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장 주석
창세기 5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5장
죽은 아벨의 피에 대한 복수전이 전개되는 것은 5장부터이다. 그 복수는 아벨 대신 하나님이 주신 자식인 셋 가문을 통해 수행된다. 이 복수는 무엇과 연관되는가 하면 땅의 휴식과 관계된다. 땅 위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무질서와 부도덕은 자연질서와 결코 무관한 게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자의 호소는 반드시 하늘까지 도달된다. 하나님은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감찰자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위해 억울하게 순교한 자의 피를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필히 갚아주신다.
아담에게 내린 약속은 가인 노선이 아니라 셋 노선을 따라 진행되는데 그 약속은 아담이 타락 후 지니게 된 하나님의 심판의 징표도 함께 지닌 채 대대로 이어진다. 그 징표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약속의 전달이라 셋의 후손에서는 단순히 말로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전 과정을 통해서 그 종말로 말해준다. 1000년 가까이 수명이 접근하지만 그러나 죽음이란 한계는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에게 종말이 개인적으로 각자 주어졌다는 것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 수 없음을 말해준다.
약속의 외부 개입의 그 절실함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그 증거가 아담의 7대손 에녹이다. 에녹의 실존은 죽음의 실존과 대비를 이루면서 약속의 목표를 바라보도록 해 준다. 그 약속의 목표는 억울한 자에 대한 피의 복수이다.
에녹의 행적은 모든 다른 선조들이 살아 생전에 확인할 수 있는 연대에 들어가 있으며 노아를 제외한 모든 후손들도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것에 대하여 알 수 있던 연대에 속한다. 이러한 사실은 셋의 모든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은 죽음의 한계 속에서 그 한계를 깨뜨리고 죽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다가옴을 이해하게 만든다.
약속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죽음과 상관없다. 죽음이 무서워서 해야 할 일을 못한다는 것은 약속을 믿는 자의 태도로서는 적합치 못하다. 만약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면 실제적으로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다.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그 약속 안에 있다는 실존 때문에 당연히 적이 있다. 그 적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자가 된다. 약속을 가운데 두고 두 진영은 서로 대치되어 있고 서로는 서로를 잘 알아본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라는 것이 단순히 인간의 모든 선함과 착한 의지를 집대성 하여 창안한 종교가 아님이 파악된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인간 세상에 균열과 파장이 생기게 하는 종교이다. 통합이나 일치란 무조건적이 아니라 약속 안에서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서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제한을 두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도 '약속 안에서' 이고 하나님의 거룩도 오직 '약속 안에서' 이다. 기독교는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지만 결코 인본주의는 될 수 없다.
또 인간들끼리 대규모 집회를 열어 신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이것으로 인해 영생으로의 참여가 가능하다.
에녹의 다음 자손인 므두셀라는 정확히 그의 이름대로 '그 심판의 나라' 까지만 도달되도록 이 땅에서 산다. 선지자 에녹 이후 모든 정황은 그 심판의 나라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오직 에녹의 일생을 모르는 노아만이 심판에서 죽음과 부활을 새로운 약속 차원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에녹과 손자 라멕의 수명은 갑작스럽게 수명이 900대에서 700대로 떨어진다. 즉 노아만이 경험해야 될 것에서 그를 제외시키기 위함이다.
셋의 가문은 등장된 인물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하여 생존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세워놓은 꿈을 성취하기 위해 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보여주며 살아야 된다. 우리들이야말로 에녹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지자들이기 때문이요 그럴 때만이 이 악한 세상도 희망을 갖게 된다.
5:1-5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으실 때는 그냥 낱말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담긴 내용으로 살아야 될 운명도 함께 부여 받는 것이다. 사람이 지닌 운명이 3-5절까지 나온다. 생명을 배태하고 낳고 그리고 본인은 죽어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분인 예수님의 생애에서 볼 때에 참 사람 되시는 그 분께서는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을 낳으셨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으로서 아담이나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사역이다. '사람'이라는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라고 이름 지어진 그 아담은 오실 예수님의 표상이요 아이콘이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그 사람이 담당할 사역이요 운명이요 역할이다.
2-3절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이름을 짓는 일과 4-5절에 나오는 아담이 자식을 낳고 이름을 짓는 행위가 같은 창조적인 사역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줄 때 이미 더불어 주어진 사역이다.
창세기 32:27-28에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은 좋든 싫든 이 운명대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 물론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이지만 이 이름은 그가 죽을 때는 사라져 버린다.
오직 주의 이름만 영원히 남는다. 골로새서 1:15-17에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영원히 높이게 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심지어 아담이 하나님께 받았던 '사람'이라는 이름마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전 9:5) 우리 자신의 이름보다 영원한 아름다운 이름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며 주의 이름만이 영원한 것이고 영원히 찬양 받으실 이름은 오로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뿐이다.
겉 사람은 후패 해도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비록 죽었지만 다시 새 생명으로 되살아나셨다. 주의 이름이 담고 있는 운명이요 사역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사는 것은 내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5:6-24
본문의 핵심은 개개인의 인생은 끝나더라도 그 끊어지는 인생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이어져서 전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한 곳으로 인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에는 죽음에 굴복해서 인생을 끝맺는 숱한 사람들을 소개해 놓으시고서는 21-24절에 끝 부분이 차이 나는 어떤 자를 하나님은 내세우시면서 인생 전체를 비교시키신다. 그냥 삼백 년을 산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한' 삼백 년이었다.
바로 이 다른 점으로 인해 인생의 끝도 다른 이와 달라졌다. 다른 사람들의 시신은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반면에 에녹의 몸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동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세상 사람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5:25-32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인간들이 수고했다는 대목이다. 인간들이 이 땅에서 고생하는 원인 제공자가 여호와라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지 안 했으면 결코 인간은 이 땅에서 고생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땅 저주는 그 다음에 주어지는 땅의 안식에 대해서 모든 인간들이 주목을 해야 한다는 점을 알리기 위함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머물지 않고서는 참다운 인간이랄 수 없다는 것이다. 안식이나 고생이나 인간들이 자신의 손으로 달성하는 것은 전혀 피조물답지 못한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에게 비록 저주가 주어졌다 할지라도 그 저주조차 어찌 할 수 없도록 평안한 안식이 심어져 있는 존재만이 참다운 인간이라는 것이다. 고생이 아예 없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생 속에서도 평안의 요소가 배어나올 수 있는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29절에 어떤 인물을 통해 안식을 주시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도의 역할이라는 것이 단순히 자기 구원만 챙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6:65-66에 하나님의 일에 성도가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구원 소망을 챙기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고생과 고난 속으로 몰아넣되 그로 인해 타인에게 안식과 영생을 주는 증거인으로 삼고자 하기 위함이다.
이미 성도이기에 고난을 받는 것이며 영광도 함께 받기 위한 고난이다(로마서 8:18). 노아는 많은 전도를 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준 사람은 없고 자기 식구들만 결국 방주에 들어가서 살아남았다. 이것이 노아 식구에게만 느꼈던 안식의 경우이다.
이처럼 안식이란 안식을 주는 자의 고생과 수고에 의해서 제공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 그 분은 모든 인간들의 수고 속에 들어오셨고 그 고난과 희생을 감당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이 거룩한 고난 안으로 초청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외롭게 사셨다. 이제 우리 차례이며 단순히 우리가 구원받기 위한 외로움이 아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과 생명을 주기 위한 외로움이다. 우리는 이 점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하며 주님의 고난 속에서 하는 기도와 봉사를 피해서 따로 도망치려고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수고로움을 세상 적인 획득으로 보상받기 위해 주의 일을 수행해서는 아니 되고 주님은 고통 속에서도 안식이 주는 기쁨과 평안은 지속적으로 따로 솟아난다는 점을 고마워하라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