 것은 아니며 더구나 예뻐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5공 청산을 안 해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고 조국 통일 가로막는 국가 보안법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는 얘기도 아니다. 다만 그런 일들은 ‘ 세상의 일’이며 이 세상의 일에 대해 염려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살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라합을 인간적인 면에서 평가하자면 그녀는 형편없는 쓰레기일 뿐이다. 그녀가 ‘창녀’였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창녀는 오히려 동정의 여지가 있기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형편없는 쓰레기’라고 막가는 표현을 하는 것은 그녀의 행동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라합의 삶을 보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 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여리 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 인지 나 는 알지 못하였고 그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 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수 2:1-6)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의 방황을 끝내고 이제 막 요단강을 건넜다.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끝난 셈이다. 이런 이스라엘이 최초로 공격해야 하는 대상이 여리고 성이었는데, 여호수아는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정탐꾼 둘을 여리고성에 파견한다. 그러나 그 정탐꾼들 은 여리고 성의 정보망에 포착되고, 여리고 성에서는 왕이 직접 나서서 라합을 심문한다. 하지만 라합은 왕의 심문을 ‘지혜롭게’ 피해 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라합의 임기응변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자기만 살겠다고’ 자기 민족과 나라를 배반한 이런 행동이 괜찮은 것이냐 하는 점이다. 라합의 생각에는 아무래도 여리고 성이 망하겠거든, 그래서 그녀는 얼른 여리고를 버리고 이스라엘에 가서 붙었던 것이다. 아무리 배운 게 없는 창녀라지만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자신과 가족의 안전 을 도모하기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이런 라합의 행동이 칭찬받을 일이 라면 이완용이가 나쁜 놈이 될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김일성이 역시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한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위난에서 건진 사람들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라합이 하나님을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 하는 형이상학적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한 일이라고는 나라와 민족을 적의 손에 팔아먹은 것밖에 아무것도 없다. 그것도 뭐 그럴만한 대의나 명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사람에게 무슨 대의며 무슨 명분이랴. 라합은 이렇게 여리고 왕을 속이고 정탐꾼들에게 아첨하여 일가의 목숨을 구한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 (수 2:12-13)
이상이 라합의 믿음이요 삶이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리고 자기 민족을 팔아먹은 여자. 자신의 목숨과 자기 가족의 안녕을 위하여 자기 나라를 배신한 여자. 그 이름이 라합이다. 오늘날 사회의 정의를 구현한다는 분들이나 이 나 라와 민족을 위하여 애쓰시는 분들께서는 이 라합의 믿음과 삶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실는지. 과연 히브리서 저자처럼 ‘믿음으로 라합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히브리서 저자야 자기가 히브리인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혹시 여리고 성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라합을 어떻게 평가 했을 것인가.
이런 면에서 나는 라합을 ‘인간쓰레기’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라합에게 오면 ‘인간쓰레기’가 되는 일이다. 라합이라고 애국심이 없었겠는가. 라합이라고 자기 나라 백성들이 다른 민족의 칼날에 무참히 죽임당하는 것이 좋았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나라에 총부리를 겨누는 것이며 자신의 동족과 원수가 되는 것임을 어찌하랴.
이래서 믿음이란 삶이라는 말이고 관념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살기는 자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나라와 민족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의 염려’일뿐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동족을 등지는 일이다. 여기서 동족이라 함은 물론 ‘이 세상’을 말한다. 이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 때 그 삶이 자기의 믿음이 된다. 얼핏 보기에는 이 세상(여리고)이 하나님(이스라엘)보다 훨씬 강력했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함락시키지 못했더라면 라합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되거나 종신형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믿음이란 이처럼 아슬아슬한 생의 줄다리기이며 일생을 건 도박일 수도 있다. 일생을 건다는 것은 마지막 카드를 받았을 때 자기 카드가 ‘이 세상’의 카드를 이기지 못한다면 자신의 전 생애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믿지 않는다는 얘기며 이 세상에 대한 포기의 선언이다. 여리고성이 더 이상 동족이 아니며 자기 나라가 아니라는 결단.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결단을 하더라도 당분간은 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하고 여리고 에서 더 머물러야 한다는 점이다. 이 기간이 힘들고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무능력자이고 어떤 면에서는 ‘인간쓰레기’이다.
이런 반대급부가 없는 믿음은 라합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라합의 믿음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일을 세상 나라의 통일을 위해 애쓰는 일이라 생각하고, 탄압받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불의한 공권력에 대항하고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항하여 전심전력 투쟁한다. 마치 세례 요한이 헤롯왕의 부도덕을 맹렬히 비난했던 것처럼.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막 6:17-18)
이 사건으로 세례 요한은 결국 죽는다. 불의한 공권력에 희생된 ‘의로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도 처음부터 세례 요한을 죽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했으며 요한의 말에 대해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듣고 있었다(막 6 :20). 불의한 사람이라고 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없이 정적(政敵)을 죽이는 사람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인 줄 알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욕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헤롯 역시 세례 요한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여건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헤롯이나 헤로디아의 행동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야 어차피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치자 . 하지만 세례 요한이야말로 문제의 인물이다. 세례 요한은 왜, 무엇 때문에 헤롯 같은 인물의 결혼문제에 얽매여 죽게끔 되었는가. 이런 죽음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문제는 오늘날 해방신학의 주제와도 연결된다. 불의한 공권력에 대항하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세례 요한은 이러한 불의하고 부도덕한 세상의 지배계급에 온 몸으로 부닥쳐 경종을 울리고 한줌 흙으로 산화한 사람이다. 오늘날의 해방신학자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헌신인가. 뿐만 아니라 민중의 대변 자연 하는 사람들께서도 충분히 추앙하여 마땅한 삶의 모습이 아닌가. 세상의 절대권력 자 헤롯 앞에서, 그의 불의와 부도덕에 대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 던 때에 과감히 그를 비난하고 나선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세례 요한의 이러한 죽음에 대해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마 14:12-13)
예수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일언반구 논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냥 다른 동네로 가버리신다. 왜 그랬을까. 세례 요한이 자기보다 앞장서서 헤롯을 비난하고 나선데 대해 고깝게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헤롯의 군사력이 무서워서, 잘못 말했다간 자기도 잡혀갈까 싶어서 그랬을까. 만일 오 늘날 우리 나라에서 이런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신교, 구교를 막론하고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져 있기도 하다). 과연 아무 말도 못(안 )하고 슬쩍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일까. 왠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는가. 우리 같으면 당연히 헤롯을 비난해야 하고 국가보안법을 비난해야 한다고 생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반응은 ‘노코멘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보다 세례 요한의 행동에 심정적으로 훨씬 더 동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한다. 이래서 생각 따로 삶 따로 이고, 믿음 따로 행동 따로 이다. 말년의 세례 요한은 예수의 그리스도 성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반신반의하던 사람이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가 라사대 …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 11:2,6)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던 모습이 옥에 갇히던 때의 요한이다. 결국 어떤 면에서 예수와 요한은 신앙 의 노선이 서로 달랐다고도 볼 수 있는데, 즉 요한은 예수의 그리스도성에 대 해 의심하고 있었고 예수는 이런 요한에 대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대꾸하고 있었다. 요즈음의 얘기로 환언하면 세례 요한은 현실참여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고 예수는 국가니 민족해방이니 정권의 정통성이니 하는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신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이런 모습은 그가 십자가에 죽기 얼마 전에 말한 다음과 같은 메시지에도 잘 드러난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네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 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 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5-36)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나라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불의와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과 요한의 죽음이 다른 점은,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그들을 죽인 주체가 누구냐 하는 점이다. 세례 요한의 경우는 ‘세상 권력’이지만 예수의 경우는 이와 좀 다르다. 빌라도나 로마 병정들은 하수인이고 실제로 예수를 죽이는 것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및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대 민중들 이다. 유대 민중들은 처음에는 예수를 향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 11:9)’ 하면서 좋아들 했지만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막 15:13)’고 외친다. 민중들이란 언제나 어디서나 이렇다. 예수는 결국 민중들에 의해서 죽임 당한다. 세례 요한을 죽이는 헤롯은 심히 근심하면서(그가 근심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사형을 집행하지만,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근심하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는 ‘민중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는 얘기이다. 예수는 한마디로 ‘유대인’이 아니었다. 유대 민족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지도 않았고 부정과 부도덕의 헤롯정권을 타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 민중의 기대는 민족의 해방이었고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었으니 예수의 기대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호의를 보내지 않는다.
예수는 이러한 민중들의 기대를 저버린 죄로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예수의 죽음을 표면적으로만 바라보면 예수는 복지 인권국가를 꿈꾸는 유대 민중의 꿈을 짓밟은 죄로 죽는다. 라합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脫유대인을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수긍이 된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로마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모두 ‘이 세상’일 뿐이다. 이 세상은 로마를 쳐부수거나 소련을 쳐부수어서 평정할 문제가 아니다. 예수가 생각하는 ‘이 세상’ 은 우리 모두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나의 가족, 친척, 이웃, 나라와 민족)만을 사랑하는데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평정된다(마 5:43-).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세상의 시민권을 버려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라합처럼 자기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을 수도 있고 예수처럼 그들의 손 에 맞아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일한 죽음이라도 이 세상 정권의 부도덕성 을 나무라다 죽는 것은 아니다. 민중들 대다수가 바라는 그런 일들을 하다가 죽는 죽음이 아니다. 여리고의 어느 민중이 라합의 행동을 칭찬하겠는가. 예수가 유대 민중의 동의가 없었더라도 죽었을 것인가.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 해서는 누가 헤롯을 욕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렇지만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당시의 민중들이 빌라도와 헤롯을 비난했겠는가.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그 속에 동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아니면 그 역사의 무대를 오늘날로 옮겨와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의 식민지 팔레스틴의 한 청년으로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며, 수탈 받는 민중들 틈에서 그 민중들의 고통을 체험한 예수를 읽어야 한다. 예수는 민중을 수탈하는 이 세상 권력에 대해 공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받는 그 민중들을 나무란다.
우리는 과연 이런 예수를 믿고 있는가. 오늘날 이 땅에 예수가 재림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예수가 와서 한다는 소리가 맨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하면서 돌아다닌다면 이 땅의 어느 민중이 그를 좋아하겠는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노사분규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가서 얘기해 보라. 국가보안법에 연루되어 억울한 옥살이를10여년 씩 하고 나온 사람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얘기해 보라. 통일운동 한답시고 왔다 갔다 하다. 간첩으로 몰려서 사형당한 의로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빈들로 도망가는 예수를 생각해 보라. 산상수훈은 세상의 가진 자나 세상의 집권자들에게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산상수훈은 민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마 5:1). 오늘날 이 땅에 예수가 다시 온대도 그는 십자가에 죽거나 아니면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하거나 할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특히 해방신학자들과 민중 운동가들은 그를 ‘비겁한 지식인’ 혹은 ‘현실 도피적 몽상가’라 비난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민중으로부터 소외당하고 결국엔 그 민중의 손에 죽임당 한다.
라합이 자기 동족이며 자기 나라인 여리고를 부인한 것은 예수의 나라를 볼 줄 알았고 그 나라에 자기 인생을 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인간적인 명분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라는 자기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육신적 혈통으로는 여리고의 백성이었지만. 그래서 그 여리고 백성들에겐 ‘인간 쓰레기’가 되었지만. 우리 모두 ‘인간 쓰레기’가 되자. 나는 라합을 사랑한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자신을 지켜 우상에 서 멀리 하라. (요일 5:19-21)
이근호(IP:117.♡.141.96)
09-09-20 19:38
무엇을 증거하느냐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꼭 동양철학의 일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제공하는 단절이나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본인이 예수님을 '자기 구원을위한 예수'로 알게된 그 죄로 인해 예수님의 생각과 충돌을 야기했다는데 있습니다. 기생 라합의 신앙은, 여호와의 행하신 거룩한 심판 앞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죄관이 복음과 대비되면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미아(IP:115.♡.203.64)
09-09-21 12:34
믿음은 말 그대로 선물이며 믿는다는 것은 이 설교처럼 스스로 인간쓰레기 되는 것입니다.
"나는 기생 라합을 사랑한다" 이 고백이 어쩌면 그렇게도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꽈리 역할을 하고 있는 고백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쓰레기 되고자 할 때 반대급부적인 그 이면적 동기와 목적이 항상 우리를 수면위로 떠오르게 합니다. 인간쓰레기가 된 자기 반대편에 선 자들 앞에서 스스로 얼마나 의로움을 가질 것입니까? 죄만 나올 것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사건이 덮쳐와서 내몰린 라합이었을 뿐입니다.
라합이 인간쓰레기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서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
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
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 내기로 이제 여호와
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수2:8-13)
기생 라합은 진정으로 창녀짓이 죄가 아니라 상천하지에 하나님 그 분을 무시하는 처사가 죄요, 죽음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면 모든 사람은 이미 죽은 자였음을 알게 된 사건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라합의 이 고백은 스스로 인간쓰레기 되려고 하는 고백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할 수 밖에 없었고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녀를 사로잡은 은혜의 작용이었습니다.
죄를 죄로 볼 줄 아는 눈을 열어 주셨고 죽음과 생명이 주님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용서와 사랑은 아무 행한 일이 없이 주님께서만 주신다는 것을 깊이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미아(IP:115.♡.203.64)
09-09-21 14:02
김대식씨 목사도 아닌데..미안합니데이~^^
바람이 전하여준 이스라엘 하나님의 소문은 기생 라합에게는 죄인이라는 심연속에 갇히게 한 절망이었습니다. 소문과 진실의 만남은 창녀의 창녀됨을, 인간쓰레기의 쓰레기됨을 확증해주는 절망으로 이끌었습니다. 진실한 표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관리자(IP:220.♡.176.169)
09-09-21 17:00
목사 직분이 아니어도 누구든지 복음을 위해 한번 평가 해주시길 바랍니다.
김영완(IP:222.♡.215.171)
09-09-21 23:02
성경동화책을 읽어 주는 남자!
기생 라합이 되었다가
세례 요한이 되었다가
끊임없는 선악의 분별로 성경을 들여다 보며
자신의 목소리를 더빙하는 것 같슴니다.
언제나 예수 잘 믿는 자신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 함니다.
글의 맨 앞부분에 성경은 항상 나의 이야기여야 한다???
성경이 나의 눈 앞에 펼쳐져 꼼짝도 안하는 것 같지만
정작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눈 앞에 있더라도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항상 나의 이야기만 해야 한다...
예수님은 나에게만 동화책을 읽어 주어야 한다...
구득영(IP:203.♡.97.146)
09-09-22 01:23
오래전에 초청해서 특강을 한 그분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녹음도 하지 말라고 하면서 협박을 했는데, 그때는 아마 목사도 아니었든 것 같은데, 목사가 되셨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삶을 강조하는 일관성은 있어 좋은데, 하지만 성도가 이 세상에서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네요. 자기 기준에 부합하면 맞고, 아니면 틀리고, 도대체 이 분에게 성경은 왜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곰곰히 생각해서 알아서 살면 되는데 말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 순간에도 마귀가 마귀임을 드러내는데 그 역할을 충실하게 감담하고 있음이, 주님이 일으키신 사건으로 날마나 확인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마라난타 -
구득영(IP:203.♡.97.146)
09-09-22 01:25
마라난타가 아니고 마라나타 입니다. 마라난타는 백제에 최초로 불교를 전하였다는 인도의 승려라고 하네요. ㅋㅋ
김대식(IP:124.♡.85.46)
09-09-22 09:36
구목사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얼마전에 이호식 씨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고
궁금해서 십자가마을 통합검색을 해서 자료를 뽑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니 왠만한 내용들 다 나오더군요.(강의 속에 자주 언급이 됨)
비록 오래전 이야기 였지만 여전히 소문은 이상하게 (또 이상할 수 밖에 없겠지만) 반대로 소문이 아직도 퍼져있길래 내막을 좀 살펴 보니 아 저들은 어떻게 하면 넘어뜨릴까 궁리를 하다보니 어쩔수 없이 그렇게 볼 수 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항상 정치적이기에). 얼마나 이기고 싶었으면 저럴까?
죄인 하나 이겨서 뭐 할려구? 마치 어린아이 장애아이 앞에서 어른 골리앗이 힘 자랑 해 보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것 처럼 말이죠.
그것도 목사 라는 작자들이 말이죠. 복음에 관심이 없으니 별수 없는 듯 보입니다.
과거 강의 중에 이호식 씨가 질문을 하는데 있어서 이근호 목사가 답변도 못하고 버벅 거리면서 얼굴 벌게 져서 단 한마디 반박도 못하고 결국은 그 자리를 도망치듯이 나가버렸다는 일이 마치 그것이 크게 이슈가 되어서 소문이 퍼져 있더군요.
막상 내막을 들어보니 아무것도 아니던데, 얼마나 웃기든지
껍데기만 퍼지고(그것도 전부 자기 유리한 정치적 해석인 주관적해석만) 내막은 들을려고도 안하겠지요.
항상 양쪽 다 들어보면 저들이 말하는 객관성(어차피 정치적이기에 객관화 될 수 없겠지만)을 저들 스스로가 뒤 엎어버리니 말이죠. ㅋㅋㅋㅋ .
하여튼 잘도 덥썩 잘 뭅니다. 뭐 눈에 뭐 만 보일 뿐이겠지요.
(저는 이근호 목사의 그런 행동을 제 개인적으로 한번 격어 본적이 있습니다. 단 둘이 있을때에 그런 상황을 아주 특이한 경험으로 다가온 적이 아주 신기했습니다. 올 겨울 수련회때에 서경수 목사님과 그 내용을 말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백이면 백 100% 오해하기 딱 좋을수 밖에 없는 상황일수 밖에 없겠지요.
말씀이 사건화 되어서 펼쳐진 마당에 항상 뒤로 빠지는, 말씀만 앞장세우고 뒤로 빠지는 것을 모르는 자는 아무리 설명해 줘도 말귀를 못 알아먹을 테니까요)
이상규(IP:121.♡.224.239)
09-09-22 14:16
광주 김집사님하고도,어제 이야기했는데 이목사님이
복음전하는, 증거하는 자이기 때문에
말씀만 앞장세우고 뒤로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누가복음전하든지(이,구,오,서 정목사님) 주님이 도구로 만 쓰시고,
역사하시는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런(전하고 빠지는)귀한 목사님들이 주위에 계심이 늘 감사합니다.
이상규(IP:121.♡.224.239)
09-09-22 16:36
오늘들어와 보고,목사가 아니어도 된다기에
아마추어 견해를 짧게 올리 겠습니다.
호식씨, 결론은,믿음은 관념이 아니라,어제 내일이 아니라,
오늘,염려하지않고,주님과 더불어 그리스도 삶처럼 사는삶을이야기 하는것 같다.
그러다면, 비유를 한
믿음으로,기생라합은..(히11;31) 이아니라,
"행함"으로 기생라합은.. 으로 바뀌어야 한다.
또,믿음의 선인들(히11)도 "행함"의 선인들로 바뀌어야한다.
제경험으로 볼때 이런 주장은 지금 내신앙 상태를 구약시대의인물들을 끌어드려 내신앙을 합리화(?) 하려는
겁니다.한마디로 주님 주신 신앙이 아니라 어설픈신학으로 자기 믿음을 증명 하려는 짓입니다.
그이유가 성경이주님을 증거 하는것이 아니라(요5;39)
성경은, 나의 이야기여야 한다는 웃기는주장입니다.
또,이사람에게는 십자가 피의 공로가 필요치않다.
라합같은삶,오늘 주와 더불어 사는 삶,염려하지않는삶,자기 목숨 버리는삶...
이런삶이,생명이 있는 믿음의삶이가면,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이유가 없다.
2000년전, 오셔서,"이런삶을 똑바로,살아라,하시고 다시오면,이런 삶의 기준으로,
너희를 구원하겠다."라고하시면서,
십자가에,못박히시지않고,구름타고 올라가시면 되는데,
문제는, 이런,삶이죄라는데,있다.(호식씨 늙어감,라합도 그런죄 때문에 늙어 죽었음)
또,라합의 행위를 예수나라 위한믿음 이라고 죄 빼고 이야기한다면 (요한의,희안한 해석도 웃긴다.) 라합은 계시록에 기록한 대로 행위책에 기록된 자이고,믿음의 선인들이될수가 없다.
호식씨를만나면,당신은,믿음의삶을 보여 주세요,
즉 ,염려하지않는삶,주님과 더불어 사는삶,심령이 가난한삶,애통하는삶,
의에주리고 목마른삶,부인하는삶 목숨을 버리는 삶을보여 주세요.
나는 나의그런죄때문에,십자가에죽으시고,그흘리신 피의공로 만으로,
예수님나라에, 들어가게하신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복음은 호식씨가이야기한 히11장 믿음의 선인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그 나라의 완성 입니다.
이믿음이 내가 깨달아 아는것이아니라.
미아님, 이야기한 하나님의 선물이니 감사 감사 합니다.
김대식(IP:124.♡.85.46)
09-09-22 22:27
몇년 전에 양무리 쪽에서 믿음이 예수님이다 라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이유와 같다고 봅니다.
믿음이 곧 주체가 되어버리면 인간은 대상에 불구한데 믿음을 자기 숙제가 되어버리니까
믿음이 빈자리로 만들어 버리는 그 입장에서 덮석 그 자리에 앉아서
인간 본인이 믿어야 된다는 식으로 기여이 자신의 종교의 자리에 대한 탐욕성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만 앞장세우시고 뒤로 빠지시는 것을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셔도(최근에 오전 설교 중에)
인간은 믿음이 자신을 밀어버리고 그 빈자리에 창세전에 예정한 십자가의 피만 남기운다는 것을 모르고
기여이 믿음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모습은 마치 구원을 자기 챙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새생명의 삶, 성화론, 개혁주의 모두다 거리끼는 걸림돌에 턱 하니 부딧혀서 넘어서질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에 나의 믿음이 빼앗기는 것이고 밀쳐짐을 당하는 것을
기여이 나만의 믿음을 가질려는 저 모습은 믿음의 선배들
특히 야고보서에 나타난 행함이 있는 믿음의 대표적인 예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행함의 믿음과
기생라합이 거짓말로 정탐꾼을 숨긴 사건으로 구원의 붉은 줄이 그 가정을 구한 사건을
마치 그대로 흉내를 내면 그대로 되는 줄로 알고 자기 쪽으로 땡기기를 하면 된다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주체는 정작 예수님이였고 미래에서 십자가를 확정짖는 모습을 보여준 창세전의 노선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따라하기를 하면 된다는 식은 마치 개혁주의의 성화와 새생명의 삶과 같은 양상이겠지요.
(분명히 강조드립니다만 성경은 일체 인간에게 대상으로 남겨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경말씀에 인간만이 대상으로써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 라는 직분을 엄청나게 오해 하는 정반대로 생각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운동력 앞에 이래 이래 당했습니다 라는 것을 쏟아내어야 할 자들이 목사 직 이라는 그 자체를 덮썩 잡다 보니 항상 자기방어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뱉지를 못하는 겁니다. 먼저 공격 받을 것을 생각하니까 말이죠.
목사 직이란 원래 없는 겁니다. 없는 목사 직 붙잡지 말고 제일 먼저 나 이렇게 말씀의 운동력 앞에 이렇게 찔렸고 쪼개짐 당했고 골수와 관절 혼 영 마음이 해부 당했습니다 라고 시체된 자신을 말씀이 이렇게 했다고 미리 앞당겨 미말에 둔 조롱거리 찌기 사람들 앞에 말씀 앞에 발가벗겨진 구경거리가 되었음을 보여 주라고 목사라는 은사가 된 것을 도리어 무화과 나뭇잎을 몇배나 더 끼여 입어서 어떤 누구도 벗길수 없는 좋은 옷으로 포장을 하고 있는 것을 이제 아예 교인들에게 까지 위선자로 만들려고 하니 저런 이호식 같은 부류들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일치성이 아닌 그 차이성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증거하시는 말씀 앞에 인간들의 하나님 형상 회복 운동이 얼마나 마귀적인가를 보게 됩니다. 더욱더 집착만 할테니까요.)
김대식(IP:124.♡.85.46)
09-09-22 22:43
아 참 어제 대구 강의에도 이호식 씨 에 대한 언급이 조금 나왔는데
어제 강의 중에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말씀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막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눅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성경 전체가 이런 양상인데 문뜩 야곱의 형 에서가 생각이 났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아무리 줘도 그 사람을 빼앗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옥 갈 자는 성경말씀 아무리 지켜도 지옥 자체가 끌어 당기기로 되어 있는 것과 같고
반대로 야곱은 아무리 장자권을 빼앗지 않아도 야곱에게는 장자권이 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야곱은 쓸데 없이 장자권을 빼앗음으로써 알게 됩니다(알 필요 없는 선악을 괜히 따먹음).
결국 그 장자권이란 자기가 형 에서로 부터 빼앗아서 빼앗을 수 있는 장자권이(약속) 아님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호식씨 와 개혁주의 성화론자는 빼앗자 라는 식을 완벽한 사기로 포장해서(금방 들키기에) 반대로 표출할 뿐이겠지요.
결국 사울과 다윗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왕 자리를 마치 자신의 숙제 여부로 본 것 인데
다윗 또한 그렇게 생각 하다가 이스라엘 왕의 보좌 자리로 인해 박살이 나서 내려 앉게 되니 비로소 이스라엘 왕이 자신의 숙제의 대상이 아님을 아는 것과 같겠지요. (상한심령 - 회개)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이스라엘 속에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집 잃어버린 양 과의 대립에서 똑같이 벌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평생을 양 노릇 한 자는 염소 였고, 평생을 염소 노릇 한 자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였다는 것을 말이죠.
이상규(IP:114.♡.136.17)
09-09-22 23:21
아멘,
택한자,주님이 선물로 주신,믿음이 아니면,
기존교회든,개혁교회든,천주교든,불교든,인간이 만든 믿음은 행위로 밖에 표현 못합니다..
복음 알기전 제모습이고,또,죄모르는 인간의 한계이니까요.
지금도,내행위 통한 내의,내존재감이 나올때마다,내가아니요 주님의은혜임을 고백케하셔서,
날마다,사건마다,죽은자로 살게하셔서,내속에서 주님의 생명이,나타나게 하셔서,
복받은자로 살게 하시니 주님을 높이 찬양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