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0장 - 11장 주석
창세기 10장 - 11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10장 - 11장
수많은 종족이 새로운 땅에 솟아나왔다. 그들은 셈과 함과 야벳을 각기 조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땅은 활기를 찾았고 그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약속한 것은 어김이 없었다. 창대하고 번창한 그들 가운데 주목 받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함의 후손 중 구스의 아들로 태어난 니므롯은 그 중의 하나다. 그는 영웅대접을 받는다. 그것도 그럴만한 것이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땅에서는 누가 앞서서 땅을 지배하느냐 로 칭송을 받는다.
땅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을 장악함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를 구축한다. 나라의 생성이 이런 연유로 비롯된다. 종족과 종족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경계가 확정되고 서로가 고유의 역사와 활동범주를 인정해 줌으로 땅의 인간나라는 다양한 문화를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의 다양함은 원초적으로 언어의 다양함에서 야기된 결과였다. 원래는 모두 다 동일한 말과 문자를 지니고 있었다. 흩어져 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모두 다 한곳에 집결해 있었으며 그곳을 자신들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간주했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인간들이 한곳에 모여 살면서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뭔가를 보시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아진 힘으로 자기들이 평소에 이상(理想)했던 일을 위하여 투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고 있었던 것에 힘은 최종적으로 소비되기 마련이다. 그 일은 인간이 신의 영역까지 도달되기 위한 시도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도가 어디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자적인 땅의 시대를 열어보려고 했다. 뜻은 하나로 모아졌다. 다른 의견은 제시되지 않았고 별문제도 없었다. 혼란이 생길 것이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그런데 작업도중에 혼란이 생겨 공사는 중지되었다. 갑자기 언어가 불통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뜻은 이미 일치되었다. 그러나 그 뜻의 전달과정이 원활할 수가 없었다. 우선 같은 말을 하는 사람끼리 모일 수밖에 없었다. 혼란이 그 속에 있었고 결국 우리들은 함께 떼지어 살수 있는 자들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었다. 혼란이 생겼을 때는 그 혼란을 최소로 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각기 자기의 자리를 찾아 흩어져 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하신다. 이 혼란의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복해야 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땅이어야 한다. 땅은 하늘에 종속되어야 하며 하늘로부터 위탁 받은 사명 때문에 반드시 책임을 지는 일이었어야 한다.
올바른 땅의 정복과 다스림, 제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최선을 감당해야 하늘과 땅은 안식을 누릴 수 있다. 과연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자가 그 누구인가?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흩어진 민족들 가운데서 노아가 자기 자식에게 축복한 것에 의거하며 그 중의 한 종족을 선택하여 진정한 복의 원천으로 삼고자 하신다. 이는 흩어진 모든 민족의 운명을 그 선택된 민족에게 그들의 태도에 따라 결정지으려는 생각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물론 그 복의 원천이 되는 민족도 저주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 하는 특수한 사명을 부여 받게 된다. 그 종족의 선조가 아브라함이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을 일단 혼란상태에 있음을 전제로 하고 인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혼란의 근원을 이루는 사상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신에 대한 반란이다. 신으로부터 오는 모든 간섭을 거절하고 독자적인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 때문에 이 세상은 혼란에 잠겨 있다. 이로 인하여 복의 원천인 교회는 무시당하고 저 구석에서 혼자서 훌쩍이며 울어야 한다. 물론 세상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어용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을 보고 울어야 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딸들을 보고 울듯이!
니므롯은 영웅대접을 받는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재주를 갖고 있다. 영웅을 기리는 것이다. 땅의 시대이다. 홍수를 대체하고 있다. 차질이 생겼다. 언어가 달라졌다. 인간이 신에게 도전한 적이 있음을 언어가 다름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저주이다. 이마에 땀을 흘리고 여자가 고통 가운데서 아이를 낳는 것도 원래의 모습이 아닌 저주의 모습이다.
오순절날 하늘에서 불의 혀 같이 성령이 내려온다. 언어가 하나가 된다. 성령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그 이유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해 가신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언어가 통하는,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모임이다.
언어 불통으로 민족이 나누이게 되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함과 가나안이 사는 땅에 집중된다. 그 땅은 은혜를 알고 있는 자만이 그 땅을 정복할 권리가 있다. 진정한 성도는 갈라짐을 무시하고 서로 교제하면 된다.
10:6-20
8-9절에 사람들이 원하는 영웅의 대표자로 그 당시 사람들에서는 니므롯을 꼽았다. 탁월한 사냥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아니하시느냐를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남보다 더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로 가름하는 것이다. 영웅을 가치 있는 것으로 쳐주고 진리로 통하는 세상이었다.
함과 가나안 족속을 저주한다고 했다. 그 저주 받은 종족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흠모할 만한 영웅이 나왔다. 저주와 영웅의 연결 고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하나님은 지켜 보신다. 단지 이 땅의 생활이 전부라면 함 족속의 영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땅이 저주로 무너진 이 후라면 진정 우리가 고대해야 될 영웅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것만 의지하는 사람이다.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 갔다. 거지 나사로도 낙원에 들어갔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이 땅이 없어진다는 것을 믿었고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혀 영웅 같지도 않는 예수님이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그 사건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달리 보아야 하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진정한 영웅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자이다.
11:1-9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탑이나 건물을 쌓을 때 그것을 벽돌과 같은 사물의 탑이나 건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탑이 된 것으로 보신다는 점이다. 건물을 헤치시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헤치시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벽돌로 지은 탑이 아니라 인간들에 의한 탑이요 역청으로 벽돌로 연결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언어로 그 인간들과 인간 사이를 연결한 것으로 보시는 것이다.
3절에 '대신'라는 말이 연이어 나온다. 즉 인간들은 돌을 대신하여 벽돌을 사용하므로 서 탑 자체에 새로움을 가미하려고 한 것이다. 자신을 대신해서 거대한 탑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려는 그 본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면은 다니엘 2: 32-35에 인간들은 탑이라는 대체물을 만들어 자신으로부터 분리를 꾀했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인간 세계 자체를 금 신상이라는 거대한 사물로 표현해서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못박는다. 하나님 나라까지 하나님께서 사물로 통해서 표현하시는데 금 신상이 부서지는 것은 어디선가 날라온 작은 돌이다. 그 돌은 결국 금 신상이 무너진 그 현장에서 거대한 태산을 이룬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제국만이 인간의 제국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확고한 의지는 시편 127:1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지은 집만을 인정하신다.
바벨탑 이야기는 예전에 인간들이 미쳐 몰랐던 하나님의 마음을 새삼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밝혀진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인간들은 그들도 예상 못한 새로운 실패의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해도 항상 그것이 자신에게 바벨탑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름을 그 작업을 통해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실패케 한다. 그것을 심판이라고 보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이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 또 다시 확인되기 때문에 이 점을 알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해야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미 성사시켜 놓은 하나님의 제국을 우리가 알고 믿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흩으셨지만 모든 이에게 여전히 은혜를 내려주셨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세운 것만이 영원함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실패에 절망하지 말고 원래부터 부셔져야 될 것임을 미리 인정하고 평소에 이런 점을 놓치고 불안에 떨며 살지 않았는지를 나타난 확고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회개해야 한다.
11: 26-32
셈의 족보, 특히 아브라함의 어릴 때 가정 사이다. 성경에 나왔던 족보는 주로 누가 몇 세 때 자식을 낳았고 몇 세를 더 살다가 몇 세 때 죽었더라 하는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 족보에는 특별히 한 요소가 더 들어가 있다. 그 곳을 떠났더라 라는 요소이다. 이사를 간 것에 대해서 중요시 여긴다.
아브람의 가족이 이사를 가게 된 점을 들어서 과연 인간은 무엇이냐를 파악해야 한다. 아브라함 가족이 이사 하는 사실과 지금 이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가 과연 어떤 인간이냐 하는 점과 서로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자식, 하늘의 자식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불임 부부라는 장치를 마련하시고 그 가정을 그 고향으로부터 떠나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 불임 부부가 이곳에 살다가 저 곳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자식을 잉태케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물으신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라고 말이다.
어디서부터 어디로 떠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아브라함을 벗어나야 할 것이 단지 지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출생하고 자라왔던 그 모든 인간적이고 육적인 환경에서부터 철수하는 것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혈육 그 자체에서 아브라함은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원래 이름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지어주는 법이다. 자식이 자기 이름을 임의로 바꾸겠다는 말은 부모와의 고리를 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래가 사라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이름이 바꿨다는 것은 너의 운명과 장차 팔자가 다 바꿨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인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새로 지으신 이름 자체가 담고 있는 그 내용이 그 사람의 남은 여생이 된다. 부모로부터 모든 관계는 절단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적인 요소가 없는 데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뭔가 새로운 존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름이 담고 있는 운명의 내용대로 말이다. "이것은 내 것, 내 영역, 내 나라, 내 가족"이라는 것은 없어졌다. 단지 있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 그 뿐이었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도와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계획 해 나가시는 일에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께 하심'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점점 짧아지고 없어져 가는 것이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 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위에 어머니를 갖고 있는 사람을 약속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약속된 사람은 약속된 내용이 담겨 있는 사람이다. 아브라함 경우에 모든 것을 떠나 보내고 그 빈 것에 하늘의 약속으로 모두 채워져야 했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브라함의 남은 인생을 채웠다. 예수님은 남자 없이 태어나신다.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예수님을 잉태한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은, 아내의 능력이나 자신의 생식 능력과 관련 없이 한 아이를 얻게 된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어떻게 태어난 자인가?"하고 말이다.
아브라함은 무엇으로부터 떠나야 하는 것인가? 창세기 15:1-2절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상속자로 엘리에셀을 내세운다. 물론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뜻을 거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창세기 16장에 이번에는 아브라함 아내 대신 아내의 여종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나님은 거부하신다.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약속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약속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약속이 우리를 가져야 한다. 약속이 우리를 지배해야 하고 약속이 우리를 끌고 다니는 것이다.
교회라는 것은 오직 약속만 증거 해야 한다. 약속 아닌 것을 증거 하게 되면 그것을 믿는 자로 하여금 죽어서 엉뚱한 곳에 이르게 만들 뿐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 사람은, 결국 약속만을 최종 의지하게 된다. 이점이 비약속인과 다르다.
하나님은 친히 약속 된 분을 주셨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예상치도 못한 자식 이삭을 주신 것처럼 말이다. 이 소식을 접한 사라가 하도 기가 차서 장막 뒤에서 홀로 웃었다. 이 사실로 인해 그 자식의 이름이 웃음, 즉 이삭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이 부부는 이 이삭을 볼 때마다 자신의 능력으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 약속된 자식인 것을 두고두고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웃음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참된 신자는 최종적으로 약속된 예수님을 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