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창세기3장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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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강의
2006년 12월 1일
창세기 3장
이근호 목사
창세기 1장, 2장을 요약해 드리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함유된 창조지,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창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골로새서1장 16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창조였다”는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경로든, 어떤 이유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코끼리나 코스모스, 심지어 천사나, 악마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로든 창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까? 사실 '어떻게'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면,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강의를 통해서 규명해야 할 내용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에 의하면,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뭔가 본래의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창세기 3장부터 풀어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요한복음 17장 2절을 찾아서 읽어 보십시오.
요 17장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위의 말씀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이 권세가 방해받을 수 있을까요? 이 권세가 어떤 저항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 권세를 사용하는데 문제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 예수님의 권세는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이 관계를 완벽하고 철저하게 유지시키실 수 있습니다. 강의 처음부터 제가 이야기한 그 관계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우리에게 미흡한 것이 없게 됩니다. 모든 걸 다 알아버리 게 됩니다. 창조부터 마지막까지 다 알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고, 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버리면 깔끔하게 전부다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미진한 게 남아있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유지하는 권세가 예수님한테 나온다는데 우리는 왜 걱정을 하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걱정한다는 이유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모든 권세가 예수님한테 있다는데 왜 우리는 걱정을 하면서, ‘행동을 올바로 했느니, 못 했느니’ 하는 쓸데없는 곳에 관심을 기울입니까? 권세가 그리스도한테 있는데 말입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나옵니다.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근심이나 걱정, 두려움, 초조, 불안, 이런 것이 나오는 이유는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이 말씀에서 눈을 돌려버렸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관계가 주님의 권세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면 우리는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찬양하고 좋아하면 그만입니다. 자기가 우주의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근데 왜 자기가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느냐 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그림, 다른 말씀을 염두에 둬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런 확정된 주님의 뜻에 굴복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피조물의 관계는 주님의 권세로써 유지됩니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마십시오. 창세기 3장으로 들어갑시다.
“죄라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주님과 피조물의 관계가 주님의 권세로 유진된다는 주장에 대해 감사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전부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규정하실 때 적용한 기준을 이탈하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정해놓은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예수 그리스도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는 주님의 권세로 유지한다”는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에서 시선을 돌려버리면 우리에게 뭐가 나온다는 말입니까? 죄가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와 찬양과 고마움과 기쁨이 나오는 대신에 근심, 걱정, 두려움, 이런 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복음의 광채가 흐릿하게 된 것은 그런 죄의 힘에 의해 우리가 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취지의 말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흔히 죄 지었다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죄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은 뭘 가지고 죄라 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착한 일을 안 했으니까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만 저는 반대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두려움과 걱정이 생긴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저나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들은 착한 일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착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몇 시간 또는 몇 일을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입니다. 왜 진작에 이런 착한 일을 못 했는지 후회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착한 일 그 자체가 새로운 근심과 걱정, 두려움을 유발시키는 측면입니다. 이런 착한 일에 대한 집착을 한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했더라도, 착한 일 한 그것을 통해 착한 일이라고 생각한 ‘자기 의’를 회개를 해야 될 텐데, 사람들은 반대로 착한 일 했는데 미쳤다고 회개하느냐 이렇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사람이 나쁜 짓 할 때만 회개 할 것이 아니라 착한 일 한 그 순간도 회개를 해야 됩니다. 착한 일이 나를 새로운 궁지에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가 죄가 아닙니까?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의 권세로 유지된다”는 그 생각으로 감사가 나오면 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착한 일 했다는 것은 누가 누구를 관찰했다는 것입니까? 자기가 자기를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를 관찰하면 위 주장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인식으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일 중심으로 나가버리면 성경은 하나도 해석이 안 됩니다. 착한 일은 장려하고, 나쁜 일은 꾸짖는 이런 인식으로는 성경해석이 전혀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착한 일 중심이 돼버리면,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와의 관계성을 권세로서 유지한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착한 일이 크게 보이게 됩니다. 그 다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식입니다.
포이에르바하라든지 많은 철학자들의 연구한 바에 의하면 자기 뒤에 나타나는 예수가 어떤 예수냐 하면, 내가 만든 예수라는 것입니다. 내가 환상 가운데 만든 예수인 것입니다.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내 속에 나를 관찰하면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정의로움이라든지, 착함, 성실함, 열심, 믿음 좋음,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뭉쳐서 쏟아내면 만들어진 예수가 배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다른 예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다르다면,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하나님도 다른 하나님입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가 나오게 하지 않고, 철저함이 나 완벽함, 그리고 완전함이 나오게 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잘해볼게요.’라는 나오는 것입니다. 이 두 말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 나지 않습니까? ‘고맙습니다.’란 말은 완료지만, ‘잘해볼게요.’라는 말은 미완료 아닙니까? 앞으로 내가 하는 일에 따라서 감사할 것과 감사 안 할 것이 구분되니 말입니다.
제가 방금 강의하면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시고 그 안에 모든 피조물이 있으며, 그 관계가 예수님의 권세로 유지된다는 그림과 나와 예수님이 이렇게 마주보는 관계, 즉 자기가 자기를 관찰하는 단계의 그림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그림이 있는데, 우리는 이 두 개의 그림을 다 알아야 됩니다. 왜 둘 다를 알아야 하느냐 하면, 창세기 3장부터 해서 이 둘이 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쪽의 자기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이런 사람은 아주 구구절절 평생 살면서 철저하게 이걸 다 알고 있어야 됩니다.
만약 1번이 틀렸고, 2번이 맞다면 1번은 버려야 되지 않습니까? 1번을 버리려면 우리는 창세기 3장이 아닌, 창세기 2장의 죄짓기 이전의 인간으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조상을 잘못 만나서 창세기 3장 이후로 넘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1번과 2번 둘 다를 같이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한쪽은 잊어버리자. 1번은 나쁜 거니까 잊어버리자.”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은 나쁜 사람이니까 바리새인들은 잊어버리자.” 그럴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신앙 생활했는지를 철저하게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다 보여줘야 됩니다. 우린 같은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 다에 해당되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어떤 것인지를 다 경험했지만 말입니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고,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서 두 번째에 개입되신 것이라는 그런 차이 뿐입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가 창세기 공부를 하면서 우리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낸 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이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제부터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한번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첫 번째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권세로써 자기 피조물들을 어떤 관계 속에서 다스리느냐 하는 이 관계를 알아야 되고, 두 번째는 이미 죄인 된 인간이 어떤 식으로 가짜 예수, 가짜 복음,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어떤 의식과 욕망, 사고방식이 동원되는지, 이것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들은 부모가 시키면 그게 진리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면 그걸 반성하게 되지요. 과연 그런가 하여 자꾸 반성하게 됩니다. 독자적인 노선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초등학교 때는 착한 아이고, 중학교 되면 나쁜 아이입니까? 이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답변해 보세요.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같은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가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고, 교도소 갔다 오고하면 다른 인간이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같은 인간입니다. 그 애는 날마다 자랍니다. 날마다 자라난다는 말은, 자기의 본색을 나중에 감추고 싶어도 못 감추는 때가 오는데, 그게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책을 무시하는 불신자들은 이 성경책이 전부다 과거의 이야기며, 소설이기에 갖다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본인이 이유도 없이 죽어가는 사실은 버릴 수 없습니다. 본인이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죽는 이유는 여기 창세기 3장에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자기는 죽어가고 있으면도 자기 죽음을 감추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데, 어떻게 자라게 하시느냐 하면, 우리가 죽어야 될 죄인임을 폭로시키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자기 본색에 더 가까이 가도록 그렇게 역사하시고 일하십니다. 그걸 제가 조금 전에 두 자로 뭐라 했습니까? 권세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첫 번째, 두 번째 그림을 여기서 통합시켜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여기 피조물이 있는데 이 피조물 속에 인간도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피조물,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권세를 가지고 피조물을 다스리십니다.
이 인간들은 나름대로 머리 속에서 다른 예수를 창작해서 만들어냅니다. 그렇지요? 이렇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하나님 만들어내는 것까지 누가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1번과 2번을 통합시킨 그림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인간들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것까지 주님께서 권세로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세 중에 악마가 있습니다. 하지만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고 예수님께 대항하는 것까지 누가합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권세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권세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그림을 보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감사가 아니라 철저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초조함 속에서 보다 완전하지 않으면 도중에 탈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그림을 합쳐보면 뭐가 나와야 됩니까? 감사가 나오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 두 그림을 합쳐서 보도라도 이것 전체에서 감사가 나온다면, 뭐도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까? 나란 인간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논리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 선악과 심은 것은 감사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뱀이 찾아온 것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다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마에 땀 흘리는 남자나,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여자는 또 어떻습니까? 모두다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3절을 봅시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는 무슨 의미입니까?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평생을 살면서 무엇을 확인해야 합니까? 나란 인간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쫓아갈 수밖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을 밖에 없는 것은 위로부터 오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자생적으로 제조해낸 것을 바른 복음이라 하고, 바른 예수라 하면서 그것을 믿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인식의 대 전환이 필요합니다. 제가 어제하고 오늘 중세철학에 대해서 기술한 책을 봤습니다. 아벨라르, 보나벤투라,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둔스스코투스,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등. 쭉 보고 내린 결론이 이단 옆집이라는 것입니다. 이단이 따로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이단이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단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어떻게 하면 참된 하나님을 규정할 수 있는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이성을 통해 이것을 규정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증언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은 200페이지의 책으로 50여권이 됩니다. 지금 분량으로 만 페이지 넘게 책을 썼습니다. 그만큼 노력한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분량의 책을 썼음에도 제가 보기엔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뒤에 어거스틴, 둔스스코투스 이외에 윌리암 오캄에, 에크하르트, 신비주의가 나타나지만 이들도 자기를를 증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왜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가 눈에 안 보이는 것일까요? 왜 성경을 보면서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감사가 안 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물론 성령 없이 그런 믿음이 불가능하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고 있는 짓거리가 토마스 아퀴나스나 어거스틴과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저쪽이 수를 쓰면 뭣 때문에 그런 소릴 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쪽은 이쪽을 이해 못합니다. 어떻게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 쏟아져 나오는데 감사가 나올 수 있느냐고 따지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9장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토마스 아퀴나스나 어거스틴은 아마 해석 못할 것입니다.
롬 9:1,3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1절에 포함됨)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말씀에 ‘근심’ 이나 ‘고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근심, 고통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구원 못 받은 것에 대한 분풀이입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유지시키는 것이 바로 ‘권세’라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이 사실조차도 자기는 수긍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형제를 위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이 있다면 이것조차도 주님이 주는 권세로 유지시키는 관계라면, 이것은 피조물로써 마땅히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권세 앞에서, “나는 싫습니다. 안 됩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됩니다.” 이렇게 나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 3장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들과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느냐 하는 것을 밝히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를 제가 미리 결론삼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내린 정답을 미리 말씀드리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있던 그 관계로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그 관계를 예수님은 우리를 지배하는 관계로써 그대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제가 알고 있는 정답입니다.
이 관계를 밝혀내지 않는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나 유명한 신학자들처럼 우리도 인간 쪽에서 억지를 부리면서 예수님을 믿어보려고 온갖 이성과 의지를 총동원할 것입니다. 이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혼신의 종교적인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는 창세전부터 있었던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개입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눈치 챌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개입불가입니다.
인간들은 성령의 도움이라든지, 주의 은혜라든지 온갖 말을 갖다 붙여서라도 이 관계를 이해하고 알아듣는 관계로써 전환시켜 보겠다고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주장이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저렇고, 저것은 이렇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우리 어머니는 천당가야 된다든지, 내 딸만은 구원받아야 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압력이 통하지 않는 창세전의 관계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정론을 싫어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이미 끝난 문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우리가 제사를 드린다든지, 공적을 쌓아서 어떤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정론 싫어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다면 인간에게 왜 자유의지를 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누구에게 그 자유의지를 줬다는 것입니까? 그 자유의지도 결국은 자기가 자기에게 준 것 아닙니까? 자기 마음대로 자유의지 줬다는 주장을 하면서, 예정론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따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그 관계를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로 전환시킴으로써 죄는 드러납니다. 이것은 결국 전 우주의 움직임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의와 죄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시려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있고, 그래서 지옥이 있는 겁니다.
의는 이미 창세전에 확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은 죄입니다. 그래서 그 죄 앞에서 의가 의로 드러나고, 죄는 의 앞에서 죄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질서체제가 원래 하나님께서 그렸던 그림입니다. 우리는 그저 찬양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께서 영광 받는시기에 합당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만들었습니다. 창조하셨다는 것은 아무 목적 없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며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다시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니까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드신 이후에 유지하고 보존하는 그런 힘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7장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주님께 주셔서 주님의 자기 권세로 유지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그림만 생각하면 될 텐데 현실상 이런 그림만 나오는 게 아닌 것이 문제입니다. 그건 왜 그렇다고 했습니까? 우리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인간을 조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창세기 2장에서 3장으로 넘어온 범죄한 인간을 우리 조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죄가 뭐든가요? 바로 내 중심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무엇이 생겨납니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하나님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오는 것조차 예수님의 권세 하에서 움직이는 것이기에 이것을 믿는 사람이 진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생각할 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관계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냐?는 것과 두 번째는 우리에게서 이런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 다른 복음이 왜 나올 수밖에 없는가? 이 두 가지가 왜 병행해서 나올 수박에 없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나서(예수님의 계시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 역사를 둘로 쪼개놓습니다. 한쪽은 약속의 자녀이며, 다른 한쪽은 율법의 종의 자녀라는 구도로 말입니다. 이걸 가지고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이 두 언약을 이야기했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만 챙기고 한 쪽의 언약은 몰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이건 옳지 않은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3절에 보면,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하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23절에 계집종에게서는 뭘 따라 났다고 합니까? 육체를 따라 났다고 하지요. 다른 한쪽은 뭘 따라 났습니까? 약속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약속과 육체는 섞일 수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섞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섞여 버리면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어버리는 거잖아요. 지금 의도적으로 따로따로 분리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도 분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육체가 뭔지 알아야 되고, 약속이 뭔지 알아야 되고, 둘이 섞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되고, 서로서로 배타적이란 것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증거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빼버리면 둘이 아니고, 하나로 통합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남겠습니까? “나 예수 믿으니까. 알아 줘.”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둘로 쪼개셨다면 우리 내부에서도 둘로 쪼개져야 됩니다. 왜 나라는 인간은 죽어야 되는 반면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야 하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나란 인간 자체에서부터 이미 둘로 분리돼야 됩니다. 그래야만 두 언약을 증거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맺어진 관계로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두 언약이라는 약속입니다. 두 언약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요?
바로 십자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피조물인 우리 속에 반드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들어오게 되면 이 십자가의 힘으로 인해 부활이 일어나고, 이 부활의 힘으로 우리는 뭘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던 두 언약이 십자가라는 걸 통해서 우리 속에서 두 언약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창조하신 그 원래 목적입니다.
이것이 드러나는 사람이라면 구원받은 사람이고, 반대로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 흔적이 없는 사람은 믿음을 못 받았기 때문에 여전히 다른 예수, 다른 복음에 매달려 그 안에 붙잡혀 있는 인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공부한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고생고생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11:23-27 『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의 마음에 지금 가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안 빼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사도의 몸에 가시가 있어야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그 두 언약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지만 주님은 내 속에서 강하시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언약대로 실시하여 나 같은 가시 있는 인간도 구원시키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부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할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사도 바울이 슬퍼했습니까? 아닙니다. 항상 기뻐합니다. 심지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할뿐만 아니라,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까지 하는 것입니다.
빌 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는 이들에게는 이게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논리적으로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창세기 4장부터 출발하는데, 그 이전의 창세기 1장, 2장, 3장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창세전에 맺었던 영원하고 은밀한 계획서입니다. 프로젝트인거죠. 프로젝트가 창세기 2장, 3장으로 쭉 넘어옵니다. 그걸 설명하는 게 상당히 어렵지만 그게 논리상 어렵더라도 전체적인 그림만 꽉 잡고 있으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있었던 영원한 약속을 우리를 틀로 사용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두 언약이 나오게 됩니다. 나는 육체지만 주께서 약속이 되는 순간, 나는 육체에 속한 자가 아니라 약속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 약속은 바로 영원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고 하셨기에.
창세기 2장부터 보게 되면, 에덴동산 중앙에 시선을 끄는 두 개의 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열매가 맺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람을 만들어놓고, 이 에덴동산의 의미가 무엇이며, 왜 에덴동산을 만들었으며,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을 왜 만들어 놓았는지를 설명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설명을 시도하시는 게 아니라, 다른 성격의 두 나무를 가지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설명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이 두 나무를 가지고 설명하십니다. 그럼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 보겠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가지고 설명하는 이것이 이해하기 쉽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오시고 난 이후에 설명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습니까? 어느 쪽이 더 쉽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고 난 이후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게 쉽습니까, 아니면 그냥 예수님 오시는 것 모르고 생명나무 가지고 하나님 뜻을 이해하는 게 쉽습니까? 어느 쪽이 쉽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오시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이게 더 쉬울 것 같지만, 실은 예수님이 생명나무라 하는 말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이지 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 생뚱맞은 소리가 또 있겠습니까?
덧붙이자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우리 인간은 바라지요. 바라는 것의 실상은 믿음이단 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하는 게 쉽습니까, 예수님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하는 게 쉽습니까? 어느 쪽이 쉽습니까?
또 해봅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왜 사랑하는데.” “당신이 사랑스럽기에 사랑해.” 이 말은 말 하나마나 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랑스러운데?”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야.” “왜 사랑스러운가 말이야.” “사랑스러우니까 사랑스럽지.”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논리적으로 말이 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이 먼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당신 준 그 사랑이 어디서 나왔는가 따라가 보니까 당신에게 나와서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 “진작 그렇게 이야기하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 믿는 그 믿음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알려주기 위한 실상으로서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조차도 예수님에게서 나온 믿음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향해 찾아갈 수 있게 된 거야”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왜 있습니까? 생명나무가 예수님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선악과가 예수님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둘 다 예수님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여기 인간 있지 않습니까? 인간과 더불어 이 셋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권세를 보여주는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과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흉하게 생겼습니까? 아니면 기괴하게 생겼습니까? 아니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생겼습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따먹지 말라고 하셨죠. 누구 환장하고 미치게 만들 일 있습니까? 따먹지 말라고 했으면 정말 두 번 다시 보기도 싫은 몰골로 만들어 놓으셔야지 따 먹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이 문제를 한번 심사숙고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먹지 말라”는 금지가 더 사람을 유혹하고 끌어당기는 법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의지, 감정, 이성이 종속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자기가 자기를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내가 스스로 결심해서 어떤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우리가 놓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중 어느 인간이 스스로 결심해서 “나는 먹고 싶은 것도 안 먹고, 보암직하지만 안 봤고, 탐스럽긴 하지만 거부했다.”고 할 인간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담이 너무나 의지가 강해서 어지간히 예쁘지 않으면, 어지간히 탐스럽지 않으면 안 따먹을 정도로 강단 있는 사람이라면 주께서는 더 예쁘고 더 탐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강단이 있고 의지가 강해도 결국은 탐스럽고 아름답고 보암직한 것에 굴복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자율적으고 자립적으로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은 애시당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의지해야 됩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지만 뭐가 걸려 있습니까? “따먹지 말라”는 명령이 걸려 있습니다. 이를 두 자로 줄이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그죠?
인간은 그 나무를 보고 “먹고 싶다”는 자신의 결정보다 뭘 우선시해야 합니까?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우선해야만 하는 그런 조건 하에서 처음부터 이 땅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체적인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탄생한 것이 아니고, 어딘가에 철저하게 종속되어야 하는 자리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란 말입니까? 바로 말씀이죠. 말씀이 떠나버리면 풀의 꽃같이 인간은 사라지지게 되는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첫째 시간을 끝내면서 다시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인간이 여기 있습니다. 인간이 자율적이고 자립적으로 예수님께 다가올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뭐가 가로 놓여 있기 때문입니까? 자율적으로 못 오도록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주님보다도 여기에 기울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져 있음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말씀뿐입니다.
이것이 잠언서에 나오는데 말씀이 인간에게 스며들지 아니하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로 말씀대로 사시는 분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예수님이 나중에 뭐가 됩니까? 인간이 됩니다. 육체를 지닌 인간이 되십니다. 이게 참된 모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참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참 아들인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육인 인간으로 태어나 허망하게 흙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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