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9장 주석
창세기 9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9장
방주 밖의 홍수에서의 구원이란 사실은 이미 방주 안에서의 구원의 결과일 뿐이었다. 초자연적인 것을 눈에 드러날 때 와서 비로소 깨닫는 것은 이미 구원을 위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저주하는 초자연적인 것이 되고 만 후의 일이다. 노아는 구원의 의의를 이미 방주 안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고대했다. 비둘기가 입에 물고 온 감람나뭇잎은 결코 옛날의 감람나뭇잎이 아니다. 옛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노아 언약에 의한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방주 안에서의 삶은 무지개 안의 삶의 형태로 바뀌었다. 새 세상은 무지개의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 그 무지개의 원리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새로운 세상은 비록 전까지만 해도 저주의 피를 머금은 땅이었지만 이제는 물로서 씻음 받은 은혜의 세계라는 것이다. 만물은 다시 활기를 찾아 번성하고 생육하지만 그 모두는 물로 씻겨진 세상(무지개는 하나님의 영광) 안의 생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생명에 대하여 조심해야 될 권고를 받는다.
모든 것이 노아에게 더욱더 밀착되어 종속되며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이 그만큼 노아에게 은택을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음식물로도 바쳐져야 한다. 어쨌든 이제부터 번성하고 충만한 피조물은 처음 창조 때의 산물은 아니다.
철저한 노아 종속 시대의 출범은 그 속에 하나님의 자기 약속으로 가득차게 하기 위한 조치이며 이후에 인간과 자연이 누릴 모든 혜택은 하나님과 노아 사이에 체결된 영원한 언약에 그 근거를 두고 주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가족 가운데 이러한 땅의 속성에 위배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은 아버지 노아에 대한 수치를 공개함으로써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성을 모독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함을 자신들의 옷으로 덮어줌으로써 노아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성을 행위로 고백했다. 노아는 잠에서 깨어나 이 일어난 사실을 알고 그가 알고 있는 땅의 원리에 입각하여 가나안과 함에게 저주를 내린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란 언약성취에 부정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번성과 확산이다. 즉 이렇게 해서는 벌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민족이 된다 반면 셈의 하나님께 찬송한다. 셈에게 그런 바른 것을 계시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셈과 야벳에게 축복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축복이란 이런 행위를 하는 자는 이 땅 위에서 하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후손의 번성을 두고 말한다.
하나님이 애초에 선언한 약속은 노아 후손에 와서는 함과 셈의 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장차 함의 후손인 가나안 민족과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사이의 가나안 땅에서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는 노아가 예언한 대로다.
노아가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일까? 또 다시 홍수심판이 없게 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마음 놓고 죄악을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것을 가르쳤는가?
초자연적인 것은 이미 자연적인 현상 속에 낮아진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를 알고 그 진리의 확산과 전체적인 통치의 날을 고대하는 입장과 노아의 은혜를 배제한 채 모든 것을 자기 힘의 소산으로 간주하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내리신 자연의 선물을 당연시하는 무리 사이의 역사가 다 될 때까지 투쟁은 쉬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노아의 안목으로 자연을 바라봐야 한다.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노아 언약에서 야기된 필연으로 여겨질 때 그리스도를 섬기는 우리들은 결코 외로움을 모를 것이다. 땅 위에 사는 자들은 먼저 땅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들이 있을 때 그들을 통해 구세주를 파견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만이 이 원리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삼라만상, 낮과 밤과 해와 달과 별들도 그들만이 통하는 언어로 이 사실을 역사 속에서 전달하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은 왜 모른단 말인가?
피를 흘리면 하나님이 보복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노아 언약으로 새로 창조했다. 심판은 하나님의 소관이며 햇빛과 공기를 주신 것은 노아의 언약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피를 흘리는 것을 싫어하신다. 땅은 노아 언약에 의해 안식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죽이는 일이 일어 나는데 하나님이 죽이라고 해서 죽이는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노아의 하체를 가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덮어주었다. 덮어 줌의 은혜로 유지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죽을 인간이 하나님의 덮어줌으로 살아난 은혜 덩어리란 말이다. 담요로 공개하는 것이 아니고 덮어주었다. 덮어줌의 은혜이다. 죄를 간과하심으로 롬3:25 간과-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의인이 된다.
안식의 땅이기에 안식의 의미를 아는 자만 살고 안식에 적합한 씨 덮어줌의 은총을 아는 자만 살고 나머지는 멸망한다. 덮어줌의 은혜를 모독하고 자기의 행위와 노력에 기대하는 자들 함 가나안 같은 사고를 철저히 우리는 공격해야 한다. 역사가 그렇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의 군사란 말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는 사고와 싸워야 한다. 전도, 헌금해서 예배당 세운다고 교회가 아니다. 영생을 받은 자만이 교회이다. 인간 자체가 성전이지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하면 된다.
앞으로 땅에는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다. 시1편 의인의 회중은 공짜로 주신 은혜만을 빈 마음에 고이고이 간직하는 사람이 모인 회중을 말하는데, 곧 천국이 의인의 회중이다.
셈, 함, 야벳으로 나누는 것은 인종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축복과 저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함의 정신은 영웅주의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셈과 야벳은 비영웅주의이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를 보여준다. 축복 받는 족속의 특징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끌어 간다. 영웅과 약속의 대비이다.
두 민족이 서로 서로 섞여 있다는 것은 한쪽은 압박하는 쪽이고 다른 쪽은 압박을 받는 쪽을 나타낸다. 고난을 받는 쪽이 오히려 승리를 하는 것이 창 3:15의 성취이다. 시68:21에 원수의 정수리를 치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
9:1-7
하나님께서 지시를 내리는 것은 주도권부터 이양된 자에 한해서만 내리는 지시와 명령이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바쳐진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인간 행위의 주도권이 더 이상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피 때문에 우리가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를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8:20절에 정결한 희생 제물로 인하여 노아의 가족은 살아났다. 노아 가족뿐만 아니라 이 피의 혜택을 입은 무리가 바로 각양 땅의 짐승과 바다의 짐승과 하늘의 짐승들이다. 노아와 및 동물의 무리들은 '생명'이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보여줄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전의 생명과 다른 홍수 이후의 새 생명에 대해서 말이다.
하나님은 생존의 조건으로 음식물을 거론한다. 홍수 이 후 살아남은 사람과 짐승의 무리들이 먹어야 될 음식물 안에다가 새 생명의 원천에 관한 내용을 담는 식으로 하나님은 노아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다.
노아 홍수 이 후에는 생명이란 인간이나 어느 짐승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흠향 하시고 받으시는 정결한 제물의 생명에만 기초 되어 있다. 그 향기를 흠향 하시고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서는 이 피조 세계를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담기 위해 인간과 짐승 사이에 위계 질서를 세우신다.
이제부터는 동물성 고기를 음식물로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로서 창세기 1장에서 식물들이 동물들 앞에서 놓여 있는 처지가 이제는 짐승이 인간 앞에 놓인 처지가 되었다. 음식을 섭취한다는 것은 곧 생명을 보장 받는 것이다. 그 생명의 출처가 식물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성까지 확대가 되었다는 말은 창세기 1장의 입장에서 더 이상 생명을 설명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말이다. 피가 없는 생명 설명은 식물성 음식물로서는 더 가능치 않다는 말이다. 식물성 만이 음식물이 된다면 식물에게는 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부적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 동물성 음식물을 허락하시면서 조건을 다신다. "피 채 먹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피는 인간이 감히 손 델 수 없는 다른 차원에 그 원천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17:10에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다. 피를 먹는다든지 타인의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의 원천을 건드린 것이 된다. 생명을 은혜로 공급 받는 주제에 그 은혜의 원천에 대한 주도권을 인간이 가져 올 수는 없다. 이러한 법칙을 하나님께서 방주에서 나온 언약에게 담고자 하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이후에는 모든 인간들은 같은 생명에 예속되어 있다. 따라서 타인의 생명이나 자기의 생명에 대해서 더 이상 주도권을 행사 할 수 없다. 음식물로 준 짐승의 고기나 피 중에서 피를 섭취해서 생명이 연장되는 것을 주도권을 쥔 하나님께서 의도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피를 쥐고 있는 하나님이 주도권이 의도하는 방향과 목적은 요한복음 6:54-55에 아무리 하나님이 허락하신 곡식을 먹고 동물성 기름진 고기를 먹어도 예수님의 피를 먹지 못하면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미리 노아와 언약을 맺은 것이다.
이 시대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피의 원천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진정 살아 있는 자이다. 요한계시록 21:8에 믿지 않는 자와 살인 하는 자는 지옥의 유황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살인이 단순히 남의 생명 해침이 아니라 생명의 주도권이 여전히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살인한 적이 없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도 역시 지옥 불에 들어가야 마땅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생명 없다고 간주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 이후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동물성까지 허용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먹고 수명 연장이 되는 것이 곧 생명이 아니고 피에 주목하는 하나님의 규칙을 받아드리는 것이 곧 생명이다. 오늘날 이 시대에서는 말이다.
9:8-17
하나님께서 이 일방적 언약을 내리시면서 언약의 증표까지 남기신다. 그 증표로 인해 새로운 예속 관계가 만들어진다. 증표가 제공된다는 것은 증표를 받는 쪽이 주는 쪽에 영구히 매이게 된다는 것이다(창세기 17:10-11). 증표라는 것은 언약이 내려진 후 과거와 완전히 단절 되었음을 말해주는 표시이다. 과거와 단절된 표시가 없다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다루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증표로 남기신 것은 이 세계는 홍수 전과 완전히 다른 규칙과 질서 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고 그 규칙에 모든 생물들이 어쩔 수 없이 예속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무지개를 사용한 것은 무지개가 피어 올랐다는 말은 잠시 전에 한바탕은 물벼락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물 벼락이 이미 과거 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내용과 잘 부합되는 것이다. 그것도 이 세상 안에서의 각 사람마다의 차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갖는 과거와 현재의 차별을 표현했기에 자연물로서 증표로 삼으신 것이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구원 받은 증표는 예레미야 31:33에 하나님의 법이 돌비석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 받은 증표이다. 이 새겨진 것을 하나님 앞에 나타낼 수 있다면 구원 받은 자 이다. 로마서 8:9와 고린도전서 12:3에 오늘날 언약의 증표는 바로 예수님이다. 마음 밖의 예수님이 아니라 마음 안의 예수님이다.
9:18-29
같은 집안인데 하나는 저주 받는 후손으로, 다른 하나는 영원히 축복 받는 후손으로 갈라서게 되며 그 가운데에 또 노아가 있었다. 여기서 노아가 지닌 언약적 위상이 드러난다. 디모데전서 2:5에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이 존재한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중보자를 끼어 넣는다. 그 중보자도 하나뿐이다. 이 사실로 인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는 필히 먼저 중보자와 상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중보자와 무관한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지옥 보낸다는 것이다. 중보자가 등장하게 되면, 인간들이 인간끼리 상호 단합할 모든 가능성을 영원히 파괴되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이 중보자로 인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갈라짐이 성립한다. 같은 가정이나 친척이나 가족 속에서도 하나 되지 못하고 중보자로 인해 균열된 상황이 나타난다.
따라서 지옥 갈 사람들은 모든 중보자의 흔적이나 위상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흐지부지 하는 쪽으로 생각이 돌아선다. 그 일 중의 하나가 가나안과 함의 행위이다. 이 인간들은 노아가 갖고 있는 중보자적 입지를 의도적으로 부셔버린다. 노아 입장에서 노아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 입장에서 노아를 평가해 버리는 것이다.
노아는 그 자체로 위대하지 않지만 노아가 우리에게 전해준 그 구원의 정신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완벽하다. 노아의 벌거벗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방주 안에서도 갖고 있었던 수치이다. 그의 수치는 그의 중보자적 역할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 중보자적 위치 때문에 같은 자식이라도 지옥과 천국으로 영원히 갈라서게 되었다.
저주란 이처럼 중보자의 토대가 없음으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셈과 야벳이 담고 있는 구원의 취지가 이 우주에 충만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구원의 취지가 누락되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저주 받는 운명으로 전락되는 것이다.
노아는 장차 십자가 달리시는 메시야과 관련 있는 자이다. 예수님까지에 이와 같은 정신은 계속 이어지는데 바로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일관된 구원의 은총이 작렬하고 있음을 아브라함의 종이 증언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 차례이다.
갈라디아서 3:27-29에 우리가 위대하고 실수 없는 자가 되어야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관된 구원의 일을 우리가 덧 입어야 한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으니라' 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가 덧입어야 될 분이 더 소중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