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대구강의17(교회를넘어서)22-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9-1
05대구강의17(교회를넘어서)22-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9-1
이름 : 구득영(IP:203.223.97.173)
[05 대구강의 17] - 교회를 넘어서 22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9
05,10,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
오늘은 먼저 교재 234페이지에서 244페이지를 살펴보고 나서 다음 강의를 계속해서 진행하도록 하겠는데, 일단 교재 242페이지를 한번 살펴보자.
** 이와 같이 들여다보기만 해도, 또한 붙들기만 해도 저주를 받아서 죽었던 언약궤였지만(삼상 6:19, 대상 13:9-12), 이제는 인자가 되시는 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겔 3:17-18, 고전 16:22).
(삼상 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구약 때는 거룩의 실체가 따로 있었는데,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실체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분, 즉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함부로 예수님에 대해서 빈정거리고,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거부반응도 하고 싫어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저주를 받는고 하니, 어떤 특정한 노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든지, 혹은 특정 목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든지 말이다. 그러니 저주의 기준이 너무나 명확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저주를 받는 대목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의 첩과 간통을 하면 저주를 받는가? 저주가 아니라 그냥 죽인다는 것이다. 또한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자기 죄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떡을 떼든지 하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죽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저주를 받은 것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아프거나 죽는 것이지 말이다.
◈ '십자가' 라는 현실감 앞에 서면 !!
그러니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거룩 외에는 그 어떤 거룩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지금의 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 외에 다른 거룩은 없고, 다른 현실도 없다는 말이다.
어제 설교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십자가 앞에서 현실을 제대로 알게 되면, 기존의 알고 있던 현실은 무너진다고 말이다. 즉 "'십자가' 라는 현실감 앞에 서면 기존의 모든 현실감은 다 무너진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허물허물해지고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 기존의 현실감은 '나' 라는 주체에서 !!
그런데 기존의 모든 현실감은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주체'에서 나오는데, 즉 '나' 라고 하는 주체를 보다 더 곤고이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현실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다 '나'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즉 '내'가 잘되고, '내'가 유익이 되고, '내'가 유명인사가 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 자리가 얼마나 안정되고, '나'의 목숨이 연장이 되느냐는 말이다. 여기 누가 뭐라고 해도 '나'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나' 라는 주체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오직 십자가 앞에 서야만 아이스크림처럼 !!
제가 이렇게 자꾸만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 앞에 서야만 바로 이러한 주체가 마치 초가 녹듯이 그렇게 녹아 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름에 아이스크림이 녹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주체라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주체는 조작된 것이고 허구인데 말이다. 그것을 구약적으로 설명을 하면 '텅 빈'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성소나 성전은 신이 없는 신전이었다. 즉 언제든지 하나님이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시 78:59,60). 이처럼 성전은 부재의 가능성을 함유한 성전이기에 이 성소나 성전이 세워져 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면제받을 입장에 놓여져 있지 않다.
(시 78:59)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시 78:60)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성소나 성전은 신이 없는 신전 !!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성전이 있으면, 그것으로 자기들은 영원하다고 여겼는데, 하지만 전혀 그것이 오해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오해의 이유가, 신약성경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성전과 더불어 자기 주체를, 즉 자기의 '있음'을 성전에 집어넣은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은 무엇인가?
그것이 교재 243페이지에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성소나 성전은 하늘나라의 가치 충만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집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 안에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게 되는 순간이야말로 성전의 존재 의의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게 되는데, 언젠가 하나님의 거룩한 손에 의해서 '지워 버림'을 당해야 될 때, 참으로 하나님이 영원히 계셔야 될 집이 따로 존재해왔음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 지워버림을 당한 성전을 대신해서 !!
이렇게 성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그렇다면 그 성전을 지은 주체는 도대체 자기가 무엇을 보기 위해서 그렇게 성전을 열심히 지었는지, 거기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거룩한 손에 의해서 아무 것도 없는 성전은 지워버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무 것도 없는 성전은 지워버림을 당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 대신에 바로 뭔가가 있는 성전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데, 스데반 집사가 바로 이 성전을 보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을 말이다.
◈ 스데반 - 예수님이 곧 성전이야 !!
그래서 사도행전 7장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라고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그러면 그 대안이 무엇인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라고 했을 때, 스데반은 "곧 한 분, 죽 의인이신 예수님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였다는 말이다.
(행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행 7: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왜냐하면, 성전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버리면, 그렇게 되면 인간들의 나름대로의 자기 행함이, 즉 자기가 주체적으로 행한 종교적인 행위, 즉 종교적 열심과 기도와 전도가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총체적인 것이 바로 '성전 짓기' 인데, 그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텅 빔' 이라는 성전의 공백적 속성으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성막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훌륭하게 증거하는 기능을 갖는다.
(수 22:34)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뭔가 누락되어있는 그 공간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여호와께서 진정으로 말씀하고 싶어하는 바를 확실하게 나타낸다. 즉 제단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희생제물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의 일상성을 채우는 것은 농토를 경작하는 백성들의 노동과 삶이 아니라, 제단 위에서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매일 같이 드리는 희생제물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한데 말이다. 그 희생제물은 그 제물이 표상하고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분, 그 실체를 위해서 바쳐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날마다 바쳐져야 하는데, 그것이 곧 '산 제물' 이라는 말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놀랍게도 제물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어떤 제물을 따로 동원하면 안 되고, 우리 자신이 곧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목사님,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교회 게시판에 누군가가 "목사님,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을 올렸는데, 그래서 제가 뭐라고 답변을 했는고 하니, "헌금이라는 것은, 헌금을 하고 나서 집에 있는 나머지가 자기 돈이라고 여겨지면, 그것은 헌금을 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집에 있는 돈이 자기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헌금을 한 것이 아니라 기부를 했다는 말이다. 즉 자기 자신이 산 제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집에 있는 돈이 주님의 돈이라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집에 있는 돈을 교회로 이동시킨 것인데, 자기는 거기에 심부름을 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을 바친다고 하면, 그만 '나' 라는 것이 주체가 되는 것인데, 그런 주체가 나서면 헌금을 해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집에 있는 돈이 주님의 돈이라면 그 주체자가 주님이 되니, 자기는 거기에 심부름을 했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계속해서 산 제물이 되니, 집에 있어도 주님께 드린 것이고, 물론 교회에 나와도 드린 것이고 말이다. 그야말로 사나 죽으니 주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곧 영적 예배인데, 물론 집에 있어도 영적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날마다 집에서 헌신을 하니 말이다.
◈ 너무나 생소한 사도바울의 이야기 !!
하지만 이러한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오늘날 현대인들의 구미에 철저하게 맞추어진 교회 안에서 울려 퍼진다고 하는 것은, 차라리 다음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즉 "저는 당신들이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고 하는 말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자기 존재에다 소유를 채우는 사회인데, 그러니 바로 그 소유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도 그랬지만 말이다. 옛날에는 그것이 돈이 아니라 가문이었는데, 사람들이 추석 때 그 막히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굳이 고향으로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 저주받는 존재들이 이어져봐야 역시 저주 !!
그것은 바로 자기 존재의 바탕을 고향에서 찾으려고 하는 처절한 몸짓인데, 그래서 고향에 관한 노래들이 많다는 것이다. 고향 역, 고향의 봄, 고향의 강, 등등 말이다. (눈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강??) 이렇게 인간은 자기 존재의 뿌리를 고향이라고 여기는데, 즉 조상숭배는 모든 민족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에서 존재로 이어지는 영원함이니 말이다.
그러한 것을 체계화한 것이 바로 헤겔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인가? 인간들이 아무리 존재를 이야기하고 설쳐도,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너희들이 그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이다. 까불면 죽는다고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뭔가를 제 아무리 해도, 그렇게 저주를 받는데, 그런 저주를 받는 존재들이 이어져봐야 역시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창세기 5장에서는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뒤에는 "나는 살았다" 라는 구절이 있던가?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근호든, 박근호든 간에 그 누구라도 다 죽는다는 것이다. 즉 아담의 형상을 가진 자들은 자 죽는다는 말이다.
국민가수(?) 나훈아가 아무리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라고 설레발이를 쳐도, 물론 인간들은 그 순간에는 자기가 살았다고 여길지 몰라도, 그러나 그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죽은 시체가 기차에 실려서 달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 소녀야, 그만 일어나라 !!
물론 이 죽음의 의미가 구약에서는 목숨이 끊어진 것이고, 혼이 나가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이 신약에서는 달라지는데, 즉 신약에서는 저주를 받는 것이 곧 죽음이란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는 회당장의 딸을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소녀야,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왜 이렇게 잠이 많지"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신약시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죽음의 의미를 주님은 양쪽을 모두 다 사용하시는데, 즉 기존 인간들이 말하는 죽음의 개념도 사용하시고, 그렇게 하면서도 그만 그것을 발로 차버리신다는 것이다. 즉 "얘들아, 죽음은 그것이 아니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 자기 오빠가 죽어가고 있는데 왜 예수님은 오지 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은 그렇게 재림을 바꾸어서 자꾸만 인간들을 혼란스럽게 하신다는 말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는 쪽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너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말하는 것을 무조건 수용해야만 돼" 라는 식으로, 그렇게 자꾸만 바꾸신다는 말이다. 즉 인간들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다시, 텅 빈 성전으로 와서 !!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이렇게 "성전이 텅 비어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 인간자체를 고발하는 의미에서 텅 비어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렇게 텅 비어있지 않으면 자기가 그만 잘난 줄로 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목사의 경우에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보니 교인들이 다 빠져나가고 텅 비어있으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자기의 죽음을 느끼는데, 물론 설교할 마음도 생기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교회당에 사람들이 가득할 때만 설교할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그동안 주님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설교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렇게 텅 비어있을 때, 자기 존재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 몇 그 명이 되지 않는 교인 앞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면, 그러면 자기 속에 소명, 혹은 사명이 생기되 됨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소명이 그동안 사람들에게 푹 빠져서 가리어졌는데,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이 빠져나감으로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왜 살아가는가?" 라는 문제가 당면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은 확실하니, 그것이 새롭고도 유일한 현실이고, 또한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제대로 된 최후의 현실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을 십자가 중심으로 보는 것이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교회에 사람들이 적게 온 것도 분명히 주님이 알려주시는 현실인데, 즉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주님이 환경을 조성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왔다고 해서 좋아하고, 적게 왔다고 삐친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사도행전과는 상관이 없는 모습이란 것이다. 사도행전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도 주님을 찬양했지, "아이쿠, 내 신세야" 결코 자기 신세타령을 하고, 일종의 허무에 잠겨서 자살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님, 자살을 하시죠 ??
만약에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서 "사도바울님, 살기 힘드는데 자살을 하시죠" 라고 하면, 사도바울은 "물론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하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라고 할 것이란 말이다. 즉 지금 사도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에 바쁘지, 지금 자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그래서 자살과 같은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사도바울은 자기가 주체가 아닌데, 그러니 자기의 찬란한 최후, 혹은 비참한 죽음 등을 생각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도바울의 신앙적인 모습을 구약에서 찾아내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텅 빔' 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243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의 언약은 다름이 아니라, 제단 위의 죽음을 통해서 속된 것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텅 빈 지성소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언약궤는, 제단 위의 피묻은 언약행위의 근원을 하나님 편에서 소개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언약의 내용은 포기하지를 못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천명이다. 그래야만 거룩이 존속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교재 244페이지를 보자.
** 지성소 안에 신의 형상은 없고, 오직 텅 빈 공간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은, 만남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그 어떤 인간들의 노력도 하나님께서 거부하고 부정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인위적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려고 한다면, 이는 곧 우상적인 성전이 된다.
◈ 인간의 존재는 채워야 맛이 !!
인간의 존재는 채워야만 맛이 나는데, 즉 사람이 자기 존재를 생각하게 되면, 반드시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소유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아까 말한 가문이 채워주는데, 그런데 서양사상이 들어오면서, 자기 존재를 무엇으로 채우게 되는고 하니, 가문보다는 돈으로 채운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 존재는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소유된, 즉 뭔가가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 없다고 한다면, 왠지 뭔가 붕 떠있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또 남편과 사이좋게 살다가, 그만 남편이 죽어버린 여자의 경우에, 그 여자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만 붕 뜨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자기 존재에 있던 내용물이 그만 빠져버리고 나니, 그만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라는 것을, 즉 자기 존재를 파악할 길이 막연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그만 우울증과 같은 것에 걸리고, 결국에는 자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 속에는 처음부터 무엇이 있는고 하니, 자기가 존재할 수 있는, 그러한 자기 존재의 소유물로서 가득하게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 노자철학 - 유(有)가 없으면 무(無)가 없다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주머니가 있는데 이 주머니는 가만히 있으면 주머니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노자철학에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주머니가 주머니가 되려면 여기 안에 돌맹이라도 집어넣어야만 주머니 값을 하는데, 그제야 비로소 비어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노자철학에서 그러한데, 제법 생각보다 어렵지요? 그러니 그냥 주머니만 있으면 그것은 헝겊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왕 어려운 것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를 하자면, 이것을 두고 "유(有)가 없으면 무(無)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무(無)라고 하는 것은 유(有)가 되었던, 그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무(無)라는 것이 의미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과연 동양철학다운데, 특히 이 노자철학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여보, 어디 있어요?
예를 들어서, 자기 남편이 있다가 죽어버렸다고 한다면, 그러면 "내 남편은 어디 갔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위에서 뭐라고 하는가? "남편은 이미 죽고 없는데, 그것을 이제 현실로 받아들이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이근호?) 성경말씀을 인용해서,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남편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세요" 라고 할 것이고 말이다. 물론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하고 말이다.(ㅋㅋ)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가?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있는 순간에, 즉 그 남편이 있음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확정하게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만 남편이 빠져버리니, 그것이 남편이 빠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 '나' 라는 것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 인간은, 소유물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적립 불가능 !!
그렇게 되면 이 '나' 라는 것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것, 물론 그것이 돌맹이라고 해도 좋은데 말이다. 그 안에 뭔가를 채울 수 있는 소유물이 없으면 존재라는 것이 그만 적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누군가가 "목사님, 소유가 없으면 존재가 적립되지 않는 것이 과연 옳다는 말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제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것이 옳고 틀리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에덴동산을 떠난 타락한 인간들이 자기 존재를 구축하는 방법이 이것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말이다.
◈ 아니, 자기 존재를 키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존재를 키우기 위한 자기 속에 예수를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를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서 그만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즉 과거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경험과 같은 것을 간증이라고 해서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이전에는 방언이 되었는데, 왜 지금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방언이 무엇인고 하니, 신의 계시이고, 또한 "너는 구원을 받았어" 라고 하는 증거물로서 주어진 것인데,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방언이 되지 않으니, "목사님, 저는 과연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맞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왜 지금은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다.
◈ 구약역사 - '텅 빔'이 아닌, '자기 존재'로 가득한 역사 !!
그러니 그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생긴 존재가 아니라, 일단 자기 존재가 우선이고, 거기에다 신의 사랑과 같은 것을 집어넣어서 그만 자기 존재를 채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채우는 방법이 여기 교재에 있는 것처럼 '텅 빔'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납득이 되는 방식으로 채우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약의 전체역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역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홍해바다가 갈라져야 하고, 여리고 성이 무너져야 하고, 성전을 지어야 하고, 또한 실제로 왕이 있어서 정치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 내용물을 채우는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내용물의 검열을 누가 하는고 하니, 하나님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하겠다는 것이다.
◈ 아, 무의식에서 흘러나온 욕망 !!
물론 구약에도 그런 내용이 있지만, 오늘날 철학에 의하면 그런 내용물이 주어지는 이유까지도 설명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무의식에서 흘러나온 욕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에서 흘러나온 욕망 말이다. 그런데 그 욕망은 자기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즉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이 자기 자신을 대신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참, 그 사람은 믿음이 좋다" 라고 싶으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을 자기 욕망에 의해서 그 사람의 믿음을 그만 자기 존재에 집어넣어서, 마치 자기 신앙을 믿음이 좋은 그 사람의 신앙과 일치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 들통이 나는고 하니까, 교회에서 한 바탕 싸울 때라는 것이다.
그때는 신앙이고 복음이고 뭐고 다 떨어지고, 주체가 다시 강화되면서 상대방의 주체와 자기 주체가 누가 세냐고 하면서 시합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주체에 대해서 강하게 집착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즉 십자가의 현실은 그만 다 날아가 버리고, 자기가 존재한다고 하는 새로운 현실감이 또다시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에 대해서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것을 인정해주시겠는가?
계속해서 교재 241페이지를 보자.
** 지성소 안에 신의 형상은 없고 오직 텅 빈 공간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은, 만남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그 어떤 인간들의 노력도 하나님이 거부하고 부정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인위적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려든다면, 이는 곧 우상적인 성전이 된다.
**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과 긍휼의 작용을 인위적 종교성으로 유발시키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왜곡 해석한 결과이다. 없어져야 될 것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전환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한다.
◈ 언약사건과 십자가 !!
그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이 우두둑 쏟아져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건을 다른 말로 하면, '언약사건'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언약사건이 터지게 되면, 이 언약사건은 그 안에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물이 곧 십자가라는 것이다. 즉 언약사건의 중심내용은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자기 삶에 있어서 이 십자가가 크게 보인다고 하면, 주님께서 다루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십자가의 현실이 정말 자기의 현실로 느껴진다고 하면 '나' 라는 주체는 그 안에서 허물허물해지고, 그렇게 자기가 허물허물해지는 것은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허수아비로 보인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 세르반테스의 '통키호테' !!
세르반테스의 '통키호테' 라는 아주 유명한 소설이 있는데, 소설의 주인공 동키호테는 그야말로 미친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미쳤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풍차하고 싸운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도 밤이 되면 전봇대를 붙잡고서 마냥 싸우는 사람들이 제법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떤 평론가에 의하면, 그 소설의 작자인 세르반테스는 근대주체사상을 아주 제대로 고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을 아주 높이 평가를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풍차와 싸우는 것은 누가 봐도 미친놈인데,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즉시 소멸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을 크게 의식한다는 그 자체는, 그것은 바로 동키호테가 풍차하고 싸우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심판은 누구에게 맡겨야 한다고 하는가? 당연히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뒤에는 뭐라고 하는가? "믿음으로 쫓아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다 죄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롬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그런데도 그렇게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심판을 자기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선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자기가 하나의 주체가 되는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가 주체가 되면 상대방은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역시 하나의 주체가 되어서, 즉 풍차에 불과하던 그것이 자기에게 달려들어서 괴물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왜 현대에 들어서서 괴기영화나 유령영화가 인기가 있는고 하니, 사람들이 너무나 주체가 강렬하기 때문에, 자기의 강렬한 주체를 더 확장하기 위해서는 유령이라는 실체를 만들어서 자기에게 굴복을 당하게 되면, 비로소 자기는 주체로서 더욱 더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실제 인물과 싸우면 폭력혐의로 파출소나 지구대에 가야하니, 그래서 직접적으로 싸울 수는 없기에, 그래서 유령이라도 끄집어내어서 마음껏 패고 싶다는 말이다.
◈ 내가 곧 히어로 !!
사람들이 상상을 할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안에는 스토리가 있는데, 그러니 상상은 시나리오가 다 있지 시나리오가 없는 상상은 없다는 것이다. 혹시 그러한 시나리오를 조사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 상상력의 시나리오를 조사해보면, 공통점이 무엇인고 허니, 다들 자기가 영웅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다 극복하고 영웅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영웅이 되는 데는 2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자기가 상대방보다 돈을 더 많이 벌든지 힘이 세든지 하는 것이고, 아니면 아는 것이 더욱 많다든지 말이다. 그렇게 해서 끽 소리도 못하도록 짓밟아버리는 것이고 말이다. 다른 또 하나는, 자기가 너무나 양심적으로 사니까 상대방이 달려들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자기에게 굴복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두 가지가 모두 다 상대방이 자기에게 꺾였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런 상상력을 인간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상력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다. 물론 자는 시간은 빼고 말이다. (녹취자 - 꿈은 그런 상상력의 연속이 아닌가요?) 그것이 바로 통키호테가 풍차와 대결하는 모습이란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누가 다루시는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데, 그것이 가장 기본이고 철칙인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위로 잘라버리는데, 그리고 나서 "저 사람은 내가 다루어야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그렇게 하신다고 여기지는 않고, "저 놈은 내가 손을 좀 봐야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목자를 치니 양의 떼가 흩어진다 !!
어제 제가 설교시간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요즘 교회는 양은 없고 목자뿐이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자기의 목자가 누구인고 하니까,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목자이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것이 현대인들의 시편 23편이라는 말이다.
현대인들에게 왜 목자가 없는고 하니, 근대의 주체사상이 발달하면서 그렇게 되었는데, 어제 설교한 본문이 마태복음 26장 31절에 나오는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요즘 현대인들에게 제 아무리 목자를 쳐도 결코 양이 흩어지지 않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목자를 치는 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래서 제가 이 본문과 연결해서 창세기 3장 15절의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이야기했는데, 바로 그것이 현실이라고 말이다. 즉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우는 입장에서, 뱀의 후손이 목자를 치게 되는데, 물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목자를 치는데 양이 흩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목자와 양이 결탁이 되어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목자를 치는 것은 창세기 3장 15절의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치는 그것이 바로 현재 이 시대는 예언의 시대인데,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이제는 목자가 필요 없어 !!
그런데 타락하고 난 뒤에 사람들은 말씀이고 예언이고 간에 다 깨어버리는데, 그래서 목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목자가 없는가? 그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목자가 있으면 귀신이 도망을 가니 안 되고, 그래서 자기가 그만 자기 자신의 목자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로 간다는 말이다. 좁은 길은 전혀 돈이 안 되는데, 그래서 넓은 길을 좋아하고 몰려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넓은 길이 바로 멸망의 길이라는 말이다. 코스가 바로 정해진 코스이고, 논리가 그런 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야말로 개떡같이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 의한, 즉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치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현실을 제대로 붙잡고 파악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 목자가 상처 난 모습으로 양을 감싸줄 때 !!
그리고 바로 그 예언의 말씀에 의하면, "목자를 치면 양은 흩어진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흩어진 양을 위해서 목자가 상처 난 모습으로 감싸 앉아 줄 때, 비로소 양은 목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무엇을 보고 말인가? 목자에게 난 상처를 보고서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목자의 두 팔에 난 상처를 보고서 말이다.
이것이 스가랴 13장 6절에 예언된 말씀인데, 즉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예언인데, 이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확인이 된다는 것이다.
(슥 13: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그런데 이 십자가가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렇게 지독하게 당하면서도 "나는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그런 오기가 다 있느냐는 것이다. 실컷 얻어맞고는 "다 이루었다" 라고 하고 말이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서 죽어가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하고 말이다.
◈ 예수님은 무슨 꿍꿍이속을 ??
그러니 이것은 제3자가 외부에서 보면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 속에 무슨 꿍꿍이가 들어있는지, 우리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실컷 당하고 그런 말씀을 하시니 말이다.
심지어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어떤 현실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가 목자이고 주체자이니 말이다. 즉 되고 안 되는 것은 자기 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물론 우리는 양이 아닌데, 만약에 양이라고 하면 당연히 목자를 찾는데, 그런데 목자도 찾지 않으면서 무슨 양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목자인데 말이다. 물론 몸이 아파서 목사를 찾는 것은 말고 말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한국교회는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닌데, 목자도 없는데 무슨 자기가 양이라고 할 수 있는지, 전혀 말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현대인들이 원하는 목자는, '임시직' ??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현대인들이 원하는 목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임시직' 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임시직 목자가 무엇인고 하니, 일단 한번 고용을 해보고, 그렇게 해서 일을 잘하면 계속해서 목자로 간주해주겠다는 말이다. 즉 자기에게 고용된 말을 잘 듣는 목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자기가 하는 일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즉 자기가 하는 사업도 잘 안 되고 가정이 힘들어지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바로 그러한 노동의 유연성이 있는 임시직 목자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임시직 목자를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놀랍게도 그것을 두 글자로 '예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두 팔 사이에 난 상처를 알지 못하는데, 즉 친구 집에 가서 난 상처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제는 설교를 하면서 하도 화가 나서 고함을 좀 질렀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심보가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도대체 왜 그런 교회에 아직도 다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저는 어제 누가 왔는지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예배를 마치고 보니 언약교회에 다니는 분이 오셨는데, 물론 그것도 모르고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 오늘 강의를 다시 정리하면 !!
오늘 강의를 다시 정리하면, 오늘 강의가 정말로 중요한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해서 지어놓았는데, 그런데 그 안에 보니 그만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과연 그때 우리의 느낌은 어떠하겠는가?
예를 들어서, 자기가 많은 돈을 들여서 예배당을 지었는데, 그런데 그 예배당이 텅텅 비어있다고 하면, 교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면, 그때 무슨 느낌이 들겠는가? 솔직히 "아, 망했구나"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교회가 아니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자기가 열심히 지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가인이 될 가능성이 많은데, 즉 풍성한 제단을 쌓고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드리고 했지만, 그만 주님이 받지 않으니 말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서 잡채도 하고 탕수육도 했는데, 그런데 위선적인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턱을 받치고는 말씀만 듣고 있다는 것이다. 전혀 예수님을 대접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다. 그때 그것을 보고 마르다가 가만히 있으면 별 문제가 안 되는데, "아하, 너는 말씀이 좋아서 그렇게 하고, 나는 또 이렇게 음식으로 봉사하지 뭐"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만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즉 "예수님, 동생을 야단쳐주세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말씀만 듣습니다" 라고 했을 때,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너보다도 동생이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텅 빔'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텅 빔'의 사상인데, 즉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인데, 왜 사람들은 이것이 믿어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텅 빔을 말이다.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고 하겠는가? "아니, 그것을 어떻게 믿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돈 보따리가 있다고 하면, "주님, 여기에 있는 돈을 바칩니다" 라고 돌아서는데, 그만 그 돈 보따리가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돈이 없어진 것이 섭섭한 것이 아니라 기쁜데, 왜 그런가?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 것이 느껴지니 말이다. 주님이 오셔서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돈이 그대로 있다고 하면 불안한데, 왜냐하면 주님이 그 돈을 받지 않은 것이 되니까 말이다. 자기가 바친 것이 아무런 기여도 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구원이 되었는지, 되지 않았는지 몰라서 자꾸만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 너희들이 모르는, 바로 '내 아들' !!
그것이 바로 '텅 빔'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구약의 텅 빔이 신약에서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내가 너희들의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전혀 준비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내 아들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바칠 것을 대신해서 모두 다 바쳤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즉 그 아들을 따라오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텅 빔'을 모르게 되면, 예수님의 전부를 왜곡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주셨는데,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고 정죄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제 무엇을 바치고 말고 하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건 목사들이 하는 짓인데, 무엇을 바쳤는지 바치지 않았는지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은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인간들이 바친 것은 다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직 아무 것도 없음에서, 즉 '텅 빔'에서 나온 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이러한 '텅 빔'의 사상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그 모든 말씀과 행동들을 모두 다 곡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너무나 강렬한 '나' 라는 주체 때문에 !!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사람들이 왜 그것을 믿지 않습니까? 제가 가만히 들어보니 그것이 성경으로 모두 통하고 맞는 것 같은데, 왜 믿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나' 라고 하는 그 주체가 너무나 강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한 주체를 주님의 사랑 앞에서 허물허물 녹아 내리도록 해야하는데,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주체가 강력한가? 그것은 바로 소유물을 그 안에 잔뜩 집어넣어서 그러한데, 즉 자기가 장로니, 목사니, 집사니 하면서 말이다. 자기가 신앙생활을 몇 년을 하고, 기도를 얼마나 하고, 헌금을 얼마나 했고 말이다. 성경을 몇 독을 했고, 또한 신학서적을 얼마나 보고 저술을 했고, 그렇게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온갖 잡동사니들을 다 끌어 모아서, 그야말로 쓰레기들을 끌어 모아서 자기 속에다 잔뜩 집어넣어 놓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주체를 버리려고 하면, 그런 기존의 모아놓은 것을 모두 다 버려야만 하는데, 자기 소유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버리기가 너무나 아깝다는 것이다. 다 떨어진 옷도 버리기가 아까운데 말이다.
◈ 너희들은 결코 극복하지 못한다 !!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즉 예수님이 얼마나 극단적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리고 부자청년을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니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빈 털털이가 된 다음에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주님에게 바치라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자들에게 다 주고 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영생이 있다는 말이다.
◈ 십자가로 채워라 ??
그러니 이러한 말씀이 얼마나 도발적인지 모르는데, 이것은 돈을 버리라든지, 바치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너는 그것을 결코 극복하지 못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자기 주체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 십자가로 채운다는 것은 어폐가 있는데, 십자가로 채운다는 것은 십자가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게 사도바울에 의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나니"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자기의 죽음을 인정하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 안에 자기 존재의 소유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분과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 모두가 다 허수아비 !!
그런데 십자가로 채우게 되면, 놀랍게도 자기만 허수아비임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 허수아비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게 되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하게 되고, 그들이 어떻게 나오든지 사랑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한번 제대로 갉겠다는 게 아니고 말이다.
◈ '텅 빔'이 사도바울의 명령법으로 !!
바로 이러한 구약성경의 '텅 빔'의 사상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들에게 다 연결되는데, 즉 사도바울의 명령법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여기에 관한 적당한 예를 하나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조깅을 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해병대 그림이 있는 군복을 입고 있더라는 것이다. 벌건 배를 고정시키는 닷 그림이 있는 말이다. 전혀 색깔이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제가 알기로는 해병대에는 여군이 없는 것으로 하는데(?), 물론 해군은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아마 그 여자는 남편의 것을 고쳐서 입었지 싶은데, 아니면 시장에서 여자용으로 만든 것을 사서 입었든지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 아주머니는 분명히 해병대가 아닌데, 옷만 해병대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아주머니는 해병대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사실은 예수님의 옷만 입기를 원하는데, 하지만 이제 우리의 주체가 없는 이상, 그 옷에 맞는 주체를 주님이 만들어나가신다는 것이다.
◈ '예수의 사람되기' 인가? 아니면, '성화론' 인가?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그만 성화론이 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성화론의 기본은 주체가 있음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예수의 사람되기'는, 그런 인간의 주체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인간 주체가 없이 말이다.
그것을 지금부터 좀 어렵게 설명을 하겠는데, 잘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제가 말하는 논리가 맞는지, 속아서(?) 넘어가지 말고 철저하게 검토해보라는 말이다. 너무나도 어려워서 그림으로 그려보겠는데, 이렇게 인간 존재가 등장을 하는데, 이것을 인간들은 그냥 인간존재가 등장했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등장할 때 그 옆에 누가 있었는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존재할 때 함께 선악의 나무도 심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 존재는 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죽으리라' 라고 하는 죽음이 존재와 함께, 즉 죽음의 곁에서, 죽음이 주시하는 가운데, 죽음이 관찰하는 가운데 인간 존재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 인간은, 죽음을 말해주는 도구로서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지를, 그러한 죽음의 실체를 말해주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죽음을 말해주는 도구로서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는, 이렇게 이야기한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는고 하니, 즉 선악과가 왜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자기를 볼 때 자기 중심으로 보게 되는데, 그렇게 자기 중심으로 보게 되면, 자기를 사랑할 사람이 누구인지 찾게 되는데, 그러면 요한복음 3장 16절에 그냥 필이 꽂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말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물론 성경말씀의 그 뒷부분은 볼 생각도 전혀 없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으면, 자기를 그렇게 사랑한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은 당연히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보는고 하니, 이 인간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자기를 위한 인간인데, 태어날 때부터 본성상 그렇다는 말이다.
◈ 아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끝 !!
다시 말해서, 그렇게 이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즉 자기를 사랑해주는 하나님과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이 만났으니, 서로 궁합이 너무나 잘 맞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착각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제대로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것들은 더 이상 살펴볼 필요조차도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백화점에 가서 자기 마음에 꼭 맞는 물건이 있다고 하면, 그래서 그것만 집어들었다면 다 된 것이지,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화점에 소방관리가 어떠한지, 인적구성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그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꼭 드는 물건만 구입하면 되었지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인데, 즉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을 찾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좋은 하나님이고, 좋은 성경말씀인데, 그러면 계속해서 교회에 다닐 마음이 생긴다는 말이다. 자기는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도 이 세상, 즉 자기를 사랑하고,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끝난 문제라는 것이다.
◈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이렇게 선악과가 있는데, 이 선악과 이야기를 하게 되면, 즉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선악과 심겨져있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팻말이(?) 기록되어져 있고 말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사랑한다 한다면, 그런 데인져러스한(위험한?) 요소는 없어야만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야 인간을 처음부터 사랑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사랑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하는, 그런 분잡스럽고 귀찮은 과정을 겪지 않아도 말이다. 즉 아예 선악과를 심어놓지 않았다고 하면, 처음부터 인간사랑이라는 것이다.
◈ 너희들은 이것을 좋아하면 안 돼 !!
제가 어제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그것도 그렇게 탐스럽고 먹음직한 선악과를 말이다. 그것은 마치 순진한 청소년들에게, 일본 AV배우가 나오는 너무나 자극적인 헤어누드 화보집을 보여주면서, "너희들은 이것을 좋아하면 안 돼"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일부러 같다대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도박은 나쁘다고 이야기하면서 고스톱에 대해서 아주 재미있게 설명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따먹고, 또 이렇게 하면 싸고, 또한 이렇게 하면 3점이 나는데, 그러면 '스톱'을 할 수도 있고, 또한 '고'를 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아주 자세하고 신이 나게 설명을 해주면서 하는 말이, "이것은 결국 도박이니 하면 안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과연 이것이 사랑인가?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너는 너를 위한 존재가 아니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선악과를 심어놓은 것은 죽음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함인데, 그런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을 대상물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죽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죽음은 선악과만을 가지고는 모르는데, 물론 인간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만 해도 아담은 죽어본 적이 없기에 말이다. 그렇게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따먹으면 죽는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진씨, 제 말을 들어야 합니다. &@%&#@*$#@@%&#"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님의 말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는데, 그런데 그 뒤의 말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 라고 하니 말이다. "만약에 제 말을 듣지 않으면 한 대 얻어맞습니다" 라고 한다든지, 그렇게 아는 말을 해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 '죽음' 이라는 것은 아담에는 전혀 낯설고 생소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이 경험하지도 못한 낯선 것을 집어넣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결코 인간 자신을 위한 인간이 아니라,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을 설치해놓고, 그런 죽음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기 사랑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뜻에 부합하는가? 처음부터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죄를 짓고 난 뒤에 나온 하나의 결과물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죽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그러면 생명나무는 왜?
그것은 바로 이 에덴동산에 또 하나의 나무가 있었는데, 그것이 곧 '생명나무' 라는 것이다. 즉 생명이 무엇인지 알라고 하면, 먼저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생명을 알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또한 엄청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9) 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