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 주석
창세기 3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60)
창세기 3 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뜻밖에 뛰어든 피조물 하나가 있었다. 그 지혜를 가진 뱀은 인간을 치명적인 상태로 이끌고 말았다. 인간은 뱀과 한 통속이 되어 하나님의 지시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인간이 신이 되는 길을 모색한 그들은 그 방법이 하나님이 금지한 그 무엇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말씀에 매여 있는 존재인 줄 알지 못했다.
벌거벗음이 수치가 되는 경우는 한 경우밖에 없다. 그것을 낯선 것으로 간주하는 자신의 비정상적 상태에 있을 때다. 이것은 비 본래적이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숨을 곳을 찾으려고 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렸지만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에덴 동산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간은 그의 거처가 새롭게 마련되어야 했다. 인간이 추방 당한 곳은 그 전 같지 못했다. 가시와 엉겅퀴가 새로 돋아 났다. 이것은 저주 받은 땅의 본질을 말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책무는 취소되지도 않는다. 경작할 때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자식을 생산할 때 고통이 따라 와도 인간의 고유한 삶의 터전 만은 벗어 날 수 없다.
그러나 아담은 실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인해 영생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는 여기에 희망을 걸고 아내를 생명(하와)이라고 불렀다.
땅은 땅이로되 약속이 성취될 배경으로서 땅이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땅이다. 또한 이 땅에서는 약속이 말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서로 부딪기는 생존의 전쟁에서 약속은 피어난다.
약속이란 인간사회에서의 극도의 비극 안에서 발견되는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그 비극을 기쁨으로 극복 시킬 때 분명히 나타난다. 고통을 모르는 자는 은혜를 거부하게 되어 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행운과 행복을 기대하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모든 고통과 죽음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여기지 않고 남 탓으로 돌리는 자에게는 약속은 헛수고의 결과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약속은 그 누구 편도 아니다. 약속은 무상으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유산이다. 세상살이에 여유가 있고 구태여 하나님께 기대지 않아도 살만큼 산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약속은 노리개로 취급 당한다.
그러나 날마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사는 자들에게는 오직 은혜의 약속 이외에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하나님은 쫓겨가는 인간에게 짐승을 잡아 옷을 만들어 입혀줌으로써 그들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인간이 영원토록 비본래적 존재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안 했다. 그래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했는데 그 지킴은 인간이 약속을 이해할 때까지이다. 약속,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역사를 해석한다. 오직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모든 창조물은 존재하고 동원된다. 온 천하보다 더 값진 것은 약속 안에 있는 생명이다.
3:1-4
마귀가 먼저 사람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먼저 묻는다. 그 물음의 내용은 상대방의 신상에 관한 것이 아니고 놀랍게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귀가 인간에게 찾아올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빌미로 잡아서 찾아오며 하나님과 인간을 격리시키는 목적으로, 하나님 말씀조차도 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려고 인간을 찾아오는 것이다. 이사야 40:7-8의 말씀이 "풀도 마르고 꽃도 시들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흐지부지되고" 로 되기를 원하며 찾아온다.
하나님이 제시하는 것은 말씀의 일관성인데 반해 마귀가 다가오는 것은 그 말씀의 역할에 대한 불신감을 조장하기 위해서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며 오늘날 시대에는 누구를 붙잡아야만 하며 누구를 믿어야만 한다. 예수만 의지하는 것으로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3:5-7
죄를 지은 본인들이 죄를 없앨 수 있는 방도는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으며 오직 죄와 무관한 자가 만든 치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치마를 만든 행위에는 죄가 들어있지 않는 것이며 의로 말미암아 가리움을 받을 경우에만 죄가 해결된다.
하나님이 직접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이 만드신 가죽옷을 제공하심으로써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계속 남겨 둔 채 오로지 구원에 관한 모든 공로와 영광은 하나님에게 두기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며 가죽 옷 안에 있는 인간의 육체는 계속해서 수치스러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사람 된 육체를 보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가죽 옷 만을 계속해서 보고 계시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그 위치에 그냥 하나님의 은혜가 덮여 있는 것이다.
3:8-15
하나님은 선악과 훼손을 놓고서 그 원인 자를 끝까지 추궁해서 규명하시고자 하신다. 선악과라는 나무의 물질적 훼손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도록 조치한 그 원인 제공자의 정체를 밝히는데 선악과를 사실상 이용한 셈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과 마귀 사이에는 영원히 화해될 수 없는 관계로 고정시켜 버린다. 영원한 원수지간이 되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한 행동이 악의 정체를 밝히는데 있어 뚜껑 역할을 한 셈이다. 뚜껑을 여니까 엄청난 내용의 악의 실체가 공개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묻기를 "선악과 왜 따먹느냐?"고 물으시고 여자에게도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뱀에게는 "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부추겼느냐?"고 묻지 않으신다. 뱀에게는 그 어떤 배려도 허용치 않기 위해서다. 뱀은 악의 최종자였으며 영원한 저주의 대상이지 구제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런 취지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싸우게 되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정수리를 칠 것이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화해하는 경우는 없다. 뱀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갈라서도록 의도한 것이다.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을 자기 사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악의 정수리를 치는 것은 시편 68:21절에 하나님만 칠 수 있다.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가능하다. 그 약속으로 인해 더 이상 성도를 공격 할 죽음은 없다. 이제 우리는 우리 바깥을 알아야 한다. 그 세력에서 벗어나는 영생에 이르는 것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을 아는 것뿐이다. 과연 누가 악마의 정수리를 쳤는가를 생각하고 죽음조차 가두지 못한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3:15-21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하면 약속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속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 속에 다 담겨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은 창세기 3;15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우고 결국에는 여자의 후손이 이기는 식으로 세상을 몰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벌써 이러한 것은 결정 난 사실이며 수정도 불가하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결정 난 사항이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보고 이제 다시 살날을 고대하는 것이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름을 하와, 즉 생명으로 불렀던 것도 이런 자신감의 발로이다. 그는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발견했다.
아담은 하나님이 여자에게 내리는 징벌 속에서 생명을 발견했다. 그래서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 즉 '모든 산 자의 어미'라는 뜻으로 부르게 된다. 이 여자에 비해서 아담은 남자의 이름으로 그저 '흙으로 돌아감'이다. 따라서 흙으로 도로 돌아가는 입장에 놓인 자는 여자가 받는 징벌을 바라봐야 한다. 아내가 받는 징벌 안에서 생명의 법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자와 남자가 받은 징벌을 보면 여자에게는 남편에게 지배를 받게 되며 아기를 낳을 때 해산하는 고통이 따른다. 남자의 징벌은 처음과 끝이 다 저주의 모습이다. 땅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사는데 그 땅이 수월하게 농산물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징벌의 상황 속에서 아담은 자기 아내를 보고 생명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징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시는 약속을 함께 아내에게 주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내의 징벌은 생명 있는 자로서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살 때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요 구원의 징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아내는 남편을 본능적으로 사모하면서 도리어 그 사모하는 남편으로부터 눌림 받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좋든 싫든 말이다. 이미 약속이 내장된 여인으로서의 이러한 태도는 진정 하나님의 약속을 고대하는 모든 자는 공통된 품성으로 아담은 이해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본능적으로 남편 되시는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마음 자세는 그 그리스도로 지배를 당하는 참된 신비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이 악한 세상에서는 성도들에게는 고통인 것이다. 마치 아기를 잉태할 때의 고통처럼 말이다. 약속된 자식이 태어난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는 고통 속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의 내리신 징벌로서의 고통인 동시에 하나님이 내린 약속을 성취하는 고통이기도 하다.
즉 생명이란 고통 속에서 잉태되고 또한 그 약속을 유지하는 것도 고통이 수반된다. 함께 고통 당하는 아담의 고통은 약속을 잉태하는 고통이 아니라 저주로 인한 고통이다. 그래서 아담은 자신을 향해 생명이라는 표현은 못하고 생명은 자신이 아니라 아내 하와이다. 자신의 운명은 아내의 운명에 종속되어 있으며 아내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면 자신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여자이기에 남자를 사모하고 아내이기에 남편에게 복종하는 그 마음씨를 본받아야 한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상대로 말이다. 남자든 여자든 예수님 앞에서는 이 여인의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편을 사모하는 신부의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여인은 고통 가운에서 자기 자식, 즉 자기 생명을 끝까지 껴안고 살아간다. 비록 그 자식이 자기에게 큰 고통을 준다고 해도 끝까지 책임지려고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징벌을 주시면서도 그 징벌을 통해서 약속이 구현되게 하셨다. 이미 생명이 우리에게 있기에 고통 없기보다는 그 고통마저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3:22-24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그 기준에 위배된다면,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신 그 기준에 의해서 우리도 하나님 면전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하다. 이 추방의 원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기준이 22절에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 근처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생명 나무 있는 곳에서 생명 나무 없는 곳으로 쫓아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저주받은 상태에서 그 상태가 영원토록 이어지고 이어지는 것을 걱정하신 것이다. 생명나무 과실은 현재의 운명을 영원히 고정시켜 놓는 열매다. 만약 선악과를 따먹고 이미 저주받은 입장에 놓인 인간이 만약 거기에서 영생하도록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 바로 이것이 지옥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셔서 생명나무 근처에 오지도 말도록 추방 조치를 내리신 것이다. 미워서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살려주기 위해 쫓아내신 것이다.
결코 저주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들을 연단을 시키시며 저주받지 않는 상태, 즉 의로운 상태가 되고 난 뒤에 그 다음 생명나무를 먹도록 허락하신다.
어떻게 되어서 저주가 없는 상태가 되는가? 갈라디아서 3:13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속량'은 이미 저주 안에 놓여 있는 우리를 그 저주에서 빼내어주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저주를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죽옷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혔지만 그 인간을 또한 에덴 동산에 쫓아내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진정한 가죽옷의 의미는 이 세상으로 추방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분명해진다. 비록 이 세상에서 고생은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는 그 죄악마저 거뜬하게 이겨내신다.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는 자만이 생명 나무 과일을 먹을 수 있다. 영원히 그 의가 빛나고 그 의로 인해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의는 고린도후서 5:21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를 내가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하나도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다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의가 들어온 자는 날마다 자기 의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