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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090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자유게시판요한복음

2009090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90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

(강의:이근호 목사)

2장 8절에 보면,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왔던 겁니다.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여기서 두 번째 시간 초반부터 어려우니까 그림으로 하겠습니다. 층이 두 층이 있죠. 아래층은 역사 층이고, 위층은 계시 또는 묵시라 하죠. 묵시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 이뤄지죠. 그러니까 이게 무관한 게 아닙니다. 역사는 묵시의 조정을 받게 돼있죠. 그래서 창세전에 예정된 대로, 이 말입니다.

여기에 역사 층을 죄 층으로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줬지요. 율법이 들어간 곳은 죄가 드러나게 함이라. 그렇다면 율법을 지키는 것을 계명이라 하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계명을 지켜라, 계명을 지켜라. 그렇다면 새 계명은 역사 층에서 이뤄질 것이냐, 묵시 층에서 주어진 계명이냐 하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데.

만약에 율법이란 계명이 죄를 유발시켰다면, 여기 묵시 층에 있는 새 계명, 두 자로 사랑이죠. 사랑이 오면 죄가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그걸 묻고 싶어요. 새 계명이 오게 되면 죄가 발생됩니까, 발생 안 됩니까? 나타나는 게 발생이죠. 밑에 계명은,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하게 함이라. 죄를 발현시키기 위해서 한 겁니다. 왜냐하면 죄 자체니까. 확 뒤집어놓는 거예요. 모든 입으로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그러면 새 계명도 역시 죄를 드러나게 할까요, 안 할까요? 합니다. 그렇다면 역사 층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이라 계명을 주어지게 되면 있는 계명에다 기껏 사랑하나 추가하기 때문에 역시 죄로 드러날 수밖에 없죠. ‘난 사랑도 지킬 거야.’ 이럴 거다 말이죠.

그런데 사랑이란 의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모든 죄를 덮어주고, 덮는 거거든요. 그걸 요한일서에서는 심판이 없다는 거예요. 어려우니까 쉽게 합시다. 하늘에서 편지가 팔랑팔랑 날아왔는데 ‘이근호 더 이상 심판 없음.’이란 내용이고, 앞에 제목이 써있어요. ‘새 계명=사랑’이란 제목으로 내용은 ‘너 심판 없음’이라고 우리 집에 날아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계명을 지켜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지킬 게 아니죠.

그렇다면 뭐가 문제에요? 밑에 사람들, 이 계명을 줘도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이미 구원받은 사람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쪽은 여전히 지켜야 된다는 쪽이고. 그 지키는 주체가 누구죠? 본인이죠. 본인이 지키죠.

위에 있는 사람은, 묵시 층에 있는 사람은 접수죠. 영접. 영접해서 사귄다. 저는 이걸 읽어보고 찍었습니까? 이걸 복사해서 온 천장에 벽까지 붙여놓죠. 그럼 우리는 그걸 가지고 안에 거한다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이게 요한일서 4장에 나오잖아요.

누구든지 사랑 안에 거하면 하나님과 사귀게 되죠. 그런데 계명으로 이해한 사람은 주체가 누구에요? 자기가 사랑도 계명이니까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겠죠. 그렇다면 모든 구원의 주체가 자기로 주장하는 한 그 사람은 아직도 역사 층을 고수하는 사람이고, 그것은 심판과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입니다.

그건 교인들에게 무엇을 전해주느냐 하면, 나플나플 나는 이걸 증거하는 거예요. ‘여러분, 새 계명은 사랑입니다.’ 이렇게 성경 고대로 말해도 듣는 교인들이 이걸 이미 어떤 상태 안에 거한다고 이해하지 않고, “아이고, 오늘 지킬 것 계명 하나 추가해서 받았네. 힘들어 죽겠다 정말. 장사해서 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또 계명까지 지켜야 되나?” 그러면 “목사님, 그 계명 안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물어본다고. 목사님도 성경대로 이야기한다고. 사랑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지옥 갑니다. 그 사람은 이제 사랑 안 하려 하니까 지옥 가고, 짬을 내서 바쁜데 사랑 계명 지키려 하니까 힘들고. “에이, 힘들어 안 되겠다. 다른 교회 간다. 수월한데 가야 되겠다.”

요한일서 2장 9절 봅시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이걸 제가 새 계명으로 이야기합니다. 맞잖아요. 새 계명 때문에 생긴 거니까. 이 계명 지켜야 됩니까, 확인해야 됩니까? 확인할 사항이지 이건 내가 지킬 사항은 아니죠. 왜 그러냐 하면, 형제와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면, 남을 볼 때 저 사람하고 나하고 비교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고 같이 땡잡은 사람, 같이 복 받은 사람, 같이 혜택 입은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 하나. 나는 그렇게 봤는데 그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날 이용하려 하겠지요. 그러면 거기서 우리가 또 힘들게 되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잘못한 건 아니죠. 상대방도 구원받은 사람인 줄 알고 착각해서 사랑했는데 상대방은 아래층에 역사 층에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돈 좀 빌려달라고 한다.’ 지가 이용한다고요.

그러면 우리 보기에는 형제라고 봤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형제 아니잖아요. 쉽게 말해서 서로 형제 같으면 복음 안에서 대해야 될 텐데 복음이 아니고 하나는 주체가 예수님이 사랑이지 예수를 보고 있는데 저쪽은 내가 주체가 되서 내가 사랑해서 내가 구원받은 것으로 봐버리면 대화가 안 되죠. 소통이 안 돼요.

그래서 복음 모르는 사람 만날 하잖아요. 제가 복음 이야기하면,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그걸 좀 이야기해 달라. 답답해 죽겠다.” “당신이 은혜 받았으면 은혜 받은 대로 사시면 됩니다.”라고 한다면, “글쎄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런 사람한테 요한일서가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어디 안에 들어있는 공간개념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단독개념이에요. 나는 내 안에만 있어요. 내 밖에 날 지배하는 어떤 분이 계시지 않아요. 내가 어떤 분 품속이 아니라 내 안에 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다가가야 될 다리가 없어요. 내가 알아서 가면 가고, 내가 안 하면 그분도 멀어지고. 우리는 어딜 가도 그분과 함께 계시죠. 그게 사귐이 아닙니까. 한 번 사귀고, 두 번 사귀고 그게 아니고 늘 함께 있다는 것에서 사귐이잖아요. 공간개념이에요.

2장 13절에, 오늘은 진도를 많이 안 나가겠습니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이걸 또 밑에 있는 아래층에 역사 속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이긴 걸로 알지만 이미 우리는 이긴 형편 속에 이미 이겨버린 형편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그것을 안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1장 3절 봅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러니까 여기는 우리 개념이 성립되죠.

그런데 여기 사도 요한하고 장 목사님하고 누가 더 착합니까? 하는 질문은 성립됩니까, 성립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왜냐하면 주님한테서 함께 사귀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사도 요한이 소위 믿음이 좋다고 친다 할지라도 그건 의미 없어요. 사도 요한이나 나나 다같이 어떤 공간 안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저 주신 것으로 사귀면 되지 누가누가 잘하나 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그렇게 봐야 유명한 구절 요한일서 2장 27절이 설명이 됩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맞잖아요. 사도 요한이 우리를 가르치는 겁니까? 사도 요한이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어이, 여러분 가운데 나와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 누구세요. 확인해 보세요.’ 확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다만 지금 내 곁에 누가 있느냐를 확인만 하면 그게 바로 성도의 신앙사적인 삶이다 이 말입니다.

그걸 또 새 계명이라 하고. 왜? 이쪽 계명이니까. 목사님, 그럼 계명이란 말을 하지 말지. 아니에요. 계명이란 말을 해야 안 믿는 자들이 또 이걸 계명화시켜서 하니까 이 사람은 나는 사랑 지켰다고 죄를 또 유발시켜줘야 돼요. 그것도 요한일서에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난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5장에 보면. 어떤 죄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고, 성도 안에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아니하느냐 하는 이 난제.

이 새 계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죄를 짓고 싶어도 못 짓는 게 새 계명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새 계명에 따라서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제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지요. 이미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도 못 짓는데 이걸 안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새 계명이 있다는 걸 모르는 죄가 추가적인데 그 죄는 두 번 다시 용서가 되지 않는 죄가 됩니다.

어제 오후예배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이 위층에 새 계명 안에서 모든 밑에 있는 계명은 집합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해요. “목사님, 십자가도 율법적 기능을 갖고 있습니까?” 물어요. 십자가가 뭡니까? 새 계명이죠. 율법적 기능을 갖고 있죠. 천국 간다, 지옥 간다는 뭐로 결정됩니까? 새 계명으로 결정되죠. 그런데 새 계명을 예수님을 뭐로 하느냐 하면, 내 살과 피라 했다 이 말이죠. 살이 찢어지지 않고는 피가 나올 수 없죠. 살과 피가 같은 건데.

살과 피로 새 언약을 세웠잖아요. 그러면 천국 가는 기준은 예수님의 피죠. 여기서 철학자들이 복음에 도전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용서해준다면서. 그러면 십자가 안 믿어도 용서해주지. 이렇게 나온다고.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안 믿는 죄는 용서해주지. 그러면 주 예수님의 복음을 안 믿는 죄는 용서해주지. 그건 용서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왜냐하면 새 계명이기 때문에.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거에요. 자녀는 교회 나오는데 엄마가 교회 안 나온다. 용서가 됩니까, 안 됩니까? 인간적으로 용서하고 싶죠. 내가 하나님 같으면 우리 엄마 봐주고 싶죠. 하지만 내가 기준이 아니고 내 살과 내 피가 기준이 아니고 누구 피가? 예수님의 살과 피가 기준이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 엄마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안 믿으면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목사라도 자기 엄마를 용서할 자격이 못 됩니다. 아주 냉정합니다. 비정해요.

에스겔에 이런 말 있지요. 나는 죽일 영혼 죽이고, 살릴 영혼 살리는데 왜 너희들은 죽일 영혼 살리고, 살릴 영혼을 왜 죽이느냐? 그 대목에서 다 강조돼야 되겠지만 특히 우리에게 인상적인 것은 죽일 영혼을 살리려고 애쓰는 우리의 거짓 선지자적인 속성, 지적받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구원 못 받지만 내 조카니까, 내 마누라니까 천당 간다고 해줄게.”라는 권위가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 기준은 내 살과 내 피가 목사의 기도한 땀이 아니고 목사의 살과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하나님의 사랑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새로운 계명이기 때문에.

목사라고 해서 백 쓸 수가 없습니다. 또 하늘나라는 백이 안 통합니다. 백이 안 통하는 걸 여러분 잘 아시는 정의, 다른 말로 공의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어려운 공의개념이 간단해요. 인간적인 술수나 백이 안 통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에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자비, 하나는 공의인데, 공의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저주 받습니다. 왜냐? 행함 책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 행함 책은, 인간의 행함은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배신할 때 베드로처럼 나 살고 예수 믿죠. 나 살고자 예수 믿는 건 지옥 갑니다. 왜? 그 기준은 이 새 언약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행함들은 전부다 지옥으로 들어가는데 천국 가는 사람은 아예 행함이 없고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사람은 생명나무에 간다. 그러면 생명책의 명단이라는 말은 무슨 기준입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을 덮어버렸다? 우리의 행위, 내 몸이 주체가 되는 몸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를 예수님의 살과 피가 대체해버렸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 같으면 들어가죠.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근거가 뭡니까? 새 계명이죠. 사랑에 의해서 만들어진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이 당연한 이야기인데 왜 새롭게 들리죠? 사람들은 자꾸 어떻게 하면 행동합니까? 자기 행위 기준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기준만 봅니다. 기준이 뭡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시면 거기서 사랑이 퐁퐁퐁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일 겁니다. 용서하시는. 그리고 그건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거하면 우리는 주님의 화목제물에 시선을 두고 살고 그야말로 성경에 이 세상이 어두움이고 죄고, 빛과 생명은 하나님뿐인 것을 알게 돼요.

그 다음에 2장 15절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또 사랑. 요한일서를 보면 놀라워요.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면 알아듣는데 그것 가지고는 못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나님이 사랑인 줄 알아요. 동양 철학하는 사람들 다 알아요. 하나님 자비롭다고. 자연은 자비롭다고. 그런데 그들은 뭐가 안 됩니까? 눈에 보이는 걸 사랑치 말라가 안 됩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랑이란 말 하면서 이것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뭐도 사랑치 말라 하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요한일서 덮어버립니다. ‘나, 예수 못 믿겠다.’ 예수님이 밥을 하나 추가해주면 믿어요. 현재 있는 밥을 갖다 버려야 된다는데 이거는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주일날 설교한 게 왜 우리 안에 괴물 있는 걸 모릅니까? 교인들이 우리한테 무슨 괴물이 있는데. 왜 나는 사랑하는 애가 공부 잘하는 걸 사랑하고 왜 예수를 미워하는지. 도대체 무슨 괴물이 들었기에 공부 잘하는 내 자식은 사랑스럽고, 무슨 말이냐 하면, 애가 공부 잘하면 입이 째지고, 예수님이 사랑한다는 것은 입이 안 째지고. 무슨 괴물이 들어있기에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우리 아내가 회사에 보너스 천 프로 받았다면 할렐루야 하면 좋아하면서 주님께서 죄를 알게 하시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안 좋아하고 또 죄입니까? 라고 미워하는 도대체 무슨 괴물이 들어있기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느냐? 아직도 교인들이 못 알아들어요, 그 말을.

그래서 그랬어요. 도대체 나는 무슨 기준으로 살기에 왜 주님 되신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그 기준을 내가 미워하느냐? 어떤 악마가 들었기에. 그러니까 아, 목사님이 뜻이 그 뜻이구나 하고 조금 아는 형편입니다. 도대체 내가 평소에 교회 다니고 수 년 동안 복음 듣고 했지만 여전히 내가 사는 기준을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그런데 그걸 사랑하면 또 다시 예수님이 살과 피를 내게 만들어요.

주님께서 십자가 피 흘린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해야 될 것은 사랑하지 않는 그것 때문에 화목제물로 돌아가셨잖아요. 그것 때문에 어두움이잖아요. 빛은 따로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말씀 들으면서도 마치 추가가, 새로운 정보 하나 얻는 것에 끝날 뿐이지 정작 포기할 것은 포기 못하고 사랑하지 않을 것은 계속 사랑하고. 이것 평생가도 못 지킵니다. 지킬 재주도 없고 지킬 위인도 없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성령 나와요. 요한일서에서 성령을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이야기하는 게 뭐냐? 우리는 무엇을 전에 평소에 사랑했었던가를 거론하고 성령 그래야 돼요. 안 그러면 우리가 옛날에 잘못된 것 모르고 그냥 성령 받으면, 성령 또 하나 추가 하면 돼요. 막 오는구먼. 예수님 기도 오고, 성령 오고 난 뒤에 부자 됐다. 이런 기분이지.

이런 게 있잖아요. 옛 부대에 새 술을 못 담지요. 새 포도주는 부대조차도 바뀌어져야 새 포도주가 영광을 받아요. 그 가치가 산다고. 우리의 부대는 옛 부대에다 예수님의 피와 성령이 임해버리면, 이것은 마치 돼지한테 진주 던지는 격이 됩니다. 개한테 짓밟히는 돼요.

그러니까 구원이란 새 창조 개념입니다. 새로 만들어야 됩니다. 판을 새로 짜야 돼. 판을 새로 짜기 위해서는 기존 판에서 나오는, 기존 판이라 하니까 어렵지요. 기존 양심. 사울처럼 말이죠. 율법에 흠이 없는 사울.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양심이잖아요. 이런 판에서 나오는 행위가 하나님의 은총을 유도합니까, 유도 못 합니까? 기존의 이성과 양심에서 나온 어떤 행위를 하면 자동적으로 성령으로 오는 이런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오늘 십자가마을에 보니까 태승철 인가 요새 유명한 설교자 있대요. 독일에서 조직신학 공부하고 온. 아침에 그 사람 설교 들어봤어요. 보니까 바로 이걸 주장하는 거예요. 그쪽에서 복음, 복음 하는데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느냐? 거기다 주안점을 두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 무슨.

그러니까 죄가 빠졌지요. 그들이 생각하는 죄는 선악적인 입장에서 죄지, 새 생명 가운데 죄는 아니죠. 새 생명 가운데 죄는 다릅니다. 선악적인 죄는 뭐냐? 간음했다 이거지만 새 생명 가운데 죄는 뭡니까? 내가 나의 구원의 주체가 되는 자체가 그게 바로 죄에요. 그래서 끝에 댓글 달았어요. 태 설교자는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죄가 나오게 되는데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식으로 써놨어요.

소위 복음적으로 한국교회 비판하고 기존의 신학과 다르면서 새롭게 하는 사람들, 진짜 복음인지 아닌지 가리는 방법은 죄의 개념입니다. 묵시 층에서의 죄의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

여기서 성령은 어디서 오느냐? 성령은 예수님의 몸에서 옵니다. 그러면 그동안 성령 오기 전에 우리가 우리를 사랑한 것은 어느 몸에서 왔습니까? 우리 몸에서 나왔죠. 우리 몸과 예수님의 몸, 이걸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뭐라 했느냐 하면, 한쪽은 빛이고 한쪽은 어두움이라 했어요. 예수님 몸은 빛 되신 하나님과 사귀고, 우리는 어두움과 사귀고 있다. 어두움과 사귀니까 제가 했지요. 아무개야, 이근호라 부르지 않고 너는 어둠이라 한 거예요. 속성으로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그래야 하나님의 빛 되심의 속성이 드러나니까.

아까 경찰관 이야기했지요. 순덕이하고 춘자하고. ‘야, 춘자야.’ 이러면 안 됩니다. 봐줄게, 봐줄게 이러면 안 되지. 창녀야. 알잖아. 동네 우리 같이 살았잖아. 아랫동네 산 건 아는데 지금 넌 체포돼야 돼. 이래야 돼요. 그게 새 언약 관계에서 그래요. 주님의 화목제물에 눈 돌려버리면 체포감입니다.

주의 몸에서 나오는 성령이 없어버리면 인간들은 예수의 몸을 자기의 몸과 연결시켜버립니다. 그러면 뭐냐? 예수의 몸은 단지 모범 케이스 돼버려요. 나도 예수처럼 본 받아야지. 있는 몸으로 열심히 해서 예수님 따라 가면 따라 가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했기 때문에 나도 부인해야지. 아까 이야기한 태 설교자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하게 돼요.

그러면 점점 더 자기는 죄인이 아니고 뭐로 변했습니까? 자기가 죄인이라고 여긴 것도 뭐로 변해요? 내가 죄인이라고 회개한 것이 나의 의가 된다니까요. 이런 말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 방금 한 말이 어렵지요. 내가 죄라고 회개한 것이 마일리지가 된다니까.

기존의 율법에서는 모르지만 위에 새 계명, 예수님의 살과 피 입장에서는 그것도 죄가 되죠. 그러면 그 사람은 더욱더 심판과 두려움 속에 살게 됩니다. 좀 더 잘해야지. 다음에 좀더 회개 많이 해야지. 반성 야무지게 해야지. 만날 자기 관리, 자기 절제. 이게 정말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매일 우리 자신도 돌아서면 이런 식으로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몸을 소개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으로 행했던 것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보혜사라. 정확하게 말해서 제2의 보혜사입니다. 제1의 보혜사는 예수님이죠. 요한복음 14장, 15장에 나와요. 그렇다면 제2의 보혜사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이것도 어렵다. 진짜 오늘 강의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성령하고 성자께서 계신데 성령이 성자에 대해서 알지요. 왜 알지요? 그건 예수님 태어날 때부터 성령께서 태어나게 하셨잖아요. 그리고 십자가 할 때 모든 기적이 임할 때 누구 힘으로 했습니까? 성령이 예수님을 알았으니까 성령이 독단적으로 행동합니까? 아니지요. 오늘날 우리가 교회 와서 예수님에 대해서 알았다고 독자적으로 행동해야 됩니까? 아니지요. 독자적으로 행동 못하도록 예수님과 끈, 아까 이야기한 다리, 끈이 뭐냐? 성령으로 끈을 이어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성령이 가만두질 않아요.

그런데 가만두지 않을 때 뭘 보게 하느냐 하면, 새 계명, 새 언약만으로 시선을 다시 돌이키기 위한 기준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숨쉬게 하는 게 성령입니다. 그래서 복음 증거 안 되면 무조건 죄가 돼요. 방언해도 마찬가지에요. 구제해도 마찬가지고. 복음이 증거 돼요. 복음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우리가 죄인이다. 자기가 죄인임이 드러나지 않으면 모든 게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죄 드러나고 맞은편에 용서가 드러나면 나오는 것이 감사가 나오죠. 그래서 결론은 감사가 나오지 않으면 성령의 일이 아니다.

사람이 착한 일 할 때 감사가 하는 것 성령의 일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게 성령이 아닌 것은, 여러분이 나쁜 짓을 했다. 나쁜 짓을 하면 감사가 안 나오죠. 그것은 나쁜 짓은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데 나쁜 짓을 해석하는 그 과정에서 갑자기 새 언약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고 옛 언약, 율법적 해석, 선악적 해석을 자기한테 가미했으니까 다시 한번 낙담하는 거예요. 낙담하면 누가 좋아해요? 옛날 친구 마귀만 좋아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누구 몸이다? 아예 우리 몸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게 해요. ‘너, 원래 그런 놈이야.’ 주여, 또 요한일서에 보니까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했는데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은 다 세상 것이라 했는데 아이고, 그걸 또 주장했습니다.

성령께서 원래 네가 그래. 네가 아닌 척 하지만 원래 네 주특기야. 네가 원래 그런 죄인이라 하는 것은 어디 앞에 섰을 때 봤지? 십자가 앞에 서니까 화목제물 앞에 서니까 그걸 알죠. 네가 한 행동보다 화목제물이 더 우세해. 그게 이김이에요. 너는 화목제물 앞에 있는 거야. 화목제물의 조명발을 받고 있죠. 자동차극장이에요. 화면에 화목제물, 우리는 자동차 안에, 화목제물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조명발 놓치고 다시 옛날처럼 우리 자신의 행동은 우리가 책임지도록 너의 잘못은 네가 책임져야 돼. 앞으로 벌 받을 각오해라. 세상에 우린 벌이 없습니다. 심판이 없어요. 우리가 힘들어도 심판 아닙니다. 그냥 좁은 길로 가는 영생의 길로 가는 과정이지 그게 저주가 아닙니다. 뷔페에서 김밥 다음에 잡채 나올 때 잡채가 저주가 아니잖아요. 마지막 코스, 입가심 과일 먹을 때까지 다 먹어야 되잖아요. 탕수육도 먹고. 뷔페 차려놓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좁은 길 안에 생명 안에 있는데 그 음식 먹을 때마다 새 언약, 새 생명을 심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우리는 먹고 마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내가 착한 일 하다보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꼭 마실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옵니다. 내가 이렇게 착한데 난 죄인이 아닌데 왜 자꾸 아직도 예수 피냐? 이런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단 말이죠. ‘난 완벽해. 복음도 알아. 남들도 그걸 인정해줘. 이 바닥에서 뭐가 내가 죄인이야.’라는 생각이 들 때 네가 바로 그런 식으로 세상의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자랑거리의 주인공이 누구에요? 나 아닙니까. 또 나를 자랑거리로 본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은 성자와 절대로 제1 보혜사, 제2 보혜사인데, 제2 보혜사 성령께서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 할지라도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안 한다? 절대로 안 한다.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사귐이 있도록, 성령 안에서 사귐이 있도록 다른 말로 사랑 안에서 사귐이 있단 말을 요한일서에 있지요.

요한일서 4장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안다’는 것은 매일같이 확인된다. 그래서 이거는 이미 안에 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

요한일서 4장 4절 봅시다. 여러분이 읽어보세요.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죠. 5절에,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공간이 몇 개입니까? 딱 분리된 두 개죠. 그걸 집합으로 볼 수 있는데.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동그라미 두 개 쳐봅시다. 동그라미가 분명히 떨어져있지요. 누가 떨어지게 했습니까? 이건 우리가 떨어지게 한 게 아닙니다. 분명히 새 계명으로 떨어지게 했어요. 그리고 이게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는 몇 종류의 사람이 있다? 달랑 두 종류의 사람이 있죠. 한쪽은 예수님의 화목제물에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돼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 안에 있는 사람을 형제라고 하죠. 이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고.

그럼 물어봅시다. 형제가 세상에 속한 사람을 사랑해야 됩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까? 아까 했는데. 하지 말아야 되죠. 왜냐하면 기준이라니까. 바로 건너가면 안 되고 반드시 여기 새 계명 안에서 봐야 되니까. 새 계명 안에서 이쪽 보고, 그 다음에 뭘 보고? 이쪽 보고. 형제는 뭘 받는다? 새 계명 안에 있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지만,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를 안 믿는데 용서가 된다? 용서를 해주면 안 되지요. 죽은 영혼은 죽는다고 해줘야 사랑이니까 사랑은 동정을 말하는 게 아니고 현실을 직시하는 게 최고의 사랑입니다. ‘너 그래서 천국 못 가.’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새 계명을 선언해주는 게 최고의 사랑입니다. 지금 사도들은 사랑하고 있어요. 우리를, 세상을.

그런데 지금 이건 쉬운 것만 했어요. 어려운 것 지금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 말 들어도 우리 말 안 듣잖아요.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사람 사랑하는 게 아니죠. 그건 쉬운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분명히 하나님한테 둘로 나눠졌잖아요. 그런데 실제 현실은 뭐냐? 동그라미 두 개가 겹쳐져 있습니다. 옆으로 보면 안경알 옆에서 본 게 되지만 앞에서 보면 안경알 두 개가 포개져 있어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형제라고 생각했는데 형제가 아니고, 저 사람 세상에 속했다고 던졌는데 형제인 거예요. 그걸 설명해볼게요. 요나 선지가가 니느웨에 갔잖아요. 니느웨는 언약 밖의 사십일 지나면 저주받을 도성이죠. 요나가 갔습니다. 심판받는다 했습니다. 요나는 팔짱 끼고 언덕에 올라가서 멸망할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나로호 페어링이 분리가 안 되서 실패하듯이 심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때 요나가 삐졌지요.

요나가 뭘 몰랐던 거예요? 도대체 요나가 하나님 앞에 뭐가 터진 겁니까? 내가 고국에 있을 때 회개한다는 소리를 왜 안 했습니까? 고국에서 망한다 했지, 이렇게 회개해서 심판이 중지된다는 걸 난 못 들었습니다. 요나의 잘못으로 보지요.

요나의 잘못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두 번째 전략에 들어갔습니다. 날씨가 쨍쨍하니까 더위를 탔습니다. 그때 옆에 싹이 속성으로 넝쿨 만들어서 덮어주니까 요나가 갑자기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아따 시원하다.” 그런데 갑자기 박 넝쿨이 바짝 햇빛에 말랐습니다. 더워 죽겠습니다. 짜증을 냈다고. 그렇다면 니느웨는 박 넝쿨이었다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요나를 포함한 요나의 이스라엘이 자기 멋대로 판단한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였다, 아니다? 아니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은혜를 알기 위해서 환경을 만든 거예요. 그 환경에 해당하는 박 넝쿨이 니느웨입니다. 멸망당할 니느웨가 회개하니까 자기한테 햇빛을 가리는 참 좋은 것이 됐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도 바로 너희 자신들이 회개하기를 고대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은혜다.

‘우리는 택한 백성이다. 이만하면 됐다.’ 그건 네 생각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 이만하면 됐습니다. 나쁜 놈은 저쪽입니다.’라고 손가락질을 저쪽으로 할 때 그 손가락을 부러뜨려버립니다. ‘주여, 우리를 매일같이 새로 만들어주시는군요.’ 이걸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구원받았고.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서로 형제고. 판단을 왜 네가 해. 니느웨는 나쁜 놈이고 세상에 속한 자고. 누구 마음대로.

막상 동그라미 두 개가 겹쳐보니까 형제라면서 형제가 아니었고, 세상의 사람 중에서도 내가 형제들이 있었다 이러지요. 그러면 이 조정을 성령께서 하잖아요. 하게 되면 수시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여전히 주를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는 나 자신의 몸을 토대로 해서 나의 선악을 토대로 살고 있구나를 깨닫는 그런 현상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일어나겠지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문득문득 이렇게 새 계명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의 사귐은 일방적인 사귐, 다시 말해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사귐.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생명이 되는 겁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4장 6절에 봅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참 이 말도 어렵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누구의 말을 듣고요? 우리의 말을 듣고. 여기 ‘우리’란 말은 사도를 말하죠. 이미 사도 속에 우리라 했는데 그 우리가, 우리가 판단하는 우리로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고, 깨질 수도 있고, 새로 누가 편입할 수 있고. 하지만 그런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 기준이 뭡니까? 새 계명. 아시겠죠.

하여튼 사람은 믿지 말라 말이죠. 사람을 사랑하면 안 돼요. 결국은 새 계명을 사랑해야지. 계속 새 계명 이야기하면 나중에 같은 교회라도 십자가만 그만 가이소. 이젠 듣기 싫습니다. 라고 할 수 있고. 진작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왜 딴 소리했습니까? 난 십자가 ( ) 안 믿는 사람도 믿을 수도 있고. 그 기준은, 우리는 달라져도 우리라는 구성원들은 날마다 다르고 삐지고 떨어져도 주님의 새 계명은 변치 않지요.

그 다음에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드디어 무서운 이야기 나온다. 여러 목사님들 이런 질문 안 받았습니까? 목사면, 악령하고 성령하고 구분할 수 있습니까? 목사면 답니까? 저 사람 신자고, 불신자고 목사, 네가 뭔데 비판합니까? 이런 소리 안 들어봤어요? 자주 안 들어도 가끔 들어보지요. 왜 건방지게 저 사람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함부로 가릅니까? 주님께서 갈라야지. 이런 소리 안 들어봤어요?

그런데 여기 보면 뭐라고 돼있어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은 구분되지요. 그리고 사도가 말하기를 확신의 복음을 전하라 했지요. 사도가 한 번 믿어보고, 예수 구원받을 걸 이런 식으로 안 했지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이랬잖아요. 지금 십자가마을이 공격받는 게 이거잖아요. 너희들이 뭔데 이단과 이단 아닌 걸 결정하느냐? 그걸 비난 받잖아요. 네가 뭔데 미혹의 영과 성령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우리한데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우리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도 맞고,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고 복음 말고 성경에 다른 주신 것도 있으니까 부활도 있고 이런 게 있으니까 성령의 열매, 그것도 같이 두려워하는 우리가 옳다는 거예요. 이럴 때 어떻게 됩니까?

그때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를 해야 돼요. 사도 바울이 무엇, 무엇이 복음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무엇, 무엇이 복음이 아니고 저주받을 지어다 할 때 복음을 안다면 반드시 무엇, 무엇이 복음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러면 우리 십자가마을을 공격할 때 ‘나는 이러이러한 것이 때려죽어도 복음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그쪽에서 말을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지요. 왜? 사건을 못 봐서. ‘아무나 오시오’라고 하기에 바쁜 사람이 두루 뭉실 다 끌어 모으려고 하려 하는데 죽을 영혼 다 살리려고 하는 그놈들이 ‘무엇, 무엇은 절대로 때려죽여도 이건 복음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못 하지요.

만약 하게 되면, 또 다른 집단에서 ‘너희들이 뭔데 복음이 아니라고 해.’ 또 욕 얻어먹을까 싶어서 입을 다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이야기해야 됩니다. 뭐가 복음이 아닌가? 십자가의 새 계명, 화목제물의 새 계명에서 눈 돌아가면 그냥 돌아가는 빈 공간이 아니잖아요. 눈 돌아가면 누굴 봅니까? 반드시 자기 몸을 봐요. 왜? 온갖 몸의 대조니까.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겁니다. 미혹의 영은 어디서 나온다? 내 몸에서 나오고. 성령은 어디서 나온다? 예수님의 살과 피에서 나오고. 악령은 내 땀과 기도하는 내 무릎, 헌금한 것, 전도한 것, 설교한 것, 강의한 것, 유명한 것, 믿음 좋은 것, 그것은 자기 좋아라지 어떤 사랑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겠습니까? 자기가 무슨 화목제물이고, 자기가 무슨 십자가 졌습니까? 피 흘리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왜 십자가에서 눈 돌리느냐 하면, 십자가 눈 돌리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행함도 같이 의미 있다는 것을 언급해줘야 교인들이 교회 올 맛이 나요. 인간의 기대가 쌓여서 자기가 예상한 미래의 자기 인간상을 미리 획득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잘라버립니다. 왜? 새로운 작업이니까. 수리하는 게 아닙니다. 고장 난 걸 수리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우리를 어둠 속에서 생명의 사람으로, 새 계명으로 사랑 덩어리로 새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한번 사도가 전한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손으로 만져 봐도 눈으로 본 게 무슨 뜻인지 그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 섬기는 것이고 경배하는 그러한 공간인 줄 압니다. 우리가 주님의 화목제물에 시선이 꽂혀서 더 이상 나 자신의 잘잘못에 신경 쓰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0901b 부산강의.hwp (55.0K), Down: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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