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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울산강의(창세기50장b)자유게시판창세기

울산강의(창세기50장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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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강의(창세기50장b)

2009년 5월 1일

창세기 50장

이근호 목사

둘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이 상당히 복잡했는데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이란 사람이 죽고 난 후 애굽 사람들은 자기 존재에서 빠져나간 죽은 야곱이 애처로워서 울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죽음은 본격적으로 야곱이 남긴 예언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세계가 죽은 세상이고, 죽은 세상이 진짜 산 세계입니다. 그걸 야곱이 보여준 겁니다. 창세기 마지막 장은 결국 야곱의 끝이 아닙니다.

야곱은 죽었지만 야곱은 어디로 가느냐? 5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가 예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야곱은 무덤에 치중해요. 무덤 제가 이야기한 화산입니다. 화산의 공백입니다. 무덤이라는 것은 산 자가 사라진 곳입니다. 산 자가 사라진 그 무덤에서 시작된 그 일이 너희들로 하여금 결국은 애굽에서 나오게 할 것입니다. 뒤에 나온 것이 출애굽입니다.

거대하고 많은 후손들이 누구한테 매여 있습니까? 죽은 귀신에게? 죽은 야곱에게 종속된 운명입니다. 언약대로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운 운명이 되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 지금부터 상세하게 해보겠습니다.

창세기 49장 8절 봅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에게 내린 예언입니다. 그러면 유다의 위치가 다른 모든 형제의 위치와 동등하단 말인가요? 아니면 위에 있단 말인가요? 위에 있습니다. 찬송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찬송 받아야 될 하나님이 유다를 통해 찬송을 받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다른 형제들은 유다의 운명에 예속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찬송드릴 통로가 없어지게 됩니다.

‘찬송’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사건이 나왔던 구멍을 말합니다. 원천을 말합니다.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 사실은 찬양 올리도록 사건들을 유발시킨 겁니다. 사건이 없으면 찬양될 일이 없습니다. 찬송가를 부른다고 찬양이 아닙니다. 사건이 터져야 됩니다. 어느 정도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될 때, 비록 유행가 가사로 바꾸더라도 찬양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노래 가락이나 가사의 문제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이 노래를 바칠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존재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을 유발시킨 사건 당사자에게 이런 사건을 받은 내가 사건 주신 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몽땅 다 바칠 수 있는 그것이 찬양입니다.

‘나’란 존재로 인해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건’으로 인해 내가 있으므로, 마땅히 영광 받으시고, 찬송 드릴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통로가 유다에게서 온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먼 미래의 일입니다. 공백이라는 화산 분화구 밑바닥에서 아주 먼 장래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올 때는 아직까지 유다가 빛을 못 볼 때입니다.

유다가 빛을 볼 시기는 레위 지파가 붕괴되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빛을 잃을 때입니다. 그것을 뚫고 다윗이 등장하면서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중심으로 등장합니다. 그때에 영생 얻을 자와 영생 못 얻을 자가 구분됩니다. 이런 사건들이 분화구 속에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것이 조금씩 떼어지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조금 더 신앙생활하면 자꾸 사건이 터집니다. 계속 사건이 터지는데 그러한 사건은 내가 나를 부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 내가 조종 받고 있다는 그 사실을 차츰 느껴지도록 사건이 조금씩, 조금씩 뿜어져 나옵니다. 그게 바로 인도받고 있다는 겁니다.

사건을 받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가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나갑니다. 나에 대한 가치가 떨어져나가면 내 영광, 내 찬양이 없어집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 은혜입니다’라는 농도가 짙어지는 겁니다. 그전에는 먼 미래의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창세기 27장 29절을 봅시다.

창세기 27장 29절.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누가 누구에게 주는 축복입니까?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내리는 축복입니다.

그러면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말하기를 ‘에서가 있지만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한다’ 이것은 창세기 27장 29절입니다. 창세기 49장 8절은 이 원칙이 어디에 흘러들어갑니까? 유다한테 흘러들어갑니다. 신약에 오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에게 흘러들어갑니다.

이렇다면 미래(종말)이 마지막 끝으로 뭔가 집합되는 곳을 향하여 돌진하는데, 그 한 곳인 예수님 쪽으로 모아져 가면 갈수록 점점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구원 받는 이유와 구원받는 근원되시는 분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집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누구 자손입니까? 물론 야곱의 자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다 자손입니다. 유다의 뿌리에서 우리의 구세주가 납니다. 물론 유다는 야곱의 아들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유다 아들이라 함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윤곽이 점점 구체화되는 겁니다.

구체화된다는 것은 그 전에는 희미했다는 말입니다.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영생 줄 자와 영생 받지 못할 자를 구분합니다. 영생 줄 자의 핍박와 미움도 더욱더 강렬해진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고난 받는 것은 바로 요셉에게도 주어집니다. 꿈에 요셉 형제들이 절을 합니다. 요셉의 형제가 미워합니다.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누가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요셉을 미워할 자의 윤곽도 점점 뚜렷해집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이런 찬송을 받기 위해 어떤 수모를 당해야 됩니까? 유다 외에 다른 지파로부터 배신 당하고, 배반 받아야 합니다. 그럴 입장에 있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할 자라면 예수님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배신 받아야 됩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받을 길이 없고, 구원받을 이름은 우리가 배척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버린 예수님에 의해 구원받는다면 우리 속에 뭐가 포함됩니까? 내가 포함됩니다. 하지만, 나로 인해 버림받은 분이 나를 구원하신 것에 나는 내 구원에 어떠한 보탬도 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헌금, 나의 기도 그 어떤 것도 내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됩니다. 우리는 나의 헌금, 기도 등 이런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로 인하여 버림받은 그분이 찾아오심으로써 우리가 공짜로 구원받게 됩니다.

그러면 창세기 49장 8절이 이뤄집니다. 모든 찬송은 유다가 받지만, 내막을 들춰보니 유다가 받는 게 아니고, 유다의 자손, 다윗의 자손 되시는 분이 홀로 찬송을 받습니다. 창세기 49장 8절에서 보면, 유다 지파가 찬송 받게 되어 있지만, 그것은 아직 마지막 때가 아니기 에 약간 희미하게 포괄적으로 이야기되어 진겁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다 전체가 찬송 받는 것이 아니고, 유다 자손, 다윗의 자손 되시는 그 한 분이 찬송 받습니다.

모든 찬송이 한 분에게 쏠린다는 것은 구원받는 사람은 그 한 분의 혜택으로 인해 너나 할 것 없이 구원받기 때문에 천국에는 ‘개성’이 없습니다. 지옥에도 개성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자기 주특기 필요 없습니다.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고...

개성을 밝힌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두개인들입니다. ‘어이, 예수여. 당신은 부활이 있다면서? 있으면 한 여자를 일곱 남자가 서로 내 마누라다 할 때 어떻게 할 거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천국에는 개성이 없거든. 네가 성경도 오해하고 말씀도, 능력도 오해했구나.’라고 했습니다. 천국에는 ‘나’라는 게 없습니다. 내 아내도 없습니다.

시집을 가든 장가를 들든 결혼해서 산다는 것은 내가 저 여자와 만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사는 것입니다,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해서 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해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찬양받으실 예수님을 죽이고 배척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며, 나는 원인제공자가 되는 겁니다. 내 힘으로 산다는 것.

그래서 야곱은 훌쩍 어디로 갑니까? 무덤 속으로 풍덩 뛰어듭니다. 분화구 속으로 풍덩 뛰어들면서 뭐라고 합니까? ‘나를 따르라’ 라고 합니다. 결국 창세기 49장에 있는 모든 예언들은 야곱이 갔던 막벨라 굴에 전부다 관심이 쏠려야 됩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열두 지파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그것은 야곱이 풍덩하고 빠졌던 분화구, 죽음이라는 막벨라 무덤 속에 같이 풍덩, 풍덩 개구리 빠지듯 쏠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홍해 사건입니다.

홍해 건너지 않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지요. 홍해 건너지 않고, 먼 길로 돌아 광야 들어간 사람도 없습니다. 유월절 그 때 피 안 바르고 살아난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피가 발렸다면 자기 공로란 것은 소용없습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개성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분의 혜택을 입은 겁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와 영광은 조금도 천국 가는데 고려의 대상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앞당겨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 평생 수고하고 자식 키운다고 고생 했습니까? 그것 소용없습니다. 나는 내 마누라만 알고 잘 살았습니까? 그것도 소용없습니다. 내 마누라가 셋이 되고, 넷이 되고 다섯, 일곱 명 되어도 그것도 의미 없습니다. 교도소 일곱 번 갔다 왔습니까? 일곱 번을 갔던 여덟 번을 갔던 안 갔던 상관없습니다.

찬양받으실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왜? 그분만이 비로소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이쪽은 예수님의 죽음에로 초대를 받고, 저쪽은 예수님의 죽음에로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그냥 무작정 살려고만 하고, 존재를 유지하려고만 애쓰며 살아가는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50장 5절을 다시 봅시다.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요셉이 온 가족과 함께 국장을 치릅니다. 칠 일 동안 크게 울면서(10절).

13절에 보면, “마므레 앞 막벨라 밭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얼마나 희한한 일입니까? 여기 구덩이가 꺼지고 평지가 된다면 이게 막벨라 굴입니다. 지금 야곱이 죽어서 여기에 빠졌습니다. 야곱이 죽어서 막벨라 굴에 갔습니다. 막벨라 굴에 누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선배들이 와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 이삭도 있습니다.

왜 애굽은 영원히 매장지가 안 됩니까? 그 이유는 야곱이 죽는 그 자리에 뭔가 있습니다. 야곱의 언약에 의해 만들어질 국가와 민족의 그 땅 지점을 야곱이 죽음으로써 지시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죽는 자리가 장차 후손들의 영원한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묻혔습니까? 어느 빈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죽고 난 후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할 때 그 빈 무덤이 열렸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 땅에서의 죽음의 자리까지 몽땅 가지고 하늘로 갔습니다. 구름타고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한 그 자리가 주의 오른쪽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막벨라 굴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오른편, 주의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럼 성도는 어디에 합류됩니까? 주의 자리에 합류되기 위해 주님이 주의 자리에서 재림하면, 재림한 그 코스대로 우리가 주와 함께 합류되어 주의 오른편으로 가게 됩니다. 장난 같죠?

무덤이 떠서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 봤습니까?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는 이쪽으로 막벨라 굴을 이동시키면, 영원한 안식처인 안식의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게 됩니다. 하늘에 있고, 하늘에 있는 안식을 새 땅이라고 한다면, 지상에 있는 땅은 무엇이 됩니까? 불바다가 됩니다. 완전히 불에 다 녹아 없어지는 겁니다. 영화 [노잉]처럼 태양 복사열 때문에 다 타버린다는 겁니다.

그런 것 보면 웃깁니다. [노잉]이란 영화를 보면 어린애가 숫자를 막 쓰는 장면이 있습니다. 5, 4, 3, 2, 1 씁니다. 물리학자가 숫자풀이해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립니다. 하지만, 성경에 숫자 안 써도 됩니다. 숫자풀이를 하지 않아도 그냥 나는 길이요, 진리입니다. 이게 비밀이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알아듣습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다. 이것을 누가 알아듣습니까? 숫자를 안 써도 됩니다. 그냥 평범한 말 써도 됩니다. 보통 인간들이 쓰는 단어, 그 단어 안에 아무리 풀어도 안 풀리는 비밀이 성경에 다 담겨있습니다. 그냥 담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세상 단어는 단어 하나에 의미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단어는 단어 하나에 신구약 다 포함돼있어요. 쭉 당기만 신구약이 다 딸려옵니다. 관계없다고 여기지만, 다 딸려옵니다.

이번 2009년 여름수련회에 묵시문학인 다니엘과 스가랴를 합니다. 왜 하는가? 묵시문학 단어가 보통 인간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아니라 묵시적인, 역사를 초월한 사건이 담겨있는 겁니다. 그대로 예수님 공생애에 넘어오면 예수님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묵시언어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니엘, 스가랴가 있는 겁니다. 이것을 이번에 여름수련회에 하려고 합니다.

막벨라 굴은 무엇이냐? 막벨라 굴은 뭔가 지시하는데, 막벨라 굴이 있는 자리가 사실은 우리가 거할 안식처가 됩니다. 따라서 ‘나를 그곳에 묻어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들을 그곳으로 인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일단 내가 먼저 가 있을게. 그 뒤에 너희들 따라오게 돼있어.’ 왜? 죽은 공백에서 사건의 혜택을 입는 겁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보이지 않는 이미 죽어버린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듯이.

신명기에 보면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러한 안식에 누가 임하느냐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정도가 아닙니다. 여호와 이름이 임합니다. 만약에 ‘모년 모월 모시에 울산 다대포 앞 바다에 나가 있어라. 하늘에서 비행접시가 올 것이다’ 이것과 똑같은 겁니다. 어떤 자리에 같이 만나는 겁니다. 그 만남의 장소를 죽음으로 표현한 겁니다.

야곱이 어느 나무 붙들고 있는 게 아니라 막벨라 굴에 가면 이미 나보다 먼저 하나님의 이런 계시를 받았던 우리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그곳에 여호와 이름이 동참하므로, 할아버지 아브라함, 이삭도 같이 묻혀있는 겁니다. 결국은 하나님은 산 자로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하나님으로 동참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를 이미 죽은 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매일같이 십자가 죽음에 동참케 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은 왜 죽었다는 이야기를 왜 자꾸 하십니까?’라고 반문합니다. 듣기 싫고, 살아 보고자 하는데... 우리가 죽었다고 이야기해야 내가 내 소유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소유가 되려면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내가 살아있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라고 할 때마다 내 손, 발 전부를 누구한테 인계합니까? 내가 아닌 우리 하나님한테 인수인계하는 그 순간이 되는 겁니다.

인계해봐야 돌아서면 ‘하나님 그리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우리 애 이번에 일등 해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라며 말합니다. 하지만, 다시 뺏어옵니다. 우리가 간섭하지만 어쨌든 자꾸 넘겨 오는 겁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어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게 느껴지는 겁니다. 이게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사는 겁니다.

막벨라 굴이라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보면,

13절에.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이 아비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군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이제부터 무엇이 문제냐 하면,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남은 것은 아버지의 예언뿐입니다. 예언은 바로 죽은 자 터져 나옵니다. 죽었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죽은 자에 의해 삶을 살게 됩니다. 산다는 말은 애굽에서 산다는 것이 아니고, 애굽에서 빠져나온다는 겁니다. 빠져나올 때는 그냥 산 채로 못 빠져나오고 반드시 뭘 거칩니까? 죽음에서 빠져나올 때 언약이 주는, 언약으로 코팅된, 언약의 외투를 뒤집어쓴 채 통과하지 않으면 죽음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이른 것처럼 너희들도 십자가에 죽어서 통과한다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 다같이 읽어봅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주와 함께 죽었으면 비로소 삽니다. 주와 함께 죽으심이 없으면 사는 것도 없습니다. 늘 얹혀서 살아야 됩니다. 함께 하심이 없으면 못 산다 말입니다. 주님이란 쟁반에 얹힌 돼지머리가 돼야 합니다.

주님이 얹혀줘야 갈 수 있지 나 혼자서는 못 갑니다. 주님과 함께 죽으신 그 자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사는 길로 제대로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주와 함께 삽니다. 낙하산 펴지도 못하는 인간이 그냥 뛰어내리면 죽습니다. 낙하산 늘 뛰어내리던 전문가를 껴안고 같이 뛰어내리면 그건 사는 길입니다. 그게 탈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탈출’입니다. ‘탈출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탈출할까요? 이게 박찬욱 감독의 고민이었어요. [박쥐]는 뱀파이어 영화인데, 흡혈귀가 설쳐대지만 성당의 신부도 속수무책입니다. 장님 선배 신부는 ‘귀신이라도 좋다. 내가 눈 한번 떴으면 좋겠다. 제발 나도 흡혈귀 돼서 내가 눈 떠 보는 게 소원이다’ 합니다.

이러니 하나님 뜻이고 뭐고 개인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있는 교회가 흡혈귀가 날뛰는 세상에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아무런 힘이 안 된다는 게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종교라는 것, 구원이라는 것, 교회라는 것 모두 오늘날 사람들에게 전혀 구원을 못 주고 있다는 게 박찬욱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구원을 왜 받으려고 하는데?’ 스스로 만든 종말론은 가짜입니다.

그래서, 뱀파이어 된 신부가 하는 말이 ‘우리 이렇게 하면 지옥 가는데’ 하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저는 종교가 없기 때문에 지옥도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쫓기죠. 종교도 없는데 어디에 쫓깁니까? 죽음에 쫓기는 겁니다. 이게 모순 아닙니까. 종교도 없는데 맨날 살아야 된다? 자기 속에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공포에 쫓기는 겁니다. 원치 않는 나의 욕망에 쫓기는 겁니다.

종교는 없습니다. 교회도 다녀보고 성당도 다녔는데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 주인공은 짜증이 날 정도로 자꾸만 쫓깁니다. 왜 물가가 높은 거야! 왜 경제가 안 풀리는 거야! 왜 노무현은 받아 처먹은 거야! 종교도 없고, 교회도 안 다니고, 그냥 놀러만 다닙니다. 그렇지만 짜증이 납니다. 내 몸은 왜 아픈 거야? 죽으면 어디로 가는거야? 나도 몰라! 누구 아는 사람 없어요? 짜증나는 겁니다.

이것은 외부의 언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아브라함이 있으므로 그 내부에 갈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은 영생 얻은 자에게 결코 있을 곳이 못됩니다. 거기서 탈출해야 되는데 우리들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왜? 산 자는 산 채로 못 빠져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죽어도 못 빠져 나옵니다. 살아도 못 빠져나오고, 죽어도 못 빠져나오고, 그 속에 갇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가? 이미 죽은 자가 받은 예언이 우리를 인도하면 우리는 거기서 탈출 가능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예언했던 그 분의 운명과 같은 운명 조건 하에서만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전체가 야곱이 되어야 되고, 이스라엘 전체가 이삭이 되어야 되고, 이스라엘 전체가 아브라함이 될 경우에만 우리는 언약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예전에 강의한 것을 다시 말합니다. 방주가 있습니다. 그 방주에 문이 있습니다. 방주에 노아 식구가 올라갑니다. 올라갈 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올라간 겁니다. 방주 안의 세계가 내가 살아온 세계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 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안 들어갑니까? 방주 안의 세계가 지금 내가 사는 세계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일구어 온 세계가 덜 귀하기 때문에 방주에 안 들어갑니다.

그러면, 일구어 온 세계를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종말이므로, 종말에서 노아를 다시 해석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사고팔고, 절에 가고, 교회 가는 이 세계는 방주 바깥의 세계입니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냥 부단히 움직이는 세계입니다. 여기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주저앉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체적으로 빠져나온다는 의식도 없습니다. 못 빠져나옵니다.

방주가 오고, 하나님이 동행하니까 먹고 마시는 이 세계는 물에 덮입니다. 인자되신 예수님이 올 때도 그러합니다. 인자가 오게 되면 전 세계가 불에 덮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 ‘인자가 올 때에 불바다 된다.’라고 한 그 한 소리를 듣고 난 후, 그 한 소리가 지금 나의 사건으로 덮어버릴 때, 나는 그것을 구원의 기준점으로 잡고, 거기에 준해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언약의 인도함을 받아 방주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모든 성경 원리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말씀을 멀리 하면 이 세계가 좋아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가까이 하면 이 세계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 목사들은 말씀을 가지고 오히려 반대로 이 세상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교회가 부흥 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여러분 출세합니다’라고 자꾸 이야기를 퍼뜨립니다.

오늘 아침 산책을 하는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옆에서 들었습니다. 주로 하는 이야기가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 사업이 안 된다는데, 그럴 땐 우리가 중보기도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사업이 안 되는 걸 통해 빠져나갈 세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업이 안 되어서 기도했더니 사업 잘 된다는 겁니다. 구원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 교회는 완전히 절입니다.

교인들은 교회 오는 이유는 한 마디로 한을 풀기 위해서입니다. 오히려 한은 우리 주님이 맺혀 있습니다. 인간에게 무슨 한이 있습니까? 주님 덕분에 평생 살아놓고, 무슨 한이 맺혔다고 합니까? 남에게 맨날 나쁜 짓 해놓고 무슨 한이 맺힙니까? 나쁜 짓 못해서 한이 맺히죠. 진짜 한 맺힌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진짜를 이야기 해도 거짓말로 알아들으니 얼마나 한이 맺히겠습니까? 진짜 한 맺힌 사람은 복음 전하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세 시간 동안 강의해도 알아주지도 않으니 얼마나 한이 맺히겠습니까?(ㅎㅎㅎ)

말씀을 천 번, 만 번 읽어도 소용 없습니다. 더 키워야죠? 말씀 있으니까 하나님이 복 주셔서 더 퍼지게 하셔야죠?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영생 얻기로 작정된 특수한 집단은 어떻게 형성되는 지 알아 보았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누구 덕분에 못 빠져 나올 애굽에서 빠져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한 대목을 말씀드리고 창세기를 마치겠습니다.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못 빠져나올 세상이라 했죠? 그 이유가 어디 나와 있느냐 하면, 창세기 50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왜 못 빠져나오는 지 봅시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아비는 없습니다. 지금 사건은 사라지고, 존재만 남았습니다. 존재인 요셉과 가해자인 형제들만 남아 있습니다.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이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이 썩어빠진 사고방식을 가진 형제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버지는 이미 죽은 분이기 때문에 더 이상 힘 못 쓰니까, 남아있는 사람 누구한테 잘 보이면 된다는 겁니다. 동생인 요셉에게만 잘 보이면 우리는 살아남는다 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못 빠져나오는 겁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 살 궁리만 챙깁니다.

그때 요셉이 그 말을 듣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울었다’라고 했습니다. ‘아이고, 이 철없는 것들아(시건머리하고는).. 그렇게 모르겠나? 그렇게 이야기해도 모르겠나?’ 이 말입니다. 진짜 울고 싶습니다.

제가 울어야 될지 울지 않아도 될지 일단 질문 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죽었습니다. 이 죽음은 예수님 혼자 잘났다고 죽은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만약 내가 날 용서 못하면 누굴 모독하게 됩니까? 용서해주신 예수님을 모독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의 완벽을 주장하고, 내가 나의 잘남을 뽐내고, 심지어 반성하는 나의 멋있는 모습에 신경을 쓴다면 이건 누굴 모독하는 겁니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를 모독하는 겁니다. 이 죽으심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이미 용서해주기로 작정한 용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 같은 인간을 용서하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왜 쓸데없이 자기 겸손을 내세웁니까? 주님께서 용서했다면 용서한 것입니다. 까라면 까는 겁니다. 내가 날 왜 용서 못합니까?.

‘나는 바보야’ ’ ‘내가 이럴 수가’ ’ ‘내가 그런 실수 하는 게 아닌데’ ‘앞으로 또 할 거야’라고 하면 주님이 웃습니다. 용서했음에도 인간은 자기 존재 가치, 자기 영광에 미련이 남아서 찬양을 자기한테 하고 싶은 겁니다. 평생을 죽도록 고생한 나에게 찬양 보내지 않고 누구한테 보내겠느냐! 이게 인간적 사고방식입니다. 고생도 내가 했고, 힘들어도 참았고, 공부를 해도 내가 했기 때문에 모든 찬양과 영광은 나한테 돌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인간적인 형들은 요셉 만나 이야기 합니다 ‘요셉아 너 나중에 딴 소리 하면 안 된다.’ 요셉이 기가 차서 말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여러분들 용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그게 어디 나옵니까? 여기 19절 봅시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나님은 지금 하나의 사건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무엇을 모릅니까? 눈 앞에 누가 보입니까? 요셉이란 존재로 보여서 ‘저놈이 언제 변절할까?’ 이러고 있다는 겁니다. 요셉 자체가 사건 덩어리인데 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요셉을 존재로 보는 겁니다. 요셉을 존재로 보는 이유는 자기들이 자기 자신을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존재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요셉이 권력 있다고 저놈을 하옥하라고 하면 골치 아프다. 미리 조치를 해놔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그런 조치는 야곱의 약속 앞에서는 다 쓸데없는 염려입니다.

제가 주일 설교 할 때 이런 이야기했는데 ‘여러분들이 주님의 용서를 제발 믿으시거든 죄책감을 돌파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책감이 남아있으면 벌 받을까봐 두려워합니다. 두렵다는 말은 ‘내 존재는 내가 지킨다’라는 겁니다. 내 고향은 누가 지킨다? 우리 예비군이 지키잖아요. 하루 24시간 매일 생각하는 것이 ‘내 인생은 내가 지킨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칼로 잘라버리세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입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를 누가 키웁니까? 주께서 키웁니다. 시장에서 팔릴 때까지, 새총한테 맞을 때까지 키웁니다. 들풀도 키우시는데 언제까지? 다음날 아침 아궁이(불쏘시개)로 들어가기 직전까지입니다. 들풀을 키우시듯 주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겁니다.

내일 염려는 언제 하라 했습니까? 장로님 언제 할 거예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하세요. 오늘 염려는 몇 시간 안 남았습니다. 뉴스 보고 주무시면 됩니다. 세상에 자면서 걱정하는 사람 없습니다. 잠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염려의 단절입니다. 염려 끝. 내일 또 아침에 살려주시거든 내일 또 염려하면 됩니다. 인간이니까...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모독하는 게 됩니다. ‘너 잘났다, 못났다’ 하지 말고 나에게서는 약속을 끄집어내세요. ‘너 주님한테 뭘 들었지? 너 선지자한테 뭐 들었어?’ 그것을 이야기하란 말입니다.

나 못난 것 천하가 알고, 심지어 공중 한 구석에서 한 이야기도 새들이 다 아니까 묻지 말고 약속을 이야기 하세요. 당신은 약속을 받았습니까? 네. 용서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누가 말씀하셨죠? 내 대신 돌아가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그분이 어디 계시죠? 오신 곳에 돌아가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의 사건인데, 우리는 왜 인생을 두려워합니까?

요셉이 울면서 이야기합니다. 20절을 봅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의 사건입니다. 요셉은 사건으로 봅니다. 저 사람들이 나를 해하려 한 것이 하나님 주신 사건으로 다시 해석합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지금 창세기 마지막에 와서 아는 겁니다. 모든 것을 전부다 하나의 사건에서 나온 사건들로 봅니다. 예수님의 사건에서 나온 사건들의 다발로 보는 겁니다. 하나의 사건이 종말의 사건이 되어 지금의 사건이 된 겁니다. 마지막 사건이 미리 터져서 지금 하나하나 사건이 되는 겁니다.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그 후 요셉이 가족들과 함께 다시 애굽으로 복귀합니다. 24절에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보십시오. 탈출입니다. 창세기 이 부분에서의 주제는 탈출입니다. 우리는 여기 살지만, 하나님이 약속한 세상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거기 가기 전에 임시적으로 사는 곳이 이 땅이라는 겁니다. ‘나가자! 우리 그냥 약속으로 나간다’ 그 약속이 와서 당겨주면 우리는 나가게 됩니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그 해골을, 여호수아 마지막에서 확인해 봅시다.

여호수아 24장 32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이렇게 한 가족으로 모입니다. 이처럼 약속을 받은 사람은 결국 주님 앞으로 다 한 곳에 모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24장로가 어린 양의 보좌 밑에 둘러서 섬깁니다. 이 장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사건을 받은 사람의 대표라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전부다 면류관을 자기 중앙에 있는 예수님께 던집니다.

이처럼 교회라 하는 것은 중앙이 있어야 되고, 중앙은 공백이 되어야 하고, 그 공백은 오직 십자가 사건, 죽음의 사건만 있어야 됩니다. 십자가 죽음의 사건은 누구나 들어갈 수 없고, 사건의 조명이 비추는 곳, 십자가 위에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곳을 바라볼 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든지 주님을 본 받으라. 십자가에 이르려 함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이른 것은 부활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주님을 본 받아서 공백에 참여해서 공백에서 나아간다. 이것이 빌립보서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끝이 아니고 새로운 야곱 언약의 능력이 어떤 능력을 발휘했기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애굽에서 빠져 나왔는지 그것을 알려줍니다.

끝으로 묻습니다. 왜 그들은 애굽에서 못 빠져나옵니까? 마지막 질문인데. 아까 요셉의 형제들처럼 누굴 생각하기 때문인가요? 자기 존재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존재를 생각하는 건 모든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절대로 못 빠져나옵니다. 존재를 생각하는 것을 사건과 결부시킬 때 그 존재는 사건에 의해 죽은 자리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합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했사오니 이제는 그 사건이 있는 이상 자신을 자책하지 말고 자신을 변호하지 말고 옹호하지 말고 그저 주님께 맡겨진 인생 그 자체를 하나님께 다시 맡기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ulsan090501b_v1.hwp (62.0K), Down:14

관리자(IP:219.♡.86.34)

09-09-19 23:05

막상 해 보니 만만치 않네요. 그동안 공짜로 얻어먹은 것에 감사드립니다.

강구만(IP:118.♡.241.217)

09-09-20 18:21

최집사님, 만만찮은 작업 계속 수고 부탁합니다!
천성은 목사님, 애들한테 시달리면서 틈틈이 고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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