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주석
창세기 2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10.117.115.97)
창세기 2장
여호와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호칭은 여호와란 신명(神名)이 가지는 독특한 기능을 소개하는 구실이 되는데 그 기능이란 구원 사역이다.
이 구원사역은 단순히 창조, 타락 그 이후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신명의 등장 자체가 구원사역의 시발점이 된다. 그분에 의한 성령에로의 창조 또한 구원사역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이란 창세기 2장에서 포괄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렇다면 구원의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은혜이다! 그리고 그것이 목표이다. 타락과 죄로부터의 헤쳐 나옴만이 구원으로 이해 해서는 안 되고 은혜가 충만한 세계에로의 도착까지도 내다보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을 인간의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으로 풀이하게 되면 구원이 단순히 창조를 회복하기 위한 임시조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안에서 창조와 통합될 수 있다. 은혜로부터 출발하는 구원사역은 항상 무엇과 대립되는가 하면 선악체계와 충돌한다.
애초부터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선악체계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상관해서는 안 되는 바깥세상이었다. 선악은 인간의 고유요소가 아니다. 만약 개입한다면 그것은 이질요소가 되며 그 체계에 따른 응분의 책임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죽음이란 불의의 사고든 아니면 건강상의 이유이든 간에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금지조항을 위반했기에 벌이라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구원과 상관없는 해석이 된다. 구원사역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었다. 그 중 하나가 창세기 2장의 끝을 장식한다.
여호와께서 생명과실 이외에 인간에 또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게 있는데 그것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아담은 그녀를 자기가 만들 수 없었다. 그 시간 그는 잠자고 있었다. 주어진 자기의 배필을 보고 아담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당신은 완벽한 또 하나의 나요!" 그는 그녀를 타인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 또 미완성된 나의 반쪽도 아니었다. 여기서 그는 은혜의 결과로 생긴 새로운 인간형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몸]이라는 개념이다.
육은 멸하여도 몸은 영원하다. 몸은 여호와의 고유권한에 속한 문제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은혜사상이 놓여있다. 두 사람이면서 한 몸이 되는 이치를 우리는 무어라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에 그랬다(에베소서 5:32)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고 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한 몸도 가능할 것이다. 무어라 설명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할 줄로 우리는 믿을 뿐이다.
오랫동안 신학계는 창조와 구원 사이에서 어느 쪽에 우선권을 둘 것이냐에 대하여 고민하여 왔다. 창조 회복을 위한 구원이냐, 구원을 위한 바탕으로 창조 역사냐 하는 것이다. 만약 창조에 비중이 주어진다면 복음 전파는 신학적 언어에서 정치적 언어로 바뀌게 되고 성, 속의 구분은 무의미할 것이다. 반면, 구원에 강조를 두게 되면 우주라는 피조세계 자체가 악이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 성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야 한다.
선과 악은 그 존재 자체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모든 악도 선으로 바뀌게 하며 반면, 선하다고 여기는 것도 부정적 역할을 하게 되면 둘도 없이 속된 것으로 봐야 된다.
내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사역에 내가 긍정적으로 쓰여지느냐가 중요하다. 교회의 가치는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사역으로 결정됨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창 2 장에서 여자 이야기 등장 이유
죄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여자가 죄와 접촉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가 주어서 범죄 하였다. 변명 탈선의 모습이다.
(창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완벽한 또 하나의 나 이다. 원래 창조한 몸을 폐하지 않기 때문에 몸은 영원하다.
2:4-9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산 사람으로 만든 취지는 생명나무나 선악과 가운데서 사는 것을 사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에덴동산의 의의는 죽을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인간을 에덴 동산에 살게 하신 것은 그 죽음의 가능성이 어떤 경우에 발생되는지 그 연유를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인간이란 죽을 수도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곧 살아 있는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생명나무는 곧 예수님이며 선악과는 율법이다. 갈라디아서 3;10의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태어나서 이미 선악과의 지배를 받고서 세상에 나타나고, 자라나면서 또한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와 선악과 나무 아래 있게 하신 것은 생명 나무 과일은 먹되 선악과 나무 과일을 거부하는 자라야 진짜 인간이고 싶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혜택은 인간의 고유 권리에 속한 것이 아니며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일 단계, 흙으로 먼저 사람을 만드셨고 모든 인간은 흙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답다, 사람답다, 라는 것은 흙으로 기본으로 늘 돌아가 있는 사람임을 말씀하신다. 이 기본에서 하나님의 생명 나무를 누가 더 원하고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교만하지 않는 상태에서 실시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이 처음 창조 원리에도 같이 부합되는 면이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흙인데 생명 나무의 은혜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2:9-17
생명이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이것에만 주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 구원받는 자녀요 하나님의 양이다. 참 양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영생이 어떻게 주어지는 가를 제대로 아는가 하는 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예수님이 가능케 하는 내용이 15절에 나온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고 되어 있다. 오직 예수님의 목숨이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먹어야만 하는 그 영생은 딴 게 아니라 예수님의 목숨이며 그 예수님의 생명에 인간의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관여될 수 없는 법이다.
요10:28절에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멸망치 않는다'는 말씀이 나온다. 아무리 선과 악에 대해서 명쾌하게 알고 선을 많이 행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목숨, 즉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없으면 어디까지나 멸망의 대상일 뿐이고 에덴 동산의 원리 원칙이 확실하게 이어지는 증거인 것이다.
이 영생은 예수님이 친히 주셔야만 하는 것이며 영생이란 나의 행함과 무관하게 그냥 받는다는 사실이고 뭔가 행해야 그 대가로 영생을 얻는 자라면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영생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은 자신의 선과 악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선한 행위의 대가로서 영생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정말 본래의 인간이라면 영생이란 나의 행함과 전혀 무관한 다른 세계에서 주어지는 선물임을 확신해 야만 하는 것이다.
2:20-25
결혼은 상대를 통해서 아담의 머리 되신 예수님을 알라고 붙여주신 것이다. 상대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못마땅해서 자신과 갈라서기를 원하거든 차라리 갈라서 버리라는 것이 성경의 뜻이다. 부담 갖지 말고 이혼해 버리라는 것이다. 이미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자는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한 예수님의 신부이며 따라서 이 세상의 아내나 남편이란 절대적으로 매인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 점은 고린도전서 7:29과 32-39에서 말씀하시고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 때 결혼 자체를 위해 만드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그리스도를 위한 결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제한 하나의 증거로서 결혼이 등장되고 만 것이다. 심지어 본문 가운데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는 말씀조차 다른 여자와 또 다시 혼인하기 위하여 이 대목을 거론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성도는 결혼을 통해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하면 혼인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죄성을 더욱 더 깊이 알아야 하며 비록 결혼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다 깨어졌지만 결혼시켜 준 하나님의 뜻은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전도서 9:9절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욕심이 얼마나 강한 지를 알아야 한다. 또 잠언 5:15-20에 남자로 태어나서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죄를 지었기에 한 몸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각자 몸이 된 입장에서 조강지처 말고 다른 여자에게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 말씀 앞에서 모든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더러운 죄인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혼인이란 서로가 그리스도 앞에서 다 같은 죄인 인줄 알아서 서로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생활을 해야만 한다. 자기에게 배우자는 과분한 대상인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낮추라고 하나님께서 혼인이라는 환경을 조성해 주신 것이며 그 가운데 서로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고 진짜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
이미아(IP:119.♡.119.36)
09-09-09 16:53
너도 흙
나도 흙
우리 모두 흙
늘 흙이라는 기본으로 돌아가 있는 흙임을...
아!!!
흙으로 조차도 돌아갈 수 없는
짐승이, 괴물이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말씀의 나타남과 능력은
정녕 우리를 흙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