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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5대구강의12(교회를넘어서)19-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6-1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05대구강의12(교회를넘어서)19-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6-1

이름 : 구득영(IP:203.223.97.192)

[05 대구강의 12] - 교회를 넘어서 19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6

05,07,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예비된 몸'과 '인간의 몸' !!

먼저 교재 278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 모든 언약의 주체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예비해 놓으신 그 한 몸, 곧 예수님의 몸뿐이다.

(히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이렇듯 오직 하나님만이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 주인공임을 천명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예비된 몸과 인간의 몸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고전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여기서 말하는 '예비된 몸'은 어떤 기능이 있는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홀로 다 성취해야 되는 책무가 있는 몸, 그것이 곧 예비된 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반해서 '인간의 몸'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책임은 있는데, 그런데 전혀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자기 딴에는 말씀을 지킨다고 해봐야 자기 죄밖에 나오지 않는 몸,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다.

◈ '산 영'과 '살려주는 영' !!

그렇다고 하면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그 차이점이 위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듯이, 첫째 인간의 몸은 '산 영'이지만, 두 번째 예비된 몸은 '살려주는 영' 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비된 몸은 살려주어야만 하는 기능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예비된 몸에는 어떤 기능이 있는고 하니, 즉 예비된 몸은 인간의 몸이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법밖에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으니, 천하의 아담이라도 쫓아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누구든지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자기 법밖에 몰라 !!

아무튼 하나님은 자기 법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법에 대해서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이쿠,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냥 대충 지켜라. 내가 지키라고 한다고 해서 일일이 모두 다 지킬 필요는 없다" 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거룩한 나라에는 죄가 용납되지 않아 !!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법에 대해서 양보를 전혀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법을 지키지 않으면 '거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 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거룩에 실패를 하게 되면 거룩한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인정사정을 봐주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말이다. 즉 하늘나라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 거룩한 나라는 그 어떤 조금의 이물질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그만 폭발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 아니, 목사님이 포항공단에서 ??

제가 포항공단에 근무를 하고 있을 때(?), 거기서 제일 조심을 해야되는 것이 바로 3500도나 되는 그 용광로에 다른 이물질 들어가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어서 잘못되면 그만 폭발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도 있었고 말이다. 그 정도로 무섭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룩은 그것보다 더욱 무서운데, 그야말로 완벽한 거룩인데, 그런데 죄가 묻혀서 들어왔다고 하면, 그것은 도저히 용납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고라자손이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그만 땅이 갈라져서 불길이 올라와서 다 타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그렇게 데모한 인간들이 그만 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완벽한 거룩을 위해서는 완벽하게 법을 지켜야만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완벽한 법을 지키는 것은 오직 예비된 몸에만 해당이 되지, 우리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비된 몸이 바로 살려주는 영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다른 기능이 !!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다른 기능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모든 행동에는 무엇이 포함되는고 하니, "내가 그냥 살려줄게" 라는 것이 녹녹히 담겨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몸짓과 행위가 예수님의 공생애에 '쫙' 깔려있다는 말이다.

설교자는 바로 이러한 것을 밝혀낼 수 있어야만 하는데, 그러니 "잘해라. 잘만 하면 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살려줄게. 그래도 내가 살려줄게. 그렇게 개판을 쳐도 살려줄게" 라는 것이 예수님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 모이고 모아져서 예수님을 두고 '살려주는 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왜 '살려주는 몸'이 아닌 '살려주는 영' 인가?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왜 살려주는 몸이라고 하지 않고 살려주는 영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신비롭고 어려운데, 물론 성경에서 다른 것도 그렇지만 말이다. 이 '영' 이라는 것은 무슨 기능이 있는고 하니, 타인까지도 결합을 시키는 기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 영은, 성령 안에서 하나로 !!

다시 말해서, 성령의 특징 중에서, 몸은 다른데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어지는 기능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영에만 있는 기능인데, 그러니 몸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고린도전서 5장 3절을 한번 보자.

(고전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여기서 사도바울은 몸과 영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몸은 떠나있는 것이 가능한데, 그런데 영은 떠나있는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마태복음 마지막 장인 28장에도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고 하셨고 말이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사도바울은 혼자가 아니라 !!

바로 이것을 사도행전에서 그대로 다 보여주는데, 사도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도바울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 혼자만 덜렁 있었지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 옆에는 주님이 함께 계심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사도바울에게 "너는 반드시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기가 최선을 다하는 차원이 아니라, 즉 전혀 자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도 마찬가지인데, 목회가 결코 자기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자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인데, 주께서 옆에 서서 "지금 이것은 니가 아닌 내가 할 문제인데, 왜 니가 걱정하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문제라고 여기면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있기에 초조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 인간은 왜 초조해하는가?

제가 언제가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사람이 왜 초조감을 느끼는고 하니,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즉 초조해하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말이다. 남을 이기려고 말이다. 하지만 남을 이겨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이미 주께서 다 승리를 하셨는데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니 자기 주특기가 있어야 하고, 실력이 있어야만 하고, 또한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 든든하게 무장이 되어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이게 초조감과 불안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자슥아, 그래도 내가 너에게는 지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런 것 때문에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아무리 성경말씀을 찾아보아도 '이긴다' 라는 개념이 없는데, 오히려 "그래, 그래, 내가 졌다. 나는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할 게. 마음대로 나를 유린해라. 그래, 너는 잘 먹고 잘 살아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이고 또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약한 데서 생기는 능력 말이다.

◈ 너희들은 안 되지, 그러나 나는 돼 !!

아무튼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그 몸짓 하나 하나는, 즉 예수님의 언행과 심사에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까, "나를 본 받아라" 라는 모범이 아니라, "살려줄게. 나는 살려내는 영이야. 너희들은 할 수가 없지? 그러나 나는 할 수 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너희들은 못하지? 정말로 못하지?" 라는 것과, "그러나 나는 되거든" 라는 것이 항상 들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를 두고서 '언약' 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죄와 은혜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너희들은 못하지?" 라는 것은 죄이고, "그러나 나는 되거든" 라는 것은 은혜라고 한다는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전혀 불가능한 일인데, 하지만 부자가 천당에 가지를 못하는가? 간다는 말이다. 어떻게 가는가? "너희들은 못하지? 그러나 나는 되거든" 라는 것인데, 즉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을 증거하고 전파해야 될 자들이 곧 목회자인데, 즉 "너희들은 못하지? 그러나 나는 되거든" 라는 두 가지를 다 해야한다는 것이다.

◈ 엘리야의 경우에 !!

아무튼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절망케 해놓고서 찾아오시는데,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절망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서 대승을 하고 나서 말이다. '850:1'로 싸워서 이기고 나서 말이다. 로뎀나무 아래서 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굶어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왕상 19: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엘리야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일을 내가 한다" 라는 의식 때문에 그러한데, 하지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굳이 니가 아니더라도 남은 7000명이 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 대목의 결론인데, 그런데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있는고 하니까,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때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도, 번개 가운데서도, 바람 가운데도 계시지 않고, 그야말로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시는데,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뭐라고 하시는가? "니는 모든 선지자들이 다 죽고 니만 혼자 남았다고 우기는데,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7000명을 남겨놓았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절망하도록 해놓고 나서 그 다음에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또 절망케 하고 찾아오시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늘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절망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거룩은 피로서 뚫는 것이지, 성숙이 아니기에 !!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절망이 없으면 자꾸만 자기 행위를 의지하게 되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믿지를 않고 자기를 의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실컷 주의 일을 한다고 했는데, 돌아보면 자기 일이고 말이다. 사람이 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고 하니, 윤리적인 성숙을 기하려고 그렇게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성숙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전혀 아니기에 말이다. 거룩은 피로서 뚫는 것이지 성숙으로 뚫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예수님은 성령을 받고 공생애를 !!

계속해서 교재 278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영'이 나오는데, 이 '영' 이라는 것은, 몸과 몸을 결합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무엇을 받았는고 하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성령을 요단강에서 받았는데,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특히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예수님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즉 성령의 능력의 나타나심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복음서도 그렇지만 말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이다.

◈ 소경이 되는 것도 역시 기적 !!

이번에 서울에서 강의를 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 기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지만 멀쩡한 눈을 다시 감아서 소경이 되는 것은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것도 역시 기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흔히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소경이 눈을 뜨면 기적이지만, 그러나 다시 소경이 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장애인이 마라톤을 잘하면 기적이라고 여기지만, 그러나 마라톤 선수가 장애인이 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이 얼마나 인위적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자기 가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태도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야 하는데, 전혀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빈털털이 나오미에게 !!

룻기를 보면, 나오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 언제인고 하니, 모압으로 내려갈 때가 아니라, 남편이 죽고 아들도 두 명이나 다 죽고 난 다음인데, 즉 약속의 땅에서 가지고 온 것을 다 날리고 난 다음에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아니, 그때 하나님께서 그야말로 빈털털이가 되어버린 나오미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오미 가족은 약속의 땅에서 가지고 온 것을 모두 다 날려버리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인데, 즉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나오미 가정을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도박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제일로 위험할 때는 돈을 잃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돈을 딸 때인데, 물론 그런 경우는 실제로는 거의 없지만 말이다. 사람이 도박판에서 돈을 따게 되면 어떤 충동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렇게 해서 딴 돈을 다 날릴 때까지 그 도박판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전혀 아깝다고 여기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돈은 공짜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라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자기 돈도 날리고 공짜로 딴 돈도 결국 날리게 된다는 것이다.

◈ 먼저 자기에게 실망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할 수 없어 !!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죽은 자를 살리시고, 또한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인데, 그래서 항상 우리를 먼저 절망케 하고 낙담토록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실망을 하도록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게 실망을 하지 않으면 결코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실망해야하는데, 그렇게 해서 살려내는 영이 살려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은, 예수님이 함께 동행을 할 때 성령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어서 서로 연결을 시켜주는 것이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면, 성자께서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 우리들에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성령은 예수님과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해주시는데, 즉 살려주는 영과 산 영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성령께서 하신다는 말이다.

여기서 요한복음 14장을 잠시 살펴보자.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

여기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고아' 라는 말이다. 그리고 19절에도 보면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이 살았다고 하는 사실이 무엇으로 이어지는고 하니, 우리도 살겠다고 하는 것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 다음 차례는 우리 차례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살려내는 영으로서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

그리고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라고 하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그 날에는 성부 안에 성자가 계시고, 또한 성자 안에 성도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성도 안에 성자가 계시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논리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데, 즉 우리들의 논리에 의하면 큰 것 안에 작은 것이 포함이 되면 작은 것 안에는 큰 것이 포함이 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의 양적인 논리에 의하면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성부 안에 성자가 있고, 성자 안에 성도가 있는데, 이것이 언제 그러한고 하니, 성령이 오게 되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이 전체보다 더 크다는 말인가? 그러니 이것이 논리를 가지고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기를 가지고 말이다.

◈ 성도는, 자기 인생이 없어 !!

그러므로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성자 안에 성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성도의 경우에 이미 자기 인생은 이제 끝이 났다는 것이다. 성자가 인도하는 데로,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는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갈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로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명령법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이 모든 성경말씀은 우리가 다 지켜야만 되는 명령법으로 가득하게 차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고 난 상태에서 이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 말씀은 우리가 지켜야 되는 몫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즉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여기에 있는 이러한 말씀의 기준대로 우리를 이끌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끌려가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아하, 내 안에 다른 분이 계시는구나" 라고, 그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성도는 결국, "아하, 이제 사나죽으나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로구나" 라고 하는, 즉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다.

여기서 베드로전서 4장 10절 이하의 말씀을 한번 찾아보자.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우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

여기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라고 하는데, 그 은혜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11절의 말씀이란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봉사하는, 즉 말씀을 전하는 주체가 분명히 우리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만 빠져버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 다시 '산 영'과 '살려주는 영' !!

그렇다면 왜 이런 방정식이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그 앞서서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는 것도 전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당연히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은 것은 자기 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 힘밖에 없는 것을 두고서 '산 영'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산 영이 성령을 받게 되면, 산 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 움직이는데, 산 영은 백 날을 해봐야 죽음으로 가고 말이다. 하지만 살려내는 영이 계시게 되면, 우리가 그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항상 그것을 살려내는 식으로 우리 속에 예수님이 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 어떤 경우를 당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을 교재 279페이지를 통해서 한번 살펴보자.

** '몸' 이란 육체를 지니고 있는 당사자가 그 물질 덩어리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존하는 양식이다. 모든 것들은 몸 안에 여백이 없이 촘촘하면서도 나란히 뭉쳐져 있다.

◈ 몸은 죽고, 에어리언은 살고 !!

사실상 지금 여기에 나오는 것들이 다 중요하고 깊은 내용들을 함축하고 있는데, 지금 이 말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인간은 무려 60조에서 100조의 세포로 뭉쳐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포들이 어떻게 기능을 하는가? 놀라운 사실은 그 세포들이 각각 독립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옆에 있는 세포와 마구 싸우는데, 즉 세포는 하나의 독립적인 생물체로서 우리 몸에 기생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포는 누가 만들었는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괴물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괴물 이름을 곧 'DNA' 라고 하는데 말이다. 이 DNA가 단백질을 스스로 자기 복제를 해서 새로운 새끼를 까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세포가 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 세포의 모든 성장과정은 이미 자기 세포 속에 있는 그 DNA 새끼가 내장하고 있는 정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몸이 성장하는 것이 말이다. 자꾸만 DNA 새끼라고 하니 꼭 욕을 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ㅋㅋ).

◈ 왜 암이 발생하는가?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 당뇨가 오고 암에 걸리고 하는 것도 모두가 다 바로 이 DNA가 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동안 잠복되어있던 DNA가 나름대로 낯선 환경에 적응을 하다가보니까, 암 세포가 그만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암 세포가 다른 세포보다 더 우열을 취해서 성장을 해보니 결국 희생자가 누구인고 하니, 불쌍한 우리 몸이 그만 희생을 당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DNA는 살고 우리 몸은 죽고 말이다. 즉 우리 속에 에어리언이 있는데, 그 외계 괴물은 살고 우리는 죽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DNA 자체를 다른 DNA로 바꾸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바꾸려는 아이디어를 낸 DNA는 황우석 DNA(?) 라고 할 수 있는데, 일종의 돌연변이 DNA 라는 말이다. 즉 DNA 자체를 바꾸어서 건전한(?) DNA가 되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철학에서는 '자기 되먹임' 이라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한 줄로 언급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자기 되먹임으로 되어있다" 라고 말이다.

◈ 내 몸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해 !!

흔히들 하는 말 중에서 웃으면 몸에 좋고 건강해진다고 하는데, '소문만복래' 라는 말도 있고 말이다. 마침 오랜만에 어제 TV를 어쩌다가 한번 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나와서 자기는 웃음으로서 암이 나았다고 하던데, 즉 웃으면 엔돌핀이 나와서 자기는 그렇게 암이 나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전혀 웃지 않는 사람은 무엇인가? 그것도 역시 DNA가 그렇게 시키는 것인데, 소위 집안내력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간에 항상 찡그리고 다닌다는 말이다. 둘리에 나오는 고길동이 처럼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몸'이라는 육체를 지니고 있는 당사자가 가장 그 물질 덩어리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존하는 양식이다. 모든 것들은 몸 안에 여백이 없이 촘촘하면서도 나란히 뭉쳐져 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아무튼 인간은 자기 몸 안에 여백이 전혀 없는데, 그렇게 여백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곧 완료성인데, 즉 "내 몸도 내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흔히들 정신력으로 이긴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력은 결과의 문제이지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여기에서 말하는 정신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촘촘하게 여백이 없이 뭉쳐진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 곧 정신이란 말이다. 이렇게 자기 육체에서 나온 정신이 자기 육체에게 다시 압력을 가하니, 그것이 바로 '되먹임' 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육체를 지닌 인간이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육체 내부의 밀집성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띠는 해체의 질서인데, 즉 분리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육체가 해리(解離)되면 모든 것이 다 끝장이라고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이다.

◈ 해체의 질서가 곧 죽음 !!

여기서 말하는 해체의 질서가 곧 죽음인데, 사람은 자기 몸이 떨어지고 달아나는 것은 굉장히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은 무엇인고 하니, 떨어진 그 육체를 다시 끌어 모으는 것, 그것이 곧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부모의 자식 사랑인데, 그 이전까지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에피투리아(?)' 사랑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아가페 사랑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아가페의 사랑을 하늘의 사랑이라고 하면, 그것에 버금가는 지상의 사랑이 바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도 보면 나오는데,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제 아무리 아비가 악해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이놈아, 그냥 옆 동에 살림을 차려 !!

왜 사람들이 남의 자식을 두고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떨어져서 나간 것을 다시 회수하고 싶은 본능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니가 백 날을 떨어져나가도 니는 내 자식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이 결혼을 해도 항상 자기 집 주위에 두기를 원하는데, 아마 우리 강 집사님도 그렇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옆에 두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자기 자식이 근처에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람은 자기 자식이 떨어져있으면 죽음을 느끼는데, 물론 자식이 곁에 있으면 생명을 느끼고 말이다. 그러니 생명은 자기 몸의 확장인데, 그래서 영혼불멸설 등이 등장하고 말이다. 그렇게 되니 죽음은 무엇인가? 자기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말하는데, 즉 자기 몸이 사라지는 것을 말이다.

왜 그런가?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의 몸으로서, 바로 그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몸에서 모든 생각도, 신념도, 관념도 다 나온다는 것이다. 즉 하나밖에 없는 자기 육체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몸이 사리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이 자기 육체를 집착하는 이유는, 이런 해리와 기관의 무질서를 해소하겠다는 의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도덕이라든지 윤리라는 것도, 실상은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잡고서 그 대상과의 연결력 내지는 유합력(癒合力)을 시도하는 힘의 행사이다.

◈ 윤리와 도덕 - 내 몸을 보다 더 단단하게 !!

그러니 인간들이 주장하는 윤리와 도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자기가 추스리겠다는 것인데, 즉 자기 몸이 해리되지 않고 분산이 되지 않고 더 단단하게 말이다. 그것을 '유합력' 이라고 하는데, 연결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자기 몸이 더욱 더 단단하게 뭉치게 하는데 동원되는 것이 윤리이고 도덕이라는 말이다.

가정윤리나 사회윤리가 무엇인고 하니,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라는 것인데, 그러므로 제가 지금 하는 강의하고 얼마나 다르냐는 것이다. 흩어져도 생명이라는 것이 아니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매일같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원리라는 것이다.

흔히 'QT' 라고 하는데, 왜 아침에 'QT'를 하는가? "내 몸아, 제발 흩어지지 말고 내 몸을 좀 유지해다오" 라는 것인데, 즉 사고가 나서 팔 다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 혼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보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것을 결국 무엇을 무시하는고 하니, 다음 두 가지를 무시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첫째는 자기 몸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고, 또 둘째는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 이라는 사실을 모독하는, 즉 예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첫째는 자기가 죄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둘째는 살려주는 영이 자기 곁에 있음을 인정하기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몸을 지닌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소유하는 그 방식으로 계속해서 주변의 것들을 잠식해나감으로서, 몸의 팽창과 자기 질서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것이 곧 진리(眞理)라고 규정하며, 정의(正義)이며 선(善)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신학이고 윤리철학인데, 그 어떤 책들을 보더라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데, 바로 여기에 있는 이 한 문장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즉 "내 육체의 확장" 이라는 것에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이고 정의이고 선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러한 진리관으로 인간은 눈에 뜨이는 모든 것들과 접촉하고 결합을 하며, 소유하는 형태로서, '산 영'으로서 그 고유성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 라고 말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모두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는 지금 죽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차라리 그렇게 "나는 살아있다" 라고 하지 말고, "나에게는 살려주시는 분이 있다, 살려주시는 분이 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믿음이고 예수님만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공로만 높이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분이 자기를 위해서 돌아가신 분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은 무엇을 해도 이러한 행태를 보인다. 성전이라든지, 신을 위한 모임을 결성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왕 '산 영'이기에 이 '산 영'을 기반으로 해서 신과 접촉을 시도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성전과 교회는 자신의 몸과 해리되지 않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자신이 곧 성전의 일부가 되어보고자 한다.

◈ '살려내는 영'의 교회는, '산 영'이 할 것이 없어 !!

그렇게 '살려주는 영'이 아니라 '산 영'으로 한번 신과 접촉하겠다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또 엉터리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 '산 영'에서 나오는 것으로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이런 '산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려내는 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것이 곧 교회라는 말이다.

그렇게 '살려내는 영'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런 '살려내는 영'에서 나온 교회는 '산 영'이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특징인데, 그런 '살려내는 영'의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은 마치 요나처럼, 엘리야처럼, 이사야처럼, 세례요한처럼, 그리고 사도바울처럼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도무지 자기가 무엇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증거할 뿐이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들은 모든 것을 '산 영', 즉 '자기 몸'을 중추로 해서 해석을 하기 때문에 성전이라는 건축물도 인간의 힘과 연관시켜 생각한다. 인간의 정성으로 유지될 수 있는 성전을 하나님도 받아주시기를 원한다.

◈ 聖殿은, 聖戰에서 승리한 승리자의 기념관 !!

이전에도 이야기를 했는데, 성전이 무엇인고 하니, 전쟁에서 승리한 승리자의 기념관이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전쟁을 신들이 했는데, 바로 그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준 신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 성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성전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전리품이 가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전리품 중에서 최고의 전리품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즉 하나님께서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어서, 그래서 그 악한 영들과 싸워서 이겨서 구출해내어서 생긴 하나님의 '자기 백성',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자기 백성 속에 함께 있겠다고 하는 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성전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처소를 같이 하시겠다는 것이다.

◈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러므로 성전, 즉 예배당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들이 모여야 하는데, 하지만 인간들이 만든 예배당은 무엇인가? 인간들의 재력과 소유력, 즉 돈이나 재산 등이 모여있기 때문에, 그런 예배당은 인간들이 이렇게 잘났다고 하는 것을 기념하는 인간의 공로와 인간의 간증집회, 그리고 인간의 종교적인 성과를 높이 기리는 곳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만큼 잘났다"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영원토록 각인시키고 새기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이 책에서 '회관'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을 집어넣었는가?

이렇게 인간은 자기의 '산 영'을 절대시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산 영' 속에 무엇을 집어넣었는가?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그렇게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누가 집어넣었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전혀 이러한 점을 모르고 있는데, 자기가 힘이 빠져서 죽는 것으로 알고 있지 말이다. 그래서 죽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사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말이다.

하지만 살아있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자랑거리가 아닌데, 왜냐하면 나중에 악한 자도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해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악한 자도 부활이 되니 말이다. 물론 악한 자는 저주의 부활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저주받은 몸을 가지고서 부활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가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지독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악한 자는 저주의 부활을, 선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쪽이 다 살아있는데, 한 쪽은 저주스럽게 이를 갈면서 통곡을 하라고 살아있고, 다른 쪽은 영광의 부활이고 말이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하나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

제가 어제 설교를 하면서, 이를 갈게 되면 나중에는 갈 이빨조차도 없다고 했는데, 닳지 않는 이빨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계속해서 갈아야 하는데, 그리고 구더기도 타는데 소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를 때, 마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고 소실이 되지 않듯이 말이다. 참으로 희한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에너지 법칙에 어긋나는데, 왜냐하면 불이라는 것은 물질 속에 있는 조직 에너지가 열 에너지로 변하는 것인데, 산소와 결합해서 말이다. 그것이 물리학에서 말하는 불인데, 그래서 산소가 없는 곳에는 불이 없다는 말이다.

◈ 과학의 한계성은?

그런데 출애굽기에 나오는 떨기나무는 불에 타면서도 자기 원소에 포함되어있는 에너지는 소실되지 않는데, 그렇다면 그 불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왔는가? 뉴턴도 아인쉬타인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물리학이 알기는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개뿔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청조를 믿는다고 하는 창조과학회' 라고 있는데, 그들을 보고 한번 설명을 해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근본적으로 과학이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과학이 도저히 설명하지 못하는데, 물론 죽은 자를 살려내지를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면서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살아계심은 십자가를 통해서 분명히 증거되는데, 그냥 추상적인 신 개념은 오직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야, 하나님은 일을 저렇게 하시는구나" 라고, 그러한 주님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치고 감탄하게 된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경우에, 남에게 미움을 받아도 목회를 해야함을 느끼고 말이다. 즉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 다시, 죽음을 누가 주셨는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죽음을 누가 주셨는가? 죽음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 것에 대해서 전혀 자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 하나님의 법인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에 자책감을 느껴야 하지 말이다. 하지만 자기 죽는 문제로 자책감을 느낀다고 하면, 결국 자기 비통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 김광섭의 '서른 즈음'에 !!

이번 8월초에 십자가 마을 여름수련회를 할 때에, 가수 김광섭이 부른 '서른 즈음에' 이라는 노래에 대해서 하려고 하는데, 이번에 죽은 가수인데 말이다. 그 강의의 원, 투, 쓰리가 무엇인고 하니, '원'은 연옥에 관한 것인데, 또한 '투'는 김형희 씨가 쓴 글인데, "니가 유영철보다 더 착하냐?" 라는 것인데, 참으로 독하고 별난 사람이라는 말이다. 사람을 20명 이상이나 죽인 살인범 유영철이보다 착하냐고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그리고 '쓰리'가 바로 이 '서른 즈음에' 라는 노랫말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야말로 항상 이별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왜곡하는 것인지 모르는데, 죽음을 하나님이 집어넣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자살을 했는데, 물론 김현식은 술을 많이 마시고 해서 건강을 해쳐서 죽은 것이고 말이다.

이 양반이 왜 자살을 택했겠는가? 노랫말에도 나오지만, 왜 점점 더 멀어져 가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이 양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오늘 교회에 나오는 젊은이들과 모든 사람들에게도 다 해당이 되는 이야기인데, 즉 교회에 나오는데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예수님을 이렇게 열심히 믿는데 왜 사업이 안 되느냐는 말이다. 즉 자기가 기대했던 것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먼저 자기가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 가사 처음에 보면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라고 시작을 하는데, 이것을 강의 첫 시간에 당겨서 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집에 가지 못하도록 말이다(ㅋㅋ).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는데, 이번에 집회를 하는 울산동은교회는 기존 찬송가 가사도 더럽다고 시편으로 된 찬송가를 사용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광섭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되면, 그동안 성령이 곳곳에 스며있던 그 공간에 유행가 가사가 섞이게 되면 교인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데 말이다(ㅋㅋ). 그 양반이 직접 부른 노래를 구해서 직접 들으면서 해야하는데, 누군가가 하나 구해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 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

아무튼 그건 그렇고, 창세기 2장 말고 3장 이후에 하나님께선 아담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만들고 말았는데, 즉 "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말이다. 그렇게 흙으로 돌아가면 더 이상 아담은 없다는 것이다. 아담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제 아담으로서 흙이 아니라, 그냥 흙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아담은 어디에 가 있는가?"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언제 아담인고 하니까 살아있을 때의 아담인데, 즉 살아있을 때만 그 이름이 '아담' 이라는 말이다. 몸체나 자아는 어디로 갔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주님이 아담으로 묻는 것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만 그렇게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 '이름'은 하나님이 불러서 쓰실 때만 !!

이것이 정말이지 어려운 말인데, 예를 들어서, '이근호' 라는 이름은 이근호라는 몸체를 가지고 이근호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근호라고 다루실 때만 이근호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근호라는 이름은 없는데, 그것은 아담에 포함이 되어버린 이름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이름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곧 '아담' 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데, "목사님, 왜 그렇게 되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이 이름을 지을 때 그냥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과 기능이 하나가 되라고 짓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 '야곱'이 '이스라엘'로 !!

그래서 창세기에서 '야곱' 이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이름이 듣기 좋아라고 바꾼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 속에 있는 기능을 따라서 야곱은 이제 좋든 싫든 간에 자기는 이스라엘이 되어야만 하고, 그것은 전혀 자기에게 선택의 여지나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아담이라고 했으면 우리는 아담이 되는데, 즉 흙이 될 때가지 아담의 기능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의 경우에 부활이 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형제 기능을 하게 되는데, '양자'의 이름을 가지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이름도 나중에 '이스라엘'이 되는데, 그러므로 이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이 전혀 취소가 되지 않는데, 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야곱뿐만이 아니라, 야곱의 후손들도 모두 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 144,000명은 야곱이 깐 새끼들 !!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성도라고 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야곱의 지파가 12지파이고, 그들이 새끼를 깐 것이 곧 144,000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다 어디에 속하겠는가? 당연히 여기에 속하는 말이다.

(계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나다나엘' 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하면, 그 이름을 예수님이 부르시는데, "이봐라, 나다나엘아?" 라고 말이다. 그렇게 살아있을 때는 나다나엘이지만, 그런데 예수님이 그 뒤에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참 이스라엘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의 경우에도, 그 '베드로' 라는 이름의 기능은, 즉 베드로는 살아있을 때는 교회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반석'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 왜 교회에 가는 것이 겁이 나는가?

이러한 사실들을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교인들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리를 설교시간에 듣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 교회에 가는 것을 겁을 내는데,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가 구축한 자기 세계가 그만 '푹' 파여서 날아가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존의 있는 것을 수정하기를 원하지, 있는 것을 다 깨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큰 모험이고 위험한 짓으로 여기니 말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갈수록 모이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목사는 "점점 더 적어져 가네" 라고 노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깨어지지 않고 수정을 하고 보충하려고 나온 사람들은 당연히 기존 교회에 나가게 되는데, 자기를 무너뜨리는 말씀은 겁이 나서 보기는커녕 그냥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친목이나 도모하고 말이다.

◈ 하나님은 왜 죽음을 인간에게 주셨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죽음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는가? 그것이 교재 281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성전의 제단은 '인간 죽음'의 극치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없음'의 상태, 즉 '모든 것이 죽어있음의 상태'로 되돌려놓은 것이다.

이것이 참 재미있는데(?), 하나님은 아담을 죽이는데, 왜 죽이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죽음을 가지고 인간은 악마와 한통속에 되었음을 밝혀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인간을 몰아넣는데, 인간을 계속해서 인질로 잡아서 어디까지 가는고 하니, 악마를 만날 때까지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경찰들이 마약을 거래하는 현장을 적발하고도 그 현장에서 범인들을 곧 바로 체포하지 않는데, 그것은 바로 그 마약을 거래하도록 하는 주동자를 잡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잠복근무를 하면서 계속해서 뒤를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을 줌으로서, 그 인간으로 하여금 죽어가면서도 살려고 매달리는데, 그렇게 매달리는 방식이 바로 분명히 악마와 결탁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시점을 잡아서 양쪽을 다 때려잡기 위해서 주님은 인간을 계속해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죽음이 처음에는 아담에게는 단순히 "아이쿠, 이제 내가 죽는구나" 라고 다가왔다가, 하지만 나중에는 그 죽음이 그냥 자기가 죽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도 죽지만 남도 죽이는 것까지 그 죽음의 속성이 그만 까밝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이라는 말이다.

◈ 결국에는 악마가 메시야를 !!

그렇게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속성이 발전되게 되면, 결국에는 악마가 메시야를 죽이게 되는, 그렇게 메시야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악마의 본심이었는데, 물론 그동안 인간들은 그것을 몰랐었고 말이다. 유대인들은 전혀 그러한 사실을 몰랐는데, 자기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십일조를 하고 율법을 지키면 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레미야서 등에 나오는데 말이다.

바로 그 십계명을 지키겠다는 것이, 그것이 바로 메시야를 죽이라고 하는 악마의 저의가 깔려있음을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의 그러한 모습이 메시야를 죽이겠다 라는 것이 잠복되어있을 몰랐다는 말이다.

◈ '미리암'의 경우에 !!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자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 이라는 여자가 주동을 해서 찬양대를 조직했는데, 그녀가 직접 작사작곡을 해서 찬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수기 12장에 보면 그만 이 여자가 어떤 짓거리를 하게 되는가? 그녀의 사고방식을 보게 되면, 즉 "모세, 니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하나님을 안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문둥병에 걸리게 되는데 말이다.

(민 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민 12: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민 12:13)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민 12: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가 칠일간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 밖에 칠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

그것이 곧 악마의 음성인데, 이 악마가 항상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너희들만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라, 나도 예수를 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예수를 안다고 하는 악마가 결국은 예수를 어떻게 하는가? 그만 죽이고 만다는 것이다.

◈ 결국, 하나님의 선택을 파괴시키는 미리암 !!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미리암이 자기가 직접 주동해서 하나님을 찬양까지 했는데, 그런데 그러한 믿음이 좋은(?) 미리암이 뭐라고 했는가? "모세야, 니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하나님을 안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결국 무엇을 파괴시키는가? 하나님의 선택을 파괴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모세만 하나님께서 선택했다는데 대해서, 즉 시내산에서 직접 모세 혼자서 하나님을 독대했다고 하는, 바로 그러한 독대성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전혀 모세가 알아서 시내산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셔서 그렇게 되었는데 말이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선택을 모독하고, "니만 하나님을 아나? 나도 안다" 라고 하니, 결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둥병에 걸리게 되면, 남자의 경우에는 피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괜찮을지 몰라도(?) 여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데, 차리지 죽는 것이 낫지 말이다.

◈ 머리를 깎는 독한 년들의 경우에 !!

그리고 여자가 머리를 완전히 깎는다는 것도, 그야말로 보통으로 지독한 경우가 아닌데, 그래서 10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기도를 하는지 몰라도 말이다. 아무튼 여자가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의 쓴 맛과 단 맛을 모두 다 맛보았다는 것인데, 절에 가면 그런 비구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말이다.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삭발을 하는데, 그야말로 한에 서린 여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지독하게 자기 집착증이 있는 여자가 문둥병에 걸렸다고 하면,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민수기 12장 14절에 보면,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가 칠일간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라고 하셨는데, 즉 지금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경말씀을 살펴보면, 그 깊은 연결고리와 내막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를 하자면 !!

아무튼 다시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아담에게 죽음을 준 것은, 그 죽음의 끝이 어디에 와 닿는고 하니, 악마의 본심과 맞닿아있다고 하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죽음을 일단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죽어가면서도 자기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아담 개인뿐만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다 그러한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뭐라고 외치는가? "나는 죽으면 안 돼. 살아야만 돼" 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까 말한 곧 신체의 흩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유합력이고 말이다. 즉 인간의 생존본능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메시야마저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메시야마저도 죽인다는 것이다.

◈ 아담은 장차 오실 아담의 표상 !!

하지만 전체적인 진리의 측면에서 보게 되면, 즉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아담을 죽인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살려내는 영' 이라는 것을, 이렇게 '산 영'이 이렇게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는, 즉 인간은 그렇게 무능력하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비로소 살려낸다고 하는, 그런 적극성(?)이 표출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봐서 말이다. 그러니까 "아담은 오실 아담의 표상이다" 라는 로마서 5장의 말씀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 제대로 된 표현인데, 즉 '모형' 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담 개인으로 봐서는 모형이고 표상이고 간에,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길을 가는 사람을 잡고 어디 한번 물어보라는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라고 하면 관심을 가지는지 말이다. 그냥 인간 개인은 밥이나 먹고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이렇게 아담이 오실 예수님의 모형이라는 것은, 아담이 잘났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아무리 살려고 해도 살려고 해도 결코 살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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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2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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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