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하면 저주
사랑 안하면 저주
이름 : 한진영(IP:58.236.164.86)
십자가 마을에서 자주 듣게 되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 저주를 받는 다’(고전16:22)는 말씀 앞에서,
저주 받을 인생이었음이 종종 발각되면,
나는 첫 사람 아담이 느꼈던 그 원초적 수치심으로 긴장한다.(창3:10)
그러면 “어찌 할꼬?(행2:37)”
그 되도 않을 도발적인 질문을 올려 본다.
비결은 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7:47).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계3:20)
단순하다.
사랑하지 않는 죄는 사랑하면 사함 받고,
주는 일향 미쁘셔서 항상 그곳에 계시니 내가 마음을 열면 된다.
그러면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주를 사랑할 수 있을까.
공식대로라면, 죄를 많이 깨닫게 되면 많이 사함 받고 많이 사랑하게 된다.
죄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이제 죄를 깨닫기 위해 각종 홈피와 성경 탐색 작업에 들어간다.
잠깐이나마 하늘 문이 열리고 죄의 추악함을 깨닫게 되면,
수순에 따라 보혈에 대한 죄송과 감사가 밀려든다.
얼마간의 애통과 감사로 당일 분의 사랑의 과업은 완수하였으니
저주의 화살은 대충 피한 듯 안도감이 느껴지지만...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마16:25)
요 따우 동질화를 거부하는 묵시는
차이로써 간단하고 정확하게 역사를 공격한다.
사랑에 대해 착각하였다. 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딤전1:5)
사랑 받고자, 사랑하고자 한 모든 시도가 허사였음이 백주에 드러난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14:23)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마6:24) 불가능이었다.
자기를 미워하는 일도, 주를 사랑하는 일도 때로는 각각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자기를 미워하며 동시에 주를 사랑하는 일은
묵시적 사랑 자체의 흘러넘침이 아니고는 불가능이었다.
죄인은 본능에 따라 이곳저곳을 찾아 산당을 세우며 붉은 깃발을 꽂아 본다.
그러나 십자가의 산이 우뚝 서지 않고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사2:2-3)
그런데 육과 영의 철저한 단절(창3:24)을 인식할 때 희한한 것은 좌절이 아닌
참을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6,8)
진화하는 바이러스처럼 죄인은 더욱 교묘해진 행함으로 십자가의 원수 노릇에 골몰하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피의 능력은 뒷덜미를 잡아 챈다.
뭘 하는지도 모르는 자아의 혼미함을 묵사발 내면서
십자가는 늘 승리의 깃발을 꽂는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40:4)
사랑.. 불가능이었다.
이종호(IP:124.♡.4.195)
09-08-19 11:27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니 마음대로 하던지 말던지...