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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울산강의(창세기3장b)자유게시판창세기

울산강의(창세기3장b)

이름 : 관리자(IP:219.249.86.34)

울산강의

2006년 12월 1일

창세기 3장

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아담 위주로 성경을 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 위주로 성경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두 진술은 모순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고 난 뒤의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되는 반면에, 또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담 같은 경우도 이 두 가지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흙으로 돌아갈 것도 알고, 그 다음에 가죽옷 입고 자기 아내 이름이 한 여자에서 생명으로 바뀐다는 것도 알게 되고 말입니다. 아담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생명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죄 짓고, 범죄한 것을 너무 서러워하면 안됩니다. 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애달파하지 마십시오. “안 따먹었으면 안 죽을 건데.” 그것만 자꾸 미련 갖지 마시고, 따먹어도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그 가죽옷 사랑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왜 고마운 줄 모르는 것입니까? 얼마나 큰 사랑인데 말입니다. 일부러 찾아오시기 까지 하시는데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받은 큰 사랑은 생각도 안하고 자꾸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미련과 애착을 갖는지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사랑인지 그 두 가지 면을 다 보여줘야 되는 인물인 것입니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걸 보여주기 위한 존재란 것입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골로새서 1장 16절을 다시 기억해 봅시다. 모든 만물은 누굴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죄와 저주, 그리고 축복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면, 그것이 그대로 아담에게도 죄와 저주, 축복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담의 일생을 통해서 다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는 생각은 안 하고 시시때때로 지나간 일에 후회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실수 안 했으면, 그 때 주식을 집어넣는 게 아닌데 라는 후회만 하고 있더란 것입니다. 진짜 신자 같으면 주식을 하던 뭘 하던 간에 이것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권세의 적용 과정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양쪽이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이 정상임에도 사람은 사랑만 차지하고 죄는 감추려고 하는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죄가 드러나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드러나게 되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담을 부담스러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게 좋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아내를 붙여주셨습니다. 아내를 주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왜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두 육체가 한 몸이 된다는 말은 몸을 먼저 규정하고 난 뒤에 그 몸을 보여주는 육체들이라는 말입니다. 한 육체를 한 몸이라 하지 않고, 두 육체를 한 몸이라고 한 것은 이미 몸이라는 것이 먼저 설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 장래에 한 몸이 어떤 몸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에게는 하와가 있고 하와에게는 아담이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두 개라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두 몸이 되어야 합니다. 두 육체가 두 몸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범죄하고 난 뒤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자아가 우선될 때 내 육체, 즉 내 몸 중심으로 사물을 하나의 대상으로 성격지울 때 비로소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것이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 사람하고 나는 완전히 딴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라 하는 것은 같은 원리와 같은 관계로 지배받는다는 뜻입니다. 몸이 하나라는 말은 세 명이든, 네 명이든 천 명이라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가 똑같이 적용이 될 때 그때는 두 몸이라도, 세 몸이라도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 육체끼리 어디 붙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의 몸 되게 하는 원리가(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언약이죠) 동일하게 적용되면 비록 서울 있고 전라도 있더라도 한 몸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이디어는 우리가 성령 받고 난 뒤의 아이디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아이디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범죄하고 난 뒤의 원리는 내 몸 위주로써 아무리 가까운 남편, 아내라도 어디까지나 자기가 자기한테 적용하는 원리를 가지고 상대방에 적용하려고 하니, 한 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한 형제는 좋을 때 같이 웃고, 슬플 때 같이 울라고 합니다. 이것은 부부 사이 이야기입니까, 안 그러면 그리스도 몸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그리스도 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교회 교인들 간의 이야기지, 어디 가정 집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12:26-27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개척 교회할 때, 개척교회 목사들이 제일 화나는 것은 교인들이 자기 가정 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는 한 형제, 자매라고 하는데, 돈 문제 등장하면 어디까지나 교회는 친목단체에 불과하고, 역시 돈 쓸 곳은 내 새끼,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가 우선시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생색낼 일이 있으면 우리 같은 교우 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약간 배부르고 여유가 있을 때뿐이지만 말입니다. 지금 당장 자기 발등에 불 떨어졌는데 남의 교인까지 챙길 수 없지요.

‘한 몸’이 되는 것은 내 한 육체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이것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 몸’이 ‘한 몸’ 되기 위해서는 자기 아닌 다른 육체와 육체들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범죄 한 이후의 인간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메를로 퐁티를 위시한 유명한 철학자나 사람들이 19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연구한 게 바로 이 [몸의 철학]입니다. 몸의 철학이 관심을 두는 바는 ‘어째서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느냐’ 는 것입니다. 이런 연구도 지금은 옛날 것이 되어서 지금은 ‘어떻게 해서 인간은 자기 육체의 컨디션에 따라서 인간이 달라지느냐’는 이런 주제를 연구합니다. 자기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괜찮은 인간이다가도, 컨디션이 나쁘면 아주 몹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자아라 하는 것은 고정된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아도 결국에는 자기중심입니다. 자기 육체 중심입니다. 혹여나 자기 컨디션이 좋아서 교회 청소부터 차량봉사까지 다하다가도 몸 아파버리면, 전화 심방하는 목사한테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몸 아프면 남편도, 자식도 다 싫은 것입니다.

사람이 자랑거리 좀 있으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난리가 납니다. 평소하지 않던 헌금도 하고, “내 아들, 사법고시 수석 합격시켜 주신 은혜 고맙습니다.”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남들 보기에 자존심 상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 날로 교회하고는 안녕이란 말입니다.

젊은 청년들이 교회 나올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좋아하는 연인이라면 열심히 성가대도 하고 주일학교 반사도 하면서 결혼하면 그야 말로 금상첨환데, 난데없이 새로 등록한 제 삼의 인물로 인해 삼각관계가 되고, 관계가 깨져버리면 복음이고, 뭐고 교회 안나오는 것입니다. 복음 때문이 아니라 연애를 위해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육체 중심이라고 할 때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그냥 육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아십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추궁할 때 그가 하는 대답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데, 이것이 이미 몸의 개념이 깨져버린 결과입니다. 문제는 ‘한 몸’의 깨짐 현상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를 들춰내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 배후는 인간의 육체로 이길 수없는 사탄이 숨어 있습니다. 이 배후를 들추어내는 그것에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자기 몸 중심으로 살아가다보면 그곳에서 뭔가가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사랑이라든지, 아니면 의, 정의로움, 인정, 동정, 자비 등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악마의 조종을 받는 그러한 사랑이고, 의리고, 동정이고 자비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컨디션을 타고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성질이 왜 납니까? 이걸 갈라디아서에서 육체의 소욕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을 보면 악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선한 것들인 것 같지만, 막상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그 모든 것이 마귀에 의해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목사님, 그건 예수 믿기 전이고 예수 믿으면 다른 것 아닙니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조금전에 말했지 않습니까? 이걸 잊으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평생을 갑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가짜입니다. 가짜 신앙입니다. 이것을 충분하게 평생 느끼고 느껴야 됩니다. 이걸 느끼는데 자라가야 됩니다.

왜 주님의 한 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육체가 한 몸 되게 하십니다. 몸은 한 몸 될 때까지 자라납니다. 자라나면서 우리는 전부 다 다른 몸이었고, 다른 육체로 신나게 놀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깨우치면서 자라나는 겁니다.

누구의 권세로 이것이 가능케 됩니까? 주님의 권세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자라난다’는 말이 이 말입니다. 한 몸으로 자라난다는 말이 이 말입니다. 개인적인 성화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몸의 성화입니다. 개인의 성화가 아니고 말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두 육체가 만나도 한 몸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난 뒤에 이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두 육체가 한 몸이 될 수 있습니까? 세 사람 같으면 세 몸이 되지, 어떻게 한 몸입니까? 세 육체는 세 몸이고, 네 육체는 네 몸이고, 다섯 육체는 다섯 몸이고. 그게 정상이지, 어떻게 다섯 육체가 교인 다섯 명이 어떻게 한 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참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르는 게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한 몸 되는 원리는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과 나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의 원리를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과 나, 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이 전부다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던 하나의 권세를 통해서 그 관계성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두 가지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의 중심에서 하나 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릴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것까지 이 두 편을 모두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창세기 3장을 보게 되면 조급하지 않고 느긋해집니다. “그래, 잘했다. 범죄 잘했다.” 이런 생각까지 들지 않습니까? “아이고, 그때 범죄 안 했으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고, “그래, 이왕 깨질 거 잘 깨졌다.” 이런 생각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뱀이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마귀가 있는 것이 우리한테 슬픈 소식이 아닌 것이 됩니다. 마귀가 있는 게 어떻게 슬픈 소식입니까?

창세기 3장에 뱀의 후손이 나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뱀이 한 동물 같으면 후손이라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독사 새끼가 여자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그냥 칼로 쳐버리면 되는데 말입니다.

여기 뱀의 후손이 단순히 뱀의 암수가 낳은 뱀의 새끼가 아니듯이 여자의 후손도 단순히 여자가 낳은 자식은 적어도 아니란 것입니다. 다른 의미인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아담이 낳은 가인, 아벨이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선악과는 아담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먹음직 하고, 보암직 하고, 먹기에 탐스럽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마라해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죽음이라 했지만 죽음이 뭔지도 모릅니다. 그냥 그들은 도저히 억제할 수 없을 뿐입니다. 너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먹기에 탐스럽기 때문입니다.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도 하다는 것은 언제든지 인간이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유혹을 이겼더라도 언젠가는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과가 있는 이상은 유혹의 연속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 번 마귀를 이겼다 계속 이기는게 아닙니다. 마귀가 뒤통수칩니다. 어제 이긴 유혹이 오늘까지 유효하지 않습니다.

백화점에 마음에 드는 원피스가 있지만,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유혹을 떨쳐버렸다 합시다. 그럼 그 다음날에는 그 원피스에 대한 유혹이 사라져 버려서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 집착이 생깁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게 인간의 육체입니다. 인간은 선악의 지배를 받는 이상 예수를 어떻게 믿든지 간에 자기 육체의 능력을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냥 주께서 쓰시는 대로 맡길 뿐입니다.

그냥 흰 도화지라 생각하십시오. 무슨 그림을 그리시든지, 그것은 크레용을 잡은 이의 솜씨입니다. 도화지가 크레용 빼어서 자기 그림 그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려지는 대로 담으면 됩니다. 그러면 성도에게는 두 가지 그림이 나옵니다. 하나는 우리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하고, 먹기에 탐스럽기까지 한 그것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그럼에도 이것을 이기지 못한 것까지 용서하시는 생명나무의 위력이 그려집니다. 이걸 이기지 못했기에 따먹을 수 없었던 그 생명나무를 주님께서 임의로 오셔서 당신의 피와 살을 먹이셔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그림까지 함께 도화지에 그려져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뱀의 후손이 되던 여자의 후손이 되던 우리 인간을 가지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같이 투입시켜서 대결하는 대결장 즉 대결을 하게 되는 장소로써 주께서 사용하게 됩니다. 이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좀 더 얘기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마라. 따먹는 날에는 전녕 죽으리라”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따먹고 보니까 그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우리라.”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도 모릅니다. 이것은 그냥 알아서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라 네가 알든 모르든 이 말씀대로 너한테 적용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 무슨 뜻인지 압니까? 모릅니다. 나중에 겪고 보니까 “아, 이게 범사에 감사하고, 이게 항상 기뻐하는 거구나.”는 것을 알게 될 뿐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무슨 뜻인지 압니까? 모릅니다. 그냥 겪고 보니 “아, 돈을 사랑하지 않을 때도 있었구나.”는 것을 알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도화지 삼아서 주님께서 그리시는 것입니다. 그냥 말씀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알아서 지킨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내가 납득해서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위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범죄하고 난 뒤에 얼마나 건방진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남에게 조심을 한다면 그게 들보를 뺀 것이라는 것입니다. 뺀 게 그 정도입니다. 사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한 것인데 말입니다.

하루 세 끼 꼬박꼬박 다 챙겨 먹으면서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루 세 끼, 간식까지 다 챙겨 먹으면서 말입니다. 마지막 커피까지 셀프까지 다 뽑아 먹으면서. 세상에. 먹는 거 입는 거 족한 줄 알라는 것은, 하루 네 끼 먹어도 족하면 그게 먹는 게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겪고 보면 아는데 그걸 자기가 지레짐작으로 안다고 설치니까 그게 자기 의로 축적이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 이 말입니다.

전에 있었던 crossvillage에서 토론을 했는데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자기는 방종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방종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나는 반복해서 죄를 안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반복해서 지은 죄는 절대로 지은 적이 없습니까?” 이렇게 말입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께 난 사람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구절을 가지고 같은 죄를 반복해서는 짓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반복해서 두 번 다시 죄를 안 짓는다 말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아무 소리 못하는 것입니다. 사기 아닙니까? 사기. 무슨 그런 사기가 다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짓게 되고, 속한 사람은 죄를 안 짓는다.’ 이 말은 두 개 다 우리 속에 있어야 됩니다. 성도 속에는 이 둘이 다 들어와 있어야 됩니다. 다 들어온 있을 때 그것을 죄 안 짓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쓰시라고 자기를 내맡겼기 때문입니다. 그게 죄 아닌 게 됩니다. 소속의 문제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갖고 놀던 상관없습니다. 아까 로마서 9장을 봤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저주해서 주님으로부터 끊어질지라도 사용하시면 사용하세요.”라는 것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죄 안 짓는 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22절을 봅시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입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영원한 언약에는 인간이 개입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근데 인간이 뭔가를 했지요? 선악과를 따먹었지 않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해서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들어가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악을 모르는 상태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완전히 죽음으로 내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세계는 에덴동산 바깥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흙이 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죽음의 세계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지 않습니까? 예수 믿던 안 믿던, 여기에 오던 합기도도장에 가던, 검도를 하든, 태권도를 하든 우리는 다 죽습니다.

문제는 죽는데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권세로써 일하시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죽고, 안 믿어도 죽습니다.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죽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은 죽는 이유도 모르고 지 잘났다하면서 계속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나 뱀의 후손이 누군지 모릅니다. 다만 주님께서 죽어가는 우리 인간들 위에 이 두 개의 정보를 덧입히시는 것뿐입니다. 인간이 죽어가는게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남겨지고 어떤 흔적이 남겨지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이것이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인간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그 일을 위해 사용되는 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9장 21절에 나오는 ‘귀히 쓸 그릇(진노의 그릇)’과 ‘천히 쓸 그릇(긍휼의 그릇)'이 따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롬 9: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그러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12장에 여자의 후손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갈리디아서 3장에서도 여럿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지 않고 한 사람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말입니다. 한 분으로 되느냐 하는데,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계 12: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 몸의 원리가 세 육체, 네 육체, 천 육체, 만 육체, 십사만사천이라도 그 한 몸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해서 한 몸으로 유지시키기 때문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지체라도 동일한 혜택을 누린다는 겁니다. 발끝에 있는 발가락이라든, 아니면 귀든, 손가락이든 머리에서 멀리 있다고 차별하는 그런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혜택을 입습니다.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목사나 평신도나 관계없이 동일하게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영생 받게 돼있습니다.

그게 한 몸 된 원리에요. 그래서 여자의 후손은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에서 여러 육체가 지체로서 다 모아지는데, 결국은 한 몸밖에 없습니다. 몇 명이 되던 한 몸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한 몸’인 것은 더 이상 자기 몸 중심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한 몸’에 있지, 인간 개별적 몸에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선악을 알게 되었기에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면서부터 인간은 그 마음속에 가계부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계부에는 나름대로의 선과 악에 대한 항목들이 쭉 적혀 있습니다. 선한 것 속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악한 것 속에는 불신, 미움, 질투 이런 것이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죽어야 될 선악과의 습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죄를 지워야 합니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세요. 죄가 있어야 됩니다. 이걸 어떻게 지워버립니까? 지금 강의 도중에도 우리는 강의 들었다는 착한 일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집에 설거지 이만큼 싸놓고 왔는데 말입니다.

만약에 제 말이 틀렸다면 창세기 3장에서 이야기가 끝나야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세기 4장이 나오지 않습니까? 5장, 6장 계속 넘어가지 않습니까? 근데 4장, 5장, 6장해서 계속 나오는 게 무엇입니까? 심판이야기입니다. 왜 심판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까? 분리시키는 작업이 계속해서 나오지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계속 분리시키니 심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분리시킬 때 구원받기로 분리된 사람이 선악적인 것을 활용해서 구원받았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선악을 발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작하십니다.

어떻게 조작하시는지 봅시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아벨의 예물을 하나님이 받음으로 말미암아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적으로 삼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벨만을 적으로 삼는게 아니라, 아벨의 예물을 받았던 하나님까지 모두 포함시켜서 원수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누가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해줘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뚜렷하게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동생만을 적으로 취급해 버리면, 형은 뱀의 후손이 아니라 그저 형일 뿐입니다. 반대로 동생은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 그저 동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형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고 동생의 제사를 받아 차별화시키신 것입니다. 가인으로 하여금 배후에 악마가 있으며 그리고 아벨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음을 보여줘서 이 싸움이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악마와 주님과의 싸움인 것을 보여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이 창세기 4장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12장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뭐냐는 의문이 생기죠? 우리는 그냥 들러리입니다. 신랑, 신부 따로 있는데 뒤에 치마나 들고 가는 들러리죠. 꽃이나 들고 가는. 그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 합니다. 저쪽은 악마의 증인이며, 악마의 일꾼들 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꾼들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저쪽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만 알지만, 우리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 무엇인 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신 이도 주님이신 줄 알고 말입니다.

그렇게 패가 둘로 나눠집니다. 나눠져서 이쪽은 천국으로, 이쪽은 지옥으로 갑니다. 나중에 지옥, 천국 갔을 때 결국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천국 왔느냐는 것입니다. 중간과정은 다 생략됩니다. 그 때 우리는 “창세전부터 주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과 나중에 천국하고 연결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너는 왜 지옥 왔나?” “창세전부터 미워했잖아요.” 이렇게 됩니다. 창세전부터 미움 받는 것 하고 지옥하고 연결되는 것입니다. 중간과정은 없어져 버립니다. 모든 게 ‘내 뜻’이 아닌, ‘주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닙니다. 이런 관점으로 창세기 4장을 보셔야 됩니다.

예수님은 아직 미지의 인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모형이라고 말입니다(롬5:14).

우리가 지금 상당히 이해하는데 복잡한 것은 아담과 하와는 예수님 이야기를 직접 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너무 억측이 아니냐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그렇게 말을 했어도 막상 창세기 3장 들여다보면 거기 예수님이 나오시지는 않잖습니까?

하지만 오실 예수님을 아담과 하와 속에 남겨두신 게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여자의 이름이 하와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냥 아담이지만 흙이라는 본래성이 강조되고 말입니다. 흙이라는 말은 죽음의 자리를 뜻하는 것이라면, 하와는 생명의 자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창 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개인적으로 보면 아담은 섭섭하고, 하와는 신나는 것이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죽음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버리시고자 하셨다면 가죽옷을 입힐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가죽옷을 입히심으로 여전히 그들을 사용할 뭔가를 남기시는 것입니다.

가죽옷을 입힌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하라’는 뜻입니다. 이미 이 시기에도 예수님이 관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셨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흔적을 남기셨는데, 그것이 바로 가죽옷입니다. 이 가죽옷을 입히시는 동기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약속 때문입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나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약속을 아담이 이뤄가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담보고 하란 말이 아니라 하나님 본인이 해내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냥 쓰임 받을 뿐입니다. 가만히 있었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증언할 뿐입니다.

주의 일은 주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설쳐봐야 우리 일이지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내가 아니요”, 십자가 지신 주의 능력이라는 고백을 통해서 결과로 나타날 뿐입니다. 주님의 일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신다고 해서 주의 일을 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이 계속 무익해야 되지, 쓰임 받았다고 유익한 종으로 바뀌면 안되는 것입니다. 유익종도 아니고 말입니다. 무익한 종은 계속 무익해야 됩니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무익한 종은 왜 이런 일들을 하면서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해야 합니까?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무익한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익한 종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입니다. 만약에 무익한 종에서 유익한 종으로 바뀌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인간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천국 가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 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라고 말입니다(마25:27-29). 이것은 본인들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언제 자기들이 그렇게 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야 되는데, 지금 휴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휴지가 주인한테 집어달라고 아양을 막 부립니다. 주인이 휴지를 집으면서 그만 뒷발로 옆에 있는 가방을 찼단 말입니다. 휴지는 내가 이렇게 아양을 부려서 주인에게 선택되었다고 좋아하는데 이건 주의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데 휴지 줍다가 차인 그 가방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사람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 하시는데 우리가 모르는 이유는 그래야만 주님께서 홀로 일한다는 것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도 않은 일을 몰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사용하는 도화지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우리 속에 등장하는 사태로 말미암아 그 두 개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뱀의 후손일 수밖에 없고, 여자의 후손은 내 육체도, 내 몸도 아닌, 오직 한 분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확장되어서 우리를 사용했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의 어떤 공로나 그런 것들로 인하여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은혜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내일 또 살려주세요.” 라고 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내일 살고 죽는 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성질 급하게 자살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 알아서 다 보내시고 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주의 마음대로 하셨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데, 이 두 분 이야기는 창세전의 이야기이자, 우리가 있기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의 개입을 허용치 않습니다.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기로 그들이 나기도 전에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피조물 위에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 있었던 확정된 두 언약대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또는 육체에 속한 자와 약속에 속한 자를 그냥 분리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냥 적용시킬 뿐입니다.

우리 피조물들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먹기에 탐스럽기도 한 유혹거리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결국 따먹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데 그 따먹음의 결과로 우리 속에 선악의 가계부가 생긴 것입니다. 나쁜 일과 선한 일을 임의로 나누는 것입니다. 내 중심으로 판단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마저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십자가를 우리 속에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십자가의 원수로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그 십자가가 우리를 원수시 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당연히 그 사랑을 받은 자는 자신을 가리켜 ‘무익한 종’이라, ‘죄인이 괴수’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 고백합니다. 면류관을 보좌앞에 던지며, 주님께서 받으셔야 할 것으로 찬양하는 요한계시록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의 증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전에 있었던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보니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감을 저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께서 마음 놓고 저희들을 사용해 주시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찾아오심으로 그 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되었음을, 미리 구원 다 되었음을 주 앞에 감사하고 세상에 자랑하며 증거할 수 있는 저희들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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