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대구강의(피)01-왜피없이는아니하는가1-2
09대구강의(피)01-왜피없이는아니하는가1-2
이름 : 구득영(IP:203.223.97.174)
계속해서 교재 10페이지를 보자.
** 사도는 전쟁중이다. 하지만 자신의 적은 없다. 모두 주님의 적이다.
◈ 모두가 나의 적이 아닌, 주님의 적 !!
사도는 주님의 군사이기에 자기의 적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국군이 인민군과 전쟁을 한다고 해도, 개인적으로는 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 봤다고 말이다. 나중에 만나서 막걸리를 한잔 할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사상이 다르면 적이 되는데, 그것은 바로 위에 있는, 그것을 ‘메타’ 라고 하는데, 즉 위쪽에 있는 개념에 의해서 종속된다는 것이다.
◈ 메타와 대상 !!
이것을 논리학에서는 ‘메타’와 ‘대상’ 이라고 하는데, 즉 위쪽에 있는 것을 ‘메타’ 라고 하고, 아래쪽에 있는 ‘대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의 높은 쪽에 있는 메타에 의해서 아래쪽에 있는 대상은 그만 종속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메타에 ‘메타1’ 주님과 ‘메타2’ 마귀가 있다고 하면, 주님에게 종속이 된 사람들과 악마에게 종속이 된 사람들이 물론 개인적으로는 정으로 살아가지만, 하지만 주님이 응해버리면 이쪽 전체가 모두 다 적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적이 아니라 주님의 적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되는데, 주님의 적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있는데, 즉 우리의 개인적인 적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셨는데, 우리 적이 아니라 주님의 적이기에 말이다. 죄인인 주제에 무슨 적이 있고 말고 할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류의 오류는 진리인데, 적의 적이 자기의 동지이고 말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기능의 군사로서 모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부부나 자식의 관계라고 할지라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원수가 되고 만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이혼을 하라” 라는 의미가 아니라, 제 아무리 가까운 혈육이라고 해도 주님보다 더욱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너는 나의 사람이 아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내가 여기에 있다 ??
그러므로 여기 교재에 나오는 “주님이 여기 계시다” 라는 말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모르는데, 그렇게 주님이 여기에 계심으로서 “내가 여기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어디서 얼마나 살았으며, 본적이 어디이고, 또한 직업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런 것은 전혀 관심을 가지거나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자기가 미국에서 살았던, 한국에서 살았던, 그리고 노가다를 하면서 고생을 하던,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서 호화호식을 하던지 간에, 지금 주님이 여기에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도에게 성령이 함께 계셨던, 바로 그러한 특징이 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도는 주님의 전쟁터에 나와있는 것이다.
◈ 나의 싸움이 아닌 주님의 싸움 !!
여기에 전쟁개념이 나오는데, 물론 조직신학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교회를 나누면서 승리하는 교회, 또 무슨 무슨 교회, 그렇게 나눈다는 것이다. ‘전투적 교회’ 라고, 루터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칼빈이 그런 이야기를 했나요? 즉 교회는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바로 군사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가 본부인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본부는 주님인데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본부인 줄로 착각해서, 그만 자기 이미지 관리에 나서서 자기 싸움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주님의 싸움이 아니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적들은 다만 십자가를 반대하는 자들이며, 십자가 대신에 다른 것을 강요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를 빼버리면 무엇이 빠지는가? 먼저 이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첫째로, 공평하다는 것이고, 둘째로, 자기 부인이고, 셋째로는, 우리는 이미 죽은 자라는 말이다. 이것은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자꾸만 증거를 대어보라고 하는데, 하지만 여기 3장 3절에 보면 분명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미 죽었고, 생명은 하늘에 있다”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구약에서는, 모세언약이 없으면 우상 !!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세 가지가 빠져버리면, 먼저 공평이 아니라 차등이 되고, 둘째로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 긍정이 되고, 그리고 셋째로 죽은 자가 아니라 자기가 이 땅에서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성경전체가 십자가의 새언약인데, 그러면 구약에서는 무엇이 우상인가? 언약이 없는 이방나라가 곧 우상이 되는데, 즉 구약에서는 모세언약이 없으면 우상이라는 말이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무엇인고 하니, 먼저 언약을 던져놓고는 그러한 언약을 성취해나가는 언약적인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라는 것이다. 그 언약을 비켜나가는 신이 바로 우상인데,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바로 언약인데, 즉 언약을 던져준 하나님이 아니라면 결코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들이 다 조작해낸 것이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십자가를 걷어치우게 되면 나머지는 모두 우상이 되고 마는데, 우상적인 예수, 우상적인 성령, 그런 우상적인 삼위일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삼위일체라는 것은 참된 신이 아닌데, 그 중간에 새언약, 즉 십자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위한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신학교 교수들의 무지한 점 10가지 !!
이번에 ‘성경신학의 세계2’ 라는 책이 나오는데, 첫째 글이 바로 ‘신학교 교수들의 무지한 점 10가지’ 라는 것인데, 물론 우연히(?) 그렇게 처음 글로 실렸는데, 그런데 하고 나서 보니 배치가 참으로 멋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목을 보고 화를 내지 말고, 내용을 보고 한번 따져보라는 것이다. 내용 중에서 성경말씀과 맞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말이다.
예를 들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복음적이고 성경적이다” 라고 했을 때, 그런데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는데,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다 수정이 되어야 한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러면 논리가 어떻게 전개되는고 하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경자체에 위배된다면 그것을 고쳐야하는가? 아니면 말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점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다.
◈ 당신은 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순종하지 않는가?
제가 바로 이 법에 걸려서 합동측에서 면직이 되고 말았는데, 즉 목사가 될 때 서약하기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순종을 한다고 해놓고 왜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 성경말씀에 나오는데, 그 성경말씀에 과연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성경말씀에 어긋났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니 그쪽에서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최고이고 그 다음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인데,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메타가 되고, 성경말씀이 그만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말씀대로 하는 사람이 그만 이단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데,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모세가 받은 말씀을 위해서 만들었는데,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법이 모세언약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그만 죽여버린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너희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정죄할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모세를 추앙하는 너희들이 모세에게 당할 것이다” 라는 말이다.
◈ 죄인에서부터 시작을 !!
이러한 논리의 해결점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이미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죄인이 되었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몫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는 그 덕분이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아까 한 연극을 한번 더 언급해야만 하겠는데, 지금 자기는 주님과 마구 손을 흔들면서 악수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저쪽에서는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을 붙들고, 즉 눈에 보이는 목사를 붙들고 구원해달라고 설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 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들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본능적인 몸부림을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 그러나 성경에서의 교회란 오직 하나님의 피가 불러낸 자들이다(행20:28). 피를 보고 살며, 피를 믿고 살고, 피를 마시고 사는 자들의 모임이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피를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자체가 하는 이야기가 그러한데, 즉 피가 불러낸 자들이란 것이다. 피를 믿는 자들이 아니고 말이다.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가? 오직 피로서 말이다. 아까도 언급을 했지만, 히브리서 9장 7절에서 뭐라고 했는가?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교회란, 오직 하나님의 피가 불러낸 자들 !!
다시 말해서, 성도라고 하는 것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라는 방식으로만 불러낸 자들인데, 하지만 그들도 역시 자기들이 무엇을 기대한다고 해서 불러낸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니기에, 일단 불러내었으면 어떻게 하는가?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누가 말인가? 불러내신 분께서 말이다.
그렇게 피에 의해서 불려나온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오직 피를 보고 살며, 피를 믿고 살고, 또한 피를 마시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 요한복음 6장 53장에 나오는데, 즉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왜 갑자기 피입니까?
정말로 주님이 말씀을 어렵게 하셨는데, 즉 얼룩져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성경은 일종의 홀로그램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렇게 주님이 피를 이야기하니,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점심을 얻어먹은 사람들은 다 떠나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보통 사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얼룩이 져있으니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왜 갑자기 피를 이야기합니까? 우리들이 당신을 왕으로 섬기면, 그것으로서 족한 줄로 아시면 안 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우리들의 왕으로 그렇게 섬김을 받으면 되었지, 굳이 왜 우리에게 피를 이야기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굳이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학교에 입학을 했으면 되었지,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만 “피!” 라고 하자, “야, 어렵도다!” 라고 하면서 모두가 다 그만 떠나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가 좋아서 교회에 온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의 자기들의 직장이기 때문에, 즉 자기들의 밥벌이가 되기 때문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라이선스를 획득했고 말이다. 그러니 교인들은 당연히 자기들의 밥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들은 십자가로 인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여기 문장을 살펴보면, “이들은 십자가로 인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들은 십자가가 있는 한 이미지 관리를 하지 않을 것이고, 반면에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이미지 관리를 한다는 것이다.
◈ 탕자인 주제에 무슨 이미지 관리인가?
이것이 바로 2초, 혹은 2.5초 동안의 기적인데, 즉 우리도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오래가야 2초이고, 그 다음부터는 곧 바로 자기 이미지 관리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이다. 즉 “하나님, 제가 이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믿는데, 좀 봐주세요. 남들 눈에도 좀 띄게 해주시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미지 관리를 하지 않아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인 탕자를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탕자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그냥 일방적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탕자인 주제에 무슨 이미지 관리를 할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큰아들은 어떠했는가?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한답시고,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전혀 아버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목소리 높여 부르면서도, 바로 자기들 옆에 오신 진짜 하나님을 몰랐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피’로서 올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 되는 줄로 알았는데, 또한 열심히 성화의 삶을 살고 말이다.
◈ 십자가가 있는 한 비극은 없어 !!
여기에 보면 로마서 1장 16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즉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처럼 말이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마지막으로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기 이미지를 관리한다고 쓸데없이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한 결코 비극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달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원하지도 않는데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줄 압니다. 그런데 그 피가 흘러 흘러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왔는데, 그것이 웬 은혜이고 충격인지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미지 관리를 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다고 하면, 이 세상 앞에서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한 자유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4,16 새벽 1시에 마침.
‘피’를 서평하자면, ‘픽!’ ㅋㅋ
첨부파일 : 09대구강의(피)01.hwp (77.4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