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용서(이웃사랑실천)가 사기인 이유?
인간의 용서(이웃사랑실천)가 사기인 이유?
이름 : 김대식(IP:124.59.85.46)
글을 읽어보시고, 이 글에 대한 반박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제가 쓴 글 입니다.
인간의 용서(이웃사랑실천: 행함)가 사기인 이유?
이번 수련회 강의가
[행할 것이 있음]과 [행할 것이 없음]의 차이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것은 곧 역사와 묵시의 차이요
허물어져서 다시는 일어서지 않는 성전과 영원한 성전의 차이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실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말씀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늘 장난으로 삼는 목사와 장로의 습관적인 말뿐인 것이 실제상황으로써 벌어지면서 말이다.
그 실제상황은 놀랍게도 행할 것이 없음을 앞장세우면서 진행된다.
곧 성령이다.
예수님은 세례요한과의 만남 조차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세례요한은 반드시 자신이 세례를 도리어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면서 반드시 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허락하신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머리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목격해야만 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고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내 아들이다 라는 음성을 들어야 했다.
즉 성령을 거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누구인지 모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세전의 노선이다.
지금 자신의 시선으로 충분히 판단 가능한 해석될 수 있는 예수가 아닌
도저히 해석 불가로써 창세전으로 되돌림을 당하는 성령에 이끌려서 예수님을 창세전의 시선으로써 해석해야만 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인간들이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말을 한다.
인간은 왜 해석을 못하는고 하니 해석행위 자체를 자신에게 주체로 두고 있기에
해석행위자 주체성을 도저히 타인에게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판단도 되고 해석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뻔히 보이는데 안 보인다고 할 수 없고
뻔히 판단이 되는데 판단불가 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런 인간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도저히 말귀를 알아먹을수 없는 말만 한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 보다 잎선 것은 나 보다 먼저 계시며
나는 신들메 풀기도(노예 중에 가장 하급직이 하는 일 : 신발끈 푸는 노예) 감당 못하겠다
그는 흥하고 나는 패(망하고 죽어 마땅, 누락, 쇠약, 끊쳐짐, 버림)해야 한다.
(요 1:15, 개역)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 1:27, 개역)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 1:30, 개역)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 3:30, 개역)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것이 세례요한이 성령을 거쳐서 예수님을 목격한 목격담이다.
말이 길어 질 것 같아 짧게 하고자 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용서는 정치다.
왜냐하면 행할 것으로서 나타난 역사 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묵시가 아니다. 성령을 거치지 않고 자신에게서도 충분히 나올수 있는 가능성이다고 본 것이다. 놀랍게도 한 번 용서하면 상대방은 두 번 용서를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벌리게 된다. 그렇다면 용서는 인간의 숙제가 아니라. 성령을 거쳐서 봐야할 문제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그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이 용서를 많이 한 자임을 밝히고자 상대방을 이용하는 수가 있다.
마치 타인의 무지와 병듬과 죄짖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선생됨의 가르침과 의사 노릇 또는 병고침과 죄를 사하는 양잡는 제사지내는 것이 정당화 된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너가 선지자냐 라고 물었을때에 아니 그런 답을 요구하면서 낚을려고 다가오는 제사장과 그 그룹들에게 [아니요] 라고 대답한다.
만약에 맞다 라고 대답하게 되면 악마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계파가 나누어지고 생각이 다르고 분리되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귀 라는 공통분모에서 살고 있는 역사만을 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아니요]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얍삽하고 뻔뻔스럽게
타인의 무지와 병듬과 죄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빠져버리고
자신의 뒤에 오실 분만을 소개해 버린다.
창세전의 노선이 덮쳤기에 자신의 선지자 됨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용서자 됨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직분과 할 일과 사명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뒤로 빠져 버리면서 뒤에 오신 분에게 다 떠맡겨 버리고
그 분이 먼저 계신분이다 라고 창세전의 노선인 묵시를 외쳐 버리고
무대 뒤로 빠져 버린다.
묵시를 앞장세우는 이유가 뭘까?
역사는 묵시에 의해서 사라지고 삭제 당할 판국에
자신의 선지자 됨을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의 용서가 그래서 악마 짓이다.
인간의 용서는 아무리 용써도 묵시를 증거하거나, 그릇으로써 묵시를 담지 못한다.
도리어 역사를 기념비화 해서 영원히 자기 밥풀떼기로 삼기 때문이다.
그거 주장하던 율법사가 예수님의 입을 이용해서 자신의 두 계명을 지킴을 과시할려다가
도리어 보기좋게 쭐떡 미끄려 졌다.
예수님을 잘못 본 것이다. 세례요한처럼 성령을 거쳐서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과 판단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예수님이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줄 착각한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게 되니
살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비로소 없던 마음이 생겨버린 것이다.
역사를 주장하다 묵시를 제거 할려고 매진 한다. 돌 잘 못 건드렸다.
인간의 용서는 예수님의 무조건적 용서를 제거하고자 발악한다.
예수님의 무조건 용서 라는 그 무조건이란
인간들 또한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이라는 것은 묵시 이다는 뜻이다. 창세전의 노선이요 예정이요 계획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것을 자기 숙제인냥 역사로 본다.
자 그럼 묵시 인지 아닌지 시시비비 과연 따져 볼까?
묵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용서는 창세전의 노선이 맞고
영원한 용서요 무조건적인 아무 보상과 댓가가 없는 용서다.
미래 완료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에서 조차도 다시 살수 없다.
남을 사랑하는 자가 율법의 완성이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에 갇혀 버린다.
남을 용서 했으니 그 사람을 영원히 자기유익과 자랑에 이용해 먹는다.
그리고 죽어서 다시 일어날 수 없으니 역사 속에서도 안개일 뿐이다.
인간이 타인을 한번 용서하면 시끄럽다. 입을 꾸매지 않으면 그 자랑을 멈출길이 없다.
미흡함 뿐이다.
무조건은 역사의 노선이 아닌 역사 이 전의 창세전의 노선이다.
무조건은 첫사랑처럼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마냥 사랑하신 것이다. 처음자리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조건을 아무리 이렇게 설명해 줘도
자신이 행해야 하는 숙제로 본다.
이런 사람이 교체 당하는 길은 딱 하나다.
우리 인간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또 세례요한이라는 선지자가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한다.
십자가는 역사의 사건이 아니라
묵시의 사건이기에
그 사람에게 생전 격도 보도 못한
인자의 죽음이 십자가의 사건으로써 그 사람에게 덮쳐져야 한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7번 용서 할 게 아니라. 7에 70 490번 무한대?
아니다. 베드로는 타인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7은 창조의 단위요 묵시의 세계다.
베드로는 도리어 용서 받아야 한다. 창조함을 받아야 한다.
7번 용서를 어렵게 해 온 것 조차 죄로 봐야 한다.
남 용서 할 입장이 아닌 (십자가를 진 적이 없기에)
도리어 용서 받아야 할 입장 뿐이다는 것(행할 것이 없음, 다윗이 롬4장에 표현한 믿음)
이것이 묵시에서 묵시로 (역사는 누락 당함을 외쳐야 한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인간의 믿음 인간의 행함을 [아니요] 라고 외쳐야 한다.)
주 께서 내 주께 라는 의미이고 (다윗은 빠져야 한다 -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
아버지 소원에서 아들의 소원으로만 이루어질 뿐이다. (인간의 소원 곧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이 왜 틀려야만 하는지를 차이를 드러내도록 되어 있다)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막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1,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9, 개역)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눅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눅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인간은 철저하게 소외 당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계획(예정)에서 참여 거부 당했다)
이 묵시의 계획인 용서에 소외 당해야 한다. 무조건 소외 당함 이다.
용서 라는 묵시세계 창조행위 창세전의 노선을
감히 인간이 했다고 자부하고 나서는 순간부터
참 재미있게도 악마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용서 할게 없다. 용서를 입음 당하는 사건 뿐이다.
정석훈(IP:124.♡.32.9)
09-08-15 09:01
성도는 묵시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람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은 묵시세계를 증거하는 삶이다.
용서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는 용서하는 자이고 사랑하는 자이고 서로 용납하는 자이다. 이것을 통해 십자가의 피공로와 그 능력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역사속에 머무는 자는 느부갓네살왕과 같이 묵시의 내용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할 뿐이다.
똑같은 묵시를 받았지만 하나는 자신을 신의 자리로, 다른 하나는 고난의 자리로 인도함을 받는다.
성도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서를 보여주게 됨으로 고난을 당하고, 성도 아닌자는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용서를 보여 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지신분을 핍박하게 된다.
용서할수 없는 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 십자가만이 영원한 용서임을 선포하게 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4장11절
용서의 지향점이 인간에게 있으면 마귀적이요, 말씀의 지향점이 인간에게 있어도 마귀적이요, 봉사의 지향점이 인간에게 있으면 역시 마귀적이다. 범사가 그러하다.
강구만(IP:118.♡.241.170)
09-08-15 10:51
옳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 행위의 지향점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영광 이지요. 그래서 세상 중심에 자신이 있어야 하고 어떤 사건도 자신이 소외 되었다고 생각되면 히스테리적 발작을 하는것이 아담 입니다.창4:5 그러나 때로 본성을 거스려 모든 일이나 행위가 자기가 아닌 '주'를 위하여,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 입니다.요일5:4 이 사람들 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는 '주' 안에만 있기 때문 입니다. 빌3:3 새로 지으심을 받아 '예수안 '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세상을 이길려고 하지 안습니다. 요일4:4 이들에겐 '주'가 있고 '주'를 믿는 산 믿음으로 인도 함을 받기 때문 입니다. 주의 행하심이 기다려지고, 어떠한 경우에도 '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빼앗기지 않습니다.(본인의 노력이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래서 '나' 아니요 '주님'이라고 하는자는 고전15:10 예수안에 있는 생명을 맛 본자요 롬8:2 주와 함께 죽은자요.갈2;20 그 흔적을 가진자 입니다. 갈6:17 오늘 하루만 사는 영원을 사는 자입니다. 다른 세상, 다른 현실 입니다. 이들이 증언 할것은 '피'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곧 세상의 심판 입니다. 벧후3:7
김성환(IP:114.♡.231.249)
09-08-15 11:09
인간의 행함을 작살내는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경험하다보면 인간의 '행함'과 예수님의 '햄하심'의 변별력이 모호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행함을 수용하자'란 것이 아니다. 주님의 예정(작정)하심대로 '십자가의 복음'에 완전히 깨어져 버린 한 조각의 파편인 성도가 십자가의 반대편에 서 있든 십자가편에 서 있든 상관없이 죄인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자비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묵시의 복음안에 피의 사죄함으로 뒤범벅이 된 죄인이다. 더불어 인간이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도 십자가안에서는 역사가 아니라 묵시안에 하나의 사건으로 터져버린 주님의 '행하심'이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묵시든 허상인 이 세상 역사든 죄든 의든 모두 주님에게서 주님으로부터 주님에게로 돌아가게끔 이미 계획하신 하나님의 작품(비밀)이다.
그러나 묵시든 역사든 개콘이든 잠시 접어 두고 정낙원 목사님의 히브리서 강해 "35강. 살아서 죄인을 해부하는 말씀" (히 4:12-13)도 한 번 읽어보고 댓글을 달아보자!!!
노파심에...글이란 것은 늘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부부가 합궁하면서도 어느 날 잠시 서로간 침묵이 흐르면 오해의 소지를 유발하듯 글이란 것도 읽는 독자가 글쓴이와 저자와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사실 글이란 것은 글쓴이와 저자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사과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즉 빙각의 일각이다.
십자가 마을의 강의일정이 줄줄이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저자의 글을 읽어도 그 글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거나 그 글에서 '주님의 행하심'이 아닌 인간의 '행함'를 이끌어 낼 수 있기에 혹은 인간의 '행함'을 복음으로 비판하고 분석하다가 자칫 복음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머리의 지식만 발달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기에 일정표를 잡은 걸로 안다. 물론 자의가 아닌 타의에 요청에 의해서 일 수 있지만...복음의 값어치는 계산이 되지 않는데 만일 복음의 가치를 잘못알아서 복음을 자기 자랑과 자기 우월성으로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면 그것도 '행함'이다. 그런 상황은 악마의 좋은 양식감으로 작용한다.
복음의 가치와 그 깊이를 경험하는 목사들이라고 해서 그 사모들도 동일하게 복음의 맛을 아는 것이 아니듯 여름 겨울 수련회에 참석하는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도 두루두루 한 번 살펴 보았으면 한다... '복음은 눈치도 안 본다'
이미아(IP:115.♡.203.64)
09-08-15 11:22
인간은 자기 좋아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 없으신 분이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과 죽음을 보여 주셨듯이,
인간은 약속대로 선택 되어진 생명과 죽음을 보여줘야 할 자들로 부름 받아서 갈려진 인생을 보여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간대에 밀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시간대입니다.
인간의 시간대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간대만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약속(생명과 죽음)이 담긴 사건만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이 없게 된 자는 제 2의 예수 제 3의 예수 제 4의...예수 이름만!!!(죽어도 산다)
예수 이름이 없게 된 자는 제 2의 자기 제 3의 자기 제 4의...자기 이름만!!!(죽어도 죽는다)
결국 예수님의 시간대를 쭉쭉 잡아 당기면 창세 전 부터 예수의 날 까지 입니다.
영원, 영원, 영원입니다.
우린 그 영원에 갇혀서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이 잡아 땡기는대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창세 전 부터 이었는지를...
인간의 용서...사기입니다. 그 막연함을 어찌 할런지...
용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용서했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조작된 사기극이지요.
인간은 없습니다. 예수님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서한 예수님이시지 용서한 내가 아니니까..
진짜 용서는 용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현실만 있어서...그 용서받은 현실만 증거될 것이기에...
강구만(IP:118.♡.241.170)
09-08-15 11:46
쓰레기 통에서 장미꽃이 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미가 쓰레기의 것은 아닙니다. 피게 하신 분의 것입니다.구분조차 못하는것이 사람의 형편 입니다. 쓰레기 보고 왜 장미를 못 피우냐고 꾸중하는 쓰레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강구만(IP:118.♡.241.170)
09-08-15 12:27
인간의 용서는 언제나 타협 입니다. 결국 자기유익 구함이고 그 의미가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타인을 위한 진정한 용서란 없습니다. 성도에게 용서의 의미란 내가 주께 용서함을 받았으니 나도 용서함이 아니라 용서할수 없는 자리에 있음을 알고 세상이 발생 시킨 어떤 상황에서도 용서의 주체가 아닌 용서의 증언자로서 있을 뿐 입니다. 용서 하실수 있는 한분 예수의 증인 입니다. 주께만 범죄함의 의미를 아는자가 아니면 용서를 알수 없습니다.
이상규(IP:121.♡.211.217)
09-08-15 16:03
사람과사람의 용서는 결국 자아실현 자기의드러내고,자기행함축적시키기,자기성취로 돌아오고,
성령있는자는 이런것들 다 발각당하고,
내가 용서하고 안간한테 용서 받음 보다
오히려,
심판 받아야 할 자임을
고백하게되고..
이런죄인 용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고...
이능우(IP:203.♡.124.203)
09-08-15 16:22
용서 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음을 알고 세상이 발생 시킨 어떤 상황에서도 용서의 주체가 아닌 용서의 증언자로서 있을 뿐 입니다. 용서 하실 수 있는 한 분 예수의 증인 입니다.아멘
용서는 죄인에게는 해당이 안됩니다.
죄인이 무슨 용서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됩니까?
아예 용서 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오직 의인 되시는 주님에게만 해당 합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신 할 수가 없는데 어찌 용서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까 말입니다.
성깔대로 사시고 어찌 할 수 없는 죄인 됨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만이 용서를 받고 사는 겁니다.
용서는 성도를 통해 주님이 하십니다.
관리자(IP:124.♡.85.46)
09-08-15 22:36
[무조건 용서] 라는 의미를 다시 [조건화] 하여서 왜 무조건 용서를 못 행하느냐 라고 따지는 것은
마치 가룟유다가 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땅에 허비하느냐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맞습니다. 평생을 가룟유다는 가난한 자를 위해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때려 죽어도 가난한자를 위한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음이 바로 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의해서 발각 당합니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사는 그 위치에서 서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그런 가룟유다를 가난한자로 여겨서 예수님 자신의 목숨을 때려붓는 그 부요한 마음에
그만 적개심을 품고 그 여인에게 도저히 그런 일이 있을수 없다는 분노의 폭발을 터트립니다.
과연 가난한자를 생각해서 하는 말일까요?
때려죽어도 가난한자를 눈꼽만치도 생각하지 않는 자의 진면목(감추어진 모습)을
예수님이 창녀(무시받는 어리석은 자 - 창세전의 노선)를 통해서 까발리는 겁니다.
그 까발리고 들추어내심 조차 사랑인데 그 사랑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노선으로써 고집만 피우다
부엉이 바위에 오른 겁니다.
화를 내면서 가난한자를 위한 마음을 억수로 디기 생각하는 듯이 보였지만
정작 가난한자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품은 겁니다.
자신 보다 더 가난한자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더 나은 제사가 나타나니
목숨까지 못 버리는 또 죽은 자를 살리는 죄사함의 피 흘림 의 하나님의 일 앞에서
드디어 가인의 분노 만을 표출할 뿐입니다.
결국 인간의 용서란 정치요
인간의 무조건은 무조건을 다시 조건화 시킨 절대로 남을 용서치 않는 마음 입니다. 행함이기 때문이고 묵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진영(IP:218.♡.37.187)
09-08-19 12:45
"가난한 자를 위하여 사는 그 위치에서 서고 싶었던 겁니다."
정말 섬뜩한 말입니다. 이 더러운 죄를 캐내시고 드러내시느라 주께서 제게 행하신 일들때문에
애들 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네요.
김대식(IP:220.♡.176.169)
09-08-20 07:48
그것이 바로 성화론 아닙니까? 얼마나 자부심이 대단한데요 뭘
목숨까지 걸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실 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할까요?
뻔하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