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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5대구강의19(교회를넘어서)24-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11-1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05대구강의19(교회를넘어서)24-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11-1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8)

[05 대구강의 19] - 교회를 넘어서 24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11

05,10,2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다 !!

오늘은 진도를 좀 나가겠는데, 교재 293페이지부터 한번 살펴보자.

**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본문에서 '몸' 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성전' 이라는 구약적 용어가 튀어나오면서, 결론적으로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작품으로만 성립이 된다는 말이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몸'과 '성전'과 '십자가' !!

이렇게 몸과 성전을 연결시키는데, 그렇게 연결시키는 핵심사상이 곧 '십자가' 라는 말이다. 즉 십자가 안에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는데, 이렇게 사도바울이 단어와 단어를 연결할 때는, 특히 구약의 단어와 신약의 단어를, 즉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현실적인 단어와 연결시킬 때는, 십자가를 가지고 매치를 시키는 것이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하나의 원리라는 것이다. 즉 성전과 몸과 같은 경우에 말이다. 물론 그것은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도들도 동일하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십자가를 빼버리고 성전과 몸을 바로 연결시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고 하니까, 그만 존재론적 성경해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참 어려운 부분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모르는 신학자들의 오류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십자가를 통해서 연결을 시키고 있는데, 그런데 십자가가 아니라 성전과 몸을 곧바로 연결을 시키면, 그것은 존재론적 연결이 되고 마는데, 십자가의 언약적인 연결이 아니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론적 연결이 무엇인고 하니까, 소위 '있다' 라는 것인데, 즉 "손에 잡힌다" 혹은 "눈에 보인다" 라는 식으로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성전이 누구인가?" 라고 했을 때, "내가 성전이다" 라고 하면, 말은 틀린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복음을 거부하게 되면, 그래도 성전이냐는 말이다. 당연히 복음을 거부하면 성전이 아닌데, 그러면 조금 전에는 있었는데, 자기가 성전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복음을 거부하면 성전이 아닌데, 그러면 졸지에 성전이 '있다' 라고 하다가, 그만 '없다' 라고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론적 성경해석은 그런 한계를 지닌다는 말이다.

◈ 존재론적 성경해석은 꺼져 !!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데,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하다면 무엇도 영원해야 하는가? 몸도 영원해야 하고, 성전도 역시 영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론적 성경해석에서는 '있다' 라고 하다가 '없다' 라고 되고, 또한 '없다' 라고 하다가 '있다' 라고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원하지 않으니, 그것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과 같은 명확한 성경해석이 나올 수 없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성경해석을 해야하는가? 고린도전서 16장 19절 하반부에 보면,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존재론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 분명히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다" 라고 하니 말이다. 즉 "일단 내 몸을 성전으로 삼자"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너희 몸은 …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너희'를 '나' 자신으로 바꾸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라고 출발하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자기로부터 출발을 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성전은, 내 몸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 !!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누군가가 "목사님, 과연 무엇이 성전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리스도의 몸을 성전으로 본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 인간들이 "제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라고 우길 수 있는 것이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 말씀은 인간 세계의 그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몸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새로이 인간을 만들기 이전에는 그 어떤 경우라도 진정한 성전은 없다. 성전이 없다는 것은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되고, 애초부터 구원을 받을 자격도 없다는 말이다.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말씀을 허락지 않아 !!

여기에서 예수님은 건축 구조물로서의 기도하는 집, 즉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을 헐라고 하시는데, 예수님 자신이 사흘만에 짓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기존 인간의 상식적인 개념체계가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누군가가 자기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자기에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여기는데, 물론 다들 그렇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예수님은 전혀 우리가 납득이 되지 않는 쪽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초조차도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데, 기본적인 예수님의 어법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러한 것도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듣도록 하시기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분석해서 나올 수 있는, 그러한 말씀으로 인간들에게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누가 보아도 46년 동안 지어도 짓지 못한 성전을 지금 3일만에 짓겠다고 하니, 예수님의 그 뒤의 말씀을 모른다고 하면, 이것은 누가 보아도 실제로 이 성전을 3일만에 짓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산아, 바다로 던져져라 ??

성경에 그러한 예가 많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산을 보고 바다에 빠지라고 하면 빠질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아니, 산이 어떻게 옮겨지는가? 포크레인을 수십 만대를 동원해서 한꺼번에 옮길 것인가?"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예수님의 몸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말이다.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실제 인간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접근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나를 믿어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이 아무리 이 자연세계에서 일을 많이 해도, 인간들이 그런 자연세계에서 일어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소녀야, 일어나라 !!

예수님께서 회당장인 야이로의 딸을 보고 "아이가 잔다" 라고 해도, 그러나 사람들이 보기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아이는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세계에 대한 무지를 고발하는 쪽으로, 즉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쪽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전을 헐라. 내가 3일만에 다시 짓겠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나중에 그 뒷부분에 보니,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하신 그 육체를 가리킨다고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바로 성전이라는 것인데, 물론 인간의 육체가 아니고 말이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우리의 몸이 곧 성전이 되니 안 된다는 것이다.

◈ 성전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 !!

제가 여기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몸을 두고서 성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성전이라는 건물은, 우리 육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육체인데, 그것도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바로 그 육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전인 건물과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만이 서로 연결되는 것이지, 십자가와 부활하신 육체가 아니라고 하면, 이렇게 건물과 예수님의 육체를 연결시킬 수 있는 제자들은 그 당시에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제자들은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이 잘났다고, 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빼고서 해석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 당시 제자들도 전혀 그렇게 하지를 못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빼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건물을 두고 예수님의 육체가 아닌, 그만 자기 자신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이미 성전에는 십자가와 부활의 정신이 !!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은,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하신 그 육체가 바로 성전이라고 한다면, 왜냐하면 요한복음 2장 21절에서 분명히 사흘만이 다시 짓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몸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여기서부터 조금 어려운데, 즉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건물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 십자가와 부활의 정신이 이미 성전이라는 건물이 들어가 있겠는가? 없겠는가? 당연히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것을 건물로 보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을 그냥 건물로 본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 이 성전 안에 들어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부활된 몸에서 십자가가 빠질 수가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살펴볼 것은, 과연 "예수님의 부활된 몸에 있어서, 과연 십자가가 빠질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를 지시고 3일만에 부활을 하셨는데, 그러니 십자가를 빼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부활을 이야기하더라도, 십자가를 뺀 부활을 이야기하면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부활 앞에 항상 먼저 십자가를 붙여서 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있어서 십자가를 그만 빼버리면, 구약에 있어서 성전 개념과 예수님의 연결고리가 '뚝'하고 끊어져버린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말하는 취지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더 설명이 필요하지 싶은데, 흔히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을 믿을 때는 십자가가 필요하지만, 믿고 난 뒤에 성화과정에 있어서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존재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 A : 당신은 무엇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
* B : 응,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받았지.
* A : 그러면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그 십자가는 필요 없겠네?
* B : 물론 더 이상 필요가 없지.
* A : 그러면 무엇이 필요하지?
* B : 응, 이제는 성령님만 필요해.

◈ 언제나 존재론적인 인간 !!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왜 그런고 하니, 자기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구원받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아까 제가 말한 '존재론적' 이라는 의미인데, 제가 지금 바로 그런 것이 틀렸다고 지금 지적하고 있다는 말이다. 감히(?) 틀렸다고 말이다.

그렇게 틀렸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면서 결국에는 "나는 어떻게 될까?" 라고 하면서, 자꾸만 '나' 라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까 본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서도, 우리들은 습관상 성경말씀을 들으면서 뭐라고 생각하는가? "나에게 어떤 효과가 있을까? 나는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만 자기 몸과 자기 것을 찾으려고 하는, 그런 느낌 아래서 성경말씀을 보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 잘못된 버릇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물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가질 것이고 말이다. 평생을 간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자기 존재를 위주로 살아가는 것을 억지로 말린다고 해서 될 문제는 아니고, 단지 목회자는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라는 것만 전할뿐인데, 즉 그렇게 잘못이라는 기준은 제시해야만 그게 목회자의 사명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듣고 꼴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또한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렇게 자기 존재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까?" 라고 한다면, 물론 목사는 여기에 대해서 답변할 것이 있어야 하고 말이다.

◈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 !!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무 이기주의자인가요? 하지만 피조물 그 자체가 예수님의 자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피조물 자체가 말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인데, 즉 예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피조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자기밖에 모르는데, 아직도 그런 흔적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고 말이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긴장관계? 줄다리기를 하시나?

하지만 꼬이든 풀리든 간에 그것은 자기 인생이 아니라 주님 인생인데, 즉 자기 인생이 꼬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는 이런 것이 없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동행해서 같이 간다는 말이다. 최성수의 '동행'이 그런 내용인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서로 대치하면서 같이 간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기존 신학자들은 '긴장관계' 라고 하는데, 여기서 '긴장' 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마치 동네에서 체육대회를 하면 마지막에 보통 줄다리기를 하는데, 거기 줄처럼 팽팽하게 되는 상태를 두고서 말한다는 것이다. 긴장관계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고 당겨서 팽팽하게 되는 말이다. 자꾸만 자기 쪽으로 당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대로 당기고, 주님은 주님대로 당기고 말이다. 그러니 전혀 원활한 관계가 아닌데, 서로 서로 당기고 당기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한 긴장관계가 늘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그것을 인정하는데(?),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구원자가 인도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이미 너희가 구원을 얻었고, 장차 구원을 얻으리니" 라고 말이다.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이미'와 '아직' ??

그런데 신학자들은 이것을 시간으로 해결하려고 하는데, 즉 '이미'와 '아직'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미'와 '아직'은, 그 말 자체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구원된 자는 끝까지 주님이 인도하신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존재론적으로 해결하려고, 즉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안심을 하면 안 돼" 라고 하면서 말이다.

◈ 교회를 넘어서 !! - 교회란 무엇인가?

다시 설명을 해보면,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 관해서 하고 있는데, 성전이나 몸이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교재로 쓰는 책의 이름이 '교회를 넘어서' 라고 되어있는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란 무엇인가?"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전을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어떻게 보시는지, 그것이 중요한데 말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성전건물도 예수님은 다르게 보더라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은 성전을 어떻게 보시는고 하니,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와 부활의 뜻이 이미 담겨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존의 생각하는 그런 건물은 큰 오해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몸은,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을 !!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우리는 예수님은 어디를 통해서 만나는고 하니, 예수님은 '몸을 통해서' 만난다고 하니, 우리는 또 오해를 해서 그만 자기 몸이 성전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몸은 우리 인간의 몸이 아니라, 저는 분명히 우길 수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몸을 두고서 이야기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 몸이 아니라는 말인데, 왜냐하면 '내' 것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즉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때문에, 자기 몸이라고 해도 자기 것이 아니기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간에 자기가 간여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갈 뿐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인생에 대해서 간섭을 하면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생이 가치가 있니 없니 하면서, "그래,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자"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기 몸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할 때 그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옛날 건물을 보았을 때와 동일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와 부활의 정신이 남아있다고 하면, 그것을 '몸' 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부를 때는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당연히 십자가와 부활의 정신이 그 안에 있어야 하고 말이다.

◈ 누가, 로마서 6장을 좀 가르쳐주세요 !!

그것이 바로 로마서 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저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이 로마서 6장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도 같은 고민을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로마서 6장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교인들을 가르친다고 강단에 선다는 것이, 그런 자신이 그 얼마나 건방지게 느껴졌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전도사 시절인데, 그런데 만약 설교를 마치고 어떤 교인이 "전도사님, 로마서 6장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 라고 하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아마 쥐구멍이라도 찾아야했을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설교를 하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자신이 없고 모를 때는 선배들이 해놓은 주석이나 설교집을 참고하게 되는데, 칼빈이나 박형용 등의 주석을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로마서 6장을 제대로 모르는 이 전도사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다. 해석을 해놓은 것이 말이다. 개핀이든, 좀머레이든, 그 누구든지 간에 말이다. 도대체 이 로마서 6장을 제대로 해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로마서 6장은, 그래도 알버트 슈바이처가 !!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알버트 슈바이처가 한 로마서 6장의 해석이 약간(?) 그럴싸한 해석을 하지 않았나 싶은데 말이다. 소위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그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물론 그가 의사이기도 하지만 먼저 신학자라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탐구' 라는 책으로 유명한데, 그는 주장하기를 "사도바울의 서신은 신비주의 신학이다" 라고 했는데, 즉 그리스도의 영적 신비주의라는 말이다.

◈ 로이드 존스 목사도, 땡 !!

심지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로마서 6장설교도 보면 엉망진창이란 것이다. 물론 그의 로마서 3장 해석은 그야말로 압권인데, 그런데 그 뒤부터는 좀 이상하다는 것이다. 로마서 3장을 설교할 때만 성령을 받았는지 말이다. 나중에는 청교도 쪽으로 흘러나가면서 이상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번에 전라도 함평에서 겨울 수련회를 개최하는데, 이번에는 성경 가운데서 한번 하자고 해서, 아마 베드로전후서를 하지 싶은데, 그동안 그 부분은 별로 강의한 적이 없어서 말이다. 그래서 지금 제가 로이드 존스 목사의 베드로후서 설교를 보고 있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분은 설교를 좀 제대로 한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설교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물론 기존 한국교회 목사의 설교보다는 백 배 낫지만, 그런데 설교가 통일성이 없고, 성경본문에 너무 충실하려고 하다보니,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즉 "나는 이제 할 이야기는 다했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하고는 자기는 손을 떼려고 하는, 그런 모습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분에 대해서 약간의 실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 도대체 로마서 6장에 무슨 내용이?

그렇다면 도대체 이 로마서 6장이 무슨 내용이 들어있어서 그러한가? 이 로마서 6장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존재론적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래서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그 부분이 곧 4절인데, 즉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펄펄 살아있는데, 그런데 무슨 장사를 지낸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것을 한국 부흥사들이 옛날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영적으로 죽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여기에 이미와 아직의 개념을 집어넣어서 해석을 하니, 해석이 될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총신의 신성종 목사도 그러한데,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슈바이처의 해석은 무엇인고 하니까, "묵시는 시간을 초월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영적 세계, 즉 묵시의 세계에서 시간은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와 아직과 같은 개념을 이런 것에 집어넣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에 속한 개념이니 말이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이 로마서 6장에 집중에서 다른 곳으로 성경해석을 확장시키는데, 물론 저는 그가 주장한 신비주의에 동의하지는 않는데, 이 '신비주의' 라는 용어는 오해할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냥 '언약의 능력' 이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 '새 생명' 위주인가? '우리' 위주인가?

그렇다고 하면, 조금 쉽게 가도록 하겠는데, 이 로마서 6장에서 사도바울이 주장하는 것이, '새 생명' 위주인가? 아니면 '우리' 위주인가? 분명히 정답은 둘 중에서 하나인데, 즉 예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새 생명을 위주로 우리를 사용하시는가? 아니면 우리 구원위주로 새 생명이 있는 것인가?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가 죄를 짓고 난 뒤에 불쌍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인가? 아니라면 새 생명을 위해서 저주를 받아야만 될 우리를 활용하시는 것인가?

도대체 어느 쪽이겠느냐는 말이다. 당연히 새 생명 위주인데, 그렇지 않은가? 모두가 대답이 없는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즉 예수님의 생명이 마음껏 활개치고 뛰노는 장(場)으로서, 우리를 죽여놓고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살려놓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가지를 잡아서 숨통을 끊어놓고 일을 하신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그대로 하면,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일을 하실 때,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즉 아버지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는데, 그렇게 될 때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4절에 나오는데 말이다.

◈ 성도는, 주님의 일에 동원되는 동원 예비군 !!

그리고 5절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원된다고 하는 뉘앙스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영광은 어떤 영광인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광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신 생명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부활의 능력이 죽은 자에게도 !!

이것을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위대함으로 예수님만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동일한 생명의 능력이 예수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했다고 하는 그 이유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서 죽은 우리에게도 역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그 놀라운 생명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받은 것조차도 제대로 잘 모르는데, 물론 시건이(?) 없어서 말이다. 하지만 천국에 가보면 알 수가 있는데, "야, 나에게 주어진 능력이 바로 예수님을 살리신 바로 그 생명의 능력이구나. 예수님을 부활시킨 그 생명의 능력의 영광이 이렇게 대단하구나" 라고 말이다.

◈ 그러나 현실에 시달리면 !!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그 생명의 능력을 마음껏 만끽을 하겠지만, 그러나 지금 현실에서는 우리가 돈을 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데, 그리고 하루 하루일과의 문제가 엄청나게 쌓여있는데, 전기전화요금, 인터넷 요금도 내야하고, 프로야구도 응원해야하고, 또 교회도 부흥시켜야하고 말이다.

하루종일 그렇게 씨잘데 없는 것들에게 시달리다보면, 무엇이 자꾸 감추어지는고 하니, 예수님을 3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무한한 새 생명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우리는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습관들이 남아있어서, 죽은 자를 3일만에 살리신 그 영광의 능력이 지금 우리에게 도착했음에도 분명히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감격해하지 않고, 그냥 맹숭맹숭하고 시시하게 쳐다보기만 할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시시하게 보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눈을 뜨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를 날마다 죽이는 방법인데, 그렇게 날마다 죽이는데,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하는데, 그렇게 해서 또 날마다 살리고 말이다. 바로 그렇게 해서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 또 다른 방법이 있으면 한번 제시해보라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옛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에, 아무리 주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어도, 돈 100억을 그냥 택배로 부쳐서 집에 갖다놓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겨우 돈 100원을 잊어버렸다고 찡찡거리면서 울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돈 100원을 치워버리면, 따라가서 그것이 자기 돈이니 내어놓으라고 하면서 데모를 하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아무리 주님이지만 왜 자기 돈을 가지고 가느냐고 말이다.

◈ 그만 죽어라, 이 놈아 !!

그렇다면 주님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시는가? 그렇게 찡찡거리면서 질질 짜면서 억지를 부리고 있는 우리들을 그만 죽여버리신다는 것이다. 즉 있으나마나한 존재로서 말이다. 주님은 그렇게 그냥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허접한 놈들아, 이제 죽어. 그만 꺼져" 라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죽으면 돈이 필요 없는데, 그러니 성경말씀을 보면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하,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내 몸이 아니구나. 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라고 말이다.

◈ 2.5초의 엄청난 은혜로 로마서 6장이 자기 사건으로 !!

다시 말해서, 이미 주님께서 자기 몸으로 다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인 줄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깨닫는 순간이 얼마인가? 제가 하루 24시간 중에서 2.5초(?) 라고 했는데, 물론 사흘만에 2.5초가 되면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바로 그 2.5초를 통해서, 그 2.5초 안에서 이 로마서 6장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에게 벌어진 일이 된다는 것이다. 즉 로마서 6장의 말씀사건이 말이다.

여기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을 한번 찾아보자.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말씀이 역사하기 때문에 !!

여기에 보면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라고 하는데, 즉 '이 말씀'에 로마서 6장이 포함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분명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로마서 6장이 그대로 역사한다는 말이다. 물론 2.5초 동안이지만 말이다.

어떤 분은 제가 하도 2.5초를 이야기하니 혹시나 싶어서 "목사님, 2.5초가 성경말씀에 있나요?" 라고 하는데, 물론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혀 없다고 하면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제가 만들어보았는데, 2초는 너무 짧고 3초는 너무 긴 것 같아서 말이다(ㅋㅋ). 물론 믿음이 더 좋은(?) 사람은 0.5초라고도 하는데 말이다.

◈ 한국교회 교인들에 복음을 전하게 되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방금 말한 그 강의를 설교시간에 그대로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인들은 그만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되는데, 즉 "과연 내가 다음 주부터 교회에 다녀야 하는가?" 라고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상태가 이 정도수준이라는 말이다. 물론 우리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말씀대로 설교를 하게 되면, 자기들이 교인들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니, 아예 포기를 하는 쪽으로 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쏟아지니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때려 죽여도 자기 몸은 자기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런 자기의 것을 보다 더 제대로 관리하려고 교회에 나왔는데, 그런데 교회에 나오자마자 "니 것은 니 것이 아니다" 라고 하니, 그렇게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미친놈들에게 무슨 설교를 듣느냐고 하면서 교회를 그만 나가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너무나도 당연한 태도이고 말이다.

◈ 임직자 여러분, 혹시 스데반 집사님을 아세요?

지금의 계획대로 라고 하면 11월 27일에 부천의 개혁교회에서 장로님을 두 분을 뽑고, 또 집사님을 뽑게 되는데, 주일오후에 말이다. 그래서 그 임직식 설교본문을 고민하다가 마음에 굳힌 것이 있는데, 즉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 대목을 설교하기로 말이다. 너무 잔인한가요?

알다시피 스데반 집사님이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는데, 적어도 복음을 아는 장로이고 집사라고 하면, 이 악하고도 악한 시대에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를 자꾸만 양산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정말 성경말씀을 제대로 전한다고 하면, 즉 스데반 집사님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사로서, 혹은 장로로서 설교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교회에서 또 돌에 맞아서 죽지 않겠는가 싶다는 말이다. 아니, 또 다시 돌에 맞아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정도로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성도라고 하는 개념이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개념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정말로 진짜 참된 성도를 원하는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말하는, 그런 남발된 세례증을 가지고 있는 교인이 아니라 말이다. 즉 로마서 6장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자를 말이다.

여기서 로마서 6장 6절을 다시 보자.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우리의 죄 된 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지금 앞에서 설명한 것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데, 이 6장 6절을 그대로 해석하면 정말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졌다는 말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갈 때 배낭을 매었다고 한다면, 그 배낭 속에 무엇이 들어있겠는가? 우리가 지은, 또 지을 모든 죄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아까 6장 3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우리가 장사가 되어야 하는고 하니까, 우리의 죽을 죄 된 몸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죄 된 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몸 안에는 예수님을 빼고는 온갖 모든 죄들이 모두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니 말이다. 즉 예수님을 빼고 모든 인간들이 지은 죄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만약에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고 하면, 우리가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즉 우리의 그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그러한 우리의 모든 것들이 다 죄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이다.

◈ 자기 나이 40에, 과연 80이 되어서 짓는 죄를 알 수 있는가?

제가 지금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은가요? 예를 들어서, 지금 자기 나이가 40이라고 하면, 자기가 50이 되어서 무슨 죄를 지을지 모르는데, 그리고 60이 되고, 70이 되고, 또 80이 되어도 또 다시 나올 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죄를 나이 50이 되어서 아는가? 모르는가? 당연히 모른다는 것이다. 아직 나이가 80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만약에 지금 자기 나이가 50이 되었다고 한다면, 나이 50에서 80까지 살아온 그 모든 것들이 다 죄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아직 나이 40이니, 즉 80이 되어야만 알 수가 있는 죄에는 도달하지를 않았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말하는 논리가 상당히 어려운데, 하지만 분명히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다" 라는 것은, 그것을 "십자가에 장사되었다"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의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라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성화론은 그 자체가 성립이 될 수 없는데, 이 로마서 6장에서 그만 박살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아직 90살까지 살지도 않았는데, 무슨 자기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인생을 다 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인으로 죽어 !!

여기에 대해서, 90살까지는 죄를 지어도 92살이 되면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면, 즉 나이 90에서 92까지는 십자가가 적용이 되지 않는데, 말을 그렇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몸 자체를 아예 죄의 몸으로 간주했는데, 그러니 예수님의 논리에 의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죽을 때도 역시 죄의 몸으로 죽고 말이다. 바로 이러한 전체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함께 죽는다" 라는 것은, "십자가가 너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너의 죄와 상관이 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그런 죽음을 깨닫는 것이 만약에 45살이라고 하면, 그리고 그 사람은 90살에 죽는다고 하면, 그 45년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이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즉 죄라는 말이다.

◈ 아하, 그래서 '의의 종'이구나 !!

하지만 성화론자들은 이런 말씀의 원리를 전혀 모르는데, 십자가의 원리를 말이다. 그런데 자기 몸이 죄의 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비로소 무엇을 증거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의를 증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 몸이 죄의 몸임을 아는 자들만이 말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두고 사도바울은 '의의 종'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 로마서 6장 8절부터 한번 읽어보자.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

여기 14절에 보면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이 율법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죄인이 되고 말고 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이 십자가 앞에서 이미 죄인이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이미 죄인이 되었는데, 사람을 때려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율법을 가지고 또한 따져서, 즉 "당신은 이러 이러해서 죄인이다" 라고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죄인이라는 것이다. 즉 그럴 대상이 안 될 정도로 이미 죄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의인이 아니고 말이다.

◈ 인간은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그러므로 더 이상 율법 아래에서 죄책감을 전혀 느낄 필요가 없는데, 인간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래도 자기가 뭔가 잘난 구석이 있다는 의미인데, 하지만 그건 교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로마서 6장이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성경말씀도 어렵지만 말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일 위험할 때가 바로 자기 죄책감을 느낄 때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그런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를 풀어보면, "아하, 나는 이런 사고를 칠 나쁜 놈이 아닌데, 그만 이렇게 되었구나"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 자기가 나쁜 인간이 아닌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데 말이다.

◈ 아니, 내가 이런 실수를 ??

다시 반복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나이 45살을 먹은 사람이 자기 나이 60살에 지을 죄를 아는가? 모르는가? 자기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다 아시고, 자기가 60살에 지을 죄도 이미 다 용서를 해주셨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몸이니 말이다. 그런데 60살에 죄를 지어놓고는 새삼스럽게 "야, 60년을 잘 버티고 왔는데, 여기서 그만 실수를 하다니, 오호 통재라"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죄를 용서해준 주님이 얼마나 섭섭해하시겠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실수냐는 것이다. 처음부터 죽을 죄의 몸인데 말이다. 그냥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왜 나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깨달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어떤 위기의식을 느낀다든지,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진다고 여기면, 그런 사람은 주님의 뜻을 아주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 !!

분명히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몸은 주님의 관리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주님의 십자가의 의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런데 이러한 사도바울이 전한 말씀도 모르고, 로마서 6장을 무시하고 자기의 결백함이나 순수함을 주장한다고 하면,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면, 즉 "아이쿠,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 남에게 이런 피해를 주다니?" 라고 하면서, 그렇게 새삼스럽게 죄책감을 느끼면서 낙심을 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평소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좋게 여겼다고 하는 반증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여긴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니 그런 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평소에 제가 그렇게 선악구조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은 했지만, 그러나 사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 인간들의 한계이기도 하고 말이다.

◈ 사도바울 - ① 율법에서 죄가 나온다 !! ② 그런데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죄다 !!

사실상 이 로마서 6장의 문제는 지금 우리뿐만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먼저 이 율법에서 죄가 나오는데, 왜냐하면 율법은 죄를 더하기 위해서 있으니까 말이다. 사도바울은 여기 첫 번째 논리에서 두 번째 논리를 끄집어내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 죄다" 라는 것을 끄집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첫 번째에서 두 번째로 넘어가는데, 그 논리가 굉장히 복잡하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처음에는 "율법에서 죄가 나온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여기서는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 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심판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즉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과연 율법이 죄라고 하는 것에서, 복음에 순종치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 논리가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율법은 그냥 죄라고 지적만 하는 것이지, 그런데 거기에 십자가를 집어넣어서, 그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죄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나올 수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 율법은, 십자가 사건 이전까지만 !!

여기서 사도바울은 율법과 십자가를 분리해서 주장하는데, 즉 율법은 십자가까지만 율법인데, 즉 새언약이 오기 이전까지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새언약이 오고 나면 옛언약과는 이제 결별이라는 것이다. 즉 옛언약인 율법은 폐기처분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새언약인 십자가를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과연 어떻게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느냐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죄가 된다고 하는데 말이다. 즉 사도바울에 의하면, 과거에는 율법이 죄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 죄의 몸은, 반드시 저주를 받아 죽어야 !!

여기 로마서 6장에서 주장하는 사도바울의 논리가 무엇인고 하니, 갈라디아서도 역시 그러한데, 이런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여기에(?) 집어넣으면, 율법에서 죄가 되는 것이 곧 죄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죄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죄의 몸이기 때문에 반드시 저주를 받아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런데 그 죽음이 다른 곳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 십자가에서 죽는데, 물론 혼자 죽으면 그냥 지옥에 가지만 말이다. 하지만 함께 죽는 분이 계시기 때문인데, 그분이 과연 누구인가? 즉 4절에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라고, 즉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시킬 때, 우리를 보고 부활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묶여있는 예수님의 의를 보고 우리를 부활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죽을 몸인데,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그 예수님을 부활시키니 우리도 덩달아서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바라보고 부활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와 결합이 되어있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다 잿더미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는 어디서부터 해방이 되는고 하니, 율법에서 해방이 되는데, 즉 율법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 - 이미 죽은 몸이기에 율법에는 해당사항이 없어 !!

그러므로 율법은 더 이상 성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데, 그런데 이것을 기존신학에서는 "성도는 말 그대로 의인이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사도바울에 의하면 성도는 이미 죽은 몸이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죽은 몸이기 때문에 말이다.

지금 주위가 시끄러워서 다시 해야 되겠는데, 아무튼 사도바울에 의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율법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죽은 놈 불알 만지기라는 말도 있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성도는 이미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살은 자가 아니고 죽은 자라는 말이다.

◈ 기존신학 - 이미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해당사항이 없어 ??

그런데 기존 신학에서는 "우리는 이미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해당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박옥수의 '구원파' 라는 것이다. 박옥수는 로마서 1장을 설교하면서, 예수님은 믿는 자는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박옥수의 설교를 들으면 사람들이 기분이 좋은데,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앞으로 무슨 행동을 해도 죄가 아니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제가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지금 좀 거룩하게 산다고 폼을 잡을지 몰라도, 물론 그것도 죄이지만,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나이가 50이 되고 60이 되면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제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를 짓습니다" 라고 하니, 기존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은 또 이것을 이해하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아니, 예수님을 믿고 이미 의인이 되었는데 무슨 죄를 계속해서 짓는다는 말인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무슨 다람쥐 채바퀴 도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면, 자기 존재만 가득 !!

그렇다면 왜 이런 주장들이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모두가 다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전혀 몰라서 그러한데, 즉 존재론적으로 접근을 해서, 그렇게 되면 자연히 자기 구원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예수님이 율법대로 죽었는데, 즉 물귀신 작전(?)으로 우리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산 것도 예수님의 의로 인해서 산 것인데, 즉 의인 하나 잘 만나서 우리가 살았다는 말이다. 그것도 우리가 요청한 의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붙들어서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님으로 인해서 살아났는데, 그래서 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의를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가 다시는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라" 라는 사도바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가 다시는 우리를 어떻게 주장하지를 못하는데, 그러나 죄는 느낀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죄인인 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성도이고 말이다.

◈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죄 !!

여기서 성도가 죄를 느낀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죄인가? 어떤 죄를 느낀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라고 한다면, 놀랍게도 그러한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느끼는 수준까지 올라가게 되고, 그렇게 해서 자기가 전적으로 죄인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이고, 자기가 곧 그런 죄인임을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한 편 강도는 마지막에 십자가만 붙들어도 구원을 받는 이유를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강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어도 낙원에 간다" 라고 하니,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강도처럼 마지막에 그렇게 하고, 그동안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겠네" 라고 빈정거리는데, 그것은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니, 세상에 부끄러운 구원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십자가를 모독하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망가져 있어 !!

예를 들어서, 자기가 60살까지 착하게 살았다고 하면, 그런데 그만 나이 70살이 되어서 실수로 죄를 짓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뭐라고 하겠는가? "야, 내 나이 70에 드디어 망가지는구나"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망가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이 자기 잘못에 대해서 너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인데, 함께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라는 말이다.

이제 로마서 나머지 부분을 읽고서 이 로마서 6장은 마치도록 하겠는데, 15절부터 누가 한번 낭랑한 목소리로 한번 읽어보세요.

(롬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롬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복음을 위해서 선거운동 방해쯤은 ??

지금 밖에서 선거운동을 한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다른 것 같으면 제가 나가서 하지 말라고 막겠지만, 저것은 막으면 그만 선거법 위반으로 걸린다는 것이다. (걸려도 복음을 위해서 하지 말라고 막을 수도 있지 싶은데, 바울은 감옥에도 주님을 찬양했는데, ㅋㅋ)

일단 교재를 살펴보기 전에 여기가 너무 시끄러워서 옆방으로 옮기도록 하겠는데, 제가 정신이 집중되지 않아서 너무 힘이 들어서 말이다. 여러분도 괜찮지요? (그래서 장소를 옆방으로 옮겼음) 이제는 옮겼으니 창문을 닫고 열공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그래도 영 아니다 싶으면 주께서 알아서 밖에 있는 놈들에게 깽판을 놓을 것이고 말이다.

◈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

그러니까 이제 사도바울이 해석한 율법의 의미는 우리가 어느 정도는 알았다고 여겨지는데 (아닌데?), 이제 진도를 한번 나가보자는 것이다. 교재를 조금 '붕' 뛰어넘어 살펴보겠는데, 그 중간에 있는 것은 이미 강의를 다 한 것이니 말이다(??).

일단 교재 297페이지를 살펴보자.

** 예수님은 성전의 장소적 의미를 배제해 버리신다. 따라서 건물로서의 개념도 자연적으로 사라져 버린다. 왜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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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