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대구강의20(교회를넘어서)25-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12(총정리)
05대구강의20(교회를넘어서)25-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12(총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8)
[05 대구강의 20] - 교회를 넘어서 25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12
05,10,3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드디어 '총정리' !!
우리가 이 '교회를 넘어서' 라는 교재를 제법 오랫동안 했는데, 작년 4월에 시작했지 싶은데 말이다. 오늘로서 아쉽게도 끝을 내려고 하는데, 그래서 총정리를 하고자 하는데, 내용이 너무나 방대하기에 말이다. 물론 내용도 중요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교회를 넘어서' 라는 책이, 교회에 국한해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성경전체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그것도 아울러서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전체구조가 하나의 덩어리라고 하면, 이 덩어리를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 표출한 것인데, 그러니 이것이 십자가라고 하면, 이렇게 십자가로 끌어당겨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천국이라고 하면, 천국의 개념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마치 손을 이렇게도 내밀고 요렇게도 내밀 수도 있듯이, 그렇게 주제에 따라서 달리 내밀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주제에 빠짐이 없이 다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즉 그 어떤 것 하나라도 누락시키는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교인들의 구원에 관심을 둘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러니 교인들이 단 한 편의 설교를 듣더라도 성경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그렇게 도와주어야만 하는 임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편의 설교라도 결코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교회' 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면서도, 일부는 천국에 관한 것, 또 일부는 구원에 관한 것,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분리가 되어서 칸막이를 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양태상, 즉 바깥에 드러나는 것은 그 전체주제가 교회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그런 취지를 가지고 이 교재를 썼다는 말이다.
◈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
그렇다면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것이 또 궁금한데, 물론 지금까지 했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성경말씀 한 구절을 보겠는데, 출애굽기 15장 13절 이하를 살펴보자.
(출 15: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출 15: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여기에 보면 '처소' 라는 말도 나오고, 또한 '성소' 라는 말도 나오는데, 그리고 18절에 보면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성소에서 그렇게 영원토록 함께 있으면서 다스리겠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 굳이 성경이 왜 필요한가?
그런데 목사가 되어서 아무리 교회에 봉사를 잘하고 신앙생활을 오래하더라도, 항상 떠오르는 회의나 의심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성경을 안다고 하든지, 혹은 교회에 반드시 다녀야 하는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굳이 기독교 신자일 필요가 없는데, 아무 것도 믿지 않고 그냥 돈만 벌면서 살아가도 이 세상은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부질없이 교회에 자진해서 나가고, 모호한 하나님이 있다고 우기면서 억지로라도 믿어야 한다고 하고, 거기에다 예수라는 양반의 피도 믿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이데올로기를 자기가 억지로 품고 다닐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 몸 하나 편하고 집에 돈만 있으면 그만인데, 물론 늙는 것은 자연이치이니 할 수 없는데, 늙어서 죽으면 그냥 눈만 조용히 감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서 그러한 소리를 해도, "아하, 그런 것도 있구나" 라고 하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되는데, 그렇게 해도 살아가는데 그렇게 손해볼 것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생각이 비록 목회자라고 해도 들기 마련인데, 즉 모든 인간은 그러한 범주를 전혀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몇 달을 보지 않는다든지, 한 동안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방금 제가 말한 그러한 사고방식이 우위를 점하게 되는데, 즉 아주 강렬하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교회에 안 나가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도 그냥 한 달 정도를 지나게 되면, 그런 불안감이나 양심의 가책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도 보지를 않고, 교회에도 다니지를 않고, 그리고 기도도 하지를 않고,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시간이 점점 지나감에 따라서 하나의 일상으로서 굳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냥 일상생활로서 말이다.
◈ 얘들아, 나와 영원히 함께 있자 !!
그런데 여기 출애굽기 15장에 보니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거할 성소를, 즉 거룩한 곳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영원히 함께 거할 처소를 말이다.
그렇다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냥 돈만 벌고 교회를 잊고서 살아간다면, 자기 몸 하나 편하게 말이다. 그렇게 전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은 어디와 무관하게 되는고 하니, 성소를 만들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는 동떨어진 사람이란 것이다.
물론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예 성경말씀을 보지 않으니, 즉 이러한 출애굽기가 있는지도 모르고 전혀 관심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 있어야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 교회 밖에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잔소리(?)를 듣지 않으면 성경조차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즉 무엇을 들어야 신경을 쓰든지 말든지 하는데, 아예 듣지를 않으니 그럴 필요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성경말씀에는 관심이 없는데, 그런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그 교회의 사고방식이 성경말씀이 없이도 돌아갈 수 있는 것만 전달하기에, 그래서 교인들이 그러한 감을 잡았기에 성경말씀도 필요가 없이 살아간다는 말이다.
◈ 목사님, 설교가 납득이 안 되는데요?
다시 말해서, 목사의 설교가 성경을 몰라도 얼마든지 납득이 되는 쪽으로 나아가 버렸다는 것인데, 즉 이 세상과 이질적인 것이 아니고 상식적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즉 신은 존재하는데, 그 존재하는 신은 우리가 착하게 살기를 원하니 우리가 착하게 살면 된다고 하는, 그렇게 설교 아닌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구태여 성경을 보면서 알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미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데, 왜 시간을 들여서 골치 아프게 다시 파악을 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그 시간에 얼마든지 다른 것을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는 교인들이 평소에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전혀 모르는 소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야 교인들이 "아니, 그것은 나와는 다른 생각인데, 과연 성경말씀에 그런 있는가?" 라고 하면서, 다시 한번 성경말씀을 뒤적거리며 찾기라도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렇게 성경에 관심을 둘 수 있는 설교를 해주어야만, "어, 내 생각과는 다르네. 지금까지 내가 성경을 오해했네" 라고 하면서 성경의 지퍼라고 열려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아하, 평소에 내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네" 라고 되어버리면, 굳이 성경말씀을 애써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아중심인데 말이다.
◈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 자들은 없지만, 끌려나온 자들은 있어 !!
아무튼 하나님께서 성소를, 즉 거룩한 처소를 만들겠다고 할 때,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지 않으면 이런 내용조차도 전혀 남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다 이러한데, 즉 모든 인간들이 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전혀 인간들의 협조가 없이도 꾸준하게 이 사업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까지 추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하나님의 사업에 동조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데, 그것이 기본인데, 즉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 인간들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제로 불려나온 자들은 있는데, 그들은 거룩한 성소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즉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가 없는, 그런 강력함에 이끌린 자들이라는 것이다.
◈ 성소는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다 !!
그러니 제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고 하니까, "성소는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다" 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17절 하반부에 보면,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교회를 넘어서' 라고 하는 이 책의 전체주제가 바로 그것인데, 즉 사람이 믿어줄 때 하나님의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을 아예 듣지 않은 것으로 하고, 인간들이 그런 하나님의 계획을, 즉 하나님께서 손수 성전을 만들어서 함께 있겠다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성경말씀을 보지 않아서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그러한 인간들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즉 우리가 거기에 관심을 두든 말든 간에 하나님은 오직 성경말씀대로 일을 진행시킨다는 것이다.
◈ 성경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
그것을 신약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을 하는데, 특히 요한복음에 많이 나오는데, 즉 "성경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라고 말이다. 여기서 성경말씀은 구약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주로 예수님의 활동을 두고서 그렇게 표현한다는 말이다.
(요 18: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강의를 하다보니, 제가 이 책의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를 했는데, 그 결론을 다시 소급해서 한번 풀어보자는 것이다. 즉 그렇게 모든 것이 "성경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라고 한다면, 어떤 논리가 되는고 하니, 그것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성소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즉 하나님은 사람들의 협조가 없이도 묵묵히 자기 백성을 만들고 처소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참 희한한 현상도 어디에 포함이 되는고 하니, 그것 자체도 성경에 응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지요?
◈ 친구야, 지금 좀 만나자 !!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범위를 넓혀서, 11시 예배에 참석하려고 10시에 집에서 나오는데, 그런데 마침 전화가 와서 받으니 30년만에 아주 친했던 동창생이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왔는데, 지금 한번 만나자고 하는데, 그런데 지금 당장 만나지 않으면 다시 미국으로 가야하니 비행기 시간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전화가 온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말씀에 응하게 하는 것인데, 그렇지요? 하지만 만약 이 거룩한 처소에 포함이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면, 그러니 성령도 받지 않고 말이다.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을 받아야 거룩한 처소가 되는데, 성령 자체가 처소이니(?) 말이다.
아무튼 성령도 받지 않고, 그냥 교회에만 몇 년을 다녔는데, 그런데 나중에는 몸도 그만 부실해지고 하니 모든 것이 다 귀찮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는 교회에도 착실히 다녔고 또한 세례도 받았으니, 설마 죽어서 지옥에 보내겠느냐는 마음은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제는 성경말씀에도 관심이 없고, 설교도 들어봐야 그 소리가 맨 날 그 소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에게 그렇게 교회에 가려고 하는데 30년만에 동창생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렇게 전화가 온 것에 대해서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라는 차원에서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성령을 받지 않아서 말이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가 아니기에 말이다.
◈ 인간은,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지 몰라 !!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자기가 교회에 가려고 하는 그 시간에 오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는가? 그것은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전화가 와서 받았을 뿐이고, 그래서 받았는데, 마침 친구에게서 와서 만났을 뿐이고 말이다. 다음 주에 목사를 만나면, 마침 오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와서 할 수 없이 만났다고 하는 핑계거리도 되고 말이다. 하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의 일, 즉 거룩한 처소를 만드는 작업에 포섭이 되지 않은 사람은, 물론 말은 "내 몸이 편한 대로 살면 된다" 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전화가 어떤 목적 때문에 왔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당연히 비가 왜 오는지도 전혀 모르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그 사람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아는 것은 달랑 하나인데, 즉 "자기 몸 하나 편하면 그만이다" 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러니 결국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떤 곳으로 이끌려간다는 것이다.
◈ 목사님, 예수님이 선택했다는 것이 안 믿어지면?
지금 제가 말하는 논리가 굉장히 어려운데, 이것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예수님께 선택이 되었다고, 내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말이다. 이것이 듣기에 그냥 만만하게 여겨질지 몰라도, 그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논리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자기를 선택했다고 예수님이 아무리 우겨도(?), 본인인 자기가 그러한 선택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자기는 도대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사실 그런 사람은 대부분이 선택이 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물론 그런 자들 중에서 가짜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교회에 와서 이 예수님의 선택에 대해서 몇 번 듣기는 하는데, 나중에는 여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 목사가 제 아무리 예수님이 선택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결국 관심이 있는 것은 자기 몸이고, 자기 몸 하나 알아서 그냥 편하면 된다는 것인데, 사실은 그 자기 몸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순간 순간 아는 것은 자기 몸뿐이고, 다른 것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종의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남이 자기를 공격하면 방어를 하고, 또 상대방이 약하면 공격을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전혀 모르는데, 왜 30년의 동창생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는지 말이다.
◈ 아하, 하나님이 성소를 만들기 위해서 !!
그런데 만약에 거룩한 처소의 신자가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30년만에 전화가 온 것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에, 즉 거룩한 성소가 되게 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그렇게 성경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거룩한 처소를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랜 친구로부터 전화가 오게 하도록 하셨다고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전화가 왔을 때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겠는가? "1번, 친구와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 라는 것이고, "2번, 친구와의 약속을 포기하고 교회에 나간다" 라는 것이다. 즉 친구를 만나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만나기로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3번, 교회에 가고자 하는 마음은 가지고 친구를 만난다" 라는 것인데, 주님이 섭섭해하지 않도록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은 친구가 아닌 주님께로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4번, 친구에게 전화가 온 것도 주님의 뜻이니 만난다" 라는 것이다. 즉 친구를 만나는 것도 주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하면서 떳떳하게 만난다는 것이다. 그 주일 설교는 인터넷으로 보면 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정답은 몇 번인가? 사실 여기서 정답이 몇 번이라고 하기보다는, 1번, 2번, 3번, 4번이 모두 다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과감하게 친구를 포기하고 교회에 가는 것도 2번에 들어있고 말이다. 아무튼 모든 경우가 다 해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아하, 나의 죄를 깨달으라고 !!
하지만 여기서 신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그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행동의 정당함을 보장해주지는 못함을 안다는 말이다. 그냥 그 전화가 오는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이 세상의 변화에 쉽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연역한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그러한 하나님의 일관된 성소 만들기 작업으로서, 그런 사건이 발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2번의 경우처럼, 과감하게 친구를 포기하고 교회에 가는 것으로 마음을 잡아도, 교회에 가서 그 마음이 편하겠는가?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하루종일 찜찜하다는 것이다. "어제 전화가 왔으면 친구도 만나고 참 좋았을 텐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주님, 그래도 제가 친구와의 약속을 거절하고 교회에 왔는데, 참 잘했지요?" 라고 하면서 자기 의를 내세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 4가지 경우에서 그 어떤 경우에 해당이 된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선택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으로 가능한 것이지, 자기가 어떤 행동을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공헌한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교회를 넘어서'의 주제 !!
①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드신다 !!
②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만든다 !!
③ 인간의 모든 행함을 죄로 규정해버린다 !!
그것이 또한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데, 그러니 이 '교회를 넘어서' 라는 책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첫 번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드신다" 라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렇게 처소를 만드는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만든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만드는 것이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을 하시면서 "인간의 모든 행함을 죄로 규정해버린다" 라는 것이다. 바로 이 3가지가 이 책의 흐름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물론 그 흐름은 3번부터 시작해서, 2번, 1번으로 진행이 되지만 말이다.
◈ 그런데 문제는 3번 - 모든 것을 죄를 규정 !!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 무려 3번씩이나 읽고 거부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는데, 아주 똑똑한 사람인데 말이다. 저와 같은 신학교 동기생인데 말이다. 그 양반이 무엇을 거부하는고 하니, 1번은 거부하지 않는데,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다. 또한 2번도 거부하지 않는데, 즉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3번인데, "인간의 모든 행함을 죄로 규정해버린다"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3번을 거부하면서 2번을 긍정적으로 언급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그야말로 심히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1번과 2번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1번과 2번이 3번을 유발시킨다는 점이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마지막으로 총정리를 하면서,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 3번이 구속사와 어떻게, 즉 언약사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그것을 지금부터 한번 시작해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정신을 조금 집중해야 하는데, 서로가 그렇게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 첫째로, 교회의 자본주의화 !!
이 책에서 제일 먼저 나온 것이 '자본주의와 현대교회' 라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재 있는 교회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이 교회가 그만 자본주의화가 되었다고, 제가 제일 처음에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교회의 자본주의화' 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돈이 생산되는, 즉 돈을 벌 수 있는 교회로, 그렇게 모든 조직과 체계가 돈이 들어올 수 있는 교회로 그 초점과 방향을 다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교회의 자본주의화라는 말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회 살아남기 !!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는데, 즉 그렇게 돈이 있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존재로서 성립되고 또한 지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에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가정이든, 교회이든 간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저히 지탱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이든 군대이든 간에 말이다. 심지어 구제사업을 하는 봉사단체라고 해도 어떠한가? 반드시 돈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 이전에는 무엇인고 하니, 그때는 국가가 모든 가치를 배분해주었다는 것이다. 즉 일단 모든 재산은 다 왕의 소유인데, 그 왕은 백성들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고 하니까, 국가의 백성들을 배부르게 살찌우고 행복하게 해주어야하는 사명이 있는데, 물론 외세의 침입도 막고 말이다. 백성들에게 그런 봉사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 대신에 백성들은 이 왕의 모든 지시를 따라야 하고 말이다.
지금도 그런 나라가 있는데, 바로 북한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는 노동당이 그러한데, 그 노동당은 모든 백성들에 행복을 제공하고 나라를 지탱하는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예술을 하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지, 또 여자의 옷은 어떠하고 머리모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것을 노동당에서 다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국가가 가치를 나누어주고 정해진다는 말이다.
◈ '가치'가 어디서 주어지는가?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자본주의는 무엇인고 하니,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이 자본주의를 제일 이해하기 쉽도록 하는 것인데,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돈이 가치인데, 하지만 이러한 사회주의, 혹은 국가주의에서 돈이 가치가 아니라 사회의 존재함, 그 자체가 바로 가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라로 이민을 가버리면 되는데, 그렇게 자기 한 몸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군대에 가기 싫으면 여권을 만들어서 밖으로 나가서 그 나라의 시민권을 획득하면 되고 말이다.
우리나라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이 맨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져온다고 보는데,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와 같은 봉건주의 사회는 일종의 자연, 즉 신이 내린 국가주의라는 말이다.
◈ 국가주의는 일종의 혈통주의 !!
이렇게 자연이 내린 국가주의, 혹은 사회주의는, 이것이 바로 일종의 혈통주의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씨족이 모여서 부족이 되고, 부족이 모여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나라의 기준은 혈통주의인데, 즉 같은 씨족끼리 모여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자가 시집을 가면 독립체가 아니라, 그 시집의 귀신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렇지가 않는데, 물론 여자가 시집을 가서 시댁에 봉사를 하는데,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조건이 혈통이 아니라, 그 시댁에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시댁이 돈이 없거나, 돈을 함부로 낭비하면 여자는 이혼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시부모들이 며느리 몰래 몇 백 만원 짜리 건강기구를 구입하고 해서 실제로 갈라선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 돈인가? 토지인가?
그렇다면 왜 그렇게 달라졌는가? 달라진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과거의 혈통주의는 토지인데, 봉건주의에서는 왕이 자기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인데, 그런데 이 토지는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돈은 지갑에 넣을 수가 있는데, 토지는 그렇게 넣을 수도 없고, 가위로 자를 수도 없다는 말이다. 물론 경계선은 치지만, 자기가 죽으면 후손에게 상속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약성경에서는 '기업' 이라고 하는데, 나봇의 포도원의 경우에, 그 포도원이 누구의 것인가? 아합 왕의 소유인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왕이 되는 일종의 봉건주의제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10%는 세금으로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에게 바치고 말이다. 또한 3년마다 내는 십일조도 바쳐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제일 두려워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땅을 떠나야만 한다는 점인데, 가인이 여기에 대해서 겁을 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자기가 자기 땅을 떠나더라도 제발 좀 살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난 다음에 밭을 갈고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소산물이 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말이다.
원래 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토지 위에 살게 되는데, 그런데 그 토지에게 저주가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것이 레위기나 신명기에 다 나오는데,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어디에 가서 밭을 갈고 무엇을 해도 저주를 받는다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 토지자체가 어떤 소산물을 내지 못하면, 그것 자체로서 혈통이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그러한 죽음 정도가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혈통이 날아가는 것을 두고 '저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옛날 사고방식에서는 말이다.
◈ 구약의 축복 - 땅과 혈통의 유지 !!
이 옛날 사고방식에서 제일 중요한 축복이 무엇인고 하니, 혈통을 잇는 것인데, 그래서 씨받이가 있고, 씨내리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나가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그리고 십계명에 봐도 그것이 나오는데,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삼 사대에 까지 저주를 받고, 순종하면 복은 천 대까지 이어지고 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범할 뻔한 왕이 있는데, 아비멜렉인가 하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완전히 그 집안의 여자들의 태가 닫혀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태가 닫힌다는 것은 혈통이 끊어지는 무서운 저주인데,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도하니 다시 열렸다는 것이다. 이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 무엇인가? 주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토지가 소산물을 내는 것인데, 또한 가축이 늘어나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구약을 통해서 이런 봉건주의 사회의 개념을 알아간다는 것이 사실은 상당히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사유재산의 개념이 아닌데, 그러니 '가치' 라는 것은 신이 내린 토지와 더불어서,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혈통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녹취자 - 지금 우리는 조금은 섞여있는 것 같네요? 적어도 혈통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자기 유대인 가문을 중시하고, 하나님이 주신 땅을 유지하는 것인데, 물론 혼자서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유지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이고 이상이란 말이다. 더불어 함께 말이다.
◈ 자본주의 사회 - '나'만 배부르면 끝 !!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남이 죽던 말던 간에, 자기 자신에게 이 돈이라고 하는 '교환가치', 즉 지폐만 많이 있으면 그것을 곧 축복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불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주의라는 말이다. 그것이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그러한데 말이다. 소위 근대주체사상이라고 말이다.
◈ 큰 성 바벨론이 곧 자본주의 ??
그런데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바로 이 자본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큰 성 바벨론이 어떻게 돈을 벌어서 교만하게 되는고 하니, 심지어 하늘에까지 이르도록 말이다. 그것을 '계명성' 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루시퍼' 라는 마귀이름이 아니고 말이다. 일종의 별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교만한 것을 그렇게 별로 표현해놓았다는 말이다.
이 큰 성 바벨론이 바닷가에 있는데, 물론 바벨론 자체는 바닷가에 있는 게 아니고 시돈이나 두로가 바닷가에 있다는 것이다. 이 바벨론에는 각양 좋은 것은 다 모이는데, 그러므로 이 바벨론 성이 크게 된 것은 무역을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 무역을 했다는 말은, 뭔가 잉여 된, 즉 넘치는 것이 있었기에 벌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가난한 자를 등쳐먹은, 즉 갈취를 했다는 말이다.
◈ 잉여와 노동의 대가의 차이점은?
자기가 노동을 한 그 이상의 것을 취하지 않으면 잉여라는 것이 도저히 나올 수 없는데, 자기가 일한 만큼 받는 것은 잉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잉여는, 자기가 노동을 5개를 했는데 10개를 가지고 가면 생긴다는 것이다. 1달란트가 1달란트, 5달란트가 5달란트, 그리고 10달란트가 10달란트를 남기는 것이 잉여인가? 잉여가 아니라, 그냥 자기가 노동한 만큼 가지고 간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1달란트가 1달란트를 남기면 2달란트가 되고, 5달란트가 5달란트를 남기면 10달란트가 되고, 또 10달란트가 10달란트를 남기면 20달란트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4달란트, 9달란트가 차이가 나던 것이, 이제는 8달란트, 18달란트 차이가 나지만, 그런 것은 정당한 노동의 가치로 본다는 것이다. 즉 성경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는 것은 잉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지 말이다.
◈ 야, 천만 원이나 벌었다 ??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잉여라는 것은, 그냥 빼앗는 것을 의미하는데, 물론 그렇게 빼앗지 않으면 빼앗기고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정보에 어두워지면 자기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다 빼앗기고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부동산이 그렇지 않은가? 부동산의 경우에, 그 흐름을 모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서, 자기는 집을 5000만원을 주고 사서 6000만원에 팔았는데, 그래서 1000만원을 벌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같은 다른 집은 무려 1억이나 받고 팔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는 졸지에 4000만원을 손해보았는데, 이제는 6000만원을 주고 도저히 전에 살던 집과 같은 것을 구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이도 들고 해서 그만 정보에 어두워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자기는 1000만원이나 벌었다고 좋아했는데 말이다.
◈ 교회헌금도, 펀드로 조성해서 운용을 해야만 !!
바로 이러한 정보의 흐름이 곧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노동이 아닌데,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교회가 유지된다고 하는 것이, 특히 헌금문제에 있어서, 그 헌금이 기금(펀드)가 되고, 그런 기금이 되면 반드시 운용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헌금은 그런 씨앗과 같은 밑천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헌금은 부동산 투자를 한다든지 채권을 산다든지 땅 투기를 해서, 그것을 키워줘야만 교회는 이전에 만큼이나 유지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부동산 투기나 증권 투기가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그래도 다른 안전한 투자처를 찾아서, 결코 그 이전보다 자산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요즘 현대교회는 그렇게 자본운용도 제대로 잘 해야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어떠한가? 헌금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성경은 전혀 헌금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이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 교회는 비용을 자체적으로 생산해야만 !!
그러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이미 교회가 그렇게 돈이 들어오는 곳으로, 또한 돈을 키워야 하는 단체로 전락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일반 사람들에게 그래도 교회라는 이미지를 계속해서 충족을 시키려고 하면, 즉 "야, 저곳은 아직도 교회로구나" 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계속해서 그 비용이 자체적으로 생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계속해서 그런 건물을 유지를 해야하는데, 만약에 그 건물을 팔고 다른 곳에서 지하로 내려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교회가 그만 깨어졌다고, 즉 망했다고들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계속해서 모임이 있어도 말이다. 그러니 번듯한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딕양식의 건물이 없다면, 교회가 아니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게 인식하도록 한 것인데, 그러니 교회가 그러한 흐름에 부합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겠는가?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응하라면 돈이 필수적인데, 그런 돈을 벌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설교를 하게 되는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이 책의 첫 부분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힘이 들어도 조금만 참으세요(누가 졸고 계시나? ㅋㅋ).
◈ 구원을 주세요. 그러면 돈을 드리겠습니다 ??
그것이 바로 교회운영과 설교문제인데,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회가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데 말이다. 그러한 가운데 일반 민중들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바로 '교환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환의식이 무엇인고 하니, 즉 "나에게 구원을 주세요. 그러면 돈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혈통주의적인, 즉 "아버지가 세례를 받으면 우리 가정은 대대로 세례를 받는 가정이다" 라고 하는 봉건주의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살았다고 하는 유대주의적 사고방식, 즉 구약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 속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그러한 개념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 이라는 것도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즉 남편의 구원도 모르고 그냥 자기가 받으면 되는데, 그렇게 자기만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교회에서 얻을 수 있고, 또한 모든 가치는 돈으로 교환이 되니, 즉 돈을 내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인식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 팽배되어있고, 그것이 하나의 '관계'를 지을 수 있는 원칙으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 교회는, 민중들이 원하는 것을 상품화시켜서 !!
그러니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교회로서 살아남으려고 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상품화시켜서 포장을 잘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1단계 구원은 이것을 드시고, 2단계 구원은 또 이것을 드시고, 그리고 3단계 구원은 또 이것을 드시고,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성경구절이 바로 로마서 8장 30절이라는 것이다. 물론 엉터리 해석인데 말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성화의 과정이 1단계, 2단계, 3단계가 있는데, 또한 제자훈련의 과정이 어떻고 하면서, 그렇게 엮어 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제도로서 만드는데, 즉 평신도, 권찰, 서리집사, 안수집사가 되는데, 여기서 남자는 장로가 되고, 여자는 권사로 올라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평신도, 권찰, 서리집사, 안수집사로 될 때, 그 관계에서 무엇이 형성되겠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본주의 교회에서 말이다. 당연히 자본으로 기여를 해야하는데, 즉 여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돈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두고서 '뒤틀려진 기독교' 라는 책을 보면 '성직매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간략하게 교회사를 !!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이 교회사를 공부해보면, 요즘 우리교회에서 토요일에 교회사를 공부하고 있는데 말이다. 한 하나님 밑에 한 감독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 밑에 한 감독이 어떻게 삼위일체를 만들어내는지, 지금 그 부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 물론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한 감독 밑에 세 가지의 계급이 나오는데, 즉 평신도, 집사, 감독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것이 그만 이 세 가지의 계급으로 고정화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 476년에 서로마가 망하는데,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말이다. 물론 395년에 로마가 동과 서로 나누어진 것은 황제가 그렇게 한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1432년(1453년?)에는 동로마가 망하는데, 바로 그때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서 새로운 로마제국이 등장하는데, 그것을 신성로마제국이라 한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서 무엇이 생기는고 하니까, 계급이 생기게 되는데, 물론 비잔틴 제국으로 불리는 동로마나 또 서로마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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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제국 [Roman Empire] - 로마시(市)로부터 흥륭하여 이탈리아 반도 및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였던 고대 서양 최대의 제국(帝國). 로마는 BC 8세기 무렵부터 전설적 왕정기(王政期)에 속하며, BC 510년부터 공화정기(共和政期)로 옥타비아누스 이후는 제정기(帝政期)로 들어간다. 그러나 395년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비잔티움제국(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다. 로마가 이룩한 지중해 세계의 통일은 세계사에 불멸의 의의를 가진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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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왜 교회에서 '한 감독' 이란 계급이 생기는고 하니, 교회가 그만 대지주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논쟁에 있어서 서방 쪽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사실상 이 삼위일체 이론은 그 내용을 살펴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말이 안 되고 성립되지 않는데, 그것을 목사들이나 신학생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 교회가, 백성들의 출세를 위한 본부역할을 !!
아무튼 교회가 대지주가 되는데, 봉건사회에서 대지주가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경제의 중심체가 된다는 말이다. 백성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대지주의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대지주에게서 반발하면서 나온 것이 '몽크(?)' 라는 것인데, 즉 외롭게 사는 수도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수도원이 그만 대지주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특히 샤를마뉴 대제의 신성로마제국에 있어서 말이다.
그 당시 왕은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즉 기사계급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지주에게 돈을 빌리고, 그리고 나중에 대지주에게 증여가 되는데, 보다 자세한 것은 이번 토요일에 할 것인데 말이다. 아무튼 대지주에게 힘이 생기는데, 그렇게 힘이 생기면 그런 교회의 힘을 빼먹기 위해서, 즉 사람들은 출세를 하기 위해서 교회로 마구 몰려드는데, 그러니 교회가 출세하기 위한 본부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 소위 '밀라노 칙령' 이후에 !!
313년 이태리의 밀라노에서 칙령이 발표되는데, 소위 '밀라노 칙령'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기독교를 인정하고 수도를 콘스탄틴으로 옮기는데, 이 칙령이후에는 공직으로 출세를 하려고 하면 황제와 같은 종교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황제와 같은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황제의 똘마니들이, 즉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 교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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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라노칙령 [Edict of Milan] - 313년 2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칙령(勅令)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와 빼앗은 교회 재산의 반환 등을 밝혔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포함해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여,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보호되고 장려되는 계기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계기로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기반을 넓히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최대한 장려하였다.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각종 특권을 주었고, 각지의 교회 설립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325년에는 니케아공의회(Councils of Nicaea)를 열어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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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당시에 유럽의 교회에는 5부류의 조폭들이(?) 있었는데, 그런 파벌이 왜 생기는고 하니까, 사도들이 죽은 무덤이 있다든지, 활동을 한 흔적이 있으면, 그런 것을 근거로 해서 파벌을 형성했다는 말이다. 즉 로마파, 콘스탄티노플파, 안디옥파, 예루살렘파, 그리고 알렉산드리아파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양파는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 중에서 제일 파워가 센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파였고, 그것이 점점 로마파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알렉산드리아파와 로마파가 합세를 해서 다른 파를 그만 눌리게 된다는 것이다. 원래는 콘스탄티노플파와 사도바울이 있었던 안디옥파의 힘이 상당히 세었는데, 그런데 앞의 두 파가 그만 합세를 하고, 또 황제에게 뇌물을 주고 해서, 이제는 이 두 파가 주장하는 것이 무조건 옳은 것이 된다는 말이다.
◈ 성령이, 누구에게서 나오는가?
예를 들어서,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는가? 성자에게서 나오는가?" 라는 문제의 경우에라도, 그것을 '필로꾸메(필리오케, Filioque)' 라고, 즉 '~로부터'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것이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나오는데, 그때부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방교회는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하고, 서방교회는 성자에게서도 나온다고 하는데, 물론 성부에게서도 나오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교리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고 말이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서방교회에서 나온다고 하면 무조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까면 까라는 것인데(?), 즉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에서 나온다면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그들을 두고 조폭이라고 했는데,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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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5강' 중에서 (05,11,12 이근호)
그 다음은 '필리오케'(아들로부터, Filioque) (~에게서) 논쟁인데, 이것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다른 주장을 했는데, 문제는 "성령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가? 아니면 성자 예수님에게서 나오시는가?" 라는 것이다.
서방교회 측에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성령님이 나오시고, 성자 예수님에게서도 성령님이 나오신다" 라는 것이고, 즉 성령님이 양쪽에서 다 나오신다는 것이고, 이에 반해 동방교회에서는, "성령님은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다"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성령님이 나오시는 것에 대해서 관여는 하지만(통해서), 나오시는 것(발출)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나오는 출처가 두 군데가 되었는가? 서방교회 측에서는 가이샤라의 바질, 닛산의 그레고리, 나지안스 그레고리 등으로 불려지는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가 있는데, 전에도 언급했지만 이들이 삼위일체를 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다음과 같이 주장했는데, 즉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교통하기 때문에 내부적인 교류가 있다. 그래서 동일하게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따라서 성부 위주의 삼위일체는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내부적 교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소위 '페리코레시스' 이론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서 동방신학은 주장하기를,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완성이다. 구약은 유일신으로서,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배타적인 신으로서, 자기 외에 다른 신을 차버리는 독보적인 신이다. 그래서 배타시하면서 한 분으로 계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에 와서 삼위일체로 그 실체가 다 드러났다면, 하나님이 세분이라면 좀 곤란하고 당연히 성부가 대표를 해야한다는 것이 동방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아들이 아버지께 나라를 바친다고 했으니, 항상 성부 하나님 중심으로 일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사랑도, 영광도 말이다. 그래서 성령님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고, 예수님은 거기에 '통해서' 라는 것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다.
(고전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런데 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붙은 논쟁에서 누가 이기는고 하니, 서방교회 측이 이겼다는 것이다. 즉 "성령님은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온다" 라고 결론이 났는데, 이것이 오늘날 20세기의 신학인데, 서방교회가 이겼기에 말이다. 또한 그 당시 10세기의 주류를 이루었던 신학이란 것이다. - 타임머신을 타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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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 '位'나 '體'의 개념자체가 없어 !!
동방의 경우에는 '힐렐리우스(?)' 라는 신학자가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처음 주장을 했고, 서방에서는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가 성자의 본성에 대해서 주장을 했는데,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위격' 이라는 것을 가지고 나누었다는 것이다. 원래 그러한 개념은 없는데, 그것은 서방교회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라고 할 때, 그 '위(位')나 체('體)'의 개념이 원래 없는 허구였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데(다른 나라는?), 언어학에 있어서 '허구' 라는 개념이 무엇인고 하니, 실체는 없고 말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위'나 '체'를 만들어놓으면, 그때부터 논쟁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삼위일체 논쟁인데, 그런데 실상은 이 '위'나 '체'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말은 만들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말에 대항하는 실물이 실제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세종대왕님, 혹시 전기밥솥을 아세요?
예를 들어서, 이렇게 '전기밥솥'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글자로는 넉자인데, 물론 이것이 요즘은 의미가 있지만, 그러나 조선시대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실물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말은 만들 수가 있지만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를 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위'나 '체'의 개념이 없고 허구라고 한다면, 즉 그런 의미 없는 개념을 가지고 와서, 즉 '삼위일체' 라고 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서 아무리 자기 논리를 주장한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 계속해서 삼위일체 논쟁을 !!
그래서 서방에서 이 '위'를 가지고 '하이포스타스(가면?)' 라고 하니, 동방에서 서방을 보고서 뭐라고 하는가? "아니, 하나님께서 가면을 썼나? 그러면 양태론이 아닌가?" 라고 비꼬아서 말한다는 것이다. 이미 이단으로 결정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언급해서 말이다. 그러자 서방에서 하는 말이, "우리는 그냥 가면이라는 용어만을 차용한 것이지, 실제로는 가면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자 동방에서는 "그렇다면 왜 굳이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는가?" 라고 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방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완전히 구분되어야한다" 라고 하니, 그러자 동방에서 하는 말이 "그러면 일체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방에서는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신성과 인성은 구분되어야한다는 것이 니케아 회의의 결정인데 말이다. 그러니 동방 측의 '세베투스' 라는 신학자가 하는 말이, "놀고 있네. 그러면 일체가 아니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방에서 만든 말이 '위격(位格)' 이라는 것인데, 그 "위격내제(?)" 라고, 해서 그 위격 안에서 일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방에서는 계속해서 없는 말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마치 조선시대에 전기밥솥을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실물도 없이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서방교회가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로마에서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나중에 동방교회에서 질문하기를, "삼위일체에 있어서 이 삼위는 어떤 의미인가? 본질은 하나인데, 가지가 나오듯이 튀어나온 것인가?"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닌데, 그러게 되면 양태론이 되고 마는데, 그렇게 되면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방교회에서 하는 말이 "그렇게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삼위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오잉, 사위일체(四位一體) ??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 삼위는 결국 일체와 같은 의미가 되고 마는데, 이렇게 되면 일체가 되든지, 아니면 사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4개의 체가, 즉 사체가 되면, 즉 본질은 하나인데 거기서 가지가 나와서 4개가 된다고 하는 의미인데,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동방에서 묻기를, "그러면 무엇인가?" 라고 하니까, 서방에서는 "세 분인데, 한 분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정리하기를, 즉 "세 분인데 한 분이고, 한 분인데 세 분이다" 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고 이런 식으로 하라고 하셨는가?
◈ 민중들이 교회에 토지를 바치면서 !!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샤를마뉴 대제의 신성로마제국이 성립이 되고 난 뒤에 신자들이 계속해서 교회에 토지를 바쳤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토지를 교회에 증여하게 되었는고 하니, 그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바친 것이 아니고 말이다. (녹취자 - 신성로마제국의 성립은 훨씬 뒤의 일인데, 혹시 동로마 제국(비잔틴)이 아닌지?)
연옥설이 본격화되는 것이 1100년경인데, 사실은 그 이전부터 있었는데, 이 연옥설은 소위 패자부활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선조의 후손이 교회에 땅을 바치게 되면, 그 선조의 죄가 사해지면서 연옥에서 천국으로 신분상승(?)이 된다는 것이다. 토지는 요즘 말로 하면 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토지가 계속해서 교회로 들어오면서, 사실 이것도 설명을 하지면 긴데, 왜 교회에 돈을 바쳐야만 구원이 되는지를 이야기해야하니 말이다.
물론 그 당시가 자본주의 사회는 아니지만, 게르만족의 종교와 아리우스 종교와 로마의 삼위일체가 합쳐지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이론이 바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밖에 없는 교회의 말을 들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교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 갖다 바쳐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쟈크엘룰의 '뒤틀려진 기독교'를 보면 !!
그러므로 교회가 대지주가 되는데, 보다 상세한 것은 '뒤틀려진 기독교' 라는 책을 보면 되고 말이다. 거기에 너무 잘 나와있는데, 그야말로 탁월한 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도덕주의' 까지 합세를 하는데, 그것은 터툴리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양반 때문에 십자가의 죄 개념이 그만 도덕개념으로 전환하게 된다는 말이다.
사실 동방은 이 '십자가' 라는 개념조차도 없었는데, 마지막 아담은 첫째 아담을 회복하는 개념으로서,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들이 무식해서 예수님을 죽였는데, 하지만 다시 사흘만에 살았으면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는 그만 잊고, 주님이 부활을 하셔서 회복이 되면 그만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동방의 안디옥 신학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한 분이 고생해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이제는 그 십자가는 잊어버리고,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그분이 부활을 하심으로서 우리가 회복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이레니우스의 동방신학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회복신학인가?)
하지만 서방의 신학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해버리면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이 죄 때문에 죽었으니, 이제는 십자가를 믿고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서방의 터툴리안주의 인데, 그러니 둘 다 십자가의 의미는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일종의 조폭의 보스인데, 그 당시에 아까 말한 5개의 파가 있었는데, 그런 조직에서 큰 소리를 치는 인간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기 조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느냐는 것이지, 결코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 조폭들의 행진 !!
그러니 오늘날 한국교회와 똑같은데, 우리교회는 그런 파에 넣어주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요즘 대구에서 동부파, 서문파, 동신파 등이 주도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삼위일체가 그런 조폭들이 벌리는 세력다툼의 과정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무슨 복음을 아는가? 자기 조직의 세력팽창에만 관심이 있지 말이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그들이 타협을 보게 되었는데, 그래서 제일 큰 형님은 로마파가 되고, 그 다음에는 콘스탄티노플파가 되고 말이다. 그런 타협의 조정자가 바로 로마 황제인데, 왜냐하면 황제는 자기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 타협을 보도록 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시끄러우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좋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근본은 토지에 있는데, 즉 돈을 가진 자가 결국에는 다수가 되고 승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교회에 돈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설교나 모든 초점이 헌금으로 모아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서 모아진 돈은 재테크를 잘하든지 해서 불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 돈이 교회를 만들어 !!
외국에서는 이미 교회가 펀드에 투자하고, 그것으로 수익을 얻어서 사업을 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헌금이 잘 들어오지 않으니, 기존의 있는 것을 더 잘 관리를 해야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 돈으로 공동묘지를 멋있게 만들고 하는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