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0901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자유게시판고린도후서

20090901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901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

(강의:이근호 목사)

이창섭 목사님께서 ‘이레’가 창조의 단위란 것이 무슨 근거가 있느냐 하는 그 질문에 제가 답하고 있는데. 끝이라 하는 것은 모든 그동안 숨겨진 비밀 내막이 마지막이 다 드러난 시점을 끝이라 합니다. 일단 그건 인정하죠? 왜냐하면 마지막 끝이 와서 이렇게 했던 이유가 다 드러나니까.

그러면 끝이 있다는 말은, 시작했음부터 끝까지 자체는 뭔가 미흡함을 인정해야 되겠죠. 끝에서 모든 게 다 드러나니까. 시작부터 끝 올 때까지 모든 것은 미흡함, 온전한 비밀을 모르는 것, 온갖 진리를 남겨두고 뭔가 다 알지 못하는 그건 인정해야 되겠죠.

그러면 처음부터 시작된 마지막 때까지 오는 걸 역사라 합시다. 이게 어려운데 종말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뭐가 전제되어야 하느냐 하면, 역사가 있어야 종말이란 말이 성립이 돼요. 마지막이란 것이. 시작도 없는데 마지막은 말도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제가 방금 두 가지를 이야기했죠. 하나는 뭐냐? 종말이라 하는 것은 모든 비밀이 다 정답이 나온 것이다. 종말이란? 일 번, 모든 정답, 사실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 아닙니까. 또는 감추어진 비밀, 이런 것 이야기하거든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반드시 시작된 것이 있어야 됨. 이걸 역사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방금 두 가지 이론에 의하면, 역사는 자체적으로 진리를 알 수 있다, 없다? 모르지요. 종말에 와서 역사가 오는 거예요. 그런데 역사가 선이라면, 사람들 자체가 수명이 깁니까, 안 깁니까? 기껏 살아봐야 오백 년, 육백 년 오래 살아봐야 구백구십 년이고, 보통 칠십 년 살고 말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역사 속에 파묻히지요.

그러면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자기가 알았다 하는 것이 제대로 알았다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모르지요. 기껏 칠십 년, 오십 년이고. 더 중요한 것은 오십 년, 칠십 년 이것도 어디서 나온 체험이냐 하면, 기껏 역사에서 나온 체험들이 뭉쳐져서 ‘난 칠십 년 살았다, 난 오래 살았다. 구십 년 살았다.’ 이래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럼 여기에 대한 해답, 나는 죽으면 어디 가며, 마지막 세상 끝은 어떻게 되며, 심판은 누가 되시며, 과연 그런 비밀을 우리가 우리의 역사로 알기는 역부족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이것 뒤집어지죠. 그러면 역사 말고, 마지막 해답은, 모든 정답은 종말에 있으니까. 종말을 쥐고 있고 종말에 계시는 분이 앞서서 우리 역사 속에 우리에게 알려주면 그걸 묵시라 하고, 다른 말로 계시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묵시와 계시는 우리 역사적인 납득이나 해석에 매인다, 안 매인다? 안 매이죠. ‘안 매인다’는 말은 역으로 우리를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너 해석 잘못됐어.” 그걸 한 마디로 성경에서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죄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까불었던 것 있잖아요. 인간이 죄 지어서 모르는 건 당연하고, 또 모르면 모른다 하면 될 텐데 그렇지 않아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모르는 가운데 모르는 걸 뭉쳐서 아는 체 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거든요. 왜? 만날 인간은 불교처럼 역사 속에서 생사병사의 질고와 고통을 느끼거든요. 이게 창세기 3장 이후에 그렇잖아요. 저주가 막 뿜어대고 우리는 살아보려고 애쓰고 피곤하기만 하고, 피곤한 육체는 당뇨병이라든지 성인병 해서 점점 더 죽음에 해체돼가고. 몸이 해체되니까 짜증은 누가 냅니까? 내 몸이 해체되면 남이 짜증내는 게 아니에요. 내 몸이 짜증내요.

짜증내니까 그 짜증내는 것이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를 향하여 항의하게 돼있고, 반항하게 돼있고, 욕하게 돼있고, 미워하게 돼있죠. 그럼 누굴 미워하겠어요? 나를 왜 이따위로 힘들게 하느냐고 미워한단 말이죠. 해답은 모르면서 뭔가 자꾸 하나님 두기 싫어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 가운데서 그 아픔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신을 만들어내고, 메시아 만들어내고, 자기가 예수 만들어내고, 자기가 성경해석 해버리고, 성령 자기가 만들어내고 이런 모든 일련의 죄인 된 구조, 자기가 조직신학 만들어 구원론 만들고, 계시론 만들고, 신론 만들고, 삼위일체 다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언제 깨지느냐 하면, 바로 마지막 때 계신, 다니엘에서 인자라 하죠. 인자 되시는 분께서 모든 정답을 갖고 우리를 공격할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죄를 아는 것이 아니고 죄가 나에게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우리는 그동안 짐승 속에 묶여 살았다.

그래서 다니엘에 보면 땅 위에 뭐가 올라와요?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죠. 짐승이 그냥 곱게 이 안경처럼 앉아있는 게 아니고 뭐 한다? 세상에 군주 노릇, 왕 노릇 해서 인간들은 짐승의 똘마니 노릇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우리는 공중권세 잡은 자에 따랐고,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보이지 않는 세상 신에 속했고, 에베소서에 보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인간들 배후에 장악하는 세상 권세를 쥔 악한 영들과 대함이라.

벌써 이런 이야기가, 짐승이 올라왔다는 자체가 이미 역사로서 우리가 스스로 갖고 있는 어떤 해석, 이런 것들은 포기해야 된다. 그래서 다니엘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묵시, 다른 말로 하면, 계시. 계시란 말은 종말에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되시는 분이 우리와 직접 접촉하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은 이 세상 해답, 진리를 모르게 돼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70이레라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70년이 아니고, 70이레. 이레라 하는 것은 바로 짐승이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 이전으로 돌리거든요. 그러면 무에서 유로 새로 간다는 거예요. 모든 걸 무로 돌려버립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이게 오늘 요한서신과 관련돼있어요. 오늘 참석하지 못한 분들은 역시 녹음되니까.

요한서신은 요한1서, 2서, 3서인데 사람들이, 신학자들이 요한서신과 요한복음과 엮으려고 하죠. 같은 사고방식으로 쓴 것이 아니냐. 그런데 요한서신 보세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별로다 생각해봅시다. 가상적으로. 나는 예수 자체가 귀찮아. 그런데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직장생활하고 돈 벌고 사는데 왜 예수냐?”라고 물을 때 예수라는 자체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느냐 하는 것부터 요한일서를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태초부터’거든요.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이 있었지요.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이 예수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이야기 안 하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태초로부터 있었던 그 생명과 무관하다, 상관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태초의 생명의 말씀이 우리 손으로 만진 바 됐잖아요. 그것이 예수님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빠져버리면 뭐가 빠진 거예요? 태초로부터 있었던 생명 자체가 우리에서 뭉텅이로 빠져나가서 우리는 살아도 태초의 생명이 없는 존재가 되죠.

근데 보통 세상 사람들은 예수 없어도 우리는 노동해서 돈 벌고 살잖아요. 그들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생명이라 하고 목숨이라 한단 말이죠. “나 이대로 살도록 놔둬. 교회고 예수고 다 귀잖아. 가만 좀 놔둬. 이대로 살래. 이 목숨 가져가. 늙어 죽을 때까지 살래. 죽으면 그만이고.” 그렇게 하잖아요. 그럼 그런 사람에게 ‘예수 믿으세요.’ 하는 의미가 또 뭐예요? 의미가 없잖아요. “예수님이 태초의 생명이거든요.” 하면, 그 다음에 뭐라 합니까? “그만 좀 놔둬. 나 이대로 살래. 예수 없이 살래.” 하잖아요. 그때 뭐라고 이야기해야 됩니까?

여기서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기를 생명이라 하는 것이 기존의 목숨처럼 그냥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의미에요.

지금 한국교회가 구원론, 구원론 많이 시작하잖아요. 처음 할 때 ‘당신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하잖아요. 사람이 그렇게 구원론을 이야기해버리면 자기의 것은 털끝도 안 건드리고 그냥 보너스로 구원만 하나 덜렁 자리를 하나 채운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럼 뭐가 날아가 버려요. 하나님께 경배한다가 의미가 없죠. 나 구원받으면 그만이어요. 우리가 알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피조물의 마땅한 도리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요한일서에 의하면, 죄 짓고 난 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냥 죽는다’ 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경배해야 될 사람, 요한일서에 의하면 하나님과 사귀어야 할 사람이 누굴 경배하느냐 하면, 나를 경배해요. 누구하고 안 사귀면 괜찮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자기가 신이 되기 때문에 신은 스스로 사귀지 누구하고 안 사귑니다. 사귀면 경쟁이 생겨서 안 돼요. 자기가 돛대인데, 자기가 최고인데 누구하고 사귑니까?

안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하나님 경배 안 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예요? 오직 자기만 경배하기에 정신이 팔려 있잖아요. ‘건드리지 마라. 나 경배하는 중이다.’ 하나님이 구원 준다고? 그건 챙기지. 그러니까 구원은 챙겨도 자기 경배는 없어진다, 안 없어진다? 절대로 안 없어지지요. 못 되기 이를 데 없어요. 정말 못 됐죠. 누구한테 고개 숙일 줄 몰라요. 엎드려 경배할 줄 모른다니까요.

교인들이 교회 와서 하는 말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해요. 그런데 뭐는 이야기하지 않느냐 하면, “목사님, 하나님 경배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습니까?” 안 하잖아요. 자기 죽어서 좋은데 가려는 그 생각만 하고 있지 내가 엎드려야 될 나는 완전히 죄인이고, 하나님만 경배해야 될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어려운 이야기할 테니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특강이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했지요. 제가 예를 들 테니까 다음 중에 어느 쪽인지 알아보세요. ①선악과 따먹지 마라. 네 건강에 안 좋아. ②선악과 따먹지 마. 그럼 네가 인생 사는 게 힘들어. 난 너 걱정스럽다. ③선악과 따먹지 마. 선악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만 알아야 돼. 몇 번입니까? 삼 번이죠.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추방시키니까. 분명히 삼 번이죠.

근데 사람은 그 내용이 창세기 3장에 분명히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선악과 따먹어서 내가 고생한다.’ 관심사 어딥니까? 여전히 하나님한테는 관심 없고 내가 죽었다는 사실, 내가 저주받았다는 사실, 내가 사는 게 힘들다는 사실, 선악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오래 못 살아서 약 오른다는 사실, 사람이 관심사가 거기 있잖아요.

선악과가 뭔지 안다고 우기면서 그런데 관심이 있다는 자체가 지금 그 사람은 누구를 경배하는 겁니까? 자기를 경배하는데 좀 손해가 왔잖아. 그렇잖아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고 죄인이 된 입장에서 다시 선악과 이야기를 본들 그냥 후회스럽지요. “아이고, 선악과 안 따먹었으면 에덴동산에서 오래 살 건데.”

이 사고방식은 무슨 사고방식이냐 하면, 선악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을 경배하기는커녕 뭐냐 하면, 괜히 우리 조상이 선악과 따먹고 나만 손해 봤다. 자기 손해 봤다는 느낌이 들지요. 자기가 손해 보면 무엇에 지장되느냐 하면, 온전하게 나를 완벽한 신으로 세우는데 있어서 약간 지장이 왔다. 그래서 심술 났다. 그런 느낌이 아닙니까. 그게 제대로 해석한 겁니까?

그래서 복음 아는 목사들이 힘든 거예요. “여러분,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 따먹어서 까불다가 저주받았습니다.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 몫이고 하나님만 아시는 겁니다.”라고 목사가 이야기해도, 교인들은, “목사님, 교회 와서 하나님 뜻 알려고 온 게 아니고,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복 받아서 수월하게 인생 보낼까 그것 알려고 왔는데 왜 엉뚱한 소리합니까?” 그런 투로 바라봐요. 그래서 그걸 한 몇 년 하게 되면 삐져서 교회 안 나옵니다. 참 얼마나 목사 입장에서 가슴이 아픈지요. 정말 아파요.

하나님께 경배하자 하니까 애초부터 저는 하나님께 경배할 생각 없고, 지금 내 경배가 잘 안 돌아가서 나를 남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만들고 싶은데 이게 잘 안 돌아가니까 좀 아이디어를 주셔서 내가 목사님 시킨 대로, 하나님 시킨 대로 할 테니까 여전히 옛날처럼 완벽한 나로서 좀 내가 대견스럽고, 내가 우아하고, 내가 훌륭하게 보이는 것에서 사는 재미를 느끼게 하옵소서. 이거잖아요. 그런 입장에서 요한일서를 달달 외운들 무슨 소용 있으며 로마서를 외운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환장할 지경이죠.

그러니까 성경말씀 이렇게 해도 하나하나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거는 교인뿐 아니고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척교회 해서 개척교회 잘했다고 나 스스로 경배하고 싶은데 개척교회 잘하는 좋은 아이디어 없습니까? 어떤 식으로 설교하면 개척교회 성공할 수 있습니까? 그럼 저는 이야기해요. 개척교회 망해도 주님 경배하면 그게 피조물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래도 귀에 안 들어와요. 들어오질 않는다고.

차라리 우리는 진짜 제대로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가 성경해석 통해서 도대체 근본적으로 내가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말만 원죄, 원죄하지 말고 도대체 나란 인간이 원초적으로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좀 알아서, 진짜 성경에서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했거든요. 주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 할 때에 사람들은 뒤에 구원받은 자에 관심을 두는데, 앞에 뭐가 죄인이냐는 관심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 믿어주는 것까지 뭐로 변하느냐? 자기 경배란 차원이기 때문에 전부다 의로 다 변해요. 예수 믿는 것도 의죠, 심지어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도 의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교회 나올 때 죄인인 척하다고 서너 달만 다니면 의인돼버려요. 교회 나와 줬잖아. 회개해줬잖아. 이런, 이런 복음 알잖아. 의인 행세해버리니까 지금 의인 되서 경배하는데 누가 날 건드려? 건드리기만 해봐라. 그래서 교회에서 짜증내고, 불평하고, 삐지고, 복음에 귀 막고.

요한일서도 어려운데 이번에 겨울수련회 요한복음 할 겁니다. 역시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 어떻게 하면 구원합니까? 이거 이야기하는 것 아니고 ‘사귐’이에요. 사귀는데 문제는 아까 제가 이야기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신 됐잖아요. 하나님 아는 걸 나도 알아버렸으니까 자기가 신 아닙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선악과 아는 것은 하나님만 알지요. 그런데 인간이 비밀의 뚜껑을 열어버렸잖아요. 선악을 알았잖아요. 더 이상 하나님이 남겨준 미진한 것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마귀의 말이 맞는 거예요. 네가 선악과 알면 네가 하나님처럼 행세한다 말이죠. 그 성질 그대로 어디 가겠습니까? 행세하는 거예요. 선악과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 바라봐야 되는데 선악과 있는 하나님 바라보니까 하나님한테 어떤 정보를 얻는 거예요. 하나님나라 어떤 것인지 정보를 얻어서 그걸 챙기고 구원받는 건 자기가 구원받고.

거기에 누굴 대비시키느냐? 태초에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시켜버립니다. 예수님도 선악과 알지요? 그리고 우리도 선악과 알지요? 그러면 신이 두 개입니까, 하나입니까? 신은 한 분밖에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 경배입니까, 우리 경배입니까? 둘 중에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하기를, 나를 경배하는 자를 너를 미워해야 되고. 너 경배하고 나 경배하는 건 둘 다 안 돼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를 경배하는 자만이 아버지를 섬긴다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빼고 내가 아버지 섬기는 것은 아버지 섬기는 겁니까, 아닙니까? 답변해보세요.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거론돼버리면 기존까지 내가 아버지 섬기는 것은 죄로 규정된 채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섬기는 그 하나님을 새로 섬겨야 되거든요. 그러면 내가 주인공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 안 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영접해버리면 자기가 졸지에 죄인이 돼버리고, 그 죄 속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과거에 내가 예수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섬겼던 모든 것은 바리새인처럼 죄가 되고, 그 죄 속에 들어가 보니까 그건 악마가 시킨 대로 살은 거예요. 단순히 내가 실수한 게 아니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다보니까 내가 하나님 섬기는 게 된다 이 말이죠.

사도 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그 사람은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다 아는 문제 낼게요.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지금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가 나사렛 예수를 좇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더욱더, 더욱더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죠.

지금 사울이란 사람은 자기 신학체계에 달랑 예수만 빠지고 나머지는 건전한 게 아닙니다. 내가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니까. 율법에 흠이 없이 하나님 섬긴다는 자체가 자동적으로 누굴 핍박하게 돼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을 해롭게 하는 게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하는 것이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가만있는 예수를 핍박해요. 그 관계를 오늘날 교인들이 몰라요. 왜? 자기가 죄인이라고 인정 안 하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뿐이지 그것 하나 집어넣으면 전에도 괜찮은 인간인데 예수 앎으로 더욱더 괜찮은 인간처럼 돼있지 내가 그동안 예수를 핍박해왔다는 사실 몰랐던 겁니다. 자기 딴에 하나님 경배한다는 그것이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 체제에서 하나님 경배한다는 그 말로 하나님 경배하는 자기 자신을 경배하는 그 사실을 자기들은 몰랐어요. 그런데 예수님 오고 나니까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이래 돼있지요. 우리가 죄 없다하는 경우는, 진리가 우리 속에 안 들어왔을 경우에만 나는 죄 없다가 됩니다. 그러면 같은 말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들어오면 순간적으로 죄 없다가 아니라 모든 게 죄라는 걸 압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 예수님 할 때 예수님의 키가 몇인 줄 아느냐 이걸 묻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몸무게가 몇이냐 그걸 묻는 게 아니고, 요한일서, 이서, 삼서에서 ‘예수님’할 때는 예수님 증거하는 게 세 가지라 했습니다. 물과 피와 성령 세 가지거든요. 그럼 그중에 하나를 이야기해봅시다. 네가 피를 아느냐? 이런 뜻입니다.

다시 해볼게요. 진리가 안 들어오면 우리는 죄 없지요. 진리 들어오면 죄 있지요. 그럼 진리가 예수님이지요. 진리가 들어왔다는 말은 신장 몇 센티인지 그걸 묻는 게 아니고, 피가 들어오죠. 그럼 예수님의 피는 가만히 흘렸습니까, 누가 찔렀습니까? 누가 찔렀지요. 누가 찔렀어요? 죄인이 찔렀잖아요. 그러면 찌른 자 중에 ‘내가 포함돼있습니다.’ 할 때 비로소 피는 내 안에 돌아다니면서 나에게 의미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물과 피와 성령을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 예수가 예수가 아니란 거죠. 왜? 그 당시에 예수, 예수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요한일서가 어려워요. 왜 어렵냐 하면, 기본전제가,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누구 위주다? 항상 내 위주가 나를 아끼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외부에서 근사한 아이디어나 지혜나 정보를 모두 끌어당기는 중력, 자장, 지남철 그런 힘을 내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요한일서, 이서, 삼서가 해석이 어려운 거예요. 그걸 가위로 끊어줘야 하는데 이걸 안 끊는 거예요. 말만 뭐 해도 ‘그러면 나는 삽니까?’ 꼭 이렇게 자기에 대한 집착을 미련을 못 버리는 그런 식의 그걸 밑에 깔고 요한일, 이, 삼서가 있는 겁니다.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그럼 더 어려운 것 물어봅시다.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자기는 하나님과 사귄다고 생각합니까, 안 사귄다고 생각합니까? 자기는 충분히 사귄다 생각했지요. 왜? 사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또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사귈 수 있는 매개물로써 뭐로 봤습니까? 말씀 또는 율법을 봤지요. 그래서 난 율법에 흠이 없던 자였다.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잖아요.

사울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럼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악을 아니까, 선도 아니까 이 가운데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제가 아까 첫 번째 이야기한 역사가 성립되죠. 누구 역사입니까? 남의 역사입니까? 자기 역사죠. 왜? 내가 이렇게 역사를 이끌어서 악에서 점점 더 선으로 나아갈 때 남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런 행위와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당사자인 누구? 내가 내 신앙역사로 내가 구원받기 때문에 우리는 중점적으로 여기에다 치중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우리 모두가.

내가 신앙생활 잘해서 남이 사는 법은 없는 거예요. 어렵게 이야기해서 나에서 너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있다고 하는 사람은, 폴 사이먼과 아트 카펑클이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그것밖에 없는데 험한 세상 다리가 안 돼요. 제가 신앙 생활했는데 장근식 목사님이 구원받습니까? 아니잖아요. 건너갈 다리가 없어요.

그래서 유대인은 뭐냐? 각자 알아서 잘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말씀, 율법이 있는데 이걸 스스로 자기 재량껏 또는 역량껏, 자기가 양심껏 이 말씀을 지키겠지요. 그러면 이 말씀을 지키게 되면 이 말씀 지킨 분량은 누구 의가 돼요? 자기 의가 돼요, 남의 의가 돼요? 자기 의가 되죠.

그럼 자기 의가 되면 열심을 내면 낼수록 범위가 점점 더 폭이 풍성해진다고 믿고 있단 말이죠. 로마서 10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모르고 율법을 지켜서 자기 의를 얻기 위해서 열심을 내지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 했잖아요. 그러면 자기 의는 하나님 의가 됩니까, 안 됩니까? 하나님 의 바깥에서 놀지요. 이걸 한 마디로 죄라 한다 이 말이죠. 참 이것 설명하기 힘들어요.

인간들은 자기가 선악을 아니까 악이 아닌 것을 의로 여겨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무슨 영역이다? 그 자체가 이미 죄 속에 갇혀서 못 빠져나오는 상태다 이 말입니다. 오늘 두 사람밖에 안 되는데 목 다 쉰다. 하여튼 개혁주의 성화론 하는 인간들 그렇게도 못 알아들어요. ‘내가 뭐 죄인이냐’ 이럽니다. 참.

예수님의 말씀을 산상 설교했잖아요. 제자들이 다 도망갔어요. 왜 간 줄 알아요? 사람이 예수님을 알 때는 꿍꿍이속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 덕분에 살자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예수님 잡히니까 누가 죽게 됐어요? 자기가 죽게 됐잖아요. 그러면 나 살아야죠. 주일날 했지만. 환경이 예수님과 있을 때는 마치 예수 믿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환경이 달라져서 예수님을 미워하는 환경 속에 살 때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나도 좀 살아야겠다. 사는 방법은 뭡니까? 나는 당신과 같이 예수를 저주합니다.

그러면 그동안 예수 믿는 것은 다 자기 살자는 거죠. 이건 사귐이 아니고 단독이죠. 사귐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그걸 제공하는데 그게 아니고 경배대상이 누구냐 하면, 자기 자신이었어요. ‘나 죽으면 예수가 무슨 소용 있느냐’ 이 말입니다. 나를 지옥 보낸다면 하나님이 무슨 소용 있느냐? 나를 지옥 보낸다면 애초부터 하나님 안 믿지. 하는 인간들이 지옥 가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피조물이 해야 될 도리는 생각 안 하고 피조물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자기 장군, 왕이라. 자기가 신이에요. 그런데 자기가 신처럼, 왕처럼 누린 그 행세, 성격, 그 성질 누구한테 왔습니까? 그게 배후에 있는 짐승한테 왔어요. 그래서 따먹어라, 따먹어라. 다른 말로 독립해라, 독립해라. 그런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 더 이상 말 들을 필요 없다. 네가 하나님 되면 되잖아. 왜 하나님 지시 받노? 네가 하나님 되면 되지. 그럼 되잖아. 어떻게 하면 되는데? 선악과 따먹어라.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는 그 나쁜 짓을 율법, 말씀 주니까 계속 나쁜 짓 계속하는 거예요. 이 말씀 내가 지킬게. 율법 내가 지킬게. 심지어 이런 더러운 행세는 바로 십자가 복음 앞에서도 똑같이 해요. 내가 십자가 믿을게. 피 믿을게. 믿어서 다 어느 주머니 들어갑니까? 자기 주머니 들어가죠. 왜? 나는 예수의 피를 믿을 정도로 의롭다.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을 정도로 괜찮은 존재다.

이 더러운 행세가 이것은 인간적인 모든 방법으로 중력처럼 끌어당기고 이렇게 하면, 남들 보기에는 복음 아는 믿음 있는 척 해요. 돌아서면 ‘내가 언제 죄인인데?’ 대번에 딴소리 합니다. 참, 마지막 때에 믿을 보겠느냐? 열두 제자 중에서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리아란 여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인간도 인간의 행위로 주님의 성령을 따낸다든지, 주님의 은총을 뽑아낼 수 있는 그러한 재주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말하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새로 만들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라 하는 것은, ‘현재 눈에 보이는 이걸 잘 처리해 달라.’라는 식으로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게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새로 만듭니다. 새로 만드는데 그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하고 도저히 예상도 못한 인간상입니다.

새로 만드는 방법이 뭐냐? 새로 만들 때 거기에 가담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왜? 처음에 인간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형상을 입게 되죠. 주께서 만들어진 사람으로. 그래서 만들 때는 기존의 자꾸 수리한다든지, 개선한다든지, 보선하다든지 고물 가지고 ‘이것 좀 고쳐주세요.’ 하면 안 돼요. ‘죽여주세요.’ 해야 돼요. 날마다 죽여주시고 날마다 새로 만들어주세요. 내가 예상 못할 존재로 만들어주세요. 주님이여, 내가 예상하는 그런 인간 말고 새롭게 만들어주옵소서.

여기 인간 존재가 있고 우리가 예상한 어떤 거듭남이 있다면, 사람이 기대를 하게 되면, 우리가 갖고 있는 기대와 같은 공통적인 속성을 내가 새로 만들 존재까지 꼭 이어져나가려는 버릇이 있어요. 이런 식대로 해주세요. 미장원에 가면 여자들이 디자이너님, 내가 생각했던 [아내의 내조]에 나오는 김남주처럼 해주세요. 무슨 파마라 합니까? 물결 파마. 그게 안 나오면 화내죠.

우리 인간이 그래요. 항상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재가 되면, 항상 뭐든지 예상을 하게 돼요. 예상에 맞는 어떤 하나님 상을 밀 당겨서 일방적으로 상상하고 그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걸 라캉은 ‘상상계’라 했어요. 쉽게 말해서 허구다, 허상이다, 헛빵이다.

그래서 사람이 상상이 안 되면 짜증을 내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기도해놓고 짜증내고, 기도해놓고 불평하는 이유가, 기도할 때는 무슨 시간이냐? 기도는 상상의 세계거든요. 자기가 현재 있는 모든 자료를 입력해서 이 자료에 의해서 자기 욕망에 합당한 상황을 그려내면서 그대로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은 그런 식으로 기도하지 말라 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첫 번째 뭡니까? 하늘에 계신 누구 아버지? 여기에 ‘우리’에요. 인간들끼리 우리가 아니고, 악마 같은 우리가 아니고 누가 포함된 우리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포함한 우리 아버지의 뜻이 우리에게 임하게 해 달라. 그러면 이 제자들은 현재 예수님하고 생각이 다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국 무엇을 위함이라? 이해도 못하는 주기도문을 십자가에서 이루기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사신 거예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이미 뜻은 지난 대추밭에서 봤지요. 이미 묵시의 세계는 끝났지요. 묵시는 시간관이 없으니까. 하늘의 뜻이 이미 이룬 것같이 땅에 이루어지이다. 단 역사의 뜻은 안 돼요. 하늘의 뜻만 이루어지이다. 그게 뭐냐? 죄 용서고 새로운 창조죠. 예수님만 알고 있는 아버지를 아는 유일한 집합, 집단. ‘우리’니까. 그 우리에 제자들도 포함돼있고, 앞으로 성령 받을 사람도 포함돼있는 겁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듯이 우리 인간도 옛날 그 인간은 아니고 말씀으로 어떻게 합니까? 새로 창조할 때 우리 인간은 죽은 자가 되고, 생명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됩니다. 그게 요한일서의 내용입니다. 태초의 생명의 말씀이죠.

그러면 요한일서 봅시다. 1장 5절에 보면,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이 빛 같으면 우리는 뭡니까? 어두움이죠. 이것 설명해야 돼요.

왜 하나님은 우리 이름을 안 부릅니까? ‘이근호’ 이렇게 부르면 되는데, ‘이창섭’ 이렇게 부르면 되는데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뭔가 뭉텅이로 ‘어둠’ 이렇게 보죠. 그것은 우리 껍데기는 소용없고, 아무 의미 없고 그동안 너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그 속성을 표현한 것으로 우리의 표현을 대체하는 겁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합니까?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그래야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빛이 되고, 사랑이 돼야 되고. 예수님은 피가 돼야 돼요.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하나님이 빛이 되고, ‘하나님’ 하면 존재되잖아요. 존재로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속성으로 존재를 표현한다 말이죠.

인간이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나는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이런 뜻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할 때는 누구 존재를 인정해 달라? 나는 내가 인간임을 안다는 걸 전제해서 하나님을 존재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치워라. 나는 빛이고, 너는 어둠으로 보자.

그러면 사귐이란 게 뭐예요?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습니다. 하고 사귀는 것이 아니고, 무엇과 무엇의 사귐이다? 빛과 어둠의 사귐이요, 사랑과 사랑 아님의 사귐이요, 피를 내신 분과 피를 내게 한 자들의 사귐을 통해서 하나님의 빛 되심과 사랑되심이 점점 더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요한일서가 어려운 거예요. 우리는 항상 자기 존재를 생각해요. 저 인간이거든요. 자꾸 이걸 주장한다 말이죠.

이런 예를 천박하지만 알기 쉽게 합시다. 서울에 미아리 창녀촌에 갈 때 단속경찰관이 떴어요. 사이트카 열 대 떠서 단속하고 있는데 드레스 입은 창녀가 “저, 창녀 아니거든요. 춘자거든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경찰관이 춘자를 찾는 게 아니에요. 자기 여동생 찾는 게 아닙니다. 뭘 찾습니까? 너희들이 이런 속성 갖고 있는데 속성 보고 체포하잖아요.

그런데 춘자가 보니까 경찰관 가운데서 옛날 촌에 살던 순덕이가 있다 말이죠. “어이, 순덕아.” 그럼 그쪽에서 뭐라 합니까? “너, 춘자 아니가.”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니까. ‘순덕아’ 부르면 안 되고 ‘경찰관님’ 이래 불러야 돼요. 지금 하는 기능이 뭡니까? 하나는 체포하고, 하나는 체포당해야 되잖아요. 그래야 미아리에서 창녀촌이 척결되지요.

지금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게 뭡니까? 마귀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죄를 없애려 하잖아요. ‘하나님 저 모릅니까? 이근호 목사.’ 이렇게 나오면 안 되잖아요. 그럼 우리는 하나님을, ‘오, 유일한 빛이시요, 유일한 생명이시여.’라고 불러야 되고, 그럼 주님은 뭐라 합니까? “너는 날 죽게 한 어둠이고, 너는 죽음이고, 너는 사랑이 없었으며, 너는 너밖에 모르고, 너는 마귀에 속했으며, 너는 사귄 적이 없다.” 이렇게 나와 줘야 그 속성과 속성의 기능 속에서 빛이 빛답게 드러나고, 사랑이 사랑답게 드러나고 우리는 그 사랑에 합류되어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거예요.

너 몇 년 살았어? 나이 몇 살이고? 묻는 게 아니고 난 이런 사랑 받았어. 사랑을 아는 자는 형제도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장애자기 때문에 사랑하고 이게 아니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형제를, 형제가 누구에요? 믿는 사람밖에는 형제 없지요. 믿는 사람이 형제잖아요. 형제란 것도 자기 형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형제죠. 같은 기적을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걸 하나하나 다 다시 정리해야 되니까 얼마나 힘든지.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는데 다음주일 날 교인들 교회 문 열고 들어와 보세요. 바쁜데 교회 왔습니다. 죄 진 게 있으면 봐주고, 한 주 축복 해주이소. 속으로. 내가 교회 와 줬는데.

정리해봅시다. “집사님, 누굴 경배합니까?” “하나님 경배하죠.” “하나님 경배하는 방법을 요한일서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압니까?” “예수 믿는 내가 경배하면 됩니다.” 아닙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반드시 매개체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 안에서 경배하게 돼있어요. 사귀게 돼있어요.

우리는 이렇습니다. 관심이 나한테 있기 때문에 예수님 사랑을 받아서 사랑받은 내가 이제 하나님께 경배하고 싶어 해요. 그러면 뭐가 들어갔다가 나와 버렸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갔다 나와 버렸지요. 이제는 내가 예수님 사랑 알았으니까 내가 경배한다 이 말 아닙니까.

예수 안에서 경배하려면 요한복음에 의하면, 요한복음 그 대목 봅시다. 요한복음 5장 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심판을 지금 어디서 어디로 이전됐다는 말입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로 가버렸지요. 이 말을 예수님이 하는 이유가, 현재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미 하나님은 아들에게 맡겼는데 너는 맡긴 내용도 모르고, 성부, 성자 안에 의논한 걸 모르고 어디만 쳐다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요. 쳐다보고 있단 말이죠.

지금 예수님이 방향을 틀라고 하죠. 시선을 틀어서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한테 시선두지 말고 이 아들에게 틀어라. 왜냐? 네가 생각했던 심판주는 네가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내가 바로 심판주다. 그 다음에 심판주가 되었으면 전에는 하나님께 공경한다는 그 공경이 어디로 이전돼야 됩니까? 그게 23절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그동안 너희들은 하나님이 없었다 이 말이죠. 네 아비는 마귀라 했습니다. 마귀를 섬기는 거예요.

그러면 남은 문제가, “집사님은 하나님을 공경합니까?” “공경하지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알아서 하지요.” “아닌데요.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한테 뭐 주고 그만이잖아요. 경배는 아버지께 경배하지 왜 아들에게 경배합니까?”라고 나올 거란 말이죠. 그렇잖아요. 아버지 있고 아들 있으면 아버지께 절해야지 아들에게 절해야 하느냐 그런 인식이 있다 이 말이죠.

요한일서 2장 23절 봅시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아들을 시인한다는 게 요한일서 2장 1절에 보면,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2장 2절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그러면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눈이 지금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가 없잖아요. 그럼 아들을 시인한다는 말은 요한일서 2장 2절에 보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보죠. 화목제물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뭘 전제로 해서 나온 거냐 하면, 죄를 전제로 하죠. 그렇다면 그림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흐트러진 죄 바닥에 죄 안에 우리가 지금 앉아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죄가 아니죠. 왜냐하면 우리 죄는 하나의 반성이니까.

이 죄라 하는 것은 누가 보기에 죄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죄죠. 그것이 어떻게 알죠?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니까 제물이 어린양 희생. 십자가 피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처음부터 죄 아래 있었고,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죄를 알았단 말이죠. 왜냐하면, 아까 했잖아요. 진리가 오지 않으면 죄 없다 하니까. 우리는 틈만 나면 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란 진리가 들어오니까 우리는 죄 속에 있는 게 드러났습니다. 그 다음에 죄를 알려준 분이 화목제물 되시는 분도 예수님인 것도 알려줘서

제가 이야기하는 건 이겁니다. 우리의 시선이 화목제물에 속할 때 이것이 하나님과 사귐이 되는 거예요. 화목제물 안에서 진짜 하나님이 하는 취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정성,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화목제물을 통해서 비로소 ‘아, 그렇구나.’ 하고 확인하고 매일같이 확인하면서 감사할 때 이 안에서는 더 이상 심판이 없고, 심판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거죠.

사람이 두려움이 있다는 말은 자기가 의인일 때 두려움이 생겨요. 자기가 죄인 됐으면 두려움이 없어요. ‘목사님 죄인입니다.’ 하면 두려움 없어요. ‘목사님 훌륭하십니다. 다음에 설교 더 잘 하세요.’ 이러면 그 다음부터 두려움이 생겨요. 왜? 지금 괜찮은데 다음에 어떻게 한다? 나 나름대로 역사, 악에서 뭐하는 역사? 선악과니까.

악을 버리고 선은 자체적으로 나가는 자체적으로 의인되는 이게 마귀가 옛날 죄 있을 때 했던 그 짓 아닙니까. ‘좀 더 잘해 마. 열심히 해. 그게 무슨 복음이야.’ 자꾸 두려움을 줘요. 시선이 나한테 가면 두려움이 옵니다. 그런데 시선이 화목제물로 가면 심판은 없고, 심판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어요.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090901a 부산강의.hwp (59.0K), Down:21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25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8,042 자유게시판 창세기 3장 주석 창세기 최고관리자 09-09-11
8,041 자유게시판 개혁주의자들의 세계(이근호 목사님 댓글을 옮겨옴) [신학] 최고관리자 09-09-11
8,040 자유게시판 예수님의 살아계심의 세계(이근호 목사님 댓글을 옮겨옴) - 최고관리자 09-09-11
8,039 우리교회 [일반] 개혁주의와 복음의 차이-심재성 목사님의 글 [일반] 최고관리자 09-09-10
8,038 자유게시판 20090814-(2) 서울강의녹취 : 빌립보서 제 2강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09-09-10
8,037 자유게시판 20090814-(1) 서울강의녹취 : 빌립보서 제 1강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09-09-10
8,036 자유게시판 내가본 개혁주의 복음과 이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과의 차이 [신학] 최고관리자 09-09-10
8,035 묻고답하기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9-09-09
8,034 우리교회 렘 7:29-34 (울 음)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09-09-09
8,033 우리교회 [일반] 예수 없는 한국 교회- 심재성 목사님의 글 [일반] 최고관리자 09-09-09
8,032 자유게시판 기특한 한국교회 복음을 빠뜨리다 - 최고관리자 09-09-09
8,031 자유게시판 창세기 2장 주석 창세기 최고관리자 09-09-09
8,030 강의 부산 9월 8일 조지래드 32 신약신학-제43과 요한서신(2) [신학] 최고관리자 09-09-08
8,029 자유게시판 창세기 1장 주석 창세기 최고관리자 09-09-08
8,028 자유게시판 그것이 알고 싶다 !! 미가 최고관리자 09-09-08
8,027 자유게시판 20090901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9-09-07
열람 ➜ 자유게시판 20090901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서신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9-09-07
8,025 강의 대구 9월7일 피 9강 세상구조 [피] 최고관리자 09-09-07
8,024 자유게시판 구약과 신약의 흐름을 관통하는 퀴즈 1 잠언 최고관리자 09-09-07
8,023 우리교회 [주보] 교회가 조롱하는 예수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9-06
8,022 우리교회 삼상 27: 5-12 (다윗의 처신)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09-09-06
8,021 설교 마가복음 15장 1- 4절 제목 : 고소 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9-06
8,020 우리교회 막 15: 1- 4 (고소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09-06
8,019 강의 울산 9월 4일 출애굽기 4장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9-09-05
8,018 자유게시판 05대구강의20(교회를넘어서)25-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12(총정리)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9-09-05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