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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울산강의(창세기 50장 a)자유게시판창세기

울산강의(창세기 50장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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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강의(창세기 50장 a)

2009년 5월 1일

창세기 50장

이근호 목사

오늘은 창세기 마지막 50장입니다. 창세기 마지막 장이 야곱의 죽음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야곱의 죽음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야곱의 죽음이 아니고, 야곱 언약이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야곱을 통해서 야곱 언약이 진행되는 절차가 이제는 야곱의 죽음 속에서 어떻게 야곱 언약이 이뤄지는지 보겠습니다.

보통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것도 기회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비록 죽어도 언약은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제가 말을 이렇게 해야 되겠죠. “사람이 죽어야 비로소 언약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말이 더 정확합니다. 살아 있으면 하나님의 언약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자꾸 반대하는 경향을 띕니다. 나는 살아야 하고, 언약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내가 죽을 때 언약이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 죽어봐야 살려주심을 실감하게 됩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관계에서 부자도 살아있고 거지 나사로도 살아있으면, 그들에게 아브라함 언약과 아브라함의 가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 그게 어느 동네 할아버지인데? 그 아저씨 누구신데?’ 별로 의미 없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때 부자는 그냥 살아있는 게 아니라, 부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때 거지 나사로는 어디에 합류했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살고 있는 세계에 합류했고, 그 곳을 예수님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그 나라에 거지 나사로가 합류했고, 부자는 지옥 불에 갔습니다. 곧 지옥불이란 아브라함이 없는 곳입니다.

그들이 생전에는 “아브라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너는 거지”, “나는 부자” 이렇게 살았는데 막상 죽고 나니 “아브라함과 함께 있다”는 그것이 바로 축복이고, “아브라함이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을 제가 두 자로 바꿔보겠습니다. “언약”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것은 “언약”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죽어봐야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살아있을 때는 겉모습으로 비교를 하고, 사람들의 평가가 둘러싸여서 거지 나사로가 천사에 받들려 올라가는 진가를 전혀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둘러싸였습니까? 언약에 둘러싸였습니까? 부자는 아무것도 자기를 둘러싼 게 없습니다. 그냥 “자기자신” 뿐입니다. “자기자신” 뿐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믿을 게 없다”겁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자신” 외에 믿을 게 없다는 것, 그걸 불신앙이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자기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지는 자기가 “거지된 자체”를 신앙으로 보거나, 믿지 않고 “함께 되신 분”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창세기 50장을 마무리 하면서 사람이 죽었을 때 “야곱에게 한 약속이 어떻게 이뤄지느냐?”를 시작점으로,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야곱 언약은 어떻게 살아 역사하느냐?” 그걸 보여주는 출발점에 와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50장 이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 언약에 대해 얼마나 많은 오해를 갖고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무지몽매하도록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왔느냐는 것입니다. 그 경과과정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의 긴 역사의 순간, 순간입니다.

꼭 우리들 이야기죠? 예수 믿는다 해놓고선, 돌아서면 순간 “예수가 무슨 의미 있느냐?” “예수가 나에게 왜 필요한데?” “예수가 도대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지?” 예수 믿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은 또 어떤 관계가 있으며, 내 사업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도대체 이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 낮 상당히 이슈와 논쟁거리가 되는 유명한 영화를 ○장로님과 보고 왔습니다. [박쥐]라는 영화입니다. 다른 사람은 영화를 편하게 봐도, 저는 꼭 숙제로 다가옵니다. 박쥐에 대한 줄거리와 의미는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태도, 종교에 대한 인간의 본모습 다 나옵니다.

영화에 보면 문제점이 여기와 똑같습니다. “살아있는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실 것이냐?” 이것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있게 되면 누가 하나님의 구원을 자꾸 방해하는가? ‘나 살아있습니다’라고 하는 “살아있다”는 이것이 구원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을 “살아있는 나”를 의식할 때는 잊어버리게 됩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잊어버리고, 불평을 하고, 불만을 자꾸 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눈을 감고 죽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아무 일 없이 이뤄집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물론 죽었을 때는 모든 게 정리됐기 때문에- 살아있으면서 언약의 혜택을 받으면 이것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복잡할뿐더러 복잡해져서 저 밑에 내려갑니다. 고난을 받습니다. 박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언약 때문에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고, 고난 받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언약 속에 들어가면 고난 받고, 박해 받고, 미움 받습니다. 여기에 반드시 박해자가 있고, 피해 입히는 가해자가 있고 고난을 주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이 완성된 세계의 실체라면, 여기 그림자는 가해자와 피해자 이 양쪽으로 이 세상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 하나 찾아봅시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에 보면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예수님에게 아버지로부터 모든 세상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는데 예수님 쪽에서 둘로 구분됩니다. 한쪽은 만민이 나오고, 다른 한쪽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 선택한 자, 주신 자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이 지상에서 발휘되면 “만민”과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구분 짓는데 활용됩니다.

제가 수요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메뚜기부터 개미 하나까지 전부 아버지되신 예수님께서 다스리고 인도하십니다. 그 목적은 “만민”과 “아버지가 주신 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왜 구분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영생은 결코 만민에게 주어질 용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생은 오직 “아버지가 주신 자”에게만 영생이 돌아가도록 주어진 권세이며, 거기에만 쓰입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제 말이 맞는가 보세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뭘 준다 했습니까? 영생을 주게 하십니다. 그 다음은 뭡니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준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나사로와 부자를 섞이는 법이 없게 하는 겁니다. 착각했다. ‘내가 널 구원하려는 걸 깜빡 잊었네’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너는 구원받지도 못할 자인데 여기 천국에 와있지? 내가 실수했나.’ 이런 법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영생 얻을 자와 얻지 못할 자를 구분 짓는데 이 세상의 모든 에너지, 역량들이 여기에 다 투자 됩니다. 다 투여합니다.

이걸 구약적으로 보면 언약입니다. 언약에 속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여기에 속한 자. 야곱이 지금 죽습니다. 야곱이 죽을 때 이 야곱을 예수님이라 봅시다. 예수님에게 영생 얻을 자와 만민이 구분됩니다.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반드시 언약을 실현시킬 힘도 같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 힘은 어디에 주어지는가 하면, 영생 얻을 자와 얻지 못할 자를 구분하는데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살아있습니다. 언약에 속한 사람은 살아있을 때 핍박과 박해와 억압을 받습니다. 나머지는 가해자가 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은 후 과연 언약은 정지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죽더라도 야곱의 죽음은 산 사람을 영생 얻을 자와 영생 얻지 못할 자를 구분하는 힘으로 여전히 작용합니다. 그것은 죽음이 주는 효과입니다. 오늘 창세기 마지막을 하면서 이 대목에 공부를 해봅시다.

‘유훈통치’라고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살아계셔서 설교를 매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 기분 나쁘지만 돌아가셨다고 합시다. 돌아가셨는데 교인들이 ‘이 빈자리에 아무도 앉지 마! 여기는 서경수 목사님 자리야!’ ‘돌아가셔도 비워 놔’라고 하고, 교인들이 앉아서 ‘이제 예배 시작합시다’ 하니까 비워 있는 자리에서 옛날 서경수 목사님 음성이 나온다면 아주 무서운 일이 되겠지요?

그 무서운 현상이 그대로 현실화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못 믿겠죠? 그래서 ○○○목사님이 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화산의 마그마에서 불씨가 튑니다. 그런데 화산에서 언약이 나온다면 이 언약에 아무 것도 있으면 안됩니다. 공백, 죽음입니다. 죽음이기에 살아있지 않습니다. 산 사람 같으면 말이 됩니다. 죽어있기 때문에 아무도 없습니다. 공백입니다. 비어있습니다. 공백에서 어떤 힘이 나올 때 ‘여기가 공백이다. 여기는 화산 터지는 장소다’라는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하면, 화산이 터지는 그 위는 한라산처럼 구덩이가 있는데 둘러싼 그 안은 텅텅 비어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터져 나왔다는 흔적이 둘러싸여 있을 때 이것을 ‘언약 사건’이라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어떤 사건이 나왔다는 말은 그 안에 존재가 없고 대신 사건이 있습니다. 사건은 한 번 터지면 똑같은 상황은 없습니다. 한 번 지나간 강물에 다시 똑같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사건이라는 것은 만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바람 같다’라고 합니다.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리게 하지만 그 흔들리는 현장에 가서 ‘누가 흔들었어?’라고 물으면 누가 대답합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바람을 잡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기다렸다가 머리카락이 날릴 대 그 바람을 붙잡으려고 하면 그 바람이 잡힙니까? 그냥 내 머리카락만 날리고 지나갑니다. 이처럼 존재라 하는 것은 붙잡을 수 있지만 사건은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변화를 일으키며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이런 사건이 나오려면 존재가 비켜줘야 합니다. 사건이 되려면 존재는 사라져야 되는 겁니다. 그 존재가 사라지는 그 공백.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 그 분이 어디서 사라졌지?’라고 할 때 이 지점. 이 지점을 이야기할 때 사건을 지칭할 수 있는 변화의 어떤 테두리, 그 안에 바로 우리에게 지금 혜택을 주는 분이 이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건으로 남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누군가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무슨 언약이라 합니까? ‘새 언약’ ‘마지막 언약’입니다. 새 언약을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남자의 죽음으로서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나’라는 존재와 타협하거나, 우리에게 무엇을 지시하고, 명령하고, 율법 지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제쳐버리고, 우리 존재를 존재로 구원하지 않고, 화산 분화구에서 뿜어 나온 한 남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건 속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럼 우리 존재는 어떻게 됩니까? 사건으로 변화 됩니다. 이 사건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우리를 죽이는 사건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특히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 보이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보인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삼다수란 대상이 보이잖아요) 보이니까 존재하는 것입니다. 컵이 보입니다. 존재입니다. 제가 존재란 어려운 말을 썼지만, 쉽게 설명하면 박카스가 있습니다. 있을 때 존재라 합니다. 바람이 불어서 박카스가 넘어지면 박카스를 넘어지게 했던 바람은 어디에 존재합니까?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바람 불면 박카스 떨어집니다. 이것도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사건을 붙잡을 때 그 붙잡는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에게 없습니다. 믿음이 와서 구원해야 되지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수 없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도 분화구에서 터져 나와야 돼요. 사건이 터져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내가 믿는 게 믿음 맞습니까?’ 하면 그 때 믿음이라는 것은 그 사건 터져 나오는 언저리, 테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건이 있다, 없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원래 붙어 있었는데 바람이 부니까 머리카락이 헝크러졌습니다. ‘엄마, 뭔가 지나갔어?’ ‘거짓말 하지 마. 뭐가 지나갔어?’ ‘뭔가 지나갔어. 바람이 지나갔어. 사건이 지나갔어.’ ‘어떻게 믿나?’ ‘봐. 내 머리카락 헝크러졌잖아.’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머리카락 헝크러진 것처럼 나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한 내 존재 중심, 내 중심. 내 존재 중심이 있습니다. 여기에 누가 있습니까? ‘나’가 있습니다. ‘나’란 말은 사건이 아니고 존재입니다. 손에 잡힙니다. 내 중심은 나의 중심이고, 나의 중심은 존재 중심이니까 존재 중심은 천국에 못 갑니다. 존재 중심이 무엇으로 바꿔야 합니까? 사건 중심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이 사건은 내 존재를 늘 죽이는 사건으로써 와야 됩니다. 진짜 그 사건이 왔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나에게 이 사건이 오게 되어서 나에게 이런 결과가 주어졌다는 것을 믿어지는 언저리를 말합니다. 화산 언저리, 그 테두리 거기에 믿음, 소망, 사랑, 여러 가지의 새 언약, 어떤 변화, 성령 받음 이런 것들로 둘러싸입니다. 어디서 나온 겁니까? 예전에 내가 예상도 못한 게 나왔습니다.

예전에는 내 존재 중심이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어디서 나옵니까? ‘나’에게서 나옵니다. 내가 만든 믿음, 내가 만든 소망, 내가 만든 사랑, 내가 만든 선행이 나왔는데, 성령의 바람, 즉 십자가 바람이 휙 지나간 후에는 낯선 소망, 낯선 믿음, 낯선 사랑 이게 나를 콘크리트 타설하듯이 부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에게 주도권이 있지 않고, 사건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이 살게 할 때 내 존재는 뭉개지고, 사건에 포함되어 내 존재는 회칼에 잘리듯 탁탁 잘려져 버립니다. 내 존재는 토막토막 사건 속에 토막이 납니다. 오늘 밤 밥 먹은 것도 주의 사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내가 숨 쉬는 것도 사건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서 주도권을 쥐고 바람 불듯이 나에게 주신 것으로 여깁니다.

하루는 화장실에 앉아서 타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타일 한 장이 왜 우리 집에 있느냐는 겁니다. 나같이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에게 왜 타일 바른 화장실을 하나님이 주신 건지 이게 하나의 사건으로만 해결이 안되는 겁니다.

창세기 50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야곱이 죽었습니다. 야곱이 죽고 난 후 과연 야곱 언약도 끝났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끝난 게 아니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식으로 이제부터 영화가 시작되는 겁니다. 야곱이 죽고 난 후 야곱의 효과가 그 다음에 어떻게 사건화 되는 지, 또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 쏟아지는 지를, 제1막 1장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창세기 마지막 대목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무엇을 남깁니까? 예언을 남깁니다. 예언을 남긴 예언자가 죽어버리면 예언도 끝나느냐? 아닙니다. 야곱은 한라산 분화구 속에 들어갔습니다. 죽었으므로 야곱의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비어있는 걸 공백이라 합니다. 비어있지만 여기서 무엇이 터져 나옵니까? 야곱이 49장에서 예언했던 것입니다.

비어있는 곳, 바로 이미 죽은 사람에게 예언이 나옵니다. 예언이 나왔다는 말은 여기에 많은 존재가 있더라도 그 존재는 무시되고 예언이 덮어버리는 하나의 화산재를 말합니다. 바로 사건입니다. 사건이 주어지므로 앞으로 모든 것은 야곱 언약에 준해 한쪽은 영생 얻을 자로 한쪽은 영생 얻지 못할 자로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야곱 언약이 실시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생각해야 될 것은 ‘기준’입니다. 구원의 기준점을 주로 목사들이 제시 하는데, 목사들이 힘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의 기준점을 제대로 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안 되고, 운영이 어렵고, 교인이 다 떠나고 나중에 자기 가족밖에 남을 그 때에 떠나간 사람을 붙잡기 위해 구원의 기준점을 변경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하는 문제입니다.

이론상 구원의 기준점은 누가 정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안 죽었고. 아직 존재가 있습니다. 날마다 사건이 우리에게 발생하지만. ‘우리’라는 존재에서는 결정 나지 않고, 죽으신 분, 이미 십자가에 죽으신 분에게서 결정이 납니다.

예수님 말씀 하나하나가 예언이 되고, 그게 사건화 됩니다. 그러면 분화구 같은 공백에서 튀어나온 예수님 말씀이 기준점이 될 때만 우리는 천국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 나사로가 어디에 합류합니까? 아브라함에 합류합니다. 그러면 거지 나사로 살 때 아브라함은 공백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공백입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합류했다는 말은 사건으로 당겨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믿음으로써, 다시 말해 성경에 나온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믿음으로써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된 겁니다.

그러나, 부자는 아브라함이 없는 곳에 갑니다. 이것은 평소에 아브라함 언약과 상관없이 버림받은 자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나사로 사는 기준점이 달랐다는 겁니다. 나사로의 기준점은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사로가 천국에 갔을 때 부자가 하는 말이 ‘동생들이 있으니까 나사로를 다시 살려 보내면 혹시 동생들이 살지 않겠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그럴 필요 없다. 이 세상에 선지자와 모세의 글이 있기 때문에 그걸 믿는 자는 다 이곳에 온다.’라고 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선지자와 모세의 글,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하나의 전체 사건 덩어리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사람을 믿지 않고 말씀 믿을 것이고,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과 사람만을 붙들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목하거나 예수님 옷을 만져도 소용없습니다. 자기가 말씀의 사건화 되지 않으면 예수님이 뒤에 떠밀어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 사건화 된 기준점, 목사 자기 자신에게 사건이신 죽으신 분에 의해 뒤집어지면 눈에 보이는 사람이란 존재가 안 보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기준입니다.

설교 40분하고 난 후 누가 있거나, 아무도 없어도 지금 자기에게 사건이 와서 이야기할 뿐입니다. 사건으로 안 뒤집어지면 반드시 존재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저 사람 어떻게 꼬드길까?’ ‘저 사람 부자니까 우리 교회 오면 헌금 많이 할 거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목사는 구원의 기준점을 사건으로 봤지만 오랜만에 온 사람은 사건을 보지 않고, 자기 존재로 봅니다. 자기 자신은 구원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주님은 당신이 왜 구원받아야 되는 되묻습니다. 주님은 산 사람 구원 안 합니다. 주님은 죽여서 구원합니다. 왜? 살아있으면 자기중심이 되기 때문에 구원이 안 됩니다.

박찬욱 감독은 [박쥐]라는 영화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종교도 필요 없더라’ ‘종교도 귀신한테 못 이긴다’ 라고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박찬욱 감독은 ‘인간은 왜 구원되어야 하는가?’ 그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천만에 말씀, 만만의 콩떡.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를 사랑합니다. 그럼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 어디 있는가?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는 사건이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를 사건으로 준비합니다. 사건화시켜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만 데려갑니다. 데려가지만 반드시 주님의 사랑으로만 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못 받은 인간들을 하나의 배경으로 쫙 깔려놓고 데려갑니다. 들러리로. 신부는 하나이지만 들러리는 여러 명입니다. 들러리는 신부를 부각시키고, 빛나게 할 뿐입니다.

영생 받은 자를 빛나도록 하기 위해 영생 받지 못한 인간들, 좀비 같은 그런 인간들 많이 깔아놔야 합니다. 울산에도 많습니다. 영생 주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이 임해야 영생 받는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그들은 있는 것입니다. 존재로만 우기라고.

그래서 그들은 존재에 입각해서 자기 존재로 사건 받은 목사를 핍박합니다. ‘날 알아주지도 않고, 어렵게 교회 나온 날 무시하는 이 교회에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라고 합니다. ‘왜 구원의 기준점을 성경대로만 이야기하느냐?;라는 겁니다. 대구에서 공부하는 ○목사님 대구 어느 고등학교 교목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취직할 때 신학교 나온 것 말 안 하고, ○○대학 철학과 나온 걸로 교목 됐습니다. 이사진들이 목사인 줄 압니다.

그 학교 실권자 이사장 아들이 하는 말이, ‘성경은 가르치지 마세요.’ 강의 제목도 성경 시간이 아닌 상담과 윤리로 하고 너무 성경을 가르치지 말라고 당부를 한답니다.

애들은 영어 단어 외우고, 수능에 안 나온다며 전부 개판친다는데... 그럴 때 무엇을 느낍니까? 모멸감, 무시당함. ○목사님이 언제 당해 봤겠어요? 전에 이런 무시와 박해를 받아봤겠습니까?

구원의 기준점을 변경해야 하느냐? 마느냐? 이게 목사의 딜레마입니다. 매일같이 겪는 일입니다. 구원의 기준점을 달리하면 교인들은 모이는데, 문제는 그들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의 기준점인 좁은 길을 바로 제시하면 사람들은 다 떠나가지만 진리는 진리대로 남습니다.

바로 이런 구원의 기준점을 전하는 목사는 그 순간 자신의 죽음을 느끼는데 이 죽음은 자기 존재의 죽음입니다. 존재 안에 자기 영광이 들어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죽여 버리니까 자존심 상함, 모멸감, 기분 나쁨 느끼는 겁니다.

이런 자기 부인, 자기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통해서 목사에게 계속 주어집니다. 어떻게? 이렇게. ‘너 한번 왕창 무시 당해봐라. 너 무시당하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무시당했는지 몸소 체험해 보자. 철저하게 무시당해 봐라’. 그 길을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이 걸어왔습니다.

드디어 야곱은 그 고생스럽고, 무시당했던 인생길을 마감하고, 할 것 다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 죽고 만 자리가 무엇이냐? 바로 공백의 자리입니다. 그 공백의 자리에 대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창세기 50장을 통해 봅시다.

창세기 50장 3절에 보면,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 수가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사람들이 곡하였더라. 웁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왜 웁니까? 갑작스럽게 자식이 죽거나 젊을 때 배우자 죽으면 웁니다. 왜 웁니까? [반응]입니다. 상처에 대한 반응입니다.

늘 옆에 있던 아내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칩시다. 죽은 후에도 아직 귀신처럼 아내가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가 뭔 가를 준비하고 있을 것 같은데 아내는 없습니다. 그때 그 허전함. 결국 죽음은 공백입니다. 공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이냐? 울음입니다.

울음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 또는 자기 존재를 재정립합니다. 사람이 울 때는 자기의 존재가 깨어짐에 들어갑니다. 자기 때문에 웁니다. ‘왜 세상은 내 마음먹은 대로, 왜 내가 예상한 대로 안 되느냐?’라는 겁니다. 반발심입니다. 운다는 것 한 마디로 ‘악~’ 외침입니다. ‘이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옛날 유명한 외국 노래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해는 그대로 뜨고, 파도는 치는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내 사랑이 죽었으면 꽃은 안 펴야 되고, 눈도 내리지 않아야 되고, 해도 없어져야 되는데... ‘내 사랑하는 사람 죽었는데 왜 해는 뜨냐‘ 말입니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 왜 지나가는 여학생들은 같이 울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온 나라가 백성이 다같이 웁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바로 애굽적 사고방식입니다. 존재에 대한 허탈인 이 공백을 울음으로 메워서 전에 있던 존재와 지금 남은 존재를 연결시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새로 시작한다는 겁니다. 한 사람은 죽었지만 울음으로서 이걸 통과하고, 다시 눈물 닦고 이곳에 있던 존재는 때려치우고 새로운 존재로 새로 시작하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단절에 대한 반응이며, 울음입니다. 쉽게 말해서 울면서 마음 정돈하는 겁니다. ‘아이고, 그래도 남은 애들 하고 살아야지.’ 하며 웁니다.

한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나이 오십에 스트레스 받아서 암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 미망인이 우리교회 왔었는데 처음에 기가 막히더란 겁니다. 큰 애는 이제 대학교 들어가야지, 작은 애는 고등학교 1학년이고, 자기는 오십도 안 됐고, 남편은 덜렁 죽어버렸고, 남편은 천재란 소리 듣고 잘 나가는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는데... 얼마나 힘든 과정입니까? 그 어려운 자리 올라가서 70명 단원 관리한다가 스트레스 받아 죽어버렸습니다.

그때 그 분이 우리교회 와서 고백을 합니다. [피]라는 책에 보면 죽음에 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보고 많은 위로를 받았답니다. 그 책에 보면 나옵니다. 왜 내가 죽어야 되는가? 멀쩡한 내가 왜 죽는가? 기가 막합니다. 내가 왜 죽는데... 내가 죄를 지어 죽는다고 할 때,죄를 지었는데 왜 내가 죽어야 되느냐는 말입니다.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박찬욱 감독은 그게 해결이 안 됩니다. ‘죄 지어서 죽었다’. 성경에선 우리가 죽는 것이 죄 값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왜 죄 값이 ‘죽는 것으로 되느냐?’ 라는 겁니다. ‘왜 죽음이 죄 값이냐?’라는 겁니다. WHY? 왜??? 왜??? ‘왜 날 죽이는데?’

예를 들어서 죄 값은 오백 원이다. 그러면 우리는 울 필요 없습니다. 왜? 죄 값이 날 죽여 버리니까.

죽는 것이 억울해서 죄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죄가 뭔지 알고 싶어도 내가 죄 값으로 죽는다는 그 죄가 싫은 겁니다. 왜? 어떻게 하든지 나는 안 죽어야 되니까! 그런데 내가 지금 죽습니다. 내가 매일 죽어가고 있습니다. 내 존재에서 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이 해결책이 없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사건, ’영생 주기로 작정해서 나온 나‘라는 존재가 영생 사건입니다. 믿습니까? 영생 사건입니다. 영생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사건입니다. 사건이 나오므로 왜 내가 영생 사건의 존재로써 이 땅에서 죽어야 되는지를 압니다. ‘아! ’죄‘라는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 되는구나.’ 라고 깨닫게 됩니다.

홈런 타자에게 감독이 지시하는 말이, ‘어이 번트치고 넌 죽어’ 할 때 ‘내가 홈런 칠 줄 아는데 나보고 번트 대고 죽으란 말인가?’라고 반문했지만, 나중에 보니 내가 홈런 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팀이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바로 그 때 ‘아하!! 나 하나 희생타로 보냈지만, 그 희생이 값없이 쓰이는 게 아니고, 내 희생으로 우리 팀의 승리에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 그것을 위해 내가 죽어야 되는구나’라고 알듯이 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야 됩니다.

그럴 때 사건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구원이 무엇냐? 내가 구원받은 게 구원이 아니고, 지금 나를 있게 한 이유를 아는 게 구원입니다. 내가 여기 왜 사는지? 나는 어디로 가는지? 왜 태어났는지? 태아나기 전에 누구의 계획에 의해서 여기 태어나야만 했는지? 이것을 몽땅 아는 게 바로 구원 속에 이미 들어간 사람입니다.

첨부파일 : ulsan090501_v1.hwp (49.0K), Down:9

김대식(IP:124.♡.85.46)

09-09-17 14:25

강이아빠 드디어 녹취 작업에 뛰어 드셨군요 아마 온몸이 아파올텐데 ㅋㅋ

딴게 아니고첨부파일로 한글문서도 꼭 올려 주세요

강이아빠(IP:219.♡.86.34)

09-09-18 14:38

네.첨부파일 올려 놓았습니다. 해 보니 만만치 않네요. 목사님 특유의 어법때문에 문장 정리하는데만 시간이 꽤 걸리네요. 눈알 빠지는 줄 알았심다. 몇 번 곱씹어서 보다보니 많은 공부가 됩니다. 공부 잘 안 하니, 공부하기 위해서 작업하는 거죠. 순전히 이것도 욕심에서 잉태된 것입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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