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090829b 대구특강-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b
[녹취]20090829b 대구특강-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b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829b 대구특강-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b
(강의:이근호 목사)
둘째 시간 이해 안 되면 회비 안 내도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제일 어려운 둘째 시간이 시작됩니다. 아까 목사님도 그런 질문했는데, 그 어려운 것을 글로 미리 이야기 해주시지 하는데 이 논문 2페이지, 관주 2)에 보면, 둘째 시간에 할 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옐름슬레우에 의하면, 기호는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기능으로 작용하면서 의미가 발생된다고 보았다.] 이 한 문장 이것도 어려운 말이고요.
이걸 제가 둘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면서 첫째 시간 한 것을 요약해보면, 예수님의 몸이 있고, 그 다음에 우리의 몸이 있다. 우리가 정신이고 영혼이고 하는 것을 우리 몸에서 나온 거예요. 성경에 보면 그렇게 돼있지요. 흙이, 하나님의 신이 하면 우리 몸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몸은 깨지고 이 몸은 없어지고 나중에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돼있어요. 예수님의 몸이 이미 하늘에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부활, 승천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보가 담겨있는 우리의 몸도 결국 예수님과 같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으리라.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 몸 안에 예수님 정보가 들어 있느냐 하는 이게 관건인데, 예수님 정보는 예수님의 몸을 가지고 만든 그건 예수님의 역사죠. 공생애에서 나온 건데 공생애는 어디까지 하느냐?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십자가와 부활, 승천 다 포함됩니다. 그 중심은 십자가에 있는데, 왜 십자가에 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복음과 비 복음을 나눌 때 기준이 뭐냐 하면, 부활 나눈 게 아니에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십자가로 기준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나눈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정보인데 십자가는 뭐로 보느냐? 언약의 완성으로 봤어요. 여기 리델보스의 책에 502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언약의 완성을 예수님의 피와 살로 표현했고, 이 피와 살로 그 다음에 교회를 만들 때 믿으라 한 게 아니고, 언약적으로 교회가 뭐냐 할 때는 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같이 마시고 먹는 무리, 먹는 집단, 이걸 교회라 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와 살에 이르려면 피와 살이 찢어지고 피부 안의 피가 바깥에 나오려면 어떤 사건이 있어야 되는데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죠. 그래서 교회에 모일 때마다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죠. 그것을 반복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살과 피를 반복한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는 것이고, 그 반복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성만찬 해봐야 반복 되지도 않아요.
그 십자가라는 것이 예수님 몸과 인간 몸의 차이를 이야기하니까 결국은 뭘 반복하느냐? 그 차이 됨의 무한 반복. 이건 어디까지 계속 되느냐? 천국 가서도 되풀이 반복돼요. 천국 가서도 어린양의 보좌에 날마다 찬송하면서 주님의 몸과 우리 몸과의 차이성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사건 중심, 언약 중심 같으면 이해되는데 이것이 내 몸이 구원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느냐 하면, 천당 왔다. 됐어. 천당 가고 싶으면 날 따라와. 다 따라갔다. 천당 왔다.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네 마음대로 살아. 네가 스타야. 이제 왔는데 뭐.
성경을 볼 때 자기 몸을 아직도 유지한다면 결국 복음, 십자가 아무리 집어넣어도 목사님 십자가 믿으면 내 몸 구원 받습니까? 언약 믿으면 내 몸 구원받습니까? 만날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을 포기 안 해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자기 몸 안에 무슨 정보만 있겠습니까? 예수님 정보만 담겨 있어야 되는데 누구 정보가 있겠어요? 나도 이렇게 했다는 자기 공로, 나도 교회 봉사했다는 공로. 자기 정보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낳겠지요. 이걸 성경에서 ‘자기 의’라고 합니다. 로마서 10장에.
다른 사람과 차이 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간직하는 것,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스스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되풀이하고 반복하는 겁니다. 왜 교회 와서 기도합니까? 그건 뭐냐 하면, 다른 사람과의 차이. 두 번째, 과거에 나는 이랬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나아졌다는 나 자신과의 시간적인 차이, 그걸 노리는 겁니다.
진짜 기도는 이렇게 해야 돼요. “주여, 주님의 정보가, 십자가가, 언약의 완성이 나한테 들어 닥침으로 말미암아 나는 항상 죄인임을 알게 하옵소서.” 그것, 주님의 정보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항상 죄인이고, 주께서는 항상 용서하시는 분인 줄 어느 자리든 깨닫게 하옵소서.” 그 기도 외에 다른 기도 없어요. 주기도문 내용이 그거에요.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내 죄를 용서해달라고.
그래서 여기서 십자가의 사건이 여기에 피와 살이 되고 이것을 같이 먹고 마심으로 교회 된다. 502페이지 보면 나와요. 그러니까 리델보스가 성경에 없는 소리 한 게 아니고 맞는 소리했는데 그게 뭘 자꾸 구분하느냐 하면, 그래도 인간적으로 납득이 되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천국과 결합을 시키려는 대목으로 자꾸 시간적으로 나눈다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교회가 만약에 분리된다면, 그러면 교회에 있는 청년들이나 선교단체는 뭐 해야 됩니까? 우리는 예수 믿었다. 그 다음부터는 할 일 있죠. 뭡니까? 땅 끝까지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 유명한 창세기 1장 28절. 다스리고 정복하고 그 다음에 전도해서 구원하자. 그래서 온 각처에서 어떤 직업이든, 교사든, 농부가 됐든 그 현장이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 되게 하도록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자. 나가라.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라로 가거라. 선교비 대줄게. 이건 뭡니까? 아까 심 목사 이야기하듯이 진화론이죠.
이걸 가지고 교재에 보면, 인간은 자기 몸의 확장을 노린다. 자기 몸의 지평을 넓혀간다. 이게 바로 유토피아, 상상의 천국이에요. 무슨 하늘나라에 확장이 있습니까? 지가 무슨 수제비할 것도 아니고, 떡을 늘일 것도 아니고, 피자 만들 것도 아니고. 왜 확장하는데? 겨자씨 비유 대면서 ‘확장하라, 확장하라.’ 천국은 크기가 아닙니다. 사건의 반복이에요.
이것 적어놓으면 좋은데. [사건은 소멸하는 처소]에요. 한 점으로 인자의 있는 자리가 보좌인데, 그 보좌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한 처소, 한 지점에 있어요. 그 지점에서는 오직 누구만 앉아있는가? 오직 어린양만 앉아있고, 그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의 모든 것들이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을 위하여,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져서 모든 것이 주로부터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려 함이라. 소멸되는 한 지점, 여기서 보면 없는 지점이죠.
이건 둘째 시간 서론까지 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둘째 강의하려니까 나도 겁납니다. 진짜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 어려운 대목 해봅시다.
사건 층이 있고, 역사 층이 있는데 사건이 역사에 이렇게 해버리면 역사는 뒤틀리죠. 낯선 사건으로 말미암아 재조립이 되는 겁니다. 전에 수련회할 때 했잖아요. 아빠, 엄마가 같이 낚시 갔다가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고3 애가 서울대학 준비하다가 고아가 되서 공장에 취직했다는 이야기했지요.
나는 분명히 서울대학 가려고 했는데 낯선 사건, 아빠, 엄마가 돌아가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미래가 다시 재조립 되면서 나는 공장에 가서 훌륭하게 일해야지. 라고 했는데 죽었던 어머니가 수영선수 출신이 돼서 나오다가 받쳐서 기억력은 없지만, 막장 드라마 이야기했지요. 깨지고 난 뒤에 보니까 재벌 2세가 돼서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역사를 균열, 깹니다. 뭐가 깨지는가? 지금까지 의미가 깨져요. 이게 바로 다메섹에서 사울이란 사람이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지금까지 의미가 깨어졌어요. 내 중심에 있다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중심이 바뀝니다. 그러면 내 몸 중심 역사 속에 뭐가 흘러들어오느냐 하면, 기관차, 은하철도999 주인공, 철이가 괴상한 복장의 차장, 일제시대 때 개 잡던 만주사람 복장 있잖아요. 오바 입고 모자 쓰고.
은하철도999가 이 인간의 역사 속에 파고 들어오면 지금까지 나의 과거는 흘러오다가 뭐와 접속이 되느냐 하면, 위에서 내려오는 주님의 몸의 역사와 이게 결합이 되면서 앞으로 나오는 역사는, 자기 역사는 사라지고 누구 역사로만 이게 이전됩니까? 내 안에 계셔서 주님의 몸으로써 이뤄지는 은하철도999가 달려가게 되는 겁니다.
문제는 이 정도까지는 사람들이 알아요. 뭘 모르느냐 하면, 이렇게 생각했던 ‘은하철도999가 이렇게 달리는구나.’라고 생각한 이거는 지금의 나의 몸이 생각하는 또 나의 역사가 돼요. 어렵다, 어렵다. 정말 어려워요. 은하철도999가 나를 관통해서 이제는 소급해서 과거, 미래까지 주께서 인도하는구나. 그럼 앞으로 이렇게 인도하시겠지. 라고 생각했다면 그 다음 십자가 사건은 반복되니까, 사건에 의해서 그것도 새롭게 조립된 우아한 나만의 괜찮은 간증이었다. 역사였다. 그것도 죄였다. 그게 깨져야 됩니다.
목사님,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보고? 맡기세요. 앞으로 사건이 여럿 남아있습니다. 각자에 무슨 사건이 있는지 모릅니다. 고마운 것은 그게 어떤 사건이든지 간에 소멸되는 하나의 지점, 하나의 처소 전부다 인자되시는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모든 것은 용서되었다. 어떤 죄를 져도 다 용서된 상태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우리는 즐겁습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A란 지점에서 은하철도999가 이렇게 관통하고 난 뒤에 앞으로 이렇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한 삼 년 지나고 난 뒤에 이것이 이미 어느 정도 역사화 된, 이 역사를 깨기 위한 사건 층이 또 떨어지니까 그것 깨지고 새로운 몰랐던 또 다른 은하철도999가 나를 또 이렇게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 층에서는 따로 은하철도999의 묵시의 흐름이 있습니까, 사건들만 있습니까? 답변해보세요. ①사건들만 있다. ②나름대로의 역사의 흐름이 있다. 몇 번입니까? 항상 정답은, 이 번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 정답은 일 번이었습니다. 거기는 사건들만 있습니다.
왜 사건들만 있느냐 하면, 아무리 사건이 우리 속에 개입해보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 몸에서 주체라는 것은 버리지 않습니다. 나 중심을 버리지 않아요. 내가 구원받았다. ‘나’라는 말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괜찮은 사건, 구원해도 며칠 안 가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나를 끼어 넣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사건덩어리가 있어서 이 사건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주체가 됩니다. 사건을 일으켜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또 사건을 일으켜버리면 이 사건을 나라는 주체가 이해하면 안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쉬운 편에 속합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테니까 여러분들은 좀 어렵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아래층의 역사 층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의미는 주체가 누구냐 하면, 내가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죠. 우리 장로님 집에서 수박을 잡술 때 장로님이 수박 잡수면서 “이 목사, 수박 맛있는 걸 네가 알아?” 저는 수박을 먹는 주체가 아니잖아요. 안 먹잖아요. 남이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그게 주체입니다.
둔스 스코투스라고 루터 바로 이전의 신학자 주장이 그거에요. 하나님 한 분 밑에 어떻게 남이 모르는 어떤 개별자가 등장하느냐? 그 문제를 다룬 겁니다. 여기 영혼론 나오는데 관주 3)에 보면 나오는데 라이프니츠 이야기 나오죠.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면서도 하나님이 하나같으면 적어도 형제 간 정도는 다 알아야 되는데 동생이 어젯밤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까? 왜 하나님은 하나인데 왜 각자가 하나가 생겼느냐? 그 문제를 다룬 거예요.
그래서 스코투스가 말하기를, ‘각자 하나, 하나가 신인 줄 알라’ 이겁니다. 그때부터 주체사상이 확하고 다가오죠. 내가 예수 믿으면 누가 구원받습니까? 정 목사님이 구원받습니까? 아니잖아요. 내가 예수 믿으면 누가 구원받아요? 내가 예수 믿잖아요. 정 목사가 예수 믿으면 정 목사가 예수 믿는다고. 어떻게 정 목사 믿음이 내 믿음이 왜 안 됩니까? 이걸 따지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어떤 분은, “목사님 믿으면 저도 믿습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어떤 불신자는, “당신이나 교회 가라. 당신 덕분에 천당 가자.” 그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남편 아무리 잘 믿어도 아내가 안 믿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오 목사님, 아시죠?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신학공부하면서 왜 그런지 안 물어봤습니까? 참 골치 아파요. 어려운 것 아닙니까. 왜 한 사람은 믿고 둘이 안 되는데요? 된다고 한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이 믿으면 다른 사람에 영향을 준다고 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스피노자가 있어요. 여기 있네, 수박. 스피노자는 이 파란 부분이 하나님이고, 이 빨간 부분이 우리에요. 파란 부분을 흔들면, 이게 만약에 액체라든지 끈이라면, 빨간 부분이 자기가 안 흔들리고 싶어도 같이 흔들리죠.
그러니까 성도가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은 뭐냐?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이론입니다. 그 스피노자의 이론이 마치 성령의 은사론 아니겠습니까? 맞지요. 똑같지요. 그래서 개핀 교수가 아무리 성령의 은사론 이야기하고, 개혁주의에서 성령의 은사론 해도 그걸 철학에서 스피노자가 이야기 다 해버렸어요. 할 게 없어요. 그래서 신학자들이 철학을 공부 잘 안 하니까 마치 철학자들은 지옥 가고, 자기는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지만 스피노자가 이야기 다 해버렸다고.
뱀 꼬리 흔들면 머리도 흔들리잖아요. 하나님이 흔들어대니까 그 파동이, [해운대] 보면 파도가 치니까 해변까지 밀리잖아요. 이쪽에서 흔들면 저쪽에서 흔들리니까 우리는 헤어진 관계가 아니고 하나다. 그러니까 예수 안 믿어도 모든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 여호와증인 주장 아닙니까. 다만 여호와증인이나 신천지나 이런데 보면 십사만사천 티오 때문에 바짝 전도해야 교회 돈 바쳐야 되고. 임원진은 안 되도 구원은 받겠지. 여호와증인, 신천지 아예 천국은 없으니까. 그게 전부다 스피노자 아이디어에서, 인간들 본성에서 나온 거다 이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가 둘이 되느냐?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 들어갑니다. 어려운 것 근처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층을 하나는 사건 층, 영적 세계, 이걸 말씀의 완성. 밑은 육의 세계, 역사 세계. 역사 세계에서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장로님이 수박을 잡술 때는 수박 맛을 장로님이 그걸 알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나만의 의미가 돼요. 이 집 수박 괜찮다. 저는 안 먹어 봤으니까 몰라요. 목사님도 잡사보지요? 맛있네. 그러면 물어봅시다. 장로님의 맛있네 하고, 나의 맛있네 하고 같은 맛있네 입니까? 아니지요.
이 몸의 개별성이 있는 한, 여러분 믿습니까? 믿습니다. 백날 믿습니다 해도 목사 믿는 것 달라요. 교인 백 명이면 백 명 다 달라요. 지 마음대로. 이 의미 층을 어떻게 해서 의미가 나왔느냐? 내가 꽃이라고 불러줌으로서 비로소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겁니다. 김춘추가 꽃을 출판해서 평소에 늘 무관심했는데 어느 날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주니까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남한테? 아니에요. 나에게만.
지금 뭐가 문제에요? 내가 나를 의식하는 자체가 모든 죄의 근원이 되죠. 그런데 죄인 줄 알면서도 인간은 누구로부터 못 벗어난다? 때려죽여서 나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날 잊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떻게 내가 나를 잊을 수 있습니까? 난 잊을 수가 없는데. 고로 나는 의심한다.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하는 나를 의심 못한다는 것이 유명한 데카르트 생각 아닙니까. 어떻게 나를 잊어.
나는 건망증이 왜 이리 심해. 건망증이 아무리 심해도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 남이 아니고 나라는 사실은 건망증 하는 가운데도 잊을 수가 없어. 그렇다면 하나님, 그 하나님은 누구에게만 의미 있는 하나님이에요? 나에게만 의미 있는 하나님이죠. 그러면 내가 어느 날 하나님 이십 년 믿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 안 믿으면 하나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 내가 쥐고 있는 하나님인데 내가 놔버리면, 어떤 분의 용감한 고백처럼, “나는 이제부터 예수님 안 믿습니다.” 아주 용감한 고백을 했죠. 근데 그 사람 고백은 소용없죠. 왜? 이틀 뒤에 믿는다고 또 나올 줄 모르니까.
도대체 안 믿는다고, 나는 천당 안 간다. 나는 대추밭에 있지만 그걸로 하나님하고 예수하고 안 믿는다. 빠이빠이 해도 그 인간 지 마음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는, 위층에서 분배하기 나름이에요. 위층에서 의미를 줄 때 아래층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은 두 개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의미와 또 하나는 나 같은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구원하셨던 돌발적인 사태, 주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걸 아는, 모든 일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중심은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두 가지의 의미를 함께 갖고 있으면, 100%입니다. 100% 신자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전에도 그런 의미 있었는데 의미 다 잊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나의 의미기 때문에 그 생각대로 안 됩니다. “잘 믿다가 안 믿으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는 물음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의 몸에서 나오기 때문에 고마운 것은 그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줄 몰라요. 그래서 인연이란 말은 끝장내야 인연을 아는 것처럼, 마지막 아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의미에 있어서 의미에 질료, 질료란 말 어렵지요. 재료라 합시다. 의미라는 재료가 있어요. 그 재료를 통해서, 땅에 있던 하늘에 있던 의미라 하는 것은 재료가 있고, 그 재료가 하는 기능, 기능이 모아져서 구조를 이루는데 이걸 ‘표현’이라 하고, 이 재료를 가지고 ‘내용’이라 합니다. 옐룸슬레우 이론이 그래요.
그러면 다니엘에 보면 ‘이레’라는 게 있는데 이레가 7년이거든요. 1+1+1+1+1+1+1, 1년 이건 내용이 되고, 뭉쳐진 이것이 바로 이레의 표현이 되는 겁니다. 이 표현과 내용에 따라서 의미가 다 달라요. 그런데 이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이 7년 이것이 또 내용이 되고, 표현이 되는 이것이 뭐냐 하면, 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심이 됩니다. 이게 바로 표현이 돼요. 어렵다 했지요.
어려우면 목사님이 쉽게 설명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쉽게 설명하려면 예가 들어가죠. 여러분 자제분이 계시죠. 여러분 자제분이 만약에 몸이 아프면 걔는 졸지에 환자가 돼요. 그런데 걔가 학교 가면 학생이 돼요. 이 표현이라 하는 것은 단독적으로 아이가 이렇다고 규정짓지 못하고 어느 장소에, 어느 공간에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그때그때마다 의미가 달라요.
그런데 아이만 예를 들었지만 우리 자신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설교할 것 미리 해볼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버릴 때 예수님 함께 있을 때는 예수님 안에서 자기 존재는 반석이었어요. 수제자죠. 그런데 자기가 예수님 결별하고 어린 소녀하고 예수님을 미워한 사람 분위기에 있을 때 그때 베드로는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세 번씩 배반한다는 의미로 표현으로 누가 사용했어요? 말씀으로 주께서 그렇게 사용했지요.
그런데 배반하고 있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디서 닭이 두 번 울었어요. 그러면 베드로는 뭡니까? 나는 배신자요,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는 그런 의미로 존재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닭이 울었잖아요. 닭은 어느 계열입니까? 닭이 운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계열이에요? 묵시적 사건 계열이죠. 묵시적 사건 계열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이 응해서 닭이 울리라. 할 때 닭이 자기 인생에 개입하니까 이제는 내가 예수를 미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적응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말씀대로 순종했던 닭 앞에서 자기는 새로운 자아가 발생되면서 베드로가 뭐냐? 나는 비록 죄인이며 배신자기 때문에 울잖아요.
그 우는 것은 누구 표현입니까? 베드로 자기 표현일 수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께서 말씀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의 표현이 되겠지요. 그 말씀의 표현을 가지고 예수님의 정보가 누구 안에 들어있다? 베드로한데 들어있기 때문에 베드로는 빼도 박도 못하고 그 예수님의 정보의 나라, 무슨 나라? 킹덤,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천국이에요.
천국은 사건의 집합이에요. 거기에는 개인적인 역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개인적인 역사는 용서가 안 돼요. 과거에 뭐 했습니다. 필요 없어요. 어떤 사건이 너한테 도착해서 너로 하여금 집어냈느냐? 그 정보, 예수님의 정보만 있는데, 예수님의 정보가 뭐냐? 십자가로 나타나요. 십자가를 분해하면 살과 피가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질 때 우리는 십자가 앞에 뭐가 되느냐 하면, 늘 죄가 되고, 이 죄는 예수님을 안 만난 사람은 아무리해도 알 수 없는 모르는 그런 독특한 사건으로서의 죄죠.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 지금 대추밭에 있다가 집에 가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뭡니까? 우리의 죄가 기다린다는 아주 즐거움, 내가 지은 죄가 오늘 밤 한껏 기다리고 있다는 아주 즐거움. 이 즐거움이 있다면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에서 벌써 다 벗어난 사람이에요. 여러분들이 착해지려고 하니까 여러분 인생이 고로운 거예요.
착해지려고 하니까 착한 과거와 더 착한 미래를 하기 때문에 나만의 차이를 주장하려 하니까 자기가 힘든 거예요. 뭘 해도 죄입니다. 강의해도 죄고, 목사가 설교해도 죄고, 다 죄에요. 그 죄라는 보편적인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터져버렸으니까 그때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뭐로 만납니까? 잘난 사람과 덜 잘난 사람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서로 또 괴수라고 우기는 것이 십자가마을이죠. 특히 이상규 집사님. 나는 죄인입니다. 정낙원 목사님은, 나는 더 죄인입니다. 더 죄인 못 되서 환장했어요.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죄인입니다. 마치 코미디에 ‘어흠’으로 시작하는 양반 인사처럼, 옛날 구봉서가 할 때, 서로 엎드려서 머리 맞추고, 서로 겸손하다고. 그런 것은 절에서 잘하죠. 부흥사들, 나는 부족합니다. 돈은 다 챙기고. 그 돈이 뭐냐? 자기 부족한 값이야.
표현과 내용은 주어진 환경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 설명한다고 그 어려운 노아홍수 설명한 거예요. 위에는 무지개 떴고, 밑에는 피가 떴어요. 그 당시에 무지개 떴다는 말은, 비가 오면 죽었구나. 왜? 혼났기 때문에. “아버지, 또 비 옵니다.” “우린 죽었다.” 홍수를 만나고 시껍했거든요. 비 오면 죽음이고, 날이 개면? “아버지, 날 개었습니다.” “살았구나.”
세상에 날 갠 것을 은혜로 여긴 사람은 그때 그 사람들밖에 없습니다. 요즘 만날 날 개도 이건 당연한 걸로 여기는데 한번 호되게 몇 개월 동안 비 맞고 난 뒤에 비 오는 것을 저주로 느낀 사람은 그 사람들밖에 없고, 비 개인 것을 축복으로 여긴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 옴과 갬의 중간에 무지개가 있어요. 내가 막아줄게. 물로써 조지는 것은 내가 막아줄게. 조건이 있다. 조건이 뭡니까? 땅을 봐라. 누구든지 의로운 자의 피를 흘리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여기서 내가 ‘의로운’이란 말을 집어넣은 것은, 그 뒤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는 피를 내요. 그러니까 무조건 피 안 내는 것이 아니고, 소고기 잡으려다 피 냅니다. 의로운,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흘린 피는 내가 용서하지 않고 무지개 철수하겠다. 은혜를 철수하겠다. 그러면 의로운 피가 누구였습니까? 결국은 예수님이죠.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가 드러나니까.
예수님이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뭐가 철수한다? 인간 세계는 종말이다. 이 종말에서 구원받을 자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는데 있다면 누구의 일방적인 선택이겠어요? 바로 묵시되시는, 인자되신 분이 다 저주받아야 되는데 “너 긍휼이 여겨줄게. 너는 용서해줄게.”라고 사건의 필이 꽂힐 때 그 꽂힌 사람은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성경해석이라든지, 역사적인 말씀순종, 자기 의 모든 것은 다 무로 돌리고, 오직 無 위에 뭐만 남긴다? 예수님의 용서했던 정보, 예수님의 사랑의 정보만 묻히면 그 사람은 구원받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방금 뭐했습니까? 무죠. 무로 돌리는 단어가 뭐냐? 7이레.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거예요. 그럼 그걸 제가 설명해보겠습니다. 둘째 시간이 어려우면 녹음됐기 때문에 되풀이해서 보면 됩니다. 한꺼번에 다 아시려면 힘드니까.
창세기 1장과 2장에 보면, 1장에 창조를 며칠 만에 하죠? 6일입니까, 7일입니까? 분명히 내가 알기는 창조는 7일 만에 한 걸로 돼있어요. 그런데 창세기 1장에 보면, 창조를 며칠 만에 끝내버립니까? 분명히 6일 만에 끝내죠. 만약에 6일 만에 끝내버리면, 이 창조의 의미는 역사에 그대로 남아있어요. 의미, 의미. 내용과 표현. 만약에 6일 만에 하면 뭐만 있어요? 내용만 있지요. 왜 창조했는가? 표현은 어디서 결정합니까? 7일 날 위에 올라가야 돼요. 올라가면 여기에 ‘안식일’이 나오죠.
안식일이 위로, 위층으로 올라가버리면 이 지상에 있는 일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안식의 표현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게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아직까지 안식의 때가 남아있다. 믿으라. 뭘 믿어라? 묵시를 믿어라. 모든 것은 완성된 상태에 이른다. 그러면 “보기에 좋았더라” 완성되었다는 말은, 이 안식이라는 표현 밑에서 내용 층에서 완성된 거죠.
그런데 이 표현 층만 떼어버리면 이 밑에는 자체적으로 완성됐어요, 안 됐습니까? 완성이 안 됐지요. 왜 안 됐느냐? 여기는 선악과 따먹는 죄도 있고, 에덴동산에 누가 들어오고? 뱀 있고, 뱀 안에 마귀가 들어와서 후작질을 해놓고, 저주받고. 아담이 부름 받고, 에서는 야곱하고 서로 싸우고.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고 성전 깨지고. 온갖 긴긴 역사가 이 안에 다 들어 있잖아요. 예수 믿는다 해놓고 나중에 배반해버리고 온갖 것이 있단 말이죠.
온갖 것이 있더라도 이 자체는 죄니까 죄는 그냥 가만있죠. 죄는 그 자체로 의미를 끄집어내요. 주여,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네가 어때서? 제가 예수 믿는데 몸이 아프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 욥 같은 경우에, 하나님, 제가 왜 제 아들 죽였습니까? 그게 뭐 어때서? 제 재산들 왜 날아갑니까? 그게 뭐 어때서? 왜 저한테 고난을 줍니까? 그게 뭐 어때서? 그때 표현 되서 날아오죠. 너,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그것도 모르면서.
그러니까 하늘나라 의미에서 의미 층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인간은 누구 중심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자기 역사중심의 의미를 계속 고수하면서 “주여, 못 살겠습니다. 괴롭습니다. 응답해주옵소서.” “무슨 응답인데?” “제가 괴롭습니다.” “그래, 죄인을 구하러 왔다.” “구원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하니 그 말을 뭐로 잡아당깁니까? 나는 죽어도 사는구나. 또 일방적으로 자기 의미로 받아들여요. 이게 오늘날 교회 형편입니다. 역사의 형편이고.
목이 아파서 못 하겠다. 그래도 계속 해야 되죠. 안식의 때가 남아있으니까.
창세기 2장부터 이미 이 세상은 7일의 반복이 아닙니다. 그건 유대인들이 반복했고. 위에서의 반복인데 안식일에서 뭐가 반복이냐? 사건의 반복, 위층과 아래층 차이의 반복, 십자가의 반복, 묵시적 사건의 반복이 지상에 퍽퍽 터지네요. 애굽에 잡혀갔다가 홍해에서 터지는 사건, 홍해 터지다가 천당인 줄 알았더니만 광야에 고생하는 사건들. 계속 사건 주면서 자꾸 무슨 정보? 하늘에 있는 안식의 정보를 주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 창조할 때 왜 안식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기 때문에 안식을 했거든요. 그러면 사람 만드는 것은 창조의 대상이 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의 대상입니까, 주체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의 주체 아닙니까. 주체가 인간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이 뭘 한다? 나머지 창세기 3장 15절 이후에 모든 인류역사를 누가 주관해요?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이 주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정보는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의 정보죠. 그러니까 천국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나라였죠. 그 정보 안에 아버지께 바칠 그것도 포함돼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몸 위주에요. 그러니까 ‘성자보다 성부가 오야봉이잖아.’라는 말을 우리 입장에서 할 수 있다, 없다? 우리 입장에서는 못 하는 겁니다. 다만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지는 거예요. 아버지가 나라를 바칠 거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은 죄 용서하는 전문가고, 이제 비켜. 난 십자가에 머물지 않겠어. 이제 십자가 이후에 진짜 하나님 섬길 거야. 그건 뭐냐 하면, 섬기려 하니까 또 죄 짓잖아요.
그때 “리델보스님, 우리가 구원 받았는데 성령 받았는데 또 죄를 지었어요. 우리는 구원받습니까?” 하고 자기 몸 주장하니까 리델보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미와 아직’이다. 정신 바짝 차려. 긴장관계야.” “알았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앞으로 점점 더 성화돼야지.” 그래서나온 게 성화론이라. 미치는 거라.
그러면 성화됐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까 성화 5단계, 6단계 막 올라가는데 7단계에서 1단계 죄가 또 나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건 크게 회개해야지. 한꺼번에 회개하려면 돈 좀 들걸. 봉사 많이. 이건 자기 진화론 아닙니까. 그건 뭡니까? 그 의미는 자기가 구원받는 자기 일방적인 자기 의미고, 자기 역사에요.
그러니 이거는 교회 내에 경쟁이 발생해요. 누가누가 잘하나? 금요일 오후 네 시에 KBS1에서 노래 자랑하는 거고. 세상에 날마다 죄인인데 누가누가 잘하나가 어디 있습니까? 그거는 자기 자체적으로 자기 내용과 표현을 자기만의 표현을 또 시도한 거예요.
그렇다면 목사님, 이런 신학에서 어떻게 해서 이런 묵시적 의미를 우리 의미로 당겨놓을 수 있습니까? 이 묵시가, 인자 같은 이가 인자가 돼야 돼요. 그러면 모든 총괄적인 의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그 시점을 종말, 같은 말로 마지막 때. 그러면 다니엘 때 마지막 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건 우상으로, 금신상으로 돼있는데 금신상이 자빠졌거든요.
꽈당하고 자빠지니까 머리는 이렇게 있고, 발. 엎어지니까 발 지점이 종말지점이에요. 끝 지점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여기에 우상을 덮은 게 이만한 돌멩이 하나 왔거든요. 돌멩이가 커서 뭐로 덮는다? 태산이 되서 이걸 덮었지요. 그럼 아래층은 역사 층이고, 위층은 인자 층. 태산 층. 태산은 중국에 있는 산인데 성경에 태산을 이루리라 하니까. 이게 묵시 층이죠.
그러면 다니엘이 보는 계시가 뭐예요? 세상은 틈이 있다, 틈이 없다? 질문하는 내가 나쁩니다. 지금 바벨론 제국과 하늘나라에 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직선으로 보면. 이거는 바벨론 멸망이 BC500년 경, 예수님 오신 때가 AD1년. 몇 년 차이입니까? 500년 차이 있잖아요. 위로 보니까 틈이 차이가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없으니까 지혜가 이때 오잖아요. 사건으로.
그럼 우리는 들어가기는 이렇게 들어가는 게 아니고 어떻게 들어가요? 이렇게 발로해서 이렇게 들어가죠. 이렇게 들어가려니까 우리의 수명은 너무나 짧지요. 그래서 바로 들어가면 돼요. 바로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수명이 칠십이든, 팔십이든, 어떻게 되든 우리가 돌려서 못 들어가죠. 오래 살아야 되니까.
그때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이걸 몽땅 이삿짐 챙기듯 우리 몸을 묵시의 몸으로 예수님의 정보를 담을 우리를 껍데기 삼아서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묵시의 의미로 인하여 우리는 날마다 죄인이고 주님은 날마다 용서하시는 분으로서 우리 안에 있는 것, 그게 바로 예수님의 말하는 예수님의 인자의 통치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090829b 대구특강.hwp (53.0K), Down: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