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9. 8. 21) 1강
광주 강의(09. 8. 21)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8. 21) 52-1
디모데후서 4장 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방금 제가 읽었던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인데 여기에 상당히 어렵고 힘든 단어가 많이 나오지요? ‘죽은 자를 왜 심판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앞과 하나님 앞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 또 ‘왜 다시 와야 되는가?’ 그 문제도 있고, 그냥 명하면 될 텐데 ‘그의 나라를 두고 명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상당히 이야기할 것이 많은데,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쉽게 하나의 힌트가 되는 이야기부터 하고 본문에 들어가 봅시다.
제가 질문합니다. 1)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까, 2)예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셨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셨다면, 그 다음에 사람이 선포한 것을 믿으면 구원의 효력이 있고 안 믿으면 아무리 선포해도 효력이 없게 되지요. 그렇다면 아무리 예수님께서 구원이 어떻고 천국이 어떻다고 해도 내가 거부하면 예수님은 헛수고를 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 아니고 성취하게 되면 선포 그 자체가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믿을래, 안 믿을래?’가 아니라 선포와 동시에 성취가 되면 우리는 주님 앞에 삼킴을 당하죠. 포착이 되고 장악이 되죠. 그러면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내 안에 용서가 이뤄지는 겁니다. 1번 선포입니까, 2번 성취입니까? 정답은 2번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할 때 그냥 말씀을 참고로 들으라는 식으로 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그 말씀이 우리 속까지 잠식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이런 식이지요. ‘빛아 제발 좀 있어다오.’ 이것이 아니라. 빛이 있으라고 명하실 때 없는 빛이 생긴 것처럼 주님께서 용서라는 그러한 내용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의견은 일체 반영하지 않고 우리 안에 주님의 용서가 발현이 돼요.
우리가 원치도 않은데 주님의 용서가 발현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쉽게 말해서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은 말씀을 순종할 때만 구원이 된다.’ 라는 이 공식을 꽉 쥐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말씀 주시는 것은 하나님 몫이고 그 다음의 순종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이 착해서 그 말씀을 순종하면 그 말씀의 효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구원 받는다.’ 라는 식의 공식을 유지했던 사람인데, 이런 유대인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하면 “나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속에 아예 박아버린 거예요.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박아버리니까 기존의 유대인들이 이런 예수님의 결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무슨 이런 권세자가 다 있지?’ 하고 놀랐고,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비난했어요. ‘사람의 할 몫이 없잖아! 사람이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왜 허락 안 하는데?’ 라는 식으로 반발을 하는 거예요. 나중에 그 반발이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지요.
예수님은 ‘내가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다.’ 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선포’까지만 복음이고, 그 다음 그 복음을 믿고 안 믿고는 나의 의중에 달렸다고 여기는데 이런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짜 복음은 선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선포된 그 말씀이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서 그 말씀으로 살아 움직일 때, ‘복음은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 되는 것이구나.’ 하고 아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오전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지금 한국교회 문제가 뭔가 하면, 믿어서 문제입니다. 믿어지면 되는데 안 믿어지니까 억지로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믿어지면 ‘어 믿어지네.’ 하고 고백하면 될 텐데, ‘안 믿어지지만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한 번 믿어 보렵니다.’ 하면서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단 말이지요.
여기다 목사는 또 장단을 맞추지요. “믿습니까? 믿습니까?” ‘당신이나 믿으세요.’ 예수님은 ‘믿습니다.’가 아니고 선포하면 선포한 말씀이 날아가서 그 사람 마음속에 꽂혀서 이미 그 사람 속에 말씀이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네가 믿느냐?’ 라고 그 때 물어요. 이미 들어왔기 때문에 믿느냐를 묻지, 믿음이 안 들어온 사람한테는 ‘네가 믿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 집사님에 저에게 냉장고를 보냈다면 “목사님, 집에 새 냉장고 있는 것을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저는 “믿습니다.” 라고 하지요. 왜? 이미 왔기 때문에 대답하는 거예요. 그런데 냉장고 보내지도 않고 “목사님, 내가 목사님 집에 냉장고 보낼 것을 믿습니까?” 라고 하면, 저분이 우리 집에 냉장고를 보낼 모양이구나. ‘믿습니다.’ 하면 안 줘요. 이것은 아직 구원이 안 된 것입니다.
결국 여기 디모데후서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은 복음으로 설득하라는 말이 아니고, 비록 어린아이가 전하는 복음이든 혹은 집사가 전하는 복음이든 복음은 누가 전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복음 자체에 운동력이 있어서 날아가서 꽂힌 사람을 확인하고 찾아내는 그 역할을 너희들이 하라는 말입니다. 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에서 나왔기 때문에.
디모데후서 4장 1절 봅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앉아 계시고 심판이 이뤄집니다. 심판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하는데, 심판을 하시면서 누가 심판에서 구원 받고, 누가 심판에서 지옥 갈 사람인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무엇이 이 세상에 떨어지는가 하면, 복음이 전해집니다.
복음이 전달되면 하나님이 복음을 그저 줬던 사람은, 그러니까 구원 받은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발생되어야, 이런 장(영역)이 발생되어야 이 사람들이 바로 심판에 그대로 올 사람들이거든요. 하늘나라에 심판이 있다는 말은 이 지상에서도 동일한 심판 작업이 복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벌써 개시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제가 만약 디모데라면 “저, 아저씨. 마지막 심판 때 우리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데요. 이것을 아저씨는 믿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이미 ‘심판한데요.’ 라는 내용 자체가 스스로 이것이 로켓이 달려서 날아가면서 그 사람에게 꽂히면 아까 냉장고 비유처럼 “그럼요. 나는 마지막 때 주님이 심판하는 것을 믿어요.” 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구원 받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뭐, 나는 그런 것은 못 믿겠는데.” 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확인 작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이 쉽다는 말도 맞고, 구원이 어렵다는 말도 맞아요. 이번에 나로호가 발사되었는데, 그것이 공중으로 달아가는 것이 굉장히 힘들어요. 그런데 사람을 천국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이건 힘든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합니다. 로켓이야 연구해서 만들면 공중에 올라가긴 하지요. 하지만 사람은 아무리 연구해서 집어넣으려고 해도 복음이 자체적인 능력으로 오지 않는 한 사람이 강제로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그 사람이 교회는 갈 수 있지만 천국 가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천국 가는데 성공했다면 더 이상의 축복은 기대하지 마세요. 축복 안 받아도 괜찮아요. 이미 받을 것 다 받았어요. 지상에서 ‘네 인간 됨됨이 이렇다. 저렇다.’ 따질 필요 없어요. 그냥 천국 가버리면 그곳에서는 그런 것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아요. 안에 복음이 들어 있는 것만 확인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는 아예 신경도 안 씁니다.
구원을 받는데 그 기준은 우리가 만든 기준이 아닙니다. 1) 기뻐하자. 2) 슬퍼하자. 어느 쪽입니까? 기쁘지요. 만약 십일조 안 하면 저주 받는다고 그렇게 알고 있든 사람이 ‘우리가 만든 기준으로 천국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는 것을 듣고 1) 기뻐한다. 2) 슬퍼한다. 그동안 십일조 한 번도 안 빠진 사람들은 슬퍼하겠지요. 지금까지 돈 낸 것이 아까워서.
‘착해야 돼.’ 라는 것이 우리 양심이 만든 기준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 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만든 기준을 제시했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성경 말씀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동안 내가 힘들었던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이런 인간이어야 해.’라고 자기가 세운 그 기준이 너무 완벽해서 그것에 맞춘다고 본인이 얼마나 가슴 조아렸습니까? 이것이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잖아요.
구자근 사모님 잘 들어놓으세요. 얼마나 완벽을 기하려고 했습니까? 그 기준, 나를 힘들게 하는 그 기준은 하나님이 주신 기준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내 기준은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 주신 기준이 따로 있으니까 그게 ‘기쁜 소식’이고, 이것을 두 자로 줄이면 ‘복음’입니다.
이번에 개혁주의 신학 학회에 내기 위해 논문을 하나 썼어요. 이런 내용이 있어요. 성경 전체를 하나님께서 믿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는 것으로 줬는데 왜 인간들은 이걸 믿으려 하고 이걸 왜 지키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준 것은 ‘너는 믿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을 믿게 되었다면 누구의 은혜입니까? 성경 말씀 자체가 움직여서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은 덕분이에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잖아요. 성경 자체가 운동력이 있어서 내 안에 들어왔지, 내가 성경을 내 의지로 믿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우리 안에는 아담의 속성이 있어서 항상 말씀을 거부하게 되어 있는데, 그 거부의 마지노선마저 넘어서서 우리에게 믿어지게 하시니 어찌 우리가 할렐루야 찬양을 안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어떤 글을 썰 때 ‘이렇게 이게 믿어지게 하시다니!’ 그런 식으로 십자가마을에 글을 쓰면 십자가마을 사람들 중 예리하게 비판하는 분들도 다 동감합니다. 어떤 글이라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어야지 자기 의가 드러나는 글을 쓰면 안 되지요. ‘나는 이렇게 고생합니다.’ 이런 글은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를 공짜로 구원 했는가? 예수님의 공로가 드러나야지, ‘나는 이렇게 잘 믿는다. 너희는 이렇게 못 믿지?’ 이런 식으로 누구와 경쟁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창녀도 구원 받는데 예수 안 믿는 테레사 수녀는 지옥 갑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공평하십니까?
왜 우리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으로만 구원 받는가? 누가복음 10장 1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할 때 1) 사람보고 전했다. 2) 사단보고 전했다. 몇 번입니까? 사단을 보고 전한 거예요. 오늘날 목사가 교인들 보고 설교를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교인 꼬드겨서 우리교회 식구 만들려는 그런 수작이 뻔히 보입니다. 예수님은 누구한테 설교를 했는가 하면, 인간은 병신이라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고 악마에게 한 거예요. ‘악마야, 이제 손 떼라. 이 사람들은 내 백성이다.’ 라니까 손 떼서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졌잖아요.
이제부터 우리 오 목사님도 화평교회 교인들 보고 설교하지 마시고 악마보고 설교하시기 바랍니다. ‘악마야, 제발 김을수 집사님 그만 괴롭혀라. 노태진 집사님 그만 걱정시켜라.’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악마를 상대로 설교한 것입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봅니다. 인간보다 더 고수는 구굽니까?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인간은 마귀의 지배를 받아요. 그러니까 사람보고 백날 해봐야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마보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2장 2절에 나오잖아요. 강도가 와서 집 주인을 묶고 세간을 늑탈해서 예전 주인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처럼. 여기서 강도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집 주인은 누구입니까? 악마. 집 주인에게 묶여 있었던 가구는? 우리들이죠. 강도가 와서 집 주인 묶어놓고 집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던 가구를 늑탈해서 가지고 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와 같으니라.
그러면 그 강도는 가구를 꼬드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구야! 네 발로 걸어 나오너라.’ 이럴 수는 없단 말이지요. 예수님의 모든 설교는 소위 영적인 고수 마귀를 겨냥합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착해야 되고, 성경 말씀 지켜야 되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마귀가 속삭여요. ‘말씀 지켜야 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왜? 그렇게 해서는 한 사람도 구원 못 받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자꾸 시킵니다. ‘목사 말 들어야 복 받고, 헌금해야 부자 되고 ---’ 자꾸 공갈, 협박을 하는데 진짜 복음은 ‘나는 너와 상대 안 한다. 그러나 너를 붙잡고 있는 악한 사단과 상대해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려 하심이라.’
우리가 주님의 선물을 공짜로 받습니다. 악마를 사로잡고 거기에 대한 혜택을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은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주님이 홀로 추수하시고 아무 농사도 짓지 않은 우리들에게 추수의 혜택을 같이 누리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사단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예요. 이것이 뭐냐 하면, 제가 오 목사님한테 갑자기 권총을 들이댑니다. 그러면 오 목사님이 ‘목사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하는데 방아쇠를 당겼어요. 그런데 그 총알이 오 목사님을 잡고 있던 마귀에게 날아가서 마귀가 쓰러지면서 갑자기 오 목사님이 정신이 번쩍 들어서 ‘아, 구원 받았구나. 그동안 뭔가 어깨가 좀 무겁더니만 이제 가벼워졌네. 그동안 나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었구나.’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내 뒤에 있는 놈을 쏴 죽임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탕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 집은 바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해서 나타날 영원한 아버지 집이지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사단을 권총으로 죽이고 우리를 빼내서, 탕자는 자기 집이 아닌데 자기 집으로 간주해서 하나님 나라를 자기 집으로 만든 겁니다. 다음 토요일 [하나님 나라] 강의를 하는데, 최일규 집사님이 책을 주면서 강의 하라고 해요. 차타고 오면서 이 책을 봤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하나님 나라에 보내주겠다는 것은 주의 뜻이지 우리는 갈 마음이 없었어요.
하늘나라에 제일 큰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는 하늘나라 갈 마음이 없는데 주님께서 자리 마련했다고 오라고 하시는데 여기에서 우리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갭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식과 아내와 오순도순 같이 살고 싶은데 주님은 자꾸 떠나라고 하세요. ‘왜 가야 됩니까?’ 라고 물을 때, 하나님은 우리 집은 몽땅 악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항상 부정적으로 말씀하세요. “집안 식구가 네 원수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친하고 싶은 것을 건드려서 ‘너는 그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빠져 나와야 돼.’ 이런 식으로 자꾸 자극을 줘요. 제가 이것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왔어요. 얼마 전에 작은 처형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들 셋, 딸 하나 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이상한 교회에 다녀요. 그 교회는 서약을 하는데 김홍전, 최낙재 계통의 교회인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 ‘절대로 다른 교회에서는 예배드리지 않겠다.’고 서약을 한답니다. 그런데 하필 금요일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자기 교회는 서울에 있고 초상은 대구에서 났는데, 상중에 서울까지 가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이 난리가 났어요.
처형이 전화한 이유는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면 좀 혼내 주라고 전화를 했어요. 그 전화 끝나자 말자 전화가 걸려 왔어요. 대구에서 초상났는데 자기 교회에서 예배드린다고 서울까지 가서 예배를 드렸다는 그분이에요. 그분에게 제가 이야기했어요.
이근호: 이번 주일에 본 교회에 예배 참석을 하셨다면서요?
사 돈: 예.
이근호: 아버지 돌아가신 사건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사 돈: 하나님이 일으켰지요.
이근호: 아버지 죽음을 슬퍼하며 멀리서 참석한 조문객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누가 하도록 시켰습니까?
사 돈: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지요.
이근호: 본인은 예배 참석한다고 가버리고 본인이 해야 될 일을 남에게 떠맡기면 그 피해가 그들에게 고스란히 가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 안 합니까?
사 돈: ??? (아무 말이 없어요)
이근호: 자식이 본인 한 사람 같으면 ‘오늘은 주일이라 문 닫겠습니다. 조문하실 분들은 내일 오세요.’ 하고 가면 되는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형제를 두게 하셨고 다른 형제는 그런 생각이 없어서 조문객을 접대해야 되는데 혼자 교회 간다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른 형제에게 맡기고 가버리면,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남에게 피해를 줬다면 그 죄는 하나님이 지은 죄가 됩니까? 주일 안 걸리고 초상이 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금요일 초상이 나게 해서 주일을 거쳐서 장례를 치르게 하신 잘못도 하나님한테 있습니까? 형제들 모두가 사돈처럼 ‘오늘은 주일이니까 조문 안 받습니다.’ 하고 다 교회에 가면 좋겠는데 --
사 돈: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근호: 조문객들이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먼 곳에서 오는데 상갓집에서 문 닫고 내일 오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통화를 하고 난 후에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자꾸 “너 주위에 악마가 있다. 사단이 너를 유혹한다. 집안 식구가 너희 원수다.” 라고 할 때, 그 악이 뭐냐 하면, 그 사람은 자기 구원 중심으로 악을 생각했겠지요? 그게 바로 악이에요. ‘저 사람은 나를 망하게 하는 자야. 저 사람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야. 저 사람 때문에 구원 못 받겠어.’ 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악은 누구 중심입니까? 우리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입니다. ‘나는 구원 받아야 돼.’ 라는 것은 내 중심이고, ‘예수님이 나를 어느 자리에 있든 지옥에 가도 빼내신다.’ 라고 믿는 것은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님 중심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교회 안 가고 봉사해도 그 사건을 주께서 일으켰기에 주께서 일으킨 사건에 감사하면 됩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감사하면 이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내가 세운 기준(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것을 누가 조성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조성하셨어요. 왜 조성했습니까? 네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것을 묻거나 따지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에 다짐을 하는 거예요.
교회 가려고 하는데 차가 펑크가 났다. 교회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 왔다. 평소에 목사님께 농땡이라고 찍혔는데 오늘 또 얼마나 욕을 하실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할 거예요. 그러면 차 펑크를 누가 일으켰습니까? 하나님이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집에 있으면서 할렐루야 감사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어떤 목사는 그것을 ‘방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복음으로 활동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방종’이 되지요. 정신 차리고 자기가 믿음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부인하는 겁니까? 그 사람이 처음 예수 믿을 때 자기가 복음을 믿어서 자기가 구원 받은 식이니까 비복음입니다. 처음부터 비복음이에요.
제가 만약 그분 입장이라면, 오랜만에 휴가 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까? ‘내가 교회 안가도 주께서 구원시켜 주신다는 것을 오늘 실감했네.’ 평소에 그 사람이 얼마나 충실히 예배 참석했겠습니까? 그렇게 꼬박꼬박 가면서 뭘 생각했겠어요? ‘만약 다음에 예배 참석 못하면 그동안 참석한 것 하루아침에 다 소용없다.’ 이게 얼마나 큰 공포입니까?
예를 들어, ‘나는 절대로 에로 비디오는 안 본다.’ 그래서 1개월을 안 봤다. 2개월까지 안 봤다. 케이블 TV에서 나오는 것도 안 봤다. 그렇게 안 보다가 우연히 리모컨을 잘못 돌려서 잠깐 봤는데 여자의 나체가 나오는 장면을 봤다. 그러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주여, 안 보려고 했는데 우연히 봤습니다.’ 이게 비복음이고, 진짜 복음은 ‘주께서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나는 안 보려고 했는데 보이네요.’ 마치 ‘안 믿으려고 하는데 믿어지네요.’ 하는 것처럼.
그래서 성경에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볼 때 그동안 안 봤다고 자랑하던 그 무거운 짐을 주께서 한방에 훅 날려 보낸 거예요. 주께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철저하게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 중량은 더 무거워져요.
제가 틈만 나면 식당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을 지적했어요. 그러다가 2년 후에 내가 담배를 피우게 된다. 그러면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그동안 담배 피우는 것은 나쁘다는 그 의가 한방에 훅 날아가지요.
어떤 사람이 물어요. ‘목사님! 복음을 알고 난 뒤에 복음적인 삶이 어떤 삶입니까?’ 정답은 이겁니다. 주께서 우리가 복음적인 삶이 아니었음을 확인해 주는 모든 곳에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 의, 자기 철저함, 자기 고상함, 자기의 품질 향상 이것을 챙기면 그 순간이 바로 악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자체가 악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얼마나 철저히 회개를 하는지 몰라요. ‘나는 죄인입니다.’를 늘 입에 달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옆에 세리를 딱 붙여 놓으니까 ‘주여,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저 세리보다는 낫습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주께서 ‘너는 지옥 가고, 저 세리가 천국 간다.’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회개 한다고 의인 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또 하나의 자기 기준으로 굳혀져서 법칙이 돼요. 신앙의 법칙. 이런 것 주님이 훅 불면 날아가요. 그래서 제 글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말씀이 관통하면 졸지에 주변은 안개가 된다.’ 야고보서 4장에 나오지요. 우리가 잘난 체 하다가 말씀이 닥쳐오면 다 날아가는 거예요.
자기가 안개가 아니고 잘난 척하는 것은 아직까지 말씀이 안 오니까, 십자가가 안 보이니까 ‘주여,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낫습니까?’ 이런 비교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느 누구에게도 라이벌 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어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우사인 볼트’입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달리기를 하자고 제안한다면 달리기 하세요. 그 사람은 100m를 9.58에 달리는데 집사님은 19초에 달린다면 달리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아이고 이 인간아, 네가 쓸데없는 경쟁하고 있구나. 나는 경쟁 안 해도, 경기에서 저도 구원 받았는데.’ 하는 것을 만끽하면서 뒤따라 달리면 되는 거예요.
경쟁하자고 하거든 하세요. 하시면서 ‘나도 옛날 복음 알기 전에는 너처럼 경쟁에서 이기는 재미로 살았단다.’ 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경쟁하면 됩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악인 줄 몰랐었지요. ‘어느 아파트가 더 넓은가? 당신 수입을 얼마야?’ 이런 비교가 악인 줄 모르고 그것을 인생의 보람처럼 느꼈잖아요.
그런데 복음이 들어오고 난 뒤에 하나님은 아파트 넓이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수입이 얼마나 되는가도 아니고,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느냐?’ 이것으로 이미 결정 났기 때문에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그냥 유람하듯이 한 평생 보내시면 됩니다.
아까 우 집사님이 몸이 아프다고 하실 때 가슴이 아팠어요. 요즘 신종플루 때문에 보건소에서 얼마나 신경을 쓰겠습니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신종플루를 누가 일으켰는가? 하나님이 일으켰지요. 그러면 왜 일으켰는가? 내 내부에 ‘나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해.’ 라는 기준이 있을 건데 그 기준을 주께서 고맙게도 늘 부수기 위해 그런 사건을 주십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의료인들이 남 치료하면서 본인이 전염 돼요. 그런 환경에 노출되니까. 마치 교사들이 아이들과 오래 지내면 자신들이 어린아이가 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왜 그런 환경을 주셨는가? 행여나 우리가 ‘적어도 나는 이 정도는 되어야 나 다와.’ 라는 기준이 있으면, 말씀이 관통하면 주변이 안개가 돼요. 안개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지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정리를 해 봅시다.
예수님은 누구를 향해 설교한다? 마귀에게 한다. 따라서 디모데야 너도 복음을 사람에게 하지 말고, 왜? 사람은 아무 능력 없어요. 그냥 매인체로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 악마가 있으니까 그 악마를 보고 ‘사단아 물러가라.’는 식으로 우리보고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사단아 물러가라.’는 말이나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이나 같은 말입니다. 그 복음을 디모데 네가 전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아직 1절이 안 끝났어요.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심판 받을 세상 속에 놓여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 배경을 모르니까 주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을 집어넣어서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을 세상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그래서 주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끄집어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나는 이만하면 됐는데 뭘 심판을 받아!’ 이렇게 나오지요. 우리의 배경 자체를 부정합니다.
4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설명하기가 참 난처해요. 정말 어려워요.
여기 ‘그의 나라’가 나오는데, 나라를 생각할 때 동질성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주머니들이 계를 모집해도 반드시 거기에는 연대감 또는 동질성이 있지요. 나라가 성립하려면 동질성이 있어야 나라에 참여 됩니다.
그러면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그리스도의 나라니까 그 나라에 우리가 가려면, 예수님과 생각이 같아야 하고, 예수님 말씀에 동의하고 찬성하고 동조하고 어떤 동질성을 갖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겁니다.
나라라는 개념은 집단 개념입니다. 개체가 아닌 집단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 집단의 속성은 나라 앞에 있는 이름,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리스도와 동질성을 유지할 때 그분의 나라에 소속이 되는 겁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설교를 했는데, 교회 오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 왔다고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오는 것으로 그치면 안 돼요. 천국까지 가야 됩니다. 제가 이런 글을 썼어요. 어떤 아이가 학교를 가는데 장터를 지나갑니다. 그런데 장터에서 상인과 손님이 싸움이 벌어졌어요. 아이들은 학교 갈 시간인데 그 싸움 구경하느라고 수업 1교시가 벌써 지나버렸어요. 옛날에 이런 일이 허다했습니다.
지금 우리교회 싸움이 벌어지니까 다들 즐겁게 구경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글을 썼잖아요. ‘아니 싸움 구경 그만하고 천당 갑시다.’ 교회 오면 교인들끼리 동질성을 유지할 수는 있어요. 문제는 예수님과 생각이 같아야 예수님의 나라 천국에 갑니다. 교인들과 생각이 같다고 해서 천국에 넣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화평교회까지 오셨는데, 이것으로 만족하면 안 되고 천국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는 가끔 화평교회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내분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싸움 구경하다가 천국 가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이 누군지, 아니면 ‘싸움은 싸움이고 우리는 갈길 갑시다.’ 하고 끌려가는 사람이 누군지 나눠져야 돼요.
‘그리스도의 나라’의 의미는 뭐냐 하면, 나라 앞에 있는 글자. ‘그리스도’와 동질성을 갖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 이미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와 동질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생각을 갖고 싶기는 한데 그럴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동질성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부부싸움을 해서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인데 신문 판촉사원이 와서 초인종을 울리면서 “동아일보 좀 보시지요.” 라고 하면 그 사람 요구에 응하겠습니까? 안 되지요. 지금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가?’ 라는 우리의 동질성에 타인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날 때부터 육에서 났잖아요. 이 말은 우리의 육을 있게 해주신 부모가 있지요. 부부와 자식은 달라요. 부부는 이혼하면 남이 됩니다. 그런데 자식은 어떤 경우에도 자식이 안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육이라는 것은 안 끊어지는 것이 육입니다. 그런데 이 육에 어디 예수님이라는 타인이 들어갈 자리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타인을 영접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가고 싶어도 못합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가려면 예수님과 생각이 같아야 되는데 지금 우리는 이미 우리의 동질성이 확고해요. 내 자식과 내 아내와 내 친구 등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동질성이 확립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서 예수님과 새로운 동질성이 만들어집니까? 안 되지요. 눈만 뜨면 내 자식 내 집안 생각하고 돈 벌 궁리하는데.
어떤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과거를 업고 미래를 잡으면서 나의 지평을 넓혀간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과거를 등에 업고, 그 과거에 준해서 모자라는 것은 미래에서 보충하면서 나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겁니다. 이것 말고 다른 인생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모든 인생이 다 이것입니다. 오직 육, 나밖에 모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늘나라와 동질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주께서 여기에다 사건을 일으킵니다. 철학 전공하는 학생은 잘 들어놓으세요. 나중에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알랭 바디우’의 철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건이 발생되면 여기에서 구멍이 생깁니다. 지뢰가 폭발하면 그 폭발한 곳에 구덩이가 생기지요? 주께서 사건을 일으키면 원래 있던 주체의 자리가 와해되면서 내 주체성이 깨지지요. 그러면서 ‘이게 뭐지?’ 하면서 당황스럽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사건이 일어나니까 나답지 않은 내가 예상 못한 어떤 나가 이미 달라져 있습니다. 평소에 나는 착하고 점잖고 욕도 할 줄 모르는 자였는데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어떤 아줌마가 신호도 무시하고 갑자기 끼어들 때 ‘뭐 이런 00이 다 있어.’ 하고 갑자기 욕이 나올 때, ‘욕한 나는 뭐지?’
저도 교사 생활을 해서 압니다만 “오늘도 사랑스럽게! 오늘도 친절하게!” 라고 했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한 학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어요. 그래서 갑자기 열이 오르면서 몽둥이로 마구 때립니다. 그렇게 한참을 흥분해서 매질을 끝내고는 ‘내가 왜 이러지?’ 지킬박사와 하이드. 도대체 내가 천사야 악마야? 내가 도대체 뭐지?
그래서 프로이드는 말했어요. 인간 속에는 본능이 그동안 초자아에 의해서 억압되어 있다가 꿈속에 나타나서 지랄을 해요. 그동안의 일을 분풀이 하듯이. 평소에는 도덕군자인척 하다가 잠자리에 들면(의식이 잠시 휴가를 갈 때) 온갖 더러운 것들이 솟구쳐 올라오지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물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나는 살고 너는 죽어! 나를 위해서 너는 죽어줘야 해.’ 아무리 점잖고 천사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날 건드리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이런 공격성.
보통 점잖은 사람은 꿈에 나타나는데 술꾼들은 술만 처먹으면 나타나요. 술 깨면 자기가 한 일이 창피하니까 ‘필름이 끊어졌다.’고 핑계를 대요. 필름 같은 소리하고 있네. 평소에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나타난 것뿐인데.
육은 우리 몸이라고 여겼는데 주께서 복음으로 ‘너는 이미 값을 주고 샀기에 너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이다.’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복음적인 사건을 터뜨리면 주체가 구멍이 나서 분화구가 생기지요. 그러면 주체는 어디로 찢어져서 밀립니까? 찢어져서 지면으로 밀립니다. 그러면 찢어진 아픔을 갖고 다시 붙이는 그런 성질이 주체에게 있어요. 그래야 정체성이 유지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항상 모아지는 법이니까 찢어졌던 주체가 이 구멍을 매우면서 ‘하나님께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나는 새로운 것을 깨달았어.’ 라고 주님 은혜를 포함해서 다시 모아질 때 이 일시적인 주체가 뭐냐? 찬송하고 주의 은혜를 발산하는 그런 계기가 되는 겁니다. 이게 온유, 화평, 자비, 양선이지요.
남들 보기에는 착하다고 보지만 본인은 얻어맞아서 그렇지요. 말씀의 지뢰를 얻어맞은 거지요.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자기를 부인 못합니다. 하지만 주께서 일으키시는 복음적인 사건이 오게 되면 나는 찢어지고 찢어지면서 대충 주체를 모으지요. 모으면 이 주체는 괜찮은 주체입니까? 아니지요. 그 다음 또다시 이 주체에 사건이 터지면 또 찢어지고, 주의 은혜도 다시 봉합이 되면서 ‘역시 하루하루 은혜 아니면 못 살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09. 9. 15. 12:2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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