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4:43-51 (도망치는 제자들)
막 14:43-51 (도망치는 제자들)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 : 마가복음 14장43-51절
제목 : 도망치는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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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8-16 13:27
도망치는 제자들
2009년 8월 16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4:43-51
(막 14:43, 개정)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막 14:44, 개정)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막 14:45, 개정)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막 14:46, 개정)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막 14:47, 개정)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막 14:48, 개정)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막 14:49, 개정)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막 14:50, 개정)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막 14:51, 개정)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막 14:52, 개정)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예수님과 함께 한 자들이 도망칩니다. 이로서 그들은 스스로 예수님과 같이 했다 여기는 시간들도 실은 따로 있었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 몸이 사는 수를 생각해오면서 살아온 겁니다. 단 한시도 죽어야 될 자신임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줄 알았습니다. 어제까지 살아온 나 자신이 오늘도 기어이 살아야 한다는 본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실제 천국은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세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자기 몸 보전이 우선인 인간들에게 있어 ‘예수님 사랑’이란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쓴 잔을 홀로 마셔야 하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본질을 깔끔하게 폭로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우기기 전에 먼저 예수님은 우리 자신의 정체부터 밝혀내는 작업을 수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9절에 보면, “이는 말씀을 응하게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도 제자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 자신의 본심대로 움직여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흔히 ‘믿습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믿고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안 믿어도 믿어지면 그만인데 원낙 믿어지지 아니하니 ‘믿으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믿고 행할 수 있는 말씀을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말씀은 오직 예수님 홀로 이룰 수 있는 말씀 뿐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만드실까요? 여기에 바로 선택이 작용합니다.
시편 135:4에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이 말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더 이상 선택권이 없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자기 운명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부려질 뿐입니다. 선택권이 박탈당한 민족이 그들입니다. 로빈스 크루소라는 책을 보면, 크루소라는 영국 사람이 무인도에게 지내다가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온 내용을 쓴 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원주님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크루소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Friday’입니다. 즉 ‘금요일’이라는 이름입니다. 왜 이름이 ‘금요일’인가 하면 크루소가 그 원주민을 처음 만났을 때가 마침 금요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이 호명하면 그 호명된 이름 속에서 비로소 원주민은 ‘나는 이러이러한 인간’이라고 정립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내가 누구지도 모르면서 서로를 호명하지만 이런 호명 속에서는 그 어떤 구원의 능력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누구를 불러주면 그 호명속에서는 미래와 확정된 신분의 능력이 이미 담겨있게 마련입니다. 즉 이미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호명당한 자들은 벌써 확정된 자기 신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감사하게 됩니다. 야곱의 형 에서의 운명이 바로 이와같았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며 살아도 실제적들의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그들의 미래에 도달된 그 신분이 앞당겨져서 그들을 인도한 것입니다. 즉 ‘저기 있는 미래가 이리로 온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코스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시편 135:1-3에 보면, “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찬양이란 원래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천사의 위대한 업무를 이스라엘 그들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그 어떤 독자적인 판단이나 선택권을 발휘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무엇이든지 선택권을 행사할 입장이 못된다는 말은 본인들의 자의에 의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반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자신의 주장을 부인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사태로 몰아가십니다. 자기로서도 어쩔 수 없이 본심이 드러나고 마는 상황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이 일에 도움되는 자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자신이 가야될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도망친 나머지 제자들은 상당히 당황스러움 속에서도 여전히 추가적 사건이 그들을 덮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당황스러움 속에는 뭐가 숨어있느냐 하며는 나의 세계를 나의 식대로 따로 장만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나의 세계가 든든하게 장만된다면 겉으로 ‘할렐루야’이지만 속으로는 그동안의 자기 노고나 자기 공로에 흠집이 나지 않기를 단도리하고 자신의 영광성을 더욱더 키워내고 싶은 욕망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역이 침범을 받아 와해직전에 있다면 그 어느 인간이든 ‘어쩔 줄을 모르게’ 됩니다. 즉 “애초부터 여기에서 여기까지 나의 절대 영역인데 이것이 무너진다면 나는 무슨 의미로 산단 말인가!”하고 탄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란 자기 영역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방향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하신 일은 바로 ‘쓴 잔’에 있었습니다. 이 쓴 잔 마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도움을 요청하시면서 기도를 간절히 하신 것입니다. 이 ‘쓴 잔’ 속에는 도망친 인간들의 죄까지 면제해주는 요소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담당하심’입니다. 이 ‘담당하심’의 업무가 마무리 되려면 도망친 제자들 마음 속에 허락도 업이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도록 조치하는 일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들은 할렐루야 하나님의 공로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쓴 자에 대해서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찬미하고 할렐루야 양광 돌리고 찬양하는 천사와 같은 기능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몸이 된다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 어떤 일도 우리가 천국으로 데려가는 필수 코스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5:50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75강-막14장43-51(도망치는제자들)-mar090816.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