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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울산강의(창세기1,2장b)자유게시판창세기

울산강의(창세기1,2장b)

이름 : 관리자(IP:219.249.86.34)

울산강의

2006년 11월 3일

창세기 1,2장

이근호 목사

창세기 1장을 잠시 복습하면, 빛이 있으라 함은 빛만 빼놓고 나머지는 없어지는 것이며, 이 창조는 임시방편적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바다도 다시 있지 아니하고 땅도 없고 모든 게 다 없어집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까 제가 천지를 주께서 주의 손으로 만들었지만 그거는 멸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 없어질 것이라고. 없어지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유가 뭡니까 물으신다면, 주의 손이 하시는 그 다음 일을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손이 그 다음에 어떤 작업에 또 개입하시는가를 알기 위해서 돗자리 깔듯이 깔아놓은 것이 창조인데, 그것은 빛만 남기고 나머진 없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밑 돗자리가 끊어지고 요한계시록 천국에는 빛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이걸 '광채'라 하지요. 광채는 어느 정도 되어야 광채라고 할 수 있을까요? 눈부셔야 하지요. 여기서는 이걸 복음의 광채라 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광채를 통해 이 세계의 혼미함을 밝하시기 위해 주께서 주의 손으로 깔아놓은 임시방편적인 어떤 자리, 그러한 배경, 연극의 무대장치,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라는 것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 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런데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복음의 광채가 제일 먼저 어디에 들어오느냐 하면, 이게 중요한데, 사람의 마음에 들어옵니다.

사람의 마음에 복음의 광채가 눈부시게 임하게 되면, 그 순간에 이 사람의 눈에는 피조세계가 날아가 버립니다. 보이지 않게 됩니다. 신기하죠. 이게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옵니다. 삼층천에 올라가니까 심지어 올라간 당사자가 나냐, 아니냐? 그것조차 분간 안 될 정도로 하늘의 복음의 광채에 들어가 버리면, 앞에 있는 빛 때문에 깜깜해져 버리는 겁니다. 앞에 게 안 보이게 되니 말입니다.

고후 12:1-3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비춰 버리면, 그 밝기에 압도되어서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이 높은 덴지 낮은 덴지 분간이 안 될 정도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너무 밝아서 이쪽이 생각나지가 않습니다. 창조세계가 생각 안날 정도라니까요.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갈 때에 너무 휘황찬란해서 도대체 거기 사는 사람이 자기가 맞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황홀경에 빠졌던 겁니다. 이게 원래 하나님의 의도했던 빛의 세계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취데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창조 전체를 육일로 보느냐 아니면, 하루로 보는냐 이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조 전체를 속성으로 봅니다.

요 1:5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세상이 어떻다고요? 예를 들어서, 이 세상의 길이가 어떻게 되느냐? 어둡습니다. 어허, 이 지구가 넓이가 몇 평이냐? 어둡습니다. 어허, 높이가 몇이냐 하니까. 어둡습니다. 속성으로 성질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방금 예를 든것처럼 양의 크기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성질로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요? 나는 어떻다는 말입니까? 역시, 어둡네요.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목사님, 천국이 여기서 몇 키로입니까? 빛의 세계입니다. 안드로메다 성운 그 바깥에 있어요? 빛의 세계입니다. 로켓 타고 며칠 가야 돼요? 빛의 세계입니다. 제자가 물었습니다. 예수님,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너희 안에 있느니라. 어디 있냐고요? 어느 장소에, 몇 미터 앞에? 너희 안에 있느니라.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속성으로 성질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아는 이쪽에선 어떻게 합니까? 물체의 세계, 사물의 세계, 우리가 거리를 파악한 것으로 이야기하거든요. 아까 하나 빠뜨린 게 있습니다. 사일 째 만든 게 뭡니까? 해와 달과 별 아닙니까? 해와 달과 별로 만들기 때문에 그 순간부터 우리는 시간 속에 갇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를 보면, 해와 달과 별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 감각에 매여서 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생체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도 자기 내부에 시계 같은 것들이 있어서 해와 달과 별의 운동에 의해서 그것들의 진동수에 맞춰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에 맞춰서 살게 되는 겁니다. 부엉이가 무슨 아이큐가 그렇게 높다고 밤인지 낮인지 알겠습니까? 다 생체리듬이라는 시계를 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지면, 빛의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작용합니다. 그게 뭐냐 말이지요? 먼저 들어오는게 있다고 했잖습니까? 또한 먼저 들어오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먼저 들어오는 이것을 복음의 광채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 이렇게 들어오는 이유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기존의 신학이나, 다른 쪽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먼저 해 볼까 합니다. 다른 쪽에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흙으로 되어 있다. 사람은 왜 짐승과 다른가? 코끼리 같은 경우에. 사람은 왜 코끼리하고 다른가?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짐승하곤 다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인간만이 짐승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들 합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의 형상과 짐승의 차이점을 네 가지 정도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직립보행입니다. 서서 걷는다는 뜻이지요. 두 번째는, 도구사용. 세 번째, 언어사용. 네 번째, 불사용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짐승보다 월등하고, 언어 사용하기 때문에 짐승보다 낫고,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낫고, 직립보행 하기에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짐승하고 차이 나는 하나님의 형상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어떻게 다른가하는 것이 남습니다. 외부적인 특징과 내부적인 특징이 결합되어서 이것들을 통해 창조세계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 내부적인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된 품성으로서 의와 거룩과 선함 이런 것입니다. 의와 거룩과 이것은 인간 속에 들어있는 직립보행, 이것도 마찬가지지만 이것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받았기 때문에 이런 요소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간주하자는 것이 기존 신학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었다는 말은 형상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설설 기어 다니지는 않죠? 죄 지었다고 말을 못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죄 지어도 자동차 몰고 어디든 다니잖아요. 심지어 조폭 세계에도 의리는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기 집안에서는 자애로운 어버이 아닙니까? 아무리 악한 아비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늘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대목 나오지요. 아무리 악할지라도 의와 양심이 살았다 이 말입니다.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지금 기존의 신학에서 주장하는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있는데 이게 죄로 말미암아 고장이 났다는 겁니다. 고장이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장 난 이 하나님의 형상을 수리 해서 다시 회복시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도 있고, 이 세상을 지배도 할 수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빛의 입장이 아니고, 제일 마지막날인, 제육일째 만든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또다시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의 형상론을 볼 때 생겨나는 형상론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말입니다. 이 형상론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문제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지옥이 없어야 되거든요. 지옥이 없어야 됩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만약 이 비타500을 아주 맛있는 것으로 만들었는데, 근데 내용물이 맛있는 음료수가 나오지 않고 맛없는 게 나왔어요. 이게 상했어요.

그러니까 문제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었던 직립보행, 도구, 언어, 이것들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안의 내용물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또 하나 덧붙이지마면, 껍데기는 문제가 없는데 알맹이가 지금 제조할 때와는 문제가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럼 알맹이만 바꿔버리면 껍데기는 하나님이 받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옥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이것 자체를 패는 것이 잖아요. 때리는 거잖습니까? 여호와증인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어떻게 자기 자식을 팰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패느냐 이 말입니다. 왜요? 자기가 만들었으면서, 신이 만들어놓고는, 아니 우리가 만들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직접 만들어놓고, 왜 그것도 영원토록 형벌을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지옥은 없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이라는 말은 왜 하는거겠습니까? 겁주려고 하는 겁니다. 어이, 떽, 겁주려고. 정신 바짝 차리게 겁주는 것이란 겁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지옥 보내놓고 즐거워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옥 보내놓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것은 변태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열 명 낳았는데, 그중에 다섯 명은 천국 보내고, 다섯 명은 지옥보낸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나는 네가 지옥 갈 때마다 즐겁더라” 하면 완전히 변태 부모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럴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입니다. 천주교 신학이에요.

사랑의 하나님이 빛이 되시는 분이시기에 빛이 있는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몸속에 뭐가 피어오른다? 사랑의 감정이 피어 오른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이 피어오른다는 것은 우리들 속에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집어넣었다는 것이고, 자기가 집어넣은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을 저주 할 리는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전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생명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고, 신이 우리에게 부어준 것이기 때문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저주할실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주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혹시 이 땅에 살면서 성당에 자주 안 다녔다든지, 부모한테 불효했다는 것은 너무 철이 없어 그랬으니까 한번 기회를 더 주자는 입장에서 패자부활전을 줍니다. 그걸 천주교에서 연옥이라 합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연옥이 있는 천주교를 더 좋아합니다. 누구나 한 번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얼마나 하나님이 자비로우신지 말입니다. 이 땅에서 철 없이 함부로 굴었어도, 나중에 연옥 가서 만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옥이 상당히 힘이 듭니다. 하지만 연옥에서 고생 좀 해보면, 이렇게 고생되는 줄 몰랐다고 후회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 이제부터 잘하겠습니다. 잘할 거야? 잘할 겁니다. 이렇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달래서 기어이 좋은 나라에 가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자비가 우리의 마음에 속에 있다면, 이것은 신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의심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에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도 동일한 그런 마음의 사랑의 소유자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주교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누구 중심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미 범죄해서 자기 중심의 사고방식이 굳어진 인간아닙니까.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다 나 좋아라고 존재하는, 그러니까 나를 위한 하나님이지, 하나님을 위한 나는 아닌 상태인 것이지요. 세파트처럼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하고, 나에게 봉사하는 하나님으로 계셔주시는 것이 우리 죄진 적성에 딱 들어맞는 하나님상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 맞는지 맞춤복 같습니다. 우리 본성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않고 딱 들어맞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은, 인간의 어떤 지혜로도 캐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듣고 싶어도 추방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듣고자 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알고자해도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1:17-20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해 주시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예상 밖의 소식을 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한 것은 사람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며, 오직 성령의 나타나신 능력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철저하게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그 무엇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고전 2:4-5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사야에 보면, 누가 알았으리요, 누가 믿었으리요. 아무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비밀한 것이란 겁니다. 하나님의 진짜 본 뜻은 이미 인류 전체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상 왜곡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든 뭐든 자기 앞에 등장하는 무엇이든 딱 자기 좋아라하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왜곡해서 수용합니다. 인간은 기껏 그것 밖에 안되는 존재입니다. 나만 좋으면 그걸로 끝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그게 아니잖아” 하는 식으로 등장하십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엉뚱합니다. 우리들이 왜곡되이 수용한 그런 하나님상을 온전히 비껴가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 한번 봅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모양을 만들고” 맞지요. 여러분 맞지요. 여기서 누구의 형상입니까? 여기 우리는 누굴 말합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누군 빠집니까? 사람은 빠지지요. 그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사람이 관여할 수 없지요. 처음부터 관여가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형상대로’ 라는 말이 빠져서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한번 봅시다. 갑자기 어려워져 버렸는데. 처음부터 ‘우리의 형상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이 되었다면, 인간 속에 뭐가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겠지요. 내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면 진흙 그 자체가 남아 있잖아요.

진흙으로 컵을 만들었다하면, 컵이 있다는 말은 그 안에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진흙이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으면, 인간이 있다는 말은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인간 자체가 뭐란 말이죠?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 되잖아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이말입니다.

그게 저는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왜 그렇냐 하면,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할 때 여기에 뭐가 들어갑니까? ‘우리의 형상’이 들어갑니다. 우린 누굽니까? 인간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시죠. ‘우리’라는 표현 속에는 인간이 포함 안 됩니다. 누구 뿐입니까? 하나님 자기들 밖에 없어요. 하나님 자기들의 형상입니다. 인간인 우리는 빠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무슨 형상입니까? 죄 짓고 난 뒤에 우리의 형상은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무슨 형상입니까? 물체의 형상이지요. 어떤 물체입니까? 그 물체를 한 자로 하면 바로 ‘흙’입니다.

“목사님, 저 흙 아닌데요.” 누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 팔십년 기다려 보겠습니다. 흙 되는지 안 되는지. 흙, 맞습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름도 아예 흙으로 지었습니다. 날 때부터 흙으로 지었습니다. 감히 흙으로 된 형상인 주제에 어디서 우리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그렇게 깝죽대느냐 말입니다. 기가 찰 일 아닙니까. 기가 찰 노릇이죠.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형상은 골로새서 1장 16절에도 나오듯이 누구 밖에 안 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라는 성자님 자체를 가지고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에는 성자 예수님, 구약에는 하나님의 형상. 그럼 목사님, 우리는 뭡니까? 우린 죄 짓고 아담의 형상이죠. 아담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흙입니다. 흙의 형상이에요. 우리는 흙의 형상입니다. 이게 창세기 5장에 나옵니다.

창 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오해하기를, 물론 죄 짓고 난 뒤에 오해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니깐 마치 하나님을 물체로 봐서 물체로 물체 만들면 당연히 물체가 나오는 것으로 여긴다 이 말입니다. 주신 물체와 남겨진 물체가 일치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여러분, 수제비 안 끓여봤습니까? 덩어리 수제비하고 뚝뚝 끊어지는 수제비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수제비 밀가루 덩어리하고 떨어진 밀가루 하고 다른 겁니까, 같은 겁니까? 같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죄 짓고 난 뒤에 창세기 1장을 들여다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늘어져서 인간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있다는 건 뭐냐? 하나님 형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원장이셨던 김 장로라는 사람이 이렇게 했습니다. 불신자들 교육시키면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기로 거울을 가져와서는 그 속에 비친 얼굴을 보이며, 이게 하나님 형상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5절에 그렇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강제로 거기 입소시켜서 훈련을 받으면서 들은 것입니다.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오지요. 그것은 흙의 형상이 되기 직전의 모습이죠. 해골이 되기 직전의 모습이에요.

우리의 모습은 전도서에 나옵니다. 네 모습을 알려면 결혼식에 가지 말고 잔칫집 가지 말고 어디 가라 했습니까? 초상집에 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네 모습이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초상집에 돈 받는 사람 말고 관 속에 누워있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나란히 같이 포개 누워 보세요. 푹신하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모습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몇 년, 몇 십 년만 지나면 우린 눕습니다. 물론 타의에 의해서 눕지만. 저는 기증했습니다만, 기증하든 뭐든 불 태워지겠지만 말입니다.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전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그렇게 없어집니다. 그러니 흙에 미련 둘 필요 없지 않습니까? 조금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제대 날짜 가깝다는게 얼마나 좋습니까? 사도 바울은 죽는게 좋을 뿐만 아니라, 죽는다는 것이 삶의 용기와 삶의 희망을 준다고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떠난다는 게, 늘 살지 않는다는 게 자기가 사는 하나의 보람이었습니다. 이미 하늘에 속한 형상이기에 말입니다.

다같이 성경 한번 봅시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다같이 읽어 봅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 다음에 44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맞지요? 이렇게 나오잖습니까?

현재의 몸은 교체될 대상입니다. 이게 고물입니다. 이게 중고란 말입니다. 앞으로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더 중고 될 겁니다. 서서히 온 몸이 안 아픈데 없을 거예요. 머리 훌러덩 다 빠질 겁니다. 남자나 여자나 머리 다 빠집니다. 발모제 뿌려도 안됩니다. 다 빠집니다. 점차 흙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지금 연세 많으신 분들이 제일 괴로워 하시는게 뭐냐 하면, 변한다는 겁니다. “왜 나는 이십대로 그냥 못 있는거지?” 이걸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 겁니다. 잡아당겨도 안 되고, 부셔도 안 되고 왜 나란 놈은 가만있질 못하느냐 말이죠. 왜 자꾸 안 좋은 쪽으로 변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자기 혼자 안 변하면 모르지만 다 같이 변하니까 할 말은 없지만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보면 은근히 화가 나는 것이 나도 저때는 예뻤다는 기억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지금은 그때 그 자리에 고정되지 못하체, 이렇게 변했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나로 하여금 이십대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일반인들에게는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예인들에게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변하는 것에 돈이 왔다 갔다 하니까요. 나이 사십, 오십 되면 옛날 예뻤던 유지인이 나와도 지금 젊은 애들 막 반대할 거예요. 어디 아줌마가 나와서 이러냐는 것이죠. 난리날 겁니다. 이게 돈과 직결된 문제에요.

왜 나는 지금 이 십대가 아니고 사십 대냐고 원망을 하죠. 하지만 육십 대가 가만히 있질 않습니다. 사십 대만 돼도 좋겠다는 것이죠. 그 정도만 돼도 뭐든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육십 뒤에 또 있지요. 뒤에서 호통을 치는 팔십 대가 있습니다. 이분들은 육십 정도면 청춘이라고 하실 겁니다. 그것도 늙었다고 투덜되냐고 할 것이란 말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육십 대 같으면 추억이나 없지요. 그놈의 추억과 기억은 왜 그렇게 나는지. 하여튼 시월 달만 되면 생각나는 것이, ‘시월의~ 마지막~ 밤을’이라는 이용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그 노래만 나오면 그 노래 나올 때 누굴 사귀었더라, 그 노래 나올 때 뭐하고 있었더라, 또 그렇고 그런 기억들이 살아는 거예요. 추억이 사람을 우울증 걸리게 합니다. 괜히 남자들 낙엽 떨어지면 깃 딱 세우고 혼자 돌아다니다 바람이나 피우고 말이죠. 분위기 잡는다고 괜찮은 카페에 앉아서 괜히 우울해지고 말입니다. 그게 다 추억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이 뭐냐? 한 마디로 기억이다’라고 햇습니다. 사람은 기억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화가 나는 줄 아십니까?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비교가 되니까 생겨나는 겁니다. 그 놈의 기억이 나를 비교하게 만듭니다. 현재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행복해 하지 못하게 하고, 과거와 견주어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있다는 이유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불행해지고 눈물나고 우울해지고 괜히 술 한잔 더 먹게 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정을 아십니다. 변해야 된다는 거예요. 왜? 큰 것 때문에. 고린도후서 4장 45-48절을 봅시다.

고전 15:45-48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고, 위치를 바꿔버렸습니다. 흙에 속한 형상이 형상이라고 우기던 인간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주여, 이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창세기 1장 25절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닌데.” “그럼 어디 있습니까?” “하늘에 있는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흙에 속한 형상에서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위치를 바꾸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흘 동안 직접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인간이 가는 코스, 사실은 전체 인간이 아니고, 성도지만 성도가 가는 코스를 첫 열매로써 미리 시범조로 보여주신 겁니다. 그걸 모델하우스라 하지요. 모델하우스 보고 내 살 길도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코스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가는 코스란 말입니다. 육신으로 왔기에 육신 때문에 죽으셨다면, 동시에 우리도 육신으로 왔기에 육신 때문에 죽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육신에서 어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그 약속을 믿는 자도 주와 함께 더불어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함께 살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흙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야기가 안 됩니다. 이 이야기하려고 구약 창세기 1장부터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 앉혀 놓으신 것입니다. 부활이 뭔지, 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뤄야 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배경조로 임시방편적이지만 창세기를 우리보고 이야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형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가 지음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기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또는 “나를 왜 죽이십니까?” 라는 말조차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왜 지옥을 만드십니까?” 라고 말할 처지도 못됩니다. 그 소관은 처음부터 하나님, 세분이 쏙닥쏙닥, 수근수근 당신들끼리 일을 하자는 계획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좀 엿듣자 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회합에 우리가 끼어들 수 없는 이유는 또 나옵니다. 창세기 3장 22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 말씀 이후를 보면 동산의 그 사람을 내 보냅니다. 내어보낸다는 말은 누구는 남고, 누구는 쫓아낸다는 말씀인가요? 우리는 남는데, 누군 쫓겨난다는 것입니까? 선악을 아는 일에 합세된 그 인간은 내쫓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일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몰랐어야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그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인간입니다. 선과 악을 안다는 자체가 건방진 것입니다. 감당치도 못하면서 알아버린 겁니다. 감당할 기회를 얻은 게 아니라, 감당 못할 기회를 얻어서 감당할 못할 지경에 빠진 겁니다. 마귀는 그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선악을 알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치밀어 오르는 것은 아무리 착해도 악이 나를 앞서 질주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괴로운 것은 그 속에서 선과 악의 충돌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면 괴로울 일도 없습니다. 사람이 죄라고 느끼기 때문에 죄책을 느낍니다. 참, 교묘하지요. 사람이 자기 죄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때부터 죄가 주는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옛날 저희 집이 소위 양반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혀 양반하고 상관없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우겼어요. “우린 양반 집안이다. 경주 이씨 양반 집안이다.” 이렇게 우겨서 우린 정말 양반인 줄 알았습니다. “양반 같으면 양반에 걸 맞는 행동해라. 그게 뭐냐? 문을 여닫을 때 절대로 여자나 남자나 엉덩이를 비추면 안 되고, 신발을 벗어 놓을 때는 돌아서서 나란히 이렇게 놓아야 된다.” 철저하게 이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어른들에게 잘 보이려고 어른이 있으면 신발을 벗어 놓아야 하는 방식대로 하고, 문도 그렇게 여닫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제 행동에 만족하지 못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두 개를 지키면 백점이 되어서 기분 나쁜 법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네 번째 임무를 주셨는데, 이것은 권위문제였습니다. 행동방식을 따라서 그렇게 완벽하게 한 것이 오히려 임무를 주신 분의 권위에 도전하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시달렸습니다. 저도 한 완벽 하는데. 누가 이기나 시합을 한 겁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어느 정도 완벽한지를 두고 보자는 식이셨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힘든 과제를 주셨고, 전 그것을 따라 붙인다고 애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그렇게 성장하다가 다른 집에 가보니 문 열 때 엉덩이를 보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러나 엉덩이를 보여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우리 집에 오면 저히 할아버지는 호통을 치셨습니다. “이 집이 어떤 집안인데 엉덩이를 어른 앞에서 보인다 말이냐.” 이렇게 막 호통을 치시고,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자기 집에 가서도 그것이 기억이 나겠지요. 뭐?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주셨다는 말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가 평소부터 선악구조 속에 있었으면서도, 무엇이 죄인 줄 몰랐던 것을, 율법의 가입됨을 통해서 죄책이 쫙쫙 늘어나게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신겁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죽는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육십 넘은 분들에게는 죽는 이야기가 실감이 나죠. 제가 아침마다 새벽마다 산에 산책하는데 산책하면 전부다 저보다 연세 많은 육십 대, 칠십 대 노인네들 입니다. 새벽 다섯 시에 경쟁하듯이 어떤 사람은 네 시에 일어나 경쟁합니다. 대화가 뭐냐 하면, “걔 있잖아. 옆 동 319호. 링거 맞고 있단다.” “얼마 가겠노.” 어느 한의원 가면 .... 전부다 죽는 이야기, 아픈 이야기 뿐입니다. 화제가. 그게 죽음에 가깝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십대, 이십대는, 이번에 프로야구 우승팀이 어딘지, 누구 애인의 멋있다든지, 전부 다 스포츠 이야기, 연애이야기 밖에 안 합니다. 죽음 하곤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죽는다고 하면, “제가 왜 죽어요. 제가 뭔 나쁜 짓 했다고. 제가 왜 죽어요. 제가 얼마나 착한데.” 아직까지 인생을 덜 살아서 자기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 감을 못잡습니다. 인생의 진짜 맛을 보질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애들은 불의를 보고 못 참습니다. 차간에서 휴대폰 크게 해도 못 참고, 플랫폼에서 담배 피워도 못 참는 것입니다. 누구 이야기냐 하면, 제 이야기입니다. 도저히 아직 어린애라서 못 참습니다. 그런데 연세 많으면, “뭘 해도 그럴 나이다. 그럴 수도 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교회에 너무 순진한 여자분이 계셨어요. 같은 연배의 남자분이 약간의 호감이 있어서 약간 으슥한데 가서 손을 잡았답니다. 그런데 그 여자 분이 신고했어요. 치한이라고. 경찰서에 붙들려갔습니다. 취조 당했어요. 그 여자 분은 성장과정에서 그런 게 용납이 안 되는 그런 집안에 태어난 겁니다. 어떻게 외간 남자가 내 손을 만지느냐 말이죠. 왜 음산한 곳에 몰아넣은 의도가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 여자 분도 상처를 많이 받았지요.

만약에 그 여자 분이 팔십 일곱이고 남자분이 구십이라면 경찰 신고 안합니다. 손을 잡든, 으슥한 곳에 가자고 하든 니 마음대로 해라 이럴 것입니다. 순진한 그 여자분은 아직도 인생의 때가 덜 묻어서 그 천사 같은 순수함을 자력으로 유지하려는 하는 겁니다. 나이 드신 여자분이라면, 그저 같이 논다는 수준이지 그걸 심각하게 생각 안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부부간에 살아봐야, 살 때는 내 잘 났니 너 잘났니 하지만 살아보면 니 꼬라지나 내 꼬라지나 똑같다는걸 알게 됩니다. 못나기는 둘이 똑같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살라고 똑같은 인간 둘을 붙여 놓으신 겁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춰버리면, 이걸 사랑이라 합시다. 이 사랑으로 상대방을 사랑해 버리면 자아가 안 보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게 전세방인지 사글세인지 보이질 않아요. 그대 안에 내 있고, 내 안에 그대 있다는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당신만 있다면 지금 우리가 하루 한 끼만 먹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이게 육 개월 갑니다. 도파민의 작용이 기간이 육 개월입니다.

육 개월이 지나면 그 다음엔 소유로 바뀝니다. “저 인간하고 결혼한 뒤에 내게 생긴 이익이 뭐지?” 드디어 자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아가 생기면, “저 인간을 만난 것이 내게 얼마나 이익 되었지?” 그걸 계산하게 됩니다. 그러면 슬쩍 부아가 나거든요. 부아가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보상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보상을 제 때 안 해 주니까 밉지요. 미우면 아예 찢어지는 겁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지요.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아요. 자기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가 있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나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고 마입니다.

이게 어디 나오죠? 아가서에 나옵니다. 아가서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뿜어내는 그 사랑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게 핵심입니다. 그야말로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 사랑을 계속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답은 이미 독자적인 소유의식이 생겨버렸다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소유화된 결과인 것입니다. “너만 하나님의 형상인가, 나는 아닌가?”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나도 하나님의 형상 맞는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예수여, 하나님이여! 당신이 만든 이 형상을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비롭다면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 달라“는 식인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창세기 2장으로 가 봅시다. 여기에 에덴동산이 나옵니다. 에덴동산이 왜 있습니까? 에덴동산의 뜻이 ‘완벽하게 즐거운 동산’입니다. 완벽하게 즐거운 낙원이란 말입니다.

근데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마귀가 침투하는 완벽한 낙원이 있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또한 그 곳에서 타락했다는 것은 타락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말인데, 이것을 완벽한 낙원이라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질문의 당사들이 모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 짓고 난 뒤에 생겨난 자신들의 ‘완전’ 개념과 하나님의 ‘완전’개념을 혼동한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개념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 개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완전’이라는 말은,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은혜가 개입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봅니다.

좀 어려운 눈치신데, 부연하자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죄 짓고 난 이후의 인간의 ‘완전’이라는 개념은 자기가 미흡하다는 차원에서 야기된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가 다 아는 내용입니다. 본인은 물론이구요. 그러니까 이 미흡함이란 것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해주는 이것이 바로 ‘완전하다’는 개념의 본 뜻이란 것입니다.

이런 왜곡된 ‘완전’개념들이 왜 나오느냐 하면, 나라는 인간으로부터 이것을 확대하고 확대해서 도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완전’개념에 근거해서 신을 추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이시여, 완전은 내가 원하는 완전이 있어야 완전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신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그 신에다 완전개념을 뒤집어 씌워 놓은 것입니다. 이런 연장선에서 나온 ‘완전’개념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심지어 선악과나무 위에 철조망을 쳐서라도 안 따먹도록 해줘야 한다는게 ‘완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그 미흡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메워 보려는 그런 심보, 욕망에서 나온 가짜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진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진짜 하나님이 예수님이시라면, 우리를 대표하는 예수님께서 은혜로 그냥 주신 것만 있어도 완전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증인은 그것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완전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완전성에는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됩니까? 바로 지옥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뭐가 있어야 됩니까? 심판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죄가 있어야 됩니다. 심판이 없는 완전은 예수님의 완전성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심판이나, 지옥, 그리고 저주가 있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받은 사람들이 은혜로, 사랑으로 구원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랑받지 않은, 그러니까 저주받은 반대편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혜로 구원받은 쪽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입니다. 한쪽은 완전히 미워하기로 작정하고, 한쪽은 사랑받기로 작정했을 때 그 사랑은 완전히 은혜로만 주어진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완전성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신은 완전치 못한 신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신이시라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저주가 없어야 되며, 지옥도 없어야 되고, 당연히 심판도 없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이 생각한 완전한 신의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철학적 신입니다.

그렇다면 그 철학적 인간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신과 완전한 신은 어떤 차이를 통해 나타날까요? 바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준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알려준 그 언약의 내용에 의해서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조금씩 드러나는 그 모습을 에덴동산에서 두 가지 나무를 기초로 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완전한 동산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마귀가 침투해서는 안 된다. 선악과를 못 따먹도록 막아서야 했다.”는 그런 개념은 잘못된 개념입니다. 은혜로 주신 선악과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선악을 아는 지식은 네가 몰라도 된다. 선악을 몰라도 되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람이라는 존재는 선악을 몰라도 되는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또 그런 인간을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인간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옥 보내버립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보기에 심히 좋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완벽한 나라에 삽니다. 어느 정도 완벽 하느냐 하면, 선악을 몰라도 될 만큼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나무를 따먹어 영생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 하에서 인간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뭐는 빠지는 것입니까? 선악은 몰라도 된다는 게 빠집니다. 생명나무 마음대로 따먹어도 된다는 게 요한계시록 22장입니다. 천국입니다. 천국에는 생명나무가 달마다 때마다 열립니다. 열두 과실이 열립니다. 뭐는 없습니까? 선악나무는 거긴 없는 것입니다.

계 22:1-2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것을 좀 더 설명하자면, 선악을 몰라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선악을 몰랐을 때만 완전하고, 완벽하며, 은혜롭다는 것입니다. 또한 “따먹지 말라”하는 그것과 “선악을 알아선 안 된다”는 그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을 완전히 분리하는 구분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와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할 때 무슨 조건을 겁니까? 네가 따먹으면 뭐가 된다 했습니까? 신이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신을 더 추가하기 위해서 마귀를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피조물이라면 무엇을 존중하는 것이 피조물다운 목적에 부합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을 존중할 때 그게 피조물이 피조물다운 목적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존중해 줄 때, 그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어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뭘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인간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선악을 아는 인간을 어떻게 하십니까? 창조 이전인 ‘흙’으로 되돌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흙’으로 되돌려 놓으시고는 완전히 배제시켜 버리십니다. 그러면 인간 만드는 작업은 누구만의 소관이 됩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소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은 것을 취소시키고, 생명나무를 확장시켜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나무가 주는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바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린 가만있었는데 말입니다.

생명의 빛이 비치매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생명이 우리에게 오므로 영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는 혈육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생명나무가 확장되어서 우리를 눌러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이 자신의 힘이라거나, 천당을 자신의 힘으로 갈 수 있다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자신이 힘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즘 목사들을 보면,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십자가 은혜 구원받는 것을 목사가 거부하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목사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처음부터 생명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덮쳐옴으로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없이, 자신의 열심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외우고, 목사가 되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의 선악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악 중에서도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 믿어주는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예수 잘 믿어주는 선, 이런 입장에서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예수 잘 믿어 주는 선이 어디 있습니까? 선과 악을 안다는 자체가 문제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한 분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 밖에 없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마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태복음에서는 선한 분이 하나님 아버지뿐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감히 선을 논하느냐는 것입니다. 선을 논한다는 자체가 이미 “네 힘으로 구원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들어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이상 인간은 폐기처분돼야 할 대상이지, 거기서 꿈틀꿈틀 움직여서 구원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십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바로 그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대상’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런 사실을 모르고 베드로는 뭐라 합니까?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베드로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기도해 주시지 않으면 베드로는 마귀의 시험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백날 기도해 봤자 소용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 우편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들은 구원의 길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눅 22:31-34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심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언제 알 수 있습니까? 기도 안 할 때가 아닙니다. 집안에 문제가 있어서 사십일 동안 철야기도 했는데 응답 안 될 때 그때 비로소 하는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안 해 본 사람은 주께서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잘 못 느끼게 됩니다.

실컷 철야하고, 밥 먹을 마음이 안 나서 금식했음에도 응답 된 게 하나도 없을 때 비로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은 은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내가 기도 열심히 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똑바로 보고 주의 생명나무를 왜 따로 빼돌려서 그 생명나무 자체 되시는 분의 공로로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형성되었는지를 알게 하시고, 이 모든 것이 값없는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완전임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완전을 추구 하지 말게 하옵시고, 완전하신 분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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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