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대구강의14(교회를넘어서)20-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7-1
05대구강의14(교회를넘어서)20-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7-1
이름 : 구득영(IP:203.223.97.192)
[05 대구강의 14] - 교회를 넘어서 20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7
05,07,2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매일같이 터지는 폭탄 !!
오늘은 교재 284페이지를 할 차례인데, 먼저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살펴보면, 제가 지난 시간 마지막에 뭐라고 강의를 했는고 하니, 성도 안에는 언약이 들어있는데, 그런데 그 언약은 바로 매일같이 터지는 폭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터지는 폭탄 말이다.
그러면서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이렇게 사람이 있으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폭탄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폭탄은 매일같이 늘 터지는데, 그런데 그렇게 터지게 되면 그 안에 적체되어있는 우리의 의로움이 깨어지고, 죄의 부스러기로 전환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난 시간 마지막에 했는데, 그런데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인간을 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신약에서의 인간상을 제대로 정립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가?", 혹은 "사람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은 반드시 성경말씀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찾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을 해야하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그분이 언약을 가지고 사람을 대한다는 의미이고, 또한 언약을 가지고 사람을 대한다고 하는 것은, 그 언약이 인간에 대해서 어떤 일을 실시하는지, 그 실시하는 일의 기능을 통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것이 파악된다는 것이다.
◈ 내가 누구인가?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을 해야하는데,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언약의 하나님인데, 그런 언약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게 되면, 비로소 인간의 실상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과 다른고 하니까, "내가 여기에 있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나의 존재' 인데, 즉 현재 있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자기를 분석하는 식의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방근 제가 말한 언약으로 보는 인간과 말이다. 즉 인간의 존재가, 자기가 자기를 늘 쳐다보는 것과는 그 결과가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 목회자는 염려해서는 안 된다 ??
그런데 여기서 아까 강의를 시작하기 이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목회자는 염려해서는 안 된다" 라고 했을 때, 그 염려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쳐다볼 때 나온다는 것이다. 십중팔구, 아니 백발백중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가 자기 처지를 생각할 때 염려가 나오는데,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염려가 나올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염려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평소에 자기가 어떤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지, 그 관점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를 스스로 평가하는, 그런 기준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제가 "목회자는 염려해서는 안 된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 교만해지거나, 염려하거나 !!
제가 교인들에게 성경말씀을 보라고 가끔은(?) 그래도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제 마음은 무엇인고 하니,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만약에 성경말씀을 제대로 보지 않고 접촉할 시간을 갖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자기 자신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시간이 많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말씀이 아닌 자기 자신을 쳐다보면 어떻게 되는가? 교만해지거나, 아니면 염려하거나, 바로 그 두 가지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하는 것이 잘 되면 교만해지고, 그렇지 않고 잘못되면 염려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교재를 284페이지를 살펴보자.
**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을 줄 수 있는 그 주의 이름이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것을 하기 전에, 천 목사님에게 물어볼 것이 좀 있는데, 너무 긴장은 하지 말고, 그냥 솔직히 답변만 해주면 된다는 것이다(ㅋㅋ).
* 이근호 : 혹시 천 목사님, 이번에 나온 책 '지옥의 하나님'을 다 읽어보셨나요?
* 천성은 : 예, 읽었습니다.
* 이근호 : 책에 오자가 제법 있지요?
* 천성은 :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 이근호 : 내용이 어떻던가요? 저는 만족스러운데 말입니다.
* 천성은 : 괜찮은 것 같아요.
* 이근호 : 3자의 입장에서 솔직히 이야기해주면 좋겠는데, 제가 그런 것을 좀 알아야 하니 말입니다.
* 천성은 : ? ? ?
* 이근호 : 좀 아쉬운 것이 있던가요?
* 천성은 : 없는 것 같습니다.
* 이근호 : 그러면 다행인데, 정말이지요?
* 천성은 : ? ? ?
◈ 구원이란, 받고 싶다고 받는 것이 아니고 !!
아무튼 여기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분명히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준 적이 없다고 하는데,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기가 구원을 받고자 한다고 해서, 그런 자에게 구원이 돌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보통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기가 구원을 받고 싶으면 자기 쪽에서 어떤 액션을 취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이 된다고 여기는데, 물론 자기가 액션을 취하지 않았으면 자기 잘못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이라고 하면 어떤 기회를 주셔야 하는고 하니,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에게는 구원되도록 하는 기회는 주어야지, 그래도 하나님은 구원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생각이 언제 나오는고 하니, 성경말씀을 바라볼 때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을 쳐다볼 때, 바로 그러할 때만 나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어렵고도 곤란한 이야기이냐는 말이다.
우리 인간이 자기 존재를 쳐다볼 때 나타나는 현상이 곧, 지금 현재에 있는 그 존재를 자기 스스로 없앤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에 있는 존재를 키워나간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엄연히 있는 자기 존재를 자기가 꾸깃꾸깃 집어넣어서 없앤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 달아 달아, 나는 어디로 가야 되니?
이왕 어렵게 시작한 것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흔히들 철학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자기 바깥에 있는 이 세상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아닌 자기 바깥에 있는 세상에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고민이 있을 때 밤에 밖으로 나가서 휘영청 떠 있는 달을 보고 "달아 달아, 나는 어디로 가야 되니?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아?" 라는 식으로 말이다. 목회자의 경우는, 교회에서 쫓겨난 뒤에 그렇게 달에게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을 누구에게 하는가? 자기가 아닌 자기 바깥에 있는 대자연에게 묻는다는 말이다. 칸트는 이 대자연을 '세계' 라고 했는데, 그렇게 질문을 하면 이제 대자연이 대답을 하는데, 물론 자기가 마음대로 지어낸 대답이지만 말이다. "그래, 그동안 고생했다. 한 달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푹 쉬어" 라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듣고, 그것을 답변으로 삼아서 움직이는데, 물론 자기가 마음대로 만든 답변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질문자가 없다고 하면, 즉 자기가 죽어서 사라진다면 말이다. 그러면 그 대자연이 과연 자기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기가 죽고 없는데 말이다.
◈ '마르틴 부버'의 '너와 나' !!
'마르틴 부버' 라는 사람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너와 나'의 관계로 보았는데, '네비나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말이다. 얼핏 들으면 이 '너와 나'의 관계가 상당히 복음적으로 들리지만, 그러나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나' 라는 것이 죽는다고 한다면 동시에 '너' 라는 것도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너' 라는 것은 '나' 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것이 '나' 라는 것이고, 오직 '나'가 있을 때만 '너'가 있다는 것이다.
◈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주여!' 라고 부를 때는 거기에 무엇이 깔려있는고 하니, 먼저 '나' 라는 것이 있고, 즉 '주여!' 라고 부를 수 있는 '나'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성립이 될 때만, 비로소 주님이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관점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이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이야기하는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그 정도로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사도행전 4장 12절은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공평한 기회라고 본다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 4절에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100%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인간들은, 자기들이 게으르고 나빠서 그렇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지만 그런 주장을 일반적인 예를 들어도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서, "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노?" 라고 하면, "응, 나는 모든 음식을 다 좋아하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든 음식을 모두 먹어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다는 의미로 대답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다 먹는다는 의미로 대답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해야 만족하겠다는 의미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차별을 두지 않고 구원을 해주시겠다는 의미인가?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노?" 라고 해서, "응, 나는 모든 음식을 다 좋아하지" 라고 대답을 했다면, 그것이 모든 음식을 자기 뱃속에 다 집어넣어야 만족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음식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잘 먹는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 하나님이 원하는 자는 모두 다 구원을 !!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끼리의 그런 차별에 하나님은 전혀 놀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자기들끼리는 그런 차별을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는 그런 차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꾸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자는 모두 구원해주겠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 중요한데, 다시 말씀을 드리면,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만나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겠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자를 구원하겠다" 라는 것과,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말이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
그러니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라는 것과,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것은 전혀 그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다. 뒤에 나오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4장 2절에 나오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의미가 되려고 하면, 주의 이름은 그냥 가만히 있어야만 되고,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은 그냥 꽁꽁 묶여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진열장에서 벌떡 일어나는 라면 ??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주의 이름은 마치 마트에 진열되어있는 상품처럼, 고객이 와서 선택해주도록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어디 고객이 지나간다고 해서 벌떡 일어나는 라면이 있던가요? 그런 라면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고객이 알아서 다가와서 자기 쇼핑카트에 집어넣어야만 되는 것이지 말이다.
그러니 사도행전 4장 12절의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오직 성령을 받은 자에게 한해서만, 즉 "성령을 받아야만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안다" 라고 하는 뜻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교회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나오는 말씀과 결부시켜서 말이다.
마치 하나님은 저기 미아리 고개에 가면 있는, 그러한 유리 속에 앉아있는 분으로 여기고, 손님들이 지나가다가 찍어주어야 같이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것으로, 대구역 앞의 자갈마당도 그렇다고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구원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인들도 그런 내용을 좋아하고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을 한 방에 날리는 말씀에 사도행전 4장 12절이라는 것이다.
교재를 다시 한번 보자.
**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을 줄 수 있는 그 주의 이름이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다시 정리를 하면 !!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주는데, 그것이 곧 주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이름은 전혀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논리가 철학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것에 속하는데, 지금 에어컨도 빵빵하게 틀어놓고 했으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늦게 오신 분도 있고 해서 강의를 다시 해보면, 여기에 이렇게 '나' 라는 것인데, 이 '나' 라는 존재를 근거로 해서 '나'를 쳐다보면, 도저히 자기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원리가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철학에서는 뱀이 자기 뱀 꼬리를 먹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먹는 것을 따라가면 그 먹는 주체자가 그만 없어지고 마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 꼬리부터 먹게 되면 결국 먹는 아가리조차도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아가리가 아가리에 의해서 먹히는 모순이 일어나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누구를 보든지 간에 그렇게 보는 '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그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교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염려' 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일이 잘 풀리면 교만해지고, 잘 안 되면 염려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존재적인 근원을, 마르틴 부버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이것이 말이 안 된다고 했는데, 왜 그런고 하니, '너' 라고 했을 때는 반드시 '나' 라는 것이 있기에 '너' 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즉 "내가 사라지면 너는 없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달을 보고 "달아 달아,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지?" 라고 했을 때, 보통 인생에 있어서 고배를 마시고 실패를 했다고 여기면 그렇게 달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도 자기처럼 처량하게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태양을 보고 "태양아,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지?"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달에게 물을 때, 그런데 그렇게 묻는 '나' 자신이 그만 사라지고 없어져버린다고 하면 그 달은 있던 없던 간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사라지고 없으면 달로 자기에는 사라진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달을 이 세상이라고 하면, 즉 "내가 사라지면 이 세상도 의미가 없어진다" 라고 된다는 말이다.
◈ 오잉, 주체철학 ??
그렇게 되니, 자기가 사라지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도 역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없어지면 그만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있고,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무조건 있어야 되고,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이고,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고 '주체철학' 이라고 하는데, 혹시 이런 용어를 들어보셨나요?
◈ 잠시 '양심'에 대해서 !!
이번 8월초에 울산동은교회에서 수련회를 하는데, 그 주제가 '양심' 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심이라고 하면 뭐라고 하는가? "양심은 고와야지. 성경에서 신앙적 양심을 가지라고 했으니 말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놀랍게도 이 양심의 자리가 어디인고 하니,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심의 자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하면, 양심이 무엇인지를 따질 때는 그 양심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양심을 끌어 앉고 있는 자기가 누구인지, 바로 그것부터 따지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우리 인간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한 마디로 '죄인'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니 죄인 속에 들어있는 양심은 무엇이 되는가? 당연히 죄악 된 양심인데, 이 논리가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니라 아주 뻔한 논리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양심의 주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니,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보고서 죄인이라고 하니, 그 말은 바로 우리의 양심도 당연히 문제가 있다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 이상하게도 "비록 나는 죄인이지만, 그러나 내 속에 있는 양심은 선하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가 되려고 하면, '나'와 '양심'이 떨어진다고 하는 논리가 성립해야 하는데, 반드시 그럴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과 양심은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로서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양심과 '나' 자신이 논다고 하면 '나'는 죽어도 양심은 죽지 않는데, 즉 자기는 변해도 양심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양심이 과연 변하지 않는가? 알다시피 변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양심론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이번 여름 세미나의 핵심주제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양심론에 엄청나게 큰 오류가 있다는 말이다.
◈ 아퀴나스님, 양심이 과연 그런가요?
로마서 2장에 보면, 인간 속에 있는 양심이 율법적인 기능을 한다고 하는데, 그 양심을 하나님의 율법과 동일하게 선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보았는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롬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선한 양심만 있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 ??
만약에 죄인 된 자기 자신이, 자기 속에 있는 양심을 죄악으로 물들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죄인이 된 채로 죽는다고 해도, 자기 속에 선한 양심이 살아있는 한 자기는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 속에 들어있는 선한 양심은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비록 양심은 깨끗하지만 자기 자신은 더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양심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는 순환과정으로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연옥' 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교리라는 말이다.
◈ 왜 연옥교리가 등장했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니 목사님, 우리는 지금 개신교인데 왜 굳이 천주교 이야기를 합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지금 개신교가 이미 다 천주교화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가 번역한 '천국의 하나님(?)' 이라는 책이 있는데, 책이름이 맞나요? 아무튼 그것이 30만 부나 팔렸다는 것이다.
그 책의 내용이 옛날에 '펩시콜라(퍼시콜레?)' 목사가 '내가 보고 온 천국' 이라는 책이 대히트를 쳤는데, 그것이 다시 등장했다는 말이다. 천국에 가서 보고 온 것을 책으로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이다. 물론 진짜로 천국에 간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그런 책이 히트를 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보통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양심가' 이기 때문에 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심지어 악한 아버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결코 악한 아버지가 좋은 것은 자식에게 주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 비록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준다고 해도 그 아버지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있는 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 간에, 이들은 마치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 악한 아버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지옥에 가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중보기도가 먼저 나오고 연옥교리가 !!
처음에 천주교에서 이 연옥설이 등장하기 이전에 나온 것이 '중보기도' 라는 것인데, 이 중보기도를 어거스틴이 굉장히 좋아했는데, 즉 중보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이 연옥설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연옥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런데 이 '중보기도'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구원의 결정을 이 세상뿐만이 아니라 저 세상에까지 늘여보자는 것인데, 그렇게 길게 늘어뜨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죽었던 조상들의 덕을 톡톡히 본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교(通交?)' 라고 해서, 즉 죽었던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이 한 동네에 다같이 머물러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같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산 사람에게 보다 더 영향력을 많이 미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죽은 자가, 즉 성자(聖者)가 하는 기도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효력을 줄 수 있다고 본다는 말이다.
◈ 세인트가 기도하면 더욱 더 효과가 ??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살아있는 사람의 죄가 죽은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되면 효과가 있다고 주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는데, 효과가 없으면 왜 그런 이야기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효과가 있는데, 하물며 죽어서 주님과 같이 있는 자가 기도하면 얼마나 그 효과가 대단하겠느냐는 것이다.
(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예를 들어서, 엘리야와 모세가 죽었는데, 그런데 변화산에서 보니 그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 그 엘리야와 모세가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있겠는가? 아니면 여기 있는 김 집사님이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당연하게 엘리야와 모세가 기도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데, 즉 유력인사(?)에 보다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무래도 말발이 더 서고 효과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그러나 '양심'은 또 하나의 종교적 아이템에 불과해 !!
그런데 저는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바로 '양심' 이라고 하는 법체제에서 조작해낸 새로운 종교적인 아이템이 아니냐는 것이다. 양심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각자가 다 양심이 있는데, 그 양심은 법적인 요소를 가지서 계속해서 제2, 제3의 종교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니 20살 때의 종교는, 자기가 20살 때까지 경험한 것을 가지고 양심이 만들어낸 종교인데, 그러니 30살이 되면 그만큼 인생을 더 살았는데, 그래서 20살 때의 그 종교를 버린다는 것이다. 30살 때까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양심과 결합을 시켜서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다 교주이니, 자기가 자기 종교를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얼마나 가지를 못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새로운 종교를 다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목사님, 저의 양심교를 인정해주세요 !!
그러니 인간의 양심을 긍정해주게 되면, 그 전체가 모두 다 긍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성경해석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미리 만들어서 가지고 온 양심교(?)를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인정받기 원해서, 그래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제가 어떻게 이것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고 하니, 사실 제대로 하려고 하면,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정말 엉터리입니다" 라는 것을 자인하고, 그리고 나서 성경말씀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교회에 들어오면서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다가 약간의 보완이나 수정을 하려고 하는 이상은, 전혀 자기 것을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당신의 근본은 썩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교인들은 그렇게 듣는 것이 아니라, "난 물론 죄인이지만, 그래도 양심은 하나 살아있어"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자기 양심은 어떻게 하든지 꼬불쳐두고, 그것을 죄로 물든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고이고이 간직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인간은 자기 자신이 외부와 대화를 하는데, 즉 '나' 라는 것이 외부인 '너'와 대화를 할 때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반드시 '나'를 없애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너'와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전제를 반드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기도'란 무엇인가?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한가? 아예 '나' 라는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하는데, 이것을 두고서 "나의 이름을 제거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지난 시간에 '삭제' 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즉 '나'의 이름을 삭제하고서, 그것이 성령의 역할인데 말이다. 그렇게 삭제된 곳에다가 '주의 이름'을 집어넣는데, 바로 그러한 작업을 두고 성경에서는 '기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의 반드시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인데, 그것은 흔히 주문을 하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이라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도를 하게 하시는 주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얻어진 성과를, 기도하게 된 '너'에게 채워 넣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지가 할 수 있는 열매맺기인데, 즉 가지가 밀어 채치는 그 능력으로 가지 끝에 열매가 맺힌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들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 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을 떠난 모든 열매는 다 불에 태워버린다는 것이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러므로 주의 이름은 미아리나 자갈마당에 앉아있는 거울 속의 여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의 이름도 그 악한 본성을 이렇게 열심히 발휘하고 있는데, 하물며 주의 이름이 어디 가만히 놀고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말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주의 이름 - 능력을 발휘하는 주체자 !!
주의 이름은 가만히 있다가 우리에게 선택을 받기 원하는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름이 스스로 우리를 선택해나시고 인도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을 해내시는 고유능력을 발휘하는데, 그 발휘하는 주체자를 두고서 '주의 이름'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는 의미인데, 즉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라는 것은, "내가 이름을 불러서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전혀 자기 이름밖에 부를 줄을 모르니, 그래서 우리 인간들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논리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닌데, "내가 나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서, 그런 식으로 나의 이름이 구원을 받는 것은 없다" 라는 것인데, 즉 주의 이름 말고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삼순이'이든, '삼식이'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능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름을 바꾼다 ??
놀라운 것은 미국의 여성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자기 이름이 그만 날아가게 되는데, 그러니 얼마나 복음적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결혼을 한 남편이름이 그만 자기 이름이 되고 마는데, 바로 그것은 과거 기독교의 전통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천주교를 보면 영세를 받게 되면 자기 이름이 날아가 버리는데, 그리고는 새로운 이름이 그에게 다시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가 모순이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제가 만약에 영세를 받았다고 하면, '이근호'에서 '베드로'가 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이근호와 베드로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죄악 된 이근호를 거듭난 이근호로 바꾸고, 이근호의 이름은 그냥 그대로 사용을 하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상관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가?
왜냐하면, '이근호' 라는 것은 "ㅇ+l+ㄱ+ㅡ+ㄴ+ㅎ+ㅗ"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베드로도 "ㅂ+ㅔ+ㄷ+ㅡ+ㄹ+ㅗ" 라는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기호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새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기호를 붙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새 이름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그 새 이름이 그 이름이 바뀐 사람의 인생을 주도하고 점령해나가는, 그러한 능력이 뿜어져 나오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 이제 내 이름은 삭제를 당하고, 주께서 직접 관리를 !!
바로 그 새 이름의 관리자가 누구인고 하니, 이름이 바뀐 당사자가 아니라 그 새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새 이름에 맞추어서 그 사람을 관리하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자기 이름이 삭제를 당하고 주님의 이름이 새롭게 주어져서 말이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아담' 이었고, 또 신약에서는 '주의 이름'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름이 삼순이가 되든, 삼식이가 되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것을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의 이름 덕분에, 그 주의 이름이 있어서 영원히 산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주의 이름은 가만히 있는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 속에 내장되어있는 힘이 발휘하는 장(場), 즉 그 영역으로서 우리 자신을 두고 '성전'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성전 - 주의 이름이 승리한 증거물이 있을 때 !!
이제 겨우 본론으로 들어왔는데, 제거 교재 286페이지에 있어서 주의 이름과 성전을 왜 관련을 시키는고 하니, 바로 다음과 같은 점 때문이란 것이다. 성전,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라는 것은, 반드시 주의 이름과 '나'의 이름이 싸워서 '나' 이름은 그만 완전히 박살나고 주의 이름이 승리한 그 개가를 불러서, 그래서 그 자리에 주님이 승리한 증거물이 있을 때, 비로소 성전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어려운 말인데, 여기에서 출애굽기 15장을 한번 살펴보겠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찬양한 내용인데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기존의 성경해석은 모두 다 사기에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삭제기능이 전혀 없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 존재가 펄펄 살았는데, 무슨 성경해석이 제대로 되겠느냐는 것이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출 15: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출 15:5)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출 15: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 언제 성소가 생기는가?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향하여 전쟁을 벌리는데, 왜 전쟁을 벌리는고 하니, 이 세상이 갇혀있는 자기 백성들이 있는데, 그들이 갇혀있는 동안에 아직 이 세상에 성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 성소가 생기는고 하니, 친히 주께서 용사가 되셔서 이 세상에 갇혀있는 자기 백성을 데려다가 모아놓는데, 그 모아진 장소가 바로 비로소 예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고 성소가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렇게 해야만 구원받은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용사이고, 또한 주의 이름에 합당한 승리의 주님인 것이, 바로 그 자리에서만 고백이 되고 찬양이 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은 싸움꾼이라는 것이다.
◈ 방패, 피난처, 망대, 반석 !!
시편에 보면 상투적으로(?) 나오는 용어들이 있는데, "여호와는 나의 방패요, 피난처요, 망대요, 반석이다" 라고 하는데, 바로 이 4가지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이것들이 언제 동원이 되는 것들인가? 바로 전쟁을 할 때 필요한 것들이라는 말이다.
창세기 15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지 않고 상급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전쟁에 동원된 군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야곱을 통해서 최초로 공개된 주의 이름 !!
이런 하나님의 전쟁에 주님의 이름으로 동원된 천사를 두고 '마하나임'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야곱을 통해서 최초로 공개된 것인데 말이다. 야곱이 잠을 자는데 하늘에서 사닥다리를 타고 엄청난 병력이 내려왔는데, 그 사단병력(?)이 바로 야곱을 중심으로, 야곱을 보호하면서 야곱을 데리고 인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언약의 천사부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들의 이름을 정할 때 그냥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사들의 이름이 바로 천사들의 기능이라는 말이다. 그 천사들의 기능이 구약에서 보면 '기묘자', '묘사', '전능자' 라고 하는데, 즉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는 자들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싸움꾼으로 말이다.
◈ 민수기에서, 왜 숫자를 헤아리는가?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민수기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에 주의 이름이 함께 간다" 라는 말이다. 이 민수기는 말 그래도 숫자를 헤아리는 것인데, 그런데 앞에서 숫자를 헤아리고 뒤에서 또 헤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 어떤 일이 있을 때 숫자를 헤아리는고 하니, 꼭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때 탈락하는 자들이 생기는데, 물론 그들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아닌데, 바로 그들을 빼고 다시 숫자를 헤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남은 자들은 도대체 누구 덕분에 남은 자들인가? 주님이 친히 전쟁을 수행한 결과로 남은 자들이라는 말이다.
◈ 법궤에 주의 이름이 !!
바로 그렇게 한 용사가 누구인고 하니 주의 이름인데, 그러면 그 주의 이름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민수기에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법궤에 있는데, 그것이 '성경의 중심사상'에 보면 설명이 되어있는데, 아무튼 법궤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궤, 즉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요단강이 갈라지고, 또한 여리고 성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의 이름을 앞장세운다고 하면 그 뒤에 따라가는 자들은 누구의 똘마니인가?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건짐을 받은 똘마니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합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가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인데, 바로 그 주님의 일을 완전하게 다시 되풀이하고 완성하신 분이 신약의 '주 예수' 라는 것이다.
◈ 성도는 예수님의 똘마니 !!
그렇다면 바로 그 주 예수를 부른 우리는 누구의 똘마니인가? 당연히 예수님의 똘마니인데, 그렇게 예수님의 똘마니라면 당연히 자기 이름은 삭제가 되는데, 그렇게 자기 이름이 사라지고 나면 교만도 없어지고 염려도 역시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왜 염려하는가? 먼저 그 나라 의를 구하면 되는데"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전쟁 중이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인간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자는 것은, 성경말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인간들이 자기 이름으로, 자기 양심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종교적인 행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전부가 사기이고 엉터리라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종교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을 똑바로 눈뜨고 바라보라는 것이다.
◈ 주무시는 할머니의 경우에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즉 "목사님, 지금 하시는 목사님의 말씀도 그럴듯한데, 그런데 그것을 지금 우리 앞자리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에게 어떻게 납득을 시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장로가 기도할 때부터 자기 시작해서 목사가 축도하면 눈을 뜨는, 그래서 점심을 먹으면서 손자를 자랑하다가 집에 가는, 그런 할머니에게 이 주의 이름을 어떻게 납득을 시키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조차도 당연히 염려에 속하는데, 이것이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이단이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인데, 그러니 이단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단이 있다는 말과 주님의 은혜가 있다는 말이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기에 중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주님의 은혜가 있는 것으로 같이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목회자 자체가 주님의 일에 방해자로 등장해서, 그 중을 회개시키려고 덤벼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이, 중에게 뭐라고 하면 되는고 하니, "니가 공급받고 있는 햇볕과 공기는 누가 주신 것인지 아는가?"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중에게 이미 은혜가 임했다고 보면 되는데, 다만 그 중은 눈을 뜨지 못해서 부처가 은혜를 주는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대자대비한 부처가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이 주셨는데, 신약의 예수님이 말이다. 다메섹에서 사도바울과 만났던 바로 그 빛 되신 예수님이 말이다. 바로 그분이 지금 그 중에게 공기와 햇빛을 주시는데, 그런데 그 중은 부처가 주는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중에게, 마치 방위가 예비군 통지서를 돌리듯이, "아저씨, 여기에 예비군 훈련이 나왔네요" 라고 하듯이 그렇게 하면 되는데, 즉 "예수님이 주셨네요"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목사가 설득에 나선다는 것인데, 왜 그런가? 그것은 곧 목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의 교인으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배후에는 목사 자신이 자기 이름으로 일을 벌려서, 그 벌린 일에서 자기가 승리하겠다는 심보가 깔려있는 것인데, 하지만 이미 주의 이름으로 모두 승리를 해서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그러한 배후사정도 전혀 모르고, 주님이 주신 은혜를 그냥 부처가 은혜를 준 줄로 알고 있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받을 만해서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할머니의 경우에도, 주님의 은혜로 교회에 와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할머니에게 새삼스럽게 무엇을 고치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 할머니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인데, 물론 그 할머니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더라도 핑계치 못할 것이고 말이다.
◈ 할머니, 잠을 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
그러한 경우에 목사의 임무는 무엇인가? 할머니가 교회에 와서 그렇게 주무신다고 하면, 잠이 깨고 나면 "할머니, 할머니에게 그렇게 푹 주무시도록 낮잠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아세요?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무시는 할머니를 강대상 종을 두드려가면서 억지로 깨우려고 하지 말고, 다른 교인들까지 짜증나게 하지 말고 말이다. 억지로 그렇게 깨워도 5초도 안 되어서 다시 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를 깨워서 구속사를 집어 넣어봐야 그 할머니도 힘들고 목사 본인도 힘든다는 것이다. 그 다음 주일에는 그만 교회에 안 나오고 말이다. 그래서 목사는 그만 낙담을 해서 목회를 하지 못하겠다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 자기 전쟁이 아닌 주님의 전쟁 !!
하지만 이것은 낙담을 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목사 개인의 전쟁이 아니라 주님의 전쟁이기에,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주님의 전쟁이라고 해도 꼭 자기의 전쟁으로 만들어놓아야 기쁨을 느낀다는 말이다. 여전히 자기의 이름이 자기 속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평생을 가지 싶은데 말이다.
그러므로 남편이든 자식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이 다 지금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인데, 다만 그들의 사고방식이 넓게 보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들의 예수님의 영을 받아서 조금 더 넓게 바라보기를 기도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직접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고 설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여기서 교재 285페이지를 보겠는데, 참 어려운 내용이지만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 바로 이러한 이름의 사역에 기대를 걸고 의지하며 따른다면, 그들의 이름도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다. 주의 이름 안에서 새 이름, 즉 새 존재가 되는 것이다.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 아니, 하늘나라에 리스트가 !!
여기에 보면 하늘나라에 리스트가 있다는 것인데, 일종의 장부책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명부(名簿)' 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아무리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반드시 구원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말이다.
◈ 이삭 - 야곱에게는 축복하지 않을 거야 ??
어제도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이삭이 축복을 하면서 야곱에게는 절대로 축복이 가지 않는 방향으로 요건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사냥을 해서 얻은 별미를 자기에게 바치는 자에게 축복을 하겠다고 했다는 말이다. 당연히 야곱이 아닌 에서를 축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야곱은 이미 그 조건에서 제외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사냥과는 거리가 머니 말이다.
◈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택을 깨부수면서 !!
여기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을 깨부수면서 선택을 하신다" 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많이 어려운데, 하나님은 이미 인간들이 어떤 선택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박살내는 방향으로 선택을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그가 모든 것이 다 죄덩어리라고 해도 이 선택론 하나만은 맞더라" 라고 하는,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나쁜 짓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선택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인간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인간이 잘못되었다면,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택론도 역시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생명책 이야기는 어디 있는고 하니, 구약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을 달달 외우다시피 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과연 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알겠는가? 모르겠는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투철한 신앙심으로 완전 무장한 자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오직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바리새인들이든 사두개인들이든, 그 누구라도 전혀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의견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분명히 성경에 있는 말씀이니 말이다.
◈ 샌더스 - 유대인들이 다 틀린 것이 아니라 !!
여기에 대해서 목사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유대인들이 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그렇다" 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신학자가 '샌더스' 이고 말이다. 이 사람의 신학을 총신의 교수들이 다 동의하고 있고, 장신도 그렇고, 지금 한국의 신학교 교수들이 대부분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그 양반의 신학을 조금 더 소개를 하자면,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으라고만 한 것이지, 유대인들의 사상에 대해서 시비를 건 것은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신율사상(神律思想)' 인데, 즉 신이 주권적으로 지배한다고 성경해석을 주장했는데, 과연 그들의 무엇이 잘못이냐고,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소위 신학교 교수라는 인간들이 믿음이 없으니, 개척교회는 힘이 들어서 도저히 하기가 싫고, 그래서 외국으로 도망을 가서 학위를 따와서는, 그러면서 마치 새로운 믿음이 생긴 것처럼 행세를 하는 놈들이란 말이다. 그들이 바로 지금 총신이나 다른 신학교 교수들이라는 것이다.
◈ 유대인들은 모든 것이 다 엉터리 !!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라는 것인데,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들의 모든 것이 다 엉터리이고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성경관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다 말이다. 잘못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어떠한가? 그들도 역시 다 엉터리라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들 중에서 잘못되지 않은 자들이 있는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도 한결같이 자기 잘못을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대한 축자 영감설이나 유기적 영감설을 어떠한가? 그것도 역시 잘못이고, 삼위일체도 역시나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주의 이름' 외에는 진리가 없어 !!
물론 제가 여기에서 '잘못되었다' 라고 하는 것는 조금 수정하면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진리는 엄연히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 오직 '주의 이름' 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 말고는 이 땅에 진리가 없는가? 물론 당연히 없다는 말이다.
◈ 주의 이름이 일으키는 사건을 통해서 !!
그렇게 진리가 없으면 우리는 지옥에 가는가? 그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렇게 해서 일어난 사건이 곧 진리라는 말이다. 즉 진리가 비진리를 만나서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렇게 해서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는 회개하게 되고, 비성도는 더욱 더 발악을 한다는 것이다.
성도는 어떻게 회개하는가? "주여,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말이다. 여기에 비해서 비성도는 뭐라고 하는가? "제가 보다 더 완전한 신학을 만들어보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이것이 불신자의 모습인데, 즉 자기의 것을 전혀 삭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재 있는 자기 것을 삭제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오직 성령이 오셔야만 '내' 이름이 삭제가능 !!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이름이 그만 삭제를 당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이 일으킨 사건이고 진리의 사건인데 말이다. 하지만 성도가 아닌 자들은 어떻게 하는가? 자기 이름의 삭제가 아니라 더욱 더 자기 자신을 곤고히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회개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존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항상 나아가는데, 그래서 자기가 사라지면 이 세상도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예수도 역시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사라지면 다른 것들도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의 이름만이 영원한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가 영원하기를 소원한다는 것이다.
◈ 열 처녀의 비유에서 !!
어제 설교시간에 기름을 준비한 열 처녀들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왜 오시는고 하니, 천국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징벌하려고 오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천국을 사랑하는고 하니, 자기 자신을 불사의 존재, 즉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들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불멸의 존재로 삼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열 처녀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다같이 신랑을 기다렸다는 것인데, 즉 모두가 등불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신랑을 잘 한번 만나보겠다는 것인데, 다르게 표현하면, 천당에 가서 잘 한번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영원토록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예수님이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가리켜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 심판은, 가짜가 가짜로 드러나야 !!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을 하려고 오실 때는 어떻게 오시는고 하니, 모든 것들이 다 제대로 들통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신다는 것이다. 가짜가 확실하게 가짜로 드러나기까지 말이다. 그래서 그런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날 때까지 충분하게 더디게 더디게 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짜가 더 이상 자기 본색을 감추지 못하고 "에라이, 오려고 하면 오고, 오지 않으려고 말아라" 라고 할 때까지 말이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더 빠르든지 늦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가짜가 천당에 오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ㅋㅋ).
◈ 그래, 그냥 기다리지 뭐 !!
하지만 진짜로 천당에 가는 자들은 뭐라고 하는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즉 "내가 불사가 존재가 되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메시야가 필요해. 그래서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기다려야만 돼"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전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그런 자들은 나중에 기다리다가 지치면 포기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주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지금 준비를 하지 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름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데, 항상 오시기를 기다리기 때문에, 언제나 기름이 준비되어있다는 말이다. 즉 자기 사랑을 따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오실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고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일종의 자기 삭제인데, 기름이 바로 그런 삭제 기능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기름을 성령이라고 해도 좋고, 주의 이름이라고 해도 좋은데, 아무튼 이 기름은 자기 자신의 자기 사랑을 삭제하는 기능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자기 자신을 삭제하고 없애버리면서, 언제나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 목사님, 상담을 좀 !!
그런데 이러한 사랑에는 두 주인이 있을 수가 없는데,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어떤 여성과 이 메일로 상담을 하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으니 괜찮지 싶은데 말이다. 자기가 결혼할 적령기가 되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기가 좋은 남자는 자기를 싫어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남자는 자기를 좋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해결책을 좀 제시해 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무슨 예를 들었는고 하니까, 자기는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데, 영화관에 길이 아주 길게 늘어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영화를 보지 않으면 바보취급을 받으니, 그래서 할 수 없이 영화를 보았는데,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혹시나 싶어서 보았는데, 역시 아니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망한 그 사람이 다음 영화를 보기 위해서 또 다시 줄을 서 있다는 말이다.
◈ 결혼은 일종의 영화보기 !!
그러니 결혼이란 무엇인고 하니 일종의 호기심인데, 즉 영화보기와 같다는 것이다. 즉 남들이 다 보니 자기만 보지 않으면 그만 바보병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결혼문제로 고민하는 그 여성에게 말하기를 "왜 그렇게 줏대가 없습니까?" 라고 했는데, 물론 그 여성분은 아주 섭섭하게 생각을 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먼저 결혼한 결혼의 선배에게 한번 물어보라는 것이다. 도대체 결혼생활이 어떠한지를 말이다.
그러면서 제가 사도바울의 표현을 인용을 했는데, 즉 "영화를 본 사람은 보지 않은 사람처럼 여기고,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본 사람처럼 여기세요" 라고 말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이 세상의 흔적은 그냥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결혼은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보기인데, 강 집사님, 어떻게 그렇지 않은가요?
사람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