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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울산강의(창세기1장a)자유게시판창세기

울산강의(창세기1장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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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강의(창세기1장a)

2006년11월 3일

창세기 1장

이근호 목사

창세기 1장의 이야기를 현대인들은 ‘환영’이라고 여깁니다. ‘환영’은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 ‘환영’을 상상이나, 자기 욕망에 의해서 매일같이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이렇게 되고 싶다는 것이 ‘환영’으로서 떠오릅니다. 그것이 하루 종일 자기를 괴롭히는 것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똑똑하고, 현명했습니다. 이런 환영거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단순했습니다. 현재처럼 복잡하질 않았습니다. 복잡하지 않으니 단순한 것입니다. 단순하다는 말은 계속해서 이게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자연세계에만 충실히 순응하면 그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거지, 그 이상 뭐가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연이 요구하는 대로 순응하면, 그대로 따라가면 그게 잘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살면, 만약에 그러니까 어둡구나. 자야겠군. 어!, 해가 떴네. 일어나자. 지금 이렇게 옛날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살아버리면, 지금은 못 삽니다. 왜 못 사느냐 하면, 지금은 무슨 시대입니까? 경쟁시대 아닙니까. 경쟁시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그야말로 이것은 유유자적하는 것입니다.

깊은 산골에서 달력도 없고,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는, 그저 계절의 변화만 느끼며 살 때는 자연스럽게 단순하게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근데 지금의 도시생활에서 아침에 일어나 뉴스 보십시오. 누구나 다 대통령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통령만 알아도 될 일을 온 국민이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다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열아홉 살 먹은 여대생이 산후조리원 가서 낙태한 것까지 다 나오잖아요. 그렇게 되면 산부인과 관리체계까지 다 생각해야 돼요. 골라서 정보를 습득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걸 모르게 되면, 직장에 나가서 왕따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코미디 유행어 정도만 몰라도, 그 조직사회에서 사람 무시당하기 일 아니거든요. '운전해. 어서.' 그거 이야기할 때 안 웃어버리면, 그거는 사회에서 못 살 정도다 이 말입니다.

결국 이것이 뭐냐 하면, 옛날에는 사람이 자연과 관계하며 살면 되었지만, 지금은 누구와 경쟁하냐 하면,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경쟁을 해야 합니다. 그 경쟁상태가 지금의 현실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시대는 자연적으로 뭘 잊어야 되느냐 하면, 자연을 잊어버려야 되고, 자연을 잊은 만큼 빈 자리를 뭐로 채워야 하느냐 하면, 자신의 야심에서 나온 상상력, 흔히 이걸 비전이라고 합니다. 상상력, 꿈, 목표량, 실적, 이런 걸로 대체해서 살아야 하는 시대란 것이죠.

그럼 자연에 대한 연구는 누가 합니까? 여기서 전문담당자가 등장합니다. 자연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자연학자라고 하는데, 자연과학자들이 자기 분야에 따라서 물리 같으면 물리, 화학 같으면 화학, 생물 같으면 생물, 그 분야 따라서 연구하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분야에 또 연구를 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강의 첫 시간부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경을 볼 때 옛날 사람이 성경 보는 것 하고, 지금 사람들이 보는 것 하고 다르다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늘 대하던 그 자연세계에 대해서 그대로 이야기해주기 때문입니다. “아, 믿어야 될 건데.” 이렇게 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읽어보면 다 끄덕이게 되는 겁니다. 물론 창세기 1장 믿는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지만. 하여튼 옛날 사람에겐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현대 21세기의 청소년들이나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 책을 읽어버리면 단번에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자연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그것은 내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고, 생물학 하는 사람들, 즉 그 분야에 대해서 연구한 사람의 권위를 인정해주고 그 사람한테 조언을 듣는다면 창세기 1장 읽는 것을 대체,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창세기 1장에서 하는 이야기를 믿으면 되는데, 굳이 “저, 생물학 전공이시죠.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물학 전공한 사람이,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전문가이시잖아요. 전문가. 이게 진화론적으로 맞는지 확인해 주세요. 이걸 설명해 주세요. 창세기 1장이 왜 틀렸는지, 왜 우리가 배우는 과학하고 다른지 설명해 주세요. 이렇게 나오더란 말입니다.

본인이 성경을 보고 어떻게 느꼈느냐 라든지, 아니면 본인이 성경을 보고 이걸 인정하느냐 않느냐 그렇게 나가는 게 아니라, 자연과학 담당자가 이 창세기 1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 자연과학자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이걸 받아 들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낮에 영남대병원 1009호실인가에 병문안을 갔습니다. 말이 병문안이지, 사실은 병원에서 포기한 사람입니다. 얼굴부터 손끝까지 노랗게 된 사람입니다. 나이가 사십 다섯인가, 사십 셋인가 하는 남자였습니다. 간암이 말기 중에 말기에요. 병원에서 하는 말이, 이식도하지 마세요. 안 됩니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투석도 포기한 상태입니다. 지금은 의식이 있어서 겨우 말은 해요. 마지막 가는 길인데, 그 사람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입니다. 누님 되시는 분이 우리교회 나와서, 마지막 가는 길에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해서 그 누님이 저를 불러서 갔습니다.

가서 제가 제일 먼저 끄집어낸 게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 정 선생님께서 그저 직장생활 열심히 한 분아닙니까. 물론 자기가 간 나빠도 그까짓 것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말입니다. 젊은 나이에 직장생활 하다보면 폭음하고, 담배 피우고 뭐, 돈벌이 한다고 여기저기 뛰다니며 영업하다보면 그런 것 다 해야 되잖아요. 나이가 사십 셋인가 그쯤 됐을 겁니다. 이제 몇 개월 안 남았습니다. 일 개월 안 갈 것 같아요. 제 생각엔. 그냥 청춘 끝나는 겁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사실 때 내 몸이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느냐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이야기했어요. 하나님, 이 몸은 아픈 몸이든 성한 몸이든 이 몸을 만드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렇게 물으니까 대번에 인정을 했어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평소 그 사람은 교회도 잘 안 다닌 사람이고, 평소에는 하나의 가장으로써 돈벌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직장 출근하고, 돈버는 그것만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내 몸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십 셋의 나이에 이렇게 내일 모레 곧 갈 상태가 되고보니까 비로소 자기 자신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생물학자에게 물을 게 아니고 말입니다. 이 성경말씀과 나 사이에 목사도 젖혀버려야 됩니다. 목사도 중간에 끼지 말고 비켜나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인 창세기와 내일인지 모레인지 오락가락하는 내 병든 몸과 직접 부딪치는 거예요. 직접 부딪쳐서, 과연 이 말씀 맞나? 과연 나는 하나님이 만들었나? 이제사 진지한 그 질문을 그 분에게 처음으로 던진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뭘 했느냐 하면, 히브리서 9장을 이야기해줬습니다.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확정된 일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 대목을 가지고 마지막 가는 그분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확정된 것이기 때문에 남보다 더 죄 져서 죽는 게 아니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는 것은 확정되어 있다는 그걸 인정하십니까?” 그러니까 인정을 해요. 왜냐하면 지금은 돈 버는 시간이 아니잖습니까. 지금은 기력도 없고, 이렇게 링거를 맞고 죽는 입장이기 때문에 달리 보이는 게 없어요. 하나님 말씀이나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은 확정된 것이고,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이제 인정하는 거예요. 인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예수님 두 번째 나타나시는데 그거는 뭐냐? 예수님이 대신해서 죄를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죄와 완전히 상관없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두 번째 구름 타고 오십니다. 그걸 인정하십니까? 인정한다는 거예요. 진작 왜 인정 안 했어요. 진작. 진작 왜 인정 안 했어요. 진작.

창세기를 우리가 공부하다보면 현대과학과 현대적 인식이 이 창세기하고 우리를 완전히 두터운 안개막으로 갈라놨습니다. 스크린을 쳐 놨어요. 이제, 그걸 우리가 선풍기를 틀든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창세기와 나 사이에 있던 그런 21세기 문명을 화~악 다 날려버리고 옛날 사람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자연으로 돌아가 볼 때에, 자연세계에 있는 나의 물컹물컹한 이 몸 덩어리부터 해서 손, 눈, 코, 이것을 누가 만들었다고요? 정답은 성경대로 하면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이야기 끝난 거예요. 바빠서 교회 못 나왔느니, 내가 죽을 때 나올게 그런 것은 전부다 핑계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창세기, 성경책이 내 책꽂이에 꽂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럽게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면서 우리는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창세기에 나오는 그 몸 가지고 살면서도 말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그 몸 가지고 흙으로 돌아갈 이 몸 가지고 살면서도 창세기하고 아무 상관없다고 살잖습니까. 낯두껍게 말입니다. 이렇게.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설명해야 돼겠습니다. 한 번 더 들어도 괜찮겠지요. 이유가 뭐냐 하면, 옛날 같으면 단순했기 때문에, 단순 뒤에 하나 더 붙인다면 단순무식이죠. 단순 무식했기 때문에 자연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심지어 창세기 안 들여다봐도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 보면 조물주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옵니다. 교회 안 다니는 할머니한테서도 조물주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왔고 말이죠. 그렇게 거기에 같이 살아가는 그것이 자연스런 인간다운 삶이라 했습니다.

근데 이게 경쟁이 되니까 자연만 쳐다보다가는 굶어죽잖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자연을 버리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를 버리는 것이죠. 내가 누구냐 그런 것 생각할 틈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그런 것 생각할 틈도 없다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라는 그런것 버리고 남하고 경쟁하기 위해서 복잡한 세계에 뛰어든 것입니다. 단순무식이 아닙니다. 이제는 복잡 유식해야 됩니다. 이젠 정보세계입니다. 복잡 유식하다보니까 세상에 자기 밥벌이 되는 것만 전공하고, 나머지 전공은 다른 전공자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신 몸을 가지고 살면 이게 자연스러운데, 몸은 하나님이 주신 건데 머리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나의 환영, 환상이란 말입니다. 또는 허망한 여러 가지의 상상력. 하나님이 주신 몸을 가지고 내 욕망이 자아낸 그 허망한 것을 따라가려 하니까 거기서 괴리현상이 일어나요. 괴리현상이 일어나니까 집에 오면 퍼드러져서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것, 또는 회사 끝나고 난 뒤 일차 가고 이차 가고 술 먹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냥 뭔가 모르지만 자연스런 내 몸과 남한테 안지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먹고 산다는 이러한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그걸 매우기 위해서 나를 쾌락과 감각에다 내 몸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져버렸던 것입니다. 일차, 이차, 삼차 가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술은 술대로 먹다가 나이 사십 셋에 노랗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손톱도 그렇구요.

전신이 노랗게 되어서 마지막 순간에 우리교회의 이근호 목사라는 사람 불러다가 히브리서 말씀, 한번 죽는 건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마지막엔 심판이 있으리라는 그 이야기를 이제 처음 듣는 거예요. 이제 와서 처음 듣는거단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이 말씀드리는 것은 자기 환영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라는 겁니다. 중심을 잡아야 돼요. 중심이 있어야 됩니다. 토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아무리 속이고 싶어도 자기 몸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란 사실은 속이질 못할 것입니다.

제가 요새 유행하는 사극, 드라마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그 사극에 등장하는 개가 21세기 개하고 똑 같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저거다 이 말이죠. 개가 조선시대 개나, 조선시대가 아니죠. 주몽 시대니까 고구려 시대아닙니까. 고구려 시대 개나 지금 개가 동일하다면, 고구려 사람들 하고 오늘날 사람들하고 목욕탕 들어가면 구분이 되지 않을 것 아닙니까? 똑같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누가 누구한테 속아 넘어간 것입니까? 내가 입은 옷에 내가 속아 넘어가는 것 아닙니까. 발전이라든지, 번영이라든지, 진보라는 이런 것들은 환상이고 환영이에요. 고구려 시대 때 그 개가 고구려 시대 개는 아니지. 물론 세트장에 온 개가 요새 개 이지만.

고구려 시대 때 개나 지금 21세기 개나 동일하다면,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그때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목욕탕에서 만나보면 똑 같다는 것이며, 그것은 또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고구려 시대 때 하나님이나 지금 하나님이나 똑같다 이 말입니다.

고구려 사람도 구원 받으려면 십자가로 구원받아야 되고, 21세기에 사는 우리도 구원받으려면 카드 긁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옛날에는 엽전 줘서 구원받고 카드 긁어서 구원받는 그런게 아니고, 양쪽 다 예수님의 보혜사의 보혈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걸 로마서 5장에서는 하나로 묶어놨습니다. 그 모든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놨다는 말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취급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역사가 길게 길게 이어져도 아담 안에서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이란 인간을 만들어낸 그 규정 안에서 한 발자국도 그 후손들이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새끼 쳐도 아담 안에 있어요. 아담이라는 항아리 속을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런 식으로 다루셨다면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다루십니다. 그걸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슬퍼하거나 노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그렇 게 규정된 거예요. 이것을 내가 슬퍼하고 노하고 화낸다고 해서 변경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 즉, 아담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 사실에 기뻐해야 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방법도 세월이 22세기, 23세기가 되든 상관없이 똑같이 동일하게 공평하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기뻐해야 되는 겁니다.

창세기를 처음 대하면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환영이라는 나의 상상력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지 마시고, 선풍기를 틀든지 해서 그 안에 있는 안개 같은 것을 화~악 이렇게 날려 버리라는 것입니다. 드라이아이스 같은 희미한 것들을 날려 보내면, 비로소 창세기가 똑바로 보이게 됩니다. 똑바로 보이면 내가 비록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창조 때 그 사람으로, 그때 그 시절로 성경이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 창세기 1장의 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 세우시는 겁니다.

그런데 정판옥 목사님, 왜 안 오시죠?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말입니다.

성경을 볼 때는 그때 그 장소로 그 역사 속으로 뛰어 들어 가야 돼요. 이러한 해석법을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가다머란 사람이 이런 해석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의 지평'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 역사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비록 21세기, 2006년도 11월 달이라 하더라도 창세기를 폈다 하면 처음 빛을 창조했던 그때 그 시절. 혹시 이중에 누가 간암 걸리고 누가 혹시 당뇨 걸려서 노랗게 뜨는 한이 있어도, 창세기 앞에서는 그것조차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를 속이는 것 아닙니까. 천만에 말씀. 속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들의 본질에 더 가까워지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대꾸하고 싶습니다. 진짜 본질은 성경책에 있는데, 우리는 늘상 남 따라가다 환영 속에 있는 것을 나의 본질인 줄로 착각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심신은 지칠대로 지치고, 술이란 술은 다 퍼마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오히려 자기의 본모습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돌아가 보세요. 간암에 걸리든지, 당뇨에 걸리든지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 보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저나 여러분한테 행복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만든 상상, 환영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몸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몸과 육체의 운명이 우리가 상상한 운명과 안 맡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한 것입니다. 바쁘신 것 알지만, 그러나 가끔씩은 자신의 본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귀한 시간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또 이상하게 여기 있으니까 목사 흉내 내서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하고 싶네요. 잘 안 해 보는 건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옛날 속으로 잠시 돌아가 봅시다. 돌아갔을 때 옛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빛으로 생각했어요. 이건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빛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에게는 전기가 없었거든요. 전기가 없어서 해만 지면 깜깜했습니다. 해만 지면 깜깜했기 때문에 깜깜한 시간이 그 만큼 길었습니다. 겨울 되면 더 길어지지 않습니까. 긴 어둠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낮의 환함, 즉 대낮의 환함을 그들은 신의 작품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어요. 얼마나 단순 무식합니까? 참, 그때 그 시절이 좋은 것 같아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따질 필요도 없이 낮만 되면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이 내뿜는 그 손길이 빛이라는 모습으로 자기 어깨 위에 얼굴 위에 쏟아지는 것이죠. 이용복이가 부른 노래 중에 '그 낯짝에 땡빛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얼굴에 햇빛이'하는 노래인데, 그 낯짝에 땡빛이 비친다는 것이죠. '눈을 감으면'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옛날에는 가로등도 없고 밤만 되면 자야 됩니다. 자야 될 시간에 그들에게 대낮처럼 빛이 있다는 것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이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옛날 종교치고 신을 부정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왜요? 빛은 어디서 왔겠느냐 이 말이죠. 빛은 어디서 왔습니까?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것은 둘째 치더라도 저 빛은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나와 대지를 살리기 위해서 빛을 빛의 속성으로 막 뿜어 준 거라 여겼습니다. 하늘에서 막 뿌려 주신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는 그런 망발은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햇빛이 늘 있으면 몰라도 밤이 되면 해가 없어지잖습니까. 없어졌다가도, 낮이 되면 다시 빛이 있거든요. 이것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죠. 우리 원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가지고 노는 다른 분이 이 우주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 때에, 그들은 빛을 통해서 의심 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잠깐 보도록 보겠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하면서 요한복음도 보고 로마서도 보고 하면서 왔다 갔다 할 겁니다. 그냥 창세기 보면 한 5분 보면 다 볼 건데 말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아까 제가 빛 이야기한 것 기억하시죠. 나중엔 빛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동양에서는 다섯 가지 요소지만 서양에서는 네 가지 요소입니다. 동양에는 다섯 가지 요소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있지요. 다섯 가지 요소 아닙니까? 나무하고 금속. 금요일 금속. 오늘 금속 날이네요. 어제는 나무 날이고. 목, 금. 이게 속성, 무극에서 태극, 음양으로 나가는 다섯 가지 요소입니다. 서양에선 네 가지입니다. 물, 불, 공기, 그리고 땅, 흙. 땅, 흙 같은 거니까. 네 가지 요소죠.

이것은 자기가 요청한게 아니라 그저 하나님이 그냥 주신 겁니다. 그냥 주신 건데, 로마서 1장에 보면,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절부터 항목이 나옵니다. 여기 항목 중에서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손 한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와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독과 수근수근함과 비방하는 것, 하나님 미워하는 것, 능욕하는 것, 교만한 것, 자랑하는 것, 악을 도모하는 것, 부모를 거역하는 것, 우매한 것, 배약하는 것, 무정한 것, 무자비한 것” 등 모두 스물두 가지입니다.

여기 스물두 가지 다 지키고 있는 사람, 누구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보세요. 여기 스물두 가지. 이 교회 성화 안 되었네. 큰 일 났다. 성화되었다는 사람들은, 성화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거 다 시켰다는데. 스물두 가지 이것을 말입니다. 이거 다 지킵니까? 간암 걸려야 되나? 이거.

지금 어떤 게 해결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잖습니까. 그게 뭐라고요? 빛이죠. 창세기 1장에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잖아요. 빛으로 알렸음에도, 우리가 그 빛을 보면서 신이 존재함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신이 싫어하는 또는 신이 원하지 않는 스물두 가지 이 범죄를 왜 우리는 계속해서 밖으로 분출시킬 수밖에 없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은 난감해 합니다. 이게 해소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는 하면서 신의 품성을 받았다면서 왜 천사가 되던지, 하나님이 되던지 뭔가 돼야 될 텐데, 이것은 고사하고 왜 스물두 가지나 되는 죄들이 나오냐는 것입니다.

제가 스물두 가지가 다 나온다 하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안 나오려고 애쓰는데 누가 건드리잖아요. 이러거든요. 건드리더라도 안 나와야죠. 옆에서 시비 걸더라도 그게 안 나와야지요. 빛이 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것 같으면 하나님 무서워서라도 안나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특히 이 대목.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건 족집게 아닙니까, 족집게.

교회 오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라고 하면서 교회 온 이후에 교회 나갈 때도 이제부터 하나님만 생각해야지 다짐하지만 그게 그렇됩니까?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나한테서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잘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없는 죄도 만들어내신다.” 야, 목사가 이거 알기까지 긴긴 세월 전하는 것 아닙니까. 신학교 갈 때는 신학교수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죄를 안 짓도록 막으시고, 안 짓도록 조치하십니다. 그랬는데 말이죠. 어느 신학자든 칼빈이든 뭐든 다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자기가 살아보니까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아예 죄인 되도록 작정을 했어요. 죄를 만들어내요. 만들어냅니다. 가만있는데 옆집 아줌마가 성질나게 합니다. 조용히 착하게 살라고 하는데 건들이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가지고 우리가 미처 예상치도 못한 죄를 만들어내는데 그렇게 내놓은 요리 가지 수가 스물두 가지에요. 스물두 가지의 아주 화려한 반찬이 꼭 전라도 음식 같아. 반찬이 수십 가지, 쫘~악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휘황찬란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없는 죄도 만들어내고, 이방인에게는 인간의 양심을 가지고 없는 죄도 만들어냅니다. 그게 로마서 2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차라리 안 태어나고 낙태한 놈이 훨씬 낫다고 합니다. 얼마나 부정적 발언을 하시는지요.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전도서 6:3『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태어나서 뭐 대통령했니, 국무총리했니 하지 말고, 안 태어난 그 놈 팔자가 최고 좋은 팔자라는 것입니다. 그게 제일 일등이고. 그 다음이 나자마자 죽는 놈, 그 놈이 이등이고. 삼등이 뭐냐? 살다 일찍 죽는 놈이 삼등이고. 제일 지지리 복도 없는 놈이 이 땅에 오래 사는 놈이란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의 소원이 주여, 죽여 주이소. 꼭 장희빈 같아. 죽여주옵소서. 이 죄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주께서는 택도 없다. 야야. 너, 써먹을 일이 많은데 왜 너를 죽여. 미안하다. 못 죽이겠다. 죽여주옵소서. 더 써먹어야겠다. 죽여주옵소서. 미안하다. 더 써먹어야 돼. 왜? 너 죽으면 처자식이 불쌍해. 애 지금 시집을 안 갔어. 너는 직장 더 다녀야겠어. 더 다녀서 돈 좀 벌어서 시집보내고 죽일게. 아직도 멀었어. 너 고생 더 해. 주여, 지금 안 죽으면 간암 걸립니다. 간암 걸려도 할 수 없다. 너는 더 살아야 돼.

지금 우리가 팔자에 없는 참, 더러운 팔자라서 지금 오래 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보험까지 들어서 건강보험까지 다 들어서 연금 들어서 지금 오래 살고 있어요.

순수하게 봅시다. 성경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성경이 무슨 취지로 이야기하는지 봅시다. 현재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깨끗함과 그리고 분명히 창세기에서 만들어놓은 우리 자신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밝혀줄게라는 것이 창세기 2장과 3장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이 있어야 됩니다. 보기에 심히 완벽했더라. 정말 좋았더라. 정말 에덴동산도 멋지고 하여튼 멋졌다. 너무너무 좋아서 이루 말할 수 없었더라. 그런데 너희들이 내 성질을 긁었구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1장에서 빛과 그 다음에 두 번째 날이 뭐지요? 궁창에 관한 하늘에 관한 거지요. 첫 번째 빛 만들기, 두 번째 하늘 만들기, 세 번째 땅 만들기 아닙니까? 땅과 바다 만들기 아닙니까? 첫 번째 뭐 만들기요? 빛 만들기. 쉽게 하라 하니까. 쉽고 깊게 하겠습니다. 첫 번째 빛 만들기, 그 다음에 하늘 만들기, 그 다음에 바다와 땅 만들기. 맞지요? 빛, 그 다음 두 번째 하늘, 세 번째 땅과 바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네 번째는 빛과 관련되어 있어요. 빛이 하나의 시발점이 됩니다. 시발점이 되었다는 말은 하늘과 땅이 빛에 예속이 되게 해요. 하늘도 땅도 바다도 빛에 의해서 묶이도록 그렇게 조치하십니다. 네 번째가 빛과 연관된 물건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다섯 번째, 여섯 번째가 이 지상에 있는 빛과 관련된 물체에 예속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빛에 관한 물체들이지요.

빛에 관한 물체의 예를 든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해와 달과 별이 있지요. 해와 달과 별에 이 다섯 번째, 여섯 번째가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체세계에서 빛이 우선으로 하고 있어요. 태양빛이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태양이 사라져 버리면 죽게 됩니다. 태양에너지가 없으면 다 죽습니다. 이것은 무얼 뜻하느냐 하면, 이 모든 구조가 빛 하나에 전부다, 그러니까 이, 삼, 사, 오, 육이 다 예속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창세기에서 부터 요한계시록 22장 까지를 보면, 이 중에 뭐만 남을까요? 달랑 하나만 남아요. 뭐만 남습니까? 빛만 남아요. 빛만 남고, 빛을 비추는 해와 달도 요한계시록 22장 천국에는 없습니다. 이걸로 환원돼버려요. 전부다. 빛만 남고 다 날아가 버립니다.

이것 하나만 달랑 남고 나머진 없어져버려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육적인 것은 전부다, 그러니까 물체적이고 육적인 것은 모두다 임시방편용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간암에 걸린 아저씨, 죽어야 돼요. 간암에 걸린 아저씨는 지금 고물하고 신품하고 교체하기 위해서 죽어야 됩니다. 이미 빛의 몸이 있는 이상은 태양에너지 때문에 살아가는 -태양에너지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피부 세포로 만들어진 이 육체는 사라져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장 10-11절에 나와요. 그게 임시방편용이라는 게 나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제가 창세기 하면서 신약과 연관을 시키겠습니다.

히 1:10-11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자, 10-11절을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은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표현이 뭐냐 하면, 이 모든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주님의 손으로 지은신 거라고 합니다. 주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이다는 말이죠.

지금 비타500이 있는데, 비타500보니까 광주 우 집사님 생각나네요. 비타500있는데 제가 이것을 여기 이렇게 놨습니다. 놓다가 손을 비타500에서 떼면 이제 비타500은 나하고 상관없이 되죠. 그죠? 주께서 만드신 비타500을 내가 계속 손에 쥐고 있습니다. 안 넘어지도록. 그러나 언젠가 손을 이 비타500에서 뗄 때가 되면 더 이상 여기에 미련 둘 필요도 없고 집착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손이 있는 이상은 비타500이 거기에 연연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비타500은 왜 있느냐? 손이 있음을 알리기 위한 증거물로서, 모형으로써 창조되어서 이 세상에 이 물질의 형태로 있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빛을 설명하기 위해서 빛에 예속된 물체가 등장했어요. 해와 달과 별입니다. 해와 달과 별은 빛이 영존하면 없어져야 됩니다. 계속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목사님, 창세기 1장이 왜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히브리서의 ‘주’라 하는 것은 주님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모형판으로 물체라는 재료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고 그걸 보시고, 참, 내가 보기에 좋구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육일째 되는 마지막 날에 누가 포함되지요? 사람이 포함됩니다. 만약에 사람이 죄를 안 지었으면, 이렇게 합니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의 손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간암 걸려서 얼굴 노랗게 된 것도, 주의 손이 저를 이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걸 통해서 주님께서는 네가 당뇨 걸리든지 간암 걸리든지 하여튼 너는 보기 심히 좋았다.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짓고 난 뒤에 이상하게도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나를 이렇게 일찍 죽게 하는거요? 내 청춘 돌려 주소. 청춘을 돌려달란 말이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이것은 주의 손을 모독한는 것이 되죠. 주의 손을 모독한는 것이 됩니다.

주의 손과 더불어 나 자신을 파악할 줄 알아야 되는데, 이게 죄 짓고 난 뒤에 “주의 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선악과 내 따먹어 버린다.”이렇게 된 거죠.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느냐 하면, 독자적인 노선으로 가다 보니까 빛을 가지고 빛에 예속된 것이 이게 자연스런 현실인데, 이 현실은 망각하고 마지막 육일 째 만든 자기 자신의 눈으로 전부다 빛과 하늘과 땅과 바다를 바라 보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 자연과학이 발달하는 거예요. 전부다 이렇습니다. 이걸 파악해야합니다.

빛의 관점에서 빛에 예속된 천지창조를 생각해야 되는데, 마지막에 태어난 막내면서도 마지막에 있으면서도 마지막 입장에서 거꾸로 자연세계를 자기입장에서 바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와야 될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도구로 전락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아, 이런 인간 잘라내기 위해서 주께서 재림하고 심판하고 십자가가 지셔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히브리서 같은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한다 하지만 사실 이만큼 강의 길어지면 또 앞에는 까먹습니다. 그래서 제가 간단히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그걸 가지고 친절한 금자씨.

옛날 사람들은 성경을 보든 자연을 보든 단순하게 봤어요. 단순하게 본 이유가 그때는 밤에전기가 없었어요. 전기가 없기 때문에 낮의 환한 그 빛이 어떻게 신의 속성과 능력인지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밤은 깜깜하거든요. 밤의 깜깜한 것과 너무나 대조된 빛의 환함을 통해서 신은 곧 빛이며 빛은 곧 하나님이다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싹튼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빛을 대낮에 주셨다. 이렇게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런 걸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중세 미학의 역사, 즉 중세 그림의 역사를 보게 되면 알 수 있습니다. 현대는 이상스럽게 형광등이 있고 가로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그림이 어둠침침하고, 오히려 중세 이전, 그러니까 중세나 옛날 시대 때의 그림을 보면 모든 색조가 그렇게 밝을 수가 없어요.

그건 뭐냐? 옛날엔 하나님 중심을 그림으로 그렸고, 요즘에 와서는 암울하고 우울한 자기 내부의 진실에다 세상을 비추어서 그 비춘 느낌에다 그림을 그리니까 그런 현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건 조금 전에는 이야기 안한 것죠. 새로 하면 또 새로운 게 나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은 빛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굉장히 단순했지요. 단순했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을 보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 의심할 바가 없었습니다. 왜요? 모든 것이 아침에 눈만 뜨면 다 있는 것이니까요. 바다, 하늘, 땅, 빛, 하늘의 별, 해, 달. 저거 하나님이 만드신 거야. 당연하지, 당연하지. 그걸 의심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오늘날에는 자연만 바라보고서는 밥 못 먹고 살지요. 경쟁에 나서야 되잖아요. 경쟁에 나서려면 뭘 해야 된다고 했습니까? 나만이 갖고 있는 생각을 주특기로 발휘해야 돼요. 자기만의 상상을 해야 되고, 자기만의 꿈을 꿔야 됩니다. 환영을 자꾸 자기만의 야망, 그 꿈이라는 게 야망에서 나오는데 자기만의 욕심과 야망에서 만들어낸 어떤 환상 같은 것을 일구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일구어내다 보니까 뭘 잊어버립니까? 해와 달과 별 보기를 잊어버렸어요. 자기 야망과 욕심을 이루려다보니까 전기가 발명되고, 전기가 발명되니까 이거는 밤중에도 방직공장에는 작업을 해야 됩니다. 밤새도록 잔업까지 해야 되요. 밤새도록 공장 돌린다고요. 화력발전소는 또 어떻습니까. 24시간 가동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해를 보고, 달을 보고 동시에 내가 누구지, 또는 저 해는 누가 만들었는지, 나는 누가 만들었는지 이렇게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의 담당자는 누구냐는 질문에, 그것은 생물학이나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묻게 되는 것입니다. “저, 교수님 자연세계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나는 누구냐? 저 빛은 누가 만들었나?”는 이런 질문을 자기에게 물으면 될 텐데 꼭 전문분야 하는 사람한테 가서 묻습니다. 그러고는 그 사람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현실과 엄청나게 멀어진 생활을 지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를 보더라도 과학이라는 희미한 안개가 막 들어오는 겁니다. 그때에는 뭘 틀라고 했습니까? 선풍기를 틀어야 돼요. 선풍기 틀면 드라이아이스 같은 그런 안개 같은 것이 걷히죠. 선풍기 안 틀면 하나님이 트시는데 그게 뭐라고요? 간암? 간암이죠. 아파서 누울 그때는 직장이고 뭐고 내일모레 죽는다고 했잖아요.지요. 제가 오늘 낮에 그런분 찾아서 병원 갔다 왔다 했잖습니까.

그런 분 앞에서 창세기나 히브리서 9장 이야기하면서 사람에게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는 심판이 있으리니. “아멘. 믿습니다. 인정합니다.” 마지막에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구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예.”

평소에 직장생활한다고 술을 얼마나 마셔됐는지. 왜 그렇게 마셔야 합니까? 그렇게 먹어야 업적이라도 하나 따내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처자식 먹여 살릴 것 아닙니까. 그래서 몸을 막 굴리는 겁니다. 일차, 이차, 삼차 쭉 가는 겁니다. 심판이 뭔지, 언제 주께서 구름타고 오시는지 그런 것 신경 쓸 틈이 없습니다. 지금 경쟁을 해서, 누구 환상과 누구 꿈이 더 세냐에 겨루어서 살아남야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21세기 세계의 자화상입니다.

나중에 죽을 때, 내일모레 오락가락 할 때, 그때서야 이제 성경말씀 하니까 “믿습니다. 맞습니다. 내 몸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제야 이야기하냐 말입니다. 왜 전에는 그렇게 환영에 사로잡혀서 살았냐 말입니다. 왜 실제로 자기 몸을 하나님이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고, 또 그렇게 괴리된 체로 살았느냐 말입니다. 괴리된 것이 괴로우니까 술이나, 아니면 아주 감각적인 도박같은 이런 것에 매진해서 낮의 괴로운 것을 달래려고 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을 보면서 가을 되면 가을로 족했고, 여름 되면 여름으로 족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면, 죽는 것으로 족했어요. 아프면. 병원 필요 없어요. 애가 아프잖아요. 다시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습니다. 애, 아프다고 자살하고 아파트 뛰어내리고 그런 짓 안했습니다. 또 낳으면 되니까. 순풍, 순풍. 우리 삼촌도 벌써 애 세 명이나 낙태시켰어요. 왜? 다들 쉬쉬했지만 다 그랬습니다. 또 낳으면 되니까요. 어려울 게 하나도 없잖습니까.

뭔가 남들이 이미 쳐놓은 그물같은 그 환영 속에서, 그러한 타인들의 욕망 속에서 우리는 지금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도 사실 없지만) 창세기를 보시면서, 나를 직접 만드신 분이 계시다는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를 뭐로 들었습니까? 고구려 시대 때 개와 지금 개를 비교하면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개가 똑같다는 말은 뭐도 똑같다는 뜻이라구요? 인간도 벗겨놓으고 보면 결국 똑같다는 것입니다. 갑옷 입으면 옛날 사람이고 양복 입으면 요새 사람이라는 구분이 없습니다. 둘 다 벗겨놓고 목욕탕 들여보내면 “실례지만 혹시 주몽이십니까?” 못 알아봅니다. 그게 주몽인지 최일도인지 못 알아본단 말입니다. 모릅니다. 갑옷 입으니까 옛날 사람이고, 양복 입으니까 현대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옷이라는 환영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구려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이 예수님의 피라면, 오늘날 21세기 아니 25세기라 하더라도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딴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세월 지났다고 딴 수가 있는게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단지 옛날에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라면 지금은 예수님의 피. 이 책, 교재 제일 앞에 나옵니다. 제일 앞에 보면, [구약에서는 유월절 정신이 상실되면 우상이 되고, 신약에서는 십자가 정신이 상실되면 그게 곧 우상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 책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창세기는 뭐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빛이 처음 만들어졌고 나머지는 전부다 이 빛에 예속되도록 했다고 했지요. 둘 째날, 세 째날, 네 째날, 다섯 째날, 여섯 째날 전부는 모두 이 빛에 예속되는 식으로 지음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일 째 만들어낸 작품이 해와 달과 별이죠. 해와 달과 별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빛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 했습니다. 낮에는 해가 반짝반짝 증거하고, 밤이 되면 달과 별이 반짝반짝 증거 하면서 밤이나 낮이나 우리는 빛에 예속된 그런 존재임을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아니면 생명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나니’라고 해서 창세기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 말씀들이 무엇인고 하면, 우리보고 “너는 피조물이야. 너는 창조주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존재야. 너는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창조자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네가 있는 거야”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있다는 것은, 마치 해가 있다는 것이 빛이 있다는 걸 증거하기 위함 인것처럼,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계시록 22장 이야기도 했지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뭐만 남는다구요? 달랑 빛만 남고, 둘 째, 세 째, 네 째, 다섯 째, 여섯 째 모조리 다 없다고 했습니다. 없습니다. 목사님, 여섯 번째 인간도 없습니까? 인간도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사, 오, 육은 이거는 물체로 만들어요. 흙으로 만들었단 말이지요. 그래서 빛만 있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자기 역할이 없으니 사라져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 오, 육입니다. 사, 오, 육 합하면 뭐가 되노?

사, 오, 육 이쪽에서는 일, 이, 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네 번째 날은 빛을 말하기 위해서, 다섯 번째 날은 하늘을 말하기 위해서, 여섯 번째는 땅과 바다를 채우기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서랍을 먼저 만들어놓고 그 속에 들어갈 장난감과 옷들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 서랍은 무슨 서랍이냐? 하늘 담는 서랍이라고 하구요. 이 서랍은 바다와 땅을 말하기 위한 서랍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서랍은 빛을 말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서랍 열 때마다 그 속을 채우는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뭘 하기 위함 입니까? 우리가 하늘을 정복하기 위해서 있습니까? 바다를 정복하기 위해서 있습니까?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여섯 번째 우릴 만든 것입니다. 다스리고 정복하라. 충만하라. 여기에 복을 준다는 말은 확장이 된다는 뜻입니다. 복이라 하는 것은 확장이 된다는 뜻으로 대표적인 예가 오병이어입니다. 오병이어에 주께서 기도하니까 이거는 뭐, 한도 끝도 없이 막 나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에 보면, 엘리야 시대 때 기름이 한정도 없이 나왔어요. 그때 그릇이 모자라서 다 못 받았지, 아마 그릇이 더 있었으면 더 채웠을 거예요. 그릇만 몇 개 더 있었으면 완전히 꽉 차는 겁니다. 한도 끝도 없이 나오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에 기도하실 때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은자가 몇명입니까? 하지만 그걸 먹고 죽었잖아요. 지옥 갔잖아요. 그것 먹고서도. 이건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빛에 예속됐다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물체를 갖고 있으니까, 인간 자체가 물질아닙니까. 물질이 족하면 하나님이 창세기를 모두 끝낸 줄 알고 있어요. 창세기 자체가 빛에 예속되라고, 빛을 바라보라고, 빛이 있음을 눈치 채라고 준 창세기 1장인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자기 배만 채우면 감사합니다하고는 뒤돌아서 가버리 더라는 것입니다. “복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는 도망치고 말더란 말이지요.

오병이어하고 난 뒤에 사람들이 예수님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참, 이 대목이. 이번에 제가, 조금만 하고 5분 쉽시다. 이번에 제가 하버마스라는 사회학자, 철학자의 책을 읽으면서 또다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 독후감을 크로스빌리지에 실어 놨습니다.

그 책을 보면서 또다시 느낀 점이 뭐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종교가 어떠니, 윤리도덕이 어떠니,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느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것은 사람이 배부를 때 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약간 먹고 마시는데 자신 있다, 싶을 때 그때 곁눈질하고 눈 돌리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종교, 믿음, 사랑 이런 것도 배고프면 단번에 원상복귀 쫙 되버립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몸뚱이밖에 생각 안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고무줄 속성인데, 고무줄을 당길 때는 고무줄이 멀리 간 것 같지요. 탁 한번 놔보세요. 고무줄은 안면몰수하고 자기 원 자리로 복귀하죠. 환원되고 맙니다. 사람이 믿음이니, 신앙이 좋으니, 성화론 어떠니 해도 다 먹고 살자는 짓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늦게 오신 분들 못 들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그것 밖에 모르게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아까 일찍 오신 분 답변해 보세요. 그거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했지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너는 운전 그렇게 밖에 못해”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먹든 지, 입든 지, 그것 밖에 안 되는 존재임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사랑, 믿음, 아무리 얘기해도 항상 우리는 역시 돈이 최고입니다. 아주 솔직한 고백은 세월이 갈수록 찬바람이 불수록 그걸 절실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기 실패를 탓 하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우려되는 것은 자기를 보고 인생 실패했다고 간주하는 걸 저는 제일 싫어합니다. 원래 실패했는데 뭘 또 실패한다는 것인지. 처음부터 실패했는데 거기다 새삼스럽게 실패했다고 낙심하는 걸 보면 웃긴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실패합니까? 그 질문에 대한 과제는 주님의 숙제입니다. 괜히 설치지 마시고요.죄 안 져도 가만있으면 자신의 본성, 즉 “나는 돈 밖에 모릅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곧바로 나오기 때문에 기다려보세요. 십년 믿어 보세요. “역시 돈이 최고다.” 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겁니다. 저절로 나와요.

이것처럼 은혜로운 이야기가 어디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목사님, 이제야 비로소 저 자신을 알았습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을까요? 위선과 위선으로 세 겹, 네 겹 덧씌워놨는데 선풍기 한번 틀고 간암 걸리니까 그게 다 안개처럼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것은 역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라는 그 환영, “나는 이건만 있으면 최고입니다”라는 그 환영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것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제발, 흙으로 만든 이 육체에 대해서 그걸 개선해 보려고, 그걸 발전시켜 보려고, 개과천선 해보려고 제발 그런 헛된 수고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한테 그 수고를 맡긴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다 장만해 놓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나이 구십 다섯 되어서 돌아가실 순간이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주님께서 이미 장만해 놨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이제 흙에 속한 형상으로 바르게 산다든지, 착하게 산다든지, 훌륭하게 살아서 복 받겠다는 그런 헛된 망상, 그런 것은 창세기에는 나오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창세기에는 주님께서 있는 대로 좋아 하셨다고 합니다. 괜히 손대지 마세요. 작품 버립니다. 망가지면 망가진 대로 놔두는 것이 최고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하나님의 풍경입니다.

첨부파일 : ulsan061103a_v1.hwp (39.0K), Down:13

관리자(IP:219.♡.86.34)

09-09-20 17:03

천성은 목사님이 1장에서 3장까지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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