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090829a 대구특강-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a
[녹취]20090829a 대구특강-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a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829a 대구특강-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a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최일규 집사님께서 저한테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이 책인데요. 헤르만 보스의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이 두꺼운 책에 대해서 평을 해 달라. 그 의도가 뭐냐 하면,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혁주의신학의 하나의 교과서 같은 책이니까 이 책에서 한국교회 가운데서도 간증 이런 것 말고 공부를 좀 해서 한국교회를 개혁해보겠다고 하시는 분들의 그 모든 사상이 이 책에서 기초했기 때문에 리델보스가 과연 복음적이냐 하는 것을 검토해달라는 부탁으로 제가 배정받은 게 세 시간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보면서 이 책에 대해서 굉장히 간략하게 제가 쓴 이 글 관주에다 주를 달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화란의 개혁주의신학의 한계는 하나님나라, 천국이죠. 천국을 뭐로 보느냐 하면, 인간의 몸에 입각해서 천국을 쳐다보는 이런 식으로 천국을 구성을 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실제로 성경 내용을 보면, ‘인간의 몸’을 배제해버리고 천국은 ‘예수님의 몸’을 가지고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몸이나, 우리 인간의 몸이나 다같이 살로 돼있고, 피로 돼있고, 아담의 몸으로 돼있는데 이게 뭐가 차이 나느냐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이 예수님의 몸에는 의가 담겨있고, 인간의 몸은 죄가 나온다 말이에요. 죄에서 나오는 시선을 가지고 천국을 보게 되면, 이 천국은 예수님 중심의 천국이 아니고 현재 있는 우리 몸을 구원하기 위한, 이 몸을 영원히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복락을 누릴 수 있는 무슨 나라 되느냐 하면, 놀랍게도 이게 인간의 나라가 돼요. 유토피아라 하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전부, 내가 그리워 할 수 있는, 아픈 몸을 보상 받을 수 있는, 내 몸을 영원히 맡길 수 있는 최고의 나라, 내가 그리던 에덴동산보다 더 월등한 최고의 나라, 인간의 나라가 돼요.
그럼 인간의 나라는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의 긍극적인 도달점입니다. 긍극적인 도착 지점이란 말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진리라 하는 것은 산과 같아서 최고 지점에 진리가 있다면, 거기에 나아가는 길은 꼭 기독교를 우길 필요 없고, 기독교든, 불교가 됐든, 이슬람교가 됐든, 심지어 종교가 없던 간에 사람이 순수한 경지에 이르면 모든 감각을 뛰어넘는.
켄 윌버란 사람이 이런 사상을 하죠. 유명한 사람이죠. 모든 사상을 뛰어넘는 그 긍극적인 상태에 거하면 모든 사람이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된다. 길은 여럿이지만 도착지점은 오직 한 곳이다. 산 위니까. 남쪽 등정, 북쪽 등정해도 하나의 진리다.
그렇다면 개혁주의신학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상을 반대를 하거든요. 반대를 하면 반대를 하는 근거가 있어야 돼요. ‘나는 이러이러해서 나는 이러한 범인류적인 종교적인 그런 것을 반대한다. 그럼 그 근거가 뭐냐? 왜 기독교만이 천국에 가고, 나머지는 천국에 못 가는 그 근거가 뭐냐?’라고 했을 때 과연 리델보스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해명하고, 어떻게 제대로 반박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 근거를 찾는 식으로 제가 훑어봤거든요.
이쪽에서 켄 윌버나 일반불교나 천주교 쪽에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신의 자비의 작품인데 비록 그것이 예수를 모르고, 기독교 복음을 안 듣고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했을 때 과연 하나님이 자기가 만들어놓고 지옥 불에 보내겠는가? 그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매몰차게 일을 하시겠는가? 그럴 건 아니다. 모든 인간이라면 거기에 보편적인 하나님의 자비가 있을 것이고, 그 자비에 근거해서 그들은 영원한 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 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 사상이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느냐를 봤다 이 말이죠.
봤는데 만약에 개혁주의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기독교 성경을 몰라서 그렇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너희들은 모든 인류도 구원된다고 이렇게 개혁주의가 반박한다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탐구하면 구원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논리가 되거든요.
사람이 있는데 이쪽 사람은 불교 집안이라서 성경에 대해서 잘 봤다 하고, A란 사람은 불교 집안이고, B란 사람은 기독교 집안인데. 그럼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유아세례 받고 했다고 해서 과연 성경을 많이 알아서 그 만큼 진리에 가깝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NO라고 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구약 성경의 전문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참 장난도 심해요. 세상에 누구 보다고 어릴 때부터 외우다시피하고 구약성경을 다 꿰뚫어 보는 그런 사람의 손에 의해서 메시아를 죽게 했지요. 그렇잖아요. 그리고 하여튼 구약성경은커녕 십계명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임하니까 의인됐죠.
그러면 성령이 임하니까 이런 구약성경을 몰라도, 몰라도가 아니라 아예 구약성경에 정통하고 하나님만을 위하여 모든 걸 헌신한 사람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의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결정짓는 그 기준을 가져야줘야 제대로 천국에 대해서 명확하게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최일규 집사님이 소개했던 개혁주의신학, 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 이 책에 보면, 성경을 깊이 알라는 말은 있지,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야 된다는 말은 여기 가득하지만 왜 신약성경을 달달 외워도 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이 책에서 이야기 안 해놓는 거예요.
이걸 몰라도 성령이 임하면 구원되는 이유에 대해서 이 책에서 이야기 안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걸 이야기해버리면 개혁주의를 가르친다는 자체가 의미가 있다, 없다?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개혁주의, 목사의 존재자체가 소위 목사가 교인들 가르치는 자체가 의미가 없잖아요. 안 가르쳐도 성령 오니까 구원받고, 가르쳐도 가르친 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한다면 그럼 목사가 교인을 가르친 그 자체가 의미가 없단 말이죠.
적어도 복음을 알면, 목사의 가르침도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증거를 해줘야, 고백을 해줘야 그 다음 진도가 나갈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무엇이냐? 여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마저 안 된다면, ‘인간의 불가능한 그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인간의 모든 손을 배제하고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쓴 것이 바로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이 글을 쓴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주어진 세 시간 동안 이것도 이야기해야 되고, 리델보스 이것도 이야기해야 되고, 다니엘 이것도 이야기해야 되고 무슨 재주로 이걸 다 설명하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핵심 되는 것은 건드리면서 속도를 박차를 가해서 하여튼 세 시간 만에 해봅시다. 이것 건드리고, 이것 건드리고, 다 건드리면서 아까 이야기한 이러한 개혁주의신학의 한계를 해봅시다. 이 책이 없기 때문에 저한테만 최일규 집사님이 줬기 때문에 이 책에 있는 내용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가끔.
280페이지. [죄 사함이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약속인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앞으로 알려질 것이 이제는 전달되는 지식, 그리하여 이제는 이러한 의미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경험하는 지식을 의미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죄 사함이란, 리델보스가 죄 사함이 뭔지는 예수님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리델보스가 죄 사함을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그 말 들으면 복음을 아는 사람과 동의가 되지요. 그렇지. 인간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자기 죄 사함이 뭔지 모르지.
그런데 여기서 리델보스가 죄 사함을 둘로 나눕니다. ‘죄’는 아는데 ‘사함’을 모른다는 거예요. 저는 말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죄는 아는데’가 아닙니다. 죄가 뭔지도 몰랐었어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죄가 뭔지를 모른다면 죄 사함, 용서함도 모르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를 대봐라 하신다면, 그 근거는 간단하게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있고, 예수님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서 쏘아대는 어떤 편견, 선입견, 가다머의 이론대로 선 이해, 이런 것으로 예수님을 파악해서 예수님을 코끼리 더듬듯이 더듬어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니까, 우리가 우리한데 보고해요.
“어이, self야. 예수님이 어떤데? 예수님이 들어보니까 이런 분이었더라.” 셀프가 셀프한테 자신이 자기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이, 우리는 이 분 믿기로 하자.” 믿습니다하고 나가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일상적인 소위 교회에서 믿는다는 것이 이 형태에요. 아무리 복잡하게 이야기해도 이것뿐입니다.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 들어오게 되면 두뇌에서 종합을 해요. 자아와 자기가 서로 의논을 해요. 믿을까? 한 이 년 뒤에. 지금 믿을까? 아니 죽을 때쯤 믿자. 지금 믿으려고 하니까 벌여놓은 사업이 있어서 교회 가기가 귀찮으니까 죽을 때쯤 되서 믿어 천당 가자. 아니야. 미리 믿어야 돼. 그래? 그럼 미리 믿자. 내부에서 의논 조절, 조율이 일어나요. 그래서 믿어버리면 이것이 전형적인 바리새인들의 종교라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성경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여러분 다 아시지만 살아계셔요.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장악한다 이 말이죠. 마치 레슬러가 강호동가 나보다 힘이 세서 제 목을 조르면서 “믿을래, 안 믿을래, 이 놈아” 하고 목조를 때, 믿습니다. 실제로 살아계신 분이 실제로 나를 다룰 때 그때만 믿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대전에서 그런 강의했습니다만. 나는 나 홀로 있지 않음을 정말 바보, 등신 같이 남에게 알려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렇다고 신학을 해서, 신학교 졸업해서 남한테 신학은 이렇고, 개혁주의신학은 이렇다고 이걸 시킨 것이 아니고, 켁켁 하면서 알겠습니다. “주님 살아계시거든요.”라고 자기가 직접 만났던 주님을 직접 증거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실존적 문제라니까. 목쉰다. 내일 걱정되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데 바리새인은 신학과 함께 있거든요. 더 나아가서 악마와 함께 있는데. 신학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내 안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분이 자기와 함께 있는 아버지를 이야기하니까 바리새인은 악마가 있죠. 아버지도 없고 성령도 없고 그런 인간이니까 예수님의 말을 들어도 도무지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열두 제자들도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끔가다가 성령의 능력, 주님의 자기의 세력을 약간 나눠주니까 나눠주는 그때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라고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자기에게서 나간 권세지요. “네가 알게 된 것은 혈육이 아니고 내 아버지가 알게 했다.”라고 했는데
그 다음에 베드로가 그걸 그 신앙을 자기 소유화했습니다. ‘나는 반석이 되리라.’ 해놓고 자기 몸으로 예수님 말 들어보니까 또 예수님을 해석하는 거예요. “인자가 고난을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하니까 베드로의 셀프가 하는 말이,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방금 괜찮은 고백을 했잖아요. 괜찮은 고백은 우리 소유가 될 수 있다, 없다? 예수님께서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믿음을 줬기 때문에 예수님 쪽에서 이제는 우리에게 건너왔다는 인식, 그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줬으면 도리어 반대로 이제는 우리가 예수를 배반하고 배신하고 예수를 모독한다 할지라도 그것도 누구 안에서 이뤄지느냐 하면, 우리 자신을 떠나지 않는 주님의 손아귀에서 손 안에서 작용 받는 그런 현상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배신하고 제자들이 떠날 때 나중에 와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내가 그렇게 예수를 배신한 것도 주께서 나로 하여금 반석 되게 한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 글의 핵심이에요. 읽어본 사람은 이 글의 핵심을 잡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이 글의 핵심을 여러분들이 알기 쉬운 말로 해볼 테니까 적은 것 보시고 이해 안 되시면 곤란합니다.
[인연이란 상황 끝(종결)에 와서 말해야 된다.] 인연이란 말은 기독교 용어로 예정. 종결이란 말 대신에 제가 글에서 한 것은 바로 종말. 예정이란 말은 여기서 묵시. 그 다음에 상황 전에 있던 모든 것을 역사 또는 다른 말로 나의 인생. ‘우리의 만남은 인연이었어.’라는 말은 건방진 말이죠. 왜냐하면 아직도 역사 있으니까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나중에 헤어지기 때문에. 나중에 헤어지면 소용없어요.
마지막에 이야기 할 것은 결국은 마지막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은 역사가 안다, 모른다? 역사는 모른다. 역사는 누구 구성합니까? 역사는 내 위주로 구성하잖아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마지막에 일어나는 일을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르는데 그것을 모든 역사의 끝을 미리 다 가져오신 분이 오신다면, 그분은 해답을 갖고 있겠지요. 그분을 묵시적 존재라 하고, 그분을 이 글에서는 뭐냐? 인자라고 이야기했고, 예수님은 자기를 표현할 때 자꾸 인자라고 한 거예요. 인자가 구름타고 올 것이다. 그 말은 ‘너희들은 구름 타봤어?’ 이런 뜻이거든요. 그리고 뒤에 나오는 게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라.
이것은 무엇을 의도하느냐 하면,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구원을 위한 모든 시도를 이미 바리새인이 갖고 있는데 그걸 한 마디로 말하면 전부다 역사적이에요. 그런데 역사적이 되려면 항상 그 역사의 중심은 내 몸이 역사가 돼야 돼요. 왜냐하면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만약에 열 사람이 있다면, 역사는 몇 개 나오겠습니까? 열 개 나오죠.
집에 애 한 세 살, 네 살. 만약에 강이 몇 살이죠? 강이가 만약에 열 살인데 숙제를 하면서 이런 소리 했다 합시다. “참 인생 고롭네. 참 인생 살기 힘들다.” 그 말이 누구한테 감동되느냐 하면, 다섯 살 먹은 동생 있다면 감동 먹는 거예요. “오빠. 인생 제대로 사는구나.” 이렇게 할 거예요.
그런데 팔십 넘은 할머니 계시면 귀싸대기 맞죠. 네가 열 살 살아놓고 인생을 아느냐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강이는 십 년 살아놓고 왜 인생은 고롭다는 임시적인 역사를 제공하는 겁니까? 리델보스가 천국을 이야기할 때 임시적 천국이라 했거든요. 한시적인 것.
왜 인생을 십 년 살아놓고 인생은 고롭다고 열 살짜리 애가 그런 이야기합니까? 그거는 누가 옆 사람이, 할아버지가 팔십 년, 구십 년 있어도 그거는 누구 체험이 아니다? 나의 체험이 아니에요. 내 역사는, 내가 내 체험을 이뤄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뭐냐 하면, 강이한테는 계시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열 살 먹은 아이는 자기 몸을 중심해서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이 신의 계시가 돼요.
그러면 외부에 신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신에서 쏟아지는 그 모든 사건들이 자기 열 살 먹은 애를 힘들게 했단 말이죠. 그러면 걔는 하나님을 볼 때 뭡니까? 나를 힘들게 한 하나님. 내 위주의 구원 같으면, 그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뭘 기대하겠어요? 나는 십 년 동안 힘들게 살았지만 그 좋으신 하나님이 언젠가 힘든 것을 보상해주리라. 이럴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이 이야기한 천국이에요.
조금만 참자. 로마제국에서. 로마 압제에서 조금만 참자. 왜? 다니엘이 있잖아. 에스겔이 있잖아. 스가랴 있잖아. 우리가 그 말씀을 믿나? 믿자. 파이팅. 그들은 구약의 도사였습니다. 구약에 빠싹했습니다. 모르는 게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가는 사람과 똑같아요. 이렇게 힘들지만 언젠가 보상 주리라. 믿자.
그런데 그들이 잘못됐다는 것은 어디와 마주침에서, 현대철학에서 ‘마주침’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들이 누구하고 마주쳤습니까? 예수님하고 마주쳤지요. 그 마주침을 이걸 ‘타자’라 합니다. 타인. 라캉이라든지 들뢰즈, 알렝 바디유, 레비나스 전부다 지금 관심사가 뭐냐 하면, 돌발 사태를 가져오는 낯선 타자.
그럼 왜 그러냐 하면, 그전까지는 주체가, 내가, 자아가, 나는 무엇을 원하느냐? 여기 있다면 이래서는 사회 꼴이 삭막해서 못 사니까 서로서로 종교의 벽을 넘어서, 사상의 벽을 넘어서 이제는 내가 남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 당하면서 살 때 우리는 성경에서 이야기한,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이야기한 화해, 앞에다 붙인다면, 모든 것들과의 화해, 참 오늘 좋은 말 나온다.
십자가의 의미, 화목제물의 의미를 성경에 나오는 의미, 희년의 의미는 뭐냐 하면, 모든 것들과의 화해. 천주교에서 이야기하는 용어에 뭐가 있습니까? 이 집에 오는 사람마다 평화. 모든 것들과의 평화.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손에 손잡고, 위아더월드. 주사 맞아 죽었던 마이클 잭슨 이야기. 우리는 모두 하나다. 이것을 시도한 사람이 다니엘에 나오는데 유명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의 신전에 만드는 겁니다.
역사의 특징은 뭐냐? 하나로 소급된다는데 있습니다. 그건 왜냐? 바벨탑이 엎어지면 백날 엎어져도 바벨탑은 인간의 힘으로 그 속성이 어디 갑니까? 하나로 나아가게 돼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면, 모든 사상이 하나로. 모든 사상이 하나가 되려면 그 사상을 실어주는 도구인 언어가 하나로. 그래서 언어를 깨는 것은 사상을 깨는 것이고, 사상은 흩어지겠지만 결국 그들은 한 사상으로 모이게 됩니다.
한 사상으로 모이려면 첫째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 나옵니다. 주의하세요. 사상이 하나가 되려면 하나의 인물과 이 밑의 다수의 인물 가운데 ‘공통성’이 있어야 돼요. 그 공통성은 어디서 만들어내느냐 하면, 여럿에서 공통점을 모아모아서 그걸 뽑아서 위에 세우면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쏘아 올렸던 희망의 탑, 비전의 탑 그 탑과 그 밑에 있는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이상은 흩어지지 않는 모두가 위아더월드, 제대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상적인 하나. 그래서 종교의 벽을 헐고 모든 것들의 화해를 이 시대가 주장하는 겁니다.
그전 시대는 뭐냐? 경쟁시대였어요. 서양의 대포와 무기로써 뭘 점령합니까? 동양을 점령하지요. 서양과 동양에서 서양이 뛰어납니다. 서양, 유럽의 열강들은 누가 뛰어나느냐 하는 거예요. 거기에는 모두가 하나가 아니라 그때는 우리가 독보적으로 자기 자신의 발달을 추구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자본주의시대에 지쳐서, 전쟁에서 지쳐서 이제는 모두가 하나가 되는데 하나의 사상 속에 전부다 굴복시키는
이것을 저는 역사적 종착점이다, 역사적 목적이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되는 역사적 목적을 갖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한 사고방식이 학생들 교과서에 박혀 있을 때 모든 인간 속에는 결국 하나가 돼야 된다. 이웃과 하나가 돼야 된다는 사상이기 때문에 경쟁에 지친 사람은, 이 현실이 결국은 하나가 된다는 그런 묵시적인 것을 끌어낼 수 있는 겁니다.
바로 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에서 리델보스는 교회와 천국을 나누고 있어요. 바실레이아하고 교회, 이걸 이 책에서는 분명히 나누고 있어요. 천국은 뭐냐? “어이, 리델보스 목사님. 당신이 두꺼운 책을 썼는데 한 마디로 이야기해주세요. 천국이 뭡니까?” 물으면 리델보스가 이야기하기를 ‘하나님의 통치’라 합니다. “그러면 교회와 천국의 차이점이 뭡니까?” 물으면 통치 가운데서 거기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 백성으로 부른 사람들 집합을 교회라고 하거든요.
그걸 선교단체나 일반 개혁주의신학을 한 사람들은 이 두꺼운 책에서 달랑 그걸 쏙 뽑아내죠. 뽑아내서 자기가 갖고 있던 역사적인 욕구, 자기 몸 중심의, 지금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감이 안 돼.
다시 이야기할게요. 역사가 어디서 나온다 했어요? 자기 몸에서 나오죠. 자기 몸은 뭘 담습니까? 자기 체험의 뭉치 아닙니다. 내가 체험한 것이 자기의 몸을 이루고, 그것이 자아를 이루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역사가 나오면 일방적인 역사죠.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다르죠. 다 다르던 말든 간에 우리는 언젠가는 하나가 되잖아요. 그 하나가 되는 걸 그들은 리델보스에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 그걸 천국이라 본다 이 말입니다.
저는 그걸 뭐라고 비판했습니까? 하나님나라가 아니고 인간나라에요. 본성적으로 원했던 인간나라라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이 멱살 쥐고, “이근호 당신이 말하는 천국이 뭐냐? 한 마디로 요약해봐.” 저는 ‘예수님의 나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리델보스는 하나님나라라는 거예요. 야, 이거. 오늘 강의 끝났네.
제가 만약에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라고 한다면, 리델보스나 리델보스의 계열에 선 사람은 딱 두 가지 가지고 반박을 할 거예요. 첫째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자라 했으니까, 당신 말대로 예수님의 나라는 중간기착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임시적인 나라고, 최종 나라는 아버지께 때라 해서 아버지께 바치니까 우리는 마지막 아버지 통치라 하면, 당신이 말한 예수님의 나라는 이미 포함된 거니까 거기서 머물지 말고 더 나가야지.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더 나가야지. 그 이야기 많이 안 들었습니까?
또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세상은 너희는 사도는 예수의 것이요, 예수의 것은 아버지의 것이고 모든 게 아버지” 이렇게 돼있지요. 그러니까 예수의 나라가 맞는데 그거는 중간지점이고 더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아니거든요. 왜 아니냐 하면, 중요하니까 적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정보가 들어있지 아니하면 천국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보에요. 천국은. 그런데 리델보스와 한국교회 개혁주의자들은 뭘 주장하느냐 하면, 정보를 주장하는 게 아니고 정보를 담고 있는 틀을 예수님이 결국은 아버지한테 바치니까 결국은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냐고 주장하는 거예요. 지금 제일 어려운 대목에 와 있는데
예수님의 정보가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서 나왔잖아요. 우리 몸은 이렇게 있지요.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리델보스나 개혁주의에서는 현재 자신의 몸을 유지한 채 예수님의 정보를 받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가 자기 몸을 유지해버리면 아무리 예수님 정보라고 와도 일단 나한테 오면 누구 정보로 변환됩니까? 내 몸이 살아있으니까 내 정보가 되죠. 나의 정보가 섞여있어요, 안 섞여있어요? 나의 기대, 나의 희망이 섞이죠.
그럼 나의 정보가 그대로 예수님 말씀대로 아버지께 바칠 자라 했으니까 나의 정보가 섞인 채 예수님의 아버지 나라가 이해가 된다는 말은, 이 가운데서 내 정보가 포함된 이 천국은 결국은 천국이겠습니까, 나의 나라겠습니까? 결국은 내 나라잖아요. 그러면 천국이 온전히 예수님의 정보가 되고, 나의 정보가 없애지려면 나는 뭐가 돼야 됩니까? 나는 죄인이 되고, 나는 죽어야 되고, 심판받아야 되고, 부정당해야 돼요. 부정당해야 비로소 면류관을 예수님께 바치고 예수님의 정보만 될 것 아니냐 말이죠. 그렇잖아요.
목쉬어도 할 수 없다. 내일 설교 못해도 할 수 없다. 지금 예수님의 순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 말씀은 이겁니다. 예수님의 몸, ①. 그 다음에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정보, ②. 그 정보에 의하면 나는 이 모든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 ③이 되잖아요. 예수님의 이 노선에 우리가 여기 있으면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건 답변해보세요. 제가 없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왜 없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죄인이다, 아니다 조차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니까 우리가 졸지에 뭡니까? 죄인이죠. 그럼 죄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예수님이 어떤 이야기하고, 성경이 어떤 이야기해도 이미 내 몸이 있는 이상은 그게 뭐로 변한다? 전부다 내 몸 위주의 거짓말로 뒤바뀌어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죄인이란 뜻 아닙니까.
그렇다면 ①, ②, ③. 예수님의 몸에서 예수님의 정보를 담고 그래서 천국을 이룬다는 이 노선에서 우리 몸은 철저하게 배제돼야 되죠. 그 철수의 내용 가운데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의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는 내용도 우리 몸에 같이 철수 당해야죠. 배제당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거 이해 안 되면 강의 못한다.
“목사님, 그래 나오면 배제했다 치고 믿으면 안 됩니까?” 그건 안 돼요. 배제했다 치고 믿으면 ‘주님이여, 배제했습니다.’하는 그 몸은 또 누구 몸이에요? 그것도 지 몸 아닙니까. ‘나는 자기를 부인한다.’라고 여기는 자아는 뭐예요? 에고, 에고, 셀프 아닙니까. 이차적으로 돌입된 셀프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조차도 나는 붕괴했다. 나는 부셨다. 그럼 두 번 부순 자아는 또 뭐예요? 신종 자아 아닙니까. 그게 뭘 이룬다? 내 몸이 있는 이상 나의 신앙의 경력, 다른 말로 역사를 이루잖아요. 뭐 반응이 있어야
-목사님. 하나님나라, 개혁주의가 진화론하고도 연결이 되죠?
당연하지요, 당연하지요. 역사는 종착점 없는 중간 역사는 없어요. 날마다 개혁되어야 된다. 그게 뭡니까? 진화론 아닙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래서 그들은 미완료, 만날 이미, 아직 하고 있다고요.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몸만이 천국에 이루고, 우리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으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진짜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살아서 우리의 목조를 때 그때뿐입니다. 이걸 지식으로 알려고 한 사람은 지식 알았던 내가 또 살아나기 때문에 소용없는 거예요.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이 공부 적게 해서 예수 핍박한 게 아닙니다. 공부 많이 했어요. 율법으론 흠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에요. 완벽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압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묵시문학도 다 들어있어요. 도사입니다. 그 사람. 하지만 백날 그 소리해도 직접 와서 “사울, 이리 와. 이 무식한 놈. 너 죄인 맞지.” 하고 땅에다 패대기를 칠 때 그때 뭐냐? 지식이 떨어진 게 아니고 내 몸에 문제 있다. 몸 자체가.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에게 성령이 오니까 뭐라 합니까? 머리 긁적긁적하면서, “주님 살아계셨군요.” 난 유대교가 뭐고, 구약이 뭐고 공부하려고 했더니만 예수님이 죽었다고 사흘 만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예요. 신학이고 목사고 나발이고 관계없이. 나와 관계했다는 것. 그걸 어떻게 신학적으로 틀을 잡습니까? 틀을 못 잡죠.
그러면 리델보스, 개혁주의 측에서 뭐라 합니까? “이 목사, 그건 우리 기본적으로 아는 거고. 그거는 믿음의 신앙의 토대에 불과한 것 아닌가? 우리가 믿으니까 하지.” 이렇게 하거든요. 리델보스도 자기 예수 믿는다 할 거예요. 이만큼 지어놨으니까.
예수님이 직접 관여해서 하게 되면 이렇게 리델보스처럼 천국을 인간의 몸의 시간으로 납득하고 시간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뭐만 표현되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천국을 어떻게 만들어놨는가? 그리스도의 몸과 천국이야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는 우리는 빠져줘야 돼요. 그게 바로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 해석] 이거에요.
우리는 빠져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안 빠지고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이해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믿어집니다. 한 게 이 두꺼운 책이에요. 보니까 성경구절로 도배를 해놨어요. 그러니까 이걸 사람들이 비판을 못한다고. 왜? 성경 고대로 했으니까. 그리고 성경구절을 합법적으로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적어놨으니까 이걸 누가 비판해요. 할 수가 없죠. 그래, 맞아. 천국은 이미 이루었구나. 아, 그런데 임시적이라고? 아, 그것도 일리가 있구나. 왜? 이런 성경에. 예수님 성경 가운데서. 오늘 침착 하려고 다짐을 했는데 또 안 돼.
이렇습니다. 간단해요. 예수님께서 하신 천국의 말씀을 모아보면 총 이만큼 된다면, 이걸 뽑아내는 거예요. 임시적인 천국, 그 다음에 현재 이루어진 천국,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 이렇게 분류시킨 책이 이 두꺼운 책의 내용이 이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임시적인 것은 임시적으로만 분류해놓고, 현재적인 천국은 현재적인 천국으로 뽑아냈고, 미래에 아직도 남아있는 천국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리델보스는 말하기를 어이, 내가 이 책에서 잘못한 것 있으면 찾아내봐라. 성경 고대로인데. 주님이 하라 한 대로 했고, 주님이 말씀한 대로 했는데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목사님들 가운데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 한둘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했는데 뭐가 잘못됐는데.
전에 대전에서 목사님과 같이 차타고 오면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겨자씨 비유가 어떻게 해석하면 온전한 해석이 됩니까?”라고 했을 때 겨자씨 비유를 어떤 용어나 다른 어휘력을 동원해서 아무리 옮겨 봐도 그리고 노력을 해놔도 정작 신학을 모르는 어떤 아주 연세 많은 할머니가 지금 만약에 구름타고 재림했을 때 똑똑하고 신학 많이 한 목사가 구원받을 줄 알았더니만 신학을 잘 모르는 할머니가 구원받았을 때 그걸 할머니보고 물어보잔 말이죠. 마침 예수님 재림해서 우리 구원받았다. 지금 폼은 완전히 천국 폼 아닙니까. 대추밭에 있어서. 생명나무라 여기고.
“할머니는 겨자씨 설교할 때 뭐 들으시고 이렇게 구원받았습니까? 제 설교가 괜찮았던 모양이죠?” 목사가 이렇게 착각해서 묻는 거예요. 할머니 말하기를 겨자씨 말씀이 이게 믿어지더라. 내가 이래서 믿는다가 아니라 믿는 설명을 하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이 그대로 믿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목사는 입 닫고 가야지요. 왜? 지가 한 게 없으니까.
성령께서 말씀으로 믿게 했는데 그 할머니 앞에서 열광하는 그 목사는 뭐라고 착각하느냐 하면, 전에 이 부분 이렇게 설교해서 여러 명 감동받았다는 자기 몸의 역사, 몸의 체험을 유지하면서 그걸 그대로 적용시키면 아마 효과 볼 거라는 자기 논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요.
막상 와보니까 나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신 걸 자기 열광적으로 설교할 때는 그 순간은 잊어버린 거죠. 의사 선생 수술할 때 주님이 수술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거죠. 교사가 가르칠 때 분필 쥐고, 수전증 걸리면 떨거든요. 주님이 수전증 안 걸리게 하시고 이렇게 건강하게 하신 것이 주님께서 힘 주셨다는 것을 잊어버려요.
언제 깨닫는가? 다시 십자가의 영이 오니까 “주여, 내가 이래서 나의 역사를 또 고수했군요.”라고 자기 역사에 대해서 회개할 때 바로 그 죄는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는 죄가 아니라 그야말로 성경 말씀대로 죄인을 용서한다는 예수님의 정보가 내 안에 잠재돼있음을 나로 하여금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날마다 심판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뭐가 있었다? 나의 역사적 정보는 날아가 버리고, 누구 정보가 임했다? 예수님의 몸에서 생긴 정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을 통해서 이미 여기에 냉장고 냉장실 안에 들어있었던 거예요. 들어 있다가 우리가 까불 때마다 부셔버리면,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을 십자가 통해서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럴 때 다른 사람에게 설명 못할 새로운 죄의 개념을 새롭게 아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 땅에 있는 자체가 바로 죄 때문에 있었구나. 몸이 있어 죄 짓는 게 아니고 죄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아직도 이 땅에 나는 태어났어야 했다. 죄 때문에 왜? ‘우리는 서로 인연이었다.’라는 말을 언제 한다 했어요? 마지막 끝에 이야기하죠.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은 그 말 자체가 뭐다? 모든 것이 끝났다. 끝났으니까 비로소 예수님의 정보가 우리 안에 우리의 허락 없이 들어와서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이 책에 있느냐? 있습니다. 있는데 제가 이렇게 설명해서 있어요. 그런 틀은 여기 많이 있거든요. 현재적 할 때 많이 있거든요. 이 사람은 그걸 있으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면 납득된다는 식으로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왜 설명해주느냐 하면, 우리들이 이미 되었다 까불지 말고, 아직 남아있는 천국도 있기 때문에 당신은 이미 된 것도 기뻐하고, 아직 남은 것도 있어서 너무 긴장을 풀지 말고, 그걸 현재 천국과 올 천국 간의 그게 무슨 관계? 신학교 때 다 배웠잖아요. 긴장관계에 있다고 ‘정신 차려라 이 놈아.’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여러분 정신 차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정신 차리면 죄를 안 짓게 돼요. 그게 문제라. 정신 줄 놓으세요. 정신 줄 놓으면 우리 몸이 정신을 만들어내요. 그게 이 논문에 나옵니다. 우리의 몸이 컨디션에 따라서 기분 좋을 때는 사랑이 나오고, 기분 나쁘면 미움이 나오고. 우린 정신 줄 놔도 매순간순간 우리 몸이 배탈 나면 컨디션 안 좋으면 안 좋듯이 계속해서 뭐가 나와요. 그 나오는 것이 현재 그 순간의 우리의 정신 줄이고, 영혼이라고 스스로 의미를 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 우리 몸에서 나온 또 죄의 흔적입니다.
보충해서 합시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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