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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9. 7. 24) 2강 녹취록자유게시판디모데후서

광주 강의(09. 7. 24) 2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7. 24) 51-2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우리가 항상 질문을 하는 존재인데 그 질문 자체가 죄에서 나온 질문이란 것을 지적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질문 속에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질문 하죠. 그 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제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그런 관계. 하나님이 질문하시고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응답할 때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게 됩니다.

‘너는 거기 있거라. 이제부터는 내가 준 약속을 너에게 담으리라.’ 이 약속이 뭐냐 하면,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죄가 있어야 되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있어서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피어나는가를 알죠. 이렇게 될 때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질문 말고 주님이 하는 질문 속에 우리는 항상 죄인으로 남는 것. 이것 하나 기억하시면 첫째 시간 강의 정리하신 겁니다. 주님이 질문하시면 우리는 아담이기 때문에 죄인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응답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용서가 같이 우리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가 피어나면 그것이 바로 ‘의로 교육하기에 합당한 것’이 됩니다.

이제 두 번째 시간인데 17절에 있는 ‘온전한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온전케 하며” 앞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디모데후서 2장 26절에 보면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내가 독자적으로 자기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어떤 여지도 완전히 삭제해 버리죠.

예전에는 마귀의 올무에 빠졌기에 내 독자적인 의지가 빛도 못 바라보고, 이제는 거기에서 벗어나서 내 마음대로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 사로잡혔어요. 그러니 전에나 후에나 내가 독자적으로 뭘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죠.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모든 행동을 할 때 내가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움직이잖아요. ‘복권을 살까, 말까?’ 내가 결정하잖아요. ‘MBC를 볼까, KBS를 볼까?’ 그 선택을 내가 하잖아요. 이걸 ‘판독’이라고 합니다. 이게 어려운데, 어려운 것도 해봅시다. 사람은 어떤 경험을 오감으로 포착한다고 하는데, 포착해서 그것을 해석하고, 그 해석한 것을 자기 위주로 하나의 의식으로 모읍니다. 이걸 ‘구성’이라고 하죠.

어떤 느낌이 오게 되면 지각을 하게 됩니다. ‘아, 개기일식이다.’ 개기일식을 봤을 때, 젊은 아이들은 ‘달이 해를 가렸구나.’ 21세기 해석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나 삼국시대에는 어떻게 해석 했을까요? ‘재앙이로다.’ 재앙으로 인식했다면 개기일식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기의 죄 지은 것을 회개하고, 빚진 사람은 빚 갚고 해야 됩니다. 왜냐? 재앙이 왔으니까.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선악과 인식 바깥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즉 선악과로 해석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신의 특별한 해석을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이죠. ‘아, 나쁜 짓 하지 말라고 하는구나. 착한 일 하라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목사가 복음을 이야기해도 교인들은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요. 콜 버그(Lawrence Kohlberg 미국의 심리학자이다. 장 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에 영향을 받아 도덕성 발달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였다)라는 학자의 ‘도덕발달 이론’이 있는데, 유아에서 청소년, 어른이 될 때까지 도덕심리가 어떻게 발달되는가?

처음에는 모방으로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징벌로, ‘나쁜 짓하면 매 맞고 착한 일하면 사탕을 주더라.’ 그런 식으로 가지요.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가면, 내가 이 일을 통해서 내 자존심이 확장되느냐를 통해서 선과 악을 분별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선악적인 해석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목사가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니까, 얘들은 ‘예수 믿는 것이 엄마의 얼굴을 활짝 펴게 한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이 착한 일이구나.’ ‘아빠 말대로 성경공부 참석해 주면 아빠 얼굴이 활짝 펴지니까 성경공부 참석하는 것이 착한 일이구나.’ 이런 식으로 인식해요.

그것은 본인이 악마의 올무에 빠져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중립적으로 있는데 중립에서 선한 일하면 선한 사람 되고, 악한 일하면 악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선악적 사고방식입니다.

남의 집이면 올 필요 없지요. 그런데 김 집사님 집이니까 왔잖아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런데 ‘내가 이제는 호적 정리하고 아버지하고는 남이다.’ 라고 했지만, 그게 3개월을 못가서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다시 집에 들어올 수 있다니까요. 어쩔 수가 없어. 나중에 시집가면 돼요. 빨리 시집가세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도 이게 문제는 해석도 잘못 되었지만 그 해석을 나의 자존심 위주로 해석합니다. 악이 쳐들어와서 동생을 죽인 사람이 누구죠? 가인이죠. 가인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서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할 때 가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동생이나 돌보는 인간입니까?’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나쁜 짓을 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적 해석입니다. 이 해석 자체가 바로 악마의 올무에 빠져 있으니까 이런 자기 위주의 해석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은 뭐냐 하면, 어떤 지각이 왔다. 혹은 사건이 닥쳤다면, 그 사건은 어디서 왔나? ‘하나님께서 보내셨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날 이렇게 만들었구나.’ 전부 하나님께 사로잡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다는 말이 기도원에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흥회 참석해서 즉흥적으로 재산 다 바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다는 것은 햇볕과 공기와 잠잘 때도 심장이 멈추지 않고 뛰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키우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보는 겁니다. 나 자체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보는 거예요. 나쁜 짓해도 작품이에요. 나 같은 저주 받을 인간도 살리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 몸을 만들어 놓았어요. 이런 나쁜 놈도 용서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17절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에서, 무엇이 온전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여기 있다면 그 안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로잡히게 되니까 이 사람 전체가 하나님의 사람 되려면 하나님의 영에 뒤덮여야 되지요.

하나님의 영에 뒤덮였다는 말은, 용서해 주기 위해 대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용서를 몰라요. 왜 그런가 하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왜 죄인인줄 모릅니까? 나쁜 짓해도 착한 일하면 선악적 구조 속에서 차변, 대변을 따져요. 나쁜 짓하면 용서 받으면 될 텐데, 그것이 아니라 나쁜 짓을 상쇠하기 위해서 착한 일(헌금을 더 한다든지, 전도를 더 한다든지, 예배 시간에 일찍 나오는 등)을 해서 죄를 없애려고 해요. 이게 더 나쁜 짓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주신 은혜인데, 여러분 고등어 구울 때 고등어가 스스로 뒤집습니까? “아이고 뜨거워.” 하면서 스스로 돌아눕습니까? 고등어가 굽히면 뒤집어 놓는 것은 사람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고등어 잘 굽히는 것은 고등어의 공로가 아니라 사람의 공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고등어입니다. 내가 뒤집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뒤집어 주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입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젓가락을 동원해서 뒤집는데 고등어인 나는 어쩔 수가 없어요.

모든 해석과 모든 재구성에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집어넣어야 된단 말이지요. ‘참새도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들풀도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를 그냥 두시겠느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너는 하나님의 그 나라와 그 의만 쳐다봐라.’ 왜? 이미 그 나라와 그 의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자, 그러면 성경에서는 이것을 관계라고 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죄라고 하고 관계가 이어진 것을 의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제가 방금 이야기한 관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담기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발생시키면서 이것을 믿는 자에게는 의인이 되게 하시고(우리의 행함은 인정하시 않으시고), 이 안에 뭐가 들어와요? 아브람이 아브라함 될 때 뭐가 들어왔습니까? 약속이 들어왔는데 이 약속이 구체적으로 뭐죠? 이삭이잖아요.

이삭은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아브라함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여러분이 생각 못한 아이디어가 들어오면 성령이 들어오신 거예요. 분명히 ‘나 같은 나쁜 놈은 죽어야 마땅한데 이런 내가 구원을 받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이 약속을 가지고 ‘온전’이라고 합니다. 이 ‘온전’의 특징은 ‘땅에서 안 만들었음.’ 절대로 인간이 못 만듭니다. ‘온전’은 온전한데서 선물이 와야 됩니다. 이 선물을 은사라고 하는데, 이 은사의 대표적인 것이 믿음, 소망, 사랑. 그런데 믿음, 소망, 사랑은 행위이면서도 온전한 이유가 우리 믿음, 우리 소망, 우리 사랑을 다 죄로 만들어버리고 예수님의 믿음과 예수님의 소망과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는 말이 성립이 되고, 그리고 우리가 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줄 모르고, 믿음도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십니다.

죽은 내가 다시 산다는 것 믿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내가 어쩔 수 없는 것, 그런 구석으로 몰아가지요. 바다에 풍랑이 일 때 예수님과 함께 같이 자면 돼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풍랑이 이는데 잠을 잡니까? 불이 났다. 그러면 다니엘 세 친구처럼 불 속에서 춤추면 돼요. 신의 아들(주님)과 함께. 세 사람이 들어갔는데 네 사람이 같이 있지요.

그 신의 아들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면 여러분들도 같이 춤출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이 춤출 때 같이 춤추게 되는 거예요. 곡을 할 때 같이 곡하고 피리를 불 때 같이 춤춘다는 말이 있잖아요. 마태복음 11장에 나오지요.

예수님 안에 들어오게 되면 항상 예수님의 공로가 들어와요. 실험적으로 업자에게 뇌물을 천만 원 받았다. 주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아이고, 천만 원도 뇌물이가?’ 이렇게 하십니다. ‘적어도 5억은 받아야지.’

전두환은 1,600억 받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는데 노무현은 500만 달러 받고 죽었잖아요. 500만 달러 받고 왜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느냔 말이지요. 그보다 많이 받은 사람 숱하게 많아요. 간단해요. ‘나 죄인입니다.’ 이러면 돼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러면 되는데, 이렇게 못하는 거예요. 왜?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선악과로 버티려고 하니까 ‘나는 선하다. 전두환은 1,600억 받았다.’ 그렇게 아무리 되뇌어도 악이 계속 올라오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가룟 유다처럼 죽었어요.

그래서 마귀가 들어오면 자살하게 되어 있습니다. 돼지 속에 귀신 떼가 들어가니까 물속에 들어가서 다 죽었어요. 평소에 안 가던 곳인데 왜 갑니까? 사람이 선악과만 있으면 결국은 자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꼭 목을 매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서도 기어이 자기는 잘났대요. ‘나는 최선을 다했다.’ 만날 이런 소리나 하고.

여러분도 그런 소리 하세요.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나도 생각 못했어.’ 뭘? ‘나 같은 인간을 십자가 피로 용서할 줄이야 나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돼요.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어 있지 자기 잘남을 증거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나를 한없이 못난 인간으로 만들어요. 그것이 바로 ‘온전’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올 때만 온전해 지는 겁니다.

이 말씀 들으면 이제부터 진짜 여러분들은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생각할 때 염려가 되지 자기도 자기를 포기했는데 염려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인데. 왜 남의 몸을 가지고 자기가 염려합니까? 주님 작품을 왜 내 작품이라고 착각해서 염려하느냔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살면 됩니까? 하고 싶은 게 있을 거예요. 하고 싶은 것 하시다가 막히면 돌아가면 돼요. 참 쉽죠? 나는 의사가 되고 싶다. 시험 치세요. 점수가 모자라지요. 그러면 미생물이나 화학 등 다른 공부하면 됩니다. 그것 4년 공부했는데 재미없다. 그러면 또 의대 시험 치면 돼요.

아담 안에서 의사가 되든지 재수를 몇 번 하든지 간에 주님의 그것에 대해서 ‘너 재수 했나?’ 묻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아가 생기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거기에서 온전함을 찾아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온전함이 두 종류가 생겨요. 첫째는 하나님이 생각하는 온전함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고, 둘째는 인간이 생각하는 온전함이 있는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온전코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 남들이 날 인간 취급도 안 할 텐데. 이제 얼굴 들고 다니지도 못한다.’ 이런 것.

프로이드가 이야기했어요. 어릴 때부터 인간은 자기 것이 없고 부모가 잔소리 한 것만 차곡차곡 쌓인대요. 그래서 정작 나를 뜯어보면 전부 내 부모 것이고, 삼촌 것이고, 고모 것이고 남들이 잔뜩 들어있어요. 그래서 아주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성장한 사람은 신발 벗고 실내로 들어갈 때 신발도 가지런히 놓고 들어갑니다. 그 외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예의범절을 지킵니다.

그러면 사람이 가정교육 잘 받아서 구원 받습니까? 남들 보기에 참 훌륭하고 반듯해서 칭찬을 들어도 하나님은 인간들의 칭찬이나 온전함을 죄로 만들어 버립니다. 베드로가 그랬어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닭이 울 때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했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와 닭을 비교해 봅시다. 닭은 울라고 하면 그냥 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습니다. 그동안 큰소리치며 다녔는데 막상 주님이 잡히니까 닭보다 더 못해요. 닭소리 듣고 울어요. 위대한 스승의 말씀을 듣고 우는 것이 아니고 닭소리 듣고 운다고.

코스모스나 개나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인간은 악마가 직접 상대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을 저항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요. 이게 타고난 겁니다. 그래서 신에 대해서 자꾸 밀어내는데, 그 저항을 싫다고 하지 마세요. 그 저항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가 빛이 나요. 탕자가 있어야 용서가 빛이 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항하면 저항 할수록 저항하는 인간들을 끈질기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더욱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액션을 취해서 우리를 만드는데 그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는 것이지요. 보이는 것은 나고 하나님이 안 보이고 예수님도 안 보입니다. 나만 보여요. 그런데 나만 보인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진짜 나는 뭐냐 하면, ‘나는 나를 보고 있다는 나를 믿는다.’가 진짜입니다. 어떤 인간도 항상 믿어요. 뭘 믿느냐 하면 나의 판단을 믿지요.

죽으라고 믿는 것은 나만 믿어요. 고조선 시대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개기일식은 달이 해를 가리는 것이다.’ 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사람들은 안 믿어요. 지구가 돈다고 해도 안 믿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이미 내 안에는 나 위주로 꽁꽁 묶어놓은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누가 나 위주로 살도록 만들었습니까? 그게 바로 아담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꾸중하면서 ‘너는 어떻게 하는 일마다 그 모양이야!’ 라고 하면, 자식들이 대답하는 말 중에 진리가 있어요. ‘아버지가 그 모양이니까 나도 그 모양이지요.’ 이것이 현대 과학에서 규명 되었잖아요. DNA로. 유전인자지요. 아버지 것 50%, 엄마 것 50%를 받아요.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철저한 이기주의죠. 왜? 유전자를 많이 퍼뜨리기 위한 자기집안 우대주의죠. 따라서 효도는 거짓말입니다. 효도는 없어요. 가문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걸 ‘리처드 도킨스’(영국의 생물학자)라는 사람이 밝혀냈어요.

모든 인간들은 아담이 하는 행실을 그대로 받아요. 이것은 어쩔 수 없어요. 나는 나만 생각하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단 말이지요. 온전한 인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지금까지의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뭐가 구원 받은 사람인가 하면, ‘나 같은 인간이 예수님께 구원 받은 것은 어쩔 수가 없어.’ 하고 예수님한테 묶일 때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알아요. 나는 나밖에 모르는 자인 것을. 그런데 나밖에 모르는 것을 기어이 예수님 공로로 구원받게 하는 것을 내가 믿게 하신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공로지요.

자기 고집 쌘 것도 알고 예수님은 나보다 고집 더 쌘 것도 알고. 그 때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것을 시험해 보잔 말입니다. 어떻게? 나만 생각해요.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거예요. 살다보면 그것이 뜻대로 안 되지요. “참 주님 고집 쌥니다.” 그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나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서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제 4장을 봅시다.

1절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고 했는데, 우선 요한복음 5장 28절을 보겠습니다. 앞부분만 같이 읽어봅시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그만! 제가 왜 여기서 스톱을 시켰는가 하면, 복음 아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기이한 일을 믿어요. 인간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믿어요.

기이한 게 뭐냐?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 여기 목사님도 계시지만 목사로써 제일 속상한 것이 뭐냐 하면, 투자를 많이 해 놓았는데(그 사람 위해 기도도 많이 하고, 심방도 자주 했는데) 어느 날 ‘나는 예수 안 믿습니다. 예수님은 없습니다.’ 라고 교회 발 끊을 때 참 속상합니다.

부모가 자식 집 나가면 속상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만큼 투자를 많이 했는데 그 사랑을 모르고 집 나가면 속상하지요. 그 속상할 때 목사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에이, 때려치우고 돈가스 집이나 하자!”

내가 하는 일에 성과가 나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같으면 보람을 느끼겠는데 ‘아무리 힘 쓰도 안 되는 일을 하나님이 왜 나에게 맡겨 놓았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안 되기는 뭐가 안 되든데.’

여기 초가집이 있습니다. 지붕에 눈이 쌓였어요. 그러면 처음에 눈을 굴리지요. 처음에는 작은 눈, 중간에는 중간 눈, 나중에는 큰 눈이 되지요. 큰 눈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작은 눈이 들어 있지요. 작은 눈이 과거고 중간 눈이 현재고 큰 눈이 미래라면, 사람이 어디서 어디까지를 잡느냐 하면, ‘내가 목회를 했다. 많이 기도하고 심방하고 돌봐줬는데 교회를 안 나온다. 아! 눈이 사라졌구나. 이제 목회 그만둘까. 죽어버릴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뭐가 기이한가 하면,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 - 현재 - 미래가 아니라 어디까지 이어버립니까? 계속 쭉 나갑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생각할 때는 이것은 내 몸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계속 늘어나는 시간 같으면 내 몸이 아니고 예수님 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은 내 몸보다 더 길어요. 그렇다면 목사님 몸이 목사님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라면 그 목사님은 자살하면 안 돼요. 왜? 그 몸의 시간은 어디까지 이어져야 됩니까?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되어서 죽고 난 뒤에 무덤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이것까지 다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현재 ‘목회에 실패했네, 교인이 한 사람 떨어져 나갔네.’ 거기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를 않지요.

창세전에 이미 사랑했으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언제 죽고 이런 문제는 긴 시간에 비하면 한 뼘밖에 안 돼요. 내 몸 같으면 한 뼘도 길어 보이지만 내가 만약 예수님의 몸이라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단 말이지요.

또 죽으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천사와 같이 생활해요. 그러니까 시간을 내 몸으로 생각하지 말고 주님 몸으로 쭉 늘이면 우리가 실패했다는 실패가 성립이 안 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는 예수 안 믿습니다. 하나님은 없습니다.’ 라고 나왔을 때 그 사람과 헤어졌다고 생각하잖아요. 헤어졌지만 주님 안에서 보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가있고 자기는 천국 가있죠. 왜? 무덤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예수를 버리고 도망쳐도, 심지어는 죽고 난 뒤에도 따라옵니다. 세상에는 이런 진드기가 없습니다. 아무리 악독한 사채업자라도 죽으면 빚 갚으라고 요구 안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덤 속에도 찾아오십니다. 도망 칠 곳이 없습니다.

무엇이 기이한가 하면, 사람은 생각하면 짧게 생각하는데 길게 본다는 것이 기이한 거예요.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봤지만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분이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긴 몸으로 봤어요. 그리고 자기는 그 긴 몸에 포함되어 있는 짧은 몸이고. 그러니까 목이 잘려도 자기 할 말 다하잖아요.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 우리 몸은 흙에 속했기에 흙으로 끝이나요.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형상으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이제 디모데전서 4장 1절을 봅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라고 했는데, 여기에 보면 산 자만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도 심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여기서 어려운 것이 있는데, 예수님이 왜 나타납니까? 예수님 재림이 왜 있습니까? 기독교가 2,000년이 되었는데 이 문제를 아직도 풀지를 못하고 있어요. 처음에 오실 때 다하면 될 것을 왜 다시 오십니까? 제 말은 왜 귀찮게 두 번 나누느냔 말이지요. 한 번에 다 해버리지. 왜 재림을 하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속 시원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인간 눈으로 볼 때는 재림이 되지요. 두 번 오심이 돼요.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시선이 있지요. 인간 쪽에서 볼 때 예수님은 두 번 오신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지요. 사도행전 1장 11절에 보면,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오신다는 것은, 인간들 눈에는 떠나가고 다시 오시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함께 계시잖아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계시’라고 합니다. 이 계시의 특징은 사람이 보기에는 두 번 오시지만 원래 그냥 그 자리에 계실 때, 커튼 뒤에 계실 때 커튼을 통해서 두 번 오시는 것으로 되는 상태. 이 사이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그 예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데, 골치 아픈 달란트 비유입니다. 달란트 비유가 왜 골치 아픈가 하면 달란트 비유를 말하는 사람들마다 거짓말을 했어요. 달란트를 재능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받은 달란트를 묻어두면 안 되고, 잘 활용해서 계속 키워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달란트 비유는 계시 비유입니다. 계시가 오는데, 여기 공장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집 주인과 직원 3명이 함께 일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먼 타국으로 갔습니다. 그 때 직원들의 시선은 공장을 떠나면 마치 없는 것처럼 되는 그러한 한계를 갖고 있어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 눈에 안 보이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요. 그래서 ‘예수가 안 보인다. 하나님도 안 보인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두 직원은 자기에게 지금 일거리(달란트)가 있어요. 그 일거리(달란트)는 누가 준 것입니까? 먼 타국으로 갔든 아니든 그 일거리를 누가 준 거예요? 주인(주님)이 주신 것이라면 이것이 하나의 계시 역할을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말씀이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신 거예요. 거리상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2,500Km냐 3,000Km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연결되어서 독일에 가있는 딸과도 자주 화상통화도 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 타국에 있어서 안 보이면 제 딸이 없습니까?

눈에 안 보인다고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라졌다, 아니다 라는 것은 뭐로 알 수 있는가? 주고받고 하는 대화, 하나님의 계시가 있잖아요. 그런데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주인 있을 때는 주인 말 듣다가 주인이 없으면 단독자가 돼요. 단독자는 계시가 나의 계시에요. 내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뭘 하고 등등은 누가 지시합니까? 내가 나에게 지시를 내리지 다른 지시내릴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달란트를 받은 두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를 못 내리죠. 왜? 받은 일거리가 있고, 받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교사라면 이 직분을 누가 주셨다? 주님이 주신 것이죠. 모든 것이 주님께 받은 것이고, 주님께 받았다면 주님이 여기 계신 거예요. 멀리 타국에 있어도 관계없어요.

주님은 왜 재림하는가? 정답은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노아 언약 이후에 모든 햇볕과 공기는 누가 준 은혜입니까? 인간은 저주 받아야 마땅한데 노아의 번제를 받으시고, 인간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각을 묻지 않으시고 모든 자에게 햇볕과 공기를 주시죠. 무더운 7월에 비가 왔는데 교도소에도 내렸어요. 내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도 단비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햇볕과 공기를 주셨어요. 다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다 하나님 백성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백성 아닌 사람은 아닌 티를 내야 되고, 백성인 사람은 백성 티를 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때는 주인이 왔다가 사라져줘야 됩니다. 평소에 ‘믿습니다.’를 연발해도 그것으로 모릅니다. 사실은 믿는 척했지요.

주님이 없고 주님이 주신 말씀(계시)이 있을 때 이 말씀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래서 성경에 보면 성령께서는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태28:20).’ 그리고 ‘이미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마태12:28).’ 이 말씀이 우리 속을 다 쑤시고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내시고 또 십자가 피로 용서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4:1-2).” 어떤 사람은 천국을 봤다고 하는데, 천국을 보고 지옥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어떤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진짜 신비한 체험은 이 성경 말씀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도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말씀 체험한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안 죽어봤으니까. 안 죽어 봐도 믿어져요. 그것이 기이하지 않습니까? 죽은 자가 주의 음성을 듣는 것도 기이하지만, 그 기이한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더욱더 기이하지요.

이 세상에서 온갖 기적을 말해도, 죄 많은 내가 용서받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 없습니다. 이렇게 죄 많은 인간이 죄가 하나도 없어진다는 것. 이것이 믿어지고, 죽은 내가 부활해서 다시 산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용서받은 자가 용서를 받았으면, 이런 자들은 헌금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되어 있고, 충성하지 말라고 해도 주를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목사들은 헌금 하라고 강요를 하니까 가짜들이 헌금 하는 척하며 쇼를 합니다.

뭘 강요하는 그 목사가 바로 가짜 신자인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목사가 진짜 신자라면 길게 봐요. 창세전부터 무덤 속에서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를 봐서, ‘나는 긴 그리스도 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 목회를 하고 복음을 전할 때, 이 사람은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도 원수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길게 보기 때문에.

이 긴 이야기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길게 펼쳐져 있습니다. ‘생명책이 기록되지 않은 자는 유황불에 들어간다.’ 이 모든 것까지 이미 내 속에서 다 믿어지는 것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말씀을 전파하라’는 의미가 결국은 우리도 그 말씀에 의해서 작품이 되었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빙하는 그런 말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말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주와 함께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8. 14. 10:5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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