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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9. 8. 21) 2강자유게시판디모데후서

광주 강의(09. 8. 21) 2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8. 21) 52-2

지난 시간 ‘나라’라는 것은 동질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동질성이 안 되니까 주께서 복음적인 사건을 일으켜 동질성을 만드는데, 우리가 그동안 내 주체를 형성하던 나만의 동질성(내 자식, 내 친구, 내 직장 등), 그러니까 나의 왕국이죠. 이것을 주께서 폭탄을 터뜨려서 찢어버리죠.

그렇게 되면 내 주체가 찢어지고 그럴 경우에 빈 공간이 생기고, 그 빈 공간에 나에게 날아온 돌은 남지요. 다니엘 2장에 보면 돌이 날아와 신상을 치니까 신상이 넘어져서 신상의 발과 천국이 전혀 틈이 없이 바로 이어지잖아요.

세상의 모든 과학은 바로 이어지는 것이 없어요. 약간의 간격 0.999 이것을 1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차이가 있지요. 이것은 완벽하지 않지만 확률상 접근해서 대충 그렇다고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미분(세분화)하면 반드시 간격은 끝없이 생산되고 남아 있어요.

예를 들면, ‘나는 생명을 죽이지 않겠다.’ 라고 했다면, 눈에 보이는 개미는 조심해서 밟지 않고 죽이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박테리아는 어떻게 합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 완벽을 기하고 어느 정도 최선을 기울일 때 그것을 완벽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인간은 자꾸 접근해 가는 반면에 하나님의 일은 접근이 아니고 삼켜버립니다. 작은 봉지가 있는데 큰 봉지가 와서 삼켜버리면 작은 것은 큰 것 안에 들어있지요. 우리가 구원 받을 때 예수 안이지요. 우리는 작은 봉지고 예수님은 큰 봉지. 우리가 예수님께 접근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이미 공간적으로 큰 주님 안에 우리는 작은 가지로 소속되어 있단 말이지요. 그냥 예수 안에 놓여 있는 거예요. 넓은 실내 체육관 안에 한 개의 의자로 있듯이 그냥 놓여 있으면 되는데, 의자가 자라서 체육관을 가득 채우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착해야 내가 예수님처럼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런 생각 하지 마세요. 사람이 착하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 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과거) 것에 비해서 착하다는 식입니다. 이것을 ‘반성하는 이성’이라고 하는데, 반성해서 과거까지 한 것 이상을 했으면 자기는 착함이고, 내일이 되면 오늘까지 착한 것 이상으로 착해져야 착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과거라는 것은 내가 임의로 편집한 것이지 과거 전체는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추억가운데 나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나의 과거를 만들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자기는 고등학생 시절 5대 1로 싸워 5명을 이겼데요. 그런데 동창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5대 1로 싸운 것이 아니라 양쪽이 비슷한 숫자로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친구는 겁이 나서 도망쳤다는 사실이 밝혀지지요.

인간의 과거는 조작된 것입니다. 그 조작된 과거를 근거로 더 나아진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점점 완벽을 향해 접근하려 하지 말고 삼킴을 당하면 됩니다. 주의 은혜에 삼킴을 당하면 돼요.

지금 예수의 나라 이야기를 하는데, 다니엘의 내용은 제가 곧 논문을 올릴 테니까 그 때 참고하시고, 오늘은 넘어가겠습니다.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4:1)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되려면 예수님과 동질화 되어야 하는데, 동질화가 되면 공터 또는 구멍이 생겨서 그 안에 예수님이 주신 은혜가 담기고 그걸 봉합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있는 주체. 그런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나의 것이 됩니다. ‘주님의 은혜로 살아온 멋있는 나’로.

그러면 은혜를 주신 예수님을 공경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은혜를 소유하고 있는 나를 더 최고의 정점에 두고 예수 믿는 나를 숭배하지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주께서 그것을 깨면 다시 나는 찢어지고 주님의 동질성으로 되고, 이것이 반복되지요.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는데, 이 대목을 좀 설명하겠습니다.

‘나’라는 주체 안에는 뭘 머금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머금고 있지요. 제가 좀 전에 설명했잖아요. 성도의 주체는 만날 은혜로 깨지고 은혜로 봉합되고 있는데, 이 은혜 안에 뭐가 들어와 있습니까? 말씀이 들어왔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말씀이 방출되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이 사람이 정면으로 서면 말씀이 방출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잘 지키고 있는 멋있는 내가 증거 되겠지요. 그렇지만 옆(측면)으로 서면 말씀만 와서 말씀만 통과하지요. 그러면 나는 얇아야 됩니다.

항상 인생은 얇아야 돼요. 그래서 공로가 착륙할 자리가 없어야 돼요. 주의 은혜만 왔다가 주의 은혜만 나와야 해요. 그럴 때 ‘말씀을 전파하라.’가 성립 됩니다. 말씀이 와서 온 말씀 그대로 투과되어서 다 나가야 됩니다. 몇 개는 챙기고 몇 개는 빠지고 이러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고 있으니까 딴 말씀은 다 전하면서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쏙 빼요. 왜? 자기가 늘 술을 마시니까.

이번 수련회에 참석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고 계시는 분이 있는데(선교단체의 간사로 계시는 분인데) 그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자기와 같이 공부하는 아가씨들이 결혼을 하고 싶은데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는 말씀이 자꾸 걸린다는 겁니다.

그들이 궁금한 것이 뭔가 하면, 순종은 하되 어느 정도까지 순종을 해야 되는지 그 기준이 모호한데, 남편이 개 패듯이 팰 때도 순종해야 되는가? 술을 마셨는데 어느 정도 취한 상태까지만 순종하는가? 바람피워도 순종해야 하는가? 생활비 안 줘도 순종해야 하는가? 순종의 기준이 어디까지 인지 답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답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단 한 구절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지킬 수 있는 아내는 없다. 그러면 순종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밤에 잘 때 왠지 남편이 귀엽고, 존경스럽고, 섹시하고, 어떻게 나같이 못난 여자를 용납해 주었는지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이 자체가 순종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층이 2층이 있어요. 1층(율법 층)에서는 법을 지켜야 순종이지만, 2층(사랑 층)은 사랑하면 그 자체가 밑에서 이야기한 모든 율법의 완성이 됩니다. 이 율법을 육으로 지키려고 하니까 지키지도 못하고 죄만 낳지만, 2층 사랑의 층에서는 사랑하면 그 자체가 이미 순종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사랑하면 바가지를 긁어도 순종입니다.

반대로 남편 낯짝조차도 보기 싫고, 남편하고 이야기하면서 눈도 마주치기 싫은 마음상태에서는 아무리 남편의 말에 순종해도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왜? 2층에 있는 사랑 층이 아니니까.

이런 말씀을 듣는 아가씨들은 어떤 남자와 결혼해야 돼요? 만나자 말자 눈에서 전기가 나와서 불꽃이 튀고 이런 사건을 주께서 일으킵니다. 이것은 결혼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시시하게 보이던 남편이 어느 날 자기 주체가 찢어져서 주의 은혜가 임하면 너무 사랑스럽고, 고맙습니다. 평소에는 나쁜 남자였는데 오늘은 왠지 좋고 --

보통 도파민에 의해서 사랑은 6개월 마다 식어진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월이 가면 부부사이도 포도주가 숙성하듯이 점점 깊어가고 젊은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깊은 정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그만큼 마음이 낮아져서 그렇습니다.

‘말씀을 전파하라.’가 명령이 아니고 전파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2절).”

여기서 보세요. 지금 우리의 주체는 말씀에 의해서 찢어졌지요. 찢어졌으니까 주체의 자리에 뻥 구멍이 뚫렸지요. 그 구멍 뚫린 자리에 ‘말씀을 전파하라. 범사에 참으라.’는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옆으로 물러갔던 주체가 그 말씀 중심으로 다시 모이게 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것을 자기 공로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은혜로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성취케 하시는 구나.”

제가 강의 시작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은 우리 속에 그냥 쳐들어옵니다. 복음은 주님이 주시고 믿는 것(혹은 거절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말씀이 우리 속에 자리를 잡아요. 방금 한 이야기가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찢어진 주체 안에 주의 말씀을 담으면, 어떤 사람이 ‘말씀을 전파하라.’고 가르치면 다른 사람은 오해를 하지요. ‘당신은 참 열심히 하네요. 믿음이 좋네요.’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이 아니라 말씀이 자신을 끌고 갈 뿐 스스로의 힘으로는 못합니다. 만약 자기 힘으로 해보겠다고 하면 주의 말씀을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어 있지 우리가 이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안 지켜도 들어온 자체가 기적이지요.

3절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여기 ‘때’가 나오는데, 전도서 3장 3절을 보겠습니다.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일전에 어떤 성도의 가정에 아이가 죽었는데 이미아 성도님이 이 구절을 올려놓아서 제가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몰라요. 제가 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그런 때 이 말씀을 들으니,

때는 누구의 손에 있는가 하면, 때를 원하는 우리 손에 주어지지 않아요. 때는 우리가 원한다고 때가 협조 안 해요. 때는 우리의 말은 듣지 않고 주님의 말만 듣고 주님의 스케줄 따라서 터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냥 그 때를 수용하고 때라는 그 파도에 같이 흡수될 뿐입니다.

파도가 치면 우리는 그 파도에 휩쓸릴 뿐입니다. 또 다른 파도에 다른 사람이 휩쓸리고. 그래서 우연히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만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지요. 이게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면서 자기가 알아서 만난 것처럼 여겨요. 그런데 이 만남에 제 3자가 들어오면 잘 지내다가 깨져버리지요. 물론 이 제 3자가 김을수 집사님일 수도 있습니다. 들어왔다 하면 깨지고, 또 들어왔다 하면 깨지고.

그런데 이 김을수 집사님 파도는 자기가 일으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으켰단 말이지요. 계속 일으키는 거예요. 파도처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서 재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니고(진짜 재수 없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성도한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재수 없는 경우가 성도에게는 없습니다. 이 전부가 예수님과 동질성을 이루기 위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예정하신 대로 다 이뤄지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다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전파할 때는 언제일까?’ 라고 생각하지 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즉 때의 주도권을 내가 쥐지 말고 복음 전하면 그것이 때입니다. 때가 되어서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 전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후차적으로 주님께서, 나는 몰랐는데 주님만이 아시는 때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은 상당히 큰 사고를 당해서 입원을 했는데 “내가 왜 입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입원을 해서 옆 침상에 계신 분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복음으로 기뻐하는 것을 보고는 ‘주께서 저 사람에게 복음 전하라고 나를 입원하게 하셨구나.’ 라고 해석을 했는데, 그 해석이 옳아요.

항상 모든 때를 해석할 때 복음을 염두에 둔 때로 해석하면 그 해석은 100점 만점에 100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빼놓고 해석하게 되면 그것은 자기 정당화,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 되고 잘못된 해석이 됩니다. 항상 무엇을 해석할 때, ‘복음을 위해서 왜 생겼는가?’ 물음을 이렇게 복음을 기준에 놓고 ‘복음을 위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이렇게 해석해야 결국은 주님의 공로로 돌아갑니다.

‘나는 안 그랬는데 너무 억울하다.’ 요즘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억울해도 괜찮아요. 그것도 하나님의 때니까.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습니다(전3:4).

여기서 울 때가 있다고 했는데, 여기 주체(혹은 자아)가 있습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다고 했는데 이 울 때를, 내가 생각하는 울 때의 시간을 만약에 15분이라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40분으로도 보이고 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1시간으로도 보입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아침에는 울 때를 15분으로 생각했는데 저녁에 보니까 30분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주님의 사건이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났다고 하는 사건 기간을 정하는 것조차도 내가 주체가 되면 그때그때 달라요. 그러니까 사람 마음먹기는 울 때가 어떤 사람은 5초로 끝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5일 어떤 사람은 5년인 사람도 있습니다.

3년 전의 원한을 못 풀어서, 다른 사람은 다 풀었는데 자기 혼자 울 때라. 다른 사람은 웃을 때로 넘어갔는데 혼자 울 때라. 특히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부부싸움을 하고 서로 풀자고 해놓고 10분 후에 아내가 남편을 향해 ‘당신이 풀자고 하는 말에 약한 불쾌한 느낌이 묻어 있던데?’ 이렇게 제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이런 부부싸움을 어떻게 푸는가? 장점을 찾아내되 ‘내게 없는 것이 당신한테 있네요.’ 라고 이야기하세요. 예를 들면, “나는 화를 내면 참 오래 가는데 당신은 빨리 끝내는데 이건 정말 당신의 좋은 점이네.” 그러고 또 다른 좋은 점을 찾아서 이야기해 주고.

어떤 분이 수련회에서 이런 얘기를 해요. ‘목사님. 제 남편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심심하면 저를 때리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 제가 강의시간에 ‘천사되지 말고 나쁜 여자 되세요.’ 라고 했어요. 당신을 때리는 남편은 나쁜 사람이고, 그런 남편을 용납해주는 나는 천사표 여자가 되고. 이렇게 되면 갈수록 자기는 높아지지요.

같이 지저분해지면 아무 문제없지요. 자기는 천사가 되고 남편은 악마가 되면 갭은 점점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때’라는 것은 복음을 전할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전달 되는 그 때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때지요.

3절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기에서 ‘바른 교훈이 어떤 교훈입니까?’ 라고 한다면 머리 좋은 사람은 즉시 정답이 나옵니다. ‘바른 교훈이란 사욕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교훈.’ 딱 나오지요.

사람들이 교회 나올 때 나름대로 노리고 오는 욕망을 설교자가 다 무시하고 ‘모두가 예수님의 은혜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식으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돌릴 때 이게 바른 교훈이죠.

그런데 그 바른 교훈을 전하면 교회 됩니까?

이사야의 말씀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사6:9).’ 예수님 말씀으로 하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마13:9).’ 귀가 있고 눈이 있어도, 요즘 교회에서 유행하는 성경 쓰기, 필사를 1,000번을 하고, 10,000독을 해도 듣는 귀가 없으면 절대로 복음 세계에 들어갈 수 없지요.

그러면 왜 듣는 귀가 없습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기 동질성, 자기 육의 동질성으로 가득 차 있으면 주님의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전혀 없어요. ‘만원(滿員)입니다. 다음 차를 이용하세요.’ 여기는 우리끼리만 있고 타인은 들어오지 못합니다. 라는 것이지요.

타인이야기 해봅시다. 타인이란 말은 상당히 어려운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예수님이 관계하기 전까지는 타인이었습니까, 형제였습니까? 형제였죠.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졸지에 가인에 대해서 누가 타인이 되었습니까? 아벨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개입했습니까? 하나님에게 가인은 원래부터 타인이었고 아벨은 원래부터 자기 사람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기 전까지는 가인과 아벨이 형제로서 같은 동질인줄 알았어요.

하나님이 개입하면 하나님의 자기 사람은 데려가고 아닌 사람은 그냥 배척해 버리죠. 결국 타인이라는 말은 내 중심으로 살게 되면 반드시 바깥에 누가 머뭅니까? 타인이 머물게 되어 있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자를 천국으로 보내려면 내 중심의 타인을 예수님 중심으로 바꿀 때 비로소 전에는 내 형제이고 내 집안 식구였던 사람이 나의 원수였다(마10:36)는 것이 들통 나게 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워졌는데, 가인이 받은 벌이 뭐죠? 쫓겨나서 타인의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남의 땅에 살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벌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가인은 누구 중심이었습니까? 자기중심으로 살다가 전혀 자기중심을 허용하지 않는 타인들의 세계에서 가인은 졸지에 소외된 타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형벌을 받지요.

가인의 이 모습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인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류로부터 외로운 타인이 됩니다. 그게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린 모습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의 편은 없었습니다. 12제자가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의 타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아침에 눈뜨면 내 식구 챙기지 예수님을 챙기지 않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주체를 사건을 일으켜서 주님이 타인이 아니고 주님이 원래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타인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온 비유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누구로부터 남입니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무시하고 남으로 봤지요. 그런데 지금 강도만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유대인이죠. 그렇다면 유대인을 누가 돌봐야 됩니까? 같은 이웃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돌봐야 되지 않습니까? 그 중에서도 그렇게 가르친 선생들이 누구냐 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이죠. 그러면 강도만난 사람을 제일먼저 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사장인데 그냥 지나가지요. 두 번째로 본 레위인도 그냥 갔어요.

강도만난 유대인의 타인은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이지요. 그런데 누가 돌봐줍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이 유대인 강도만난 사람을 돌봐주는데,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타인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할 때 진정으로 이웃은 우리가 생각한 이웃 바깥에, 참된 이웃은 우리가 남이라고 여긴 그 속에 우리의 이웃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설명하면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에게 타인으로 버림 받았다. 어떻게? 십자가로.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영원한 타인 되시는 분이 우리를 강도만난 사람으로 봐서 치료해주고 낫게 하시는 것예요. 우리 때문에 상처받아 우리에게 복수를 하셔야 할 분이 복수는커녕 복수한 것에 대해서 용서와 더불어 자기 품에 안아주는 식으로 우리를 데려가면서 남긴 흔적이 뭐냐? 십자가 피.

‘십자가를 너 때문에 졌지만 나는 너를 용서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남으로 여겼지만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남으로 여기지 않고 찾아오신다는 이것을 그대로 고백하면 이것이 복음 전파가 되는 겁니다. ‘나는 죄인인데 주님은 우리를 사랑했다.’라는 복음이 바로 이런 의식에서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성경 하나하나가 이렇게 어려워요. 창세기 4장부터 누가복음의 이웃까지를 연결시키려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같이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은혜가 되고 그래요.

그래서 여기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두게 되면 뭐가 발생됩니까? 항상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타인이 되고, 배척하고 남이 되지요. 그렇게 되면 자기 왕국만 고정화 되고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은 전부 자기 밖으로 떨어져나가요.

아까 제가 이야기한 사람처럼 ‘나는 특정교회에 출석한다.’ 좋습니다. 다른 교회는 이단이라고 여겨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자기 짐을 누구한테 맡겼습니까? 형제들에게 떠맡기고 갔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고 제가 전화로 얘기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사과해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까 ‘그것은 맞습니다.’ 라고 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의 잘남을 유지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다 놓으세요. 나의 잘남을 옹호해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붙잡고 있지 말고 놓으란 말입니다. 그냥 못난 채로 있어도 구원 받습니다. 여러분 이웃 잘 만나서 구원 받아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다(마7:12).’고 했잖아요. 그런 이웃이 우리 주님이잖아요.

그 다음 5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여기에서 고난을 받으라고 했는데, 그 뒤 고난의 내용을 봅시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보통 사진이 액자에 있으면 그냥 사진인데 이 액자 밑에 (한문)팔자로 검은 천이 쳐있으면 뭡니까? 죽은 사람이지요. ‘나는 이미 죽어서 초상난 사람이고’ 이런 뜻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4:7).”

고난이 뭡니까? 고난은 나의 타인되시는 타인을 믿는 것이 고난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자기 자신만 믿습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때 그 눈물을 닦아줄 손은 나의 손입니다. 어떤 가수는 그런 거짓말을 했어요. ‘내가 슬플 때 누가 날 위로해 주지? 여러분!’ 여러분이 아닙니다. 내가 돈 있을 때는 찾아오지만 돈 없으면 다 떠날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에 결혼한 황전도사님 장남 세웅씨가 녹매교회 예배에 참석했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감사한지. 돈가스 집에, 그것도 교회라고 찾아와 주니 얼마나 감사한지.

고난이 뭐냐 하면, 나를 믿지 않는 것이 고난입니다. 왜 이런 소리 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고생한다. 살기 힘들다. 이혼했다.’ 자꾸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망가짐을 고난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땅이 15만평 있고, 아파트 4채를 소유해도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고난입니다. 자신의 재주와 노동력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고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비록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내 면류관 받는다. 왜? 자기를 안 믿었으니까. 자기를 안 믿고 누구를 믿었습니까? 나에게 면류관 주실 분을 믿었으니까.

자기 목적을 위해 달려갈 길을 결정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겁니다. 고난이 뭔가 하면 자기를 생각 안하고 자기 외부에 타인으로 계시는 그분을 중심으로, 내가 그분에게 종속된 상태에 있을 때 이 관계가 바로 고난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그야말로 돈가스 두 그릇 먹으면서 금식하고, 침대에 자면서 철야하고 이게 성립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잘 먹고 잘 자면서 얼마든지 금식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믿지 않고 주님을 믿으면 잠자도 철야요 밥을 곱빼기로 먹어도 그것이 금식이 됩니다.

스스로 자기를 아픔으로 위장하지 마세요. 평소에 우리가 자신을 안 믿고 주님을 믿으면 이미 그 사람은 고난의 길을 가고 있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위한 길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착각하지 말고 내 중심으로 스스로 연극하지 말고, 말씀대로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날마다 나의 주체가 새롭게 형성된다는 것을 알고, 우리 주체 안에 주님의 은혜와 말씀이 가득 담겨있고 우리는 말씀이 통과하는 투과막처럼 되어서 오직 주님의 공로만 다시 되돌려주면서 남에게 전파할 수 있는 말씀의 사역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9. 18. 14:1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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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2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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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