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7장 - 8장 주석
창세기 7장 - 8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7장 - 8장
홍수가 시작되기 일주일전에 미리 노아 가족을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하므로 노아로 하여금 미지에 대한 견고한 신뢰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방주 안에는 노아 식구 이외에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동승해 있다. 많은 짐승들과 새들을 생각할 때 유독 주목을 끄는 점은 하나님의 이러한 구별 조치이다. 거룩과 비거룩이 방주에 함께 소속되어 있다. 방주가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 안에서도 지탱할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나중에 방주 안에 있는 생물들이 방주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의 생존은 어디에 근거하여 유지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정결한 짐승과 부 정결한 짐승이 함께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이유는 방주가 지니는 구원의 의미를 새겨주기 위한 조치였다.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나와서 행한 제사에서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아 제사 드렸다는 것은 정결한 것의 희생과 헌신으로 부 정결한 것까지 구원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향긋한 제물의 냄새를 하나님께서 맡으시고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신다. 인간이란 날 때부터 악하니 아예 기대를 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노아가 바친 제물의 정결성으로 인하여 다시는 이 세상을 그 전처럼 저주하지 않겠다. 다시 자연의 질서는 회복되리라.
노아 언약이란 인간의 비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비롯되었다. 땅은 함께 고통 당했는데 땅의 중보자라고 할 수 있는 노아의 등장으로 이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하지만 그 언약실행에 있어 정결한 짐승의 죽임이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언약의 모든 의의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희생이 없는 사랑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 희생된 자는 같은 비거룩에 속한 것이 아니라 비거룩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이다. 거룩하기에 하나님께 소속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장래 나타나는 모든 언약의 정형(定形)이 된다.
언약이란 단순히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이요 수단이라고 여기지 말자. 언약이란 하나님이 우리 죄악 된 세상 속에 자기자리를 마련하는 조치다.
비거룩으로 인해 저주 받은 그 자리를 하나님은 자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낮아지시고 또 찾아오신다. 꼭 그렇게 해야 되시는 이유는 인간의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호소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곁에 두고서도 그것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완악하며 자기 힘으로 비거룩을 극복하여 이 땅에서 위대한 존재로 군림하려고 한다. 이 모든 시도는 신이 되고 싶어하는 타락된 아담의 형상을 날 때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약사상은 그것과 철저히 대립되고 상충된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손을 내밀며 부르짖는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은 극대화되고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최고의 영광을 취하시는 것이다.
인간들은 죄악 된 세상 속에서 고통 하는 하나님과 함께 동참 되어야 한다. 그 고통은 인간의 죄악으로 일그러진 세상과 왜곡된 진리관으로 배척되어 나타난 현실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정신 때문에 예수님과 상응하는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러한 고난의 모습으로 교회가 존립 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중보자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교회의 본연의 자세를 회피하는 식의 목회가 눈에 띄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상적인 권력으로 이 고난을 자기 쪽에서 해소 시켜버리려고 한다. 어쩌면 고난 없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가르친다. 고난이 오는 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간주하려고 하고 반대로 고난이 없이 만사 형통한 것을 하늘이 가져다 준 축복이라고 의식화시킨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사람에게 밟힌다는 엄연한 사실이 현실화되는 때가 바로 교회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때이다. 교회가 앞장서서 예수님을 또 다시 못박을 수는 없지 아니한가!
7:1-5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는 이유는 2절에 노아에게 정결함과 부정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이번 심판과 정결함과 부정함을 전 세계에 나타내는 취지의 심판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신다.
무엇이 정결한 짐승이며 무엇이 부정한 짐승인가 하는 점이다. 사람들은 짐승을 볼 때에 식량 조달용으로 유용하면 유용한 짐승으로 선호하지만 하나님은 거룩과 비 거룩이 우선이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한 짐승과 더러운 짐승의 기준을 알아야 한다. 레위기 11장 1절에서 5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주시면서 인간의 기호에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 편에서 정해 놓은 기준에 의해서 지정 하셨다. 되새김하는 것과 굽이 갈라져 있는 것, 이 두 가지 조건이 다 만족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보기에 착해 보이고 순해 보이는 짐승이라도 이 조건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결코 정결한 짐승이 아니며 정결한 짐승이 아니라는 것은 못 먹을 짐승이라는 것이다. 못 먹을 짐승이라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되게 한 그 요소에 부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되게 하는 그 요소는 거룩이다. 거룩한 요소가 담겨 있을 때에만 이스라엘다운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이 정결치 못하다고 여기는 가축을 먹게 되면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거룩한 그 요소와 충돌되는 것이다.
그 요소가 레위기 17장 11절에 피를 흘려야 되는 그 제물의 속성에 동참하기 위해서이다. 제물이 되기 위해 정해져서 하나님의 거룩을 마음껏 표현하기 위해 백성들의 죄를 지고 피를 흘리며 죽는 그 모습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거룩이 발현되는 것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 속성이 밖으로 나올 때 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노아를 비품으로 삼아 이 거룩을 담고 전 세계에 대한 심판에 나서신 것이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거룩은 바로 '거룩한 자의 피'이다. 앞으로 불의 심판은 예수님의 피가 있느냐 없느냐로 가름된다. 하나님은 결코 거룩하지 않는 자가 이 지상에 생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분이다.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상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7:4-16
사랑하는 친구와 이웃이 저 물 속에 수몰되어 버렸다. 노아에게는 이것이 바로 환란이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생기는 환란이다. 심판이 일어나기에 오로지 심판을 측면에서만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아픔이다. 사도행전 14:22에 성도의 가야 될 길을 잘 표현해 놓고 있다.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까지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구원 받았기에 당연히 환란도 찾아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환란을 반기고 살 수는 없으며 도리어 견디어야 될 문제이다.
지면에 있던 숱한 짐승과 동물들이 있지만 모두다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암수 한 쌍씩뿐이다. 그동안 많은 참새들이 공중을 날았지만 그 모든 참새는 다 사라지고 오로지 한 쌍으로 축소되었다. 그많던 코끼리 떼가 있었겠지만 모두 다 사라지고 오직 한 쌍의 코끼리만이 방주 안에 갇히게 되었다. 모두 다 한쌍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노아 가정 외에 어떤 가정도 없다.
모두 대표자들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과 구원을 증거할 대표자로 삼기 위해 이들을 남겨 두신 것이다. 이 일은 마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그 때 그 상황과 같다. 창세기 1:24-25에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셔서 이 세상을 조성하셨다. 이제 심판 후에도 이 원칙과 이 능력을 그대로 발휘하시고자 하신다.
각자 한쌍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로 불어날 것이다. 결코 노아의 솜씨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노아는 단지 이미 하나님이 내주한 세게 안에 하나님에 의해서 동참케 된 것뿐이다. 종이란 그저 시킨대로 살면 그만이다. 바로 이러한 마음 가짐으로 인해 이미 구원받은 자는 그 환란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노아가 그 당시의 구원받은 자의 대표자라면 예수님 시절에는 12제자들이 있다. 이들도 역시 환란 속에 놓이게 된다. 요한복음 15:19-21에 이미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구원 받은 자이다. 예수님이 당했던 환란과 미움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도 같은 환란을 받았기에 종도 같이 그런 수모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세상 사람들로 죄인 취급 받았으며 바로 그런 외로움과 오해를 마땅히 받는다는 것이다. 성도는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한다. 과업 달성이라는 의식에서 탈피해야 하며 이미 구원 받았기에 세상을 그리워하지 못하는 환란을 겪으면서 하나님 나라로 골인해야 한다.
8:1-12
노아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살아남은 자이다. 이 세상 위에 세상을 지휘하시는 왕이 엄연히 존재함을 노아가 증거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주와 이탈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사람이 평생 살면서 제일 괴로울 때가 이별이나 떠날 때이다. 이별하는 것이 인간을 슬퍼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더 이상 왕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더욱 더 왕다운 것이다.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구원할 자를 계속해서 이별하게 만드는 인생을 살게 하신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그러하다. 자기의 본토와 아비 집을 떠나게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직업과 친척을 다 떠났다.
노아는 두 종류의 새를 날려 보냄으로 하나님의 왕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 새는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기도 하다. 이 방주에서 떨쳐 나와야 되고 이탈해야 한다는 것을 각오한 것이다. 하나는 까마귀이고 다른 새는 비둘기이다. 기존의 것에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비둘기는 방주 속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대표해서 앞서 구원의 세계를 여는 것이다. 이 점은 앞으로의 노아의 임무와 같다. 물의 저주 속에 잠긴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구원의 소식은 앞으로 노아가 담당할 몫인 것이다.
노아가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왕되심이 단지 저주스러운 심판의 행위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와 심판 속에서 구원을 열어 주시는 그 행위 자체도 또한 왕 되심에서 나온 행위에서 나왔다는 점을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은 심판 하실 때도 왕이지만 구원하실 때도 역시 왕이시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까마귀는 그냥 왕래할 뿐이지 아무런 정보도 노아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노아는 까마귀 같은 사명은 담당할 수 없으며 새로운 세상의 정보를 앞서 전달하는 것이 노아가 지닌 사명이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오셨다. 새 세계에 대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심판에 있어 하나님은 물을 사용하신 이유는 창세기 1:9에 하나님의 땅 만드심은 그냥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물 속에 잠기도록 땅을 만드시고 그 위에 덮인 물이 열어 제친 그 범위 내에서만 땅이 되게 하시는 식으로 땅을 만드신 것이다.
구원 하는데도 왕이신 하나님은 그 왕적 법칙을 그대로 적용한다. 심판 속에 있는 자를 심판이 철회되는 식으로 구원하시되 단 그 저주를 철회 하는 그 범위 내에 있는 정해진 인간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도록 구원하시는 것이다.
자신이 저주 속에 잠겨 있음을 당연히 여겨야 구원이 오로지 왕되시는 분의 은혜로운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비둘기 같은 마음이다. 저는 무서운 저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라는 환희가 있어야 제대로 하나님의 왕 되심을 증거 하는 신자라고 할 수 있다.
8:15-22
우리는 우주의 중심을 믿어야 한다. 우주의 근원이신 분이 우리들과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서 우리는 안정된 채 살아가야 한다.
맹렬한 대홍수가 있고 난 후 하나님은 노아보고 방주에서 나오라고 했다. 이때까지 지구상 어느 곳보다 안정성을 주던 그 환경에서 나오라는 것이다. 만약에 나오고 난 뒤에 또다시 저주의 비가 온다면?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에게 순종해서 과감하게 방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왜 이 지구 상에 홍수의 심판을 내렸는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7에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이 세상을 정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노아는 자신이 구원받은 이유가 자신이 의인이라서 구원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것이 안정성이다.
20-21절에 비록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가 어릴 때부터 악하지만 정결한 제물의 희생을 보고서 다시는 전에 하던 것처럼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일을 보고 노아는 안심하고 방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의롭다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방주 밖에 있으나 안에 있으나 정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안정성이다.
하나님의 일관된 뜻을 남긴 노아의 제사는 노아 때 처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아벨의 제사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서도 희생의 정신이 배겨 나온다. 제사드린 자가 도리어 악에 희생을 당하는 모호함이 노아 제사를 통해 다소 분명해졌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서 보면 결코 불안정한 것이 아니며 불안정한 것은 도리어 우리의 마음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환경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