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9월 11일 고후13:8 진리의 편재(遍在)성 : 그리스도의 것
안산 9월 11일 고후13:8 진리의 편재(遍在)성 : 그리스도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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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11 고후13:8 진리의 편재(遍在)성:그리스도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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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090911고후13장8절
안산090911고후13장8절[1]진리의 편재(遍在)성: 그리스도의 것
2010-10-08 03:43:11 녹취 : 박온정
안산090911고후13장8절[1]진리의 편재(遍在)성: 그리스도의 것/ 이근호 목사
『고린도후서 13장 8절: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
고린도후서 13장18절에 보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그렇게 되어 있죠? 이건 겨울 수련회 때 요한복음을 할 텐데, 무척 어렵습니다. 수련회 10시간 가지고 요한복음을 한다는 게 정말 무리지만, 열 시간밖에 안되니까 열 시간 내지 열한 시간밖에 안되지만 하기는 다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그 중요한 사항들을 수련회 하기 전부터 제가 조금씩 조금씩 담아야겠어요. 왜냐면 그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13장18절에 진리라는 게 나오잖아요. 진리라는 것에 대해 요한복음에서 진리가 나오는데, 본디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물었거든요? 요한복음 18장 37절에,『내가 온 것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라』이렇게 예수님이 이야기하니까, 그리고,『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들을지니라』했거든요. 그러니까 빌라도가 하는 말이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답변을 안 했습니다. 진리란 무엇이냐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얘기지만,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리면,【진리의 편재성(遍在性)】이 있는데, 진리라는 것은 ‘주님의 편재성’, 편재성이라는 것은, 두루두루 넓게 퍼져서 ‘안 계신 곳이 없는 곳’ 이것을 편재성이라 하는 겁니다.
편재성이라는 말이 안 쓰는 말이라서 좀 어렵지요? 쉬운 말로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물으신다면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21절:『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일들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잖아요. ‘이 일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지는 건 아닌가’ ‘혹시 이 일 때문에 내가 행동 잘못 해가지고 앞으로 힘들게 살아가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걱정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3장 방금 읽었던 부분을 보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너희’라고 하는, ‘성도’에 해당되고, ‘성도의 것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 이렇게 수평에서 일을 시작해 수직으로 하나님께 다 가버립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라 할 때 ‘너희’라고 하는 사람이 누가 너희에 해당되느냐, 할 때 그걸 물으신다면, 자기가 그리스도의 것이라 여기는 사람에게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너희’ ‘우리’에 해당되는 겁니다.
‘세상은 내 것이다,’ 한다면 그 사람은 ‘너희’에 해당이 안돼요.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내 것은 없다,’ 할 경우에만 세상은 우리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결국 세상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해당되는, 그리스도의 소유이기 때문에 ‘성도의 것’이라 할 수가 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 모두는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게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예요.
이게 바로 ‘내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세상 모두가 ‘그리스도를 위하여서’라고 한다면 세상의 어떤 변화라거나 여러 자기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고민하거나 걱정할 그런 자격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없다 이 말이지요. 더 쉽게 말해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하여’냐 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이 움직인다면 성도라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성도가 만들어져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방금 전에 제가 굉장히 어려운 얘기 했어요. 초반부터 어려운 얘기를 했는데, 어려운 이야기 다 수용할 수 있는 거니까 다 합시다. ‘나는 그냥 사는 것이 아니요,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만들어진다’에요. 만들어지는 존재예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만들어져 갈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말씀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말씀’이 나에게 ‘너는 이런 인간이다’ 라고 하는 소리만 우리가 들으면 돼요. 왜냐 하면, 우리는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말씀’이 기다리는 세계로 갑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나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한다면 당신은 할 게 없고, 말씀이 당신에게 다가와서 말씀대로 만들어져 갈 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죠.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내가 나쁜 짓도 하고 좋은 짓도 했는데 어떻게 살아왔습니까,고 물으신다면 당신이 나쁜 짓 좋은 짓해서 살아온 게 아니고 당신이 말씀대로 만들어져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우리를 눕혀놓고, 우리를 도마에 눕혀놓고 칼질을 해요. 칼질...칼질 계속해보면 찢어지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찢어지는 쥐포처럼 세미하게 찢어질 것 아닙니까? 찢어진 하나하나가 뭐냐 하면, 말씀의 덩어리, 말씀의 파편으로 되어진다, 이 말입니다.
이거 하나하나가 ‘너는 안개’입니다, 에 해당되고, ‘너는 풀의 꽃’ 같다, 에 해당되고 하나하나가 뭐냐 하면, 너는 말씀대로 창세전에 예정 되었느니라, 에 해당되고, 말씀 하나에 ‘네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피 때문이다’에 해당되고. 우리는 이렇게 말씀이 없어버리면, 내가 나로서 지금까지 먹여살려온 것처럼 느끼지만, 말씀이 와서 난도질을 해버리면 하나하나가 말씀 없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히브리서 6장에 보면 말씀이, 칼날 같은 말씀이 와서 우리의 골수를 쪼개고 우리를 벌거벗은 것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설교할 때, 교인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자기는 이 몸뚱아리를 가지고 ‘지금보다 부~자 되고, 건강한 몸뚱아리 되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교회를 왔는데 교회 목사님이 말씀가지고 전부다 난도질을 하고 짤라버리고, 나라는 게 아예, 없어졌다,고 할 때 교인들은 생각할 거예요. “내가 미쳤지, 교회를 왜 왔느냐’ 차라리 교회를 몰랐었으면, 그 말 안 들었으면 지금 세상 즐거움에 빠져서 재미나게 살 건데...”
이 말씀을 거부하기도 뭣하고, 이 말씀을 받아들이니까, 내 나름대로의 인생 보람 같은 것이 난도질당하잖아요. 내 나름대로 우리 아이 공부 잘하고, 우리 남편 잘났고, 뭔가 내 나름대로 ‘너하고는 달라, 우리 가정은 행복해’ ‘네 가정은 개떡이지?(ㅋㅋㅋ) 우리 가정은 이렇게 아름다워’ 뭔가 남에게 의시대고 자랑할 만한 나만의 가정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 교회 왔는데, 전부 다 저 집구석 내 집구석, 말씀을 잘라내 버리면 뭐가 되나, 전부 다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누가 남에게 의시 댈 것, 과시할 것 남아있지를 않잖아요.
남에게 자랑할 게 없으면 인생을 왜 삽니까? 인생을 왜 살아요? 인생을 사는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을 거고... 잘난 맛에 사는데... 제가 언젠가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교도소에 전부 다 나는 죄인이다, 사기꾼이다, 나쁜 놈이다, 반성하고 있는데, 교도소에 신청원이나 유영철이 한번 들어와 버리면 졸지에 그 사람들 다 잘난 사람 되어 버려요.
‘나는 사람 둘 밖에 안 죽였는데 너는 20명 죽였잖아, 그것도 여자만 연약한 여자를...’ ‘나는 조폭과 싸우다가 어린이 두 명밖에 안 죽였는데 너는...이 나쁜넘아’ 솔직히 두 명 죽인 사람은 뭐 돼버립니까. 사는 보람을 느껴요. “야...나보다 더 똑똑한 놈이 있구나” 나는 저 사람 오기 전까지 지금 죽어도 마땅한 죄인인 줄 알았는데, 저 사람 오고 나서 갑자기 자기는 큰소리 칠 수 있는 여력이 생겨버려요. 큰소리 칠 수 있는.
‘세상 사람들아, 나는 두 명밖에 안 죽였어’ ‘나는 사기 5천 번밖에 안쳤다’고 큰소리 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세상 나와서 자기 존재에 대한 큰소리치는 재미로 살죠 힘차게.
빌라도가, (어렵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자기가 지금 죄인이라고 여깁니까? 안 여깁니까? 자기는 집안에 성공한 사람이에요. 총독이 아무나 되는 겁니까. 자기는 속국의 총독으로서 자랑스러운 로마인이에요, 로마인.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 말을 듣냐 하면,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자칫하면 자기가 지금 사는게...사는 게 아니고 엉터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누구 만났을 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동안 진리도 모르면서 총독 되었다고 의시대면서 폼 잡는 재미로 살아가는 그런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심문 안 했으면, 빌라도의 마누라 잠 잘 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잡히던 그날 밤에 빌라도 부인이 잠을 설쳐서, 꿈에 나타난 모양이지요? 그래서 남편에게 ‘여보, 꿈자리가 사나워서 내가 잠을 못 잤다 이거 평상한 게 아니고 요상한 거야,’ ‘당신 심문한 사람 보통사람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했겠지요.
바로, 문제는 그겁니다. 진리가 오게 되면요, 예수님 말고 나머지 모든 것은 ‘비 진리’로 전향해버려요. ‘비 진리’로... 아내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 남편이 싫어해요. 교회 안 다닌 남편들이 싫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막되어먹은 인간도, 교회 간다는 것은 보다 더 나아지는 인간이고, 죽어서도 천국갈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아무리 교회 비판하고 기독교 비판해도 은연중에 교회라는 곳은 사람을 인간되게 만든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거든요. 본인은 교회 안가면서도...
그렇다면, 아내로서 교회 열심히 간다는 말은 격차가, 자신과 아내와의 ‘품질의 격차’가 나겠지요. 나게 되면 평소에 자기가 하는 짓들이 더 훌륭하고 똑똑해진 아내 눈에 비칠 때는 점점 더 비 진리로 잔소리 들을 수 있는 ‘헛점’이 될 수 있지요.
그러면 남편의 권위는 어디서 찾습니까. 망해도 같이 망해야 남편 권위가 살 건데, 여자가 천사 되어버리면 자기는 자동적으로 악마가 되잖아요. 그래서 ‘교회 가지 마라,’ 이 말이지요. 특히 둘이서 낯부끄럽게 만나서 연애하다 결혼한 사람들. 낯부끄럽게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한쪽 여자는 교회가 버리면 낯부끄런데 안 가고 노래방 안 가잖아요.
자기는 낯부끄런데밖에 모르죠. 거기 가야 친구만나고 ‘요새는 그 친구 통 안 오네?, 결혼하더니 마누라 잔소리 때문에 안 오나?’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요새 마누라에게 잡혀 몇 번 교회 오고 난 뒤에 술도 끊어야 되겠다, 술 안 끊으면 마누라에게 잡히겠다,’ 이런 식으로, 애 생겨가지고 담배도 못 피우게 생겼다, 이런 식으로 할 때 그 다음부터 옛날 친구들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또 새로운 친구 마누라가 교회 가기 때문에 옛날 친구하고 자기하고 하나는 악마 되고 하나는 천사 돼버리고, 점점 천사 돼버리고 상대적으로 자기는 점점 악마 돼버리고,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빌라도에게 물었어요. ‘나는 진리를 전하러 왔고’ 요한복음에 보면 “나는 진리 때문에 왔다” 라고 했을 때, 빌라도는 위기를 느끼고, 그러기 전에 누가 누구를 심문합니까. 진리를 모르는 자가 진리를 아는 자를 심문한 셈이 되지요.
진리를 아는 예수님이 누구를 심판한다? 진리 모르는, 진리를 모르니까,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먼저 물었으니까. 결국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했고, “진리를 위해서 나는 이 일을 위해서 낳았고, 진리 때문에 왔고, 내게 속한 자,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드러낸다” 했거든요.
빌라도가 예수님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자기를 ‘진리 속에 속한 자’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 (진리는 개뿔도 모르면서 진리 되고 싶어서) ‘내가 가입할게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줘’ 했지만 말을 안 하잖아요. 왜냐면 진리에 속한 사람은 따로 이야기 한다고 아는 게 아니고 자기는 이미 알고 있죠. 이미.
그 진리가 무엇이냐, 고린도전서에서 ‘진리’라는 것은「세상의 모든 것은 성도의 것이고」그런데 성도가 좋다하면 안되죠. 왜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성도로, 성도 위주로, 성도 되게 ‘내가’ 나,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나는 말씀에 의해서, 진리에 의해서, 진리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 진리에 관한 말씀에 의해서, 내가 만들어져 가는데, 만들어지기 위해서 세상이 이렇게 분주하게 변화되어 가는데,
그것을 ‘내꺼’라고 얘기해버리면 안되고, 내꺼라는 건 없고, 성도 자체가 누구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 위해서 세상변화가 있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했고... 그게 바로 제가 좀 전에 얘기했던, ‘진리’란 ‘주님의, 하나님의 편재성’이다.
모든 것, 안 계신 곳이 없다. 안 계신 곳이 없어서 거기서 변화를 일으키면, 파장을 일으키면 성도를 위해서, 곧 그리스도를 위해서, 곧 하나님을 위해서, 일의 진행이 이루어가는 겁니다. -물을 마시면서, 진리가 바로 이 앞에 있네요.-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약간 더 어려운 거 해봅시다. ‘예수님이 진리다.’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을 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말을 우리가 알아먹으면 되겠네? 그게 쉽지 않아요. 왜냐 하면, 요한복음 자체가 어려운데 제가 예로 들어드릴게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고린도 후서 12장 하기 전에 서론 들어가야 되요 -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냐 하면,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간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가로되, “잠들었으면 났겠습니다. 죽은 줄 알고 걱정했는데 잠들었으면 낫겠네요. 안 죽었네요?” 그다음에 해설 붙이기를,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했는데 제자들은 잠들어 쉰 것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해설을 붙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디두모(도마)가 뭐라 하냐 하면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렇게 했다고요, 지금 이 말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께서 첨부터, ‘나사로는 죽었는데 죽은 것을 나는 잠자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설명한 게 아니고, 불쑥, 예수님은 ‘잠자니까 깨우러 가자’ 이랬다고요.
그래서 제자들 하는 말이, “잠잤으면 지가 알아서 깨어나야지 우리가 갈 필요가 뭐 있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실은 잠자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다” 라고 하니까 디두모라하는 인간이 얼마나 말귀를 못 알아듣는지, -한번 써보겠습니다. 이게 또 어려워요 - 잠자는 것이 죽은 것인데, 예수님은 죽은 것을 ‘잠잔다’했는데, 제자들이 못 알아들어, 잠자는 것을 죽었다고 하니까 제자들은 잠자는 것으로 해석한 거예요.
‘야, 우리도 잠자러 가자’ 이 말이에요.(ㅎㅎ) ‘자러 가자’ 이 말이에요. 이게 도마입니다. 도마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안 믿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초점이 뭐냐 하면,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이런 오해가 없을 건데, ‘잠자러 간다’ 라고 왜 하셨냐 이 말입니다.
그게 얘기 한, ‘진리 때문에... 주님의 편재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보이는 것이 다 누구 것이라 했습니까? ‘주님의 것’이죠. 그러면 이땅에 살다가 죽은 사람은 누구 것이겠습니까? 주님의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라고 여기지, 이 땅에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은 갖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에서 주께서 뭐라 하시냐면, 사람들이 말하는 죽는다는 것보다, 주님께서는 더 넓게, 포괄적으로 넓은 범주로서 죽은 사람까지 뚝 떠서, 예수 믿고 죽은 사람은 죽음이 있다? 없다? 없고 몽땅 잠자는 것이다. 누구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것이에요.
하지만 이것을, 이 사실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한테는 그런 말을 해서는 못 알아들으니까, ‘죽었다’고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도는, 우리가 죽으면 깨어나겠느냐, 라고 오해한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오늘 강의 중 젤 어려운 대목에 와 있습니다. 지금 - 예수님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말이 참 어렵죠? - 지난 수요일 설교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축복받을래? 저주받을래? 할 때 축복 받겠다 하는 사람은 저주받고,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사람은 구원받은, 복 받은 사람이에요. 이게 성경의 원리입니다.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어요. 그게 선이 두 가지가 있어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습니다. 그리심 산이 축복의 산이고, 에발 산이 저주의 산이에요.
둘 중에 어디 가려고 하겠어요 사람들이. 백이면 백 축복 산으로 가려할 거예요. 축복 받겠다 하면 저주가 날아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저주 산은 에발 산에 있어요. 주님의 받은 저주와 함께 있으면, 대신하여 죽으심과 함께 있으면 뭐가 날아오냐하면 복이 오게 되어 있어요. 맞은편을 향하여 축복 날린다고 축복 산이고, 맞은편을 향하여 저주 날린다고 저주 산이에요. 이것도 모르고, 축복도 모르고 그리심(축복) 산으로 다 들어가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 오라는 것은요,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복 받게 하려는 것인데, 전부 다 교회마다 ‘복’받으러 오기 때문에 전부 다 저주받는 거예요. 안산 동신교회 같으면 프랑카드에 사법고시 누가 들어갔고, 서울대학 몇 명 들어갔다고 나오지요?
이게 바로, 동신교회 자체가 뭐냐 하면 이것은 넓은 길로, 저주의 길로 가려고 작정을 했어요. 작정을... 작정을 했어요!! 어떤 집에 가면 마귀의 말도 적어놨어요.『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여호와 하나님께 욕 얻어먹을 말을 적어놨어요. 차라리〔선악과를 따먹자〕이런 게 있어야 되요.
‘선악과 따먹자’ 하든지 아니면 ‘돌이 떡 되게 하라’ 이런 거 있잖아요. 우리를 구원하면 믿어줄게, 십자가 밑에서 마귀가 하는 이야기예요.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이런 것을 붙여 놓던지... 마귀의 말 많잖아요. 놀라운 사실은, 악마는 ‘복음’과 꼭 반대로 말하기 때문에 참으로 찾기 쉬워요.
제 글에 이런 글 있지요? 개혁주의라는 글 어떤 분이 올려서 리플 달린 글에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일할 때 우리의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군더더기 껍데기에 뭐가 들었냐 하면 ‘우리의 행함’과 ‘우리의 의’가 들어있습니다.
이걸 말씀을 가지고 쪼개고 뜯어내면 마지막에 예수님의 피가 담겨있는 사람은 ‘성도’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자기 의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지만 결국은 주께서 고맙게도, 성령께서 이걸 뜯어내주시거든요. 순간순간 사건을 통해서. “이 속에 뭐가 들어있나 보자!” “어이쿠, 피가 들어있어,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이렇게 되는데 불신자는 ‘우리의 겸손’과‘성화’에다가 종교적인 티를 내고 ‘기도’와 ‘금식’으로 떡을 쳐서 벗기고 벗겨도, 계속 벗겨도 ‘자기 공로’만 나오니까 나중에는 예수님 피가 없어요.
진짜 예수님 피가 있는 사람은 벗기면 벗길수록 점점 자기 속에 예수의 피와 공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벗기게 됨을 감사하게 되는데, 안에 ‘개뿔’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복음’안다, ‘십자가’안다, ‘오직 십자가만 외쳤다’ 하면서 ‘주여 주여 주시옵소서,’ ‘병자를 고치고 선지자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까.’
백날 해도 벗기면 ‘벗기지 마옵소서, 나도 착한일 했고, 개척교회 몇 곳을 했고, 강의도 했고 안산 가서 강의도 했는데 벗겨버리면,.. ’식으로 뭔가 부적을 붙여 놓으면... 하지만 예수의 피를 믿은 사람은 다 뜯겨가도 시원해요. 여름에 잠바입고 오바입고 털옷 입으면 귀찮잖아요.
- 여름엔 더운데 맨살로 다니는 게 최곱니다. ㅋ 어린애처럼 물장구치고 최곱니다. 고추 내놓고 물장구치면 최곱니다. 어른이라 차마 못그러지만...-
어제 ‘길안’이라는 곳에 냇가, 큰 강이 있는데 거기서 오랜만에 시냇가에서 물에 담그고 한 1년만에 세 시간동안 오후 4시에 가서 6시까지 다슬기 잡았는데 ‘아...나에게도 이런 한적한 시간이 있다니’ 반가워하면서 거의 아무도 없는데 저와 오랜만에 쉬는 제 아내와 같이 갔던 장로님 내외 두분과 네 명이서 돌멩이 들추면 고동 다슬기가 붙어 있고... 나중에 해가 져서 다 못 가져 왔어요. (다음에 또 가야쥐~)(집사님 다음에 같이 가입시다요)
사람속을 뜯어내면요, 예수님 피가, 피의 공로가 있는 사람은 어떤 사건이 벌어져가지고 자기 속에 있는 위선과 체면, 자존심이 뜯겨 나가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왜? 오랜만에 맨살에 양말 벗고 다슬기 잡는다고 하니까, 어릴 때 어린아이로 돌아간 심정처럼 허위허식과 체면 이런 것이 뜯겨나가니까, 무거운 짐 날아가 버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결국 내 안에 구원받은 것도 무엇 때문에? 예수님 피 때문에 구원받는 걸, 그것도 모르고 성경을 몇 독 했네, 나는 목사입네, 어떻게 신학을 했네, 교인수가 몇 명이고, 집안에 재산이 몇 억이고, 평수가 얼마며, 자식이 서울대학 들어가고, 몇 명을 전도했고, 헌금을 십일조 꼬박꼬박 다 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주님께서는 그 껍데기를 지포 찢듯이다 찢어버립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찢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임하면, 사도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멀쩡한 날이 없어요. 왜냐면 주님의 능력이 오니까. - 김명민이라는 텔런트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베토벤 바이러스’ 이런 드라마 출연한 배우인데, (목사님은 티브이 보실 시간도 있으십니까?-녹취자)
다른 주인공들은 쉬운 역할도 잘 맡는다는데, 주인공을 맡아도 무슨 팔짜가 살을 빼야 한다든지, ‘하얀거탑’ 에서도 꼭 힘든 역을 맡아가지고 힘들어 죽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곱게곱게 넓은 길로 가게 하시면 되는데, 어떻게 하느냐면 꼭, 우리로 하여금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너 이래도 안 죽을래?’ ‘너 이래도 안 죽을래?’ 죽음이 일어나는 그런 사투를 발생시켜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맨날 넘기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성도라는 세계 안에서 죽음에 넘겨져 봐야 그동안 잊어버렸던 ‘주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그때 알아요.
글로 적으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알면 그동안 내가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시편의 주제가 뭐냐 물으면, ‘감사’예요 감사. 다윗으로 하여금 감사케 하기 위해서,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그야말로 ‘죽음의 골짜기’를 헤매고 다닌 것이 나온 게 ‘시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22:1) “주님은 나의 요새요, 피난처요...” 이게 뭐, 말이 요새요 피난처지,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이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있다? 없다? ‘전혀 없다’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피난처요 요새시오, 이게 뭐냐면, 내가 사람에게 기댈 언덕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이 안산 바닥에서 날 위로해줄 사람 없고, 나에게 경제적으로 도와줄 아무도 없고, 그럴 때 비로소,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여호와는 나의 요새시오... ” 그럴 때 시편 84편 같은 경우 “세상의 천 날보다 하나님의 궁정에 문지기로 하루 있는 게 좋다”고 노래 했습니다.
문지기를 궁정에 들어가지도 못해요. 보초로만 세워주신다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얼마나 부러웠든지 성전 처마 끝에 참새와 제비가 집을 짓는 거 보고 하는 말이, ‘아이고, 참새야 제비야, 너희들이 부럽구나’ 참새 제비는 마음대로 성전에 집을 지을 수 있는데, 너는 왜 이토록 멀리하고 싶고 하나님을 싫어하고픈 생각이 드느냐 이 말이지요.
인간이 풀 수 없는 난해한 문제 아닙니까? 겉으로, 건성으로 ‘하나님 나를 만드시고 은혜 주시어 살아갑니다’ 말은 입술로 나불나불 하는데, 될 수 있는대로 하나님 소리가 안 들리는 곳, 예수님 십자가 소리가 안 들리는 곳, 인간들의 웃음소리가 있는 술집이나, 그런 나이트클럽이나 노래방, 거기에 합세하고 싶어 환장하는 이 본심은 누가 우리 속에 불질러서 일어나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교인들은 그런 분은 없습니다만, ‘주님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왔습니다’ 이렇게 고백한 사람은 믿지만, 혹시나 ‘주님 좋아요’‘뭐 좋아요’ 하는 사람들 안 믿습니다. 왜? ‘나는 주님이 좋아요, 말씀이 좋아요,’ 하다가도 집안에 누가 손자 왔다, 친척 왔다, 하면 교회 안 나옵니다.
평소에 그게 뭐냐 하면, 듣기 싫다는 거예요. 하나님 있는 곳에 근처도 가기 싫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바로, 어둠의 특징이 뭐냐 하면, 빛으로 오는 것을 두려워해요. 그래서 누가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에 대해 얘기해버리면 근처도 가기 싫어해요.
다시 얘기합니다만, 교도소에 전부 다 자기가 ‘죄 지었다’고 반성하고 있더라도, 유영철이 나타나면 이 교도소에 나머지는 졸지에 뭐가 되냐 하면, 졸지에 ‘의인’ 되지요. ‘내가 아무리 인간성 개판이라도 너처럼 스물 몇 명 죽이는 그런 나쁜 놈은 아니다,’ 갑자기 희희낙락해요. 즐거워요 즐거워! ‘나보다 더 못된놈 나왔다’ 고.
그런데 이 교도소에 훌륭한 스님이 오셨거나 목사님이 오시고 테레사 수녀가 와가지고, 강의하면 고개 푹 숙이지요. ‘나도 실수만 안 했으면 당신처럼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씩씩거리죠. 상대적인 ‘죄인된 의식’에.
그래서 성령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뭐냐 하면, 사도바울을 몽땅 들어서 항상 주님의 능력으로,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 같은 죄인중에 괴수도 살려냈다’는 그 은혜가 여과 없이 향기가 되어, 외부로 퍼지게 하여 사도바울로 하여금, 자기 공로, 자기 색깔 일체 남기지 않은 ‘사태’들을 일으킵니다.
사도바울처럼 전도를 많이 했으면 어디가도 총회장을 할 건데, 이건 총회장이 아니고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단소리 들으면서 강제 추방당하는 사태들이 일어납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본전 찾기’ 했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성경 보세요, ‘그래 나는 쓰레기고 나 때문에 죽은 35:58(알아듣지 못하는 부분)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나는 약해지고 너희는 강하고, 나는 가난하고 너희는 부자 되고, 나는 죽게 되고 너희는 산다면 이것이 주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본보기다’ 그러니까 상급이라는 거예요. 상급. 상이라는 건 받아 챙기는 것이 상이 아니라, 《남을 유익하게 하는 행위 자체를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했어요.》
나 때문에 누가 살게 된다면, 내가 복음 전해서 누가 산다면, 그 과정 자체가 상이라고 했어요. 그걸 해서 보너스 받는 게 상이 아니고,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 뭐라고 했냐 하면요,
사도바울은 이걸 가지고 이랬어요. ‘천사도 부러워하는 사명’ 천사도 부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귀한 복음을, 암 전문의도 사는 보람을 느끼는데 (이건 살려놔도 또 죽을 거니까) (병원의사는 돈 들여 살려놔도 다시 죽잖아요) 그런데 복음이라 하는 것은 영원히 영생을 주는 것인데, 보람찬 일에 천사도 흠모할 일을, 내가 거기 참여했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이 죄인에게 주어지는 터무니없이 큰 상급이요, 상패요, 상장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 자체가.
그래서 얻은 면류관 누구에게 반납하고? ‘이건 예수님이 쓰셔야 마땅합니다.’ 내 놓고. 그런데 오늘날 목사나 이런 사람들은 천사도 흠모할만한 사명 자체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모르고, 반드시 거기다가 반대급부, ‘내가 이렇게 수고했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못 산다, 내가 미쳤다고 이 짓 하냐’ 이것은 사명자체를 누가 지시한 겁니까. 본인이 지시해요 본인이.
본인이 사명을, 생명주는 사명을 시시하게 본다, 이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구원받지 않았을 경우에나 나올 현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진짜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십자가만 봐도 전율합니다. 십자가만 보면 자랑합니다.
“친구야!”
“왜?”
“저거 보이나? 십자가”
“저게 뭔데?”
“십자가의 공로, 그 피로서 거기서 용서가 나와 나의 많은 죄가 저 피로 내가 용서 받았다잉? 아, 십자가를 볼 때마다 좋아서 미치겠다”
“저 십자가 또 있네, 내가 다시 연락할게”
“십자가에서 펄펄펄 용서가 나와 가지고... 저 십자가 아니면 지옥 갈 뻔 했는데, 저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다,”
이러면 그 사람은 어디 가서 누구를 자랑하겠습니까. 예수님 자랑할 거 아닙니까. 이게 구원받은 성도 맞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분명 구원받았다고 사방천지 큰소리는 다 쳐놓고 주여, 생활비는 이것밖에 안주고, 교인은 몇 명 되지도 않고, 교인들은 모이지도 않고, 여름에 설교하는데 자기 마누라까지 다 자고, 설교하는 자기만 깨어 있고, 설교 시작부터 나머지는 다 자고...
이래가지고 무슨 보람이...목회 하면 무슨 재미가 나서 목회를 하지, ‘에이, 때려치우자’ ‘하나님이 동업하자는데, 동업자가 안 도와주는데 나 혼자 왜 기를 쓰고 가야 되느냐,’ 그 사람 귀에는요, ‘좁은 길로 가거라 넓은 길은 찾는 자가 많다,’는 소리가 안 들립니다. 그저 남들처럼, 그저 섞이면 되는 줄 알고, 진리는 좁은 길인데, 찾는 사람이 적은 길.
남처럼 되면 얼추 중간은 되는 줄 알고, 이게 바로 본인 자신이, 성령을 소명시켜 주님을 시시하게 보던지, 아니면 아예, 버려진 자든지, 그럴 경우가 아니면 진짜 성도는 이러한 생각이 들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말씀대로’ 만들어져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말씀이 하루하루 다가와서, ‘너는 안개다’ ‘오늘 어디 가서 일 본 거는 다 헛된 짓이다’ ‘방송에서 보도한 거 다 거짓말이야, 너는 안산 가든, 대구 가든, 서울 가든, 너는 안개야’
안개임을 알 때, 안개인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자체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죠. 안개처럼 지금 소멸되어도 마땅한데, 아직까지 복음 전하라고 살려주시니 감사할 뿐이죠. 그래서 항상 죽기 살기로, 죽고자 할 경우에만 그 사람의 의가 나오고 죽고자 하는 자를 살려주신 주님의 복음의 능력이 죽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나오죠.
다시 말하면, 제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사람은 졸지에,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고백을 통해서 같이 겸해서 복음이 전달되는 거지요. 여기서, ‘이것 믿으면 부자 됩니다.’ 하면 이건 복음이 아니죠.
일단 부자 된다고 하면, 일단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믿고 기도하시면 부자 됩니다.’ 할 때 부자 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뭐냐면, 부자 된 나를, -이제는 하나님이 주인공이 아니니까,- 어쨌든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되니까, 하여튼 날 건드리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날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자기 본성의 발로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후서에 오늘 봤던 13장8절에『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하죠. 아무튼 진리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뭘 거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 그게 진리다’ 말이지요. 우리는 장례식에 가기 싫고 어디가기 좋아합니까? 전도서에 나오죠.
사람들은 장례식보다 어디 가길 좋아합니까? 결혼식에 가기 좋아하죠. 자기가 빛나는 순간이다, 그런데 전도서는 뭐라 합니까. 결혼식 가기보다 어디 가라? ‘장례식에 가라,’ 왜? 네 본질은 거기서 바뀌어지니까. 이 말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오는 것이 아니고, ‘너는 지금 당장 죽어도 할 말, 큰 소리 못쳐,’ ‘너는 당장 죽어도 그동안 살아온 것도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말씀이 올 때, 그때 우리는 놓쳐버렸던 감사꺼리가 새롭게 나타나지요. 새롭게.
아이 공부 못한다고 쥐어박더라도,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이런 애를 주신 것도 감사하게 되죠. 그래서 성경에는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 것입니다. ‘얘야, 공부 못해도 괜찮으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그거 몇 초 가겠습니까. 그거 한 3초 갑니다. 다시 돌아서면, ‘우리 애는 서울대학 가야된다’고 나오지요.
그런데 그걸 만약에 3초가 아니고 3시간 이상 늘어나지 않느냐 하면, 그게 늘어나버리면 예수 잘 믿는 내가 또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려요. ‘나는 예수 잘 믿는다’ 라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의시대는, 자신을 믿게 되는, 내가 나를 믿게 되는 우상숭배자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나를 난도질해버립니다. 자기 자리 뽀사 가지고 짝짝 찢어버려요. 찢는 경우 그 틈이 3초라니까요. 돌아서면 또 내 영광, 하다가 또 얻어맞으면 ‘아차, 이게 죄구나’ 하다가 돌아서면 또 내 영광, ‘아, 이게 죄구나, 나는 역시 죄를 아는 훌륭한 자야,’ 하다가 또 얻어맞고.
성령께서는 쉬지 않고 말씀대로 이끕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개판을 쳐도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말씀대로 해서, 마지막에 가서 성도는 ‘주의 뜻대로, 주의 말씀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죠. 내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만들어졌습니다.’ 고백을 합니다.
그게 바로 본문의, 다시 할게요. 우리는 누구를 위할 뿐이다? ‘진리’ 진리가 뭡니까. 진라가 말씀 아닙니까. 말씀의 진리, 진리의 말씀, 예수님 말씀이니 진리의 말씀이고, 그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하니까 말씀이 진리가 되고 이렇습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 중심으로 방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직 우리는 진리를 위하여, 말씀을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말씀을 위할 뿐이다,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이것을 위하여 구하노니, 우리 사도가 약해도 우리가 약해져야 누가 구원받는다? 너희가 강하게 구원받는다 생각하면 얼마든지 약해지는 이것도 사도바울한테는 영광이로소이다, 이 말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강의 초반의 중요한 것 다시 한번 해볼게요. 여러분도 새롭게 이해하는 범위내에서...고린도전서 3장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만물은 누구의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너희의 것이다” ‘성도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과 국회문제, 임진강에 6명 빠져 죽은 것, 이 모든 것을 누구를 알리기 위한 것입니까? 세상만사가 누구의 뜻대로? ‘그리스도의 뜻대로 됨’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미쳤나, 주일날 교회 안가고 거기 왜 놀러가 그래,’ 댐이 범람할 줄 세상에 누가 알았겠어요. 주께서 범람한 인민군 손을 막을 수도 있어요. 안 막습니다. 그냥 주님께서 댐을 열게하신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거든요.
그런 것을 통해서 애들 죽는 사고가 있을 때 ‘우리 애는 괜찮다, 이러지 말고, 내가 만약에 그 현장에 있으면 아무리 예수 잘 믿어도, 내 애가 물에 떠내려갔을 때 얼마나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만약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면, 원망해 보면, 고린도전서 3장 말씀과 어긋나죠? ‘세상의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다? 주님의 것인데, 그 전에 내 자신은 누구의 것이다? 내 것이라고 얼마나 고집을 부렸어요.
얼마 전에 우리교회에 세 가정이 갔어요. 세 가정이 가버렸어요. ‘목사님 복음은 복음이 아닌 거 같습니다.’ 왜냐고 누가 물어보니까. ‘왜 인간의 행함을 무시합니까’ 하더랍니다. 8년 동안 우리교회 다니면서 아무리 봐도「목사님은 ‘인간의 행함’을 무시해서 못 있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면 제가 뭘 강조했겠습니까.
‘목사님은 예수님밖에 몰라요.’ 그걸 누가 신문에 내봤음 좋겠어요. ‘우리교회 목사님은 예수님밖에 몰라가지고 인간의 행함을 아는 다른 교회 갑니다.’ 다른 교회는 ‘인간의 행함’을 이야기했다 이 말이지요. 다른 교회 목사님들은 예수님의 행함보다 인간의 행함을 강조해서 교회를 큰데로 바꾼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끝으로 한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13장에 보면 유명한 비유장이라 해가지고 ‘하늘나라는 이러하니라’ 등 비유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 비유가 8가지 나오는데, 그 비유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뭐냐 하면, 뭡니까? ‘분리’입니다. ‘분리’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으니라,로 시작해서 모두가 한결같이 ‘분리’입니다.
마지막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분리하죠. 가라지와 알곡을 분리하죠. 30배 60배 열매 맺는 것 분리하죠. 하나님 나라가 뭐냐, 여기 있으면 우르르 좇아올 것 아닙니까. 저기 있어도 좇아가고, 좇아가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똑 같아’라고 여기는 것에 하늘나라가 액션, 활동이 주어지면 ‘똑같아’가 ‘똑같지 않구나’로 분리되는 작업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애굽과 이스라엘이 구원 된 건지 알죠? 천만에 말씀입니다.
애굽과 이스라엘이 둘 다 애굽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칭칭감고 모세가 내려오면서 애굽과 이스라엘이 최초로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이 뭔지 몰라요. 그저 이 땅에서 고생만 안하면 되는 줄 알아요. 이스라엘은 그들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환경이 만듭니다. ‘광야’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광야가 필요하고 피가 있어야 이스라엘 된다는 아이디어는 어느 이스라엘도 이걸 사전에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습니다. 지금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구원받는 사람, 스데반집사같이 구원받는 사람, 성령 받은 사람, 천국 가는 천국백성 어떻게 만드는지 아이디어를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넓은 길로 가려는 사람은 어떡하든지 넓은 길로 가게 하시고, 맨날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억지로 죽음을 넘기면서 우리가 예상한 천국백성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대로 있는, 진짜 천국백성을 만들어 내는데, 그게 바로,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그렇게 만들어내는 거예요.
세상의 안목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바로 천당 가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어요 우리는. 돌이 떡이 되고, 뛰어내려서 많은 사람 앞에서 이적을 베풀어 많은 사람에게 인기 얻고, 세상의 모든 권력이 내 앞에 무릎 꿇은, 그런 식으로 천국 가기를 우리가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4장에 보면, 처음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열리면 구멍이 생기겠죠. 구멍에서 뭐가 내려옵니까. 성령이 내려와요. 그만큼 성령이 오기 전까지 하늘에 구멍이 없는 거예요. 구멍이 찢어져 성령이 예수님께 임할 때, 그때 최초로 예수님이 누구와 상대했습니까. 사람과 상대하지 않았어요. 광야에서 누구와 상대했지요? 악마하고 했어요.
그 말은 뭡니까. 이 세상은 누구 지배아래 있다?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 나는 시시하게 인간과 상대 않는다, 해봐야 마귀가 나오니까, 마귀의 하수인들이니까, 상대할 거 뭐있어요. 구원하려면 악마를 상대해서, 예수님이 악마를 이긴 자가 된 상태에서, 이긴 상태에서 말씀과 사역이 나와 주어야 악마 속에 갇혀있는 자기백성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발휘가 되는 겁니다.
처음 악마 만날 때 뭐냐, 바로 돈, 경제적인 문제, 기적적으로 인기 있는 메시아, 세상 권력과 합세한 메시아는 누가 조작한 메시아다? 악마가 이 땅에 종교라는 걸 만들어서, 교회라는 걸 만들어서, 주일날이라는 걸 만들어서 민중들이 좋아하는, 악마에 속한 인간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교회로서 크게 부흥하는 거예요. 그게「이 모든 것까지라도 ‘주의 뜻’입니다.」
그걸 통과해야 오직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이라 하는 것은 사람은 갈 수 없고 오직, 주님의 성령 받은 사람만이 주의 능력으로 홍해 갈라지듯이, 주님 없는 곳에 길을 열어 가면서도 좁은 길 가게 하셔서, 우리의 면류관도 주께 반납하도록 만듭니다. 그 길을 가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진리가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가 세상을 비판하면서도 얼마나 세상을 좋아하고 있는지, 한쪽은 비판하면서도 사실은 내심 부러워하면서, 남에게 꿇리지 않은 인생 살고자 얼마나 소망하고 있었습니까. 그러나 고맙게도 우리를 낮추고 낮춰서, 십자가의 죽음을 맛보게 하셔서, 살아온 것도 주님의 은혜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가 말씀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고, 복음 전하는 이 사명이 천사도 흠모할만한, 아무도 할 수 없는 귀한 일인 것을 자부심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한례 10-10-08 06:2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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