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 주석
창세기 4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4장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투쟁의 두 주체인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땅이라는 공통된 배경 하에서도 각기 다른 원리를 준수하며 살아간다. 온 피조물들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다(로마서 8:19). 그러나 그들의 나타남은 이 땅에서 거의 예외 없이 순교적 운명을 짊어지고 살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께 인정 받고 출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듯 선택이란 순교를 위한 선택인가?
두 가지의 아담形이 등장한다. 이것은 두 가지의 표준적 인간형이다. 이 나뉨은 인간 쪽에서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본인과 제물을 동시에 받고 안 받고의 여부로 밝혀진다. 제사를 어떤 식으로 드리느냐 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거부하기에 그 인간이 행한 모든 것도 거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가인이 어디가 잘못되어서 하나님께 거절 당했는가에 대해 모른다. 또 거기에 대하여 관심 둘 필요도 없다. 다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에게는 죄를 항거할 만한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악은 그를 점령했고 애초부터 선을 향한 바람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善이란 하나님의 의사결정에 대한 옹호를 말한다. 즉 선택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것은 선이 될 수 없다.
동생에 대한 사랑은 먼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호응이 선행되어야 한다. 동생을 살해한 것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최고의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결정을 無로 돌리려는 시도이다.
이웃사랑에 대한 무관심은 이웃이 거기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결정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자기 스스로 이웃을 선정할 수 없다. 다만 그런 상황이 나에게 주어졌을 뿐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가인이 보여주는 인간형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독립을 허락하되 땅에서 저주 받은 자의 모습으로 추방하려고 한다. 여기서 가인은 독립과 보호라는 상충되는 원리 안에 자리잡으면서 실존적으로 모순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가인을 복수자로부터 보호하지만 그에 대한 보호는 그의 인격의 가치성보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보복할 수 있는 만큼 자격이 되는 자가 없음을 보이려는 기능적 효과를 노린 보호였다. 진정한 보복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여자의 후손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 다른 씨, 셋의 가문을 낳게 하므로 죽은 아벨의 피를 갚을 준비를 갖춘다.
선택자에 대한 비선택자의 공격은 용납되지 않고 보복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내린 약속이 시행되는 순서이다. 사람들은 비로소 약속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인 여호와의 일관성에 대하여 그 이름을 찬양하면서 신뢰함을 고백한다.
찬란한 문명, 한걸음 진보된 문화 개척자인 가인의 후손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땅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으며 땅으로부터의 저주를 감당해 내지 못한다. 땅이 기대하고 고대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다.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다.
교회들이 세상 것을 내놓고 세상과 경쟁해서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권력이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오직 필요한 것이 있다면 주님을 따라서 선한 싸움하다 순교에 이르는 것, 이것뿐이다. 세상은 잠잠해도 돌들이 증인이 되어 들고 일어날 때가 오기 때문이다.
죄의 현상은 자립심이다. 인간의 모든 문화 활동 경제활동 사회활동 등등..이 모든 인간의 행함 전체가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문명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 문명이요, 문화이다. 선한 문화로 자기를 가리려 한다. 그러나 구원 받는 것은 동행이다. 에녹의 경우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구원 받았다. 동행하는 분이 대단한 분이기에 영생을 얻는다. 이것을 나타내는 것이 증인의 역할이다.
4:1-8
가인은 하나님께 성의와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드렸다. 땅의 소산물로 추수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감사히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을 받지 않으셨다.
가인의 얼굴색이 변했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며 자기에게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동생 예물은 받으면서 자기 예물을 안 받는 것인가? 안 받으려면 둘 다 안 받든지 해야 되지 이런 하나님의 터무니없는 차별에 가인은 화가 난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조치는 잠언 16:4절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즉 악의 역할을 할 악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중보자의 기도를 받아들여서 우리를 인도해 나가신다. 가인은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 가인', 이것만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잘못된 세계관이고 신앙 관이었던 것이다. 가인은 동생 아벨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하고 아벨을 있으나 마나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사고 방식, 바로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인들의 특색이다.
자신이 벌이는 종교적 행위에 대해서 전력을 다하여 그 가치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계신지를 모른다. '하나님- 자기' 만 있으면 신앙이라는 것이 형성된다고 알고 바로 이것은 하나님 세계를 몰라서 그러하다.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예수님' 세계이며 성도는 거기에 따른 결과로 나타난 것 밖에 안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 세상이며 가인의 세계가 아니라 아벨의 세계였던 것이다. 가인의 잘못은 바로 이것을 몰랐던데 있다. 아벨의 세계에 대해서 같이 동의하고 동조하고 기뻐해야 될 형이 도리어 안색이 변하고 동생을 미워하고 더 나아가서 죽여버렸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세계에 대한 도전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1:4절에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드리고 싶은 제사를 아벨이 드렸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장차 드리고 싶고 받고 싶은 제사를 이 아벨은 자신의 제사 속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러한 아벨의 태도를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은 그 예물에 대해서 올바른 믿음의 증거로 삼겠다고 받으신 것이다. 아벨의 제사 속에는 하나님이 받아들이고 싶은 속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가인의 사고 방식은 성의와 정성을 다해 예배하면 신도 거절치 않고 받는다는 사고 방식만 있는 것이다. 이 사고방식은 예수님은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이며 악마의 정체요 이단의 정체인 것이다.
아벨은 예물을 드리면서 기름부분과 본체 부분을 따로 떼어놓고 드렸다. 히브리서 11:4절에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메시야에 대한 증거로 삼았다고 하셨다. 아벨의 예물은 기름부음을 입은 자, 즉 메시야의 희생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증거로서 예수님을 내 놓으신 것이다. 즉 십자가, 바로 구세주의 증거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천국 가는 이 원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배운 원리와 다르다. 현대 국가 교육의 이념은 자아 실현이다. 스스로 건전한 시민으로 설 수 있고 국가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잠재력 배양과 그 성취에 있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쟁취한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으로 볼 때 십자가를 무조건적으로 지우고 싶은 흔적 같은 것이다. 이 세계는 외부에서부터 구세주가 따로 투입될 필요가 없으며 영원히 우리들만의 세계로 남겠다는 것이다. 천당가도 내가 착하고 양심대로 살아서 가는 것이 순리이지 누가 외부에서 데리고 간다는 것은 용납을 못하겠다는 것이 가인의 후예들의 생각이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 만약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오히려 아벨이 있음이 가인에게는 고통이었듯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다. 그것은 나름대로 구원의 체제와 종교 제도가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리와 창기는 오히려 아벨의 세계를 반겼으며 스스로 죄인이라고 기도했던 세리의 기도를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의롭다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4:9-15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의 중함에 대해 가인이 호소하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내려주신다. 저주를 내리신 후에 또 은혜를 주시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가인에게 물으시자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고 하나님께 따질 때 하나님의 뜻은 형은 아우를 지켜야 하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아우를 지키지 못하고 죽인 가인을 죽지 않게 은혜를 베푸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지키심에 우리가 존재함을 알려주신 것이며(마 18:21-35) 하나님께서 가인을 용서하심 같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우리는 가인임을 잊지 말아야 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아벨이 안 죽도록 지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키심'이 아니라 아벨을 죽여서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지키심'의 원리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이 죽고 난 뒤에 가인에게 찾아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지 한 개인의 살아 있고 없고 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는 근원적인 악한 세계의 속성과 그 정체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악은 단순한 살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키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사는 것이 바로 악이다. 악인과 선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그 은혜를 모르고 감사 할 줄 모른다면 그 어떤 신앙적 태도도 언제든지 악한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로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4:16-24
누구나 이 사회에 대해 자신은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서 받아드린다. 양심이라든지, 인간성이라든지, 성품이 좋은 인격적인 면에서 자신을 살필 여유가 없다. 단지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선언하면서 살아야 한다. 퉁소 부는 자, 목축하는 자, 기계 만드는 자, 등 각자 자기 분야에 충실한 기계가 됨으로 비로소 참된 사람이다라고 믿게 만드는 사회가 바로 가인의 가족이다.
이 참된 사람의 결정체, 이상적인 참된 사람이 바로 라멕이다. 누구든 자신을 건드리면 철저한 복수만 있을 뿐이다. 인간들은 무작정 이 사회에 뛰어들다 보니 이런 사회가 어디서 출원했는지를 알지도 못하고 누구에게 물어 볼 여유도 없이 산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바탕 위에서 자라났기에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도 없다.
이처럼 기계적 사회가 된 이유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며 사회란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가인의 가족, 가인의 식구가 되는 외에 다른 길은 없는가? 가인의 사회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어쩔 수가 없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가인과 그 후손들의 생각을 비난하고 미워하지만 그럼에도 달리 대안이 없다. 우리가 이 가인의 사회를 떠나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가인의 사회만이 어쩔 수 없이 유일한 현실에 불과하다는 것에만 그친다면 그 결과는 복수와 복수의 연속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두 다 갖는 가인의 얼굴이며 모두 다 절대 신이다. 오늘날 현대인의 초상이다.
성도는 이 가인 사회 한 복판에서 살아갈 방법이 감사하게도 마태복음 18: 21-22절에 있다. 이것은 자아의 중심 이동에 관한 문제이다. 나는 남을 용서할 위치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너나 나나 다 같은 용서받을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가 바로 핵심이다. 동관의 비유를 통해 은혜를 은혜로 갚지 않으면 이런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이 천국을 소개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정말 자기 주제를 파악하는 자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 물론 무조건 용서하자는 말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말씀의 뜻을 아는 자에게는 용서가 되어야 한다. 주기도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는 자아의 중심이동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용서하는 위치에서가 아니라 용서받을 위치로 내려가는 중심 이동 말이다.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4:25-26
실제로 아벨은 죽었다.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린 자다. 하나님은 살인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벨이 이미 죽고 난 뒤에야 살인자에게 찾아오셨다.
죽은 뒤에 찾아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일이란 죽음조차도 극복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죽기 전에 구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그 죽은 당사자를 살리기 위해 대신 다른 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조치하시므로 이 일로 인해 결국 죽음조차 극복되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럼으로 죽음이라는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죽음보다 더 강한 무엇으로 인해 아벨은 죽은 것이다.
25절에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라는 말씀이 나오는 점이 중요하다. 약속의 씨란 반드시 깨어지고 무너지고 그리고 결국 죽어버린 그 자의 죽음을 대신하는 그 무엇이 나타나는 것이 내용으로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어야만 오직 하나님의 일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만난 자라면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알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는 비록 죽은 자라 할지라도 여호와 약속 안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자고 또는 쉬는 일이다. 안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충분히 극복된다는 말이며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조차 능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것을 걸기를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